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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그리고 봉래국민학교의 추억<上>
<註>제겐 1949년 봄 봉래초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단체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 피란을 갔다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는 바람에, 봉래와는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거든요. 그런데 다시 제가 태어난 곳인 만리동에 돌아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면서 봉래국민학교와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지요. 이를테면 ‘명예 졸업생’ 쯤은 될까요. 그때 그 추억을 되살려 적어본 글이 있습니다. 길고 지루하더라도 ‘봉래인’들의 추억이 알알이 담겨있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서울이 상전벽해(桑田碧海)했다한들 이만한 데가 또 있을까. 서울역 뒤 ‘마루보시(丸帽)’가 있던 마차조합 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 서부역 쪽인데, 행정구역으로는 만리동(萬里洞)이다. 마루보시는 일제 강점기에 통운회사가 거기 모여 있었고 그 짐꾼들이 빨강색의 둥그런(丸) 모자(帽)를 쓰고 있어서 마루보시 혹은 ‘아카보(赤帽)’로 통했다. 더러 마루보시(丸星)로 쓰는 이도 있으나 발음은 같지만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기차정거장에서 짐 나르는 사람을 아카보라고 부른다. 그들의 사택은 지금의 아현뉴타운 염리동일대에 모여 있어 그곳을 마루보시라 부르기도 한다.
그때도 역시 화물이 많이 오르내리는 곳이 서울역인데, 사람은 동자동 쪽으로 드나들지만 화물은 서울역 뒤 염리동이나 만리동으로 빼돌려 싣거나 풀었다. 그래서 지금 같으면 인천 공항이나 김포에 있어야 할 서울세관도 한참동안 그곳에 있었다. 수입물품을 일제 때부터 이곳에 기차로 들여왔다. 중고등학생 때 소위 ‘빽 좋은’아저씨들을 따라 들어가 ‘가위질’하지 않은 외국영화를 볼 수 있던 곳도 이곳 세관이었다. 운 좋게 <섬(島)의 마리>라는 외국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기절할 뻔했던 기억이 난다. 섬이나 도(島)나 그게 그거지만, 그땐 외화제목을 멋 부리느라 <산(山) - 일명 ‘마운틴’>하던 때가 아닌가.
트럭이 귀한 때라서 짐은 대부분 우마차(구루마 -くるま)로 날랐다. 그래서 하루 온종일 크고 작은 마차가 들락거려 그런 북새통이 없었다. 서울역을 거점으로 한 대한통운 전신인 마루보시는,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營圈)”이라는 미명하에 전쟁에 광분해있던 일제의 요충이었다. 또 하나는 서소문 철도관사다. 전시하의 일제 제일의기간산업이 철도다. 따라서 철도직원은 1급 관리다. 2급이, 군인, 3급이 경찰인 시대였다. 지금은 자취조차 없지만, 중앙일보 건너 편 서소문 순화탕 자리에서부터 이화여고 후문가지 늘어서있던 우중충한 기와의 일본집들이 그들 철도관사였다.
이곳 일부를 포함하여 중림동, 만리동, 봉래동을 묶어 봉래정(蓬萊町)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불렀다. 그중 만리동이 필자가 낳아 자란 곳이다. 중앙일보가 코앞이고, 한 때 중앙 인들의 나와바리(蠅張)라서 기억 속에 사라지기 전에 이곳의 추억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추운 겨울 팽이치기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걸어왔던 일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모두 여기모여 팽이를 치고 있었다. 그 골목은 서울에서 몇 군데 안 되는 시멘트 콘크리트길이었다. 그만큼 고급주택가였던 것이다. 해방 후 이야기이니 물론 일본인은 없었고, 역시 한국인 철도원들이 적산가옥으로 빌려 쓰고 있을 때였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나이토 요시마사(內藤吉政)기자는 아카몽(赤門)이라고도 부르는 동경(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었다. 대학졸업 후 단번에 고문(高文)에 패스했으나 그만두고 요미우리를 재수해 들어간 수재다. 그가 요미우리 편집부에 근무할 때,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 쪽에서 일본신문의 편집에 관하여 얘기를 해달라고 그를 초청한 적이 있다. 1987년 추석 즈음이었는데, 서툰 일어로 안내를 맡았다. 편집국에서 대형 유리창 너머로 서소문공원 쪽을 보면 멀리 만리동 꼭대기 봉래국민학교까지 훤히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극히 개인적인 자랑 겸 설명을 털어놨다.
“저쪽이 내가 태어난 곳이고, 거기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나와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 중앙일보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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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그리고 서소문의 추억<中>
서울역으로 전국각지에서 기차가 들어오고, 만리동 ‘큰 고개’ 너머 마포나루로 인천에서 새우젓배가 들어와 물류가 흥청대니 서소문은 시장바닥이었다. 바로 중앙시장이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지만, 첨단건물이 위세를 뽐내는 한국경제신문 앞을 지나면 아직도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하다. 그만큼 중앙시장은 우리에게 오래토록 각인된 것이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중앙시장의 비린내가 막 들어선 중앙일보 신사옥까지 풍길 정도였다.
파주-문산을 지나 신의주와 바이칼 호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달릴 수 있다는 기찻길은 일본군 대륙진출의 교두보이자 군수기지창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은 양곡과 채소, 특히 1종 보급물자 중 생선이 모이는 곳이어서 매머드 냉동 창고가 있었다. 전 종로학원 건물 중림동 쪽 초입에 한국냉동 창고가 있었는데 해방 후에도 생선이 가득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포로로 잡은 미군들을 서울역에 투입해 일본군 군수품을 나르게 하더니, 해방이 되자 역전돼 일본군 패잔병이 미군의 포로로 잡혀 짐을 날랐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해방 전 포로로 일하던 미군들이 얼마나 굶었던지 개천건너 마루보시 쪽으로 밥 좀 달라고 울면서 애원해 주먹밥을 던져줬다고 어른들은 애처로워했다. 어쨌든 일본군 보급품을 추진(Shipping)하느라 기차가 하도 뻔질나게 드나들어 지금도 남아있는 서소문 기차 후미기리(踏み切り)의 차단기는 예나 지금이나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냉동 창고의 추억 한 토막. 마루보시에 있는 2층짜리 일본적산가옥이 우리 집이었는데, 집에서 서울역 뒤 개천 변을 따라 걸어가면 어름창고까지 10분쯤 걸렸던 것 같다. 창고와 공장이 즐비해 인집(민가)은 거의 없어 어린아이도 드물었다. 모두가 나를 알아봤다. 개천에 천막을 짓고 사는 거지들이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부르며 손짓한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그들은 거의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더러운 물에 빨래를 하면서 뭔가 냄비에 끓이고 있었는데 정스럽기는 그만이었다. 더러 기어 올라와 안아주는 아저씨도 있었다.
평소엔 활짝 열려있던 냉동 창고 문이 그날은 빼꼼했다. 낯익은 아저씨들이 반기며 들여보내줬는데 그날은 막았다. 오늘은 돈을 내야한다는 거였다. 들어가 보니 큰 고래 한 마리가 휘장에 가려있었던 것이다. 일꾼들이 장난삼아 술추렴이나 해보려고 돈을 걷었던 모양이다. 고래라야 새끼에 불과했을 터인데, 그만큼 큰 물고기를 본 적이 없어 며칠간 꿈에 나타나 경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서울 거리는 거의 개천(川) 아니면 다리(橋)였다. 서소문 경찰청자리는 알다시피 전매청이었다. 건너편 이화여고 쪽으로 큰 개천이 있어 다리를 건너야했다. 그곳은 언제나 담배냄새가 진동했는데 70년대에 신탄진으로 옮겨가고도 1년 정도는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은 10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봉래국민학교에 6.25 전 해 입학했다. 양정학교 쪽으로 올라가면 길이 좋지만, MBC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후남이, 귀남이, 종말이 남매가 함께 세 들어 살던 골목을 찍었다는 중림동 꼭대기는 지름길이긴 해도 가팔랐다. 눈비가 올 때면 위에서 밧줄을 내려줘 울며 붙잡고 기어 올라가곤 했다. 입학식은 일본식이었다. 사내아이들은 반바지에 쇠단추 달린 윗옷을 입고 있었다. 빡빡머리에 국적불명의 ‘당꼬바지’를 입고 각반(脚絆)찬 선생님까지 보였다. 해방 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모양 그 꼴이었다.
운동장에 신입생들을 1열 횡대로 세우더니 “3보 앞으로~”하고 구령을 건다. 몇 걸음가자 세운다. 각기 앞에 가방이 놓여있었다. 가방을 들게 하더니 또 몇 걸음 간다. 이번에 필통이다. 열어보니 연필과 석유냄새가 진동하는 지우개 등이 들어있다. “가방에 넣고 뒤로돌아!” 한다. 며칠 안지나 소풍을 갔다. 뤽색(Rǖcksack)에 밍밍한 사이다와 벤또(辨當)를 넣어 짊어지고 선생님을 따라 어딘가로 걸어간다. 효창공원이다. 김구선생님 묘소 앞에 열을 지어 세우더니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한다. 그리고는 선생님에 대한 장황한 일장훈시를 늘어놓더니 가지고 온 도시락을 까먹는다. 그땐 물론 효창구장은 없고, 해방되자 누군가가 나무를 모두 뽑아가 묘소근처만 풀이 듬성할 뿐 온통 흙바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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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그리고 서소문의 추억<下>
구 대왕상가에서 대각선으로 건너편에 서대문 구청이 있었다. 호적등본을 떼 오라는 심부름을 가서 신청을 하면 다음날 오란다. 구청 서기가 일일이 손으로 베껴야만 했다. 두 통을 넘어가면 ‘가리방(がり板)’으로 긁는다. 지금은 볼 수없는 등사판인데, 일종의 복사기다. 주로 시험지 찍는데 많이 썼다. 취직용 등 지급을 요하는 민원서류는 웃돈을 주고 원본을 사진 찍어 인화, 현상해 준다. 그래서 민원창구의 ‘급행료’는 자연발생적이었다. 몇 해 전 일본신문에서 ‘가리방 100년 展’기사를 봤다. 그들의 보전하는 노력이 부러웠다.
만리동 길을 걸어 올라가면 맨 처음 조선인쇄소를 만난다. 5.16혁명 때 ‘혁명공약’을 찍어 유명해진 곳인데, 지금도 그 건물은 남아있다. 남로당이 위조지폐를 찍던 조선정판사는 소공동에 있고, 전혀 다른 인쇄소다. 더 올라가면 ‘큰 고개’인데 소의국민학교가 코앞이고, 오른쪽 위로 등산하다시피 올라가면 꼭대기에 환일중고등학교(구 균명중고)가 있다. 성경과 찬송이 성적표 맨 앞에 나오는 미션스쿨이다.
효창공원으로 통하는 왼쪽으로 가면, 고 박대통령 아들 지만 군이 74년 고교평준화 때 소위 ‘뺑뺑이 1호’로 들어간 배문고등학교가 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때부터 만리동이 뜨기 시작한다. 길이 넓어지고 큰 고개 시장도 말쑥해지기 시작했다. 만리동(萬里洞)은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해 고초를 겪은 유학자 최만리(崔萬理)가 살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확실한 고증은 없는 것 같다. 사람 살기는 그냥 괜찮으나 골목길이 너무 좁아 아침마다 “구두딲세~” “두부사려~” 하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면 학교 가는 학생들은 곤욕을 치른다. 특히 “뚫어!”하는 아궁이 청소부들이나 “변소 퍼!”하는 분뇨수거 아저씨들과 잘못 스치면 그날 등교는 포기해야 했다.
극장은 큰고개 넘어 마포 쪽 경보극장(구 도화극장)을 주로 갔다.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찍은 그 극장. 입장료가 싼 3류 인데다가 학생단속이 비교적 뜸해서다. 그러나 영화 <할리우드키드의 생애>에선 교외단속 선생을 피해 달아나다가 한 학생이 추락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등골이 오싹하다. 효창공원에 가면 상이군인아저씨들이 구획을 정해놓고 헌 자전거를 빌려주는 데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인기 짱이었다. 자전거조차 귀하던 그 시절, 30분 정도 빌려 타면 스트레스를 확 날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5.16나고 혁명정부가 잘 한일 가운데 상이군인 아저씨들에게 자활의 길을 열어준 것이리라. 한 대 그들의 횡포가 심했다. 몸은 불편하고 일자리는 없고, 지금처럼 연금 등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했을 터이니 그럴 수밖에. 서울역에 가 기차표를 사 차에 올라도 언제나 ‘손님’이 꽉차있었다. 모두 상이용사다. 자릿값을 내야 비켜준다. 오죽해야 ‘갈고리부대’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그 당시 서울역은, 회상하기조차 싫다. 거지에 깡패에 약장수, 뱀 장수가 판을 쳤다. 들치기, 소매치기는 물론,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을 인신매매하는 뚜쟁이들의 본바닥이었다. 물론 근처에는 윤락가가 창궐했다.
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가거든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을 꼭 한번 찾아가보기를 권한다. “나이센잇따이(內鮮一體)”라고 입만 열면 떠들었지만, 일제가 조선에 짓는 기차역은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한번 써먹은 설계도를 독일에서 사들였는데, 그것이 프랑크푸르트 역 설계도다. 그때만 해도 누가 거기보고 여기보고 하랴 싶었지만 필자도 가서 비교해 볼 정도니 세상 많이 달라졌다. 마치 서울역 앞에 서있는 듯 착각을 할 정도다. 이를테면 쌍둥이 빌딩이다.
만리동은 70년대 들어 행정구역이 바뀌어 일부가 용산구 서계동에 편입된다. 원래 서울역 뒤편 일부는 서계동이었는데, 미군 모터 풀(수송부대)과 영화 촬영소가 있어 유명했다. 심심하면 영화 촬영장면을 보러가는 게 낙이었다. 50년대 후반쯤일까. <마도(魔都)의 향불>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최무룡과 석금성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추운 겨울인데 제법 큰 녹화장 한쪽에 석탄난로 하나를 피워놓아 주인공들의 입에선 대사를 읊을 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벙거지를 쓴 스텝들은 거지꼴 그대로였다. 영화배우 김진규씨의 첫 부인 김보애씨가 최근에 내놓은 회고록 <내 마음의 별>에도 이 촬영소가 주 무대이니 일독을 권한다.
더 가면 남영동 쌍굴다리가 나온다. 위론 기차가 달리는 곳이다. 굴속에서 “아~”하고 소리를 내면 크게 울려 퍼져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불과 대여섯 살 더 먹은 업저지를 졸라 자주 그리로 갔다. 나는 업힌 채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지만 어린 업저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대학교 때, 시골로 시집 가 엄마가 된 그 업저지를 너무 보고 싶어 찾아갔는데, 보자마자 체면 없이 덥석 끌어안고 “네가 이렇게 컸구나!”하며 엉엉 우셨다. 쌍굴다리를 회상하며 나는 미안해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걱정 말라며 그때가 행복했다고 했다. 만리동은 이렇게 해서 내게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남겨준다. 만리동, 그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올 가을엔 꼭 다시 한 번 찾아 가보고 싶다. <정 영 수>
*위 사진 중 필자(정영수)는 오른쪽 앞에서 둘째 줄 첫번째 입니다. 아무런 기록이나 사진설명이 안보여 촬영 연도를 1949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사진 속 인물이 계시면 제 이메일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만, 아마도 80 가까이 되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