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 2007. 4월호 <나의 애장서>
미해독의 애장서 <일기; 1918~1948>
박경하(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나의 책 수집 취미는 대학생 때부터이나, 본격적으로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라 할 수 있다. 1982년 가을학기 석사과정 첫 수업에 안춘근선생님의 서지학 강의를 듣고서부터이다. 안선생님은 나의 지도교수인 김용덕교수님과 친분이 있어서 강의를 맡으셨다. 사학과에서 보통 서지학 강의를 개설하지 않는데, 이 때 서지학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강의에서 안선생님께서 몇 달 전에 <고서동우회>(후에 고서연구회로 개칭)를 창립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기에 가면 내가 전공하려고 하는 향약(鄕約)자료를 구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20대 중반인 내가 회원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 고서 수집을 몇 십년간 하신 원로 분들의 ‘고서수집 무용담’ ‘책 자랑’ ‘책 사랑’을 말석에 앉아 어깨너머로 들었다.
당시 범우사의 윤형두사장님과 한국출판판매의 여승구사장님이 고서연구회 부회장으로서 경쟁적으로 안선생님을 모시고, 거의 매일 인사동 고서점부터 청계천 중고서점을 거쳐 장안평 골동품 상가까지 순례를 하면서 고서수집을 하였다. 오늘의 범우사의 <책사랑>과 여승구사장님의 <화봉문고>가 이 시기부터의 고서수집을 바탕으로 태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서 수집가들은 대개 출판연대가 확실한 인쇄판본들을 높이 평가하여 활자본이나 목판본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생이라 경제사정도 넉넉지 않아, 그 당시 거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값이 싼 필사본들에 관심을 가졌다. 필사본은 판본들의 내용을 전사한 일종의 필사 복사본이 많아,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출판하지 못한 필사본들은 유일본이며, 이러한 필사본을 구하여 공개하면 세상에 묻혀있던 그 가치를 재평가 해준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을 수 있다.
17세기 중반 효종의 부마로서 궁중에서 들은 이야기를 일기로 쓴 정재륜의 <공사견문록> 또는 <동평위일기>로 알려진 이 책은 <이두사전>을 펴낸 장세경선생이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을 듣고 나도 세상에 안 알려진 이런 일기를 하나 찾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 기회가 왔다. 90년대 초반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우연히 장안평 골동품상가를 들렀다가 당시 호산방의 박대헌사장이 17세기후반 동래 정씨로 기억하는데 이 분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쓴 일기를 보여 주었다. 3책으로 된 필사본이고 내가 전공하는 향약을 시행한 기록까지 있었다. 꼭 필요한 책인데 값이 대학강사의 경제수준에는 조금 높아 며칠을 망설이다가 돈을 구하여 찾아 갔더니 팔렸다는 것이다. 소유는 못하더라도 그 안의 향약 내용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물어 보니 상도의상 누구에게 판 것인지는 알려 줄 수 없다고 한다. 사실 “필요한 책은 보는 즉시 사야 한다”는 고서수집 수칙의 제1조를 우물쭈물하며 망각한 것이다. 이 후 논어에 나오는 세불아여(歲不我與;세상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를 책불아여(冊不我與)로 바꾸어 고서수집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좀처럼 유일의 필사본 일기책을 입수할 기회가 없다가 6~7년전 월 1회의 정기적인 고서경매전이 생겼는데 이 모임에 갔다가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경매전이라 내가 사고 싶어도 경쟁자가 있기 마련이라 이번에도 놓칠 수가 있을 수 있다. 왠 라면상자를 경매대에 올려 놓는데 일기책이 이 박스에 한가득 있다는 것이다. 책은 보여 주지도 않고. 시대가 191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의 일기라는 소개와 함께.
내가 조선시대 전공이라 시대가 좀 떨어지지만 일기책이라는데 혹해 입수하고자 하는 욕심에 무조건 손을 들었다. 역시 예상대로 다른 몇 사람이 계속의 호가에 따라 왔다. 당시는 경매 초기라 지방의 고서점을 운영하는 분들이 참여를 하였는데, 그 분들 역시 필사의 일기는 가치를 못 느껴서인지 중도 포기하는 바람에 나에게 낙찰되어 보증금만 걸고 그 일기책을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가지고 왔다.
전북 임실 성가리(城街里)에 살았던 진판옥(晉判鈺) 라는 분이 중학교 때인 1918년부터 1948년까지의 일기이다. 총 31년 중 1920, 1925, 1927, 1932, 1943~1946년 9권이 낙질이고, 총 22권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인쇄한 다이어리에 매일 한 장씩 일기를 썼는데, 우선 날씨를 꼭 기록하였다. 그리고 달걀 몇 개 산 것 까지 값을 적고 있고, 뒤 편에 월별 수입지출을 기록하고 있다. 1918년 학교 재학시는 교우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임실지방의 40년간의 날씨 및 물가 등 일상생활사를 복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중학교때의 기록은 또박 또박 펜글씨로 적고 있어서 알기가 쉬우나 뒤로 갈수록 노필로 바뀌어 도시 해독을 할 수가 없다. 분량이 8,000여매에 달하니 쉽게 엄두가 안 나기도 하고, ,마음이 있기는 하나 내 전공보다 시기가 후라 시급성을 못 느껴 본격적으로 해독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내 연구실 책상 밑에 잘 보관을 하고 있으니, 애장서이기는 하나 미해독의 애장서이다. 내용을 자세히 알 길이 없어서 쓰다 보니 본질보다는 나의 고서수집기를 적게 되었다. 구체적 내용은 해독 후 한번 더 소개하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
첫댓글 어려웠지만 운좋게 애장서를 갖게된 행운에 부러움과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책을 애장한다는것은 진지한 삶에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교수님처럼 소중한책을 모으는 습관을 익혀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