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아까 아버지처럼 살면 되는 줄 알았다고 말했지요? 나도 그런 종류의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우리 어머니, 평생 아버지 뜻에 반대하거나 아버지에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참고 견디기만 하는 삶이 있을 수 있는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건 너무 불합리하고 부당하구나. 참고 살기에는 나는 어머니와 너무 다르구나. 그것뿐이었어요. 당신은 아버지와 닮으려 했지만 나는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 했던 것, 거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민둥산..> 중에서 흐르지 못하고 가슴에 와 콱- 박히는 문장들을 옮겨 보았습니다.
<민둥산..>은 <담배 피우는 여자>와 함께 김형경의 중,단편 중 개인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소설집에는 수록되지 못한, 아마 세번째 소설집이 나온다면 그때엔 고이 담기겠지요.
이 소설은 도서출판 ‘이수’에서 출판한 90년대 대표작가 중단편 선집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책에도,
페미니즘 선집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박완서의 작품이 표제작으로 실린,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이란 책에도 있습니다.
<민둥산>에서 김형경은 표면적으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하자면
여성과 남성, 나아가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 그 힘겨움과 서글픔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완성하는 방편으로 결혼이라는 제도로 만들었다면
(사회학이나 경제학에서 말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이나 가정은 여기선 건너뜁니다)
결혼 이후에는 그 핵인 사랑은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단지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붙잡고 버둥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두 사람, 그 서글픈 현실만이 남습니다.
인간이란 그 본성이 고독한 존재이고, 나 아닌 타인과의 완전한 합일이나 소통은 어쩌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정치의 거리두기가 가능할 때,
앞선 기대로 인한 섣부른 실망 보다는 한 걸음 뒤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나에게 위안이란 이름으로 다가오고 힘이 됩니다.
하지만 이도 그럴싸한 말잔치일 뿐, 그렇게 가정이란 울타리를 아름답게 가꾸며 사는 사람들을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결혼이란 사랑 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베품 보다는 요구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경우, 그래도 결혼생활이 지속되는 것은 그 자체의 관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떻게 내려야 할까요?
결혼이란 제도는 그저 필요악이다? 결혼은 말고 연애만 하자?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요. 이쯤에서 전. 마냥. 대책없이. 서글퍼집니다.
전 소설 속의 그녀도, 그녀의 전남편도 모두가 가엾고 가엾습니다.
남편의 월급통장에서 생활비를 인출하며 굴욕감을 느끼고, 하다못해 쓰레기더미에서도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리는 그 여자도,
교양있는 아내, 깔끔한 집안이 부담스러웠다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하루하루 버티기의 팍팍함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그의 고백도 왜 그리 서글픈 걸까요?
문제가 뭘까요?
상실한 거리감각일까요? 변심하기 잘하는 인간의 얄팍한 마음인가요? 제도 자체가 갖는 못된 속성인가요?
‘이해’라는 말, ‘사랑’이라는 말, ‘조화’라는 말
발길에 채이도록 넘쳐나는데 오늘 우린 왜 이토록 힘겨운가요?
가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도중에 뛰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는 나의 문제? 혹은 시간설정이 잘못된 신호등의 문제?
(지난 연말, 종로에서 본 신호등은 남은 시간 표시기능이 있더군요. 큼지막한 빨간 액정이 10초. 9초. 8초…
어처구니없게도 아! 서울이구나! 했습니다. 허나 샘나는 건 신호등이 아니라 골목길과 자잘한 공연들이랍니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여행 같은 걸 거예요. 차를 타고 밤길을 달리기도 하고 안개나 진눈깨비를 맞기도 하고, 이렇게 차를 비탈 아래로 처박기도 하고… 문제는 차창 밖의 사물들에만 정신을 팔아 정작 옆 좌석에 동승한 사람에게는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걸 거예요. 차를 버리고 걷게 되어서야 비로소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