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에 六村長(裵祗沱:文讓公:金山加利村)이신 後에 失傳되어 中始祖(裵玄慶:武烈公:高麗開國公臣:領議政)始祖배지타 後失傳(잃어버림) -中始祖 1世 (裵玄慶)-2世 殷祐(은우)-3世 裕(유)-4世 軒(헌)-5世斯革(사혁)은 三兄弟(삼형제) 두었는데 賜姓을 받은 場所
長男元龍(元龍:盆城君盆城派祖: 경남 김해시 화목1구 1334
次男天龍(天龍:星山派祖:경북 성주군 성주읍경산리
季男雲龍(雲龍:達城派祖:대구시(경북 칠곡군왜관읍)북구 읍내동 1090
六村間 五龍(興海派祖:경북 포항시 흥해읍
達城裵氏 派祖 略傳에 대한 小考
達城派祖 裵雲龍은 斯革((사혁)의 季子(막내)이며 中始祖 玄慶의 曾孫子 이며 高麗朝에 三中大匡 駕洛君에 封해진 裵斯革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나라에 功을 세워 達城君(달성군:大邱의 옛 이름)에 封 해졌는데 . 그後 後孫들이 達城을 本貫으로 삼아 氣勢하여 世系를 이여왔다.
達城派祖 裵雲龍은 나라에 功을 세워 達城君(달성군:大邱의 옛이름)에 封해 졌는데,高麗初에 官이 平章事 (고려때 문하부 정2품벼슬)에 至(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낱말 앞에쓰임)하시고 與 子淑과 더불어 宋國의 聘使(빙사:使臣)가 되시매 宋太祖(본명 趙匡胤(조광윤,960~976년北宋,晉의 아들 史家 陳壽(진수)의 三國志가 刊行됨) 수豕탁 또는착郡사람)께서 禮遇(예우)가 殊深(수심:깊은정성)하시어 특히 坐(앉을좌) 賜(사:하사하시어)하시고 經義顧(경의고:歷代의 經書에 관한 諸設과 沿革)와 國事를 論義 하실 때 公이專對(전대:獨斷으로 自由로이 應答) 如流하시니 曰(왈) 海東君子(해동군자:우리나라의 옛이름)를 始見(시견)이라 하셨다. 及還(급환)에 우리(高麗) 朝廷(조정)에서 達城君(달성군)으로 封(봉)하시다. 事蹟(사적:오랜동 안에 걸쳐 있었던 일이나 사건의 자취)은 大明王(대명왕:명나라) 鳳州恪聘 錄(봉주각빙록)에 載錄(재록)되었음
達城君 達城派祖 최근 高麗 公讓王때 達城君에 封해진 天慶의 아버지 廷芝의 碑文에나타나는 繼代를 밭히자는 說이 擡頭 되고 있다.
무열공6世- 7世- 8世 8世 - 9世 - 10世 - 11世 - 12世 - 13世
달성군(운룡)1世-2世淑(숙)-3世球(구)-4世問晉(문진)-5世遜迪(손적)-6世仁檢(인검)-7世瑩(영)-8
무열공14世 - 15世
世廷芝(정지)-9世成慶(성경)-10세光裕(광유:官軍千戶)-公愍王10(1361年)紅巾賊(홍건적) 侵入하자 , 果川白華寺(과천백화사) 戰鬪(전투)에 參戰(참전)하여 子 成慶(통판례문사) 함께 殉節(순절)했다.
武烈公15世 達城公10世 光裕(광유:官軍千戶)는 三兄弟를 두었다
武烈公16世 達城公 11世
長男 諱文祐(휘문우) 字綾賭(자능도) 號晦隱(호 회은: 晦隱公派)號 붙여 晦隱公派官職(관직)寶文閣直提學(보문각직제학)
次男 諱均또는彦(호 균또는언)初名乙均(초명을균)字虎翼(자호익)號栗軒(호율헌)관직:兵曹判書(병조판서:派名:判書公派
季男 諱乙書(휘을서)字鳳韶(봉소)號檢閱(호검열)諡號(시호:王이 死後에 붙여준號)諡號를 派名을 淸靖公派로 부른다.
11世晦隱公派祖(회은공)는
諱文祐(휘문우) 字綾覩(자능도) 號晦隱(호회은)이니 先生은 安裕(晦軒)에게 修學(수학)하여 義 理 를 講究(강구)하 고, 高麗公愍王(고려공민왕)때 文科에 第관직 寶文閣直提學(보문각직제학)에 이르러 圃隱鄭夢周(포은정몽주),牧隱李穡(목은이색),冶隱 吉再 諸賢들로 더불어 이름 가즈런 하였으며 같은 朝廷(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親交(친교)하여 友誼(우의)가 심히 두터웠다.(文獻:麗末忠列傳)
達城君裵氏 判書公派祖에 대한 小考
最初(최초)達城裵氏(달성배씨)族譜(족보)羅州庚辰普(경진보)1760년判書公派祖(판서공파조)는 諱均(휘균,또는彦(언)) 初名(초명)乙均(을균) 字(자)虎翼(호익) 贈(증) 兵曹判書(병조판서)洪武13(홍무1380년)(明(명)나라年號(연호),高麗禑王(고려우왕)6年 (년))庚辰(경진)(1380年(년))8月(월) 從(종)宗人(종인) 元帥(원수) 裵克廉(배극렴,星山:朝鮮開國1等功臣(조선개국1등공신),領議政(영의정))庶(서)及(급)鄭地(정지)等(등) 擊(격)紅巾賊(홍건적) 沙斤驛(사근역)被害(피해)O(류서애)忠賢普苑(충현보원)曰(왈)戶部尙書(호부상서)廷芝曾孫(정지 증손) 均(균또는彦) 武略(무략)箸聞擢(저문탁)監門衛(감문위)上將軍(상장군)擊(격)紅巾賊(홍건적적)敗(패)績(적)而(이)死(사) O跋(발)曰(왈)卞家(변가)美(미)烈(렬)菖門壯(창문장)節(절) O甲申(갑신)普(보)(1764年(년))慶州裵氏(경주배씨씨) 大同普(대동보) 四 派(사파) (盆城(분성),星山,星州(성산,성주) ,達城(달성), 興海(흥해)派(파)
한국민족문화백화사전 전9권 322P에 기록
裵均또는彦(배균,彦언)(?~1380년)高麗禑王(고려우왕)6년高麗(고려)의 官人(관인).1377년(禑王(우왕3) 密直副使(밀직부사)(정3품)에서 和寧府尹(종2품)이되었다, 1379년 門下評理(문하평리)에 李武方(이무방)과 함께 判密直(판밀직)으로서 明(명)나라에 金(금) 31근4냥,銀(은) 1,000량,白細布(백세포) 500匹(疋), 黑細布(흑세포)500疋(필)을 가지고 明(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明(명)나라에서는 朝貢(조공)의 내용이 다르다고, 入國(입국)을 拒否(거부)하여 登州(등주)에서 기다리다가 다음해(1380年)6月에 돌아오고 말었다. 朝廷(조정)에서는 그해(1380년)8월 倭敵(왜적)이 침입하여 沙斤乃驛(사근내역)에 駐屯(주둔)하자. 元帥(원수)로서 裵克廉(배극렴)(朝鮮開國1等功臣(조선개국1등공신-領議政(영의정)),朴修敬(박수경)元帥 .裵均,彦(배균,또는언)元帥倭敵(외적)을 攻擊(공격) 하엿으나 敗北(패배)하여, 朴修敬元帥와 裵均,彦(균,언)元帥는 같이 죽음을 당 하였다.(參考文獻 -高麗(고려)史(사),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이정신
麗末忠義傳(려말충의전)32p에大隱(대은)卞安烈(변안렬)(1334~1·390년에보면 1362년(恭愍王(공민왕11) 安祐(안우)를 쫓아 紅巾賊(홍건적)을 무찌르고 이듬해(1363년) 판내부사사로 경성수복 1등공신에 책록되어 이어 紅巾賊(홍건적적) 平亂(평란)에 2等功臣(2등공신)되었는데, 恭讓王(공양왕13年1364년)6月(월)에 倭賊(왜적)이 水原地方(수원지방) 浸透(침투)한 年度인데 族譜(족보)에는 紅巾賊(홍건적) 좀 아쉽다.
文獻은 東國通監(동국통감)이나 高麗史(고려사),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龍飛御天歌(용비어천가),荒山大捷(황산대첩)등
高麗時代(고려시대)는 우리民族史(민족사)에 倭侵(왜침)이 가장 많았던 時期(시기)로 總(총)484回(회)에 걸쳐 倭侵(왜침)이 있었다
高麗(고려)말 14世紀(세기) 後半(후반)에 極甚(극심)하던 倭寇(왜구)의 擄掠(노략)질은 1376년 鴻山(홍산)에서 崔瑩(최영)將軍(장군)에게 크게 敗(패)한후 한동안 潛潛(잠잠)햇으나 1380년 8월에 500척의 大船團(대선단)으로 鎭浦(진포)에(지금의 舒川(서천)-금강)에 侵入(침입)하였다. 倭寇(왜구)가 타고 온 船舶(선박)을 倭寇(왜구)들이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놓고, 上陸(상륙)하여 忠淸道(충청도),全羅道(전라도),慶尙道(경상도) 3道(도) 海岸(해안)의 州(주),郡(군)을 掠奪(약탈)放火(방화),殺戮(살륙)하여 屍體(시체)가 山(산)과 野(들)을 덮고, 朝廷(조정)에서는 羅世(나세)를上元帥(상원수)로,崔茂宣(최무선)을 副元帥(부원수)로,沈德符(심덕부)을 都元帥(도원수)로 하여 치도록 하였다. 倭賊(왜적)과 싸움에서 崔茂宣(최무선)이 민든 新武器(신무기)인 火砲(화포)를 처음 使用(사용)하여 묶어놓은 倭賊(왜적)의 船舶(선박)을 모두 불태우고 大勝(대승)을 거둠으로써 激烈(격렬)하던 倭賊(왜적)의蠻行(만행)에 쐬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목숨을 求(구)한 360餘名(여명)의 倭賊(왜적)들은 沃州(옥주)-지금의 沃川(옥천))으로 먼저 달아나 上陸(상륙)한 倭賊(왜적)들과 合流(합류)하였는데, 船舶(선박)이 燒失(소실)당하고 退路(퇴로)를 읽게되자. 상주,영동,옥천등지로 進出(진출)하여 掠奪(약탈)을 恣行하였다. 이때 상주방면으로 進出(진출)한 倭敵(왜적)의 主力部隊(주력부대)는 다시 京山(경산-지금의성주)을 侵略(침략)하고 咸(陽(함양) 沙斤乃驛(사근내역)에 集結(집결), 이 當時(당시) 倭賊(왜적)을 追擊(추격)하던 9元帥(원수)는裵克廉(배극렴)(朝鮮開國1等功臣(조선개국1등공신),領議政(영의정))元帥(원수), 金用輝(김용휘)元帥(원수), 池勇奇(지용기)원수-충주지씨,문하평장사-정몽주와 더불어 끝까지 고려에 忠誠(충성)을 다 하다가 이성계의 손에 류배후 죽음), 吳彦(오언)同福吳氏 밀직부사)元帥(원수), 鄭地(정지)元帥(원수)-하동鄭(정)씨 始祖(시조) 할머니가 裵(배)씨, 初名(초명)을 俊堤(준제) 27세까지 부름, 전남 나주시 문평면죽곡리 1347년출생), 朴修敬(박수경)元帥(원수), 裵均(배균-언(彦))元帥(원수)-判書公派祖(판서공파조), 都興(도흥)元帥(원수)星州(성주).星山(성산)漆谷都(칠곡도)씨,密直副使(밀직부사)-전라도 도순찰사재직중 왜구침입을 잘 막지못해 한때 파직 다시 起用(기용) 왜구방어에 功(공)이큼,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 일문에 의해 그일파로 몰려 유배), 河乙址(하을지)元帥(원수)진양,진주 河(하)씨,계림원수)등 9元帥(원수)들과 咸陽沙斤乃驛(함양 사근내역)-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山60번지, 沙斤山城(사근산산성)문화재 152호, 聯合軍(연합군)을 形成(형성)하여 倭賊(왜적)과 싸웠으나 안타웁게도 朴修敬(박수경)元帥(원수)와裵均,彦(배균,또는언(彦))元帥(원수,상장군)와 軍士(군사)500名(명) 戰死(전사)하고 敗(패)하였다, 倭賊(왜적)들은 繼續(계속)하여 전북 南原山城(남원산성)을 攻擊(공격)하여 雲峰懸廳(운봉현청)을 불태우고, 장차 光州(광주),潭陽(담양)을 거쳐 北上(북상)한다고 하니 朝廷(조정)에서는 깜짝놀라, 智異山(지리산)과 海州方面(해주방면)에서 倭賊(왜적)을 討伐(토벌)하여 勇猛(용맹)을 떨친 李成桂將軍(이성계장군)을 양광도,全羅道(전라도),慶尙道(경상도) 3道(도) 都巡察使(도순찰사)에 任命(임명)하고 大隱(대은) 卞安烈(변안렬)을 體察使(체찰사)에, 寓仁烈(우인렬)元帥(원수), 李元桂(이원계)(여진출신 이성계 의동생)元帥(원수), 朴林烈(박임렬)元帥(원수), 都吉敷(도길부)元帥(원수), 洪仁桂(홍인계)元帥(원수), 林成味(임성미)元帥(원수),등은 이성계를 도아 倭賊(왜적)의 大討伐作戰(대토벌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양측은 雲峰(운봉)을 넘어 荒山(황산)(해발695미터) 西北(서북)의 鼎山峯(정산봉)에서 熾烈(치열)한 戰鬪(전투)를 벌렸는데 倭賊(왜적)들은 山峽谷(산 협곡) 險地(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장군은 自身(자신)이 정산봉 오른쪽길목을 담당하고 다른 元帥(원수)들은 平坦(평탄)한 길로 나가게하자 과연 倭賊(왜적)들은 定例部隊(정례부대)가 險峻(험준)한 길로 튀어 나왔다. 이성계장군이 대우전과 우뢰전을 써서 先鋒(선봉)의 倭賊(왜적)을 다 殺害(살해)하자 倭賊將(외적장) 阿只拔都(아지발도)는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武裝(무장)하고 白馬(백마)를 타고 先鋒(선봉)에서 對抗(대항)하엿으나 이성계장군과 李豆蘭(이두란)元帥(원수)가 倭賊將(왜적장)을 쏘아 죽이니 죽은 倭賊(왜적)들이 피로 江(강)물이 물들어 6.7日(일)間(간) 물을 먹을 수가 없엇다고 한다. 捕獲(포획)한 말이 1,600餘匹(여필)이고 兵器(병기)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倭賊(왜적)이 我軍(아군)보다 10培(배)나 많았으나 겨우 70餘名(여명) 살아 남아 智異山(지리산)으로 逃亡(도망) 갔다.
荒山大捷(황산대첩)에서 戰勝(전승)한 後(후) 그이듬해 다시 찾은 荒山(황산)을 訪問(방문)한 李成桂將軍(이성계장군)은 自身(자신)과 麾下(휘하) 元帥(원수)들의 姓名(성명)을 巖壁(암벽)에 새겼스니 이것이 御諱刻(어휘각)이며 그 뒤에 宣祖(선조10)(1577년) 全羅道(전라도) 觀察使(관찰사) 박광옥의 上訴(상소)에 의해戶曹判書(호조판서) 김귀영이 王命(왕명)으로 碑文(비문)을 짓고 麗成君(려성군)宋寅(송인)이 글씨 썻으며 따로 雲峰縣監(운봉현감) 박광옥이 具體的(구체적)으로 戰鬪經過(전투경과)를 記述(기술)하여 전북 (南原市(남원시) 雲峰(운봉)읍 花水里(화수리)에 碑文(비문)을 세웠으나 그 後(후) 荒山大捷碑(황산대첩비)와 史蹟碑(사적비)를 세워 그날의 勝捷(승첩)를 기리워 왔으나 庚戌國恥(경술국치) 以後(이후) 日人(일인)들에 의해 破壞(파괴)되어 荒廢(황폐)되었던 것을 現在(현재)亭閣(정각)안에 보관 되어있다. 다시 1973년 顯忠日(현충일)에 신석호 짓고 김기승 쓰고 전북 남원시가 國庫補助(국고보조)와 南原市費(남원시비)로 環境(환경)을 淨化(정화)하였으나 이는 황산기슭에 메아리친 救國(구국)의 戰勝(전승)을 널리 宣揚(선양)하고 우리 後孫(후손)들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自主國防位(자주국방)情神(정신)을 길이 保存(보존)케 하고자 함이다.
11世 淸靖公派祖(청정공파조)
諱乙瑞(휘을서) 字鳳韶(자봉소) 號檢閱(호검열)이니 天品(천품)이 聽敏(청민)하고 碁局(기국)이 非凡했으며 일찌기 冶隱吉再 門下에서 受學하였다. 冶隱先生이 "人品은 顔子(안자) 閔子와같고, 學問은 子夏와 子游(자유)와 같다"고 稱讚하며 사위를 삼았다. 또 先生은 圃隱과 牧隱先生 門下에 出入하면서 性理學을 講明(강명)하여 佛교(불교)를 排斥(배척)하고 儒學(유학)을 일으킴을 自身의 責任으로 여겼다. 干城王朝(간성왕조:공민왕)에서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藝文館 檢閱(문에관 검열:正九品)이 도었으나 곧 李太祖가 朝鮮朝를 開國한 後에는 長兄晦隱公派祖 文祐와 鄭淵 羅繼從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門을 닫고 스스로 靖節(정절)을 지켰다. 太宗이 여러차레 世子師傅(세자사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굳게 辭讓(사양)하고 나아 가지않았다, 別世(별세)한 後에 淸靖(청정)이란 諡號(시호:죽은 후에 王이 號를 붙여주는것)를 내려서 淸靖公의 派祖이시다.((文軒:麗末忠列傳)
湖南으로 達城裵氏 離居 年代는 端宗에서 世祖1455年傾
湖南으로離居는
晦隱公은 孫子 斗有,
判書公은 曾孫子때,
淸靖公은 孫子孝明
和順入鄕祖는
裵斗有 號寓齎(호우재)字德善(자덕선) 達城公13世 武烈公의18世 관직:贈禮曹參判(차관급)先生은 永樂2年(太宗4年1404年)大邱에서 出生하셨다. 文宗때 文科及第成歎察訪(從六品)에 이르러 死六臣人,박팽년,이 개,성삼문과 講學(강학)交遊(교유)하였다. 端宗 在位때 首陽(世祖)의 位勢가 날로 盛함을 보고 不遠間에 朝廷에 不安이 있을 것을 豫知하고 家族과 함께 1455年傾(47歲)에 和順綾州 大谷里에 隱居하였다.端宗 遜位 後(端宗이 王位에 물러난 後에 北쪽을 向해 大聲痛哭) 杜門謝客(찾아오는 손님, 누구도 謝絶했다) 精舍에 寓齎라는 偏號(편호)를 揭示하고 一生을 보냈다. 72歲 卒하시다. 贈禮曹參判(차관급) 大谷祠(1914年)五位(6世달성군(雲龍),13世廷芝(호부상서),14世成慶(통판례문하사)15世光裕(관군천호)16世문우(晦隱公派祖) 陰歷3月3日子孫奉祀(자손봉사)
16世 判書公 派祖 諱 均또는彦(균 또는 언)獨子(독자)인 暾(돈) 관직 兵馬使(병마사)에서 四兄弟를
17世長孫子 諱 尙寧(휘상녕) 관직 竹頭萬戶(죽두만호) 兼節度使(절도사)-大邱(慶北,漆谷.왜관)世居
次孫子 諱 尙定(휘상정:전남영암군 사종면 구산리 龜山(구산)-世居地(세거지)
淑孫子 諱 尙集(휘상집:전북 김제시 금구면河川(하천)後孫散居(산거)
季孫子 諱 敬天(휘경천:전북 고창군 茂長面(現孔音面 群有(現공음面군유) 後孫散居
17世 判書公의 長孫子 諱 尙寧(휘 상녕) 관직 竹頭萬戶 兼節度使(절도사)은 四兄弟(사형제)들
18世 判書公의 長曾孫子
諱緝(휘집) 號 東皐公(호 동고공) 司馬試에 及第成均生員으로써 國家經營하던中生六臣 남효온(남추강),김시습,조려,성담수,원호등과 道義至交友(도의지교우)로써 賢人講學(강학)을 交遊(교유)하면서 親交하여友誼가 深히 두터웠다. 端宗 遜位,後에 累次 世祖로부터 成均館 敎綬職으로 除綬(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大川七聖山(東大邱川 西대구천)隱居(京山志記錄)龜川書堂(구천서당)에서 後學을 가르치며 判書公의 門中 世居地가 되었다.
崇德廟 1936年創建 3位 主壁 判書公派祖 (諱 均 또는 彦, 관직 贈兵曹判書,判密直,監門衛上將軍) 대구(칠곡)入鄕祖 (諱 緝 號 東皐公 進士) 諱 以勳 號 聖譚公陽歷5月마즈막 日曜日 子孫奉祀
曾次孫子
諱 縉(휘진)호 雲巖公 司馬試에 及第 成均生員 生六臣 남효온(남추강),李耕隱(이경은)諸賢(제현)들과 道義至交(도의지교) 하던중 端宗 遜位後에 로 世祖의 威勢가 날로 盛함을 보고 不遠間 조정에 不安이 있을것을 豫知하고 長兄님 諱緝(휘집) 號東皐公(호동고공)에게 先塋을 부탁드리고 두동생(諱紳號月巖公(나주남평)과 季弟諱繪 號 甑巖公(무안청계)데리고 江(물길 ) 따라 山 줄기를 따라 가는곳이深深溪谷(심심계곡)인 月谷에다 자리잡고 後學을 가르치며 오늘날까지 後孫世居 全羅道 땅으로 生離別하여 隱居한 곳은 山岳支帶가 西部支脈에 屬하는 羅州錦城山(해발400,5미터)은 光州無等山(해발1187미터)에서 뻐더 내려와 이山脈 줄기는 長興의 國師峰(613미터)과 영암의 月出山(해발808,7미터)은 丘陵인데 羅州鳳凰과茶道兩面境界를이루고, 龍帝山(해발332,8미터)에서보면 우뚝선 甁風石(병풍석))바위가 버티고 있고,그 뒤로는 月峰山溪谷 幽深(유심) 月谷에 隱居 後學을 가르치며 學行과 德行을 몸소實踐하였다.祭閣은 遠慕齊(원모제)1920年創建)마을에 이팝나무500年(地方文化財記念物153號旨定) 많은 人才와 많은 後孫이 移居
曾孫세번째孫子
諱紳(휘신) 號月巖公(호월암공)은 두번째 형님 운암공과 거리는 20리 밖이라 멀리안가고 나주시 남평읍 탑동(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음)으로 이거,후손은 대법관 국회의원 법원장급과 법관등 공학박사,의학박사,우수한 인재가 계속나오고 있다.화순군 도암면 虎巖(호암)리에 先塋(성영)시제는양력4월18일과 私門中別時祭는陰歷10月15日
판서공 季曾孫
諱 繪(휘 회) 號甑巖公(호 증암공) 司馬試에 及第箕子參奉((기자:中國古代傳說에 나오는 사람,殷나라의 紂王(주왕)의 淑父)參奉은生六臣南孝溫,李耕隱諸賢들과 道義支交友(도의지교우) 端宗復位로 世祖簒奪(찬탈)로雲巖公의 羅州鳳凰月谷에서 100餘리밖 務安郡 淸溪面台峰里에 定着(정착)한 甑巖公은 裵氏의 많은 後孫人才가 많으며, 국회의원,국립대학교 총장 ,독립운동가,동학혁명사 등 훌륭한 後孫輩出(배출)
淸川祠(청천사:숙종9年1683年創建, 主壁 玄慶,고려개국공신)廷芝(정지 :호부상서)裵克廉(星山,조선개국공신.영의정) 務安入鄕祖諱繪號甑巖公,諱蓂(명)號希庵(희암)全羅道 교수관,,諱相玉동학혁명 전남 서남부 道接主等六位陰歷九月九日儒林享祀,
台峰祠 1980年創建 四位 始祖 諱裵祗타(文讓公), 達城公派祖 諱雲龍(평장사) 判書公派祖 諱 均 또는 彦(균또는 언:판밀직.감문위상장군), 諱莢(휘협)號孝友堂(효우당-병조참판)四位儒林享祀陰歷二月晦(금음회)日
淸靖公 羅州入鄕祖는
孫子裵孝明 號 逍遙子 (소요자) 字 敬夫(경부) 達城公13世武熱公18世官職:通政大夫追贈1451年(文宗1) 修義副尉(수의부위:從八品의 武官)가 되었고,1453年(端宗1) 文科 에 及第하여, 戶曹佐郞(戶曹正五品)에올랐다. 端宗이 遜位(端宗이 王位에서 물러남)하자 退任하고 落鄕(慶北,漆谷) 隱居 하였는데 世祖때 累次徵命하였으나 不就 하였다, 그 後에 自嶺離居 羅州草洞隱居(慶尙道에서 全南羅州市多侍面永東里草洞 武烈祠1797年創建 八位牌 (裵玄慶武烈公(中始祖, 廷芝(호부상서),裵克廉(성산:조선개국공신), 達城君派祖裵雲龍, 淸靖公派祖(乙瑞), 乙浦(직제학파조),世祚(세조), 承武(追贈 승정원좌승지) 양력4월 寒食日(冬至날로부터105日째 되는날)儒林享祀,지방문화재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