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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계신 주님(딤후 4:9-18)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사도 바울, 그의 주변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을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본문 9절에 의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바울을 괴롭힌 사람들입니다.
본문 14절에 의하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저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바울에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했고, 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으며, 다시 11절 하반절에서는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전도자인 바울과 동고동락하지 못하고 바울을 떠나간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가시처럼 굴면서 바울을 괴롭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 곁에 머물면서 친구가 되어주고 동역자가 되어줌으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지상에서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주변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계획적으로 음모를 꾸미고, 예수의 약점만을 추적하고 발굴해서 죽이려던 유대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스승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도 주변에 있었고, 옥에도 함께 가고, 죽는 데도 함께 가겠다고 장담한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도 있었고, 순정과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 사랑했던 예루살렘의 경건한 부녀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나 예수님의 경우처럼 목회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군가가 계획적이고 패역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를 괴롭히기로 한다면, 그 고통이나 아픔은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동역자가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려는 사람들이 많다면, 한결 목회자의 목회는 활기차고 창조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17절 말씀, 그중에서도 특별히 “주께서 내 곁에 서서”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주를 위해 일하면서 주께서 내 곁에 계신 체험을 날마다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의 호된 반발과 집단 반대에 부딪쳤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9절을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을 보면 “그날 밤에 주께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폭동을 일으키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 27:23절을 보면, 지중해에서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려는 위기 속에 빠졌을 때 “나의 속한 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말하면서,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생명을 바울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곁에 계셨던 주님,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났을 때, 가까이 오셔서 함께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던 바울의 주님이, 오늘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 이런 핑계, 저런 이유로 내 곁을 떠났을 때, 그리고 나를 돕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어야 될 사람들이, 마치 원수인양 나를 반대하고 나설 때, 그래서 외롭고, 답답하고, 낙심되고, 속상할 때, 내 곁에 서서 말씀하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만만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친구라는 말을 “어깨에 나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사람”이라는 긴 단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말은 상당히 깁니다만, 그 뜻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누가 슬픔을 내 대신 그 어깨에 짊어져 줄 수 있겠습니까?
아주 오래 전에 런던 타임즈사에서 친구에 대한 정의를 모집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응모된 입선작 가운데 1위는,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나에게로 오는 사람”이었고, 2위는 “친구란 나의 침묵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3위는 “친구란 기쁨을 공급해 주고, 슬픔을 쪼개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친구에 대한 정의는 동서양의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내 곁에서 떠나갈 때, 내게로 와 주는 사람이 친구라고 한다면, 우리에겐 그런 친구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5:13-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고,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디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내 대신 슬픔을 짊어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의 아픔과 슬픔을 진실로 이해해줄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우리가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며 위로입니까?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 가운데,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늙은 시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벗과 친근한 것은 좋지만 부잡스러워서는 안된다. 일단 사귀어서 좋은 벗이라면 네 가슴 앞으로 바싹 잡아 당겨서 무쇠테로 졸라 매어라. 그러나 풋병아리 같은 친구들을 만나는 대로 다 반기고 악수할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결국 친구를 선별해서 사귈 것이며, 친구를 조심할 것이며, 필요하다고 인정되거든 강력하게 접근해서 사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친구를 보고, 이해하고, 사귄다면, 참 친구를 사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배신하다” 혹은 “배반하다”라는 말의 원문 뜻을 살펴보면 “떨어져 나가다. 돌아서다. 부인하다”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것은, 결국 그가 내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고, 내게 등을 돌리고 돌아섰다는 것이며, 나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이러한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의문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등을 돌린 채 다른 곳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있었고, 바울의 복음 사역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만은 바울 곁에 서서 떠나지 않으시고, 그에게 위로와 소망과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라는 말씀의 뜻은 “주께서 내 옆의 그 위치를 정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 참으로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은 잠깐 동안만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정하고, 영원히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내 곁에 설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깐 서 있을 뿐, 다 떠나게 됩니다. 떠나서는 안될 사람도 떠나고, 영원히 떠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사람도, 훌쩍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만, 주님은 내 곁에 자리를 정하시고,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내 곁에 자리를 잡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이 설명해 줍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전파되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시는 첫째 이유는 나를 강건케 하시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강건케 한다는 것은 능력을 퍼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나를 떠났다고 해서 낙심하고 있지 않도록, 내게 능력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내 곁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배신당했다고 한숨이나 짓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시기 위해, 내 곁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나를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기 위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새로운 힘을 얻어 활기찬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딪쳐오는 모든 환난과 시련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고 건져주시기 위해, 주님은 내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의 최후 소망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님은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신앙이 없었더라면, 바울은 자살이라도 해야 할 고난과 절망을 겪었고, 배신과 억울함을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확신과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내 곁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십니다. 나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주님께서 내 옆에 자리를 정하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잠깐 머물다가 날아가버리는 정처없는 이웃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십니다. 주께서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슴으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 곁에 언제나 있어 줄 수 있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사람, 그리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손을 잡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과연 누가 내 곁에 항상 있어 줄 수 있겠습니까?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이웃들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 곁에 계시는 주님, 그분만이 영원히 나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오늘 하루, 여러분 곁에 주님, 내 곁에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승리의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 새벽 주의 전에 나온 우리를 만나 주옵시고,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이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옵시고, 죄악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늘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나오고 싶어도 아픔 때문에, 질병 때문에, 일 때문에 나오지 못한 주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아픔이 사라지고, 질병이 사라지고, 모든 장애물들이 속히 사라지게 하여 주옵시고, 주의 전에 나와 함게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학업 중에 있는 모든 주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셔서, 지혜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앞서가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돌아오는 주일,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마음과 발걸음을 붙들어 주셔서, 주의 전으로 향하게 하시고, 주를 가까이함으로, 하늘의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모두 다 누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제단에서 하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시고, 선포된 말씀과 더불어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치기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무너진 주의 제단이 다시 세워지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교회학교가 다시 일어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교회학교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영혼들을 보내 주시옵소서. 준비된 일군을 보내 주시옵소서.
오늘 이 새벽, 주의 제단에 나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여 주셔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옵시고, 삶의 지경이 넓어지게 하옵시고, 주의 손으로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