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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예고
누가복음 1:26-38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앞서 행할 세례요한의 탄생을 예고한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수태한 후 여섯 달째가 되는 때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라는 처녀에게 나타납니다.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예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였음을 알립니다.
1. 은혜를 입은 마리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6-28)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간 동네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곳입니다(26절).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의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사렛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됩니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1:46에 기록된 나다나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습니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스드라엘론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로 부릅니다.
천사가 나사렛에 가서 만난 사람은 다윗의 후손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마리아라는 처녀입니다(27절).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합니다. 샴마이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미혼녀', '소녀'라는 뜻입니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합니다(28절).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납니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절) 마리아의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납니다.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은 ‘은혜를 받은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의 직업을 가진 요셉과 정혼한 보잘 것 없는 처녀였습니다. 그런 처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마리아에게 첫 번 째 주어진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안’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찌어다”라고 말합니다. 평안은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인사말 “샬롬”은 바로 평안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종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섬기고 이방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풍요를 준다는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웃의 블레셋이나 미디안 등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그때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다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다시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되풀이 되는 역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바벨론 포로 70년간 살다가 그중 얼마의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했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이스라엘은 헬라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고통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항상 그들의 마음에는 그들의 속박에서 구원해주실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유대인들의 인사는 ‘샬롬’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원합니다”라는 기원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두 번째 축복은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받은 자에게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주실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거룩하신 분이 함께 하시려면 우리 또한 거룩해야합니다. 어떻게 해야 거룩해집니까?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심령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구원해주실 메시야를 사모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고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아들을 낳게 되는 마리아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29-37)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가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라고 생각합니다(29절).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30절).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습니다. ‘은혜를 얻었다’라는 말은 은혜를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집니다(엡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는 이어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고 말합니다(31절).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입니다(출 24:13; 삼상 6:14; 왕하 23:8; 대하 31:15; 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행 13:6; 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태복음 1:21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 21:11), ‘다윗의 자손’(마 27:37; 막 10:47-48; 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마리아가 처녀로서 아들을 낳는다면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은혜를 받는 것과 아들을 낳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천사는 말을 계속합니다. “저가 큰자가 되고 지극히 놓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리니,”(32절)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합니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마리아가 낳는 자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신적 기원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번을 누가가 사용했습니다(본절,35,76; 2:14,35; 8:28; 19:38).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는 이스라엘의 큰 자가 되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스라엘백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3:31).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요컨데, 예수님은 예언된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 시 89:29; 132:11; 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33절). 여기서 ‘영원히’라는 말은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입니다(55절; 요 6:51).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 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왕 노릇’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고전 15:25;계 11:15).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이후 이루실 영원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다스릴 “그 나라는 무궁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왕국'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한(롬14:17)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골 1:13).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34절) 일반적 상식으로는 당연히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성적관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말로서(창 4:1; 19:8; 삿 11:39)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남자와 성적 관계를 한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을 오히려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천사가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35절)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심으로 이 일이 이루어 질 것을 말합니다.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합니다(41,67,80절; 2:25,26,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의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기적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의 ‘능력’은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냅니다(시 110:2; 사 9:5; 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도 포함됩니다(17절; 24:19; 미 3:8; 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 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습니다(4:14,36).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덮으시리니’라는 말은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 40:38의 영광의 구름을 암시합니다.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습니다(9:34; 마 17:5; 막 9:7). 이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어서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합니다(35절). 일반적인 방법, 즉 남자와 여자가 성적 관계를 맺어 아이를 잉태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아이를 잉태케 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침례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관계를 암시하신 적이 많습니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십니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입니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합니다(요 3:16;히 1:2).
그러면서 천사는 더 확실한 증거를 내세웁니다. 마리아의 친족인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다”고 말하며, “본래 수태하지 못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36절).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은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출 6:23; 삿 17:7).
그러면서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합니다(37절).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씀'('레마')은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술'등의 뜻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합니다.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마리아의 믿음을 도와줍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수태 소식과 하나님의 말씀이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는 말에 믿음을 더합니다.
3. 순종하는 마리아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마리아가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말합니다(38절).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니”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진다니 너무도 가슴이 벅차고 한편으로는 두렵기조차 했습니다. 비천한 자신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자신을 통하여 모든 이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처녀가 잉태한 사실을 알면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과 정혼한 요셉이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잠시동안 그러한 생각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계획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리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천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계집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원하는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여종은 주인이 성적인 대상으로 몸을 요구하면 자신의 몸을 드려야만 하는 신분이었습니다. '계집종'은 '노예'를 뜻하는 말로서, 이런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비록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빌리시겠다고 하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자기 몸이라도 순종하며 내놓는 마리아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킵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적용: 주님께 순종하여 헌신하는 삶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니 내일을 위하여 네 몸을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우리의 몸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시 시간만 내어 예배를 드리거나 봉사를 하고서 다 드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질 또한 얼마를 내어놓고서 전부를 드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 자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겸손히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친밀한 관계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매일 아침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깨닫기 힘써야합니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 본문의 말씀을 잘 분석하고 해석하고 묵상하여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의 의미를 통하여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조금도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매일 묵상한 말씀을 하나씩 순종해 나갈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점점 깊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몸을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