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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1월 1일 일요일
외갓집에 갔다.
동생 세난[1]이와 함께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허락을 받고 떠났다.
물론 강가까지 아버지께서 따라 오셔서 자전거[2]를 강 다리[3]에서 무사히 저쪽으로 운반 해주셨다.
거기서 나와 세난이는
"그럼, 다녀오겠어요."
하는 인사말을 남기고 자전거 속력을 냈다.
마침 물 건너 들판[4] 중앙 길에 당도했다. 얼마나 그 거리가 먼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약 500m 쯤 되지 싶었다.
그 길을 지나가는데 갖은 고생을 다했다. 길이 질어 억지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여기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또 숲[5]을 지나갈 때는
'혹시 이런 곳에 나쁜 사람이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후 우리는 무사히 외갓집에 당도하였다.
※ 줄넘기 수 - 277
[1]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도 여동생 세란(世蘭)이를 한글로 '세난'이라고 표기하였다. 학교 선생님들도 공식적인 문서에서조차도 '장세난'이라고 표기하였고 이는 두음법칙을 심하게 따진 결과로 보인다. 내가 6학년이 되어 아버지한테 한문을 조금 배운 후 '난초란'자임을 알고 난 후에는 의도적으로 '세란'으로 표기하도록 강요하였다. '세난'보다는 '세란'이가 훨씬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가 6학년이 된 후에는 공식적인 문서에도 '세란'으로 표기되었다.
[2] 나는 성인용 자전거를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탈 줄 알았다.
[3] 우리 마을 앞에는 강폭이 약 200m 되는 낙동강 지류가 있는데, 요즘같이 높고 넓은 다리가 당시에는 없었다. 여름에는 그냥 얕은 곳으로 걸어서 건넜고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배를 타고 건넜다. 그러나 겨울에는 물이 얼고 차갑기 때문에 임시로 '외나무 다리'를 가설하여 강을 건넜다. 외나무 다리의 폭은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4] 강 건너에 있는 들이라서 '물건너 들'이라고 불렀다. 상당히 넓은 들이며 길이가 약 2km 로 당시에도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5] 당시 외갓집에 가는 버스는 당연히 없었고, 들로 산으로 난 좁은 길로 8km 정도 가야했다. 그 고생을 하면서 가야하지만 그래도 외가에 가는 것이 마냥 좋았다.
1978년 1월 3일 화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외할머니께서는 우리 어머니에 대해 어렸을 때의 이야기, 시집 올 때 이야기 등을 자세히 얘기해 주셨다.
(생략) 비밀 !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왜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시지 않았을까?'
정말 신통한 일들이었다.
할머니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 구하기 힘들 거야. 너희 아버지는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 하니까…."[1]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2]
※ 줄넘기 수 - 364
[1] 아버지께선 국민학교만 졸업하셨지만 손재주가 뛰어나셔서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다음에 그대로 해 내신다. 목수일도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라 다른 가옥들을 유심히 관찰하시고 스스로 터득하신 것이다. 지금 시골 본가는 아버지 연세 32살 때 손수 지으신 집이며, 대목으로서 아버지의 '데뷰작'이다.
[2] 덕분(?)에 지금 이 시간까지도 무슨 얘기를 듣고 비밀로 했는지 나조차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나도 궁금하다.
1978년 1월 4일 수요일
외갓집에서 집으로 돌아 왔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기뻐 하셨다.[1]
아마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인 것 같다.
나는 외갓집에서 있었던 일을 모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엄마, 외갓집에 영준 외삼촌 군대 하사 훈련받고 휴가 왔는데, 지금은 청송 농협에 갔고,[2] 오늘 외갓집에 돌아오면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오려고 하고, 내일 외갓집에 오면 울 집에 못 온다고 해. 그래서 내일 울 집에 못 오면 누님 못 보고 간다고 사과 드리래."
"응, 그래 얘기 계속해."
"또 쌍계 이모부도 오셨어. 역시 잘 있다고 안부 전하래."
"그런데, 먹을 것은 좋은 것 많이 해 주더냐?"
"예, 고기국도 끓여 주고, 떡도 해 주시고, 조창[3]도 해 줘요."
"세억이와 세난이 며칠 사이에 출세했네."
"으 하하하…."
모두들 신나게 웃는다.
※ 줄넘기 수 - (못함)
[1] 외가에 갔다 왔는데 뭐가 그렇게 기쁜 일인지 당시에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만 알았으나, 이제 내가 직접 아버지가 되고나니 그 이유를 가슴으로 느낄 것 같다. 당시 우리 부모님도, 요즘 나의 아들 녀석이 유아원에 갔다가 돌아오면 그렇게 반가운 그 심정이었을 것이다.
[2] 둘째 외삼촌은 외가와는 멀리 떨어진 청송 군 농협에 근무하다가 군 입대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휴가 나온 외삼촌이 누나집(우리 집)에도 안 오고 청송에 간 이유는 지금의 외숙모님과 데이트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다. 외숙모님의 친정이 청송에 있다.
[3] 조청
1978년 1월 5일 목요일
아침 때의 일이다.
외가에 갔다 와서 처음으로 나무하러 갔다.
산에 가니 온 식물들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더구나 대구에서 온 지중이도 같이 갔다. 그래서 둘이 서로 누가 더 많이 하는가도 해 보기로, 산에 가면서 약속했다.
산에 당도해서 빨리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낫은 더욱 빨리 움직여진다.
이렇게 시합을 하다보니, 벌써 한 짐이 되었다.
지중이와 나는 서로 비교해 보았다. 역시 내가 몇 배로 더 많았다.
내가 이기기는 했지만 지중이도 많이 했다고 본다. 도시 아이가 이렇게 했는 것도 다행인 것 같았다.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칭찬해 주셨다.
"엄마, 나도 이젠 가리[1] 만들까?"
"그래라. 나도 이젠 부엌에 넣지 않을 테니 방학 동안에 한가리 만들어라."
나는 방학 동안에 꼭 나무를 한가리 해서 이 기회에 효도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 줄넘기 수 - 392
[1] 나무'가리'는 나무를 많이 쌓아 놓고 비가 맞지 않도록 이엉 등으로 포장해 둔 더미를 말한다. 내가 해오는 나무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날 당장 다 때어 버려 모이지가 않았다. 따라서 나무를 해오는 나의 입장에서는 모이지가 않으니까 일종의 저축하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가 보다.
1978년 1월 6일 금요일
오늘은 내 당번일이다.[1]
성진, 칠범, 나는 학교에 갔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전거에 호수를 많이 가지고 오셨다.
아마 방 고치는 사람 같았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다가가니 학교 아저씨[2]와 모래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에이, 하필이면 우리 당번 때 이런 일을 할 것이 뭐람!'
모래를 두 니아까 갖다 놓고 저쪽에서 노는데 어떤 아저씨가
"얘야, 여기 모래 좀 퍼부어 주렴."
나는 거기에 가서 모래를 퍼부어 주었다.
'정말, 오늘 대개 화나네. 또 나 혼자 할 것이 뭐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일을 해 주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내 마음 흐뭇하다.
※ 줄넘기 수 - 하지 않음.
[1] 선생님들 주간당직처럼 5, 6학년 학생들은 방학동안 학교에 나가서 교무실 청소 등을 하는 당번날이 있었고, 방학동안 2∼3 번 정도 당번이 돌아왔다. 나는 초등학교 6년간 내내 1번이어서 번호가 늦은 애들보다 당번을 한번씩 더 하였고, 내심 참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2] 소사 아저씨
1978년 1월 7일 토요일
오늘은 저 남해에서 세석이가 오기로 한 날이다.
나는 저녁을 일찍 먹고 큰집에 가 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벌써 세한형은 와 있는데, 세석이가 보이지 않았다.
"세석이는 어떻게 되었어?"
"응, 세석이는 아직 거기[1]에 있어."
'오늘 온다고 해 놓고 약속을 안 지키다니!'
나의 한 가닥의 희망은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후 집에 돌아와서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세석이는 왔을까? 이번 기회에 못 만나면 다음에는 만날 기회가 없을 텐데!'
잠시 후 세한형이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니께서는
"오, 세한이 왔니? 그래, 너 혼자 왔니?"
"예, 세석이하고 남희는 지금 신산에 있는데, 세국이가 데리고 오겠데요."
'뭐? 세석이가 온다고?'
나로서는 한 가닥의 희망을 눈앞에 두고 기다릴 뿐이다.
※ 줄넘기 수 - 449
[1] 신산 큰집 누나집. 지난 12월 26일 온다고 했던 세석이 형은 우리시골로 오기 전에 강건너에 있는 누나 집에 먼저 들러서 거기서 오랫동안 있었는가 보다.
1978년 1월 8일 일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내가 잠자리에서 깨어나서 책을 읽다니까 아버지께선,
"세억아, 산에 가니 나무가 많이 있더냐?"
"예, 나무는 많은데, 손에 상처가 많이 나요."
"그럼, 가지고 올 때는 안 무겁니?"
"아녀요. 가벼워요. 그런데 손 좀 보셔요. 이렇게 손에 상처가 많이 났잖아요!"
그 뒤에도 아버지와 나는 많은 얘기를 하였다. 그때 세호가
"아름다운 복사꽃이 피어나는 도하동∼ 효녀 심청."
하고 효녀 심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내 머리에는 어떤 생각이 살짝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효도였다.
'그래, 지금부터 이번 기회에 많은 효도를 해 보자.'
"아버지, 지금부터 아버지는 가마니 짜시고[1], 나는 집에 쓰는 모든 나무를 하겠어요."
"그래라. 네가 나무 많이 하면 개학하고 저축[2]할 돈은 실컷 줄 테니 많이 하거라."
아버지께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 줄넘기 수 - 335
[1] 당시에는 요즘처럼 인조부대가 없어서 한가한 겨울 내내 1년동안 사용할 가마니를 짚으로 짰다. 우리 집에는 어디서 났는지 가마니 짜는 기계가 한대 있어서 아버지 혼자서도 가마니를 짤 수 있었다.
[2] 실제로는 저축할 만큼 여유 있는 돈이 우리 집에는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 시에 학교에서 저축한 통장을 해약하니 6년 동안 저축한 원금과 이자가 23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요즘, 돈이 뭔지도 모르는 4살 아들 녀석이 유아원에서 저축한다고 일주일에 한번씩 가져가는 금액이 3000원씩이나 되니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1978년 1월 10일 화요일
점심때의 일이다.
길가에서 노는데 우체부 아저씨께서
"얘들아, 장세억이라는 사람 집이 어디지?"
"예, 바로 저여요. 그런데 편지 왔는가요?"
우체부 아저씨는 나에게 편지 두통을 주셨다.
받아보니, 내가 저번에 보낸 위문편지 답장과 찬일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나는 기뻐서 얼른 집으로 가서 읽어보았다. 먼저, 위문편지 답장은 대강 '처음에 나를 "장군"이라 하였고, 앞으로 더욱 철저히 국방을 튼튼히 하겠다'고 하셨다.
또 거기의 주소는 '육군 제6829 부대 중대 (멀리 전방) 병장 도경욱' 이었다.
나는 이 아저씨는 분명히 훌륭한 군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추위에 답장을 해주시는 것을 보아서이다.
다음은 찬일이의 것을 읽어보았다. 내용은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고, 우리들(세봉, 태진, 나)을 보고 싶다고 했다.
오늘 있었던 이 일을 끊지 않고 계속 이어야겠다.
※ 줄넘기 수 - 464
1978년 1월 11일 수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는 오늘 장에 가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 장에 가서 연줄 2타래만 사 가지고 와."
"그래, 점심때 소죽 끓여 먹이고, 밥은 큰솥에 있다. 오늘은 아버지께서도 볼일 보러 가시고 할머님도 안 계시는데 집 잘 봐야 한다. 그러면 연줄 많이 사 올께."
이렇게 해서 점심때는 소죽을 끓여 먹이고, 밥은 비빔밥을 해 먹었다.[1]
오후 3시쯤 되었을 때, 마을 어귀에 나가 보았다.[2]
마침 세근이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세근아, 우리 엄마 못 봤어?"
"너희 엄마 못 봤어. 안계에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서 나는 우선 창모네 집 근처에 와서 놀다가 다시 마을 어귀로 가 보았다. 한참 기다리다니까 어머니께서 오시고 계셨다.
"엄마, 이제 오는가?"
"그래, 세호는 집에 있나?"
"예."
"엄마, 연줄 사 가지고 왔는가?"
"아니. 연줄은 없더라."
"뭐어. 있다던데 아이들이."
그 뒤로는 어머니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희망이었던 연줄이 내 손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줄넘기 수 - 518
[1] 부모들이 일하러 나가서 집에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골 아이들은 어릴 때도 스스로 음식을 챙겨 먹어야 했다. 어릴 때 그 실력과 고등학교, 대학교 때의 자취 경험 때문에 요즘도 라면, 부침, 빵굽기 등은 기본이고 김치 담그기, 식혜 등 웬만한 음식은 아내보다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서 절대 아내를 거들어 주지는 않고, 차라리 매정한 남편이라고 원망을 듣고 만다. 그러나 간혹 아내가 없을 때는 혼자서 배불리 잘해 먹는다.
[2] 할머니나 어머님이 20리 떨어져 있는 5일장 '안계'장에 갔다 올 때쯤은 항상 마을 어귀까지 나가보곤했다. 항상 맛있는 과일이나 과자를 사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
1978년 1월 12일 목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나무하러 갈라고 준비를 하고 있다니까 형이
"나도 오늘 나무 하러나 가볼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가라 왜. 누가 말리나 뭐!"
나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벌써 형은 내 일을 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1]
"아이들 누가 많이 가더냐?
"몰라. 내가 알게 뭐래. 너도 가보면 되지."
결국 형은 나무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형과 나는 위로 올라갔다.
마침 아이들이 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아이들과 같이 나무를 하러 갔다.
가지고 올 때는 앞으로 꾸부러질 만큼 많이 했다.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는
"얘들아, 이리 와 봐."
"왜요?"
"너희들이 나무를 많이 해서 오늘은 돈을 좀 주마. 자. 세익이는 많이 했으니 100원, 세억이는 50원."
나는 돈을 저금통에 넣었다.
또 형 덕분에 내 나무가리가 한층 더 커졌다.
※ 줄넘기 수 -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 일 거듦)
1978. 1. 13 신상환 (인)[2]
[1] 어릴 때 3살 많은 형과 싸움도 많이 했고, 질리도록 같이 붙어 다니기도 했다.
[2] 방학인데도 선생님의 검사 도장이 있는 것을 지금 보니, 당시 선생님께서 방학 중에도 한두 번씩 소집하여 일기장 검사와 과제물 중간 점검을 꼼꼼히 하시면서 방학생활을 챙기셨던 기억이 난다.
1978년 1월 13일 금요일
오늘은 내 당번일 이기도 하고, 학급 소집일이다.
방학 동안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는 좋은 기회였다.[1]
나는 숙제한 것을 가지고 학교로 갔다.
가서 축구 좀 하고 아침 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젠 숙제검사를 받았다.
숙제검사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숙제검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12시가 되고, 좀 기다리다니까 1시가 되었다.
벌써 아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당번인 나와 성진이만 남았다.
"얘들아, 당번은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오너라."
나와 성진이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자,
"세억아, 난 학교 안 올래."
"나도. 내가 괜히 오후에 학교 오나 뭐 !!"
이렇게 소곤소곤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나는 학교 갈 의욕이 약해졌다.
나중에 성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왜 오후에 학교에 나가지 않았을까? 집에 있어도 노는 주제에….'
지금은 이렇게 후회가 될 뿐이다.
※ 줄넘기 수 - 341
[1] 일기에는 그렇게 표현했지만, 5학년 모두가 우리마을 애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방학이라고 얼굴 못 보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1978년 1월 15일 일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프다고 하셨다.
'웬일일까? 어제만 해도 끄덕 없으시던 엄마가…?'
조금 있으니까 어머니께선
"세억아, 아침 먹고 약 좀 사 오너라."
이렇게 해서 약을 사러 갈려는데, 좀 고달픈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밖 날씨가 매우 차기 때문이다.
"엄마, 나 약 사러 가기 싫어."
"가지 마렴. 이젠 괜찮다."
나는 이렇게 되어서 약사러 가질 않았다.
저녁때의 일이다.
저녁밥을 먹고나서 조금 있다니까 어머니께선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어지러워…."[1]
이렇게 앓고 계셨다.
'에이, 아까 약사러 갈 걸. 괜히 안 가서 엄마만 고생시키는구나. 내가 왜 가지 않았을까?'
결국 오늘, 나로서는 불효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젠 다음부턴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이러나 저러나 엄마 감기가 다 나으셔야 할텐데.'
※ 줄넘기 수 - 410
[1] 일기장 원본에도 '힘없는' 목소리임을 표현하기 위해 조그만 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1978년 1월 16일 월요일
오후 때의 일인데, 우리 집 옆에는 내 동생 만한 애가 하나 있다. 즉, 세열이라는 아이다.
내가 소죽을 끓이는데 세열이가 와서 나무도 갖다 주고, 소죽도 앉혀 주었다.
정말 고마왔다.
세열이 덕분에 소죽을 일찍 끓였다.
다음은 집정리 할 차례다.
내가 마당을 쓰는데 세열이는 마당에 있는 연장을 부엌에 갖다 놓았다.
그 뒤로도 나는 세열이의 도움으로 모든 일을 했다.
'정말 세열이는 부지런해!! 남이 시키지도 않는 일을 제 스스로 하니 말이야. 그런데 세열에게 일했는 보답으로 무엇을 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머니에 나도 모르게 손을 넣었다.
그랬더니 돈이 내 손에 만졌다. 그래서 과자 사 먹으라고 돈을 주기로 생각했다. 겨우 10원!
"세열아, 이리 와 봐."
나는 세열이를 데리고 헛간으로 갔다.
"세열아, 이것 받아. 야, 과자 사 먹어."
세열이는 그것을 받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돈 10원이 아깝지 않았다.
'돈 대신 세열이 같은 그 '부지런함'만 있다면….'
※ 줄넘기 수 - 414
1978년 1월 17일 화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내가 큰집에 가니 벌써 큰집에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형은(세한)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1]
나도 거기서 잡지책을 보다니까 세한형이
"오늘은 요리나 한번 해볼까?"
"응, 형 빨리 해 봐. 나도 배우게!"
"그래. 내가 대구에서 배운 건데 먼저, '고구마를 가지고 깎아서 입에 들어갈 만한 정도로 썰어서, 찬물에 깨끗이 씻고, 이젠 후라이팬에다 놓아, 그 위에 기름, 소금 약간하고….' 아직 더 넣으려면 달걀[2] 등을 넣어도 좋다. 이렇게 곤로에 튀겨 먹으면 좋아. 이게 바로 "고구마 튀김"이다. 자, 그럼 직접 한번 해 볼까!"
"응, 빨리 해 봐. 나도 거들께!!"
이렇게 튀김을 만들어 먹어 보았더니, 매우 맛있었다.
'나도 이런 것을 만들어 봐야지. 그래서 나의 음식 솜씨를 자랑해야지.'
나는 이 겨울방학 동안에 세한형이 제일 좋다.
내 음식 솜씨는 내일을 기대해야지.
※ 줄넘기 수 - 592
[1] 겨울방학이라 세한형도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왔는가 보다.
[2] 고구마 튀김에 계란을 풀어 넣으면 도대체 어떤 맛일까 상상이 안된다.
1978년 1월 18일 수요일
오늘은 전교생 등교일이다.
우리들은 학교에 가서 축구를 오래간만에 한번 하고 나서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에서 우리들은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생활 면에 있어서는
1. 얼음지치기 삼가
2. 불조심
3. TV 보지 말자.
이렇게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또 6학년 언니들에게는 중학교 입학금을 빨리 내라고 하셨다.[1]
이제 5학년 우리들에게는
"5학년은 공부가 대개 부진하다. 6학년들에게 비교하면 반 정도밖에 안된다. 그러니 이 방학 동안에 공부를 많이 해 주기 바란다."
또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5, 6학년들에게 다시 한번 더 부탁한다. 너희들은 곧 중학교 지나고, 고등학교 갈 날이 멀지 않다. 그러니 이 방학 동안에 어떤 계획을 하나 세워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은 '과학자'가 되면 하는 생각[2]이 들지마는 더 깊이 생각해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나서, 실천에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 줄넘기 수 - 412
[1]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도중에 전근가신 이후부터는 5, 6학년을 한 교실에 모아놓고 우리 선생님께서 수업을 동시에 진행하셨다.
[2] 어릴 때 꿈이 '과학자'였음을 이 일기를 통하여 처음 알았다.
1978년 1월 19일 목요일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우리 집에도 드디어 대문을 달았기 때문이다.[1] 그럼 거기에 대한 것을 파헤쳐 보자.
내가 집에서 놀다니까
"퉁-퉁퉁 칵!"
이렇게 경운기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 어찌된 일인가? 경운기 위에 우리 대문이 실려 있지 않은가!
"엄마, 우리 대문 가지고 왔어. 빨리 나와 봐."
"벌써 나 여기 나와 있다. 왜 그렇게 설치느냐!"
나중에는 어떤 아저씨가 전기로 대문을 붙이는 장면을 보았다.
정말 신기하였다.
일을 다 끝내신 아저씨는
"주인님, 이 큰문은 아직 열지 마소. 이 작은 문만 열면 됩니다. 만약 큰문을 열면 금방 한 땜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여기 벗겨진 이 색은 철공소 오시면 색을 드리겠어요."
나중에 할머니께서 대문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셨다.
나도 이 새 대문을 깨끗이 오래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 줄넘기 수 - 156
[1]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새마을운동'이 거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던 시절이라 우리시골에도 지붕개량은 완료되었고, 이 시기에는 블록담장 및 철대문 달기가 대유행이었다.
1978년 1월 20일 금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나는 둘도 없는 세봉이네 TV를 보러 갔다.
가니 6시! 벌써 "방울대장"을 하고 있었다.
매우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도 경찰관 아저씨들이 간첩을 잡는 데까지 제일 재미있었다.
'어떤 아이 둘이가 산 속에 들어와서 길을 잃어서 굴속에 들어가니 거기는 간첩이 우글우글 거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붙잡혔다. 그때 하늘나라 방울대장이 그 아이들을 구출했다.
그럼 간첩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다름 아닌 어떤 도로를 폭파시키려고 벌써 폭파장치를 모두하고, 이제 폭파하는 시각을 기다리는데 그 시간은 겨우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 아이 둘이도 이 간첩들이 이야기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방울대장이 경찰에 연락을 했다.
경찰에서는 먼저 호송차를 보낸 후, 뒤에 박사, 순경, 군인들이 가기로 했다. 물론 호송차에 탄 군인 한 사람은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폭파되기 전 10초……, 4초, 3초, 2초 할 사이에 저 폭파지점에 호송차가 들어갔다. 1초, 콰광―.
도로는 파괴되고 호송차에 탄 군인은 중상을 입었고, 나중에 간첩들을 데리고, 굴속에 가서 두 아이들로부터 이 자리에서 북한 제5호와 만난다는 것도 탐지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두 아이(영옥, 철수)의 재취 있는 행동을
'내 몸에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1978년 1월 21일 토요일
해가 질 무렵쯤의 일이다.
내가 소죽을 끓이는데 아버지께서
"세억아! 네가 망치 없앴지?"[1]
"나는 망치 못 봤어요."
"네가 망치는 제일 많이 쓰고 제자리에 안 갖다놓으니 아이들이 주워 갔잖아."
"난 절대 안 만졌어요. 엊그제 만지고 연장 통에 갖다 놓았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연장 통에 가서 망치 하나를 가져 오셨다 (우리 집에는 망치가(장도리) 두개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가져오신 것은 내가 쓴 것이었다.
"그게 내가 엊그제 쓴 건데…."
"그럼, 네가 엊그제 쓴 것이 이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것인가 잘 생각해서 꼭 찾아 와!"
그래도 아버지께서 오해를 하고 계셨다.
나는 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별이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오해를 어떻게 벗어 내나? 기다리자. 기다려야 한다!!!'
나는 다만 이 오해가 빨리 풀렸으면 한다.
[1] 실제 일기장에도 화난 큰소리로 다그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큰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1978년 1월 23일 월요일
오후 때의 일이다.
아버지께선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억아, 미안하다. 망치는 큰집에 집 부스는날 가져갔나 보구나."
"에이, 어른들 아니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연장이 없으면 날 보고 책임지라고 하는데, 앞으로 연장은 다신 안 만질 테니, 연장이 없어져도 내 책임이 아니어요."
좌우간 엊그제 있었던 오해를 이젠 벗어 기쁘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집 식구들에겐 안 전했으니, 다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전하고, 다시는 나에게 연장에 대한 것을 묻지 말도록…….
'그런데 만약 이 일이 반대현상(아버지는 나, 나는 아버지)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오해를 받았더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할까?'
좌우간 오해를 깨끗이 씻었으니 안심이 될 뿐이다.
1978년 1월 25일 수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세훈네 집에서 어린이 연속극을 보는데, 지목이네 어머니가 오셔서 TV 보는 큰아이들에게
"얘들아! 나 좀 따라가자. 지명이네 아버지가 강가에 손님 자전거 건너주러 가서 아직 안 왔어."
"아까 방송을 해도 안왔는가요?"
"그래, 빨리 가보자."
이렇게 해서 강가에 가니 강가에도 없었다. 그래서 강 건너에도 가보니 없었다. 이쪽으로 건너 오려고 하는데 어디서
"으으으…."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났다.
우리들은 얼른 그쪽으로 가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지각이가
"아버지― 아버지―."
부르니까 저 멀리서 또 '으으으…' 소리가 났다.
"저기다!"
우리들은 그쪽으로 가보니 옷은 다 젖어 있었다.
아마 손님을 바래다줄 때 술을 한잔 드시고, 강가 다리를 건너주고 오다가 빠져서, 이렇게 강변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먹지 말아야지. 생명을 줄이는 술을 먹지 말아야지.'
나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1]
[1] 요즘은 술을 좋아하는 편인 나를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겸연쩍은 웃음이 나온다.
1978년 1월 26일 목요일
오늘은 큰할아버지 제삿날이다.
그래서 나는 큰집에서 저녁을 먹고 누워 잤다. 왜냐하면 저녁 늦게 1시에 일어나서 나도 제사를 지내려고 그렇게 했다.[1]
'아직 큰집에도 구식이구나! 음식은 대체로 적은데 밤 1시에 지내는 것이 뭐람.'[2]
드디어 밤 1시가 되었다.
할머니께서 깨우셔서 일어나니 벌써 제사지낼 준비가 모두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우리 집 식구들도 모두 와있었다.
잠시 후 우리들은 제사를 지내고 음식과 제삿밥을 먹었다.
더구나 어제 오신 큰집 고모님께서 밥을 비벼 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큰집 고모님께서 오실 때 따라온 중학 3학년인 상태도 있었다. 상태 역시 밥을 맛있게 먹었다.
나중에는 고모님의 이모저모, 이쪽의 이모저모를 재미나게 얘기하고 나서 우리 식구는 우리 집으로 왔다.
오늘 나는 큰집 제사를 지냈는 것으로 마음이 상쾌하다.
(1. 27 아침에 씀)
[1] 제사가 끝나면 맛있는 것을 먹겠다고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결국은 잠이 들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허탈해 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2] 당시 학교에서는 가정의례준칙에 대한 교육이 철저했다.
1978년 1월 27일 금요일
오후 때의 일이다.
나는 큰집 상태하고 노는 것도 재미없어, 밖에 나와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았다.
한참 신나게 노는데, 어쩐지 큰집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노는 것도 포기하고 큰집에 가보았다. 이상하였다.
아까 까지는 상태 신이 마루 밑에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때의 일이다.
"오빠, 넌 상태와 고모님께서 가시는 것 봤나?"
"아니, 그럼 상태와 고모님께서 가셨단 말이지?"
"그럼."
'아니 이럴 수가! 내가 잘못했어. 상태는 나를 얼마나 보고싶어 했을까? 미안 미안….'
나도 마음이 몹시 섭섭했다.
귀신도 오늘 상태가 간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아침에는 가지 않더니만, 오후에 갈 줄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리움뿐이다.[1]
[1] 당시에는 '상태'와 헤어짐을 이렇게 안타까워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상태'라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아마도 가까운 고모가 아닌 촌수가 먼 고모가 왔었는가 보다.
1978년 1월 29일 일요일
점심때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요즘 한참 마루 놓기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형,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께서 손수 마루를 놓는다. 그때,
"세억아, 충청도 고모네 편지 좀 써라."[1]
"어떤 내용요?"
"마루에 바르기 위해 올 때 들깨기름 좀 가져오라고 해라."
아마 마루에 발라서 윤을 낸다던가, 나뭇결이 민들민들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의 소식은 대충……
먼저 안부를 전하고, 이제 이 편지의 목적인 들깨기름 부탁을 하고 나서 우리 집과 다른 집 소식을 자세히 썼다.
그리고 여기 놀러 꼭 오시라고 하였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나니, 나도 이젠 누구에게도 편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충북 보은군 탄부면 대양리"는 들깨가 많다고 한다.
[1] 친 고모님이 충청도로 시집갔다.
1978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때의 일이다.
일어나니 희미한 울음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다.
그래서 어디서 우는가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누구 집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엄마, 누 집에서 울음소리가 나? 응?"
"병철이네 아버지가 시상 빌었단다."
"예! 돌아가셨어요?"
나는 몸이 아찔했다. 어떻게 그 60세 밖에 안되신 분이 돌아가실까? 아마 무슨 병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 것 같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할까? 사람, 아니 모든 생물은 왜 죽어야 할까? 생물이 죽지 않는 약은 없을까? 그런 약은 언제 발명될까? 또, 정말 만들어지면 어떻게 먹을까?'
내 의문은 너무나 많다.
난 아직 내 의문을 모르는데, 어떻게 알게 될지 모르겠다.
다만 그런 약이 있어 영영 사람이 죽지 않으면 좋겠다.
또, 죽지 않기 위해선 자기 몸 건강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78년 1월 31일 화요일
점심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나무하러 간다하기에 나도 나무를 하러갔다.
산에 가서 나무해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어머, 굉장히 많이 했네. 호호호, 설에 때게 좀 더 해라."
하시며 좋아하셨다.
"에이그…, 엄마는 나에게 보통 때는 좋아하지 않고, 이때는 헤헤헤… 간신이네."
"그래, 이제부터는 안 그럴께. 두고 봐라."
이렇게 엄마와 나는 재미나게 이야기를 했다.
"세억아, 다시 한번 말한다마는 시간 나면 설날에 때게 좀 더 해라. 그렇다고해서 단번에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해라."
"알았어. 설날에 쓸 나무는 할 테니 두고 봐요."
"세억아, 너희들이 한 나무 좀 가져오렴."
"아니 엄만…, 설에 땐다고 하셔 놓곤…."
이렇게 나무관계로 효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