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짝이 거의 다 가려질정도로 제법 큰 배낭을 매고 상훈은 마산역 광장을 나서고 있었다. 7월의 뜨거운 태양은 아스팔트까지도 시뻘겋게 달구는 듯 했다. 그렇게 더운 날씨였건만 상훈의 표정에선 어떤 설레임같은 것이 일고 있음이 느껴졌다.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는 의자 하나로 가서 앉는다.
" 상훈씨 !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다본다. 빨간색 프라이드가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훈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일어난 것이 반가운 감정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출된것만 같아 순간 무안하기까지 하다. 차가 멈춰서고 운전석에서 여자하나가 내린다. 유리다.
" 유리씨 ! "
" 오랜만이에요. "
" 잘 지내셨죠 ? "
" 네, 덕분에... "
" 날이 많이 덥죠 ? 빨리 차에 타세요. "
상훈은 우선 배낭을 차 트렁크에 넣고는 얼른 조수석에 들어가 앉는다. 유리가 진작부터 에어콘을 틀어놓고 있어서. 차안은 숨통이 다 터질정도로 시원했다.
" 정말 잘 오셨어요. "
" 하하...예에... "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유리의 말투에 상훈은 너털웃음을 내뱉는다. 빨간색 프라이드는 마산역광장을 천천히 빠져나간다.
"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 "
" 아뇨. 아직... "
" 그럼 우리 냉콩국수 먹으러가요. 제가 이 근처에 냉콩국수 잘 하는 집을 하나 알아요. "
" 네 ? 내...냉콩국수요 ? "
" 네 ! 이 근처에 냉콩국수 끝내주게 해주는 집이 하나 있어요. "
사이다처럼 청량하고 시원한 유리의 목소리에 홀리기라도 했음인지 상훈은 다른 이야기를 할 엄두조차 내지를 못 한다. 자동차는 어느새 유리가 안내한 냉콩국수집에 도착을 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유리는 직접 차문을 열어준다. 상훈은 천천히 차에서 내린다.
" 들어가요 ! "
이마를 약간 찡그려보이며 웃는 유리의 표정이 상훈은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이끌린채 상훈은 유리와함께 냉콩국수집안으로 들어간다.
유리는 냉콩국수 두그릇을 시킨다. 상훈은 그 음식이 맘에 들지가 않았다. 이전까지는 냉콩국수를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이유를 댄다면 집안식구중에 냉콩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나 할까.
처음 대면해보는 냉콩국수의 하얀국물이 상훈은 좋은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뭐라고 이야기할사이도 없이 유리가 재촉을 한다.
" 어서 드세요. 시원할 때 드셔야 제 맛이에요. "
상훈은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먹어본다. 시원한 느낌이 일단 먹을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물을 먹은 뒤 국수면발을 이번엔 입에 가져간다. 유리가 소금 한숟갈을 듬뿍 떠서 국물에 뿌려준 뒤 수저로 두어번 저어준다.
상훈은 순간 당황스러워진다. 조금 어이없게도 유리의 그런 모습에서 중학교때 툭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반아이 하나가 점심시간에 느닷없이 자기 도시락에 찬물을 뿌리던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의 환한미소때문일까. 그때와같은 거부감은 일단 들지가 않는다.
" 이 국수집이 벌써 한 20년 전통이라 그러더라구요. 지금은 이 집 처음에 만들었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집 큰아들이 운영한대요. "
" 아아...네에... "
국수를 어느새 다 먹어가는데 유리가 이번엔 조금만 더 드셔보라며 국수와 국물을 조금 더 상훈에게 얹어준다. 국수집에서 나온 뒤 상훈은 유리와 함께 차를타고 오봉회관으로 향한다.
마산 시외의 한 야산에 위치한 오봉회관. 상훈으로썬 4월에 있었던 그곳의 행사에 참석하고 난 뒤 석달여만의 일이다. 피서철이 되어서인지 마산에서 시외로 빠져나가는 길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 꽉 잡아요 상훈씨. 차 억수로 흔들릴꺼에요. "
오봉회관 건물이 있는 산길을 앞두고 유리가 상훈에게 말한다. 상훈은 안전벨트와 차 앞 받침대를 손으로 짚는다. 차는 산길을 오른다. 덜컹거리는 차가 유리는 재미있는지 웃어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대로 익숙해져있는 솜씨다. 차는 마침내 컨테이너 박스건물로 되어있는 사무실 건물앞에 당도하고. 차 안에서 젊은 청년 몇 명이 나온다.
" 어 ? 왔네 진짜루. "
"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나. 이 사람이 이래봬도 일당백이다. "
사무실안에서 나온 청년 한 사람에게 유리가 사뭇 자랑스럽게 한 말이다. 거제도에서 개최된다는 청년회의 전국 여름수련회를 준비하기위해 모인 준비위원들이다. 상훈은 그들과 함께 건물안으로 들어간다.
건물안에는 약 10여명가량의 20대 초중반의 남녀가 있었다. 서울,인천,용인,전주,대구,부산 그리고 마산지역의 대진교 청년회 대표급 인물들이란다. 유리는 하나하나 그들을 상훈에게 소개를 한다.
다른지역은 다들 그곳 회관의 청년회 대표급들이 참석을 했지만 서울은 참석할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했다. 상훈은 부산회관 청년회 회장인 유리와 재무간사 영의 애걸복걸하는 전화를 받고서 그래서 대신 참석을 하게 된 것이었다.
' 빗소리 그치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얼굴. 우연히 만났다 스치고 지나간긴머리 소녀야. 개울건너 작은집에 긴머리소녀야... '
준비위원들과의 사무실안에서 회의를 마치고 상훈은 오봉회관안의 광장을 혼자 거닐어보며 노래를 한곡 읊조려본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상훈은 공연히 지금 이 시간 ' 긴머리소녀 '라는 캠프송을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상훈씨 ! "
누군가가 부르는소리에 돌아보았다. 어두워진 시간이라 자신에게 다가오고있는 여자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고나서야 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좀 어리둥절하게도 영이는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있었다.
" 뭐하고 계셨어요 지금 여기서 ? "
" 아뇨...그냥...좀...거닐어봤어요... "
상훈은 대충 얼버무린다.
" 공기가 참 좋지요 ? "
영은 억양은 당연히 경상도사투리였지만 발음은 대체로 표준말에 가까웠다.
" 저거 보이세요 상훈씨 ? "
영은 광장 한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건축물 하나를 가르킨다. 탑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람키를 조금 넘는 크기의 건축물이었다.
" 저거...제가 만든거에요. "
" 네 ? "
" 제가 만든거라고요. 중학교 2학년땐가 방학때 부산회관이랑 여기 오봉회관 애들 한 이십명이 달라붙어서 만든거지요. 하지만 사실상 거의 다 제가 만든거나 마찬가지에요. "
" 중학교 2학년때요 ? "
" 예. 세상을 구원하러 올 새로운 영적존재를 갈망하는 이들의 영혼이 한데 어우러져 만든거지요...작은 탑이지만 아마 에밀레종에 들어간 정성도 저것보담은 몬 할거에요. "
영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상훈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해 보인다. 상훈이 앉자 영은 상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는다. 그리고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 세상만사 야속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어이타고 이내청춘 세월속에 묻힐소냐. 굴러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 맺힌 이 세상 부셔지고 부셔저도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부셔보자아아아~~~~ "
후렴구에가서 영의 노래하는 소리가 다소 격앙이 된다. 노래를 마치자 상훈은 박수를친다.
" 이 노래 알아요 상훈씨 ? "
" 아뇨, 모르는데요. 무슨 노래죠 ? "
" 80년대 초반인가 중반에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탄 수상곡이에요. 수상자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친구의 넋을 그리며 이 곡을 만들었다고 수상소감을 발표했대요. 애기때는 아무뜻도 모르고서 무작정 따라서 흥얼거려보았던 노래인데. 철이들고나서 보니까. 가사내용이 참 기가막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영은 그 노래를 다시한번 차분하게 읊조려본다.
" ...굴러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부셔보자아아아~~~ "
노래를 마치고 영은 상훈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세운다. 그리고 그 탑이 있는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상훈에게 탑을 손으로 짚어보라고한다.
" 어떤 느낌이 드세요 ? "
뜬금없는 영의 질문에 상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다. 상훈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돌탑일뿐인데.
" 마음의 문이 열리면 그 탑에서 뿜어나오는 영혼의 숨결을 느끼실수가 있을거에요. "
상훈은 남자 준비위원들의 숙소가 마련된곳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성전건물 오른쪽길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서 있는 하모니카집 형태의 방이었다. 두명이 자도 벅찰정도로 방 하나의 크기는 작았지만. 두 개의 방에 네명씩 나누어잤다.
다음날 새벽예불을 드려야한다며 깨우는 남자 준비위원들의 흔듬에 잠에서 깼다. 졸린눈을 비비며 그들과 함께 방에서 나갔다. 이제겨우 새벽 다섯시를 넘었음임에도 하늘빛은 어느새 옅은 청색을 띠고 있었다.
준비위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가 상훈은 의아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잤던 방 옆방문앞에 검은색 신발이 하나가득 쌓여있는 것이다. 방안의 불은 꺼져있었다. 남자숙소건물 방은 모두 네 개인걸로 알고 있었다.
그중 두 개를 준비위원들을 위한 숙소로 임시로 마련을했고. 맨 왼쪽방은 오봉회관에 상주하는 간부가 쓰는 방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방은 빈방이라고 들었는데. 신발들을 자세히보니 대개는 구두나 부츠였으나 모양은 각기 다양했다.
누가 쓰는 신발인지 의아해서 다른 준비위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못들었음인지 대답은 하지 않고. 어서 새벽예불 을 드리러 성전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는 말만 건넸다.
아침식사를 하고 준비위원들은 차 두대에 나누어타고 거제도로 향했다. 상훈은 유리가 운전하는 빨간색 프라이드에 영과 또다른 여성 준비위원과 셋이 함께 타게 되었다. 다른 남자 준비위원들은 봉고차에 탑승했다.
12인승 승용차지만 여름수련회 행사에 쓰이게 되는 물품들을 싣고나니 일곱명만 타고도 차안이 이미 꽉 찼다. 그래서 상훈은 여자들이 탄 차에 타게 된 것이다.
" 상훈씨 ! "
달리는 차안에서 유리가 상훈에게 묻는다.
" 상훈씨는 무슨 노래 좋아해요 ? "
" 노래요 ? "
" 네. "
" 전 민해경 노래와 이지연 노래를 좋아해요. 그리고 양하영의 ' 영원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하고요. "
" 양하영 노래요 ? "
" 네. "
" 그...듀엣으로 활동하던 남자와 결혼했다가 나중에 이혼했다는 그 여자가수 말이죠 ? 양하영... "
" 어 ? 양하영이 그 양하영이었어요. "
" 네, 맞아요. 영원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바로 그 양하영이 부른거에요. "
하면서 유리는 그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 오래도록 머물수 있는 영원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왜 당신은 내게 안녕을 말하나요.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가는 사랑인줄 알았는데 왜 당신은 내게 이별을 주시나요. 혹시나 내가 떠날까 나몰래 눈물짓던 당신이 왜 먼저 이별을 말하나요 ? 사랑해요. 떠나지 말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
"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별은 정말 싫어요. "
유리가 노래를 부르던 중간쯤부터 상훈이 따라부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듀엣이 되어버렸다. 노래를 마치자 뒷자석에 두 여자는 박수를 친다.
몇시간을 달려 일행은 어느덧 거제도의 한 해수욕장에 당도를했다. 바다를 보자마자 유리와 영은 와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상훈도 엉겁결에 둘을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세사람은 어느새 신들린 듯 서로에게 마구 물을 뿌려댄다..
저녁에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더니 다음날 오전엔 바닷바람이 다소 거세어져 있었다. 준비위원 일행은 어제 쳐놓았던 텐트를 다시 거두기로 했다. 텐트를 거두기위해 기둥을 각기 잡았을 때 별안간 강풍이 불더니 그대로 텐트가 무너지는 소동이 불어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상훈과 유리가 무너진 텐트밑으로 깔리고 말았다.
" 영아, 영아 내 좀 살리도. "
급했는지 좀처럼 사투리를 쓰지 않던 유리의 입에서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다른 일행들이 허겁지겁 텐트를 벗겨냈을 때 상훈과 유리는 서로 부둥켜안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지 영이 놀리는듯한 투로 말한다.
" 언니야. 둘이서 그 안에서 뭔 일 있었나 ? "
낮이 되자 바람이 다시 잔잔해진 듯 했다. 텐트를 다시 치느냐 아니면 태풍의 진행상황을 좀 더 지켜보느냐는 문제를 놓고 준비위원들간에는 격론이 오고갔다. 오후 늦은시간이 되어서 상훈은 무료한지 혼자 민박집에서 밖으로 나와 방파제를 거닐어보았다. 오후햇살이 수평선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상훈씨 ! "
유리의 목소리였다. 총총걸음으로 그녀는 상훈에게 다가왔다.
" 다슬기 좋아하세요 상훈씨 ? "
" 네 ? 다...다슬기요. "
" 네 ! 우리 다슬기 먹으러가요 상훈씨. "
유리는 상훈의 손을 잡아이끈다. 유리는 상훈을 바닷가 한쪽 진흙이 제법 많은곳으로 가더니 익숙한 솜씨로 그 속에서 계속 무엇인가를 캐내어 냄비안에 담는다. 유리는 이어서 상훈을 방파제 한쪽의 어느 돌계단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민박집으로 가서는 초고추장을 갖고 나온다.
" 상훈씨 ! 아, 하세요. "
다슬기 속 하나를 이쑤시게로 집어 상훈에게 내어보인다. 상훈은 순간 기겁을한다. 상훈이 망설이는 듯 하자 유리의 이맛살이 찡그려진다.
" 싫으세요 ? "
" 아...아니에요...좋아요...고마와요... "
하면서 상훈은 유리의 손에 있는 이쑤시개를 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슬기를 초고추장에 찍어서 서로에게 먹여주며 흐뭇하게 웃어보인다. 오후햇살이 어느새 수평선에 닿아있었다. 상훈은 유리와 함께 나란히 저녁노을을 바라다본다.
" 상훈씨 ! "
" 네에 ? "
" 상훈씨는 저 붉게타는 저녁노을이 어떻게보여요 ? "
" 어...어떻게 보이다뇨 ? "
" 천지만물의 움직임과 이치는 그 어느것 하나 의미가 없는 것이 없거든요. "
" ??? "
" 전 저기서 세월이 보여요. "
" 세월이요. ? "
" 네, 세월. 상훈씨는 아직 모르죠 ?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
유리는 사뭇 진지함을 띠고 말한다. 상훈은 유리의 말을 알아듣는것인지 못하는것인지 묵묵히 듣기만 한다.
" 저녁노을은 저렇게 수평선을 잔뜩 물들이고는 스러지지만 아침이 되면 새벽별의 안내 를 받으며 다시 소생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지가 못하잖아요. "
" ...... "
" 시간이여 멈추라는 파우스트의 대사처럼 가끔씩은 저도 그렇게 외치고 싶을때가 있어 요. 한량없는 행복감을 맛보는 시간, 또는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에 한껏 도취되어 있는 순간들에는.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순간들이 또 그리고 한번 지나가면 스러져버리는 느낌들이 감홍들이 얼마나 야속하고 서운한지를. "
" ...... "
" 그런 감정들도 세월처럼 영원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
유리의 이야기가 계속되는동안에도 노을은 점점 수평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날이 어 둑해져옴을 느끼며 상훈은 유리를 데리고 민박집안으로 들어간다.
태풍이 한반도를 비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나서야 준비위원들은 본격적으로 여름수련회 행사준비에 들어갔다. 수련회날짜를 사흘정도 앞두었을 때 상훈과 유리는 수련회 행사일정에 포함되어있는 담력훈련코스 사전답사를 나갔다. 해수욕장 뒤켠에 있는 그리 높지않은 야산길이었다.
" 아까 누가 저쪽에 묘지가 하나 있다고 그러던데... "
" 괜히 우리 놀리려고 했던 소리 아니에요 ? "
" 아냐, 그러고보니 나도 어젠가 여기 지나가다가 본거같기도 한데. "
상훈보다 한 살 위인 유리는 언제부터인가 상훈에게 말을 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 담력훈련코스치고는 좀 시시하네요. 마을 불빛도 다 보이고 그냥 평범한길인데... "
" 아냐, 어린애들도 많은데. 이정도면 충분히 무서운 코스야. "
" 근데 왜 꼭 이렇게 전국규모의 여름수련회 행사를 하나요 ? 돈도 많이들고 여러 가지로 여건이 그렇게 힘들다면서... "
상훈의 물음에 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을한다.
"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 많이 안 모여. 아마 지역별로 하게되고 나이별로 하게 되면 20명도 안모이게 될거야. "
" 가만...방금 무슨 소리가 난거같지 않아요 ? "
인기척이라도 느꼈는지 상훈이 말한다. 유리가 뒤를 돌아본다.
"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
" 잘못들었나... "
" 돌아가지 인제...코스가 여기까지니까. "
" 그래요. "
코스답사를 다 마친 두 사람은 온 길을 되돌아가려한다. 그러다 두 사람은 흠칫한다. 검은물체 하나가 갑자기 흙담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유리와 상훈은 긴장을한다.
" 거기...누구에요 ? "
흙담쪽으로 몸을 돌려 기댄 것은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형상을 바라본다.
" 너...영이 아니니 ? "
유리가 알아보기라도 한 듯 그 형상에게 묻는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 영이...영이 맞구만... "
하면서 유리가 다가간다. 그러자 그제서야 그 형상은 체념한 듯 몸을 돌린다. 영이었다. 유리는 다소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 너...우리 뒤를 밟고 있었던거야 ? "
영은 대답이 없다. 고개를 숙인채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는 몸을 돌린다.
" 영아 ! "
유리의 부름에 뒤돌아 보는 영. 어둠속이지만 웬지 풀이죽어있는듯한 모양새임을 상훈도 느낄수가 있었다.
" 영아, 너 아직도 담배피니 ? "
갑작스런 유리의 물음이다. 영은 당황한 듯 유리를 쏘아본다.
" 영이 너 담배피는건 니 자유지만 시집갈 때 되면 가급적 담배피지 말아라. "
" 무슨...벌써부터 시집갈 걱정을 하나... "
영의 말투는 사뭇 뾰루퉁해있는 듯 했다.
" 담배가 태아한테 영향을 줄수가 있단말야. 여자몸은 남자하고 다르잖아. "
유리는 마치 친동생을 타이르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지만 영은 대답이 없다. 세사람은 그렇게 밤길을 걸어간다. 민박집에 다다르고나서 상훈은 방안으로 들어간다. 유리는 문앞에서 영을 잠깐 불러세운다.
" 영아 ! "
" 왜 ? "
영은 짜증이 좀 들어간 음성으로 대답을 한다.
" 너 아직도 아버지가 밉나 ? "
" ...밉지... "
머뭇거리다 대답하는 영의 말투엔 한숨이 배어있다.
" 너무 미워하진 말아라. 그래도 사람들은 다 힘들게 되면 부모를 찾게 되는게 자식인 것 같더라. "
" 난...다르잖아 입장이... "
" 그래, 하지만 또 따지고보면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그러나 그렇게 전부 미워하고 살게되다보면. 결국 영이 너만 손해다. "
영은 더 이상 대답이 없다. 유리는 그런 영의 등언저리를 다정하게 손으로 쓰다듬어준다.
3박4일로 일정이 잡혀있는 수련대회의 일정이 시작이되었다. 상훈은 유리와 함께 캠프파이어와 게임진행 사회를 담당했다. 마지막날밤 일정인 캠프파이어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수련회 참석자들은 잠자리에 들거나. 아직 꺼지지않은 모닥불 주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상훈은 유리와 함께 밤 바닷가로 나갔다.
" 재미있었어요 상훈씨 ? "
" ...글쎄요...잘 모르겠어요... "
" 그런 대답이 어디있어요 ? 재미있으면 재밌는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
파도소리가 유리와 상훈의 귓전을 연신 울리고 있었다.
" 미안해요 상훈씨... "
유리의 목소리가 좀 침울해진다.
" 네 ? 뭐가요 ? "
" 우리한테야 소중한 시간들이지만 상훈씨에겐 아까운 시간이었을수도 있을거란거 생각하지 못 했던거 같아요. "
" 아니에요. 아깝기는요...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유리씨같은 분도 만날 수 있게된거잖아요. "
" 그래요...사실 상훈씨같은 사람들은 우리같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 할거에요.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를...하지만 세상이 너무나 더럽고 혼탁하잖아요. "
유리의 목소리엔 사뭇 결기가 서린다.
" 그래서 우린 기다리는거에요. 세상을 구원해줄 새로운 그런 존재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존재를... "
" 네에...무슨말인지 알 것 같네요. "
상훈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한다. 착잡함이 조금은 배어있는 미소다.
" 에휴...하긴 나도 참...고등학교때 중국고전 연구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이승재선배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여기까지 오게되진 않는건데... "
" 아, 맞다. 이승재씨는 요즘은 왜 잘 안나와요 ? "
" 모르겠어요. 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통 연락이 없네요. "
" 그렇구나...하긴 부산회관에도 한 2,3년 다녀보고는 이건 아니다싶은지 안 나오는 애들 부지기수에요. "
유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오싹해져오는 느낌을 가졌었다. 대학선배 효리와 함께 동아대 뒷산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운동권 대학생들한테 프락치로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순간적으로 스쳐갔기 때문이다. 상훈이 의식하지 못 하게 고개를 잠깐 좌우로 흔들어본다. 얼굴이 약간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두 손으로 잠깐 지압을 해본다.
" 어디 아픈거에요 ? "
" 아뇨, 더워서 그런가봐요. "
" 상훈씨 ! "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뒤롤 돌아다본다. 수련대회 진행요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