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에는 아름다운 전각과 부도탑비가 있는 천년고찰 쌍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대찰이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고, 극락전과 대웅전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1978년 명부전의 재건 등 옛 영화를 꿈꾸던 중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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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극락전 앞에 호법신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두 그루의 단풍나무. 1984년 화재당시 온몸으로 불길을 막아 극락전을 지킨 불심깊은 나무다. |
1986년 대웅전이 복원되고 해탈문, 요사채, 종각이 건립되었고 1997년에는 철감선사탑 탐방로 정비와 육화당 신축공사가 있었다. 사찰 경내에는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보물 제163호인 쌍봉사 대웅전, 보물 제170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浮屠)로, 그 시대의 부도 중 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 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철감선사탑비는 귀부(龜趺)와 이수(촬首)만 남은 무신비(無身碑)이다.
천년고찰 쌍봉사에는 여러 가지 유명한 보물들이 즐비하지만, 극락전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영험담을 가지고 있는 전각이다.
극락전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 으로 단아한 다포계 양식이다. 잡석으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축대 위에 낮은 외벌대 기단을 놓고, 커다란 덤벙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끼워 넣고 평방을 올린 다음 공포를 배치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 이출목으로 공간포를 기둥 사이마다 1좌씩 배치시켰다. 설첨자 부분에는 연봉과 봉두를 깎아 장식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문은 2분합 띠살문이다. 처마는 앞면은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이며, 양 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가구(架構) 구조는 평5량으로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종보를 얹은 다음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친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였다. 1978, 1982, 1991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극락전은 서방극락 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흔히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불리는데 대웅전, 대적광전과 함께 3대 불전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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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소실된 이후 원형대로 복원한 쌍봉사 삼층목탑 대웅전. |
그런데, 이 극락전은 사실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되었을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대웅전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어 불길이 옮겨 붙는 것이 시간문제였을 즈음, 온 몸을 던져 그 불길을 막아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극락전 앞의 두 그루 단풍나무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목조건물이라고는 삼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과 극락전 두 채뿐이었는데, 불자들의 실수로 촛불이 넘어져 전소된 대웅전과 함께 극락전마저 불타 버렸다면, 오늘날의 쌍봉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급박한 사정을 알았던지, 무섭게 밀어닥치는 화마를 온몸으로 막아선 두 그루 단풍나무는 아마타 부처님을 지킨 호법신장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후 이 단풍나무를 불심이 깊은 나무로 여겨 소중히 여겼다.
지금도 쌍봉사에 가면 두 그루 단풍나무를 볼 수 있다. 25년 전 화마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화마와 싸우며 불탄 가지는 사라졌지만, 나머지 가지들이 살아남아 가을이면 짙은 단풍을 선보인다. 당시 불기운의 여운 때문인지, 가을이면 타오르는 듯한 빛깔을 자랑한다. 곳곳에 보수를 하고, 정성껏 단풍나무를 돌보고 있다.
10여년 전 쌍봉사 옆에 이불재를 짓고 사는 불교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이 단풍나무에 관한 글을 지어 단풍나무 앞에 설치해 놓았다. 사실 정찬주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나무의 아름다운 영험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이 단풍나무가 흔한 단풍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호법신장임을 안 불자들과 관람객들은 단풍나무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고는 자기도 모르게 단풍나무에 합장을 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극락전을 지켜준 고마움에 감사를 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전각 앞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조차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
아미타 부처님과 극락전을 화마로부터 지켜준 쌍봉사의 두 그루 단풍나무, 이 나무야 말로 쌍봉사가 화재로 전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나무가 되어 쌍봉사로 온 불보살들이 보여준 가피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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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살고 있는 이불재에서 바라본 쌍봉사 전경. |
*쌍봉사는?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다. 쌍봉사는 예삿절이 아니다. 멀게는 사자산문을 개창한 철감선사의 법맥이 이어지고 있고, 더 멀게는 조주, 남전의 끽다의 선맥이 철감을 통해 이 땅에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 스님의 부도비에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 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839년 이전에 이미 쌍봉사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혜철의 선맥을 이은 징효는 강원도 영월 흥녕사 에서 사자산문을 개창 하였다. 곧 철감선사는 사자산문의 개조가 된 것이다. 철감선사의 종풍은 널리 펴져 경문왕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선사가 입적하자 철감이란 시호를 내리고 부도탑명을 징소라 내렸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道號)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그 후 고려 시대인 1031년(문종35) 혜조국사(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6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1667년(현종8)·1724년(경종4)에 계속 중수하였다. 1950년 6.25를 만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