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11월 18일 오전 7시, 미국 라스베가스의 데저트 스프링스 병원. 김득구선수(당시 23세)의 생명을 지탱하던 산소호흡기가 정지했다. 어머니 양선녀(당시 62세)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의 심장은 힘겨운 박동을 끝냈다. 챔피언 레이 맨시니의 주먹에 의식을 잃은 지 99시간만이었다.
무명과 가난에 맞선 23년간의 싸움도 막을 내렸다. “작은 관을 가지고 떠납니다. 맨시니가 그 안에 들어가던지, 제가 들어가던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김은 끝내 자신의 비장한 맹세를 지켰다.
2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그는 14살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구두닦이, 껌팔이를 거쳐 서울 구로공단 보세공장에서 생존의 문제와 처절히 싸웠다. 16살에 시작한 권투는 지겨운 바닥생활을 떨쳐버릴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일확천금과 신분상승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도시, 라스베가스가 그런 김득구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챔피언은 최고의 가치이자 무지개였다.
11월 14일 오전 7시, `황제의 궁전(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마련된 특설링에서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이 시작됐다. 상대는 떠오르는 백인권투영웅 맨시니. 두 선수는 서로 때리고 맞으며 처음부터 혈투를 벌였다. 챔피언 맨시니는 한때 KO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은 승리의 문턱에서 14회 19초만에 맨시니의 오른손 훅을 맞고 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흘간의 뇌사상태 끝에 심장과 콩팥을 2명의 동양계 미국인에게 떼주고 김은 자신이 만든 관에 누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논쟁이 그의 죽음을 뒤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인간은 고깃덩어리가 아니고, 프로권투는 스포츠가 아니다”며 권투의 잔혹성을 지적했고, 미하원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청문회까지 열었다. 1897년 12월 월터 크루트가 사망한 이후 김득구선수에 이르기까지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된 권투선수는 모두 340여명.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한 국제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그 이후 권투로 인한 사망자는 83년부터 지금까지 40여명으로 줄었다.
김의 죽음은 국내 프로권투가 긴 침체에 빠져든 신호탄이기도 했다. 프로야구가 150만 관중을 동원하며 출범과 동시에 대성공을 거둔 그 해, 김득구선수를 포함한 6명의 한국선수가 세계타이틀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국내 유일의 세계챔피언이었던 김철호마저 타이틀을 잃었다 74년 홍수환 이후 매년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던 한국권투가 8년만에 겪게된 `무관의 시대'였다. 이듬해 탄생한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이 권투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남겨진 김의 자취는 많지 않다. 노모 양씨는 이듬해 봄 홧병으로 숨졌고, 김의 아이를 가졌던 약혼녀 이아무개(당시 22세)씨는 이후 주변과의 소식을 끊었다. 김의 2세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인들의 영웅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던 맨시니도 슬럼프에 시달리다 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하면된다'는 헝그리 정신의 우상에 바쳐진 젊은 혼, 김득구선수. 그는 이제 기억조차 서글픈 전설로만 남아있다. (안수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