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236A7384D242FCE23)
![](https://t1.daumcdn.net/cfile/cafe/122EDB384D242FCF24)
양동초등학교 입구(위)와 건물 전경(아래)
올해 양동 초등학교 졸업반 학생수가 16명이라고 한다.
내가 단석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다닐때 6학년 졸업반이 89명이라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 숫자는 단석, 양동, 삼산, 계정, 매월, 금왕(지금은 고송리에서 양동으로 오지만 당시는 고송리 친구가 없었다)등 총 6게의 초등학교가 양동 중학교에서 만났다.
당시 중학교는 남자 3개반과 여자 1개반 총 4개반으로 학생수 총 240여명으로 알고 있다. 물론 당시와 40여년의 세월을 격하고 있지만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양동면민의 인구수 현재 5000명이 약간 않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인구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양평군에서 4번째로 많은 인구수를 갖고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2개 면, 읍중 거의 청운, 단월과 끝을 다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양동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학생수가 1개반을 꾸리지 못하면 학교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1개반 학생 정족수 35명을 채우기 위하여 타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힘든 입학 시기를 맞는다고 한다.
양동에 초등학교는 이제 양동 초등학교 하나고 분교는 고송리에 하나 남아있다. 그나마 학생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왜그런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기때문이다. 우리의 기억에는 아직도 기성회비를 내지못해서 칠판 한쪽 귀퉁이에 자기의 이름이 적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어린 초등학교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한달 4만원되는 수럽료를 낼 돈이 없어서 중학교의 배움을 포기해야만 했고, 고등학교 대신 공장을 찾아간 많은 친구를 우리는 아픈 추억으로 간직해야만 했다.
서울로 가면 힘들지만 직장을 구할 수 있었고 허기를 지울 수있었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갈 수 없다고 느꼈던 배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 시골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정착촌 서울은 가보지 못한 시골 친구들에게 가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집중되니 사람따라 돈이 집중되고, 교육, 복지, 생활의 모든 조건이 나아지고 사람이 떠난 지역은 떠난 사람들 이상으로 모든 삶의 조건들이 낙후되기 시작하였다.
40여년간 지속된 이 삶의 불균등한 환경은 인간이 만들었으면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이 내린 팔자가 되어버렸다. 그 팔자속에 양동초등학교의 현실이 양동중고등학교의 현실이 놓여진 것이다.
이 팔자를 고쳐보자. 사람이 만들었으면서 사람이 못고친다면 말이되는가. 물론 이 개조의 시작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가 사막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나올때 죽음을 각오했을때처럼, 석가가 왕족으로서 모든 부귀와 명예를 떨치고 고행의 길로 들어갈때의 그 마음처럼...
내가 못한다면 대신 하겠다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자. 나의 비겁함을 조금이라도 위안 받기 위해서라도....
서울가는 길
이 길따라 가면 서울 닿겠다
내 어릴적 친구 미옥
이 길따라 갔을까 싶다
부귀를 얻고 기쁨을 만나고
희망을 찿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 믿음 길끝에 내 어릴적 친구 미옥은 보일 것만 같다.
나의 친구 우돈도 아버지 따라 이 길을 갔다.
정이 굶주림에 먹히던 시절
풀석이는 흙먼지 따라 서울로 간 친구는
두고온 정을 몾잊어 꺼이꺼이 울다가
한마리 파랑새가 되었다.
두고온 사연은 다 다르지만
두고온 정은 한결 같아서
부귀와 희망을 쫓아서 온 서울
그 서울의 배부름 끝에 우리는
우리는
한잔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고향으로
간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몸으로
첫댓글 양동학교 현실이 말씀이아니네 애들도 순풍순풍 많이낳아야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중고등학교는 학생수가 많은데 고등학교는 공주로 많이나가 대학으로 진출하고 앞으론 여기고등학교도 마이더스학교로 바뀌면 외지에서 와서 경쟁률이 높아진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