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04. 05
■고려 제31대 공민왕
1330년(충숙왕 17)∼1374년(공민왕 23). 고려 제31대왕. 재위 1351∼1374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전(顓),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14세기 후반, 원명교체(元明交替)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일소하고, 실지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위약하게 한 친원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공민왕릉의 상석(床石)과 난간석(欄干石)
▲공민왕릉의 문인상
▲공민왕릉에 있는 석호상
고려 제31대 공민왕릉(恭愍王陵)은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黃海北道 開豐郡 海仙里 正陵洞)에 있다. 이곳 릉(陵)은 1365년(공민왕 14)~1374년(우왕 즉위)에 축조되었는데, 쌍릉 형식으로 병립되어 있고, 서쪽에는 공민왕의 현릉(玄陵)이고,동쪽에는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이다.
고분구역은 3개의 단과 맨 아래의 경사 단으로 이루어졌다. 맨 윗 단의 크기는 동서 약40m, 남북 약 24m인데 그 중심에 2기의 무덤을 남향으로 나란히 안치했다. 무덤은 석조 흙무덤으로 무덤무지의 높이는 약 6.5m이고 병풍석의 대각 직경은 13.7m, 두 능 사이의 간격은 0.5m이다.
각 무덤무지의 둘레에는 12각으로 석조병풍(石彫屛風)을 돌리고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석조병풍에는 구름을 탄 12지신과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밖에 맨 윗 단에는 한 쌍의 상석(床石)과 범(虎)과 양(羊), 조각품들 그리고 한 쌍의 망주석(望頭石)이 있다.
두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문인석과 한 쌍의 석등이 있고, 세 번째 단에는 두 쌍의 무인석이 있다. 경사단의 아래에는 수년 전에 새로이 원상 복구된 정자각과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의 터와 비(碑)가 있다. 두 능의 내부는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무덤의 칸은 널길과 안채로 이루어진 외채무덤이다.
널방의 크기는 동서 2.97m, 남북 3m이며 높이는 2.29m이다. 무덤의 널길은 안채 남쪽 벽 중심에 냈는데 길이 9.1m, 너비 2.04m, 높이 1.82m이다. 안채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판 돌을 한 면에 하나씩 세워 축조되었으며, 천장은 3개의 판돌을 덮어서 평천장을 하였다.
동, 서, 북의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높이 70~75cm)벽화가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상되었다.
관 위에는 각기 자기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저 있고,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와 북두칠성 그리고 한 쌍의 3성을 그렸다.
안채의 동벽에는 높이 43cm, 너비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함을 나타냈다.
공민왕릉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사람 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건축기술, 조형 예술수준이 종합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