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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수양회 주제 1강(양야곱 목자님)
말씀 / 창세기 37:1-36
요절 / 창세기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꿈꾸는 요셉
잠언 29장 18절을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묵시’의 의미는 ‘비전’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로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채로 그럭저럭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비전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비전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하게 되고, 그 비전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비전’은 히브리어로 ‘바라보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비전은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비전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보이십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실 꿈을 꿀 수 있길 기도합니다.
1절에서 4절을 보면 야곱의 가족관계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부인이 4명이었습니다. 야곱을 사이에 두고 그의 사랑을 더 받고자 부인들 사이에 사랑싸움과 이로 인한 시기심이 많았습니다. 과연 이런 가정에 평화가 있을까? 여러분! 어떨 것 같습니까? 빌하와 실바는 레아만 사랑하고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정하였습니다. ‘레아만 사랑하는 자기 미워! 정말 미워! 미워 죽겠어’ 레아는 자기 자식만 이쁘게 보고, 다른 부인이 낳은 자식을 미워하며, 잘 하면 시기하는 마음에 잘 했다고 한 대 ‘콕’ 쥐어박고, 못하면 못한다고 ‘야! 그것도 못해?’ 핀잔을 주었습니다. 핀잔을 받은 자식은 엄마에 달려가 고자질을 했고, 엄마들 사이에 또 싸움이 발생하였습니다. 엄마들과 형제들 사이에는 조금 더 많은 재산을 야곱에게 얻고자 서로 험담하며 재산싸움을 하였습니다. 보통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끼리도 서로 다투고 싸우는데 4명에 부인에게서 나온 12형제들은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자, 좀 더 사랑을 받고자, 좀 더 재산을 상속받고자 자주 싸웠습니다. 그러면, 자식들 싸움이 발전하여 엄마들 싸움이 되었습니다.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속된 말로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가끔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은 아버지 몰래 못된 짓을 가끔 했습니다. 예를 들어 먹음직한 양을 훔쳐 먹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 몰래 양을 팔아 용돈을 벌기도 했습니다.(삥땅 먹은 것) 그러면, 요셉은 쪼르르 달려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보고했습니다.(세 글자로 줄여 ‘고, 자, 질’) 게다가 아버지 야곱은 다른 자식들의 옷은 오일장에서 사다 입히고, 요셉의 옷은 항상 백화점에서 사다 입히니 형들이 요셉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형들이 감정을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4절에 나옵니다. ‘언사가 불평했다’는 말은 ‘인사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침에 일어나 형들에게 ‘굿모닝’ 그러면 ‘그래 굶었다, 어쩔래?’ (선한 뜻에서 ‘예쁘다’고 하면, ‘그래, 나 예쁘다! 뭐 보태 준 것 있어’) 대충 분위기가 잡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형들에게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요셉의 꿈 사건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을 향한 형들의 감정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는지 그 형들에게 꿈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 하더이다” 그러자 형들이 말합니다. “이런, 쬐그만 게! 우리 왕이 된다고? 그러면 앞으로 네가 우리를 다스리는 거야? 진짜 그런 거야?”(8) 그런데 요셉은 꿈을 한 번 더 꾸고 와서, 형들 마음에 아예 염장을 질러 놓았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 하니라” 이번에는 형들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도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야곱은 요셉을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아니, 이 애비랑 어미랑 형들이 너한테 가서 절을 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요셉의 꿈은 형들의 시기심을 자극하여 결국 가정의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아버지도 망측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요셉뿐만이 아니라 형들도 기뻐하고 아버지도 기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격에 겨워 말을 하는데, 형들은 분노하고 아버지는 망측하게 여기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평안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갈등을 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꿈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무시를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가정가운데 불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꿈에 너무나 감격하여 그 꿈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쉽게 말을 해버리는 미숙함이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면 형들의 잘못을 덮어 주기 보다는 고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엄마가 네 명인 콩가루 집안 출신이고 아버지의 편애로 관계맺음의 어려움을 겪으며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요셉처럼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꿈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부터 요셉의 인생이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볼 때, 미성숙한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꾼 17세부터 비로소 요셉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안에서 꿈을 꿀 때,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위대한 인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목자님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꿈은 준비된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인생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꿈을 주시고 부족한 것은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통해 꿈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시켰습니다. 또한 아브라함도 부르심을 입고, 25년 동안 훈련을 받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나 아브라함이 준비가 안 되었지만, 꿈이 있어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자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그럼, 요셉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기초로 요셉을 훈련하시고, 야곱가족의 구원역사에 사용하는 분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이 좋았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좋더라도 우리에게 꿈이 없으면 현재를 재미있게 즐기며, 이성 친구를 사귀고, 좋은 차나 굴리며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삼류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꿈을 꿀 때, 어떤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하고 삼류인생에서 일류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은 설립년도인 1892년부터 1929년까지 소문난 삼류학교였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공부 못하고, 사고 잘 치는, 쉽게 말해 집에서 버린 자식들이 주로 입학하던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1929년에 이 대학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씨는 ‘꿈이 있다면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처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카고 대학생 모두에게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인 철학 고전을 비롯한 각종 고전 100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 학생들이 꿈을 꾸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졸업한 졸업생 중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무려 85명이나 배출되는 세계적인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꿈을 꿀 때 하나님께서 삼류인생에서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럼,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꿈입니다. 요셉의 꿈의 내용은 형들의 단이 요셉 앞에서 절을 하게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창42:6절에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형들이 절을 하는 것으로 성취가 됩니다. 하지만 당장의 현실에서는 서열상 요셉이 형들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면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 주인 앞에서 절을 하며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또 그 다음에는 죄인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가서 간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절을 하며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그의 삶은 허리를 펴고 일어설 새가 없는 삶이었고, 패배자의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그런 현실에 부딪히기 전에 이 꿈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내 단은 일어서고…”라고 말합니다(7). 단이란 것은 세우는 것보다 넘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어릴 때 보리를 추수하려면 보리를 빼고, 타작하기 위해 묶어 단을 만든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리를 말리려고 보리 한단을 세우면 잘 세워지지 않아 보릿단을 3~4개씩 모아 탑 모양으로 세우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단이 혼자서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이 일어서는 것은 요셉이 높이 세움을 받는 것으로, 그가 많은 고난을 딛고 일어나 세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요셉이 일어나는 깡다구가 있거나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부자냐? 공부 잘하냐? 잘 생겼냐? 부모님은 뭐하냐? 좋은 차를 타냐? 학생들은 좋은 핸드폰에 명품을 가지고 있느냐?’ 등등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나의 배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을 꾸는 자가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학을 다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인생의 역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라는 말씀이 꿈을 꾸는 자에게 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당당하게 일어나 운명을 다스리고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도 “일어나라, 걸어가라”(눅5:2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죄악 되고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학생 때는 꿈에 불타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고, 현실문제에 부딪히면 위축되고 생각이 쪼그라들기 쉽습니다. 결혼 초에는 양들과 캠퍼스 미션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삶이 아름다워 보이다가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다 보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또한 비정규직이 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양스테반 목자님은 캠퍼스 미션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제주에 남았습니다. 그럴 때 적은 월급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이 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고 여러 개의 자격증을 준비하며 자기계발을 하였을 때, 비정규직의 설움을 씻고 정규직원으로 탑동 이마트 옆에 있는 라마다 호텔의 시설팀장(간부)이 되게 하셨고, 지금은 라온 골프장 시설팀장이 되게 하셨습니다.(참고로 시설팀장은 간부직원입니다) 그러나, 시설팀장으로 있으면서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업체에서 납품이나 공사를 잘 봐 달라며 봉투가 건네질 때, 마음이 힘들었지만 믿음으로 거절하고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하였습니다. 스테반 목자님이 믿음의 중심을 지킬 때, 가정이 복음화 되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추도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스테반 목자님이 가정 복음화의 꿈을 꿀 때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둘째, 사람을 돕고 살리고 영화롭게 하는 꿈입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이 동생에게 절하는 꿈이지만, 이 꿈에는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형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형들은 애굽 총리가 된 요셉으로 인해 식량을 얻어 가족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애굽 일대에는 7년 동안 기근이 들었는데,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7년의 풍년 기간 동안에 곡식을 잘 관리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형들과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풍년의 때에 흥청망청하지 아니하고 절제하고 인내하여 양식을 모을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숱한 연단 속에서 요셉에게 주신 하나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절을 받고 서 있는 자리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절제하고 인내하고 준비하여, 때를 따라 필요한 양식을 나눠주는 자리였습니다.(눅12:42)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 요셉은 낮아져야 했고 인내해야 했고 감당해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자리는 고난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요셉의 희생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리입니다. 후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요셉을 통해서 모든 형제가 회개하는 과정 속에서 형들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들이 회개할 때, 형들은 하늘의 별과 같은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 매김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 요셉으로 말미암아서 온 형제들이 열두 지파의 족장으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사람을 돕고 살리고 영화롭게 하는 꿈이었습니다.
파키스탄이 베드로 선교사님은 선교사로 가기 전, 매년 말이 되면 내년에는 저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큰소리를 칠 때마다 매년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사로 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중소기업 해외시장조사단’으로 자기돈 한 푼 안 들이고, 파키스탄에 6개월 동안 단기선교사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기초로 본국에 와서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며 파키스탄 선교를 준비하고,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빵맛이 파키스탄 사람이 입에 맞지 않아 실패하고, 가져간 돈도 다 바닥이 나서, 끼니를 걱정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시련의 과정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끼니를 걱정할 때 까마귀를 통해 먹이셨던 하나님(왕상17:4)께서, 기이한 방법으로 선교사님가정을 먹이시고, 굶어 죽지 않게 하였습니다. 몸은 몸대로 좋지 않아 가끔은 길을 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졸도도 하였지만 안전을 지켜주셨습니다. 베드로선교사님이 파키스탄에 대한 선교의 꿈을 접지 않고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였을 때, 코트라(대한무역진흥공사) 입사하여 물질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외교관 신분이 되어 비자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꾸준히 기도할 때, 졸도하는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국가로서 이슬람이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나라입니다. 이슬람 교리를 연구하고 이슬람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경찰(국가정보원)이 있어서 모든 외국인을 감시합니다. 선교사님을 감시하는 경찰이 있어서 모든 이메일과 편지, 컴퓨터를 해킹하여 감시합니다. 이 나라는 개종자에 대해 법으로 명예살인을 금지하고 있지만, 공공연히 명예살인이 이루어집니다. 즉,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개종한 자를 죽이는 것이 공공연히 이루어집니다. 또한 개종한 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여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가에서 1명도 아니고, 5명씩이나 세례성찬식을 행한다는 것이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당시의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며 시련과 연단이 과정을 통과할 때, 불가능이 현실이 되게 하십니다. 아니!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것을 통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들이 여동생 디나의 문제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세겜에서 양떼를 치고 있어서, 야곱은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야곱은 형들의 요셉을 향한 미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하여 요셉을 세겜으로 보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의 나머지 형제를 위하여 보내는 야곱을 보면서 그가 요셉만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비의 명을 받고 80km가 되는 세겜까지 갔으나 형들을 찾지 못하였을 때, 도단까지 다시 24km를 더 찾아가는 요셉의 마음속에 형들을 향한 애정과 아버지에 대한 순종심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단으로 찾아온 요셉을 보면서 형들은 말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00Km 가까운 거리를 힘겹게 찾아온 동생을 보면 ‘그래도 내 동생이라구 멀리까지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사랑한다, 요셉아.’하면서 포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더 악하여져, 이 기회에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반가워하는 요셉을 잡아,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가 가져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개의 값으로 동생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들이 동생을 죽이지 않고 팔아넘기는 것은 혈육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 보이지만, 실상은 죽이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옷에 숫염소 피를 묻히고 다른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기만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 볼 수 있었던 위대성과 훌륭한 성품은 온데간데없고, 비열하고 잔인한 인간의 저속한 본성만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고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존재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요셉 한 사람의 희생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요셉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회개하여, 열두 지파의 족장으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 애굽을 터전으로 하여 고작 70명에 불과하던 야곱의 후손들이 60만의 큰 민족으로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요셉의 삶은 우리를 돌이키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죄악된 우리 인생들이 변화되고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요셉과 같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통해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연단 받는 한 사람,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서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속역사의 경륜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한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꿈은 한 사람을 깊이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나 한사람이 말씀에 깊이 순종하여, 말씀에 뿌리가 깊이 내려질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한 가족이 변화되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세상의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허다한 영혼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저는 이때쯤이면 다음해 방값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방값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자매목자님들과 6년 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당시 실내화장실이 있는 집에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잠자다 일어나 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화장실에 갔다 오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한 직업도 없이 이것저것을 하였습니다. 신문배달, 교차로배포, 중고자동차 부품 배달, 사료배달, 학원 강사, 과외 등으로 어렵게 생활해야 했습니다. 14년 동안 사글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강한 자아가 깨지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요회에 남는 양들이 없었습니다. 졸업을 하면 떠났습니다. 한라대 계승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저 때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낙담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를 외부에게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과연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가?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는 말씀을 붙잡고, 양들이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고, 양들의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의 생명을 걸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교회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두 시간씩 매일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 우는 것이 나으리라”(눅17:2)라는 말씀처럼 양들이 죽으면 저가 연자 맷돌을 매고, 죽임을 당한다는 생각으로 기도할 때, 1990년대 후반부터 남는 자가 있었습니다. 룻, 서례, 긍휼, 영애, 수아 등등. 그리고 2000년대 초반부터 요회가 커지면서, 2000년대 중반에는 한라대 요회가 2개로 늘어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양들이 남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요회가 배가 되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저를 훈련하사, 한라대 캠퍼스를 섬기는 가정이 되게 하시고, 저의 가정을 통해 많은 양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교단에 서는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특별법이 통과되어 2006년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해야 했기에 아침 6시 반에 출근하고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한 대로 살았습니다. 2007년에는 집을 사서 이사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편한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영적인 투쟁 없이 안일하게 살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길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말씀공부, 소감쓰기, 양식 먹기, 기도생활이 건성으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주일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진심은 없고 형식만 남은 예배를 드렸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저의 신앙에 진심과 순종은 없고 형식만 남아 있는, 집안에 있는 탕자와 같았습니다. 형식만 남으니 주님의 마음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허물을 감싸 안기보다 알게 모르게 비판하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저의 마음에 양들과 동역자들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마음과 정신이 집을 짓는데 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동역자는 한라대 계승역사와 제자양성역사로 인해 심적으로 힘들어 하는데 동참은커녕, 같이 합심기도 해 본적이 가물가물 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말씀이 없으니, 집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설계에 정신이 가 있고, 설계문제로 건축설계사와 갈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건축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나름대로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저의 마음에 말씀이 없을 때, 바람 따라 펄렁이는 깃발과 같이, 생각이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생각 없이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양들과 동역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해본지가 몇 년이 되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말씀이 없을 때, 꿈을 꿀 수도 없었고,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선생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으니 심령이 기쁨이 없고, 꿈도 없었습니다. 과거 말씀이 있을 때, 한라대 계승역사를 소망하며, 중보기도를 감당하고 캠퍼스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방향성이 있었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활기가 있었으며 생명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건강문제, 건축문제로 삶에 활력이 없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감당하면서 내면에 말씀이 없어 꿈을 꿀 수 없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이 내면에서 살아나 저를 다스려 주고,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교사목자로서 꿈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남는 것만 아니라, 저를 거쳐 간 제자들이 꿈을 꾸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저의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저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께 인도되는 것입니다.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라는 말씀을 영접하고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저의 신분의식을 새롭게 하고, 현재적으로 제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앞으로 어떤 것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저의 삶과 남은 인생을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복음송가 중에서 희망과 꿈을 꿀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오게 하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와 가정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소서
주의 청년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게 하소서 한손엔 복음 들고 한손에 사랑을 들고 온 땅 구석구석 누비는 나라 되게 하소서 × 2 |
이 노래의 가사처럼, 말씀을 통해 예수의 꿈을 꾸고, 캠퍼스 구원의 환상을 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허락하시고, 캠퍼스를 구석구석 누비는 나라 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대기오염이 심하면 밤이 되어도 하늘의 별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죄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오염되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과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께서 세상에 오염되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것을 통해, 위대한 꿈과 비전을 꿀 수 있길 기도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단과 시련이 따릅니다. 우리가 연단과 시련을 극복하여, 장차 위대한 꿈이 주인공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