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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을 때 - 욘 1:4-16
풍랑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모이고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어떤 제비뽑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요나는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요나의 숨기는 실패했고 사람들은 요나를 추궁합니다.
그래서, 뜻밖에 만난 풍랑으로 인해 요나의 계획은 다 실패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서 조용히 떠나려고 했던 요나는 배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목의 집중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 행복을 위해 필요한 만족스러운 조건들을 사람들은 복이라고 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지금 불행합니다. 그 어느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살맛이 안 난다고 말하지요. 살맛이 안날 때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미치겠다’ ‘환장하겠다’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들 합니다.
요나의 다시스로 가려는 계획도, 숨어서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도
허락되질 않습니다.
온 세상이 다 일어나서 나를 괴롭히려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누워 잠든 요나를 깨워서 제비뽑기를 한 후에 요나가 뽑히고 나니, 사람들이 요나에게 네가 ‘누구냐!’하면서 요나의 정체성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 물음에 요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9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요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백성들 가운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나를 덧붙여서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다른 길, 다른 방향,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쩜 이렇게도 솔직하고 당당한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요나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10절에서, 당신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느냐고 두려운 마음으로 묻고 있다는 거지요.
10절,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오히려 요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교회 옆에 있는 술집 주인이 ‘교회가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당신들의 기도를 듣고 우리 술집을 망하게 했다’고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하고, 목사와 성도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설마 너네 술집을 망하게 하겠냐냐 억지소리, 헛소리하지 말라’ 하면서 법원에서 싸우는 꼴이 된 거 같습니다.
누가 더 믿음의 소리를 하는 건지...
요나는 자신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 내가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이배를 탔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아니 당신 왜 그랬어! 당신 미친거 아냐!’하면서 그를 다그치고 있는 일이 벌어졌네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주일날 교회 안가고 있으면 옆에 있던 절에 다니는 사람이 그럼 못쓴다고, 주일에 교회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주일에 교회 안가는 게 말이 되냐고 나무라는 꼴이네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자리를 떠나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 이런 일들이 생기지요. 그때는 사람들이 왜 나를 가만두지 않는가 하고 너무너무 그런 상황들이 싫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잘못된 길을 가고 어둠속으로 숨어들어가기만 하는 나를 다시 깨우고 회복시키고 올바른 길을 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집요한 손길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문제는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뽑히고 요나가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배를 뒤집을 것 같고 산산이 부숴버릴 것 같은 풍랑 이는 바다는 점점 더 흉용하고 그들을 압박해 왔다는 것이지요.
급기야 사람들은 요나에게 방법을 구합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는 바다에서 우왕좌왕하며 두려움가운데 있는데, 그들은 그 파도가 완전히 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고 그들은 그 파도를 잔잔하게 할 방법이 요나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희한한 일이지만 배에 탄 사람들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들 앞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했지만 요나의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고 오히려 배에 탄 사람들이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불순종하는 요나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서, 복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상당히 충격적이지요?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다 같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자 하거나,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서 나로 인해 이 배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위태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다에 던지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를 죽여라!’ 라는 말이지요.
요나는 정말 죽음도 개의치 않는 대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미쳐서 하나님을 향해 끝까지 완강하게 대항하는 사람이거나 둘 중에 하나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듣는 자들의 미움과 시기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죄를 사하시기를 기도했던 스테반과는 너무도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요나를 걱정하며 당신의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좀 구해달라는 청원처럼 들립니다.
요나가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일을 즉시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웠고, 또 그들은 요나를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나오지요?
13절.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
그들은 할 수 만 있다면 다 같이 사는 방향을 선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요나를 살려보려고 그리고 그 자신들도 다시 육지로 돌아가서 생명을 보존하려고 애를 쓰는 거지요. 그런데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14절에 가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14절.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주 여호와는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한꺼번에 믿음 있는 성도들이 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읽고, 교회사의 역사에서 읽혀지는 집단적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이렇게 다시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는 영광스런 사건들이 일어나야겠지요.
결국 요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요나의 말대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집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15절에 나옵니다.
15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순식간에 바다가 잠잠해 졌습니다.
16절을 보니,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고 나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타이밍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지만, 배안에 탄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목숨을 건졌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두려워했으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나아가 서원까지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시고자 했던 니느웨가 요나의 설교를 듣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했지만 요나의 불순종은 놀랍게도 요나와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의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도, 구원의 역사도 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요나서를 보면서 깊이 깨닫게 됩니다.
다시, 우리의 시선을 바다에 던져진 요나에게 향해봅시다.
요나는 정말 죽고 싶었나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나를 죽이라고 한 선지자는 없었는데 요나는 정말 특이한 선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리고 지금도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요나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어떤 때는 ‘살 맛이 안 난다’. ‘죽고 싶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인생을 비관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그만큼 산다는 것이 모든 면에서 힘이 든다는 말이지요.
왜 힘이 들까요? 왜 살맛이 안 날까요?
아무것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는 거지요.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나를 행복하게 해줄 행복의 조건들이 아무것도 없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희망을 잃게 되고 인생을 비관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처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라’라고 말하고 싶을 때 ,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인생은 원래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이다. 내 맘대로 되어야 한다. 내 뜻을 이뤄야한다. 모든게 잘못 설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갈 때, 주소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네비게이션이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해주지 내가 주소를 잘못 입력해 놓고 목적지를 가려고 하면 안 되겠지요.
내 인생, 내 뜻, 내 소원, 내 목표 이런 잘못된 생각부터 버려야겠습니다. 내 생명도, 내 삶도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알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웃기겠지요.
제가 옆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서 내장고에서 음식을 꺼내서 식탁에서 먹고 있으면 멱살이 잡히든지, 욕을 먹던지, 경찰한테 잡혀서 파출소로가든지 하겠지요. 혹은,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뭐든 웃긴 일이 벌어지겠지요.
내 생명, 내 인생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내 생명,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살아야한다 이 말입니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어서 성공한 듯 보이는 완전한 실패 인생이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요나의 계획의 실패가 그를 결국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바다에 던져서 사람들이 볼 때는 끝장난 인생이 되었지요.
배안에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다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왜 저 사람은 자기의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저렇게 바다에 빠져 죽게 되는가! 참 안타깝다. 어리석다. 한심하다. 요나의 기사가 네이버에 떴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별의별 댓글을 다 달았겠지요. 그러나 그 바다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실패했는데 그 실패가 그를 성공으로, 승리로 이끌어 갔습니다.
인생에는 잘돼서 망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능력 있고 성품 좋은 부모님을 두고,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받고 인물좋고 공부 잘하고 돈 잘벌고 인기 많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한생을 살았는데 그 인생이 망하는 인생이 있거든요.
저는 일박이일로 우리 신학생들과 엠티를 다녀왔는데 평택에 있는 광은 기도원에서 세계성막복음센타를 방문해서 큰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길에 청남대를 들렀어요.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을 거기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도 보았는데 그분이 쓴 책들도 보았습니다.
이제껏 잘해 와서 인생의 성공에 관해 이야기를 해왔는데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었지만 오늘날 누가 그를 보고 승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78세의 나이에 징역 15년 벌금 130억 인가요?
요나서에서 극적인 터닝 포인트는 바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요나는 정말 죽고 싶었고 이제 모든 것을 여기서 끝장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배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기를 요청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이 내던져진 바다 속에서 그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지고 그 안에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요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요나는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은 다름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전환이지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이전에 가졌던 나 중심적 사고, 나 중심적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중심의 사람, 말씀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방향의 전환입니다.
다시스로 향하던 인간이 니느웨로 향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이지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고뇌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주님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이지요.
마 26:42-46,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갖기를 원하시는 순복의 마음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을 취하기를 갈망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요나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8~40)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요나경험’은 온 인류에게 터닝 포인트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반전도 골고다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절망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기 전에 골고다에 올라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도서 12:1-2,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아무 낙이 없다’. ‘살맛이 안 난다’ 하기 전에 ...
십자가의 골고다에서 절망은 희망이 됩니다. 전에는 내 행복이 내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었다면 인생의 좌절과 허무함, 잡히지 않고 잡을 수 없는 행복으로 인해 살맛을 잃어가는 자신을 통해 이제는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수정 해야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 때, 그 절망하는 인간은 하늘의 영원한 소망으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누가 요한에게 나아옵니까?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이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소망이 없습니다’. ‘나는 절망하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내적 고백이 그들의 발걸음을 요단강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당대에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는 천둥과 같은 경고의 고함을 쳤던 것입니다.
마 3:7,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얼마나 강력한 진노가 느껴지는 외침입니까?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더니, 너희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살길은 하나이지요.
절망하는 인간이 되라는 겁니다. 모든 허식과 교만을 벗어던지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멸망에서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라고 외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면서 도대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보면서 얼마나 많이 좌절을 경험하고 인생의 헛된 영광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됩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도망가고 싶을 때, 숨고 싶을 때, 죽고 싶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내 행복을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그치고 그 연약하고 가엾은 손을 뻗어 십자가를 붙잡아야겠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마 6: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눅 12:6-7.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413장 얼마나 평안한 느낌입니까? 그런데 이 찬송에 엄청난 인생의 비극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 곡의 가사를 쓴 분은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입니다. 이분은 시카고의 성공한 변호사였을 뿐 아니라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이었습니다. 그는 크고도 번창하는 한 법률 회사의 사장이자 유명한 법률가였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안나는 그 유명한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의 절친한 친구이자 적극적인 후원자였습니다. 스패포드는 무디가 담임하던 시카고 무디교회의 회계 집사였습니다. 그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가 가는 인생길이 늘 잔잔한 강처럼 순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복한 집안에 불행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패포드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네 살 되던 해 폐렴으로 죽고 만 겁니다. 참으로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스패포드는 마음을 추스르고 1871년 봄에 확장되는 시카고의 북쪽지역 부동산에 그의 재산 대부분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해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300여명이 숨지고 시카고의 9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전소되면서 1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스패포드는 투자한 재산 전부를 잃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거기다가 자기가 회계로 있는 무디교회마저 전소되었으니 교회를 새로 지어야 하는 부담도 스패포드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했던 아내는 그 일로 신경쇠약 증세가 도졌습니다. 아무래도 휴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스패포드는 1873년 그의 가족과 영국에서 휴양을 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특히 그 기간에 무디가 바로 그곳에서 설교한다는 소식은 장소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스패포드는 자기가 벌여놓은 사업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무디교회 건축 문제도 발등의 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패포드는 아내와 네 딸을 먼저 영국으로 보냅니다.
그의 아내 안나와 네 아이들, 11세의 애니, 9세의 마가레트 리, 5세의 엘리자베스 베시 그리고 2세의 타넷트 이러게 다섯 식구가 증기선 Ville du Havre라는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1873년 11월 15일, 뉴욕항을 출발하였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1주일 째 순항합니다. 그런데 출항한지 일주일이 지난 22일 새벽 2시, 이 배는 대서양 한 가운데서 영국 철갑선 "라키언"(Lochesrn) 호와 정면 충돌하였습니다. 그들이 탔던 여객선은 대서양 한 가운데서 불과 12분 만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226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그 희생자 속에 스타포드의 네 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아내는 구조된 몇 사람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9일 후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웨일즈의 카디프(Cardiff)에 도착한 스패포드의 부인은 남편에게 짤막한 전보 한통을 보냅니다.
당시 통신도 시원찮다보니 남편 스패포드는 이 소식을 알리 없지요. 아무 것도 모른 채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서 바쁘게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온 전보가 도착한 겁니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짧게 적혀 있었어요: “saved alone. what shall I do” (“혼자만 구조되었어요. 어떻게 해요...”)
소식을 접한 스패포드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맬 부인이 걱정되어 부인을 데리러 가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며칠 동안 항해가 계속되던 어느 날 선장실에서 차를 같이 하자는 전갈이 왔어요. 차를 나누는 도중 선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스패포드 박사님 이제 곧 우리 배는 귀하의 딸들이 잠들어 있는 지점을 통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데리고 갑판 위로 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 귀하의 따님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선장의 말을 듣는 순간 스패포드는 밀려오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자기 선실로 뛰어 들어온 스패포드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리 가혹하게 하시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복음을 위해 헌신한 저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너무 너무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해서 데굴데굴 굴면서 밤새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그토록 몸부림치며 울부짖다보니 어느덧 새벽 세시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It is well with my soul"(내 영혼은 편하다.) 그러면서 갑자기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이 몰려오는 겁니다.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린 스패포드는 떠오르는 가사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음율을 맞추기 위해 많이 생략되었습니다마는 스패포드가 지은 원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when peace, like a river, attendeth my way,
나의 가는 길 강과 같이 순탄할 때
when sorrows like sea billows roll;
슬픔이 큰 바다 물결처럼 몰아칠 때
whatever my lot, thou has taught me to say
나의 운명이 어떠할지라도 주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 말씀,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그것이 내 영혼에 족합니다.
얼마 후에 스코틀랜드에서 부흥의 불을 붙이고 있던 무디와 생키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 너무도 엄청난 일을 겪었습니다. 두 분 목사님도 뭐라고 위로해야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실의에 차 있을줄 알았던 스패포드와 부인 안나 표정이 너무 밝고 행복한 겁니다. “목사님, 찾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의 부부를 이미 찾아오셨고 평안을 주셨어요. 그로 인해 제 영혼이 너무 평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찬송시를 전도자 생키에게 전해주며 작곡을 부탁합니다. 생키는 이 찬송시를 당시 무디와 생키를 도와 부흥운동에 동참했던 복음가수인 블리스에게 주어 오늘의 찬송을 작곡하게 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이 찬양시를 1876년 무디와 블리스가 그를 방문했을 때 블리스에게 작곡을 부탁했는데요. 블리스는, 1876년 11월 마지막 금요일 시카고의 한 홀에 천명 이상의 사역자들이 모인 집회에서 이 곡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몇 년이 지난 후 스패포드 부부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했어요. 그리고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했는데요. 그러다가 1888년 말라리아에 걸려서 선교사로서 생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그가 시작한 선교사역은 지금까지 ‘Spafford Center of Children'(스패포드 아동센터)이라는 단체로 자리 잡아 매년 수만명 이상의 어린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그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죽고 싶을 때.
그때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주님을 부릅시다.
반드시, 새로운 일이 당신의 영혼과 삶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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