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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저쪽에서
한 남 철
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다. 집 앞에는 창영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의 울타리가 철조망이었다. 아마도 여름철이었음이 분명하다. 철조망의 삐죽삐죽 내민 가시에 굴비를 걸어 말리던 기억이 항상 내게는 남아 있다. 지금은 굴비 한 마리 값이 쇠고기 두어 근 값하고 맞먹지만 그때 당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가을에 김장을 하듯 웬만한 집에서는 여름 밑반찬으로 굴비를 준비하던 것이 풍습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대문 앞 그늘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거기에서 바람을 쏘이며 굴비에 꼬여드는 파리를 쫓아버리는 것이 여름 한낮의 소일이었다.
어떤 때 눈을 번쩍 뜨면 바로 눈 위에서 부채를 부쳐주다 문득 웃는 할머니의 얼굴과 갑자기 마주할 때도 있었다. 필시 낮잠에 겨운 상태였으리라. 학교 운동장에서 크게 뻗어 오른 아카시아의 나뭇잎이 푸른 하늘을 우산처럼 가리고 그 우산 아래로 쏟아지던 귀 따갑던 매미 울음소리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내 허릿병은 다 네 녀석 탓이다.”
할머니는 허리를 두드려가며 일쑤 말했다.
“내가 널 네 살 때까지 업어 키웠지 뭐니. 널 한번 업어주려면 한 서너 번 몸을 추슬러야 간신히 일어났단다. 네가 엄청 무거웠거든.”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자다가 무심결에 할머니 쪽머리에 꽂은 비녀 끝을 깨물었던 기억도 있다. 비녀가 내 이빨 힘에 못 이겨 찌그러지던 것이었다. 그것 이 꽤는 신통했나보았다.
“글쎄 저 녀석이 내 비녀를 이 모냥으로 만들어놨지 뭐니.”
찌그러진 비녀를 들고 식구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할머니는 자꾸자꾸 그 얘기를 했었다. 은으로 만든 비녀의 속이 비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그때부터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이 모두가 이처럼 잔잔했던 추억만은 아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싸우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한 집안에 삼 대가 함께 기거하던 대가족이었나보았다. 어머님은 그때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셨다.
“말도 마라. 내가 시집오니까 아침에 벤또* 싸는 것이 네 개나 되더라. 할아버지는 목수 일을 다니셨구, 늬 큰아버지는 석탄공장에 나가구, 늬 아버지는 성냥공장 다니구, 늬 삼춘은 학교를 다녔거든.”
“그 많은 식구 뒷바라지를 어머님이 혼자 다 하셨단 말예요?”
“그럼 나 혼자 했지 별수 있니. 늬 할머니는 원래 꼼짝 안하시는 성미구, 늬 큰어머님이라는 분두 내가 시집오니까 아예 일손을 딱 놓아버리더구나.”
“어머님두 그럼 일손을 딱 놓으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약간 의도를 깔고 이렇게 퉁겨보기라도 하면 어머님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새삼 억울하시다는 낯색이 되면서도 내 의도는 깔아뭉개고 그저 어리무던하게* 이런 식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늬 아버지한테 딴살림 나자구 매일같이 졸랐지 뭐니. 그런데 늬 아버지가 말을 들어먹어야지. 영순이를 가졌을 때는 ―영순이는 바로 내 밑에 여동생이다―정말 견디기가 힘들더라. 아이를 낳았는데 어찌나 작은지 사람 구실을 못하려나부다 생각했었다. 하긴 딴살림을 나려두 돈이 없었어.”
“식구가 모두 돈벌일 하는데두 돈이 없었어요?”
“굶지 않구 사는 것만두 대견했지 뭐. 그때는 먹구살기가 참 힘들었거든.”
“할머님은 집안 어른이니까 그렇다 쳐두 큰어며님은 좀 너무하셨는데요.”
“늬 큰어머님짜리가 원래 꾀퉁이였다. 사람 비위 맞추는 덴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 손재주는 얼마나 좋았게. 어떤 옷이구 한 번만 보면 척척 만들더라니까. 나 같은 어리보기*하군 아주 딴판이었다. 그러니 집안 살림할 생각이 나겠니. 원래 재주 많은 여자는 티를 내거든.”
“그럼 할머니하군 성질이 잘 안 맞았겠는데요.”
“사이가 좋진 않았지. 그게 모두 친정 식구들 탓이었어.”
우리 집안의 고향은 강화다. 거기서 조용히 농사만 짓고 살았다면 내 윗대가 인천으로 솔가해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중선을 부린다고 조기떼를 쫓아다니다 배를 가라앉히고 폭삭 망하는 통에 도망치듯 인친으로 옮겨왔다는 것이었다. 큰어머님의 고향은 초지였다. 그곳도 내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은 지명이다.
이차대전 말기에 소개(疏開)라는 것이 있었다. 그 바람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다시 강화로 이사를 갔다. 금의환향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여하간 망해나간 집이 다시 논밭을 장만해 환향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원래 살던 고향은 마니산 너머 남쪽 측면의 갯가후엉 (흥왕자리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이었는데 새로 이사간 곳은 그 반대쪽 산 너머 고창미였다. 그래서 방학이 다가오면 나는 정기적으로 강화를 찾게 됐다.
원족* 가방에 할아버지에게 전달할 용돈과 담배, 몇 가지 통조림과 어떤 때는 양주 한 병, 그리고 할머니에게 드리라는 사탕이나 과자 나부랭이 등을 챙겨서 짊어지고 연안부두에서 배를 탔다. 강화와 인천을 오가는 배 이름은 갑성환이었다. 남한에서 제일 큰 철선이라는 것이 강화 아이들의 자랑스런 주장이었지만 사실 여부는 모를 일이다. 그 배를 타고 한 두어 시간 가게 되면 첫번째 기항지이자 내가 내려야 되는 곳이 바로 초지였다. 그곳이 우리의 근대사에 나오는 전적지라는 것을 당시에는 물론 몰랐다. 그저 내게는 큰어머님의 고향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심상한 포구였을 뿐이다. 거기서부터는 걸어야 했다.
초지에서 온수리를 지나면 전등사 입구가 되는 삼걸음 장터가 나타난다. 거기서 다시 여우고개를 넘고 너럭바위가 깔려 있는 우물고개를 넘어 문산리를 거쳐야만 비로소 고창미에 당도한다. 초지에서 이십 릿길이었다. 그 길이 항상 멀고도 지루했다.
마니산이 가파르게 떨어져 내리며 바다와 맞닿은 기슭에 위치한 후엉은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그래서 후엉 사람들은 갯가에서 잡는 낙지나 조개 등속을 이고 산을 넘어와 강화 읍내까지 내다 팔고 다시 산을 넘어가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때문에 할머니 집에는 후엉 사람들의 내왕이 끊이질 않았다. 개중에는 먼 친척 뻘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유독 기억나는 분은 곤희 아저씨뿐이다. 할아버지에게는 조카뻘 되는 친척이었다. 시골인 데다 6·25 전인지라 장유유서의 풍습이 뿌리 깊은 생활정서였다. 따라서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는 노릇은 언감생심 힘든 일이었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곤희아저씨에게 양주 한잔을 권했는데 그것을 받아 마시고 입맛을 다시다가 불쑥,
“아저씨 저 한 잔만 더 주세요.”
하던 것이었다. 너무도 천만뜻밖이고 기습적인 제안이었으리라. 그리고 아깝기도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고 한 잔을 더 따라줬는데 불쾌함과 괘씸함이 철철 흘러넘쳐 얼굴마저 크게 부풀어 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분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큰어머님은 조실부모를 했다. 소싯적에 열병이 돌아 일시에 부모를 잃고 사남매만 남게 됐는데, 그래서 제일 맏이인 큰어머님이 밑으로 남겨진 남동생 셋을 떠맡는 고달픈 신세가 됐다고 그랬다. 하필이면 그같이 외롭게 된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는지가 내게는 항상 의문이었다. 후에 안 노릇이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큰아버지에게 손이 없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고, 불행했던 결혼생활과도 연관이 있었던 그 내막은 큰아버지의 온전치 못한 성기능 탓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머니를 격동시키며 큰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유도해도 슬쩍슬쩍 딴 곳으로 피해나간 것은 금기로 굳어버린 남녀간의 관계를 다 큰 자식 앞에서조차 언급하기가 거북한 어머니의 완고한 생활관습 탓이었을 터이다.
사정이 이랬으니 할머니와 큰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았을 리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어머니는 큰어머니가 달고 들어온 객식구 탓이라고 둘러댔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이 내비치는 어머니의 말에서도 그것은 확연히 드러났다.
“글쎄 늬 큰어머니는 후딱 하면 집을 나가버리는 거야.”
“왜요?”
“못 살겠다구서는 그냥 나가버리는 거야. 그러면 또 늬 큰아버지는 만사 제쳐놓구 찾아나서구. 그 난리를 피우구 나면 한동안 잠잠했다가는 또 나가버리군 했는걸.”
“그러구두 내쫓기질 않았단 말예요?”
“내쫓기긴. 늬 큰아버지는 정신없이 찾아헤매기만 한걸. 한번은 사방으로 찾아나섰다가 소득 없이 돌아오셨는데 그렇게 풀이 죽었을 수가 없더라니까. 새까맣게 탄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어찌나 측은한 지 내가 안쓰러워서 아주 혼났었는걸.”
“나가면 어딜 갔나요?”
“난들 아니. 한번은 충청돈가 어딘가서 찾아왔다더구나.”
“큰아버지가 참 용한 분이었네요.”
“늬 큰어머니가 마음만 내키면 싹싹하기가 한량없었거든. 혀에서 녹는 솜사탕 같았으니까. 사람 비위 맞추는 데는 타구난 사람이었지.”
확실히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선지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던 일이 내 머릿속으로는 종종 떠오르고는 한다. 할머니는 안방에 앉아서, 큰어머니는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넌방에 앉아서 말다툼을 벌이던 장면이다. 무엇이 싸움의 발단이었는지, 그때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통 모르겠으나 큰어머니는 머리를 빗어가며 말대꾸를 하고 할머니는 큰어머니의 말이 끝나면 되받아치는 장면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 말다툼 끝에 큰어머니는 또 집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물론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이따금씩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만국공원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배다리를 지나 싸리재 마루턱을 넘어 한참을 걷다보면 홍여문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소리치면 목소리가 되울려 퍼져 의미 없이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한 재미였다. 아치형 벽은 물먹은 고목처럼 늘 거무튀튀하였고 고개 너머 부두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이 풍성하게 쏟아져 들어 그 안은 항상 서늘했다. 신포동과 송림동 쪽을 넘나들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서면 으레 땀을 들이다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홍여문 주변에는 참외, 자두, 수박 같은 여름 과일과 아이스케이크, 빙수, 냉차 등속을 파는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홍여문 아래 기상대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할머니의 시누이뻘 되는 키 작은 꼬부랑 할머니네 집이 있었다. 집이라야 돌로 높이 쌓은 축대에 붙여 지은 방 하나, 부엌 하나뿐인 단순한 구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햇빛이 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꼬부랑 할머니는 누워 있다가 기신기신* 일어나며 할머니를 반겼다. 그 할머니의 아들은 진태 아저씨였는데 늘 집을 나가 사는 까닭에 마누라가 도망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홀로 남겨진 손자와 함께 살았다. 그 애는 늘 그 할머니와 함께였다. 꼬부랑 할머니가 친척들의 대소사에 불려 다닐 때도, 동네를 놀러 다닐 때도, 심지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항상 붙어 있었다.
“꼭 장사꾼이 끌고 다니는 염소새끼 같더라. 지 사랑은 지가 지니고 다닌다는데 애새끼가 어찌나 그악맞은지 조금만 지 성질에 안 차도 울고불고 난릴 치는 거라. 언젠가는 물 만 밥을 지 할머니한테 집어던지며 발버둥을 치더라니까. 그 할머님도 늙마에 고생이시지.”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그 애 엄마는 미군부대로 빨래하러 다닌다고 그랬다. 가난한 살림을 그 애 엄마가 꾸려나갔는데 진태 아저씨가 사흘돌이로 두들겨 패는 통에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진태두 복을 발로 찬 셈이지. 밤낮 술이나 퍼먹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는 주제에 마누라를 그렇게 때리니 누가 붙어 있겠니. 나라두 백 번 나가겠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항상 자기 며느리가 잘못해서 그리 됐다는 주장이었다.
“여자가 남편이 들어오면 반색하구 맞아들이는 게 아니라 벌렁 나자빠진 채, 소 닭 보듯 하니 누가 집에 있을 맘이 나겠수. 진태가 말이라두 붙이면 뒤퉁맞게 소리나 질러대구. 여우하군 살어도 소하군 못 산다는데 이건 똑 그 짝이지 뭐예요. 자고로 여자란 그저 참는 게 타고난 팔잔데, 진태가 좀 섭섭하게 했다고 칩시다. 그래두 그렇지, 그래 지 속에서 난 애새낄 팽개치구 집을 어떻게 나가요, 나가긴. 독한 년이지.”
꼬부랑 할머니는 늘 진태 아저씨를 두둔했지만 그것을 듣고 나면 할머니는 이렇게 면박 주듯 대답해 듣는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만들었다.
“손바닥 하나가 어디 소릴 냅디까.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할머니에겐 두 사람이 모두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도 그 집에 들어서면 으레 물부터 찾았다. 여름 한낮 창영동에서 거기까지 걸어오게 되면 갈증도 날 만했다. 할머니는 내게 동전을 쥐여주고, 그러면 나는 홍여문 아래로 달려가 아이스케이크나 빙수를 사 먹고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면 마침맞게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의 좀더 쉬다 가시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그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인천중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산기슭 따라 비스듬히 뻗어 오른 길을 가면 공원의 정상이었다. 공원에 올라서면 우선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씻어내듯 불어 닥치고 저 멀리 월미도 건너 눈 아래로는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그렇게 앉아 있다 어느 순간 문득 눈을 들면, 내가 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황포돛단배들이 눈부신 햇살 아래서 점점이 떠 있는 고즈넉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슬그머니 찾아드는 졸음 속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러면 할머니는 자기 무릎으로 내 베개를 만들어주었다. 내가 눈을 뜨는 것은 대체로 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수평선에서 뻗어 나오며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저녁 무렵이고는 하였다.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는 내게 이런 말을 붙이기도 하였다.
“가슴속까지 시원하구나. 바다를 보고 나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애.”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6·25의 와중이다. 그 무렵엔 우리 집도 송현동으로 딴살림을 나갔고 큰아버지는 신흥동에서 전기상회를 하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집의 형편이 점점 좋아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전쟁을 고비로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작은삼촌이 전사한 것도 그 무렵이다. 어떤 것을 전쟁의 피해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집안에서 두 사람이 죽어나가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강화 생활을 작파하고 다시 우리 집으로 합쳤다. 수복은 됐다지만 일선에서는 한창 전투 중이었다. 이따금씩 대로를 차단하고 불시에 들이닥친 군용트럭이 길에 갇힌 남자를 무작정 싣고 가 노무자로 충원하는 살벌한 풍경이 일쑤 벌어지던 시절이다.
그 난장판에 큰어머니가 변변한 의료혜택을 받았을 리가 없었다. 귀에 들리는 용하다는 민간치료는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굿도 하고 기도도 드리고 침도 맞고 한약도 먹고 그리고 병원에도 다녔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비실비실 앓던 큰어머니가 숨을 거둔 것은 저녁 먹을 무렵이다.
“이거 봐요. 이 사람이 이상해요.”
문병차 온 친척분이 소리치는 통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큰어머니 주위로 모여 들었다.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아이구, 이 사람이 갈라나봐요.’,
삽시간에 여기저기서 황급한 소리가 북새통을 이루었다. 큰어머니의 숨소리가 가르랑거렸다. 그 와중에 큰어머니가 뭐라곤지 말하려는 듯했으나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큰어머니의 손을 잡고,
“에미야, 에미야, 정신 차려.”
하며 애타게 불렀으나 그 소리가 큰어머니에게 들렸는지도 의문이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매우 섧게 흐느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탓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큰아버지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할머니였고 그 같은 큰아버지에게 시집올 수밖에 없었던 딱한 처지의 큰어머니 속내도 속속들이 아는 사람 역시 할머니였을 테니까. 내가 사람의 임종을 가까이서 직접 지켜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큰아버지에게는 손이 없었기 때문에 큰어머니의 상사에서 맏상제 노릇을 한 것은 나다. 국민학교 5학년 때다. 상복을 입고 큰어머니의 사진이 내려다보는 상청 앞에 멀거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할머니는,
“좀 울어라. 넌 어쩌면 그렇게 울지도 않니.”
애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울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큰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장 섧게 운 것은 큰어머니의 첫째동생인 기돈이 사돈이다. 결혼해서 애도 낳고 동생들과 함께 살던 큰사돈 기돈이 아저씨는 지방출장을 갔다가 큰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기돈이 사돈이 연락을 받고 온 것은 큰어머니의 입관이 끝난 다음이었다. 기돈이 사돈은 소식을 듣고부터 내내 울었던가보았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엉금엉금 관으로 기어가더니 관을 쳐가며 넋을 놓고 울었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그런 기돈이 사돈을 단호한 목소리로 제지 했다.
“여보게, 고만하게. 관에 눈물 떨어지네.”
큰어머니가 죽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것은 사돈들이다. 음양으로 자기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큰누이가 없어짐으로 해서 우리 집과 또다시 인연이 끊어지는 외로운 신세가 됐기 때문에서다.
큰어머니가 죽은 다음 큰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기거를 했다.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 전기상회로 종종 놀러 다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큰아버지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혼자 있을 때는 완전히 풀 죽은 모습이었다. 큰아버지도 나와 함께 잠을 잤는데 어떤 때 눈을 떠보면 큰아버지는 자는 대신 일어나 앉아 울고 있기도 하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못난 놈 같으니라구. 울긴 왜 울어.”
할아버지가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서 새 장갈 들여야 해요.”
할머니가 말하자 할아버지가 목청을 높이며 할머니를 나무랐다.
“장갈 어떻게 간다는 거야? 장가가는 게 그게 쉬운 일이야?”
전기상회는 이층이었다. 아래층은 사무실이고 이층은 살림방이었는데 큰어머니가 죽은 다음엔 창고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그 이층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큰아버지가 올라왔다. 그러고는 한 바퀴 둘러보다가
“어?” 하고 놀라더니 “여기 기돈이가 오지 않았었니?” 내게 물었다. 자고 있는데 왔다 갔다니까 큰아버지가 쿵쾅쿵쾅 이층을 내려갔다. 한참 후에 큰아버지는 기돈이 사돈과 함께 다시 올라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나가 있으라고 일렀다. 문밖에서 서성이는데 갑자기 방안에서 기돈이 사돈의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멈추고 큰아버지와 기돈이 사돈이 다시 나왔는데, 보니까 큰아버지의 눈자위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큰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글쎄 기돈이가 이층에서 물건을 가져 갔더구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침에 내게 와서 돈 좀 달라지 뭐니. 식구들이 이틀째 굶고 있다구 하면서 말이다. 마침 돈이 없어서 그냥 보냈거든.”
한참 있다 큰아버지는 혼잣소리로 이렇게 한숨 쉬듯 말했다.
“하긴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 사건은 우리 집과 기돈이 사돈 간에 마음속으로 이어져 있던 끈이 끊어지는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 이후 기돈이 사돈은 큰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우리 집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버렸다.
대가족으로 되돌아간 우리 집은 나날이 가난에 시달렸다. 머릿수는 늘었는데 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하긴 전시하의 불경기이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큰어머니 병치레로 들어간 빚을 청산하느라 전기상회를 처분했다. 그러고 나니 삽시에 서 발 막대 휘둘러도 거치적거릴 게 없는 고단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마를 맞대고 궁리를 짜낸 것이 결국은 중선을 부린다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배라고 하면 체머릴 흔드는 할머니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큰아버지는 될 대로 되라는 투고, 어머니는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반대는커녕 은근히 기대를 거는 눈치인 데다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굳건히 밀고나가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집을 담보로 빚을 내고 아는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돈을 꾸어 대고, 그리하여 연평도로 배를 띄웠다.
하지만 욕심이 앞을 가린 사람의 눈엔 남 잘된 것만 크게 보이고 안된 사람은 통 들어오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다. 말처럼 돈은 쉽게 벌리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 집은 매일같이 빚쟁이들의 성화에 시달리는 신세가 됐다. 뒤늦게 어머니도 처음부터 일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배를 부리기 전보다 훨씬 옹색해진 살림을 이 년가량 끌고 갔는데 종당*에는 아버지가 몸이 아파, 그 행차만 할아버지가 타고 나간 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것으로 끝장을 보았다. 우리 집은 빚쟁이들을 피해 서둘러 서울로 떠버렸다. 할아버지가 그랬듯 우리 집은 대물림으로 다시 폭삭 망해버렸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징글맞지두 않다. 시집올 때 끼구 온 은가락지까지 빚쟁이들한테 모두 뺏겼으니까. 집구석이라구 아무리 둘러봐두 변변한 물건은 하나 없는 거라. 그런대루 쌀이니 밥그릇이니 이불이니 해서 당장 요긴한 것들만 골라 챙겨 보따리루 맨들어갖구,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이고 지고 나서는데 거지떼가 달리없더라. 서울이라군 말로만 들었지 그때 생전 처음 상면을 했다. 기찰 타구 서울역에 내렸는데 사람두 많구 집두 많더라만 그저 낯설기만 하더구나. 동서남북 어디가 어딘지 알 수나 있데? 집두 절두 없이 그저 무작정 나선 판이니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더라. 땀은 비 오듯 하구 힘은 들어 죽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쉬어야 되는지두 모르겠구, 돈이라두 넉넉하면 뭘 사먹기라두 할 텐데 그럴 형편은 못되구. 그 고생을 하며 물어물어 정릉이라는 델 찾아드니까 우리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산동네가 나타나더구나……·정릉에 갈 생각이 왜 났는고 하면 돈암정 시장에서 장사해먹기루 작정하구 떠났는데 거기까지 걸어 다닐 델 수소문하다보니 정릉까지 가게 된 거지…… 그때가 여름철이었기에 망정이지 겨울이었다면 애시당초 모두 얼어 죽었다. 하여간에 산자락 평평한 델 골라 가마니때길 깔구 하루를 났지. 우선 인천 떠날 때 쌀이랍시구 가져온 걸루 밥을 해 먹구 아이들하구 노인들은 거기서 기다리라 이르루 너늬 큰아버지하구 아버지하구 돈암정 시장엘 갔지. 너두 알다시피 생전 내가 장살 해봤냐, 나돌아 다니길 해봤냐. 늬 아버지가 기다리라구 하는 데서 한 한 시간은 좋이 기다렸을 거다. 어디서 꽁치 한 궤짝을 가져다주구서 날더러 팔아보라는 거야. 그래 난생처음 장사판이라는 걸 벌여놨는데 내 앞뒤의 가게 주인이랑 옆에 앉은 뜨내기 장사꾼들이랑 텃세를 부리는 거라. 앉았다 하면 딴 데루 가라구 악을 쓰며 쫓아내는 거야. 그런대루 쫓겨 다니며 하루 종일 지나고 나니 한 궤짝이 다 팔리더라. 저녁 때 너늬 아버지가 돈 셈을 해보더니 내가 보리쌀 한 되 값을 벌었다더구나…… 고생이 뭔진 모르겠다만, 남 먹을 때 먹지 못하는 걸 고생이라 하구, 추운 데 입을 것이 없고 비 오는데도 집 없는 걸 고생이라 하구,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는 걸, 천덕꾸러기가 되어 사람대접 못 받는 걸, 아픈데 쉬지두 못하는 걸, 다른 사람이 부러운 걸, 돈 없구 춥고 배고픈 이 모든 걸 고생이라 한다면 난 고생 다 해봤다. 내가 못해본 고생은 없다.”
그렇다. 모두는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산야를 헤매는 들쥐떼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어른들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동안 할머니는 산속을 돌아다니며 나물도 하고 땔감을 구해 날랐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돌을 주워다 쌓았고 물을 길어 날랐고 점심때는 교회에서 나눠주는 강냉이죽을 얻어오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주워다 쌓은 돌을 흙으로 이겨 발라 어른들이 틈틈이 담을 쌓아서 그해는 그 위에 가마니와 꽁치 궤짝을 이용해 하늘을 가리고 땅을 깊게 파 움막집을 만들고 겨울을 지냈다.
여름 한철은 모두가 가마니때기를 깔고 노숙을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덮고 잔 홑이불 껍데기가 이슬에 푹 젖었고 야기를 쐬고 잔 까닭에 얼굴이 모두 퉁퉁 부어올랐다.
쉴 새도 없고 틈도 없이 고생했다고는 하나, 그러나 매시 매분이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장사가 안될 때는 그래서 걱정이었으나, 반대로 장사가 잘될 때는 또 그래서 즐겁기도 하였다. 모닥불로 밥을 지어 먹고, 마침 사 들고 들어온 수박으로 화채를 만들어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게 되면 우리 집은 웃음소리가 가득 차기도 하였다. 그것은 상처 입은 짐승들이 서로 상대방의 아픈 곳을 핥아주고 어루만져주는 동굴 속 풍경 같기도 하였다. 일수를 얻어 장사하는 까닭에 돈을 벌어봤자 남 좋은 일 다 시키고 막상 손에 떨어지는 소득은 별것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쉬지 않고 움직이다보니 쌀 떨어지는 날이 점점 적어졌고 우리 집의 모양새도 시간이 갈수록 오막살이나마 제 꼴을 갖추어갔다.
날씨가 청명하여 보름달이 더욱 밝고 혹은 별이 쏟아질 듯 총총한 밤에 가마니때기에 누워 있노라면 할머니는 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너두 알지 왜, 우리가 강화 살 때 건너편 집에 살던 강씨 말이다. 그 사람두 그때 그렇게 날뛰지만 않았어두 죽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모든 게 세월 탓이구, 그렇게 하라구 충동질한 놈들 탓이지 뭐.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잘들 살구나 있는지 모르겠다…….”
6·25 때 부역한 강씨가 잡혀가는 것을 할머니와 나는 강화 있을 때 보았다. 그해는 유난히 가물어서 가랑포뜰에는 물이 말라 논에다 밭작물을 심었었다. 할머니와 논에 나가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가을걷이를 하는데 총끈을 어깨에서 허리로 비스듬히 둘러맨 순경과 뒷결박으로 꽁꽁 묶인, 신발도 안 신은 맨발의 남자가 터덜터덜 걸어오던 것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일손을 놓고 일어섰는데 우릴 먼저 알아본 것은 묶여 가던 강씨다. 강씨는 우릴 향해 씽끗 웃으며 이렇게 말하던 것이었다.
“할머니. 난 이제 아주 가요.”
그렇게 멀어져간 강씨가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우리 동네로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다.
“늬 삼촌은 어렸을 때 아주 재롱둥이였다. 어느 핸가 명절이 돼 엿을 고아가지고 벽장에 넣어놨는데 글쎄 그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질 않겠니. 깜짝 놀라 문을 열어보니까 늬 삼촌이 거길 올라가 엿이니 강정이니 실컷 먹구는 네 활개를 쳐가며 코를 골구 있더구나. 내가 이 녀석을 단단히 혼내겠다구 마음먹구 두들겨 깨웠지. 그랬더니 글쎄 늬 삼촌이 겁을 먹기는커녕 배실배실 웃다가 내 품속으로 안겨드는 거라. 혼내주기는커녕 내가 웃고 말았다. 그때가 늬 삼촌이 다섯인가 여섯 살이었을 때다. 지금은 뼈도 없어졌을 테지…….”
할머니는 삼촌 얘기는 이따금씩 했지만 할아버지 얘기만은 일절 하지 않았다.
앞뒤 연관 없이 불쑥 이렇게 말할 때도 있었다.
“아, 참 별도 많구 달도 밝다. 귀뚜라미 소릴 듣고 있으면 난 괜히 처량해지 더라.”
“……”
“난리통에 있었던 일이란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진 모르겠다만 동네 사람들이 어떤 여잘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구 불을 질렀다지 뭐니. 그 여잔 지 새낄 안고 있었는데 불길이 솟구치니까 안고 있던 애를 사람들을 향해 던지더란다. 그 애는 얼결에 그 밑에 있는 사람이 받아서 무사했다는구나. 어떻게 인두겁을 쓰구 그런 그악맞은 짓들을 하는 건지 원.”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돼서 악착맞은 짓을 하는 거기두 하지만 또 사람이 돼서 착한 일두 하는 건데…….”
서울로 옮겨온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나는 다시 학교를 다녔다. 동생들도 급사 노릇을 하거나 남의 집 일을 보아주며 야간학교를 다녔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월급쟁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사글셋방에서 전셋방으로 전셋방에서 전셋집으로 전전하다 마침내는 수유리에 조그만 집을 사서 안돈할 수 있게 됐다. 그때 할머니는 팔십 가까운 나이가 되어 있었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는 환갑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의 나이를, 그 긴 세월을 모두 바쳐 결국 우리는 집과 바꾼 셈이었다.
수유리로 이사 간 다음 나도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딴살림을 났다. 신부는 내가 취직한 출판사 관계로 알게 된 대학 나온 여자였는데 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연애할 때는 좋았으나 결혼하고 나니 그저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였다.
결혼하고 딴살림을 나기로 작심한 것은 내 나름대로의 계산 탓이었다. 집 식구가 할머니, 큰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거기에 동생이, 그것도 시누이가 셋인 복잡한 대가족인데, 재산이 많은 것도, 문벌이 떳떳한 것도 아닌 그저 가난밖에 없는 것이 우리 집이다. 그런 집에 나이 어린 신부를 불러다가 제발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여 가정을 평화롭게 이끌어달라고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순탄한 결혼생활을 이끌어나갈 묘책이란 분가밖엔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재빨리 뺑소니치는 것으로 발등에 떨어진 불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왕 뺑소니를 칠 바에야 한 발짝이라도 멀리 도망치는 것이 상수라는 생각이 작용한 탓이었을까. 내가 살림을 나간 곳은 용산구다. 수유리와는 완전히 정반대쪽이었다. 그러니 결혼하고 집에 들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결혼 첫 무렵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문안차 들렀는데 시간이 흐르고 아이도 생기고 보니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게 된 것은 큰놈이 세 살이 되고 둘째놈이 태어났을 무렵이다.
그때는 수유리를 정기적으로 들른다는 것은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고 그저 수유리에 우리 본가가 있다는 생각이나마 잊지 않는 것이 대견할 정도였다. 그러니 내가 실성한 할머니를 이따금씩 문안차 찾아보았다는 갸륵한 말만은 낯이 간지러워서도 할 수가 없다.
노인이 실성하면 골방 차지를 한다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큰방 차지를 했다. 병든 할머니를 잘 모실래서가 아니라 어른이 모두 기거할 수 있는 방이라곤 큰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수유리 집은 병든 할머니가, 달리 말하면 할머니의 노망기가 집 전체를 지배하는 어두운 분위기였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식구들이 집에 들어서기를 꺼려하고 집을 생각하면 암담한 기분마저 드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런 일이었다.
형편이 이랬으므로 나와 아내와 아이들이 수유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여간 큰맘을 먹지 않고서는 애시당초 이루어지질 않았다. 온갖 감언이설로 아내와 아이들을 달래고 설득하고 그리고 협박해야만 성사가 되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수유리집에 들르게 되면 식구들은 할머니는 본체만체 제각기 자기 있기 편한 곳으로 둥지 찾아들듯 달려가고 나만 홀로 서 있다가 슬그머니 할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이구 이게 누구야, 내 손주로구나. 네가 날 보러 왔어. 이게 꿈이냐, 생시냐.”
전신으로 호들갑을 떨며 앉은뱅이걸음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 없는 이 집에서 내가 나타나는 것은 할머니에겐 항상 기적 같은 반가움인가보았다. 날 잡으면 할머니는 여간해서 놓아주질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런 성질을 익히 터득한 나는 두 손을 벌리고 허우적대는 할머니의 사정거리 밖으로 교묘하게 몸을 피하면서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할머니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은 다음,
“그래 요샌 좀 어떠세요.”
내가 물어보면 할머니는 대뜸 술픈 표정이 되었다. 과연 늙고 병드니 어린애였다.
“말도 마라. 저년들이 날 굶겨 죽이지 못해 안달인걸.”
“아무렴 그럴라구요.”
내가 타이르듯 말하면 할머니는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저년들 심보가 얼마나 숭악하고 고약한데. 내 속 썩는 건 아무도 모른다.”
“내 명이 길려나보다. 늙어가지구두 매일 욕을 먹구 사니 말이다.”
할머니에게 욕을 먹게 되면 하는 어머님의 푸념이었다.
“매일 누워 지내는 분이 진지는 더 많이 드시니 참 별일이지. 그러니 많이 싸실밖에. 저지난번엔 싸논 걸 들구 나오려니까 글쎄 묵직하더라. 챙겨 먹는 정신은 왜 그리 똑똑하신지. 조금만 때가 늦어두 날 굶겨 죽인다구 악을 악을 쓰는 거야. 밥상이 들어가면 밥이구 반찬이구 그냥 깨끗이 부셔내구. 그것만이면 또 괜찮게. 어떤 땐 음식을 조금씩 덜어서 종이나 헝겊으루 싸서는 여기저기다 감춰 두시는걸.”
“왜 그러신대요.”
“난들 아니.”
“그러지 말라구 해보시죠.”
“골백번두 더 했다. 그래두 막무가낸 거야.”
“밤에 심심할 때 드시려나보죠.”
내 말에 어머니는 어림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기나 하면 누가 뭐라겠니. 감춰놓구는 그냥 잊어버리시는걸. 그래서 썩는 냄새가 진동해야 나두 알아서 갖다버리는걸. 저지난번엔 고등어를 졸여드렸더니 그걸 감춰 놨는데 거기서 구더기가 생겼지 뭐니. 방 안에 구더기가 있길래 별일이다 싶어 찾아봤더니 고등어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거야. 징그러워서 혼났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집에 어쩌다 먹을 것이 생긴다 해도 대체로 할머니 몫은 제외였다. 그래도 모자지정은 어쩔 수 없나보아서 아버지는 할머니의 주전부리감을 떨어지지 않게 사들였다.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들르는 큰아버지도 절대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없었다. 큰아버지가 사오는 것은 눈깔사탕이나 박하사탕이었다.
“밤낮 이따위만 가져오지 말구 고기나 좀 사오게.”
한번은 큰아버지의 면전에 사탕봉지를 집어던지며 할머니가 악을 쓰자 큰아버지가 우리 식구들을 빙 둘러보며 허허대고 웃었다.
“괴길 사다드리면 일어나실 수가˙ 있겠어요?”
“일어나선 뭣 하게. 저년들이 모두 내가 왜 안 죽나 하구 매일 조바심인데.”
“어머님도 참…… 말씀 좀 삼가세요.”
“내가 뭐가 무서워 말조심을 하나.”
큰아버지는 우리가 수유리로 이사하고 얼마 안 있다 재취를 한 다음 딴살림을 났다. 그 일을 발 벗고 주선한 것이 할머니시다. 할머니가 수소문해 들인 재취자리 새 백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자다운 삽삽한 맛이라곤 없었다. 때때로 우리 집에 들르면 자동차 멀미가 난다며 누구 앞이고를 가리지 않고 두 다리 쭉 뻗고 드러누웠다. 나이든 시동생 앞에서 우렁차게 게트림을 해대기도 하고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는 등 과연 저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 몸단속을 할 줄 몰랐다. 어지간히 무던한 어머니마저 새 백모에게는 질렸
다는 표정을 서슴지 않았다.
“주변머리라고 하나두 없는 여자더구나. 시굴 살 때 자기 남편이 앓다 죽었는데두 두 손 놓구 멍청히 있었다니 알조지 뭐. 동네 사람들이 하두 딱해 둘둘 말아다 묻어줬다면 말 다했지. 그래두 용케 서울까지 밀려와서 남의 집을 살았던 모양이더라만 오죽했겠니. 가는 데마다 천덕꾸러기 대접만 받다가 금세 쫓겨나군 했대요. 아이도 하나 있었는데 시굴에서 동네 사람들이 수소문해 고아원으로 보내버렸대. 제 새끼 하나 건사 못하는 주변머리가 그러려니 해야지 뭐.”
새 백모가 우리 집에 들르게 되면 동생들은 모두 입을 삐죽이며 그 자리를 피해 나갔다. 그런 동생들이 언젠가 모여 하필이면 그런 여자를 맞아들였냐며 원성을 늘어놓자 할머니는,
“너희들은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달님 속의 항아 같은 여자가 미쳤다고 늬 큰애비한테 오겠니. 그리구 뭐니 뭐니 해두 남자한테 마누라가 있어야 하는 법야. 늙은 홀애비 뒤를 누가 봐주겠니. 그저 마누라밖엔 없는 거야.”
차근차근 동생들을 타일렀다. 큰아버지가 딴살림을 나자 그것을 제일로 반가워한 것은 어머님이시다.
“옛말 하나 그른 데 없다. 집 안엔 늙은이 하나와 걸레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라더니…… 할머니가 아니면 누가 큰아버님 장가를 들이겠니. 큰아버님 빨래 해대느라 내가 엔간히 속을 썩였는데, 그 노릇 면한 것만 해두 난 날아갈 것 같다. 큰아버님 돌아가실 때까지 그걸 누가 모시겠니. 이젠 마나님이 생겼으니 그런 걱정은 놓아두 되는 거지.”
하지만 이제 누워 있는 할머니는 집 안에 반드시 필요한 쓸모 있는 ‘늙은이와 걸레’에서 멀리 벗어난 신세였다. 후딱하면 ‘이년, 저년’으로 집안사람들을 몰아대서 특히 내 여동생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희들이 너그러워져라.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야. 너희들도 늙어서 할머니처럼 안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니. 그러니 할머니를 대할 때 좀 따듯하게 대해봐.”
뭔가 말은 되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공자님 말씀으로 내가 타이르기라도 하면 고2짜리 막내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내게 대들었다.
“오빤 이따금씩 와서 보니깐 그런 속 편한 소릴 할 수 있는 거야. 오빠가 한번 할머닐 무시구 살아봐. 그런 소리가 쉽게 나오나.”
할머니에게 가본 지도 까마득하게 된 어느 날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급히 달려가보니 큰아버지와 아버지만이 할머니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미 의식이 모두 나간 다음이었다. 갑자기 대문 밖이 소란해지더니 할머니의 친정 조카며느리가 되는 소래 아주머니가 들이 닥쳤다.
“사람을 알아보시려나…… 고모님, 나 왔어요.”
귀가 어두워 남보다 큰 소리로 말하는 그 아주머니가 웃음을 머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사람 못 알아보세요.”
큰아버지가 알은체하며 말했다. 그러자 소래 아주머니는 자못 안타깝다는 듯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지 않아도 엊그제 꿈자리에 나타나시길래 찾아가야지 하구 맘먹구 있었는데 고만 일이 생겨 못 왔지 뭐예요. 그때만 왔어두 한 번 더 만나뵐 수 있는 건데…….”
마치 잔칫집에라도 온 듯 명랑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들어오자 소래 아주머니가 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이젠 동세두 고생 면하시게 됐수. 그동안 참 힘드셨지 뭐. 내가 여기 왔다 간 게 한 보름 됐죠? 이틀 전에만 왔어두 고모님을 한 번 더 보는 건데. 이젠 보고 싶어두 고모님을 못 보겠구랴.”
“그러지 않아두 며칠 전에 형님이 오실 때가 됐는데 안 오신다구 말씀을 하셨다우.”
“동세두 오래 사세요. 죽으면 보구 싶어두 못 보잖우.”
“그게 어디 맘대루 되는 일이우.”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수?”
“아직은 괜찮아요. 그냥 방에 앉아 계시우.”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
“그러리다.”
사람이 늙어서 죽는 건 너무나 당연하며 별로 대수로울 게 없다는 투의 소래 아주머니의 천연덕스런 태도로 가라앉았던 방 안의 분위기가 어느 결에 살아 올랐다.
“에미랑 애들이랑 별일 없냐?”
큰아버지가 벽에 기댔던 등을 세우며 내게 물었다.
“네.”
“바쁘진 않구?”
“늘 그렇죠 뭐.”
“참, 나 일전에 춘식일 만났었네. 신관이 아주 좋아졌더군.”
그러자 아버지도 비스듬히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 돈 좀 모았어요.”
“뭘 하는데?”
“소래에서 횟집해요.”
“영등포역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누가 알은첼 하는 거야. 처음엔 그 사람을 알아보지두 못했어. 옛날엔 비루먹은 당나귀 같더니만 지금은 개기름이 번질번질하던 데.”
“그 사람 팔자가 늘어졌어요. 새벽에 노량진시장에 나가 물건 받아다 주고 나면 하루 종일 놀러 다니는 게 일인데요 뭐.”
“장산 누가 하구?”
“장사야 그 안사람이 하지, 그 사람이야 손 하나 까딱하나요 뭐.”
춘식이는 아버지와 함께 돈암동에서 장사하던 사람이었다.
“소래에 있는 횟집이면 활어집이겠네. 나두 언젠가 거기 가서 회를 먹었는데 아주 좋던데요. 좀 비싸긴 하지만.”
내가 말하자 아버지가 딱하다는 듯 나를 바라다봤다.
“뭘 먹으러 소래까지 뭣 하러 가니. 그게 모두 노량진에서 가져가는 거야.”
“수족관에 살아 있는 고기들이 우글우글하던 데요.”
“그게 모두 속임수지.뭘 먹으러 그 먼 데까지 가서 왜들 비싼 돈들을 쓰는지 난 알다가두 모르겠다.”
“전부 그 앞바다에서 잡아온 것들이라던 데요?”
“나, 참, 지금 서해 앞바다에 고기가 있는 줄 아니? 동지나해까지 나가서 고기를 죄다 훑어오는데 무슨 놈의 고기가 소래까지 올라오냐?”
부자지간에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다가 큰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속아두 좋은 건 안 속구, 안 속아야 할 건 잘 속는 게 사람들이지. 그게 모두 헛 약아서 그래. 우리 장사할 때 생각해보게. 몇 푼 안되는 건 깎겠다구 이악을 부리는 것들이 비싼 물건을 보면 사족을 못 쓰지 않던가.”
덩치 큰 초식동물의 눈처럼 한없이 선량하게 생긴 큰아버지도 이제는 많이 변해 있었다. 젊었을 때의 회한과 좌절의 모서리가 완연하게 닳아진 모습이었다. 역시 세월은 약이었다.
“어서 가서 저녁들 드세요. 여긴 이 형님하구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아주머니가 들어서며 우리에게 일렀다. 저녁을 먹고 돌아와보니 소래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밤색 겉옷 털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내가 의아롭게 바라다보자 소래 아주머니가 말했다.
“태워 없앤다기에 내가 입겠다고 그랬다. 고모님 옷인데 어떠니.”
할머니 것이라면 건드리기조차 싫어할 우리 집 식구들을 생각하자 그 아주머니의 태연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나도 진심으로 이렇게 권했다.
“잘 하셨어요. 다른 것도 괜찮은 게 있으면 가져가시죠 뭐.”
“그렇지 않아두 늬 어머니한테 그렇게 부탁해놨다.”
빈농의 맏며느리로 시집와 시골 소산을 철철이 머리에 이고 인천으로 내다 팔아 전답을 장만한 이 아주머니는 언젠가 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고모님도 알다시피 내가 외손녀만 다섯이잖아요. 그 애들한테 마지막으로 내가 해줄 것은 다 해줬어요. 놋대야, 놋요강, 놋그릇 한 벌씩, 시집갈 때 갖구 가라구요. 이젠 눈을 감아두 여한이 없어요.”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셋 난 것을 씻지 못할 죄로 알고 살아온 이 아주머니는 외손녀들에게 결혼선물로 미리 놋그릇을 해주는 것으로 평생 끝막음의 선을 그었던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나는 차마 손녀딸들이 시집갈 때는 놋대야니 놋요강 따위는 필요 없으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모욕을 가해야 할 이유가 이 세상에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되지가 않았다.
할머니는 임종을 매우 오래 끌었다. 하룻밤 새우고 다음 날 저녁이 되었어도 호흡만 가르랑거릴 뿐 숨을 거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해 답답하다는 듯 아버지가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원 이렇게 오래 끄실 건 뭔구. 아, 고만 고생하시구 어서 가세요. 먼저 가시면 우리두 차례차례 뒤따라갈 건데요 뭐.”
마치 나릇배를 모자가 타러 나왔다가 어머니가 타고 나자 빈자리가 없어 먼저 떠나게 된 배에서 아들에게 안타깝게 손짓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손을 흔들며 먼저 건너가 기다리면 곧 따라갈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그런 장면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머쓱해졌던지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화타, 편작이라두 별수 없는 거야. 누구든지 한 번은 꼭 가는 길인데 뭐.”
큰아버지가 아버지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 항우장사라두 죽는 걸 피할 순 없는 거지. 사람이 죽지 않는다구 생각해보게. 이 세상은 발 들여밀 틈도 없을 걸세.”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하루 낮을 앉아 배기자* 저녁에는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큰아버지가 말했다.
“넌 건너가서 눈 좀 붙이지 그러니.”
건넌방으로 가자마자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올려다보니 아버지였다.
“얘, 일어나라. 할머님 이 떠나실 모양이다.”
건너가보니 눈에 띄게 볼이 움푹 팬 할머니가 한참씩 동안을 들이며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큰아버지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로 떠나시는 것 같네.”
아버지가 머리맡으로 다가앉아 할머니의 눈을 쓸어내렸다.
“원 이렇게 애쓰실 게 뭐람.”
얼마 안 있다 할머니는 깊게 숨을 몰아쉬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와 소래 아주머니의 곡성이 터지는 가운데 아버지가 홑이불을 끌어올리자 지문을 크게 확대해놓은 것 같은 주름살진 할머니의 얼굴이 흰 천 속으로 사라졌다. 그 주름의 갈피마다 내 어린 시절도 함께 파묻혀 저 먼 곳으로 빠져나가는 허전함이 내 가슴으로 전해왔다. 돌아가신 시간은 새벽 세시 반경. 그때 할머니의 연세는 팔십팔 세였다.
희망과 절망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이 그저 열심히 살다가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 하긴 그동안에 그렇게 살다 떠나간 사람이 어찌 할머니 한 분뿐이겠는가. 개중에는 억지 죽음을 당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이걸 보면 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흔적을 반드시 남겨놓고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보낸 세월의 시간은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의 뼈를 이 땅에 묻어버린 것 이외에 또 다른 흔적으로 무엇을 남겨놓은 것 일까.
나룻배를 먼저 탔기 때문에 앞서 떠나게 된 할머니가 강 저쪽에서 뒤의 행보에 타고 올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할머니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다보며 이렇게 투덜대고 있으리라.
“그런데 이 애들은 뭘 꾸물대고 여직껏 안 오는 거지.”
『우정 반세기』 (창작과비평사 1991); 『바닷가 소년』 (창작과비평사 1992)
한 남 철
본명이 남규(南圭)인 한남철(韓南哲)은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1958년 『사상계』이 「실의」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사상계』 『신동아』 『월간중앙』 등에서 근무하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벌였다. 섬세한 감성과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예미ㄴ한 감응력으로 서민생활을 실감나게 묘사해온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강 건너 저쪽에서」 「황구 이야기」 「앵두나무집」 「바닷가 소년」 등이 있다. 1993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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