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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72살인 조안 바에즈!
우리에겐 River in the pines, Amazing Grace, Ace of sorrow, House of the rising sun등의 수많은 인기곡을
부른 Folksong계의 대모......
그녀가 자서전을 발표햇다네요. 함 읽어보시길!!
책소개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를 잇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비폭력 저항의 기수인 존 바에즈의 자서전. 이 책은 우리가 이제껏 들어 온 존 바에즈의 노래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그녀만의 솔직한 내면 고백을 들을 수 있다.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사회정치적 활동은 물론, 한 여성으로서 삶과 사랑, 결혼, 가족, 모성에 관해서도 바에즈는 결코 꾸밈이 없다.
포크뮤직은 의식과 관계하는 음악이다. 누군가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포크뮤직이라 말할 수 없다. 1960년대의 포크 뮤직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남과 여’ 한 쌍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포크의 콤비로서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노래란 선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가사 또한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것도 두 사람의 공이었다. 남자는 밥 딜런이요, 여자는 존 바에즈였다. 존 바에즈는 포크 프로테스트 시대에 딜런의 여성 대응자(對應者)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처럼 딜런과 ‘평등’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딜런보다 더 오래 간직했다. 딜런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정치성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바에즈는 끝까지 시대의 변화에 타협하지 않고 현실적 테마의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노선조정 이후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딜런과 달리 그의 여성 파트너는 레코드 회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등 제도권의 박해공작에 시달렸다. 또 하나 바에즈가 ‘비교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포크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바에즈가 딜런보다 시간상 한 발 앞섰다는 사실이다. 딜런이 1959년 미네소타 대학 주변의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있을 때 바에즈는 제1회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 1만 3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 딜런이 첫 앨범을 발표하여 신고식을 마친 1962년에 바에즈는 이미 스타로 떠올라 < 타임 >지의 커버스토리에까지 등장했다. 따라서 ‘포크 대중화의 선두주자’는 딜런이 아니라 엄연히 존 바에즈였다. 이를테면 그가 딜런의 선배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를 ‘딜런의 여성 대응자’라 일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딜런 우월주의(?) 혹은 습관적인 성차별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존 바에즈는 실로 약자(弱者)를 위한 여교사와 같았다. 그는 늘 힘없는 사람과 상처받는 사람 편에 서서 노래했다. 세상살이에 뒤쳐지고 외롭고 망가진 사람들을 위해 통기타를 울렸고 미국내의 약자 가운데 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이주민의 정서를 노래에 자주 실었다. 모든 ‘어둠의 자식들’이 존 바에즈의 진정한 벗이었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존 바에즈의 올타임 리퀘스트들인 ‘세상의 가련한 길손’, ‘도나도나’, ‘솔밭 사이...(하략)
서문
프롤로그
1장 유년기의 왕국
1. 내 기억의 눈
2장 60년대의 문턱에서
1. 사랑을 채우다
2. 청바지와 목걸이
3. 지난날의 바람들
3장 지평선을 보여 주세요
1. 멤피스의 검은 천사
2. 자니가 마침내 총을 가졌네
3. 한동안 꿈을 꾸다
4. 우드스톡 페스티벌
5. 난 그냥 포크 가수가 아니야
4장 지금 이곳은 얼마나 가혹한가
1. 국제사면위원회
2. 국회의사당을 에워싸다
3. 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니?
4. 인생이여, 고마워요!
5장 마침내 자유!
1. 밥 딜런과 두 여인
2. 낯선 이에게 부르는 사랑 노래
3. 노 노스 모베란
4. 지구의 지친 어머니들
6장 머릿속에서 음악이 멈췄다
1. 박해받는 자들에게 축복을
2. 제 콘서트에 오시겠어요?
3. 변화의 물결 속으로(1975~1979)
7장 중년으로 돌진하며
1. 시간의 장막들
2. 지금 나는 프랑스에 있다
3. 사랑해, 게이브
4. 바웬사에게 바치는 노래
5. 위 아 더 월드
6. 걸프의 바람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 존 바에즈
자유와 평화, 인권을 노래한 포크 음악의 마돈나!
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며,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 기록.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공민권 확대를 위한 워싱턴대행진. 밥 딜런의 연인. 베트남전쟁 당시 하노이 방문. 국제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 기금 마련 활동. 국제인권기구 후마니타스 설립. 프랑코, 피노체트와 같은 독재자의 지배 아래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앨범 녹음. 바스티유데이(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 수상.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의 제전’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참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라이브 에이드’의 미국 측 첫 공연 주자…….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를 잇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비폭력 저항의 기수인 존 바에즈에게 따라다니는 수식들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그녀는, 지난해 11월 뉴욕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때도 주코티 공원에서 통기타 하나를 들고 나와 열창을 했다.
《존 바에즈 자서전: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다》는 우리가 이제껏 들어 온 존 바에즈의 노래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그녀만의 솔직한 내면 고백을 들을 수 있다.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사회정치적 활동은 물론, 한 여성으로서 삶과 사랑, 결혼, 가족, 모성에 관해서도 바에즈는 결코 꾸밈이 없다. 자신의 성공과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도 숨기는 법이 없으며, 실패와 혼란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솔직하다. 이러한 솔직함이야말로 스스로 최선을 다해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용기일 것이고, 이 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는 요인일 테다.
“나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재능에 관해서라면 나는 굳이 겸손을 떨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내가 만들어 낸 것도, 내가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동도 아닌, 내게 그냥 주어진 재능이기 때문이다.” (55쪽)
순수가 추락하는 시대, 그 마지막 생존자 존 바에즈
존 바에즈가 한창 활동하던 60년대는 사회정치적으로도 격변의 시대였다. 베트남전쟁으로 무고한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잃고, 젊은이들이 숭배해 마지않은 영웅 체 게바라는 쿠바 정부군에게 총살을 당했으며, 1년 뒤 마틴 루터 킹 목사 또한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젊은이들은 서구 근대 문명이 만들어 낸 모든 권위에 저항했다. 그들은 기존 사회 체제들, 근대적 합리주의와 그것이 낳은 인간 소외를 파시즘과 동일하다고 보고, 기성세대의 권위를 깡그리 짓밟고자 했다. 미국에서 청년들은 징집영장을 공공연히 불태웠고, 프랑스에서는 68년 5월혁명을 도화선으로 관습과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다. 젊은이들은 모든 금기들에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하고자 했다.
포크 음악은 바로 이러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으로서 비판과 저항,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순수의 시대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존 바에즈와 더불어 밥 딜런은 그 선두의 자리에서 포크 정신과 희망의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호소해 나갔다.
하지만 진보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60년대가 끝나자 오히려 세상은 잠잠해졌다. 록의 혁명성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고, 포크의 순수를 믿은 시대는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하고 그 명맥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밥 딜런 역시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짊어졌으며, ‘우리’의 시대에서 ‘나’라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런 시기에도 결코 음악적 내용을 바꾸지 않았고(나중에는 형식면에서 일부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하지도 않았다. 바에즈의 음악은 당시 ‘연예계’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멀었을지언정, 이후로도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베트남이든, 북아앨랜드든, 튀니지든, 아르헨티나든, 레바논이든 가리지 않고 노래했고, 말뿐인 지성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노랫말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시대와 아픔을 함께하는 음악이야말로 존 바에즈의 노래가 영혼을 움직이는 이유 아니겠는가.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렇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이 시대가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인류가 서로 죽이는 일을 막을 수 있으며,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내가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 될 거예요. 내가 세상에 나서서 무언가 하길 원한다면, 그건 바로 내 선택입니다.” ― 앤서니 드커티스(음악평론가)와 인터뷰 중에서
비폭력 저항운동과 마틴 루터 킹
인종차별에 맞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비폭력 저항 대행진을 하고 있는 존 바에즈(1966년 미시시피 그레나다).
존 바에즈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느 퀘이커교 모임에서였다. 그날 킹은 연사로 초대되어 남부에서 일어난 버스 탑승 거부 운동과 자유를 향한 행진, 비폭력 혁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킹이 연설을 마칠 때쯤 바에즈는 그때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마음속 신념들이 앞으로는 신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聖人)으로 킹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1963년 3월, 존 바에즈는 킹 목사와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들의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거리 행진에 참여해, 25만 민중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노래했다. 이 행진에는 바에즈 말고도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해리 벨라폰테 같은 의식 있는 뮤지션들도 함께했다.
그 뒤로도 수십 년에 걸쳐 바에즈는 사회적 소수자로 대표되는 사람들 편에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는 그녀를 두고 순진한 좌파 앞잡이의 전형이라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사실 바에즈는 어떤 정권이든 어떤 정치적 유형이든 문명화된 윤리 규약에 부응하지 못하는 당파에게는 가시와도 같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그리하여 존 바에즈라는 이름은 마틴 루터 킹이나 마하트마 간디와 마찬가지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이상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니치빌리지의 연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
19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에서 밥 딜런을 처음 만났고, 이후 둘은 포크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연인 관계가 되어 전미 콘서트 투어를 함께했다.
바에즈와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인종차별, 흑인 공민권 투쟁, 베트남전쟁, 세대 간 갈등 등)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정과 양심에 귀 기울이고자 한 젊은이들의 대변인이 되었다.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많은 교감을 나누면서, 딜런은 바에즈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바에즈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뉴스위크》는 “포크송의 여왕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을 왕자로 책봉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바에즈의 노래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은 누구나 알 만한 것들이고, 이들의 관계는 공공연한 사실로 자리매김되어 있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바에즈가 너무도 솔직히 기록한 이 책에는 딜런과의 관계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이 두 거장의 개인적 삶과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서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밥에게 어째서 한 번도 내게 사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옛날 우리가 결혼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은지를 물었다. 그는 말을 잘 지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했다. “아마 잘 안 됐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너무 정치적이고 당신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당황한 그는 손바닥을 바 위에 올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내 질문은 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398쪽)
박해받는 이들에게 보내는 노래
존 바에즈가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반전 평화운동가로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친 데에는 집안 환경과 아버지의 영향이 아주 없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 출신의 핵물리학자인 아버지는 여러 연구소와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에 이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또한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바에즈는 어렸을 때부터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처럼 존 바에즈는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풍만한 가슴에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여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긴 생머리와 가무잡잡한 피부, 무대 위에서 맨발로 노래하는 모습은 오히려 기존의 ‘연예계’의 스타들로부터 그녀를 구분해 주는 요소가 되었으며, 미국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바에즈는 부인할 수 없는 재능 말고도 포크 음악과 정치 운동으로 대중을 열광시키고 도발시킨 새로운 종류의 섹스 심벌이 된 것이다.
존 바에즈의 삶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일이 아닐까 싶다. 1972년이 끝나 갈 무렵 바에즈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13일간 하노이를 방문하여, 11일 동안 이른바 ‘크리스마스 폭격’이라고 일컫는, 미국의 군대가 그곳을 생지옥으로 만들고, 그들의 마을을 태우고, 그곳 아이들을 네이팜폭탄으로 공격하는 등 수많은 잔학 행위들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물론 그녀의 분노는 목격으로 그치지 않고, 《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니?》(Where Are You, My Son?)를 발표해 미국 전역에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1974년에는 칠레에서 발생한 쿠테타에 대한 반발로, 피노체트 치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에스파냐어 앨범 《인생이여, 고마워요!》(Gracias a la Vida!)를 발표해 에스파냐어권 국가의 민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아래 있는 에스파냐를 방문해 텔레비전 생방송 중 40여 년 동안 금지곡이었던 〈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을 불렀으며, 모스크바의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와 폴란드 최초의 연대자유노조 의장인 레흐 바웬사를 위해서도 노래했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을 다룬 〈사코와 반제티〉 영화음악을 엔리오 모리코네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노래는 오직 ‘무대’에만 머물지 않고 언제 어디든 박해받는 자들과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