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 혜근 대선사는 경상도 영해부[현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모곡]에서 1320년
정월 보름날에 출생, 속성은 아씨이고 아버지는 선관령을 지낸 아서구,어머니는 영산 정씨이며
선사의 어릴 적 아름은 원혜, 법명은 혜근 또는 강월헌이며 시호는 선각이다
창수면 가산리에서 인량리로 가는 산비탈 중간지점에 소가 하나 있는데 당시 나옹화상의
어머니인 정씨부인이 남편인아씨가 세리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버려서 만삭이 된 몸으로
남편대신 예주부 동헌으로 끌려 가던 중 이 소 옆에서 애기를 낳았으며 세리들은 갓난 애기를
그냥 버려둔 채 부인을 동헌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다행히 예주 부사의 후덕으로 풀려나온
부인이 급히 이 소에 당도했을 때는 수 십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서 정월 보름날의 추위로 부터 갓난 애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애기가 자라서 고려불교를 조선에 전한 나옹화상 혜근이며 이 소를 까치소라 불리게 되었다
나옹화상은 20세인 1339년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에 대한 의문을 가져 상주 공덕산
묘적암 요연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다
이후 1344년 회암사로 가서 밤낮으로 수행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고 1348년 중국 연경 법원사에서 양무제의 왕사인 지공화상에게 사사하며 한햇동안 머무르다가 그후 평산 처림으로부터
불법을 이어 받고 강남 등지를 유람하였다 그후 다시 지공을 찾아 선지를 전해 받았으며
1358년 고려로 귀국하였다
처음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구월산과 금강산에 머물렀고 1367년 청평사에서 지공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전해 받았으며 4년 후 회암사에서 지공의 사리를 친견하였다
그 후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로 임명되어금란가사와 법복및 발우를 하사 받았으며 보제존자로
봉해졌고 병란으로 불 탄 회암사 중창불사에 전력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여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친 후 중앙 대간들의 압력으로 밀양 영원사로 강제로 거처를 옮겨 가던 중 1376년 5월 15일 세수 57세 법랍 38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정도가 혼침된 고려 말의 불교계에 지혜로서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 준 고승으로써
철저한 불이사상의 토대위에서 참선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고려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의 입장을 취하였고 종래의 구산선문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고려말 보우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고승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문인으로는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 자초대사를 비롯하여 각청, 각우, 각변, 각연, 각오,등등 의 여럿이 있다
경북 영덕군신기리에 아주 오래된 반송이 한그루 있었는데 나옹화상이 출가할 때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 이 지팡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
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700여년 동안 전설의 거목으로 전해져 왔으나 1965년경에 고사했으며
이 곳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선사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으며 이 곳 신기리를 반송정이라
부르기도한다
첫댓글 이 사구게가 나옹화상 시인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영덕(영해) 에 가시면 나옹왕사님께서 창건 하신 절이 (장육사) 아담합니다. 순례지란에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