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기 : 1135년(인종 13) 1월~1136년 2월 전투지역 : 서경(평양) 고려 인종 13년(1135) 묘청 등이 서경(평양)을 근거지로 일으킨 반란.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묘청 등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퇴했다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을 건립하는 등 서경천도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 등의 반대로 서경천도가 좌절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고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고려 조정은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삼군(三軍)을 편성케 하여 서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정지상·백수한 등을 처형하고 군대를 이끌고 안북부(안주)에 이르렀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서경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서경의 실권자 조광(趙匡)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묘청·유담·유호 3인의 목을 베어 윤첨에게 개경으로 보내 항복하게 하였다. 하지만 개경정부가 윤첨을 하옥시키자, 항복하여도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끝까지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김부식은 전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서경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경 조정에서는 전함 190척의 수군을 보내 김부식의 육군을 돕게 하였으나, 서경군의 공격을 받아 전함이 모두 불탔다. 그러나 김부식은 전투가 지구전으로 전개될 것으로 판단하고,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10월에 이르러 서경 성내의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김부식은 서경성 주변에 흙으로 산을 쌓아 서경을 압박하였다. 서경군은 토산(土山)을 점령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김부식은 승세를 틈타 5군을 모아 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였다. 1136년 2월 9일 토벌군의 맹공격이 개시되었다. 토벌군은 토산 위에 석포를 설치하여 수백 근의 돌을 날려 보내니 서경성의 누각이 이에 맞아 부서지고 뒤를 이어 화구(火毬)를 던져 불을 질렀다. 며칠간의 공방 끝에 19일 토벌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서경성으로 돌입하였다. 서경군은 마침내 무너져 패하였고, 조광의 시체를 거두어 항복하였다. 묘청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그 사건이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전 개경과 대등할 정도였던 서경의 지위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개경 문신세력을 견제하던 서경세력이 몰락함으로써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신세력의 독주가 가능케 되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3864&mode=title&query=%B9%A6%C3%BB%C0%C7+%B3%AD&dircode=0
*김방경
1229년(고종16) 16세 때 음서(蔭敍)로 무관(武官) 산원(散員: 정8품)에 나아감으로서 벼슬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관직 생활 중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함과 아울러, 큰일이 생기면 모두 맡겼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독·관리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곤 하였다. 1248년(고종35)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이 침략해 오자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주민들과 저수지를 만들고 농토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1263년(원종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반주(班主) 전빈(田?)의 미움을 사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고, 곧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 얼마 뒤에 형부상서(刑部尙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위기가 닥친 국가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한편, 40여 년 간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고려는 몽골과 개경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은 1269년(원종10)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 ?)을 즉위시킴으로써,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몽골)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닥쳐 원종은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 때 사신으로 원(몽골)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臧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몽골)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1270년(원종 11) 6월에 이르러 개경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봉기를 일으켰다.
삼별초 토벌의 임무를 맡아 전주와 나주가 삼별초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막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除授)받고 다시 삼별초 토벌에 힘쓰게 되었다. 원(몽골)나라의 원수 아카이(아해, 阿海, Akai)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몽골)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힌도(흔도, ?都, Hindu) 등과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의 토벌하고,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통정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서 항전하자 1273년(원종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힌도(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했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해 가을 원(몽골)나라에 들어가 황제 세조(世祖)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몽골)나라에서 합포(合浦; 마산)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해 2만5,000여 명의 여원연합군과 함께 쓰시마섬을 공략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큐슈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정벌의 공으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吏監察司事)에 나아갔으며 1276년(충렬왕 2)에는 성절사로서 원(몽골)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충렬왕3)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몽골)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원(몽골)나라에 이송되어 황제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뒤이어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충렬왕6)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몽골)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충렬왕7)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으로 참여하였다. 이키섬을 공략하고 하카타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번에도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하고 돌아왔다. 1283년(충렬왕9)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吏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 식실봉삼백호(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충직하고 근검했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 등으로 상하 민심을 잃어, 89세로 병사하였을 때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安東)에서 장례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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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고려 후기 왜구 퇴치에 공을 세운 명장·재상. 평장사를 지낸 최유청의 5세손이며,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이다. 처음에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우달치에 올랐고, 1352년(공민왕 1)에 안우 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이 되었다가,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염제신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 공을 세우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배 400여척으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 4만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철화·서경·함종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으며, 그 공으로 훈 1등에 도형벽상공신이 되었고, 1375년(우왕 1) 판삼사사가 되었다.
이듬해 7월 왜구가 부여지방으로 칩입하여 공주를 점령하였는데, 원수 박인계가 이를 방어하다가 연산 개태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패보를 접한 최영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왕의 허락을 받은 후 전지로 부임하여 홍산에서 왜구와 대치하였다. 왜구는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험의 요지를 선점하고 군세를 과시하며 고려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최영은 직접 군졸을 지휘하여 왜구를 섬멸하고,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이 되었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지금의 풍덕)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이 되었다.
1388년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을 받아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 일당을 숙청하였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갔다가 그해 12월 개경에서 참수되었다. 개풍군 덕물산에 있는 적분은 바로 그의 무덤으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 하며, 그 산 위에 장군당이 있어 무당들의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0405&mode=title&query=%C3%D6%BF%B5&dircode=0
*진포대첩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전북 군산 진포에서 고려군이 왜구를 대파한 전투.
1351년부터 왜구는 고려 전역에서 침구와 약탈을 자행하며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고, 때로는 내륙에도 출몰하며 개경을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다.
1380년에 들어와 왜구의 대규모 선단이 군산 앞바다인 진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전선 5백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진포는 한반도 수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강의 하구로, 이곳은 선박으로 군산과 장항이 연결되며 상류로 가면 부여·공주 등 강안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들과 연결되는 곳이다.
고려군은 5백여 척에 달하는 왜구의 선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을 편성하였으나 왜구에 비하여 5분의 1 정도인 1백 척에 불과하였고, 군사도 3천명을 약간 웃도는 병력이었다.
고려군은 왜구에 비하여 병력상으로 열세였으나 최무선에 의하여 개발된 화약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왜구는 자신들의 병력이 양적으로 우세한 점을 알고 고려군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선공을 하였다. 고려의 수군은 왜구의 선단이 가까이 오자 일제히 화포사격을 개시하였다. 고려군의 화공에 불길이 오른 왜구의 선단은 후퇴하려고 했으나 여러 척으로 연결되어 있던 선박들은 움직임이 둔하여 피해가 커졌다.
왜구는 고려군의 화약무기 앞에서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대패를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선단 5백여 척이 대부분 소각되었으며, 2만명에 다하던 병력도 거의 섬멸되고, 잔여 왜구는 금강 상류로 올라가 내륙으로 도주하였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262&mode=title&query=%C0%A7%C8%AD%B5%B5+%C8%B8%B1%BA&dircode=0
*귀주대첩
시 기 : 1019년(현종 10) 2월 1일 고려 현종 10년(1019) 평안북도 귀주에서 고려군이 거란의 대군을 섬멸한 전투. 거란의 성종은 여러 차례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자 1018년 12월에 10만 대군이라고 칭하면서 소배압을 주장으로 하여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안주에 주둔시켰다. 강감찬은 다시 흥화진으로 나아가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내(흥화진 앞의 삼교천)를 막아 수공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거란군은 수심이 얕아진 삼교천을 아무런 의심없이 건너기 시작하였다. 거란의 주력이 삼교천의 중심부에 이르자 고려군은 물을 터서 거란군에게 수공을 가하였고, 거란군 진영이 수공으로 혼란해지자 고려군은 이번에는 매복해 두었던 병력으로 하여금 기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배압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개경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에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자산의 내구산에서 이를 대파하고, 또 마탄에서도 1만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계속하여 개경을 향해 공격을 하니 고려군은 이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준비하였다. 귀주는 우리나라 서북쪽의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이다. 특히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오기 위해서는 서북계의 북로와 남로 두 통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귀주는 북로의 중심지가 된다. 그런 까닭에 귀주는 중국으로부터 침공이 있게 되면 항상 대접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다. 한편 소배압의 거란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019년 1월 3일에는 개경에서 백리 떨어진 신은현(신계)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군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도성 밖의 곡식은 제거하고 백성들은 성 안에서 군관민 합세하여 대비하였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고려군은 개천과 영변에 이른 거란군을 급습하여 5백여명을 죽였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이 2월 1일 귀주를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자 이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이를 요격하였는데, 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고려군에게 유리해져서 이를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노획한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요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거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참패였다. 거란의 성종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여버리리라”고 할 정도로 진노하였다고 한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872&mode=title&query=%B1%CD%C1%D6%B4%EB%C3%B8&dircode=0
*최무선[崔茂宣] 14세기 중엽 왜구의 침략이 급격히 늘어나자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화약 재료와 화약 병기를 수입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 9월에는 수입한 화약 재료로 만든 화약 총통을 남강에서 처음으로 시험 발사하였다. 무관이었던 최무선은 수입에 의존하던 화약 제조와 총기 제작의 국산화를 결심하고 연구에 들어갔다. 그러나 화약 재료 가운데 하나인 염초는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 성능에도 차이가 많았다. 최무선은 염초 제작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워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화약을 이용하여 화전(火箭)과 같은 간단한 무기를 실험해 본 결과 자신감을 얻은 최무선은 화약과 화약무기를 연구하고 제조할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에 1377년(우왕 3) 10월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총포류·발사류·로켓병기 등 모두 18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380년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오자 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선박을 이끌고 나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죽은 뒤에 그 공을 인정받아 의정부우정승·영성부원군을 추증하였다.
최무선의 집안은 아들 최해산(崔海山), 손자 최공손(崔功孫)까지 화약무기를 연구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3대에 걸쳐 화약무기를 연구한 집안이 되었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練法)>을 남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0403&mode=content&query=%C3%D6%B9%AB%BC%B1&dircode=0
*일연[一然]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호는 무극(無極)이며 속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한 후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定林社)에 주재하며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일을 맡기도 했다.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84년 경북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고, 1289년 입적하였다. 단군왕검에서 고려에 이르는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ㆍ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0225&mode=title&query=%C0%CF%BF%AC&dircode=0
*정몽주[鄭夢周]
고려말의 문신, 학자로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삼은(三隱: 고려가 망해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의 한 사람이다. 고려 말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8596&mode=title&query=%C1%D6%B4%E7%3Cb%3E%C1%A4%B8%F9%C1%D6%3C%2Fb%3E&dircode=0
*이의민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옥령사의 노비였다. 신장이 8척에 이른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체가 장대하였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된 뒤 무예로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하여 의종을 복위시키려 반기를 들자, 경주에 있던 의종을 살해하고 그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일파의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키자 정동대장군 지병마사가 되어 이를 토벌하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에까지 올랐다.
1179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1181년 형부상서 상장군에 올랐으나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 있던 중 경대승이 병사하자 명종이 불러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194년에는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인사권을 비롯한 정치의 제반사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나 1196년 그의 아들과 최충헌(崔忠獻)의 동생인 충수 사이에 비둘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여 최충헌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8378&mode=title&query=%C0%CC%C0%C7%B9%CE&dircode=0
*김윤후[金允侯]
고려 후기에 용인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격파한 승장.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병이 침입하므로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용인)으로 피난하였다. 12월 중순 살리타(撒禮塔)의 몽고 주력부대가 수원의 속읍인 처인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당시 처인성에는 주변의 주민들이 고려군과 함께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김윤후는 몽고군을 진두 지휘하는 살리타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처인성의 고려 군민은 지휘관의 전사로 전의를 상실한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생포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에 임명되고, 뒤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그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주성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관노의 부적을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이 되었고, 그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고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6058&mode=title&query=%B1%E8%C0%B1%C8%C4&dircode=0
소감: 복사를 하여 시간이 오래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이 긴 글들을 읽어보며 수업시간에 배운 것에서
더 자세한 것을 깊숙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사전을 만들면서 역사 인물들과 역사 사건들을
다시 돌아보니 복습도 되고 머리속에 다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숙제 통지가 되었을 때는
힘들어서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하며 걱정했었는데 좋은 점이 많다. 내년에 후배들도 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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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준혁군, 소감을 읽어보니, 샘이 힘이 막 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아요. 묘청을 검색하였더니, 이미 김재혁군이 조사하였더군요. 김윤후는 바로 아래 전장훈군이 하였습니다. 두개를 다른 내용으로 수정해 주기 바랍니다. 묘청과 묘청의 난이 다르다면, 김윤후를 대체해야 합니다.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