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바이욘 사원
Bayon Temple
"바이욘 사원"(ប្រាសាទបាយ័ន, Prasat bayon [쁘라삿 바이욘]) 캄보디아의 앙코르 지역에 있는 유명하고 화려한 장식의 사원이다. 이 사원은 12세기 후반 혹은 13세기 초반에 대승불교도였던 국왕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자야바르만 7세])가 국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것으로, 역시 그가 건설했던 제국의 도성인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자야와르만 7세 사후에는 힌두교도 및 상좌부불교 신자였던 왕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취향에 맞춰 증, 개축되거나 변형을 겪었다.
바이욘 사원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중심탑 주위로 상층기단부 위로 설치된 여러 탑들에 부조로 새겨진 거대하고 고요한 모습의 일군의 얼굴 조각상들이다.(주3) 또한 이 사원은 인상적인 형식을 갖춘 두 곳의 회랑들로 유명한데, 이 회랑에는 신화적 주제와 역사적, 세속적 주제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정부 앙코르 유적 구제팀"(JSA)이 이 사원을 앙코르와트의 고전적 양식과 대비시키며, 크메르 건축양식에 있어서 "가장 바로크적 형식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이라고 묘사해 학술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주4)
(주1) Glaize, p.87.
(주2) Glaize, p.87.
(주3) Freeman and Jacques, p.78.
(주4) The Bayon Symposium. |
1. 역 사
1.1. 자야와르만 7세가 창건할 당시의 불교적 상징주의

(사진) 파리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에 보관되어 있는 자야와르만 7세의 두상. 많은 학자들이 바이욘의 얼굴상들을 자야와르만 7세를 모델로 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지역에 건립된 마지막 국가 사원이며, 비록 이 사원의 건립 시기에 다양한 기원을 가진 지역적 신상들이 앙코르 톰 여기 저기에 다양하게 배치되긴 했지만, 이 사원은 대승불교의 사찰로 붓다를 모신 경우로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의 담장들과 나가(naga) 다리 및 쁘레아 칸(Preah Khan), 따 쁘롬(Ta Prohm), 번띠어이 끄더이(Banteay Kdei) 사원 등 자야와르만 7세의 거대한 기념비적 건설사업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한 건축물이다.
이 사원의 탑들에 새겨진 216기의 거대한 얼굴조각상들을 놓고, 많은 학자들은 이 얼굴이 자야와르만 7세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라 결론내렸다. 일부 학자들은 이 얼굴들이 불교의 자비의 보살(菩薩, bodhisattva)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 혹은 Lokesvara)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주5) 이 두 가지 가설 모두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 두 가지의 혼합적 성격을 지녔을 수도 있다. 앙코르 지역을 연구했던 학자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ès)는, 자야와르만 7세가 크메르 군주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왕"(神王, devaraja) 개념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힌두교도였던 자야와르만 7세의 전임자들은 시와 신(Shiva) 혹은 시와 신의 상징인 링가(lingam, 남근숭배)에 동질성을 부여했던 반면, 자야와르만 7세는 불교도로서 자신을 붓다 혹은 보살과 동일시했다고 한다.(주6)
(주5) Coedės, p.137.
(주6) Coedès, p.147. |
1.2. 자야와르만 7세 사후의 변형과 개축
자야와르만 7세 이후 후대의 왕들은 바이욘 사원에 대해 수많은 증축과 개축을 시도했다.(주7) 13세기 중엽의 자야와르만 8세 시대에는 크메르 제국의 국교를 힌두교로 전환했기 때문에, 국가 사원인 바이욘 역시 변형을 겪었다. 그 다음 세기에는 국교를 다시금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불교)로 바꾸어 또 다시 변형을 겪게 된다. 상좌부 불교는 이 사원이 정글 지역에 최종적으로 방치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국교로 남는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사원의 모습은 최초 창건 당시와는 다른 것으로, 사원 동쪽의 기단부와 서고(書庫, 고뿌라), 안쪽 회랑의 모서리들 및 상층 기단부 일부가 남아 있다.
1.3. 현대의 복원노력과 연구활동
20세기 전반에는 '프랑스 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遠東博古院: EFEO)이 "아나스틸로시스 공법"(anastylosis)을 사용해 이 사원을 복원하면서 이에 대한 연구를 주도했다. 1995년부터는 "일본정부 앙코르유적 구제팀"(Japanese Government team for the Safeguarding of Angkor: JSA)이 학문적 연구를 주도하고 있고, 매년 학술회의도 개최하고 있다.
2. 구조물의 배치
바이욘 사원은 동향으로 지어져, 내부의 건물들이 서쪽으로 갈수록 촘촘하게 배치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건축물은 앙코르 톰의 정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도시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연결된 도로들이 이곳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 사원 자체는 담장이나 해자를 갖지 않으며, "도시-사원"의 배치구조에 따라 도시 전체가 그러한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앙코르 톰 전체는 총 9 km²의 면적을 가지는데, 이는 여기서 남쪽으로 2 km 떨어진 앙코르와트의 총 2 km²의 면적에 비하면 대단히 넓은 규모이다.
바이욘 사원 자체에는 외곽에서부터 2겹의 회랑형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가운데에는 상층 기단부(제1 담장)가 위치해 있다. 이러한 구조물들은 각각 그 사이의 작은 공간에 반하는 방향으로 몰려 있다. 대규모의 조각과 열린 공간들을 보여주는 앙코르와트와는 달리, 바이욘 사원은 "대단히 촘촘한 틀 속에 압축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주8)

평면도로 본 바이욘 사원. 가장 안쪽의 상부기단만 불규칙한 모습 때문에 근사치로 그려졌다. 바깥쪽부터 "바깥쪽 회랑(담장)"과 "안쪽 회랑"이 있고, 안쪽 회랑의 내부 공간에 "상부기단"이 위치한다. "고뿌라"는 동서남북으로 난 입구들에 설치된 굵은 10자형으로 표시된 구조물들이고, 2곳의 "서고"는 " L "로 표시되어 있다. |
2.1. 바깥쪽 회랑 : 역사적 사건 및 일상생활의 묘사
바깥쪽 회랑의 외벽에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앙코르-크메르 시대의 일상생활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대단히 상세한 묘사가 되어 있지만, 어떠한 금석학적 비문도 발견되지 않아 과연 어떤 특정한 사건을 묘사한 것인지, 그리고 작품들 상호간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을 남겨두고 있다.(주9) 동쪽 고뿌라(서고)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새겨져 있다.
-
동쪽 회랑의 남쪽 부분에는 크메르 군대의 행진이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는 일부 중국 군사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고,(주10) 악사와 기마병 및 코끼리에 올라 탄 장수를 뒤를 이어 식량을 실은 수레가 따르고 있다.

바이욘 사원의 회랑에 조각된 참파를 향해 진격하는 크메르 군대의 모습
-
(사진: Manfred Werner, 2001년 8월)
-
동쪽 회랑의 다른쪽 부분인 안뜰로 들어가는 문 근처에는 앙코르인들의 일반 가정과 중국 상인인듯한 거주자들도 묘사되어 있다.
-
동남쪽 모서리의 차양 아래에는 탑과 압사라 여신들(apsaras), 링가(남근상) 등을 가진 미완의 사원 하나가 묘사되어 있다.
-
남쪽 회랑의 동쪽 부분에는 떤레 삽에서 벌어진 크메르 제국과 참파 왕국(Cham) 군대 사이의 수전(水戰)이 묘사되어 있다.(주11) 그 아래로는 시장, 옥외에서의 요리, 사냥꾼, 아이와 병자를 돌보는 여인의 모습 등 민간의 생활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
남쪽 회랑의 다른쪽 부분인 안뜰로 들어가는 관문에는 중국식 밧줄을 단 나룻배와 어부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닭싸움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대화와 놀이에 열중하는 공주와 시종들 및 여타 사람들의 모습과, 씨름꾼과 야생 멧돼지 싸움도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전함에서 추락하는 참파(짬족)의 병사와 쇠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크메르 전사의 전투모습이 나타나고, 전투에서 승리한 크메르 군대의 모습, 전승 축하연을 벌이는 크메르 국왕과 신하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
남쪽 회랑의 서쪽편에는 크메르 군대와 참파 군대가 묘사되어 있는데, 코끼리와 석궁, 투석기 등 전쟁장비들도 포함되어 있다.
-
서쪽 회랑의 남쪽 부분에는 숲 속을 행진하는 군대의 모습과 이후 논쟁을 하다 전투를 벌이는 두 크메르 군대의 무리들이 조각된 미완성의 회랑이 있다.(주12)
-
서쪽 회랑의 안뜰로 들어가는 관문에는 크메르 전사들 사이의 난투극이 묘사되어 있고, 한쪽 편이 연못에 빠진 다른 편을 추격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연못 속에는 작은 사슴을 삼키는 거대한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다.(주13) 그 다음에는 성화를 봉송하는 배를 앞세우고 코끼리 위에 서 있는 왕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
북쪽 회랑의 서쪽 부분에는 또 하나의 미완의 장면인 오락을 즐기는 왕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는 체육과 저글링, 아크로바트, 동물들의 행렬 등이 조각되어 있고, 이후 숲에서 입정에 든 고행자의 모습, 크메르와 참파 사이의 또 다른 전투장면이 이어진다.
-
북쪽 회랑의 안뜰로 들어가는 문 주위로는 촘촘한 행렬로 쫓아오는 참파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크메르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북쪽 회랑의 모서리 차양 밑에는 또 다른 크메르 군대의 행진이 묘사되어 있다.
-
동쪽 회랑에는 양편 모두 코끼리를 앞세운 크메르 군대와 참파 군대의 지상전이 묘사되어 있다. 크메르 군대가 승리하고 있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바깥쪽 회랑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안에는 동쪽 출입문 주위로 2개의 고뿌라(서고)가 서 있다. 원래 안뜰에는 16기의 불탑이 있었지만 힌두교 회귀주의자였던 자야와르만 8세가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주9) 회랑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Glaize, pp.90 ff. 및 Rovedo, pp.134 ff. 참조.
(주10) Freeman and Jacques, p.85-86. 이 장면에서 크메르인들은 짧은 헤어스타일과 긴 귓볼을 갖고 있고, 허리에 두르는 천 및 약간의 여타 복식을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인은 턱수염, 나비매듭의 리본, 무늬형 가운을 입고 있다.
(주11) Freeman and Jacques, p.85-87. 참파는 가운과 곡선형 방패, 특이한 왕관과 스카프가 달린 헬밋으로 구분된다. 이 장면은 1177년에 있었던 참파의 수로를 통한 크메르 도성 침략을 묘사한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크메르가 승리하고 있고, 1177년의 참파 침공은 성공하여 크메르 도성의 약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장면이 자야와르만 7세가 결정적으로 강자로 부상했던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할 수도 있다.
(주12) Freeman and Jacques, pp.91-92. 이 장면은 아마도 1182년에 발생했다고 기록된 반란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주13) Glaize, p.92. 다른 회랑의 장면들과 달리, 이 장면에 대한 비문 하나가 발견됐는데, 이 비문은 "이 사슴이 그(뱀)의 양식"이라고 하였다. |
2.2. 안쪽 회랑 : 신화적 사건의 묘사
안쪽 회랑은 지면보다 약간 솟아 올라 있고, 이중 모서리를 지니고 있다. 원래는 10자형으로 만들어졌다가 후대에 사각형 모양으로 보완되었다. 이곳의 회랑은 자야와르만 8세가 후대에 증축한 것으로, 바깥쪽 회랑과 비교하면 상당히 빈약하다. 여기에는 전투나 행렬의 모습보다는 힌두교 신화의 장면들을 조각한 작은 화면들로 채워져 있다. 힌두교의 3주신(뜨리무르띠, trimurti)인 시와 신(Siva), 위쉬누 신(Vishnu), 그리고 브라흐마 신(Brahma)은 물론이고, 천상의 무희들인 압사라들과 라와나(Ravana) 및 가루다(Garuda: 전설의 새)도 묘사되어 있다.(주14) 그러나 묘사된 장면의 특정성 및 장면 상호들간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동쪽 고뿌라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회랑에는 참파의 침입자들이 저지른 성상파괴 행위 혹은 산 속의 공간으로부터 탈출하는 여신의 해방 모습을 묘사한 2개의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주15) 또 다른 일련의 장면들은 맨 손으로 거대한 뱀과 싸우는 왕의 모습, 그의 손을 시험하는 여인, 그리고 최종적으로 침상에 병들어 누워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문둥이 국왕"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이 왕은 자신이 싸웠던 뱀의 독 때문에 나병에 걸리게 된다.(주16) 서쪽 고뿌라의 남쪽에 위치한 위쉬누 사원의 조각상과, 서쪽 고뿌라의 북쪽에 위치한 <우유 바다에서 불생음료 찾기>(Churning of the Sea of Milk: 乳海攪拌) 신화의 묘사도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주14) Glaize, pp.94 ff.
(주15) Glaize, p.98; Rovedo, pp.148-149 (이 두 학자는 전자의 해석을 더 선호한다).
(주16) Freeman and Jacques, p.101; Rovedo, p.149-150 (이 "뱀"을 질병 그 자체를 상징화시킨 표현으로 추정하였다). |
2.3. 상부기단 : 200기의 관세음보살 얼굴상들
안쪽 회랑의 내부 공간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여진 위치의 상부기단으로 거의 채워져 있다. 안쪽 회랑과 상부 기단 사이에 여유 공간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상부기단이 이 사원을 창건했을 당시에 계획되지 않은 것으로, 약간 후대에 디자인을 변경해 증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따 쁘롬 사원이나 번떼이 끄더이 사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이욘 사원도 원래는 단층 구조로 설계됐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주17)

(사진) 미의회도서관이 발행한 <국가연구: 캄보디아>(1986년)의 표지에 그려진 바이욘 사원 관세음보살상의 필사도.
상부기단은 바이욘 사원의 유명한 "얼굴 탑들"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각 얼굴 탑들에는 2-4기의 거대한 얼굴상들이 조각되어 있다(3기가 새겨진 것이 가장 많다). 이러한 중심탑의 군상들과 더불어, 안쪽 회랑을 따라 입구 및 모서리들과 상부기단의 본당 위에는 보다 작은 탑들이 배치되어 있다. 글레이즈(Maurice Glaize)는 "둘러보는 곳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들이 그 수천 화신으로의 현존을 보이며 주재하고 있다고 적었다.(주18)
이러한 노력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증축되거나 마멸로 인해 소실되는 환경적 악조건을 무릅쓰면서도, 탑들 및 얼굴상의 갯수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 한 일부 시도가 있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원래 49기의 탑들이 있었는데 현재 37만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주3) 얼굴상의 수는 거의 200기이다. 하지만 일부는 부분만 남아 있어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주17) Coedès, p.127.
(주18) Glaize, p.89. |
2.4. 상부기단 및 성단(聖壇)
안쪽 회랑과 마찬가지로, 중심탑도 원래는 십자형이었지만 후대에 원형으로 보완되었다. 이 탑은 지상에서 43 m 높이를 갖고 있다. 최초 창건 당시 이곳에 봉안된 본존은 3.6 m 높이의 불상으로, 중심탑의 심장인 성단 안에 모셔져 있었다. 이 불상은 명상에 든 모습으로 뱀의 왕 무짤린다(Mucalinda)가 너울거리는 머리 장식의 모습으로 지키고 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힌두교 복원주의자 자야와르만 8세의 치세에 이 불상은 철거되어 파괴되었다. 1933년 복원과정에서 이 불상의 조각들이 한 우물 바닥에서 발견됐고, 조각들을 회수하여 현재는 앙코르 지역의 한 작은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주19)
(주19) Freeman and Jacques, p.83; Glaize, p.87. |
참고문헌
- Coedès, George. Pour mieux comprendre Angkor (Hanoi: Imprimerie D'Extrême-Orient, 1943), esp. Ch.6, "Le mystère du Bayon," pp.119-148.
- Freeman, Michael and Jacques, Claude. Ancient Angkor. River Books, 1999, pp.78 ff. ISBN 0-8348-0426-3.
- Glaize, Maurice. The Monuments of the Angkor Group. Translated into English from the French, revised 1993 and published online at theangkorguide.com. (The link takes you directly to the section of this work having to do with Angkor Thom and the Bayon.)
외부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