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상동에서 중석 광맥 발견 후 일본 자본의 일본인 회사가 설립되고 중석 채광, 선광을 하기위한 시설재 도입및 채광 제련된 중석 반출은 당시 근접한 중앙선 철도역인 영주에서 봉화를 거쳐 춘양까지는 트럭 그리고 우구치 금정광산까지는 우마차였고 우구치에서 덕구를 거쳐 상동까지는 등짐을 지고 날랐던 오솔길을 자동차가 다닐 신작로로 만들고 전력선 연결, 생산 설비, 생필품 반입 및 생산된 중석 반출 활동이 활발히 시작됩니다.
아마도 그 과정의 작업들은 당시 산업 수준으로는 엄청난 사업 규모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덕구에서 우구치에 이르는 도로는 임산도로로만 유지되고있지만 상동 개발 당시는 물동량 대부분이 이용하는 주 도로였고 녹전에서 석항에 이르는 수라리재는 해방 이후 석항역 개발이후에 생겨난 도로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 과정의 작업들은 당시 산업 수준으로는 엄청난 사업 규모였을 것입니다.
그 사업을 진두 지휘한 고바야시 우네요에 대해 일본쪽 자료를 통해 알아봅니다.
고바야시 우네요(小林 采男) 1894年 - 1979年
1919년 동경제대 정치학과 졸업, 일본 농림부, 상공부에 근무하다가 지질학을 공부하여 광산기사가 됨.
1934년 고바야시광업주식회사(小林鉱業株式会社)를 설립하여 한반도 각지에 광산을 운영. 상동광업소도 그 중에 하나.
1945년 2차 대전 패전 후 승전국 미국이 상동 중석광산 몰수하였다가 미군청정(승전국 미국이 한반도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 조직, 조선총독부 기능과 유사.) 이 대한민국 정부에 인도하여 “대한중석”이라는 국영기업이 됨.
1969년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에서 명예고문 위촉.
(이때는 아직 한일 양국간 국교 정상화 이전이고 반일 감정이 높은 시기임에도 그는 대한민국 정부, 국영기업에게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다. 아마도 그가 한국에서 중석광산 운영할 때 조선인 대우에 좋은 평가와 패전 후 일본에 있을 때도 대한중석의 경영에 많은 우호적 협조를 한 결과인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의 일본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좋은 인물평이 나온다.
*고바야시광업은 인종이나 사상에 차별하지 않고 조선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사원들에게 이익환원에도 노력했다.
*그 외 조선 반도내의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해주공업학교, 춘천농업학교(옛날 이 학교에는 공덕비가 있었다고함), 성남중고등학교(서울 신도림동 소재) 설립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1945년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에 귀국하던 해, 고바야시이화학연구소(후에 RION으로 사명 변경) 설립하였고 그 회사 홍보물에서 그의 사진을 아래에 옮겨봅니다.
이 사람 경력은 좀 특이합니다.
동경제대 정치학과 졸업이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일본 최고의 엘리트로서 공무원만 해도 출세가 보장될텐데 공무원하다가 과학에 매료되어 독학하여 광산기사가 되고 아버지에 이어서 한반도(당시는 일본 식민지)에서 광산 탐사, 개발을 하고 운영하여 사업적 성공을하다가 이차대전 패전 후 일본에서 과학기술관련 제품 생산 회사를 다시 설립하였으며 위 사진에서 그 회사 홍보물 내용 맨 위에 창립자인 그가 승려가 되고자 했었음을 내 세웠고 과학의 힘으로 인류에 공헌하고자했다고 별스럽게도 공언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으로 보아 상동광업소 운영 시에도 조선인 종업원 대우에 차별화 않으려 했던것 같습니다.
첫댓글 흘러각 과거사지만
기록적으로 남기도하고
하번씩 들여다 보는 것도 좋타고 생각합니다.
배수창 동문 감사 합니다.
좋은글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