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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계절에만 유난히 인파가 몰리는 산이 있다. 진달래나 철쭉산행으로 유명한 봄 산, 시원한 그늘과 계곡이 좋은 여름 산,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 산, 쌓인 눈을 헤치며 눈꽃을 감상할 수 있는 겨울 산. 더러 한 계절에만 유독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산은 다른 계절 볼품없는 모습으로 외면당하기도 한다. 사람이나 산이나 한결같은 모습은 중요하다. 하지만 적절한 변신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설봉산에 가려 유명세는 덜하지만 경기도 이천과 광주의 경계가 되는 정개산~원적산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사람을 유혹한다. 산 아랫녘 주변 볼거리도 풍부하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래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더 큰 기쁨이 된다. 홀로 1주일에 서너 번씩 정개산~원적산 능선종주를 한다는 이창수씨. 그는 자칭 타칭 ‘원적산 도사’다. “원적산을 사랑한다”는 그는 산 자랑에 여념 없다가도 “단체로 많이 찾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은근슬쩍 꼬리를 내린다. 한적한 산에서 즐길 수 있는 ‘참 맛’을 잃게 될까봐, 산의 ‘제 모습’이 훼손될까 우려해서다. 산길 솥뚜껑 닮은 소당(정개)산 정개산(鼎蓋山·406.7m)과 원적산(圓寂山·634.1m)은 한남정맥 문수봉에서 북쪽으로 치올라가는 앵자지맥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길게 이어지는 능선은 경기도 광주와 이천의 경계가 되며 원적산은 이천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정개산과 원적산을 잇는 종주는 양방향 모두 가능하다. 이천시 송말리를 들머리 삼아 원적봉~천덕봉~정개산으로 향하는 산길은 정상에 닿기까지 조망이 덜 시원하고 가파른 구간이 많아 반대 코스를 권한다. 동원대학을 들머리로 정개산을 들러 천덕봉, 원적봉을 거쳐 영원사로 내려서는 코스는 오르내리는 구간도 적당할뿐더러 하산 길에 철철이 다른 산수유마을의 정취도 맛볼 수 있어 일석이조다.
동원대학 정문에서 300m 남짓 이천 방향으로 가 왼쪽으로 난 임도를 1km쯤 따라 오르면 범바위 약수터가 나온다. 차량 3대 정도 주차가 가능한 약수터 앞 공터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약수터 바로 옆으로 통나무계단이 놓인 산길을 따라 오른다. 참나무계단은 설치된 지 오래인 듯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지고 부식되어 자칫 미끄러질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능선에 닿기까지의 구간은 만만치 않게 가파르다. 임도를 따라 죽 걸어오지 않고 자동차를 이용했다면 갑작스런 경사에 종아리 근육이 많이 놀랄지도 모른다. 능선까지 가파른 계단 구간에는 겨울철을 대비해 굵은 고정로프가 매어져 있다. 약 10분쯤 오르면 누렇게 바래가는 참나무 이파리들 사이 새파란 하늘이 비어져 나오고 곧바로 주능선에 닿는다. 동원대학에서 뻗어 나온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인데, 동원대학 뒤로 직상하는 코스는 심하게 가파르니 피하는 것이 좋다. 왼쪽으로 ‘등산로’, 오른쪽으로 ‘정상’이라고 간략하게 적힌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동쪽으로 향하면 본격적으로 능선종주가 시작된다. 산길은 오랜 세월 곱게 다져진 흙길 위에 묵은 솔잎들이 켜켜이 쌓여 발바닥을 간지럽힐 정도로 푹신푹신하다.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사귀들이 사람의 걸음에 바스러지고, 그렇게 가을은 깊어간다. 능선상에서는 경기도 광주와 이천 시가지들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도시와 도시의 경계가 되는 곧은 산줄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골프장 인조잔디가 온통 푸른 색칠을 해놓고 오른쪽으로는 이천의 너른 평야에 고개 숙인 벼이삭이 금빛 물결을 이룬다. 인공미와 자연미의 완벽한 대조와 묘한 색대비의 조화는 한 화면 속에 재미있게 구성된 그림이다. 출발한 지 30분 만에 철탑 공사 중인 현장을 지나면 길이 세 갈래가 되고 이정표가 서있다. 갈래길은 이천과 광주의 양쪽 마을로 내려가는 길인데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왼쪽으로 봉현리, 오른쪽으로 지석리라 적혀있으나 잘못된 표기로 여기서 이천 쪽으로 내려가면 지석리가 아닌 남정리가 나온다. 이후에 서 있는 이정표 지명도 한 동네씩 밀려 잘못 표기돼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탈출로가 많다는 점도 이 코스의 장점이다. 물이 떨어져 탈진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겼을 때 어느 구간에서든 30분 안에 쉽게 마을에 닿을 수 있다. 야트막한 봉우리를 두세 개 넘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을 지나면 곧바로 정개산 정상이다. 범바위 약수터에서 정개산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새마을금고산악회가 표지석을 세워놓은 정상부는 작은 바위봉우리다. 경기 광주시 실촌면과 이천시 신둔면 지석리를 나누는 정개산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시야가 탁 트여 이천 들판과 설봉산을 비롯한 산군들이 두루 조망된다. 솥뚜껑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정개산은 우리말로는 ‘소당산’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지석리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해마다 소 한 마리를 공양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하여 우당산(牛堂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 천년 고찰 영원사로 내려가는 길목에 정성스레 쌓아올린 작은 돌탑이 있다. 싸리나무 군락 지나 억새 능선 천덕봉으로 정개산 정상에서부터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내리막길로 15분쯤 가면 오른쪽으로 도암리 이정표가 있는데 여기도 지명이 잘못 표기되어 실제로는 지석리에 닿게 된다. 약 20분 더 가면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90도 꺾이는 내리막인데 자칫 길을 잃을 우려가 있다. “10팀 중 4팀은 길을 잘못 들더라”는 이창수씨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천에서 왔다는 세 명의 일행은 아무 의심 없이 곧바로 난 길로 향할 태세였다. 그 길은 능선에서 빠져나가 광주쪽 어느 목장 울타리로 이어진다. ‘등산로’ 이정표가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2m쯤 들어간 곳에 설치되어 있는 데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가리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니 주의를 요한다. 긴 능선길이 지루하지 않은 것도 이 산의 매력이다. 주능선에 올라선 이후 대부분 시야가 트이는 구간이라 답답하지 않다. 20여 분 계속되는 오르막으로 숨이 차오를 무렵 다시 20분쯤 내리막이 이어진다. 정개산이 끝나고 원적산이 시작되는 안부다. 이 근처에 샘터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산악회 표식기 꼬리표가 여러 개 붙어있는 지점을 찾아내면 쉽게 길이 나온다. 나뭇가지가 크게 세 갈래인 소나무에서 아래로 난 오솔길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약 5m 높이의 바위 아래쪽에 샘이 솟고 주변으로 널찍한 공터가 있다. 바위 틈으로 두 군데서 솟는 물의 양은 쉽게 수통을 채우기 충분하다. 샘터로 내려선 능선으로 다시 올라와 야트막한 봉우리에 다다르면 무덤 한 기가 있고 주변에는 일부러 그늘에서 옮겨 심은 키 작은 소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며 마른 낙엽층 사이 고개를 내민 가지버섯의 보랏빛에 현혹될 즈음, 고운 흙길이 끝나고 이제 군데군데 돌뿌리들이 삐죽삐죽 발에 걸리기 시작한다. 죽은 나무들 사이 산딸기와 복분자나무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싸리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몇 해 전 큰 산불로 불탄 자리에 자라나기 시작한 싸리나무는 7~8월이면 보랏빛 꽃 알싸한 향으로 등산객을 유혹한다. 그러나 꽃이 진 자리에서 만난 것은 출입금지 철조망과 원적봉 아래 군부대 포 사격장에서 간간이 들리는 포 소리. 철조망은 대부분 철거되고 일부만 남아있어 등산로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 능선 구간은 느닷없이 펼쳐지는 억새밭이다. 억새숲을 헤치며 잠시 몸을 돌려 해가 지는 방향을 좇는다. 서쪽 지나온 긴 능선을 먼 시선으로 더듬어갈 때 등 뒤로는 그림자가 길게 눕는다. 샘터에서 원적산 정상인 천덕봉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남짓. 천덕봉 정상에는 군부대가 이용하는 헬기장이 있다. 원적산은 일명 무적산(無積山)이라 불리기도 하며 예로부터 36대에 걸쳐 정승과 장군이 배출된다는 금반형지(金盤形址)가 있다는 말이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천덕봉 정상에 서면 주변이 360도 완벽하게 조망된다. 북쪽 광주 시가지와 그 너머 산군, 남쪽 이천을 비롯해 북동쪽으로 용문산과 추읍산(바가지산)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으면 월악산 영봉까지 보인다고 한다. 천년고찰 영원사와 산수유마을 정상인 천덕봉 일대는 산불의 흔적으로 온통 민둥산이다. 큰 산불 이후 해마다 10~12월까지 석 달 동안 전위봉 아래 부대에서는 군인들을 동원해 나무와 풀을 깎는 작업을 한다. 천덕봉에서 원적봉을 바라보고 서면 동쪽 깊은 골짜기에는 숲이 우거지고 서쪽 능선은 맨살이 다 드러나 색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겨울 잘 깎인 민둥산에 눈이 소복히 쌓이면 부드러운 산의 자태는 하얀 칼날능선으로 돌변해 넋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제 천덕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내려서는 일만 남았다. 작은 헬기장 두 개를 지나 20분 만에 원적봉을 타넘으면 다시 붉은 깃발이 꼽힌 작은 봉우리가 나온다. 거기서 동남쪽으로는 영원사로 이어지는 하산로가 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정남 방향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횡단하기로 했다. 이쪽으로 가면 젊은 스님 한 분이 3년 동안 머물며 수양을 하던 자리를 지나게 된다.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인 4~5m 높이의 바위벽에 연등이 걸려있고 여름에는 냉장고 기능을 한다는 호랑이굴도 있다. 잘 쌓은 돌탑을 돌아나가 횡단하면 원적봉에서 곧바로 이어지던 길과 만나 영원사로 내려설 수 있다. 대체로 쉬운 내리막길에는 키 작은 참나무들이 많이 자라 석양에 곱게 물든다. 영원사까지는 생각보다 멀다. 작은 봉우리 2개를 넘어야 하는데 원적봉에서 1.14km 내려간 지점에 임도와 영원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영원사까지 다시 0.59km다. 영원사(靈源寺)는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 해호선사가 창건했는데 당시 절은 지금의 절터보다 약간 위쪽에 있었다. 일제시대까지는 영원암(靈源唵)이라 불렸으며 창건 후 400여 년이 지난 1068년(고려문종 22)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영원사 약사전 안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불상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좌상(이천시 향토유적 12호)이 안치되어 있다.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할 때였다. 불탄 흔적밖에 아무 것도 없는 절터에는 해호선사가 창건 당시 조성, 봉안했다는 수마노석으로 만든 약사여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거스님의 꿈에 약사여래가 나타났다. “왜 나를 버려두고 갔느냐”고 몹시 호통을 치는 바람에 놀라 깨었는데 같은 날 신도들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혜거스님은 당장 절 위쪽의 안산으로 올라가보았고 거기서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석불 스스로 내려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약사전을 짓고 석불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후 좌상은 여러 번 자리를 옮겼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처음의 약사전 안에 모셔졌다. 영원사로 내려서니 석불 봉안 후 혜거국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천년 전설을 간직한 채 석양 속에 서 있다. 천년 고찰 영원사는 다시 불사를 위해 여러 군데 생채기를 내고 있었지만 너른 앞뜰에 잘 가꿔진 화단과 넉넉한 품은 더없이 고즈넉하다. 정개산을 시작으로 12km나 되는 긴 능선을 타고 원적산 정상을 거치는 동안 5시간 넘게 달렸지만 산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원사 아랫녘으로 볼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천시 백사면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산수유나무 군락지가 있다. 백사면 도립리를 중심으로 경사리, 송말리 일대에는 매년 3~4월이면 노란 산수유 꽃이 만발하고 11월에는 선홍색 산수유 열매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4월 초 열리는 이천백사산수유축제도 좋지만 10월 말 서리가 내리고 난 후 더욱 붉은 윤기가 흐르는 산수유 열매는 차라리 황홀경이다. 산수유마을에서 빠져나오면 도립리 길가에 선 반룡송(천연기념물 제381호)도 만날 수 있다. ◇ 백사면 일대는 온통 산수유 나무가 군락을 이뤄 산수유 마을이라 불린다. 교통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IC에서 빠져 3번 국도를 타고 광주, 성남 방향으로 10여 분 달리면 동원대학이 나온다. 동원대학행 버스는 서울에서 수시로 있다. 강변역 1113-1번(3~5분 간격 동원대학 출발 막차 22:30), 잠실역 500-1번(첫차 06:10 7~10분 간격), 교대역 500-2번(첫차 06:20 10~20분 간격)을 이용한다. 버스가 동원대학 캠퍼스 안까지 들어가므로 바로 전 정류장(정문 300m 전방)에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 동원대학 정문에서 이천 방향으로 300m 지점 큰길가에 정개산 이정표가 서 있다. 한식집 고미정, 이천쌀밥부페 간판을 보고 임도로 1km쯤 올라가면 산행 들머리가 되는 범바위 약수터다. 반대쪽 들머리인 영원사는 이천버스터미널에서 1일 6회(07:20 08:30 11:20 14:40 17:20 19:20) 운행되는 산수유마을(도림리)행 버스를 타고 송말1리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천 시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1만원 안팎의 요금이 나온다. 서울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이천 가는 버스는 수시로 운행(첫차 06:10 막차 22:40)되며 요금은 3500원이다. 숙식 이천은 도자기, 온천, 이천쌀밥 등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이다. 정개산 들머리에 위치한 고미정(031-634-4811)에는 백자정식(1만원), 분청정식(2만원), 청자정식(3만원)이 있다. 이천쌀밥의 원조격인 이천쌀밥집(031-634-4813)은 쌀밥정식(8천원)이 유명하다. 넓은 마당을 가진 한정식집이 많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고 주변에 해강도자미술관, 도예촌 등이 가까워 둘러보면 좋다. 안흥동에 위치한 이천온천지구에는 미란다호텔(031-633-2001 www.mirandahotel.com) 등이 유명하다.(콜)택시(031)-631-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