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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규철선생님 검도 일대기[수련기]
선생님께서는 1942년 1월 21일 청주시 수동 224번지에서 (부)고일환 (모)김동각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서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학창 시절 도시락도 지참하지 못하고 등교하는 날이 많았고, 때로는 점심시간에 어머니께서 사발에 밥을 챙겨 오셔서 다른 학생들이 볼까 봐 창피해서 운동장 뒤편 나무 그늘 아래에서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어머니를 빨리 집으로 보내셨다고 하였으며, 대학 시절에는 틈틈이 청주 교도소를 방문하여 검도를 지도하면 고기국밥을 듬뿍 주어서 고기를 먹기 위해 교도소에 검도를 지도하러 갔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만큼 선생님 가정이 어렵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할아버지께서 자주 낚시를 나가시어 많은 붕어를 잡아오셔서 붕어를 고아 주시거나 매운탕을 끓여 주시는데 먹기 싫어도 반찬이 없어 안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붕어를 많이 드셔서 자연적으로 몸보신은 잘된 것 같고, 성인이 되어서도 잔병 없이 체력이 월등하시며 건강하게 지내 오신 것 같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면서 이야기 한 기억들이 생생하다.
선생님의 성품은 악의가 없고 인정이 많으신 분으로 전형적인 충청도 기질을 타고 나셨다. 외유내강 형으로 제자들에게는 아주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직선적으로 혼쭐나게 나무라셨지만 밖으론 아주 세심한 배려와 온자하고 정을 많이 주셔서 전국 검도인들에게 특히,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 가족에 대한 소회
평소에 가족에 대한 소회를 말씀 하시곤 하셨는데, 결혼 후 전세로 생활하면서 자식들이 전셋집 주인 자식들과 다투는 일이 있으면 잘잘못을 떠나 자기 자식들을 혼내 주곤 하였고, 자식들을 너무 고압자세로 대하다보니 성장하면서 주눅이 들어 생기가 없다고 하시면서 자식들한테 잘못한 것 같다고 후회를 하셨는데, 그래도 자식들이 바르게 성장해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집안에서야 어떻게 하셨는지는 몰라도 가정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셨다.
● 검도와의 인연
선생님께서는 1957년 청주공고 1학년 재학시절 서양의 기사도를 소재로 한 스카라무슈 (Scaramouche] 1952라는 영화 중 펜싱 장면에 매력을 느껴 펜싱을 하려고 하였으나 청주에는 펜싱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 이와 유사한 검도를 선택하여 청주 상무관을 찾아와 검도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교신 선생님 (충북 초대지도 사범)으로부터 처음 죽도를 잡게 되었고, 검도입문 4개월 만에 1957년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38회 전국 체전에 후보로 지명되어 가족 및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니셨는데 막상 시합 출발 아침에 출전 경비 문제로 함께 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학교도 못가고 선수단이 올 때까지 상무관에서 혼자 기압을 지르고 죽도를 내려치면서 다음에는 꼭 선수가 되겠다는 다짐을 수십 번 되뇌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이와 관련 오세억 前)충북검도회장은 고규철 선생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열심히 하였으며, 그때 좌절감을 극복해서 훌륭한 선수와 지도자로 성장한 모체가 된 것 같다며 소회를 피력 하셨다. 1962 년 청주대학교 체육부장에 선임 된 3학년 재학시절 주위의 권유로 2개월의 연습 기간을 거쳐 국회 의사당에서 개최 된 제2회 전국 신인 펜싱선수권 대회에 사브로에 출전하여 선생님께서는 당당히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청주대체육과 권영원 교수와 심판진들은 검도에서 펜싱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미 검도의 길로 마음을 굳힌 선생님께서는 정중히 사양하였다고 한다. 선생님의 전국 신인 펜싱 선수권대회 개인전 준우승의 계기로 청주대 펜싱부가 창단되어 현재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청주대 및 충북 펜싱의 효시는 고규철 선생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선생님의 검도 실력은 자타가 인정할 것이다. 가장 전성기는 79년도 제4회 및 제5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시절이며, 특히 제4회 삿포로 세계 검도선수권 대회에서 전 일본 선수권대회 우승자인 오노선수와 16강 경기에서 빠른 움직임을 통해 상대를 우왕좌왕 만들어 2 : 0으로 승리하였고 일본 및 세계 검도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식의 검도가 아닌 한국식 검도, 정적인 검도가 아닌 동적인 검도를 추구 하시면서 선 체력, 후 기술을 강조하셨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는데 오노선수와 마주치게 되어 "미안하다"하며 악수를 청하자 손을 뿌리치는 것을 오노선수의 두 손을 붙들고 흔들었다는 일화는 많은 검도인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해에 제 1회 대통령 하사기 전국 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우승으로 선수로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셨다. 그 후 제6회 트레이너, 제7회, 제8회 코치, 제9회 여자부 감독, 제10회 남자부 감독, 제14회 남자부 감독으로 참여하여 한국검도의 역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셨던 선생님은 그 중 제10회 일본 교토에서 개최 된 제10회 세계 검도선수권 대회에서 단체전 결승 주장전까지 대접전 끝에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그 대회에서 제자인 박상섭(청주시청 감독)이 9년 만에 그것도 일본 적지에서 개인전 3위를 차지하여 큰 성적을 거두었다. 선생님의 강인한 승부사적 기질과 지략, 선수들의 강인한 투지가 이뤄낸 합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청주공고 1958년 제39회 전국체전부터 29년 연속 출전하셨다. 30년 연속 출전을 하고 싶으셨지만, 당시 서정학 선생님께서 8단 승단을 포기하려면 출전하라는 말씀으로 전국 체전 연속출전 30년 중 1년을 채우지 못하여 아쉬움을 많이 남으신다고 하셨다.
1989년 10월 1일, 8단으로 승단, 1997년 10월 1일, 범사 칭호를 수칭하셨다.
● 필자와 선생님과의 필연적인 만남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약을 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 육상을 포기하고, 1973년 3월 청주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청주 상무관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문을 통해 검도 수련모습을 보고 절제된 행동과 엄숙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해 6월에 청주농고 검도부를 찾아가 검도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청주 상무관에서 자주 수련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며 하루 2회씩 대련을 하면서 죽도록 맞고 초죽음이 되도록 수련이 반복되면서 선생님의 눈에 띠는 계기가 되었다 . 그 이후 하루에 꼭 2회씩 대련을 들어오라고 하시며 의지가 강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필자야 뒤늦게 검도를 시작하였으니 당시에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욕심이 있어 그렇게 한 것 같다. 대학(인천체전) 졸업 후부터 상무관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더더욱 가까이서 모실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운동이 끝나면 거의 매일 같이 술 한 잔을 하게 되는데 워낙 술을 좋아하셨고, 도장에서의 지도보다도 술 한 잔 마시면서 검도 또는 인생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소주는 화학주야 건강에 좋지 않아 가능하면 맥주나 양주를 마시라고 하셨다. 약주를 드시면서 선배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애 창곡으론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두메산골, 영시의 이별 (배 호), 동숙의 노래, 돌지 않는 풍차, 갈대의 순정(문주란), 고향무정, 영등포의 밤, 우중의 여인(오기택) 중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은 돌아가는 삼각지며, 그 당시 녹음을 해서 간직했던 하나의 테이프가 재생이 되지 않아 육성으로 들을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매혹의 저음으로 불러주는 주옥같은 음성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니 참으로 세월이 믿어지지 않는다. 선생님께서는 기술교사로서 체육교사도 아니신데 1970년도부터 오후에는 매일같이 청주 상무관으로 오셔서 중, 고, 대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전국 체전 일반부선수로 출전하시곤 하셨는데 늘 하시던 말씀이 “검도는 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검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검도인이 아니다” 하시면서, 나에게 직장이냐 검도냐 둘 중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검도를 택하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후배 검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게 선생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며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검도 수련을 하여 그나마 현재의 필자가 존재하지 않나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더더욱 검도수련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필자가 1990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도장에서 초보자가 검도에 대해 질문했을 때 도장에 윗분 선생님이 계시면 선생님에게 안내해서 지도를 받게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저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스스로가 교만하지 않고 자숙하면서 검도를 수련할 수 있도록 큰 가르침을 주셨다. 당시 필자가 너무 앞서가는 것을 경계하여 마음으로 전하고자 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초심을 잊지 않고 검도의 기본인 예의와 배려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고 생활하는데 조심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종림 회장님과 전영 술 선생님에 대한 예찬론을 자주 피력하시고 하셨는데, 이종림 회장께서는 검도의 논리에서 한국과 일본 검도인들이 꼼짝을 못한다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국의 어느 지역을 가던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모르는 게 없으신 팔방미인이라고 하셨으며, 이종림 현 회장님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셨다. 또한, 전영술 선생님은 “한국에서 가장 검도기술이 좋으시고, 고단자 제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셔서 부렵다”고 늘상 말씀하시곤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충북 검도사랑은 남달랐다. 체육교사도 아닌 기술교사가 학교수업도 힘든 시절에 모든 수업을 오전으로 조정하고, 오후엔 청주 상무관에서 변함없이 제자들 지도에 전념하시고 각종 전국대회 및 행사에 어김없이 참석하셨다.
선생님의 제자로는 김국환(범사 8단, 충북검도회 수석부회장), 이규호선생(범사 8단, 충북공고 정년퇴직), 오정영(교사 8단, 前법무연수원 검도교수), 김영학(교사 7단, 용인대 교수), 민창기(교사 7단 前공군사관학교 검도교수), 김민환(교사 8단, 유원대 교수), 이상문(교사 7단 한국 중·고등학교 검도연맹 전무), 배명환(교사 8단, 대한검도회 이사), 박종철(교사 7단, 칠금중학교 감독), 강태원 )([교사 7단, 충북검도회 부회장], 조재성(교사 7단, 괴산군청 감독), 김재중(교사 7단, 충북 검도회 전무), 박상섭(교사 7단, 청주시청 감독), 임근배(교사 7단, 충남체육회 감독), 강용 만, 박홍범, 이준규, 민병주, 김대성 등 수많은 검도 제자들을 양성 하셨으며, 이외에도 대한검도회 이사 유재봉, 윤경중, 강준희, 김태영, 신학경, 김은중, 김건일, 채희준, 김영배, 정정택 등이 있다.
국가대표 충북 출신 제자로는 김건일(제1회 청소년 세계 검도대회 단체우승), 이춘복(제5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단체 3위), 조재성(제8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출전), 박상섭(제9회~제12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단체 2위[4회 출전], 제10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개인 3위), 임근배(제12회 세계 검도선수권 대회 개인 3위), 충북 검도회에서는 충북검도의 발전과 대한검도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신 선생님의 검도사랑을 기리기 위해 생존해 계시던 2017년 3월 3.1절 기념 회장기 검도대회 겸 제1회 일도(一道)(선생님의 호) 검도대회를 개최하였고, 2020년 제4회 대회를 개최 예정이다. 한편 충북검도회에서는 故 이교신 선생 추모 검도대회를 이어오다 그 동안 충북 검도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 하시다 운명하신 선생님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대회(선검추모 검도대회)로 변경하여 41회째 이어오고 있다. 향후 일도(一道)대회를 선검 추모대회와 통합하여 개최하는 (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선생님께서는 2020년 1월 4일(토) 00:19분 만 79세 운명하시고, 1월 6일(월) 화장 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연청로 소재 선영에서 전국 검도인들과 유가족, 충북 체육 및 충북 검도인들의 비통한 애도 속에서 충북검도회장으로 엄수되고 영면에 들어가셨다. 그 동안 전국 검도인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 속에 마지막 편히 모실 수 있게끔 열과 성으로 도와주심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이종림 대한검도회 회장님께서 영면 이후 더 많은 애정과 열정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여러 면에서 선생님의 일생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부족한면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에게 충북 검도인의 마음을 담아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 선생님의 주요 학력 및 경력
◆ 소속단체 주요경력]
> 충청북도 검도회 전무이사 1977년 ~ 1980년
> 대한검도회 감사 1980년 ~ 1989년
> 충청북도 검도회 전무이사 1983년 ~ 1992년
> 청주시 체육회 경기이사 1983년 ~ 2004년
> 충청북도 검도회 도사범 1985년 ~ 2004년
> 대한검도회 훈련이사 1989년 ~ 1993년
> 충북체육회 경기이사 1993년 ~ 1996년
> 충북체육회 감사 1996년 ~ 1998년
> 대한검도회 법제상벌위원장 1993년 ~ 2004년
> 대한검도회 부회장 및 심판위원 1993년 ∽ 2004년
> 충북체육회 경기이사 2001년
> 청주시청 감독 2004년 ~ 2011년
> 대한검도회 기술강화위원장 2005년
> 충청북도검도회장 2005년 ~ 2006년
> 충청북도검도회장 2011년 ~ 2017년
◆ 학력 및 주요 교직 경력]
> 청주 주성중학교 졸업 1954년 ~ 1957년
> 청주공업고등학교 졸업 1957년 ~ 1960년
> 청주대학교 광산학과 졸업[학사] 1960년 ~ 1964년
> 단양 여자 중․고교 교사 발령 1969년
> 보은중학교 1970년 ~ 1971년
> 충주중학교 1971년 ~ 1974년
> 청주남중학교 1980년 ~ 1982년
> 부강중학교 1982년 ~ 1986년
> 주성중학교 1986년 ~ 1991년
> 청주대 산업경영대학원 졸업(석사)
> 청주 청원중학교 1991년 ~ 1994년
> 진천중학교 1994년 ~ 1995년
> 음성교육청 장학사 1995년 ~ 1996년
> 충북단재교육원 연구사 1996년 ~ 1998년
> 청주 주성중 교감 1998년 ~ 1999년
> 충주 중앙중학교 교장 1999년 ~ 2002년
> 청주 서원중학교 교장 2002년 ~ 2004년(정년퇴임)
◆ 수상 실적
> 충청북도 교육감상 4회 1973 ~ 1976년
> 충북 최우수 선수상 1976년
> 충청북도 교육감상 2회 1977년 ~ 1978년
> 청주시 문화상(체육부문) 1978년
> 충청북도 교육감상 4회 1981년 ~ 1984년
> 체육부장관상 4회 1985년
> 국무총리상 1986년
> 체육훈장 기린장 1989년
> 충청북도 교육감상 1990년
> 대통령 표창 1991년
> 충북도민대상(체육부문) 2000년
◆ 검도 경기 실적
> 제40회 전국 체육대회 고등부 우승
> 제41회 전국 제육대회 대학부 우승
> 제44회 전국 체육대회 대학부 우승
> 제45, 47, 48, 49회 전국 체육대회 일반부 우승
> 제51, 52, 54, 58, 63회 전국 체육대회 일반부 준우승
> 제55, 61, 66회 전국 체육대회 일반부 3위
> 제3회 전국 단별 개인전 3단부 우승
> 제7회 전국 단별 개인전 4단부 우승
> 제9회 전국 단별 개인전 5단부 우승
> 제10회 전국 단별 개인전 5단부 우승
> 제15회 전국 단별 개인전 6단부 우승
> 70, 71년 이무공 탄신 시도대항 검도대회 준우승
> 73년 이충무공 탄신 시도대항 검도대회 우승
> 75년 이충무공 탄신 시도대항 검도대회 3위
>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 검도대회 일반부 개인전 우승
> 제1회 대통령기 전국 검도선수권대회 일반부 개인전 우승
> 제4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삿뽀르) 개인 8강
> 제5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국가 대표 16강
◆ 지도 실적
> 제2회 국제 청소년 검도대회 준우승
> 제6회 세계 검도선수권 대회 3위
> 제7, 8회 세계 검도선수권대회 트레이너(서울, 캐나다) 준우승
> 제9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여자부 감독(파리) 우승
> 제10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남자부 감독(도쿄) 준우승, 박상섭 개인 3위
> 제14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남자부 감독(브라질) 3위
> 제14회 세계 검도 선수권대회 남자부 감독 개인전 2위, 3위
> 제4회 대통령기 검도 선수권대회 일반부 단체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