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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사랑방
서정의 영토 안에 들어온 자연
-素木 김규련 선생님과의 만남
대담 : 홍억선(본지 주간)
기록 : 강여울(본지 편집 간사)
사진 : 임정희(수필사랑문학회 회원)
문단의 원로 선생님을 뵙는 일에는 언제나 적잖은 긴장감이 따른다. 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행은 그린맨션 303동 606호 앞에서 아파트 번지가 새 울음처럼 율동적이라며 한참 너스레를 떨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사실 이날은 가벼운 마음을 가지기로 했었다. ‘원로와의 대화’라는 탐방 원고를 쓰면서 가까이 계시는 선생님 댁을 불쑥 한두 시간 다녀온다는 것은 가지런한 처신이 요구되는 수필문단에서 큰 결례가 된다고 생각했기에 우선 인사를 겸하여 몇 가지 자료를 확인하고, 따로 날을 잡아 산이든 바다든 잠시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미리 선생님께 여쭈어 놓은 터였다.
현관 앞에서 눈길을 잡은 것은 운동화 옆에 서 있는 지팡이였다. 선생님의 작품 속에 나오는 “지팡이를 짚고 지구 한 모서리를 걷고 있는 자화상이 눈앞에 일렁인다”는 그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기름칠로 매끈하게 단장한 채 주인의 분부를 기다리는 시자(侍者)처럼 다소곳했다.
아파트는 넓지 않았다. 그러나 그지없이 편안한 노부부의 모습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넉넉해 보였다. 실내를 둘러보는 일행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셨던지 사모님께서는 두 늙은이만 사는 집이라 누추하다며 수줍어하셨다.
본동, 그리고 검단동
응접실 가운데 앉은 작은 탁자 위에는 사전과 안경, 수첩, 원고지가 놓여 있어 집필 중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방문 일정을 의논 드렸을 때, 쓰고 있는 원고가 남아 며칠 뒤로 물려야겠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 많이는 아니고 틈틈이 써, 날마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청탁을 받은 곳은 많은데 다 감당을 못해, 쓰고 싶으면 쓰고, 막히면 그만두고, 그래도 한 달에 한두 편 정도는 꼭 쓰는 편이야.
― 요즘은 멀리 다니는 것도 힘이 들어. 그래서 매일 아침 아파트 정원을 걷지. 이 아파트가 좋은 점은 큰 정원이 있다는 거야. 흙을 밟다 보면 돌도 밟고, 나뭇잎도 밟고, 과거의 추억도 밟고, 어쩌면 위선일지 모르는 덮개, 가면 같은 것도 밟고, 욕심도 밟게 되지. 나는 욕심이 전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다만 이 욕심을 잘 다독여야지. 욕심의 불이 오관에 번지면 위험하거든. 그러니 불타 오르지 않도록 토닥토닥 잘 밟아야지. 그렇게 흙을 밟으면서 많은 것들을 함께 밟는 거야.
걸으면서 나무들을 보면 사람 같아 재미있어. 잎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면 처절하고 근엄한 것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이판승(理判僧) 같아. 또, 늘 푸른 히말라야시더는 무성한 잎으로 나목을 감싸 주는 것이 마치 사판승(事判僧) 같아. 나무들이 서로 조화와 통합을 이루는 것을 보면 자연의 묘미가 느껴져. 그렇게 요즘 산책을 하며 쓴 것이 막 탈고한 저 「老骨의 소일」이야.
― 컨디션이 좋은 날은 자주 623번 버스를 타고 검단동 종점까지 가곤 해. 가다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이지. 버스가 서문시장 앞을 지나가거든. 온갖 물건들을 사고 파는 시장을 보면서 삶의 생동감을 느껴. 요즘 사고 팔지 않는 것이 없잖아. 양심까지도 사고 파는 그것들조차도 이젠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검단동 종점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우선 허옇게 누워 있는 금호강을 만나지. 멀리 팔공산 능선도 보이고, 땅과 하늘이 맞닿은 자연의 풍경이 이 늙은이를 아직도 설레게 해. 자연이 주는 묵언(默言)을 한마디 읽을 수 없을지라도 겨울 금호강의 정취에 흠뻑 빠져 보는 것은 더없이 좋아.
― 어제도 623번 버스를 타고 검단동 금호강에 갔었어. 남쪽으로 가지 못한 왜가리 서너 마리가 파란 물위에 떠 있다가 힘차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지. 무리들은 남쪽으로 다들 떠났는데 오염된 물고기를 먹어서 날지 못하고 남은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것이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보다 기쁘고, 나의 성공보다 남의 패배가 기분 좋은 이 아픈 세상에서 왜가리의 비상을 보는 순간 다 아름다워지는 거야.
내가 죽어 봤었거든.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다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 십오 분 만에 깨어났는데 말야. 저승도 없고, 삼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산도 바다도 없는 그냥 무(無)야.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블랙홀 앞 컴컴한 안개 속을 나 혼자 서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사람이 그리운 거야. 생각하니 감동은 못하면서 흥분은 잘하고, 불평은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아옹다옹 다투며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천당인 것 같애.
‘강마을’ 이야기
선생님은 응접실 자리가 불편하셨던지 서재로 자릴 옮기자고 하셨다. 서재는 서너 명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빼고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책장에 꽂히지 못한 책들은 빈 공간에 층층이 몸을 포개고 있었고, 한 쪽에는 피그말리온 여인상과 도자기 몇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여덟 폭 병풍이었다. 병풍에는 작품 「강마을」 전문이 단정한 서체로 적혀 있었다.
― 「강마을」이 선생님 등단작이지요? 이미지가 선명해서 저도 오래 기억이 남습니만.
― 맞아. 『수필문학』으로 등단을 했던 작품이지.
― 누가 꽤 정성을 들여 썼군요.
― 전라도에 사는 한국국어학회 회원 이강빈 씨가 저렇게 써 보냈어. 그걸 내가 병풍으로 만들었지. 그분은 내 작품에 감동을 받아서라고 했지만 나도 그분에게 얼마나 감동을 했던지. 이제 우리 집 가보가 되었어.
― 수필을 쓰게 된 계기? 그러니까, 대구여중에 근무하던 때였지. 학교에서 교지를 만든다고 글을 내라는 거야. 뭘 쓸까 하다가 지나간 이야기를 썼지. 영주중학교에 있을 때 잘 가던 포장마차가 있었거든. 주인이 혼자 사는 남자였어. 어느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취해서 그 사람의 방까지 따라 들어가게 되었어. 방에 바이올린이 있더라구. 그래서 속으로 전직이 약장수가 아닌가 생각했지. 호기심이 생겨 자꾸만 연주를 해 보라고 졸랐어. 마지못해 연주를 하는데 정말 기가 막힌 거야. 「솔베이지의 노래」와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하는데 내가 그냥 울지 않았겠어.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평양음악대학 교수였었어. 전쟁 때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혼자 살아 남아 생을 포기하다시피 살고 있었던 거야. 그날 밤 나는 감동해서 울고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서러워서 울고, 둘이서 그렇게 울었던 겨울밤을 썼는데 선생님들이 잘 썼다며 수필을 해 보라고 권했지. 그것이 계기였던 것 같아. 그래서 1968년에 「강마을」로 등단을 하고 영남수필문학회에 입회했지.
국보 그리고 흑백 사진 석 장
마침, 사모님께서 다과상을 가져 오셨다. 생활한복을 입으신 사모님은 곱고 단아했다. 다과상을 내려놓고 그냥 나가려고 하시는 걸 사진을 찍던 임정희가 기어이 소매를 잡았다.
― 그래, 당신도 앉아요. 저 사람이 지금은 늙어서 그렇지 젊었을 땐 퍽 고마웠어. 미션 스쿨인 신명여고를 다녔으니까 개화된 엘리트 집안의 귀한 딸이었지. 저 사람이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나도 괜찮았나 봐. (사모님을 쳐다보며 웃으심)
― 중매로 만났어. 나하고 살면서 고생 참 많이 했지. 열여섯 번이었던가. 그렇게 이사를 다니면서 짐도 혼자 싸고, 새집 정리도 혼자 했어. 나는 무심하게 몸만 나왔다 들어가고 그랬지. 국보야. 암 국보고말고. 요즘 유행하는 농담이 있지. 아내를 20대에는 애완동물, 30대에는 기호식품, 40대는 가구, 50대에는 가보, 60대는 지방문화재, 70대는 국보라고, 80을 바라보고 있으니 국보 중에서도 으뜸이지. 그런데 너무 무리하게 써서 고장이 났나 봐. 여기저기 아파서 걱정이야.
― 고장이 날 때도 됐지요. 그때는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살았어요. 삼일 동안 돈 천이 없을 때가 있었다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선생님들 생활이 힘들잖아요. 공무원 월급이 꼭 쓸 만큼만 주니.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손사래를 치시면서 한 일이 없다고 하셨지만, 말씀 끝에 듣게 된 자녀들은 다들 입신(立身)을 이루었다. 일남삼녀 중에 맏사위는 (주)삼보물산 대표이사, 둘째 사위는 포항공대 교수, 셋째 사위는 과천시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막내인 아들은 경영학박사로 포항대 교수로 재직중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외손녀가 서울대 법대에 다니고 있다고 자랑을 감추지 못하셨다.
교육자와 작가의 삶을 함께 일구어 오신 선생님의 뒤에는 사모님의 크신 내조가 있었을 것이다. 사모님께서 나가시고 혹 마음에 감추어 둔 연정은 없으셨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 에이, 없어. (잠시 생각에 잠기심)
요즘 정서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는지 몰라. 왜정 때 내가 부산 대신동에 살았는데 경남중학교(6년제)까지 통학을 했거든. 통학하는 전철 속에 ‘하야시 아찌꼬’라는 피부가 희고 예쁜 여학생이 있었어. 부산여중에 다녔지. 처음 한동안 사귀고 싶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몇 번이나 연애편지를 썼다가 찢어 버리곤 했었지. 그런데 날마다 만나고 보니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 나중에는 대신동 뒷산에 둘이 올라가서 모찌꼬 나눠 먹고 이야기도 하곤 했었어. 그런데 8·15 해방이 된 거야. 온 국민이 기뻐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말야. 나는 아찌꼬와의 이별이 걱정됐지. 그 여학생 집을 어찌어찌 찾아갔는데 떠나고 없는 거야. 그때 일본인들이 무더기로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거든. 그게 끝이야. 그리고 없어.
― 「잃어버린 사진 한 장」? 그건 군위중학교 있을 때 이야기야. 1950년 3월에 첫 발령을 받고 군위중학교에 부임을 하니까 참한 여학생이 하나 보였어. 인물도 빼어났고, 자태도 고왔지. 아무리 교사라고 해도 남달리 관심이 가는 학생이 있어.
사실, 내 마음속 비밀의 방에는 석 장의 여성 사진이 있었지, 물론 아내는 빼고. 하나는 어머니 사진, 또 하나는 아찌꼬 사진, 마지막 하나가 그 제자의 사진이었지. 발령 난 지 석 달 만에 전쟁이 나서 뿔뿔이 흩어지고 나도 종훈 문관으로 입대했어.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 여학생이 북쪽 여성동맹에 가입해 부역한 죄로 구속이 되어 있었어. 그때 내가 전교생과 교직원 모두를 앞세워 구명 운동을 했던 거야. 석방이 되자 그 곳을 떠나버려 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그때의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왔어. 누구누구가 오겠다고 하는데 뜻밖에도 그 여학생의 이름이 들어 있는 거야. 잔뜩 기대를 했지. 내 맘속의 사진에는 예쁘고 생기발랄한 여학생이었는데 말이야. 만나긴 했는데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로 만나니 그만 사진 한 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거야.
산 따라 물 따라
― 학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교직생활에 대해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여정에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자리였지 않습니까? 문교부에서 시행한 교원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셔서 발령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게 되기에는 건강 문제도 있었던 것 같고.
― 고등학교 시절에 폐결핵으로 무척 고생을 했어. 학교의 배려로 겨우 졸업을 했을 정도였지.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요양차 하동의 쌍계사라는 절에 들어갔었어. 그 곳 칠불암에서 여여(如如) 스님을 만났지. 말하자면 그분이 나의 독선생이었어.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오신 분인데 반야심경이며, 금강경이며 불교법문과 함께 학과수업도 모두 그분에게 배웠어. 행자 노릇을 하며 공부를 하고, 건강도 찾고, 교원검정고시에 합격도 했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여여(如如) 스님이야.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이지.
― 교사 생활은 아까 말한 것처럼 1950년 3월에 군위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지. 마침 영어 선생 자리가 얼마 동안 비어 있던 터라 환영식이 대단했어. 나이도 스물셋이었잖아. 정인(情人) 같은 여학생, 아우 같은 남학생, 전교생이 다 한 식구 같았던 그 곳에서 교사로서 매력에 푹 빠졌었지. 그런데 석 달만에 6·25가 터진 거야. 난리가 났지. 책만 가지고 피난을 갔는데 십리도 못 가서 다 버렸어. 그리고 2군사령부에 문관으로 입대를 했지. 그때 남학생들이 대부분 훈련소로 갔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어.
선생님께서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고, 일행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첫 발령지의 첫 제자들을 석 달 만에 잃은 감정이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되살아났음이리라. 지금도 현충일이 되면 반야심경을 틀어 놓고 향을 사르며 제자들을 위한 묵상을 잊지 않는다고 하셨다.
― 대구여중에 있을 때 영어연습실을 만들었어. 전국에서 처음이었지. 영어로 각본을 쓰고 연극을 했어. 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연구학교로 지정이 된 거야. 아마 그 공로가 컸을 거야. 서른여섯 살에 연구사가 되었고 마흔둘에 최연소 교감으로 평리중학교에 부임을 했지.
첫 교장 발령지는 상주 중모종고였는데 그 곳은 완전 잉카제국이더라구. 고산준령 백화산에는 겨울 내내 눈이 오는 거야. 반야사 아래로 흐르는 물이 너무나 깨끗해서 손을 담그기가 죄송할 정도였어. 돌아보면 내 인생은 흘러 다닌 곳마다 자연의 품에 안기는 행운이 따랐지. 물론 작품 쓰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테고.
그 곳에서 2년을 있다가 영양교육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역시 최연소 교육장이어서 무슨 특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곤 했지. 하긴 당시 이성조 교육감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애.
― 그 무렵에 「거룩한 본능」을 쓰셨지요?
― 응, 일월산이 영양에 있잖아. 늘 느끼지만 자연에게 정을 주면 정이 더 묻어서 되돌아와. 「거룩한 본능」은 사석에서 그 마을의 이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긴 거지. 『수필문학』에 발표를 했더니 ‘동아일보’에 기사로 났어. 신문 하단에 쭉 깔렸는데 감동이 넘치는 글이라고 격찬이었지. 그리고 나서 정진권 씨로부터 연락이 왔어. 수필가 정진권 씨 알지? 그때 정진권 씨가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었어. 작품을 교과서에 싣겠다는 거야. 기쁘더라고. 작가로서 자신의 글이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이 영광이지.
― 고령에도 있었지. 고령, 좋잖아. 고령은 대가야의 고토야. 고분에 올라가면 말이야 천 년 세월이 한 줄기 바람으로 몸을 스치고 지나가지. 이 때 첫 작품집 『강마을』을 엮었지.
― 선생님의 작품 속에는 학산과 금오산에 대한 언급이 각별한데 아무래도 포항과 구미에서의 감회가 깊으신 탓이겠지요?
― 그렇지. 땀을 많이 흘린 곳이지. 포항에서는 포항고와 포항여고 교장을, 구미에서는 경북교원연수원 초대 원장을 지냈지.
포항고등학교는 경북의 일 번지 고등학교였어. 포항고등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하면서 신임 교장을 물색하다가 나를 보낸 거야. 선생님과 학생의 열성이 대단했지. 아마 포철고등학교가 옆에 있어서 더 그랬을 거야. 그때는 서울대에 몇 명 보냈느냐로 학교의 등급을 매겼거든. 자율학습, 정규학습, 야간학습, 심야학습, 전천후 학습이란 이름을 붙여 가며 닦달을 했지. 집사람도 절에 가서 학생들을 위해 백일 기도를 했다니까.
그 덕인지 그 해 서울대에 서른세 명이 합격을 했어. 지방에서 최다 합격생을 냈던 거지. 학생은 물론 학부형까지도 자부심이 대단했고, 학교 주변의 땅값까지 올랐어.
― 포항고등에서 자주 전교생을 모아 놓고 훈화를 했었는데 듣기 괜찮았었나 봐. 경남중학교 초대 교장이셨던 안용백 선생의 짧고 힘있는 훈화를 본받으려고 애를 썼지. 평생 동안 가슴에 담아 줄 훈화를 하기 위해 많은 연설문들을 모았어. 유명한 연설가들의 말은 길지 않으면서도 잊을 수 없는 자극을 주거든. 세기의 연설가 처칠은 나라가 곤경에 빠졌을 때 대학 연단에서 “Everybody, don’t give up”이라는 한마디 연설로 국민을 흥분시켰다고 하잖아. 그때의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도 잊지 못해 찾아와 훈화가 고마웠다고 인사를 해. 교육의 보람은 바로 이런 것인 것 같애.
― 그런데 말이야. 그 시절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 정년을 앞두고 포항여고에 몇 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겨우 교장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아. 교장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를 배웠다고 할까. 아침 교직원 조회 때 훈화 대신 노래를 불렀어. 팔십여 명의 선생님들이 다 함께 입을 모아 합창하는 장면을 생각해 봐. 아침이슬, 동심초, 선구자를 신나게 불러댔지. 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일도 잘되더라구, 노래만 불러도 일심동체가 되어 학교가 잘 돌아가는데 그전에는 교장이 몸으로 뛰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몰아붙였단 말이야. 정년 퇴임을 앞두고서야 ‘불치불란(不治不亂)’, ‘불언이화(不言而和)’를 알았으니.
― 참 대단한 여정이십니다. 노고도 많으셨지만 화려함도 있었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복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교유(交遊)하시던 분도 많으셨겠지요? 요즘도 자주 만나시는 친구나 모임을 소개해 주십시오.
― 친구들이야 많지. 그 중에서도 포항의 춘강 빈남수를 잊을 수 없어. 지난해 저 세상으로 갔지만 그 사람과 포항을 누빌 때가 좋았어. 얼마 전에 추도문 「도솔천에 띄우는 편지」를 써서 형산문학회에 보냈지.
― 모임으로는 ‘구망회(九望會)’라고 있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으신지 잠시 미소를 지으셨다) 아홉 명이 아흔까지 살자고 우스개도 하는데 회가(會歌)가 「차표 한 장」이야. 팔공식당이나 진주식당에서 모여 밥 한 그릇 먹고 흥이 나면 풀하우스로 가지. 만나면 애들로 돌아가서 더러 야한 소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재미가 있어. 망구거든. 아흔을 바라보는. (마침내 흐흐흐 하고 웃으셨다). 다들 교육자야. 권오창(전 경주고등학교 교장), 권영대(전 포항시 교육장), 이종혁(전 안동시 교육달), 권탁(전 경북과학고등 교장), 서보상(전 청도군 교육장), 김종희(전 화랑교육원장), 권윤금(전 영천시 교육장), 김주현(전 경북교육감), 그리고 나. 아홉 명 맞지? 회가가 「차표 한 장」이라니까. (또 웃으심) 이 모임이 제일 재밌어.
선생님께서는 ‘구망회’를 소개하면서 크게 신명을 내셨다. 하지만 입이 마르신지 주스잔에 자주 손이 가셨다. 연세도 높으신데 무리하게 말씀을 하신 건 아닐까. 마무리를 염두에 두고 요즘 나가시는 곳이 있는지 여쭤 보았다.
― 많이는 아니고 몇 군데 강의를 하고 있어. 대구대 평생교육원, 운경 노인대학, 적십자병원 부설 노인대학 등에 나가고 있지. 이젠 강의하는 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는 것 같아. 두 시간 정도 스피치를 해도 쓰러질 것 같아.
선생님께서 쓰러질 것 같다는 두 시간이 어느새 지난 터라 가슴이 뜨끔했다, 너무 오래 선생님을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지만 다음 약속일을 확인하고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일이라 파계사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앞자리에 임정희가 타고 선생님께서는 강여울과 함께 뒷자리에 앉으셨다. 먼저 물꼬를 트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뒤로 들으며 오늘은 가만히 귀만 기울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필은 독백이다
맥문동 재배단지인 불로동을 지나면서 선생님께서는 맥문동 예찬론을 폈다.
― 맥문동이 불사초라고도 불리는데 얼마나 지혜로운지 말이야. 겨울에 혹한이 몰아치잖아. 그러면 잎들이 땅에 착 엎드려. 그러다 봄이면 일어나 잎을 세우지. 잎을 세워서는 꽃대를 밀어 올려. 그 꽃대에 가지색의 꽃이 피면 말이야 마치 로마 군단의 깃발을 세워 놓은 것 같애. 보랏빛 꽃이 피어서 색이 노랗게 변하면 온통 꿀벌들이 모여들지. 꿀벌들이 꿀을 따 가면 비취빛 열매가 달려. 이 비취색 열매가 찬바람이 불면 흑진주로 변해. 이렇게 일년 동안 죽지 않고 사는 게 맥문동이야.
― 애정이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아요. 남다른 시선이 아니면 그 변화를 알 수도 없구요. 저도 언젠가 아파트 잔디밭에서 토끼풀이 가득히 핀 것을 보았어요.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이었어요. 아파트 아래 기다란 정원에 핀 토끼풀들이 일제히 등불을 받쳐든 것처럼 환했어요. 그 뒤에는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빽빽하게 받쳐들고 있었구요. 그렇게 보는 이 없어도 자신들을 환하게 살아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나는 얼마나 나를 잘 살아내고 있는가 하면서요.
― 바로 그게 수필이야. 수필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독백이야. 더러 자기가 세상의 큰 스승인 것처럼 사람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려는 작가가 있는데 그것은 수필이 아니야. 그런 것은 논설이나, 논단, 칼럼이지. 이 독백도 나이에 따라서 달라져. 나는 말이야. 40대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적 독백, 50대에는 자신의 흠과 미숙함을 바라보는 자화상의 독백, 60대에는 욕심이나 번뇌를 씻는 세심(洗心) 작업에 대한 독백, 70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묵언(默言)을 듣고 잠언을 캐는 독백, 80을 바라보면서는 고별 분비를 하는 독백을 쓰게 되더라구. 수필은 이런 독백을 통하여 자기를 낮추고 다스리는 문학이야.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시키려는 것은 수필이 아니지.
선생님의 맥문동 이야기가 강여울의 토끼풀 이야기를 거쳐 수필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선생님께서는 운전자를 배려하고 계심이 틀림없었다. 지난 번 이런 저런 말씀을 여쭙겠다고 귀띔한 것을 기억하시고 당신께서 말머리를 잡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승용차도 말의 가락을 따라 느슨하게 파군재를 넘어갔다.
감성의 영토 안에 들어온 자연
선생님의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군을 이루고 있다. 소재면에서 역시 자연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그 다음엔 교단 수필, 그리고 소박한 삶의 현장에서 따 온 글들로 묶인다. 그런데 성격상으로는 대부분의 작품이 논리적, 철학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서정에 가까울 수 있는 소재들이 사색의 심연을 깊게 이루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김시헌, 정휘창 선생님의 평론에서도 짚었듯이 우선 생활 저변에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 그리고 문체면에서 적확한 한자어를 즐겨 사용하여 함축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사상의 부피를 보태지 않았을까.
― 나는 그런 것 같애. 젊어서는 감성적 수필, 그러니까 감성을 흔드는 「강마을」같은 글을 즐겨 썼고, 조금 지나선 나를 관조, 투사해 보고 돌아오는 반사의 자화상을 쓰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세심작업의 글을 쓰게 되더라구, 철이 든다고 할까. (소년처럼 웃으심) 그리고 내 스스로 가슴에 새기고 싶은 잠언 같은 것, 이제는 떠남을 준비하는 글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쓴 것이 내 수필들이야.
자연이나 사물을 마음으로 바라보면 의미가 부여되어 되돌아오는 거야. 나무를 보잖아.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나무지만 내 감성의 영토 안으로 불러들이면 나무가 살아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물을 심안으로 보는 거라 할 수 있을 거야.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고 찾아서 그것을 묘사하는 것 말이야. 그래서 자연을 소재로 한 글이 많을 거야.
교단 생활을 오래 했으니 교단수필을 쓰게 되기도 했지. 종교, 특히 불교적인 성향은 여여 스님 영향이 가장 크겠지. 그때 접한 법문들이 가슴에 많이 남아 있어. 젊었을 때는 파계사, 동화사, 비슬산 운흥사, 옥포 용연사에 자주 갔었는데.
수필을 평할 때 좋은 수필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을까 하는 임정희의 질문이 있었다.
― 그것은 사람의 연륜에 따라 다르고 취향에 따라 다르니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워. 사람에 따라 감성적인 것을 선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변적, 논리적인 지적 수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유머나 재치가 있는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 참여적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마디로 좋은 수필이 어떤 것이라 하기 어려워. 문화도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 가치관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잖아.
인생에는 3가지의 가치관이 있거든. 첫째는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으로 향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폴로적 인생관으로 근엄하고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셋째는 프로메테우스적 인생관인데 이것이 창조적 인생관인 거야. 이 창조적인 인생관이 과학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만큼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잖아.
왜, 이솝 우화 있잖아. 개미와 여치 이야기. 겨울이 되어서 춥고 배가 고픈 여치가 개미집을 찾아갔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여치가 문을 열고 들어가 봤더니 개미들이 과로로 다 죽어 있더래. (모두 웃음) 그래서 여치는 개미 덕분에 아주 잘 먹고 잘살았대. 마찬가지로 요즘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통합적 인생관, 퓨전 문화시대인 것 같애. 수필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연륜과 격에 맞아야 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작업으로 쓴 것이 좋은 수필이 아닐까 해.
선생님께서 수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인터넷과 영상문화가 발전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물며, 자기 자신도 감동하지 못하는 글을 누가 읽기나 하겠느냐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르면서 세상을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설득력이 있겠느냐고. 그러니 수필은 자기 독백이며, 수필을 많이 쓰는 것은 자기수양을 쌓는 것이라고 하셨다.
피그말리온 신념
― 옛날에 영남 선비 셋이서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다가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대. 세 사람 모두 그날 밤 꿈을 꾼 거야. 한 선비는 자신의 집 뜰에 핀 모란꽃잎이 지는 꿈을 꾸었어. 그래서 자신은 과거에 떨어질 거라며 낙담을 했지. 또 한 선비는 아내가 준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었으니 틀림없이 낙방일 거라 했어. 마지막 한 선비는 과거 합격자 명단이 붙은 남대문 방에 자신의 이름 대신 허수아비가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그도 이번 과거 시험은 헛일이 될 거라 했어. 셋이서 기왕 길을 떠났으니 되지는 않더라도 경험 삼아 시험이나 보자며 한양으로 갔었대. 수원재에서 한 도인이 세 선비를 보고 젊은 선비들이 어찌 그리 힘이 없냐고 묻더라는 거야. 세 선비의 꿈 이야기를 듣더니 도인은 무릎을 치며 기막힌 길몽이라고 했대. 꽃잎이 지니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지면 쨍그랑 소리가 나듯 이름이 쨍하고 빛날 수요, 허수아비 홀로 섰으니 오가는 사람들이 다 우러러볼 수니 틀림없이 세 사람 다 합격이라는 거야. 그래 어떻게 되었겠어. 세 사람 다 과거에 붙은 거야. 결국 도인의 말이 세 사람 모두에게 자신감을 준 거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이펙트라는 것이지. 그러니 무엇이든지 확신을 가지고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신념이 중요하다는 거야.
모든 이야기들이 일체유심조로 가는 사이에 차는 파계사에 닿았다. 법앙이 아니라 나무나 보고 가자는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선생님의 자연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수령 250년이 된 두 그루의 영조나무는 파계사 성전암에 기거하던 현음대사(숙종이 아들 영조가 탄생하자 기뻐하여 백일기도를 한 영원선사에게 내린 호)가 출타할 때마다 범이 이 거수목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우고 다녔다는 전설 속의 느티나무다.
느티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고르는 듯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바람의 손끝에 풍경이 울었다. 진동루 옆 범종각을 바라보며 선생님께서는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의미에 대해 물으셨다.
― 종교가 많지만 사람의 소원은 딱 세 가지야. 금생의 안락한 삶, 내생의 확고한 보장, 죽음 앞에 평안하게 고통 없이 죽는 것이지. 결국 이 세 가지 때문에 종교에 매달리지만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에 달린 것이야.
원통전, 극락전, 적묵당 등 경내를 두루 둘러보고 싶었으나 선생님은 그냥 차나 한잔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찻집은 쉬는 날이었다. 차가 파계사 입구 연못을 벗어나기도 전에 선생님과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모든 것에는 격이 있다
― 노인도 일곱 종류가 있거든. 노선(老仙), 노학(老鶴), 노동(老童), 노옹(老翁), 노고(老孤), 노궁(老窮), 노추(老醜)가 있는데 신선이나 학처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老童은 되어야 할 텐데. 얼마 전에 말이야. 신선 같은 노인을 만난 적이 있어. 연세가 아흔하나인데 피부도 좋고, 힘도 있고 눈에 광채가 젊은이 못지않았어.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주색을 끊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언제부터 주색을 끊으셨습니까 했더니, 오 년 전부터 주색을 일절 끊었다는 거야. (모두 크게 웃음) 그때는 웃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평상심으로 살라는 말이었어. 자연 따라 살다가 자연 따라 가는 평상심으로 사는 것이 달관의 세계거든.
― 노인의 종류가 일곱 등급이라면 인품에도 격이 있어. 하품(下品), 중품(中品), 상품(上品)이 있어. 각 품마다 다시 영적 지수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지. 하품 인생에는 축인(畜人. 개돼지 같은 사람),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 재인(才人, 재주 있는 사람)이 있고, 중품은 학인(學人.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철인(哲人. 세상의 물리를 깨우친 사람), 인인(仁人. 사람들에게 보시를 베푸는 사람), 이 정도는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상품은 정말 어려워. 달인(達人. 인생의 달관자, 타심통이 생긴다), 도인(道人. 도를 터득, 숙명통을 얻는다), 진인(眞人)인데 진인(眞人)은 바로 석가나 예수 같은 성인이지.
수필을 많이 쓰면 철인까지는 갈 수 있어. 더 많은 보시를 하고, 공부해서 인인이 되면 더 좋고. 달인, 도인이 되기는 어려워.
초석을 다져 온 길
송림사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5층 전탑 앞에 오래 머무셨다.
― 선생님께서는 교육계나 문단에서 큰 역할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시작하는 일, 다시 말씀 드려 초석을 다지는 일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 듣고 보니 그러네. 맞아. ‘수필문우회’도 그래. 계룡산에서 김태길, 유경한, 정진권 씨 등과 만나 하룻밤을 묵으면서 결성을 했지. 포항에서는 빈남수와 더불어 ‘형산수필문학회’를 창립했고. 생각해 보니 구미문협도 구미시장이었던 서상은 씨와 힘을 합쳐 만들었네. 정말 그러네. 집사람까지 정성을 들인 포항고등학교 교장을 맡은 것도 그렇고, 경북교육연구원장도 초대였고. 뭔가 운명적이구만.
선생님께서는 이제야 깨달은 듯 연신 ‘그러네’를 반복하셨다. 팔공산 자락에서 산채밥으로 요기를 예정했으나 선생님께서는 굳이 반월당에 있는 팔공산채식당으로 가자고 하셨다.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선생님은 두런두런 문우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 문인들 중에 교분이 두터운 사람은 김태길, 김시헌인데 요즘은 거의 만나지 못하고 서신 왕래만 하고 있어. 대구 문단에서는 이원성, 정휘창, 견일영과 가깝게 지내지. 이재호는 글도 잘 쓰고 된 사람이야. 허창옥이도 괜찮고.
계간 『수필세계』에 대하여
― 『수필세계』를 만든 것은 참 잘한 일이야. 아주 잘했어. 대구에서 누군가 맡았어야 할 일이지. 홍 선생이 수고가 많아. 젊은 사람이 앞장서서 이렇게 수필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반가운 일이야. 무엇보다 필진이 좋아야 해. 좋은 원고를 많이 받아 편집에 신경을 써 봐요. 그리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책이 되어야 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도록 해 봐요.
지난번에 보내 준 수필사랑 동인지를 읽어 봤는데 글들이 괜찮아. 문장이 아름다워. 다만 보이는 것에는 익숙한 데 비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색이 부족해. 물론 회원들의 나이가 있어서 그럴 테지만 좀더 보강한다면 괜찮은 글들이 나올 것 같애.
― 후배 문인들에게 바라는 점이나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 없어. 다들 나름대로 잘하는데 뭐. 글이란 세월에 따라 달라지고, 연륜에 따라 맞는 글이 따로 있는 것 같애.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감성적인 글을 쓰는 것이나, 이제 겨우 40대이면서 인생이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그런 글을 쓰는 것도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다들 자신의 연륜과 격에 맞는 글을 쓰는 것이 좋겠지.
― 구양수의 삼다(三多)와 삼상(三想)을 알지? 침상(寢想), 측상(厠想), 마(馬想).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거든. 화장실에서도 그렇고, 요즘은 말이 없으니 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을 해. 무엇을 보든지 고민하라, 역으로 생각해 보라, 미쳐라, 이 세 가지를 가슴에 비문처럼 새기고 몰두하고 들어갈 때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어.
권금성의 소나무
식사를 마치고 댁까지 선생님을 모셨다. 사모님은 외출하시고 계시지 않았다. 선생님은 다락에 쌓아 놓은 옛 사진첩들을 꺼내는 것을 허락하셨다. 툭툭 두텁게 앉은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선생님의 연보를 더듬어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굳이 아파트 주차장까지 내려오셔서 일일이 손을 잡으셨다. 속정으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보태 주고자 하심이리라. 일행을 배웅하고 홀로 서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권금성의 소나무」를 기억했다.
― 권금성의 외팔이 소나무는 말이야. 바위를 뚫고 자라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너무 외로워, 외롭기 그지없어. 내가 처음 이 소나무를 만난 것이 병을 앓고 있을 때였어.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이 소나무를 본 순간 묵언(默言),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희망, 삶의 의지 그런 걸 얻었어. 일월산 소나무의 여유로움이 군자의 모습이라면 권금성의 소나무는 말 달리는 선구자의 모습이거든.
흙도 없고 물기도 귀해서 잡초며 이끼마저 깃들기 어려운 황량한 암석에서 자라고 있다. 세찬 북풍은 끊임없이 불어 닥친다. 겨울이면 무서운 폭설이 북풍을 타고 전신을 호되게 강타한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쓰러질 듯 견디며 비스듬히 일어나 표표히 서 있는 권금성의 외팔이 소나무들.
― 「권금성의 소나무」 중에서
함께한 이틀 동안 선생님은 꼿꼿한 자세를 한 번도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다. 아마 권금성의 소나무 같은 강한 의지와 열정의 힘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래 건강하시어 많은 후배 문학도들에게 큰 언덕이 되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선생님께서 아침마다 걸으신다는 아파트 정원을 떠나왔다. 일행의 마음속에는, 그러니까 서정의 영토에는 훈풍이 가득 불고 있었다.
1929. 경남 하동 출생
1946. 경남중학교(6년제)졸업
1946. 고등학교 교원자격 검정(일반사회과 합격)
1950. 고등학교 교원자격 검정(영어과 합격)
1950. 경북 도내 중등학교 교사
1950. 2군단 정훈부 문관 종군
1965. 경상북도 도육청 연구사
1968. 대구시 교육청 장학사
1968. 『수필문학』에 「강마을」로 등단
1969. 한국문인협회 회원
1978. 영양군 교육장
1980. 고령군 교육장
1981. 국제 펜클럽 회원
1982. 형산수필문학 회장
1982. 포항고등학교 교장
1985. 경북교원연구원 초대원장
1986. 한국문인협회 구미지부장
1987. 영남수필문학 회장
1990. 포항여자고등학교 교장
1995. 경상북도 교육위원
1996. 한국교원대학 출강
2003. 대구대학교 평생교육원 출강
수필집
1977.『강마을』
1979. 『거룩한 본능』
1985.『종교보다 거룩하교 예술보다 아름다운』
1989.『素木의 횡설수설』
1992.『높고 낮은 목소리』
2003.『귀로의 사색』
수상 실적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대상
향토아카데미문학상
경북교육대상
한국교육자대상
SBS 방송사 서암교육자 대상
국민훈장 석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