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창호와 벽창우
“사람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혹은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간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서 살아갈 수는 없으며, 마음에 들었던 사람일지라도 함께 어울려서 생활을 하다보면 생각이나 마음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일지라도 등을 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며, 같은 말이라도 의사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다보면 이런 저런 사연들로 마음이 상하거나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생기면 당사자 본인보다는 제3삼자와 어우러져 뒷담화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 하는 말로 “아무개 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앞뒤가 꽉 막혀서 무슨 말을 해도 전혀 통하지를 않거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다가 자신의 말만 옳다고 주장을 하면서 우기는 것이 아예 벽창호라고”, “그 사람은 고집이 보통이 아니거든, 한번 황소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말은 아예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주 벽창우라니까”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쌓였던 감정을 풀어놓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에 말이나 의사가 잘 통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주장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거나, 우둔하고 지나칠 정도로 고집이 센 사람을 ‘옹고집’, ‘고집불통’, ‘고집쟁이’, ‘벽창호’외에도 ‘목곧이’와 같은 말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처럼 고집이세고 의사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리거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려하고 될 수 있으면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 가운데 미련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벽창호’라거나 ‘벽창우’라고 부르는 근거는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지난날 우리나라 시골지역 주택의 대부분은 여름철 태풍에 대비하는 한편 땔감의 확보가 쉽지 않았으므로 추운 겨울철에 보온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높이를 낮게 하고 건축자재도 목재로 뼈대를 짜고 흙을 바르거나 토담으로 벽을 만들어 오늘날의 주택과 비교하여 구조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데다 출입문이라든지 창호는 유리의 보급이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용 면에서도 부담이 되었으므로 유리창은 사용자체가 되지 않아 목재로 만든 문에 창호지를 바르고 여닫는 문짝에 문풍지를 발라서 문틀과 문짝사이의 공간을 메우게 하여 외부의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바깥의 빛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서 실내를 밝히는 구조였다.
일반적으로 ‘벽창호’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전통의 주거시설인 한옥(韓屋)에서 주된 생활공간인 방(房)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가 큰 출입문을 열지 않고서도 바깥의 사정이나 풍경을 쉽게 관찰하거나 방안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통풍을 원활하게 함으로서 실내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며 겨울철에는 환기기능 외에도 보온을 위하여 별도의 문을 설치함으로서 찬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거나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여 방안의 온도가 낮아지는 것을 최소화하는 한편으로 실내의 생활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용도를 할 수 있도록 별도로 만든 작은 문을 뙤창문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은 출입문과 기둥하나를 사이에 두고 설치를 하였다.
집안의 어른이 방안에서 큰문을 열지 않고서도 장죽 담뱃대를 이용하여 문밖에 담배통을 두어서 담배연기가 실내에 퍼지는 것을 최소화하여 흡연을 즐기면서도 바깥의 사정을 살핀다거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지시나 요구할 사항이 있을 시에는 이 뙤창문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뙤창문과는 다르게 벽에다 창문모양을 내고 벽을 치거나, 주로 토담집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방의 앞쪽에 있는 출입문의 반대편인 방의 아랫목이라 할 수 있는 뒷면에 별도의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작은 고정된 창을 만들어서 필요할 경우 문을 여닫을 수 있게 함으로서 방안의 환기를 원활하게 하면서도 방안을 어느 정도 밝게 하는 한편으로는 외부에서 사람이 집안에 드나드는 것을 알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벽창호(壁窓戶)’와는 다르게 ‘벽창우(碧昌牛)’는 시설물과 동물이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리게 된 것에는 단어의 구조상 벽동과 창성지역의 이름에서 지명이 선행하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 후행하는 것에서 그 대상의 이름이 된 예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예는 ‘안주’에서 나는 ‘항라(亢羅)’라는 뜻의 ‘안주항라’가 줄어든 ‘안항라’, ‘통영’에서 나는 ‘갓’이라는 뜻의 ‘통영갓’, 통영에서 나는 장롱이라는 의미의 ‘통영 장(欌)’, 통영에서 나는 대발(竹簾)이라는 뜻의 ‘통영 문대발’, ‘나주’에서 나는 소반(小盤)이라는 의미의 나주반 등에서 보듯이 지명과 그 지역 특산물을 합성하여 만든 물건의 이름에서 그 예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도록 빈틈없이 꽉 막힌 ‘벽(壁)’과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사람과를 동일선상에 놓고 불통(不通)을 연상시키는 것이 ‘벽창우’를 ‘벽창호’로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실제적인 의미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이와는 다르게 ‘벽창호’라는 말을 우리나라 고유품종인 한우의 지역적인특성을 지닌 ‘벽창우(碧昌牛)’자체에서 유래를 찾을 수가 있다고 하는데, 벽창우라는 말은 벽동창성지우(碧潼昌城之牛)의 줄임말로서 직역을 한다면 국토의 분단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의 ‘벽동과 창성지방에서 생산되는 소’를 말하는 것이다.
벽창(碧昌)은 평안북도 압록강연안에 있는 마을인 벽동(碧潼)지방과 창성(昌城)지방을 가리키는 말로서 ‘벽동’지역은 강남산맥이 동서로 뻗어있으며 남부가 산악지대인 관계로 지대가 높고 북쪽은 압록강연안의 만주와 접한 내륙지방으로 추위와 더위의 차이가 크고, ‘창성’지역은 대부분이 험준한 산간지대로 벽동과의 경계를 따라서 압록강의 지류가 수풍댐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주변지역은 안개가 많이 끼는데다 5월말까지도 눈이 녹지 않는 열악한 환경으로 이들 지역에서 기르는 소는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반면에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성질이 억세기 때문에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부리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생겨나게 된 어원을 따지고 보면 역용우(役用牛)로서 한우를 짐을 나르거나 논밭을 갈아엎는 등의 농사에 이용할 때에 지역마다 소를 부리는 용어에서 약간의 차이가 따르게 마련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각자의 의사를 전달하거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에도 지역마다 각기 다른 저마다의 방언이 있고 억양이나 발음에 더하여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다르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이 부리는 소에 있어서는 벽동과 창성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라도 한다면 당연히 소를 부리는 용어나 억양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소를 부리기 위하여 앞으로 가자라고 할 때에 ‘이랴’, 좌로 가자고 할 때에는 ‘자랴’, 멈추어 서라고 할 때에는 ‘워-’ 등의 명령을 하는 말들을 하고, 오른 쪽으로 방향을 전환 하고자 할 때에는 별다른 명령어 없이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이 지역에 따라서 사람의 억양이나 어투에 차이가 있거나 명령을 하는 의미나 동작에 있어서 차이가 나거나 각기 다른 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벽동과 창성지역에서 생산되어 자란 소가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간다던지 하는 경우에 소를 부리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익숙해 질 때 까지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어서 부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벽동과 창성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는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체구가 크고 힘이 좋고 체력은 강건한 반면에 성질은 거칠게 진화된 면이 있어서 부리는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지시를 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는데다 고집이 세고 의사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매질을 가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가해지는 구박을 받아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오히려 답답하기도 하고 부리는 사람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