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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
I 서론
A 기독론의 정의
B 기독론과 구원론
C 기독론의 방법
II 성서의 기독론
A 성서의 중시ꍷ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B 구약의 기독론적 칭호
C 신약의 기독론적 칭호
D 신약의 기독록
III.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A 예수 생애와 기독론 형성
B 탄생과 성육신
C 삶: 가르침과 사역
D 십자가 죽음
E 부활
IV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해석
A 초대교회의 해석
B 고대교회의 에큐메니칼 기독록
V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기독론
VI 현대신학의 기독론
A 19세기 자유주의 (슐라이에르 마허)
B 신정통주의 ( 바릍, 불트만, 본회퍼 )
C 신정통주의 이후 ( 판넬베르그. 틸리히, 스케레벡스, 몰트만, 소브리노 )
VII 다원화 시대의 기독론
A 종교다원주의 (존 힉)
B 과정신학( 존 캅 )
C 해방신학 ( 소브리노 )
D 여성신학 ( 류터 )
E 토착화 신학
참고문헌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 상,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 1998
예수 그리스도 : 현대신학자들의 기독론 하 : 출판사 상동
1-6챕터 분량. 5-6챕터 사이에 윤철호 교수의 논문 삽입.
Erickdon , Milliard, J 홍찬혁 역, 기독론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1991
이종성: 그리스도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김광식: 조직신학 II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1990
Baillie, D. M. God was is Christ. London: faber and faber, 1961 고전
Macquarie , John. Jesys Christ in Modern Thought.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1991
Norris Richard. 중요한 교재임.
Ogden, Schubert M. The Point of Christology. New york: Harper &貈 Publisher, 1971
Pannenberg, Wolfhart.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The Westmonster Press,1971 아주 좋은 내용의 책
Schillebeecks,Edward. Jesus. Trans Hubert Hoskins. New Yord : Crossroad,1980 아주 좋은 책임. 윤철호교수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
Schweitzer, Albert. The Quset of the Gistorical Jesus: A Criticla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Werde. New York: Macmillian Publishing co. Inc. 1968 번역본 있음. 아주 좋아하는 책.
주교재:
성적평가: 기말고사 1회로 성적평가. 책에 있는 내용을 숙지하기 위한 문제(?)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에 한해서 Paper를 써서 대체.
주목할 사항:
강의 980305
I 서론
A 기독론의 정의
B 기독론과 구원론
C 기독론의 방법
A기독론의 정의: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 또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등의 명제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고백의 내용안에 들어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다 예수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적 진술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이면서도 신학적이어야 한다. 예수는 역사적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신학적 이름이다. 예수는 고유명사이고 그리스도는 일반명사이다. 지금은 마치 고유명사와 같이 쓰이고 있다. 신학적 의미는 역사적 이해와 긴장관계에 있다. 긴장관계라 함은 기독룐의 과제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제자들에 부활되었다고 선포되는 인물을 역사기술자의 입장에서 방관자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접근을 하는 일이다. 예수라는 자연인의 현상을 접근하는 것을 예수론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임. 예수전이라고 해도 무방( Jesus Biography ) Jesusology와 Christology는 동일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여야 한다.
기독론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과 함께 세가지 문제를 말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에 대답하는 이가 베드로뿐임. 이 고백"주는 그리스도시다"은 정말로 예수님의 역사적 삶의 도상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에 생겼던 fact이고 그 사실의 시기의 진정성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와는 무관하게 기독교의 기독론적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였던 역사적 예수의 삶의 자리였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데서 기독론이 출발한다.
이것은 순수한 가치 중립적인 discription이 아니다. 성서 자체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전기를 전하는 단순한 현상학적인 예수전biography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사람들의 실존적인 구원의 체험과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바로 성서이다. 그것은 신앙고백적 해석이고 신학적 해명이다.
다른 한편, 이런 신학적 과제와 동시에 역사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 즉, 신학적 과제와 역사적 과제는 항상 긴장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에 전해졌고 해석, 수용되어 졌으며 전승되어 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은 실존적이고 신앙고백적이면서도 신학적이며 해석학적인 합리성을 지녀야 한다.
기독론의 신학적인 위치
가장 중심적인 위치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것을 믿고 수용하고 해석하고 이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이야기되어질 때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이중 예정론에서의 하나님(이미 어떤 영혼은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도 어떤 영혼은 영원히 지옥가도록 예정 되어 있다고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독교를 혐오할 것인가? 이 때 기독교는 매우 이기적이고 사악하게 보일 것이다.)과 한 영혼을 찾아 헤메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 서로 상충된다. 그러므로, 이중 예정론에서의 하나님만 말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면 우리를 2천년 전의 예수에게로 이끌며 그 분을 현재에 경험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서(as the Word of God, not by the Word of God)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피존물의 세계에 성육신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원형이다. 참인간의 원전한 모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참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참된 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말론적인 인간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형은 우리의 실천적인 노력과 과정을 요구한다. 원형은 회복되어지는 것이지만 모형은 우리가 회복되어가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형은 명령형으로 주어진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신앙공동체이다.
예수는 모든 역사의 중심이며 그로부터 시작됐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된다.
성서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질 때 그것이 기독교적 성경해석일 것이다.
구약은 장차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신약은 이미 오신 메시야에 대한 증언으로 본다. 성서의 권위는 그것이 성서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다. 성서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과 명령을 들려주는 한에서 권위를 가진다.
지금까지 신학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이야기했다. 신학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는 사람이 칼 바르트이다.
강의 980310
아직 교과서가 나오지 않았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독론적 물음: 그가 누구이신가? 에서 출발한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물으신 내용도 현재형의 질문이었다. 이 대답은 불가피하게 그분의 인격에 관한 의미규정을 요구하고 있는 질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이라는 인격에 대한 의미규정을 담게 되어있다. 최초의 기독교공동체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와 도마의 "나의주 나의하나님"이라는 고백에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의미규정이 담겨 있다.
전통적인 기독론과 고전적기독론:
전통적: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함. Early Christianity 는 고대기독공동체와 다르다. 고대기독공동체는 AD 100년이후 그리스 세계에서 교회의 양식에 있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해가면서 인정받는 기구화되고 제도화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고대기독교에 이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존재론적 의미규정이 헬레니즘적인 사고와 틀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틀안에서 이루어지게됨. 성육신이라는 개념이 5세기경까지 기독론의 주요관점이 예수는 누구인가? 였다 . 이것이 고대교회의 주요 논쟁점이었다. 예수의 존재론적 규정을 어떻게 내리는냐에 따라 이단,정통 구분함.,
두가지 질문제기.
①하나님과의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신성이 확립된 후의 문제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동일한지 인간과의 중간체정도인지의 입장들과 해석들이 있었다. 결론은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동일본질이라고 남. (고전 5:19 ) God was in Christ. 였음.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이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구속을 이루셨다는것은 존재론적인 규정보다는기능적 규정이다.
AD 2세기가 되어가면서 헤레니즘적 2원론적 해석은 만족되지 아니함. 본질이 동일하다라는 명제가 확립되기에 이름. 종교회의를 통해서 동일본질의 확립과 함께 하나님의 존재는 singular 이냐, 아니면 plural 인가로 발전하여 결국 삼위일체로 나아가게 됨. 삼위일체의 교리형성사는 기독론적 논쟁의 산물이다. 신성을 확증하고 나서 하나님과 존재를 규정한 후 삼위일체를 규정짓게 됨.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교리가 생김. 그 뿌리는 기독론에 있다.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 규정하고 확증하고 수립하기 위해서 논리적인 귀결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인가? 어쩌다가 들어간 것이다. 폭소
사도신경을 외울 때, 전능하사---성부의 하나님.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성령을 믿사오며,,,--성령을 그냥 믿는다.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전통적으로 항상 option으로 들어간다 정당한 status를 갖지 못한다. 성자와 성부를 엮어주는 bond역할 반 하고 있다. 연결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② 예수님의 신성 or 인성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때에 -해결은나지 않지만- 인격과 본성에 대한 사변적,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거의 배타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오는 것이 바로 약점이다.
오늘날: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다루지 않고 있느가? 플라톤의 이원론과 신체론에 근거한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규정이 오늘날 우리으 사고와 이해의 지평안에서 적합한가르 따지는것이 현대신학자의 기독론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성육신이론의 재해석이 중요한 과제이다.
다양한 재해석의 가능성:
불트만: 형이상학적 규정을 거부하고 실존론적으로 환원시킴. 예를 들어 성육신의 의미를 이야기할때 그분이하나님의 아들이어서 나를 구원하는가?-형이상학적 규명, 나를 구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가?-실존론적 규정이며 불트만은 이것을 옹호함. 제자들의 고백을 실존론적규명이라고 여겼다. 실존적인 가치체험에 관한 고백이라고 함.
오늘 우리가 생각할때 고대교회의 형이상학적 기독론의문제덤: 당시로서는필요한 과정이었을테지만 이 기독론은 사변적인 성육신등에 빠져서 소모적인 논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고대이후 중세로 가면 일단락되어지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논쟁은 하지 않음. 주로 예수님의 사역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구속교리가 발전하게 됨. (안셀름) ,그리스도의 3 중적 직무 (칼빈 ) 종교개혁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가져다 주는 현실적 실존적 의미를 중시함. 예수님의 사역을 3중직을 통해서 실존적으로 만들어 냄.
아직도 이것이 완전하지 않은 이유: 전통적 구속교리는 사역게 기초한 것이긴 하나 구속교리는 십자가와 부활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지상의 살에 대한 견해가 배제되어 있다. What Jesus does는 이해해도 What Jesus did 는 이해되지 않고 있다. 그러한 것이 이해되기 까지 18세가 계몽주의 가 지나서였다.
18세기이후;
예수가 누구였고 무슨 일을 하였는가? 서구사회는 엄청난 변혁을 겪게 된다., 정치적으로 민주화, 중세노예사회에서 시민사화로, 기존권위의 붕괴, 교회이탈. 인간실존의역사성에 관한 이해가 싹틈. 이것이 가장 중요함. 성경을 읽어도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나 이제는 역사적 비평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게됨. 철학적으로도 형이상학 적 접근(연역법) 이 통하지 않음. 과학방법론에 입각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었음.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기존의 교회에서 가지고 있던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됨. 아래로부터 출발하려는 의도가 강력하게 나타남.
19세기 역사적 예수 탐구: 신학적 새로운 주제: 에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런 역사적 기초를 확복하고 그 위에서 다시금 오늘날의 예수는 누구이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하는 신학적 히명을 하려고 함.
기독론이라는 상부구조이전에 하부구조(역사적 에수)를 찾으려고 노력함. 이것으 어떻게 찾을 수있는가? 역사비평적 접근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전승사비평...등등등. 그래서 이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예수상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신앙고백되어지고 이미 신학화되어진 교리화된 도그마화된 것이므로 독단론에 가깝다고 하여 거부함. 기초하는 역사적 fact에 가서 다시 출발하자고 함. 이분법적인 구조를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찾기 시작함. 이것이 19세기 신학의 전부였다.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
교과서 8장에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적 의미가 있다. 꽤 길지만 읽어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결론: 이런 18-9세기의 예수님의 지상의 삶을 돌아보려는 시도는 일단 실패였으나
긍정적 효과:
상당한 성과가 있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성경을 읽을 때 더 이상 계몽주의 가 없었던 것처럼 17세기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서 성서를 그렇게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성서를 읽을때 역사비평이라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 마귀의 도구?
그리고 실제로 편집사,양식사, 문학비평이라든가 다양한 성서해석의 방법론들을 사용할 대 성서로부터 들려오는 메세지가 풍요로와진다. 권위를 침식하지 않고 오히려 통전적인 복음의 의미를 드러낼 수있다. 18,9세기의 사람들이 새로운 기독교복음의 측면을발견해내기도 하엿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메세지들은 1펑 수백녀 간 잊혀져 있던 것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는 아직도 한국에서도 이상하게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영향:
근본적인 한계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수의 생을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으자리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철저한 신앙고백이 들어있었기 대문에 신앙고백이 아닌 해석되지 않둁느 것을 찾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20세기 밝혀지게 되었다. 쉬바이처와 불트만이었다.
기독론적 과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점이며 그것과 함게 누구시며 무슨일을 하셨는지 역사적인 접근을 하지만 역사 실증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역사를 이해하면서 주체,객체 이원론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역사실증주의 적 접근이나 그런 것은 이미 없어졌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은 역사성안에 자기 실존이 들어있기 때문에 역사를 넘어서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시각이 인간에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론적인 과제는 현재적인 그리스도의 차원과 객관적인 예수는 항상 같이 가는 문제이다. 편의상 구분하는 것이다. 사실상 interrelated 되어 있다.
기독론의 목적.: 실존적 고백(그리스도를 따름에 의해서 가능한 영역). 인식적 앎. 실천적 따름 , 역으로
역사적 현실속에서 그리스도를 다름으로 경험적으로 믿고 안다. 삶의 실천을 해보면 그 때에 비로소 완전하게 알 수 있다.
유형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통적 신학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인격과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누구이며 무엇하는가?
고거 누구이며 무엇했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랴 하는가?
이 세가지의 기독론적 주제는 하나의 기독론이라고 하는 그릇을 바치고 있는 세개의 다리와 같다. 현재적인 고백적 신앙. 과거를 향한 탐구, 지식, 앎. 이것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자세.
세가지는상호 보완적이고 배타적일 수 없다.
기록론 과 구원론 : 다음 시간에
강의 980312
지난시간 강의내용: 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현재적인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 무슨일을 하는가?라는 문제와 함께 역사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인식은 18,9세기 이후에 출현. 예수에 관한 이분법적인 사고의 시작. 전통적 신앙고백과 교회의 신조속에서 전승되어온 내용들이 지배적으로 신앙의 그리스도상에 집중되어 있었음. (역사적 예수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않고 도그마화된 모습을 보였음.) 이런 교회의 전통과 권위가 무너지면서역사적 예수의 현실에 집중하기 시작함. 오늘날(20세기 후반부) 을 사는 우리들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잘될때 그렇다는 이야기) 우리나라의 신학계 경우 , 일반적으로 아직까지 서구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계몽주의를 경험하고 있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Menatality가 있기 때문에.....정신문화적인 성숙의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B.기독론과 구원론
정의:
구원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 기독론이라면 그의 일에 관한 논의가 구원론이다. 19세기 이후 쉴라이에르 마허, 바르트 등은 품격과 사역등으로 나누지 않는다. Person &Work 등으로 나누지 않는다. 이것은 편의상은 구분이다.
개인적인 인격을 생각하더라도 사람이 누구인가와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는 뗄 수 없는 것이다. 바보는 바보짓을 하니까 바보지... 정체성의 물음과 관계성의 물음이라는것은 뗄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전통적인 구원론은 그분이 누구인가에서 시작하였다.그분이 우리르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의 순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그분의구원론에서 출발하여 인격의 규정으로나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왜?
현대신학의 특징은(슐라이에르 마허 이후로 ) 항상인간의 삶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정황속에서 의미있는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본다. "오 늘 살아가느 현실속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지고 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여성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라는 삶의 상황에서 추구하려고 한다. 현대신학은 그러므로 구원론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있다.
현대신학만 구원론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고 거의모든 신학이 그렇다. 제자들부터가그랬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했을때, 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던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민족의 구원자이고 해방자인 M을 만났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존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주고 새 존재로 변화시킨 이 분을,그리고 샬롬을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그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구원론적 이해가 우선되었다.
우리의 삶의 구원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사변적이 비판인가 란 문제가 있었으나 사실은 구원론의 문제였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신성이 니케아 회의 에서 확정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예수님은 사람인가 신인가 였댜. 딜렘마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인간이라면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한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해주어야 한느데.... 예수님이 신이라면 죽을 수 없는 .....
이 신학적 입장은 하나님과 예수니이 동일본질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멜랑히톤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자비를 아는것이지 그분의본성과 성육신의 양태등을 아는것은 아니라고 하였다.루터도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에도 고대와 중세의 신학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세의 신학이 너무 사변적이고 구원론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교리 논쟁에 치우치고 인간의실존에 대면하는 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신학은 실존적이다.
본회퍼: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 실존적 구조이다.
Being For Others. 존재구조자체가 우리를 향한 열려 있는 존재라고 한다. 본질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존재라고
틸리히: 기독론은 구원론의 한 기능일 뿐이다. 구원론의 문제에 기독론의 답변이 나오는 것이다. 구원론적인 질문에 기독론적인 답변의 형태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기독론적 구원의 극잔적 형태: 기독교의 인성, 신성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환원: 구원해서 하나님인가? 하나님어서 구원하는가? 전자라고 봄.
기독론을 구원론으로 환원시길 수 있는가? 아니다.
판넨버그: 반대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존재론적인 규정으로부터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의미의 규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 그래서 재미있느 사람. 결국은 인식론의 문제라고 볼수도.... 예수라는 인격체가 있고 객관적인 리얼리티로서의 그의 삶이 있음. 그의 삶이 어떠하다라는것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며 그 분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객관적인 그의 삶안에 있다고 보는 것임.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계시는 객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이성만 투명하게 있으면 되므로... 이렇게 객관적을 파악되어질 수 있다고도 보았다. 주관적인 것으로 결부시키지말고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주장. 계시는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며, 그 안에 있는 보편적 인식의 문제이다. 계시는 사실의 언어(Language of fact) 로 말한다고 하다.
인식론: 객관적 실제론, 주관적 관념론...
실제에 대한 인식이 객관적인 실체로 오는가 선험적인 것을 다가오는가? 여기에 대하여 이성안에서 구성해 내는 것인가?
이 두가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실제는 어느 한가지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는 항상 양쪽의 요소가 같이 가야 한다.
구원론적 기독론적 문제점과 대한: 기독론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구원론적 접근은 불가피하다.
주관적 관심, 실존적 구원의 필요성 없이 전적으로 순수하고 객관적, 가치중립적인 접근은 가능하지도 않고 무의미하다. 역사를 이해한다는것은 자기를 이해한다는것이다. 역사이해는참여적인 이해이다. 역사를 이해한다는것은 현재의 실존의가능성을 두고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Self - Understanding 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자기의이해가 있어야,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의역사를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구원론적으로만 가면 우리의 기독론이라는 것은 하난의 Projection뿐이다. 신학은인간학이라고 포이에르 바허가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니까 하나님을 Projection을 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허상이 되는 것이다. marx도 종교가 인간의 곤궁, 고통, 비극적 삶의 실존에대한 반증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고통스러우므로 구원자를 요구한다고.. 일방적인 구원론의 관점으로만 가면 이런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객관적인 Reality가 부족할 수 있다.
대안: 원리적으로 이해할때 그분자체의 존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객관적 실제로서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인 것처럼 , 예수님이 계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독론은 구원론보다 선행한다.
현실적으로 예수와 만나서 관계를 맺고 따를 때 우리는 의미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와 만나진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을 출발시킨다. 그리고 There and Then 으로 가서 역사적 삶의 현장으로 가서 전문적으로 탐구해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하는가? 언제나 주관적인 실존적인 의미에 대하여 열려있을뿐만아니라 실존적인 이해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말이 무슨뜻인가? 한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규정이 관계성안에서 규정되는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죽을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느가에 따라 그 사라의 인격이 결정되는것이다.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아들이 기억속에 있는 아버지를말하게된다.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는 영향을 주신 제자공동체에서 해석되어진 인격과 나누어질 수 없다. 예수님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뗄 수 없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구분하는것은 틀린것이다. 그러하다면 이것이 주관적인 것인가? 객관적인 요소 : 영향이 있다.
Offer and Response 가 합해서 하나의 Reality가 된다. 관계성과 정체성은 나눌 수 없다. 그가 누구인가는 관계안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은 당시의 제자 공동체와 초기기독교 공동체에서 또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완성된다. 그 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1세기의 상황과는 다른 20세기에서 고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이며 종말까지 열려 있다.
한 인격의 존재는 모나드(?) 가 아니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Reality가 그러하다. 시공의 Gap을 뛰어 넘어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연역법: 말씀은 하나님. 예수를 보고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에 도달하기 까지 여러과정이 있었다. 다양한 초대교회에서의 해석에서 차츰 지배적인 몇 가지 개념으로 정리되고 니케아에 이르러서 통일이 된다. 100년 경에 요한복음이 씌였다고 보고 6-70년이라는 시간속에서 말씀이 육신되었다는 고백까지 발전이 되는 것이다.
8장을 읽어보아라.
강의 980317
II. 기독론의 역사적 맥락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해와 사고의 지평에서 형성
두가지 맥락-유대종교,이스라엘 역사속에서의 사상과 신앙
-헬레니즘적 사고.
이 두 가지가 역사적 맥락의 양대산맥을 가지고 있으나 유대적맥락이 좀더 주요한 맥락으로 나서게 됨.
유대종교의 맥락에서 이해한 기독론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역의 의미의 해명인데 이것자체가 해석학적인 해명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사건의 예표로 이해하는 것 등. 유대적 사고의 지평안에서 하나의 해석학적인 과정에서 형성되어짐. 이런 해석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교리를형성하는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맥락에서 가지고 오던 메시야, 하나님 나라, 유대관습, 인자 사상등은 예수님에게 직접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방의 압제에서 구해줄 메사야를 기다렸었음. 부활경험, 오술절 경험등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됨.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증거하기 시작함. 그러나 당시의 메시야관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음. 그러므로 기독론 구성과정에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같이 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사고의 맥락에서 이해했음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에서의 메사야 사상- 지혜, 고난의 종,
헬라문화에서 온 사상- 로고스, 구주 등.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 부활체험 등이다. (사도바울 예외)
신구약에 나타난 칭호-메시야(구약)-70인역에서 크리스투스 라고 번역함.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민족적인 종교적인 것이다. 메시야는 왕이라는뜻. 하나님만이 왕이었음.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제일 정치체제에서 있어서 가장 낙후되어있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우수하다고 볼 수 있으나 이스라엘은 사사시대가 계속되었다. 씨족사회를 중심으로 위급시에는 지파동맹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왕권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왕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성경은 부정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How dare you want kings!!! 왕을 세우면서 부터 비극이 시작됨.(왕이란 것은 절대권력이며, 절대 부패한다. ) 그러나 그것이 역사발전의 대세였다. 왕정국가로 가기 전에 사무엘과 같이 나라를 지도하던 예언자등이 있기도 하였다. 지파 동맹의 지도자들은 사도적 권위를 사용하였다. Anyway,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는 반대했다.
여담: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야? 웃기는 소리;; 솔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나와서 솔로몬 처럼 우리를 가렴주구 하려고 합니까? 라고 물었다. 거기에 백성들의 희생이 섞여서 지어진 것이었다. 다윗왕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성전을 짓게 하였다고 . 르호보암이 갑절이나 더하겠다고 하여서 여론이 여로보암으로 가고 남북이 갈라지게 되었다. 갈라지는 씨를 솔로몬이 뿌린 것이다. 역적같은 왕이다.
메사야 사상의 등장: 남북이 갈리고 급기야 망하면서 시대적인 배경으로 메시야 사상이 등장한다. 백성의 고통과 억압을 지내면서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그리워 하게 된다. 다윗은 한국으로 말하면 고구려 광개토 대왕정도 ??? 싸우러 나가면 다 이겼었다. 그러할 때, 민족의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던 다윗왕 시대의 향수를 가지고있는 것이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다비드의 별을 국기로 삼고 있다. 그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며서 민족적인 메시야 사상이 전민족적으로 퍼지면서 메시야 대망사상이 종교적으로 계승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후손으로- 우리 민족을 이방에서 해방시키고 다윗시대와 같은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가져달 줄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것이 메시야 사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 사상을 제자들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자의식이 예수님안에 있었을까? 또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어떤 인식과 이해를 하게되었을까?
우선 성경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았다는것이 자의식이 없음을 말하지는 않으나 분명하지 않은 면이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을 계기로-베드로 신앙고백이후- 예수님이 그 후로 몌시야 ship 을 드러내면서 고난과 죽음이 확정된다. 이런 도식으로 성경이 전개되어짐. 예수님의 자의식에 대한 것이 19세기 역사적 탐구의 주된 주제였다. 이것은 깊이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메시야 성애 대한 자의식이 있다고 볼때, 그러나 그 메사야 ship 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상적인 권세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야는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속에서 확신할 수 있다. 고난을 스스로 예고하심. 고난의 종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음.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 하신대로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 된다. 새로운 개념정리가 필요했다.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버려야 했다. 수정하고 버려야 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 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부활고 함께 메시야관도 부활했다.
책의 내용을 읽어 보아라.
인자 개념: 人者라고 해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단순하게 여겨서는 않된다. representative of man 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아담이 첫째 아담이고 그를 통해 저주와 죄를 얻게 되었으나 예수님이 둘째 아담이어서 그 안에서 구원과 회복을 얻게 되는데 인간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시8:4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이관대...: 여기서의 인자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구절을 가지고 人子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서 예수님을 가리켰다. 구약의 시편의 인자는 人間 이다. 이런 명칭이었는데 다니엘서 등의 묵시문학으로 가면 천상의 인자개념이 된다. 앞의 개념과는 대립적 존재...
신약으로 오면 양쪽론이 다 있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문맥상 인자는 사람이다. 안식일이 사람위해 있다. 는 뜻이 된다.
예수님도 인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다. 인자가 자신을 즐겨 부른 표현이었다. 예수님의 인자개념은 무엇인가? 천사의 인자? 대표의 인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인자도 아버지앞에서 부끄러워 하리라"여기서의인자는 제 3인칭이라고 불트만은 주장하기도... 마태에서는 "나도 부인하리라.."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의미의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지칭으로 인자개념을 사용했을 때, 자신을 의미한 증거는인자를 항상 고난의 개념과 연결시켰다는 것 .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잡혀서 죽을 것이라는 것... 여기서 독특성이 있다. 구약의 인자는 인간아니면 천상의 인간이어서 고난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신약의 개념-예수님의 개념-은 항상 고난과 관련되었다. 고난과 더불어 천상의 종말론적 자의식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됨-교수님 사견. 고난을 받고 종말론적인 인자로 천상의 인자로 다시 올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음. 여기에는 십자가와 구원의 구조가 있다. 실제로 기독론이 형성될 때, 이런 구조로 형성된다. 누룩처럼 비참하게 시작되나 후에는 빵을 부풀리는 것과 같이 ... 인자개념안에 두가지 변증법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복음을위한 함축적 개념이 들어있다.
윤철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