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운대 새마을연구소 주최, 구미시 주관 새마을운동 포럼 발표논문(15.4.22)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운동
최상호(국민정신연구소장, 전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관)
1. 새마을운동=5천년 가난 극복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 열정의 실체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 이게 새마을운동 이전의 한국인의 한숨이었다. 191명의 왕과 2명의 대통령이 지나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골격은 만들어 놓았으나, 가난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북의 남침으로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군인 28만, 민간인 76만명 등 104만명이 생 목숨을 잃는 비극까지 겹치면서 한반도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정치인들은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국민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당파싸움으로 지새는 암담한 현실이 계속됐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뭘까?
궁극적으로 국민 잘 살게 하는 게 정치가 아니겠는가!
뜻 있는 사람의 눈에는 권력투쟁에만 혈안이 돼 있는 정치풍토를 그냥 두면 언제까지 국민의 배고픔은 계속될 건가? 누가 책임을 질 건가?
그래서 일어난 게 5.16 군사혁명이라고 하겠다. 교과서적 민주적 절차로 보면 비정상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뜻만은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샀다고 하겠다.
부정부패의 일소라는 사회정화 활동과 함께 가난극복을 위한 재건국민운동을 시작했으나, 실천적 사업이 따르지 못하면서 지속적인 가난극복운동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된 국민운동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재건국민운동으로 경험한 관념적 정신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 국민의 잘 살기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출발부터 주도면밀하게 추진됐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농촌에서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 농민의 빈곤극복을 목표로 했다. 바로 농촌개발운동인 것이다.
1970년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이 일어나기 위해선 헌신적인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이 같은 헌신적인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는 소수정예 정신교육을 구상했고, 이 같은 교육을 끌어갈 적임자를 전국적으로 물색했으며, 그 결과 발탁된 인사가 바로 김 준 당시 농협대 교수였다.
김 원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33명의 교관들이 생활이 바로 교육이라는 신념아래 바람직한 정신, 신념을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줘 느끼고 깨닫게 하는 교관들의 솔선수범과 당시에 이미 가난극복과 농촌개발에 헌신하고 있었던 성공사례를 발굴해내 고난극복의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준 성공사례를 통해 새마을교육은 폭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산업화 중심 근대화의 기초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통해 달성됐다는 점은 온 세계가 공인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열성적인 새마을지도자를 통해 가능했으며, 새마을지도자들로 하여금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한 새마을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케 한 그 열정은 새마을교육을 통해 일어났던 것이다.
새마을운동과 교육에서 박 대통령의 의중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연수원과의 통로 역할을 해 온 박진환 당시 대통령특별보좌관은 새마을교육 성공의 「필수요인」으로 ① 새마을사업의 활발한 전개, ② 연수원 원장과 교관들의 열성, ③ 성공사례, ④ 분임토의, ⑤ 규율 있는 합숙생활, ⑥ 박 대통령 등을 들고 있다.
박 보좌관은 이 밖에 「가속요인」으로 ① 교관들의 인사 상 특전, ② 예산 우선 배려로 원장 교관들의 관련 수고 배제, ③ 청와대 고위직 출강으로 애로사항 조속 해결, ④ 정부의 연수생 선발 효과적 지원, ⑤ 각계 최고 저명 외래강사들의 열강, ⑥ 효과적인 수료생 사후지도, ⑦ 교관 가족들의 극기와 인내, ⑧ 식당 주방 아주머니, 수위, 기사, 용원 등 모든 종사자의 일심단결 등 8개를 꼽았다.
이 처럼 새마을교육이 행동 실천 중심의 강력한 정신교육으로 정착된 데는 새마을운동을 창안하고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해 새마을교육을 도입한 박 대통령의 교육 관련 기본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하겠다. 즉, 교관과 연수생의 합숙과 성공사례 중심의 정신교육으로 특징지어진 연수원 교육은 박정희 대통령의 당초 농촌개발지도자 교육 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농촌지도자 교육 구상은 1970년 초 당시 농림부장관과 박 특보를 부른 뒤 8.15 해방 후 정부의 농촌지도자 양성 인원은 방대할 것이나 현재 농촌엔 참된 지도자가 없어 고민 중이라면서, 농촌개발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지도자가 1년에 1개 군에 한 사람이라도 양성됐더라면 지금 한 郡내에 30명의 진정한 지도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한 번에 20, 30명씩이라도 좋으니 농촌개발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정신교육을 시켜보라, 그리고 그와 같은 교육 분위기는 參禪하는 기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 지시한 것이다.
대통령의 이 같은 구상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 확고해 진 것으로 보인다.
즉, 1970년 11월 있은 「농어민 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하사용(河四容)씨의 성공사례발표를 듣고 그가 행한 즉석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사례는시골 청년이 가난해서 결혼을 하고도 부부가 같이 살지 못하고 각자 머슴살이와 식모살이를 하면서 돈을 모아 땅을 사서 채소농사로 지어 소득을 올려 나중에 땅도 많이 사고 부자가 됐다는 내용이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부농을 일궈낸 성공담을 듣고서 눈시울을 적시며 감동했던 대통령은 준비된 연설문은 가서 읽어보라고 한 다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치사를 한 것이다.
즉우리들은 농촌개발에 앞장 선 사람이라면 의례히 외국의 예를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참으로 우리 농민들의 스승이며 민족의 스승이라고 본다. 우리는 한결같은 자립의지와 자조노력으로 가난을 기어이 물리친 河四容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河四容씨의 자립의지와 자조노력이야말로 우리의 농촌이 새로워지고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본다.이다.
河四容씨의 사례발표가 있은 지 6개월이 지난 1971년 5월에 개최된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시의 대통령 지시에서 현장 사례의 교재로의 활용은 더욱 구체화됐다.
즉, 그는 다음 달부터는 경제동향에 관한 통계숫자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전국의 농민 가운데 역경을 이겨내 자수성가를 하고 마을의 개발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지도자를 한 두 사람씩 골라 이 자리에서 성공사례를 발표케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1년 6월부터 새마을성공사례가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 시에 발표됐으며 이는 1979년 10월 대통령 서거 때까지 계속됐다.
이처럼 성공사례를 통해 의식과 정신을 바꾸겠다, 효과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대통령의 확신이 새마을정신의 개발을 위해 새마을성공사례를 활용할 것을 지시하게 된 것이다. 즉, 농촌개발지도자 교육은 농업기술 이전에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할정신자세의 개발에 초점을 맞춘 정신교육으로 하고, 이 정신교육도 관념적 이론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현장 실천의 사례를 교육소재로 한 실천적, 실질적 교육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통령의 교육 구상은 그 첫 작품인 제1기 독농가교육에서부터 그대로 드러났다. 즉, 1개 군당 1명씩 140명의 독농가가 참여하고, 행동 실천 위주의 정신교육에 초점을 맞춘 사실로써 잘 입증된다.
박 대통령은 농촌개발지도자 양성을 위한 독농가교육 교과과정을 결재하면서 농림부안의 농업기술 교과목을 축소하고, 종교계인사 중심의 정신교육 대신 그 자리에 새마을지도자 성공사례로 대체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써 그 후 새마을교육에서 정신교육의 주요소재로 새마을성공사례가 도입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의지와 헌신의 정신을 현장의 실천사례를 통해 계발토록 한 것이다.
이 같은 행동 실천 위주의 정신교육, 즉 새마을정신을 이론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터득케 하려는 새마을교육의 특징은「대통령→원장→교관」으로 실현되면서 새마을교육은 한껏 꽃을 피워 현장의 새마을운동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으며, 조국근대화라는 국가적 모표는 이렇게 달성돼 가고 있었던 것이다.
2. 새마을교육=새마을운동 성공의 추진동력;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
새마을교육이 단기간에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둔 데에는 이 교육을 도입한 박 대통령이란 통치권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새마을교육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열정과 집념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 국장 중에 그가 보인 모습에서 잘 나타나 있다.
1972년 새마을지도자로 출발한 새마을교육이 부녀지도자, 공무원,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사회지도층, 기업인으로까지 확산되자 국정 운영의 중추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장 차관들이 대학총장, 언론계 중진들과 함께 1974년 7월 20일에 연수원에 입교했다. 여기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정 고위층이 일반국민인 새마을지도자들과 ′함께‵ 노래 부르며 새마을성공사례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드라마가 성공함에 따라 1기 교육에 빠진 장차관들을 8월 17일부터 입교토록 예정돼 있었다.
헌데 입교 이틀을 앞두고 8.15 경축식장에서 영부인이 피격 운명함에 따라 청와대에 빈소가 마련되고 청와대 참모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16일 새벽에 대통령이 JP총리에게내일(8월 17일) 나머지 장관들이 예정대로 수원 연수원에 입교하는 거지?가 그의 첫 마디 말이었다 한다. 총리가아니올시다. 國葬 때문에 장관들의 새마을교육은 일단 연기해야 겠습니다.고 하자 대통령은국장이라 해서 모든 장관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먼저 다녀온 장관들만 있어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새마을교육에 대한 강한 집념은 새마을운동의 성공을 통한 조국근대화에 대한 강한 집념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마을교육의 성공으로 조국근대화 열기가 전 국민들에게 전파 확산되길 간절히 바라며, 이를 국정의 제1 목표로 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대통령은 「조국근대화←새마을운동←새마을교육」이란 도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그에겐 새마을교육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되고 새마을교육의 성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연수원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로 잘 나타난다. 1년에 한 두 번씩 연수원을 방문해 교육을 점검하며 원장 이하 교관들의 희생적인 노고를 크게 격려해 주었다.
교육생들의 수료소감을 일일이 훑어보면서 교육진행 상황을 꼼꼼히 챙겨 문제점이 보이면 즉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국근대화←새마을운동←새마을교육」으로의 국정운영 도식은 대통령과 접촉이 많은 장 차관 등 고위 공직자들에게 충분히 각인됐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사업과 예산에서 새마을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새마을 우선주의」가 공직사회에 확산되면서 정부의 대다수 부처가 종전의 사업 명 앞에 「새마을」을 붙이는 기현상까지 생기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새마을 관련 정부부처들은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새마을교육에 대하여 앞장서서 지원하려는 풍토가 조성됨으로써 연수원교육에 관한 행정 재정적 업무는 연수원 자체에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극히 순조롭게 처리됐다고 하겠다.
새마을교육의 성공을 위한 농협 농촌의 기여도 역사적으로 새겨둘 필요가 있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은 1972년 창설 이후 1980년 3월말 독립법인으로 독립할 때까지 기능상으로는 국가기관이나 조직상으로는 농협 소속이었다. 따라서 교관을 비롯한 교육요원들은 거의 모두 농협에서 차출되었다.
대통령에 의해 원장으로 발탁된 김 준 원장은 32명의 교관을 농협 5만여 직원 중에서 면밀히 물색해 뽑았다.
새마을교육이 감동을 줄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그 감동이 교관들의 헌신을 통해 크게 일어났다는 점에서 보면 교관들의 자질이 주요 성공요인임엔 틀림없다. 그렇다면 새마을 교관으로 차출된 이들은 새마을 교관의 기본 자질인 강한 희생 봉사성과 애국심을 원래부터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교관 차출시의 주요 고려덕목은「성실성, 인내심, 친화력과 조화」였으며, 학력은 기본적 참고사항이었다고 하겠다. 이는 33명 교관 중 6명이 고졸이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농협 출신을 연수원 교관으로 활용하는데 따른 농협의 순기능적 역할을 다음 2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새마을운동과 농협운동의 유사 동질성이다.
농촌개발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농협직원들은 생리적으로 농촌개발에 관심과 의지가 상대적으로 타 기관 종사자에 비해 강하다고 볼 수 있기에, 새마을운동을 농협운동의 연장선장에서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다고 보겠다.
대학에서의 전공에서 농대가 많은 점도 연수원 교관으로서 긍정적이라 하겠다. 여타 전공자에 비해 농촌 출신이 많고 학문적 영향도 받아 성실성과 인내심 등에서 우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문 사회계열 전공자라 할지라도 상당기간의 농협 근무를 통해 농촌 현장감각과 농촌지향적인 자세가 크게 강화됐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써 농촌 중심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쉽게 우호적이라고 하겠다.
33명 교관들은 이 같은 기본 바탕의 동질성에다 교관으로 오기 전 이미 대부분 서로 상대를 아는 사이로서 강한동지의식이 형성돼 있었다고 보겠다. 이 동지의식은 강한일체감이 요구되는 새마을교육에선 대단한 강점으로 작용했다.
둘째, 농협이 대규모 인력탱크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교관은 신분상으로 농협직원이기 때문에 교관으로 근무하다 지치면 농협이 다시 복귀할 퇴로 역을 담당했다는 점이 농협의 중요한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안정된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에 교관으로 근무할 때 전력투구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농협은 이들 교관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부담하고, 농협으로 복귀하면 가능한 한 본인의 희망부서로 배치했다. 또한 근무 중에는 승진 기본연한이 되면 뒤쳐지는 일은 없이 제때에 승진시키는 배려도 했다.
이는 농협이 연수원 교관으로 근무한 직원에 대하여 국가발전에 대한 기여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민간조직의 유연성이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는 독립법인으로 독립된 후 교관 인력의 순환이 제한됨으로써 오는 인재의 한계와 교관들의 노고에 대한 인사 상 충분한 보상이 어렵다는 문제가 이를 입증한다고 본다.
새마을교육이 새마을운동을 통한 조국근대화의 핵심전략이라는 점에서 민간조직인 농협이 조국근대화의 산실로서 새마을교육 인력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조국 근대화를 실현시킨 새마을운동의 동력이 새마을교육을 통해 생성 공급됐고, 이 새마을교육이 농촌을 대상으로 농민들이 중심인 농협의 인력을 통해 추진됐다는 사실은 결국「농촌 농민의 가난은 농민 스스로에 의해 극복됐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 민족의 「오뚝이」기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쾌거라고 하겠다.
우연히도 교관수가 33명으로 독립선언 33인과 일치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전위대로서의 33인과 조국근대화를 위한 70년대 새마을 산실의 33인은 흥미로운 조화라고 하겠다.
3. 박 대통령, 가난극복 넘어 선진일류국가 초석 다져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 이는 말로는 많은 왕과 대통령 등 위정자들이 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최소한 4300여년 이상 말이다. 이게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역사였다.
누군가 해야 할 절대 절명의 국가적 과제가 바로「가난극복」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이전에 어느 누구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다. 그냥 자리 차지하고 있다가 갔다. 세월과 함께 그냥 흘러갔다.
이 비극 중 비극인 가난의 굴레를 박 대통령이 잘라낸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민족의 영원한 국부인 것이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지구상 인도 다음으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1972년에 323달러, 1979년 1734달러로 올려놓았다. 18년 동안에 국민의 호주머니를 21.9배 불려 놓았다. 특히 초기 11년 동안에 4.1배 국민소득 증대에서 새마을운동 7년 동안에 5.4배 불려놓은 것이다. 70년대 새마을운동 10년 기간에 규모가 커진 나라 경제가 얼마나 경이로울 정도로 가속도가 붙었었나를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엄동설한보다 매서운 4300여년 이상 묵은 그 처절한 가난을 극복했음을 의미한다.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던 가난을 일개 대통령의 집념어린 노력 끝에 달성하고 만 역사적 전환점인 것이다.
당시에 우리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말레이시아는 그 기간 동안에 281달러→459달러→1537달러였다. 18년 동안에 5.5배 성장했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월등하게 잘 한 것이다.
1961년 세계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였다. 일본은 559달러, 스페인은 456달러, 싱가포르 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 326달러, 南美의 과테말라 250달러, 잠비아 191달러, 콩고 187달러, 파라과이 166달러로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이집트 152달러, 아프가니스탄 124달러, 카메룬 116달러, 캄보디아 116달러, 태국 110달러였다.
그런데 지금 이들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며 배움의 모델로 삼고 밀려오고 있다. 세상이 그만큼 바뀌었다. 박 대통령의 힘인 것이다.
당시 세미나나 학회 등 외국의 학자들 모임에서 “자기네 나라는 왜 그러냐? 한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라는 물음에 대하여 대부분은 이렇게 답해왔다.
“너희 나라는 박정희가 있지만 우리나라엔 박정희가 없기 때문이다‶고.
이 힘이 어디서 왔는가?
이 같은 찬란한 우리의 오늘 위상의 뿌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1970년대 새마을운동 10여년이다. 10여년만의 가난 탈출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 기적이다. 새마을운동 핵심기인 1972~1979년에 가난극복에서 머무르지 않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온 과실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미래를 내다 본 박 대통령의 혜안의 덕분인 것이다.
어떻게?
국민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는 풍토를 조성했기 때문에 이룩된 것이고, 거기엔 「박정희」란, 오직 처절한 수천 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고 나라를 일으키고 말겠다는 애국 충정의 지도자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은 열심히 일하는 풍토만 조성되면 대박을 내는 민족」임을 만천하에 입증한 것이다.
이 가난극복의 민족적 대행진은 무엇이었는가?
새마을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최고 선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온 국민은 그를 믿고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뛰었다. 그 결과 가난은 온데 간데 없고 새로운 신천지가 펼쳐진 것이다.
어떤 정신이었는가?
새마을정신!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이었다.
수 천년동안 뼛속 깊이 사무쳐 내려온 한(恨), 가난의 한(恨)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한 없이 활활 타오른 것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가난극복의 대장정인 것이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강한 성취동기,
〞반드시 해 낼 수 있다(can-do spirit)„는 자신감과 신명!
이 자세와 정신으로 온 국민이 뭉쳐서 일군 것이다.
맨주먹으로는 일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종자돈이 있어야 했다.
종자돈으로서 결정적 씨앗을 어디서 구했는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는 박 대통령이 서독으로 1963년부터 광부를, 1966년부터 간호사를 보내 그들 임금을 담보로 1억 4천만 마르크(U$ 3700만)의 차관을 빌려, 먹고 마시고 써버리는 데 쓰지 않고 중화학공업과 생산기반시설에 전액 투자한 것으로 잘 설명된다.
간호사들은 시신을 닦고, 광부들은 지하 1천m가 넘는 땅 속에서 석탄 캐는 일을 하는 가운데 광부 파독 1년 뒤인 1964년 12월에 뤼프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한다.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계약은 취소되고, 서독이 보내준 항공기로 가게 됐다.
박 대통령 내외가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12월 10일 함보른 탄광에 갔다. 탄광의 한 강당에서 얼굴이 시뻘겋게 그을린 광부 500여 명과 한복 차림의 간호사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에 앞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앞자리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먹임이 터져 나왔다. 이들의 울먹임이 온 강당으로 퍼지면서 울음바다가 됐고, 박 대통령 내외도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여러분 수고가 많으십니다.‶로 연설을 시작하자 강당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이 먼 곳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다시는 가난이라는 유산을 절대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의 고리를 끊어냅시다”. “고생스러워도 참고 열심히 일합시다.‶를 주창했다.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의 연설은 끝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강당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도 울었다.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울음을 훔쳐내고 있었다.
탄광을 떠나 뤼브케 대통령과 승용차에 동승한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죄인이다..."라고 몇 번이고 되 뇌이면서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은 "울지 마십시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룹시다."라며 박 대통령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자자손손 새겨야 할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빈곤극복과 선진조국 건설을 위해 1960년대 박정희란 야무진 대통령이 나타나 선진 산업기반시설과 중화학공업에 투자할 종자돈을 마련하려는 대통령의 강렬한 애국심의 실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상영된 영화 ”국제시장‶이 국민 5명 중 1명 이상을 끌어들여서 감동케 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주인공 덕수 역으로 분한 황정민의 열연에 관객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화면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눈을 떼지 못한다. ‟한 평범한 아버지의 위대한 이야기‶라는 영화 설명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바로 우리가 달려온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흥남철수, 메러디스 빅토리 호, 피난민, 미군정, 이승만 정권, 학생의거, 군사혁명, 월남전, 파독, 이산가족 찾기, 서울 올림픽. 영화 속의 장면 장면은 바로 현재까지 이르는 우리의 역사다.
힘들었지만 그 속에 가족의 사랑이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기쁨이 함께 한다. 자유를 억압받기도 했지만 희생 속에 민주화를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극복의 역사,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역사! 이들 영광스런 역사를 이룩한 장본인으로서, 자랑스런 그들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실화로서 이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궈낸 위대한 우리 모두의 업적인 것이다.
4. 박정희 대통령=대한민국의 영원한 국부
그 처절한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 터전을 닦은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의 절대적 국부임에 틀림없다.
왜 그럴까?
경제적 치적 이외에도 그는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벌거숭이 온 산천을 푸르게 만들었고, 1개(화천댐) 밖에 없던 댐을 4개 발전전용 댐, 16개 다목적댐, 14개 용수전용 댐, 2개 홍수조절용 댐 등 총 36개의 댐을 만들어 절대적 자원인 물을 안정적으로 보존 관리토록 함으로써 발전, 식 용수는 물론 홍수와 가뭄 없는, 명실상부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치산치수가 국정의 1차적 과제임을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 서거 후 3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가?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 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 2800달러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 268달러로 한국보다 3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이다.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그 결과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 기준 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이다.
세계적 주요품목 50개 중 한국은 최고 8개로 3위(미 19개, 일 9개)이고, 자동차 세계시장 10%를 이 작은 한국이 점하고 있으며(현대, 기아), 세계 휴대폰의 33%를 한국산(삼성 29+LG 4%)이 차지하고 있다.
2015년 3월 조사(조선일보, 미디어리서치)에서 우리 국민의 73%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60대 이상에선 90%였다. 우리 국민들이 오늘의 번영에 대하여 얼마나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빈곤극복과 조국근대화 여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지켜본 국민들은 더욱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닦아놓은 터전위에서 과실을 거두고 있음을 말한다. 부르스 커밍스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1970년대는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국가기간산업을 이뤄냈다. 1980년대는 박정희의 성공이 이뤄지는 시기였다‶라고 평했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업적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알아주고 있을까?
우리 국민 83%(지역, 이념, 나이 불구 압도적)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국가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진보도 77%가 잘 했다, 허나 민주화에 부정적이었다고 56%는 보았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나라 일으킨 인물 조사(1998.7, 조선일보 한국갤럽)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67%로 1위, 2002년 역대 대통령 업적평가에서도(2002.8, 대통령 평가 위) 박정희 67%로 1위, 최근인 2014년 12월 조사(데일리한국/주간한국/리서치 앤 리서치)에서도 54%로 역시 1위를 지켰다. 60세 이상에선 79%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빈곤극복과 조국근대화 여정에 참여한 연령대일수록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알고 칭송하며 감사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같은 국민들의 평가 속엔 새마을운동이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하면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빈곤극복과 조국근대화의 초석을 일궜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반 국민들의 절대적인 긍정적 평가의 다른 한편에선 유신 독재자로 치부하며 반 박정희의 대열에서 세월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세월의 흐름을 경험하고 양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하나 둘씩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평가해 가고 있다.
서울대 재학 중 좌파 노동운동으로 제적까지 당했던 김 문수 전 경기지사는 "나도 젊을 때 거꾸로 생각을 많이 했다. 무슨 자동차를 하고, 고속도로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히틀러처럼 국민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을 하고, 독재정권의 속임수로 보고 저항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훌륭한 역사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세종대왕상만 광화문에 세울 것이 아니라 5,000년 만에 최대 역사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상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 반 박정희 인물인 백 기완씨는 ‟자기 같은 3만 명은 고생했지만 대신 3000만은 득을 봤다.‶ ”18년 동안에 국부를 20배나 불린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세계 어디에 있느냐?‶ ”유신독재라고 비난하는 자들, 유신 이후 나라 무너지는 이유부터 따져보라.‶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적을 인정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재직 중이던 1974년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서명했다가 교수직에서 파면되는 등 박 정권과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고 함으로써 그의 경제적 업적은 인정했다고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인정 평가가 외국에서 더욱 긍정적임은 뭘 의미할까?
그의 성과가 얼마나 괄목할 만 한 것이었나를 입증하고 있다 할 것이다.
에즈라 보겔 사학자이며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예기다. 또「박정희 시대」를 출간하고 그를〞엄청난 애국심, 강한 비전의 리더〝로 평가했다.
부르스 커밍스 워싱턴 대 교수는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세계 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 새마을운동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미 CIA 보고서는 ‟남한의 실질적 발전은 그로 인해 비롯됐으며 일반적 생활은 청렴하기 그 지 없었다.‶고 기술했으며, 미국 뉴욕 타임스에는 ‟박정희는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라고 썼다.
미국 RAND 연구소는 ‟중국 덩 샤오핑의 개혁은 박정희의 모델을 모방했다‶고 피력했다.
독일의 국정교과서(중학교 지리 109쪽)엔 ‟남한은 세계경제로 통합 되었다. 대통령 박정희(1961-19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국가에서 산업능력을 가진 국가를 형성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외국에 돌아다녀보니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얘기뿐이더라.‶고 했다. 이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5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49개국을 순방했는데, 모두가 박대통령 칭찬 얘기만 했다고 봉화마을을 방문한 김형아 교수께 한 얘기다. 박 대통령은 외국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처럼 엄청난 업적을 올린 그는 어떤 지도자였는가?
요약컨대, 빈곤극복과 조국근대화가 인생 그 자체랄 정도로 나라 위한 일념으로 살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한 강렬한 열정, 나라와 국민을 향한 한결같은 애국심이 그것이다.
고 건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께 21번에 걸쳐 새마을사업 추진현황을 보고했는데 그 때마다 우리 농촌과 국토에 가졌던 뜨거운 그의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절박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강렬한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한 정말 청렴했다. 나라만을 생각했지 사리사욕이 전혀 없었다. 서거 후 지금까지 나온 돈이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다. 미 군납업자로부터 제의받은 뇌물성 커미션 대신 그 값만큼 M16 소총을 달라했던 인물로서 공사가 분명하고 세계가 인정한 발전도상국의 유일한 청렴 지도자였다. 여름에도 웃옷 벗고 부채질하며 손님 올 때만 에어컨 켰다 나가면 바로 끈, 절약을 솔선수범한 대통령이었다.
전직 대통령 2명과 아들 4명이 뇌물을 먹어 투옥되는 등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 혹은 가족들의 돈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현실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청렴은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는다고 하겠다.
박 대통령 18년 집권 동안에 단 한 건의 친인척 비리도 없었고, 한 번도 그들 어느 누구도 청와대로 초청된 일이 없으며, 어떤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이 나라 건설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국근대화의 주요 현장증인의 한 사람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통령이 된 뒤에 집을 고치거나 지어달라는 등 집 얘기를 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 정치자금을 요구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회고했다.
부르스 커밍스 워싱턴대학교 교수는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고 평했고,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도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이 같은 외국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국내에선 반 박정희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동조자들도 있는 것 같다. 친일파로, 혹은 독재자로 몰면서 말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우리의 일반적 성향. 즉, 사람을 평가할 때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평가기준의 이중 잣대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리들의 나쁜 속성의 하나다. 자신은 똥오줌을 못 가려도 괜찮으나 남은 어떤 흠결도 없이 완벽해야 한다.
근년의 공직자 청문회에서 이 같은 현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호통 치는 본인들도 온갖 비리로 투옥 전력이 있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후보자의 개인적 사생활까지 들춰내며 엄격한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따지며 호통을 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인 경우도 많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파로 몰려 수난을 겪고 있다. 애국지사에서 일순간에 매국노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소한 흠으로 상당한 기여와 노고를 폄하해서 죽이고 만다. 일제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치고 목숨 걸고 희생한 애국지사 아니고선 어느 정도라도 동조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그 상황에 있지 않았다고 이렇게 함부로 매도할 수 있는가?
2015. 3. 23일 타계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싱가포르의 완벽한 국부로서 애도를 받고 있다.
우리라면 어땠을까?
일본군 정보부에 들어가 복역한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이미 친일파로 매도됐을 것이다.
리콴유와 박정희, 두 지도자는 일본군에 들어간 사실이나 잘 살기 위한 독재로 자유와 언론 중심의 민주주의는 억압하면서도 국민을 배불리 먹고 살게 만든 면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운 점에선 공통적이다. 박 대통령은 18년 집권이나 리콴유는 31년이나 집권했고, 그 후에도 그 아들이 총리로 있어 결과적으론 세습인데도 그는 칭송받고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 독재자로 매도되면서 평가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아세아의 국부적 지도자로 중국의 덩 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 대한민국의 박정희 등 3인으로 집약되고 있는데 각기 자기 나라를 반석 위에 끌어올린 조국근대화의 영웅이라는 점에선 공통적이나 국민들의 추앙이나 평가에선 확연히 다르다.
덩샤오핑과 리콴요는 당시의 옳은 판단과 업적에 대해 인정, 지지, 존경, 칭송을 받고 있는데 반해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지 못하다. 긁어내리지 못해 안달하거나 “빵 문제 해결이 대수냐‶는 식으로 평가절하하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럴까?
여기엔 민족적 성향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덩샤오핑과 리콴요는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우리와 달리 단결심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더하기(플러스+) 계승정신」이 강하다. 앞 사람의 치적 중에서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골라 그 바탕위에 다시 더해가는 정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라는 큰 집단은 계속해서 앞으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이게 중화민족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와 정 반대이다. 앞 사람의 것은 모두 매도해 허물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이 성을 쌓으려 한다. 그래서 정권마다 가장 좋아하는 문귀가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의「새」자이다.
이 같은 우리 삶의 결과는 어떻게 되어 왔는가?
한 마디로 말해 남는 게 별로 없어진다. 앞의 것 허물고 다시 조금 만들어 놓으면 다음 사람이 나와 똑 같이 내가 한 것 허물고 자기 것으로 다시 만들 게 아닌가!
이런 나라 결과는 어떻게 될까?
같은 실수 반복하며 자원과 시간 만 낭비한 채 남는 것 별로 없는 바보 같은 낭비의 과정인「바꿈질」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다 잘 할 수는 없는 게 인생사이다.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상당한 영광스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의 과오를 내세워 업적까지 죽여서 그 사람 자체를 매장시켜버리는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 역사에서 어느 누가 나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려 하겠는가?
그 처절한 가난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을 독재란 누명을 씌워 죽인다면 이는 이 나라의 미래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매국행위가 된다.
둘째로, 우리 국민의 1등 욕에서 비롯된 공격 욕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우린 일반적으로 삶의 중심 가치를 1등에 두고 있다.
미국의 정의(正義), 일본의 무폐(無弊)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제된 이타적 가치관인 반면에 우리의 1등은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이기적 속성이다.
1등이 목표이기에 자기 이외 모든 다른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야할 동지가 아니라 싸워서 꺾어야 할 적이 되는 것이다. 고로 “남을 도운다.”는 것은 적을 도우는 것으로 이적행위가 된다. 보안법 위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개개인은 똑똑한데도 불구하고 협동단결이 안 돼 주변국에 먹히는 소탐대실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도 저쪽에선 독도가 자기 것이라고 줄기차게 떠들고 있는데도 국회 차원에서 비난성명 하나 못 내고 딴 짓들만 하고 있는 게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나라보단 당이 우선하고 당보단 개인이 우선하는 것이다. 나라 무너지면 권력이고 개인 영화고 위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은 우리 민족의 체질화된 결정적 약점인 것이다. 소탐대실의 삶인 것이다.
내가 1등을 하기 위해선 내가 남보다 앞 설만큼 열심히 노력해 자기개발을 하는 방법도 있고, 다른 또 하나 방법은 상대가 무너져 반사이익을 보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 국민 중 많은 사람들은 이 후자를 즐기고 있다하겠다. 남이 못 되길 바라고 다양한 공격으로 경쟁의 상대인 남들이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시기, 질투, 공격 등 타인 저해행동들이 이를 반증한다.
이 같은 타인 공격 저해행태를 촉진하는 이간질을 대중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TV 등 매스컴이 앞장서면서 나라 전체를 공격 욕에 불타는 갈등, 증오, 투쟁의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하겠다.
우리의 일부 TV들은 뉴스 보도 시 사실만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 보도 후 한 마디를 보탠다. 예컨대, 법안 상정을 보도한 다음에〞통과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토를 단다. 이는 여야 간에 서로 다투라는 암시가 된다. 국회의원이 불법혐의로 출석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 다음에〞출석할지 의문시 된다.〟고 한다. 나오지 말라는 얘기가 된다. 개성공단 잔류인력 완전 철수 결정을 보도한 다음에〞북한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고 한다. 강하게 반발하라는 유도가 된다.
이는 「이간질」인 것이다. 이 같은 이간질의 토를 달아 일이 잘 못 되도록, 혹은 상대편의 반격을 유도하는 행태는 점증일로를 걷고 있다. 이 같은 이간질을 당한 당사자들은 자기 집단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남 배려 없는 이기적 이익집단화 됨은 물론 TV의 이 같은 이간질이 반복되면서 일반국민들까지도 어느 편에 서도록 유도된다.
그 결과 온 국민이 조가조각 「편」이 갈리면서 「갈등」 속에 빠지게 되고, 상대편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의욕」이 강해지면서 총성 없는 전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상대를 향한 「저주」와 「위해」도 서슴지 않는 투쟁이 일상화 되면서 우리들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고 「투쟁」의 열기가 넘쳐나는 살벌한 풍경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지하철에 마주하는 우리들의 굳은 표정이 이를 대변한다.
그럼 TV나 언론은 왜 이 같은 이간질을 할까? 사촌 땅 사면 배 아프고 남 못 되길 바라는 과잉 이기적인 우리 국민의 일반적 성향의 반영일 수도 있고, 싸움질을 부추기면서 이득을 보는 현실적 동기도 있을 수 있겠다. 투쟁적인 국민을 전제해 특정 집단 간 싸움질을 유도해 싸움을 붙여 이를 실감나게 보여주면 시청률 상승이란 직접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닭 싸움 붙여 놓고 구경하는 사람의 심보와 같다 하겠다. 그러니 언론 입장에선 어떤 일이 쉽게 해결되기보다 갈등과 투쟁의 와중에 오래 머물러 싸움판이 오래 계속되길 바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세월호 사고 같은 대규모 사망사건의 보도로 잘 입증된다. 이 같은 불행한 일이 터지면 빨리 벗어나게 다독거리기 보다는 톱뉴스로 계속해서 패널까지 동원해 온갖 경우 수를 예상하며 확대 재생산 한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도 보인다.
TV 이간질→편갈림→갈등→투쟁의 풍토에서 득을 보는 집단이 바로 정치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갈라져 있는 어느 편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그들이 바로 자기편이 되며 선거 때 표로 연결돼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자리만 생각하는 정치꾼들은 TV의 이간질을 역이용하는 암세포라 할 수 있으며, TV는 그 숙주인 셈이다. 고로 이들 또한 사회의 갈등 투쟁은 부추길망정 타협이나 화합 같은 평화로운 문제해결을 선도하진 않는 것이다.
이 통에 국민들 간에 편이 갈려 싸우며 국가적 에너지를 소진, 국가 차원에선 퇴락하는 우리 모두의 손해,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고로 TV의 뉴스 보도 시 이간질 첨부는 반국가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대수롭잖은 일도 침소봉대하여 하루 종일, 혹은 며칠간이나 난도질을 해댄다. 결국 완전히 언론 살인을 하고 만다. 유명인일수록 먹이 감으로는 더 좋다. 대중적 관심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하나 둘씩 승자 군에서 퇴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남을 죽이면 신나하는 이 행태가 결국 나도 그 같이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 같은 행태로 나라라는 우리의 궁극적 삶의 근본이 훼손 망가져 결국 그 속의 나도 망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남을 죽이는 것이 결국 나를 죽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민족적 약점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폄하 왜곡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수 천년동안 어느 누구도 못해 낸 일을 해낸 실질적 영웅이기에 그의 부각과 칭송에 배가 아픈 것이다. 그를 우리의 운명을 바꾼 우리의 대장으로, 우리의 처절한 한을 풀어준 구세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경쟁상대 같은, 남으로 보는 심리가 기본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5. 박 대통령 국부로서의 위상 정립; 시대적 과제
박정희 대통령!
국내외 자타가 공인한 대한민국의 국부요 민족의 영웅이다. 춘궁기와 보릿고개를 끊고 세계 속에서 조명을 받으며 실질적으로는 선진일류국가의 삶을 누리는 현실에서 그렇다.
역사적으로 기여자는 기여자로서 우리는 기려야 하고, 훼손 자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역사적으로 해야 한다. 이게 바로 정확한 역사적 평가이며, 이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정확하게 업보대로 이뤄져야 나라를 위해 삶의 가치를 둔 애국자도 나올 것이 아닌가!
결정적 공적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과오를 앞세워 공까지 죽여 그 인간 자체를 죽이는 배은망덕한 행위를 한다면 나라라는 우리 모두의 이 운명의 집단은 발전할 수 없으며, 결국엔 아귀다툼만 하다가 자멸하는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일부 자유 억압은 경제매진의 그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 대통령은 경제부흥에 매진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전도에 장애가 되는 일부를 제압했다고 하겠다. 자원도 자본도 빈약한 상황에서 하나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온 국민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아가는「잘 살기 독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러기에 가난극복도, 조국근대화의 기초도 닦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지금 다수의 국민들이 그의 치적을 인정 평가한다는 것은 당시 박 대통령의 선택과 판단, 결단이 옳았음을 오늘의 우리는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일부 국민은 고통을 겪었으나 다수 국민은 득을 본 것이다. 대표적 반 박정희 인물인 백 기완씨가 한 말, ‟자기 같은 3만 명은 고생했지만 대신 3000만은 득을 봤다.‶가 이를 대변한다.
독재자로 몰아붙이는 그들은 국민을 잘 살도록 하는데 뭘 하나라도 제대로 해본 게 있는가?
배고픈데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배가 고프면 자유고 민주주의고 별 의미가 없다는 게 인류역사가 이미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자유와 경제를 동시에 추구해서 성공한 나라가 한 나라도 없다는 사실, 경제적 빈곤의 누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오히려 퇴락해 온 사실 등으로 입증된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뤄지기란 사실상 어렵다. 러시아가 이 두 개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당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앨빈 토플러 뉴욕대학 경제학자(저서, 제국의 물결)도 ‟민주화란 것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란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자. 우리 모두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과거에 대한 시각부터 열자.
이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부로서의 위상 정립에서 시작하자.
구체적으로, 근대화의 상징적 공간인 서울, 거기서도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만 있어야 하는가?
만약 이들도 현대 인물이었다면 이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은 11명의 후궁과 18명의 아들을 둔 바람둥이로, 이순신 장군은 충청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색깔로 죽이지는 않았을까?
이조 500년만 있고 정작 근대화를 일군 최근 70여년은 망가뜨려도 되는가? 과연 그게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일인가?
이 민족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이승만 대통령과 빈곤극복과 근대화를 달성한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도 광화문 중앙에 버젓이 온 국민의 환영 속에 세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상은커녕「광화문」,「운현각」,「충의사」등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까지 복원이란 명분아래 떼어내는 일이 과연 온당한 짓인가?
박정희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 칭송함은 새마을운동을 2천 년대에 맞게 더욱 활성화시키는 일이다.
그럼 무엇을?
무엇보다도 이제 작은 개인적 이익 탐하다 나라는 망치는 소탐대실의 민족적 약점을 버리자. 국익 우선의 애국심 고양 운동을 펼쳐나가자.
우리 민족이 개개인이 영리함에도 중국, 일본 등에게 밟혔던 주요 이유가 당파싸움으로 국익을 도모하지 못하는 소탐대실 근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이들 나라들의 소리 없는 침략적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빈곤극복으로 인간적 삶의 기틀을 마련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해준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을 제대로 평가하며, 국익 우선의 애국심으로 뭉치는 애국운동을 펴는 일이 2천 년대 새마을운동의 핵심과제가 돼야 하겠다.
국내에선 새마을운동이 아직도 핍박받고 있다. 여기엔 반 박정희 대통령 정서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역차별을 받으며 훼손되고 있는 반면에 외국에선 새마을운동을 배우려, 박정희 리더십을 배우려 혈안이 돼 있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는 우리 정치권의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일으킬 생각은 없고 오직 권력쟁취에만 눈이 어두워 구한말 같은 위기감이 국민들 속엔 퍼져가는 것도 모른 채 당쟁에만 취해있으니 나라의 안위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정쟁만 일삼으며 밥값은커녕 국가발전의 결정적 장애노릇을 하면서도 야당지도자는 국회의원을 400명으로 더 늘리자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종북세력을 정권쟁취의 지원군으로 활용하면서 북의 적화야욕을 현실화할까 위기감이 높아가는 가운데 국민들 반공의식의 철저한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와 있으며, 이를 온 국민들께 깨닫게 하는 일이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일궈놓은 이 번영의 터전을 제대로 지키는 2천 년대 새마을운동의 주요과제가 되겠다.
다음으로, 우리 국민 삶의 궁극적 목표를 「행복」으로 하는 사회분위기 조성에 노력해야 하겠다. 인간의 보편적인 최고 목표는「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는 삶에서 벗어나 내 노력의 대가에 만족하며, 남 시기 질투하지 않고 잘 나가는 사람 훼손 공격하지 않으며, 남 배려하는 삶을 지향해 나가야겠다.
이를 위해 이간질 하는 TV뉴스는 보지 않는 게 좋겠다. 그리고 너희가 국적이 어디냐며 따져야 한다. 가만있으니까 그냥 당하는 것이다. 그런 이간질로 시청률이 떨어져야 정신을 차린다. 필자는 벌써 상당기간동안 TV뉴스를 보지 않는다.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갈등 속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마음 상해 나쁜 기분으로 생활하지 않기 위해서다. 전화로 여러 번 따졌다.
세계적 행복지수 1, 2, 3위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TV 뉴스는「사실」만을 보도한다. 우리처럼 이간질의 첨부도 안 하고 언론의 한계를 넘어서지도 않는다. 우리의 일부 TV, 언론은 수사관, 판검사 다 하려하고, 사건의 성격과 흐름, 마무리까지 자의적 의도대로 끌고 가려 한다. 사실 보도와는 거리가 먼 월권인 것이다. 국익을 손상시키면서 말이다.
세상이 조용할수록 좋다. 정답고 화목할수록 좋다. 싸움도 우리가 하고, 화목과 평화도 우리가 만든다. 우리 몫 더 챙기려 아무리 바동거려도 나라 망가지면 끝이 아닌가? 개인이익 극대화에서 국익 우선으로 돌아야할 역사적 기로에 우리는 서 있다. 새마을지도자들이 앞장서 일반국민이 깨어나 국가 발전과 인간 행복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선도해야 하겠다.
새마을운동은「세계적 잘살기 명품」으로서 세계적 브랜드이며, 새마을정신은 4348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런 한민족 정신, 혼의 실체 그 자체이고, 새마을지도자들은 그 전위대, 역군이요 한민족 우수 대표선수들이다.
우리 모두는 위대하다.
201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