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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위험한 가족 - 무너지는 신화
“따뜻함의 신화는 끝났다. 결혼·가족의 다양한 대안 생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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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족’은 죽은 단어로만 남고 이름이 붙지 않은 채 해체되거나 재구성되고 있다고들 우려한다. 우리의 ‘가족신화’는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는 가족의 변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붕괴 아니면 진화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하는 전문가들의 진단에 귀가 솔깃해진다. 아니면 우리 가족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리할 우려도 없지 않다. 위태로운 가족의 현주소를 해부한다. 얼마 ?외신은 할리우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브래드 피트의 아이를 낳고도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연을 전했다. 많은 사람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직장생활 12년차인 김현주(37) 씨도 이 소식을 듣고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 안젤리나 졸리가 한국 여자였다면 어떠했을 것 같아?” 친구들의 답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냥 브래드 피트와 결혼했겠지” “아이를 낳기 전에 결혼부터 했겠지” “결혼 안 할 것이었다면 임신도 안 했겠지” “외국 가서 중절수술 했겠지” 등. 김현주 씨는 또 물었다. “네가 안젤리나 졸리였다면 어떻게 했겠어?” “그만한 재산에 그만한 스타라면 나도 안젤리나처럼 아이나 낳고 혼자 살겠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아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혼한다고 덜 행복하라는 법은 없잖아” “결혼에 두어 번 데었으면 혼자 살아도 되지 뭐”…. 오지랖 넒은 한 친구는 한마디 더 거든다. “입양한 아이와 낳은 아이를 차별 없이 키우게 될까? 아이들끼리는 서로 편견 없이 잘 어울릴까?” 비슷한 경우를 가까이에서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으니 이들의 말이란 그저 밑도 끝도 없는 수다에 불과했다. 가족의 탄생 혹은 붕괴 영화는 언제나 현실의 반영이다. 다만 현실에서처럼 입을 가리고 말하기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대놓고 말하다 보니 현실보다 과장돼 보일 뿐이다. ‘가족신화’라는 거대한 빙산이 조금씩 녹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 것도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을 소재로 한 영화·소설·드라마들이 늘면서부터다. 그 변화는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드라마 <연애시대>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감지된다. 이들 문화상품에서 발견되는 가족의 변화의 결과는 한마디로 ‘콩가루’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바탕대로 생각하자면 그렇다. 먼저 <가족의 탄생>을 보자. 이 영화는 할리우드 대작에 밀려 탁월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평론가들과 관객·언론으로부터 호평받았다. 영화는 다음 3가지 이야기로 이뤄졌다. 첫째, 남매 이야기다. 누가 보면 연인 사이라고 오해할 만큼 다정한 남매 미라와 형철. 자유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벼르고 실행하는 형철은 5년 동안 무소식이다 불현듯 누나 미라를 찾아온다. 대책 없어 보이는 스무 살 연상녀와 함께. 손에 잡히듯 똑 부러지는 인생을 꿈꾸는 미라는 사랑하는 동생과 사랑하는 동생이 사랑하는 여인 무신과 아슬아슬하고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둘째, 모녀 이야기.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딸 선경은 낭만주의자 엄마 매자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인생을 산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사랑이란 것에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남자친구 준호와의 애정전선도 그저 그렇다. 셋째는 연인 이야기다. ‘그놈의’ 사랑이 뭔지, ‘그놈의’ 사랑 때문에 인생이 꼬이는 경석과 채현. 둘은 ‘그놈의’ 사랑이 맺어준 연인 사이이기는 하다. 한쪽은 사랑을 갈구하고 한쪽은 시치미를 뗀다. 덜 사랑하는 권력자에게 더 사랑하는 추종자는 이제 담판을 벌인다. 성공 확률은 모른다.
영화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되면서 가족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지난해 대안가족을 그린 독립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를 찍어낸 적이 있는 ‘가족 전문’ 김태용 감독은 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영화가 대안가족에 대한 홍보영화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어떤 구속감 없이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기댈 수 있으면 가족 아닌가?” 김 감독은 한국사회에 팽배한 똘똘 뭉친 가족주의-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가 무섭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하며 그 가족주의에 대항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게 되는지, 어떻게 가족이 되는지 궁금했고 그것을 그려보고 싶었던 영화라고 밝혔다. 드라마 <연애시대>가 담은 메시지도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은호와 동진은 이혼한 지 18개월 된 ‘엑스 부부(ex-married couple)’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지고 볶으며 싸우다 이혼했다. 여기까지는 다른 이혼 커플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커플들처럼 원수처럼 지내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쉰내 나는 오래된 연인 사이 같기도 하다. 둘은 여전히 단골 빵집과 술집에서 마주치고,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결혼의 흔적을 주워 나르고, 결혼기념일에는 결혼식을 올린 호텔에서 보내 주는 할인 쿠폰으로 같이 밥도 먹는다. 급할 때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새로운 애인이 아니라 전 남편이다. 전처의 급한 호출을 받고 뛰어간 전 남편은 당연한 듯 전처를 나무란다. “여자 혼자 술 먹고 다니지 마라. 이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제3자의 눈으로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재결합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다가서다 물러나고, 물러나다 또 다가서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에 자신이 없다. 거의 틀림없이 반복될 상처가 두렵기 때문이다. 결혼 전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 살 때보다 더 으르렁거리고 더 살가운 이들의 희한한 <연애시대>는 전남편이 먼저 재혼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혼이 통과의례로 정착하려는 요즘 전남편, 전처야말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의 변화만 남긴 채…. 이번에는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의 경우.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빌미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나’와 내 아내. 결혼 1주년 기념 행사도 치르기 전인데 아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니 이혼은 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내의 이중생활은 시작됐다. 주중에는 그 남자와 살고 주말에는 나와 산다. 이중결혼이 법적으로 유효해진 가상의 환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동안 한국의 소설·영화·드라마에서 익숙해진 철저한 가부장제 아래서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저지르던 행태의 역버전이다. 이 소설은 문학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재미’로 무장한 서사는 생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 기특한 소설로 인정받기도 했다. 박현욱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아내의 이중생활 “결혼과 가족에 대한 다양한 대안이 있을 수 있음에도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가지만 생각하고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 판타지라는 스펙트럼으로 현 제도의 문제점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소설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자유로운 사랑관을 밝히며 결혼을 거부했다. 그러나 나는 결혼만 하면 사랑하는 여인을 독점할 수 있다는 통념적 시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혼 후에도 나는 아내를 독점하기 위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소설이 끝나도록 성과가 없다. 내가 여러 가지 불합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내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라도 해서 아내를 곁에 둘 수 있다는 것, 익숙하지는 않으나 내게는 절절한 나만의 사랑법 때문이다.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포장되고 미화된 특정한 사랑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내 사랑도 사랑이다. 생각을 열기 시작하면 그럴 수 없다고 단정하던 많은 것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위기, 딜레마, 변화 혹은 진화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에 뿌리 깊은 유교사상까지 덧칠해진 우리의 가족주의는 밖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일찍이 사람과 삶의 다양성을 인정해 온 서양사회가 보기에 우리의 가족주의는 위험천만하다. 왜 아닐까? 가족주의는 속이 비기 시작했고 썩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일컫는다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한 ‘가족’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다음과 같은 행태 혹은 형태, 혹은 기능의 변화를 불러왔다. 결혼 안 한다, 한다, 깬다, 다시 한다.
가족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해 탄생하는 사회적 기구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가족제도의 영원성을 보장하는 단 하나의 시건장치다.(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자신만만한 27세 여자의 입버릇대로 이제 ‘결혼은 선택’일 뿐이다. 객관적 자료를 먼저 살펴보자. 보건복지부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은 2005년 봄 전국 8,500여 가구, 20세에서 44세 사이 기혼여성 3,800여 명과 미혼남녀 2,700여 명을 대상으로 ‘2005년도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미혼자 가운데 결혼하겠다는 응답은 남성의 경우 82%, 여성은 73%로 나타났다. 그러나 35세 이상 미혼여성의 경우 50%만이 결혼을 희망했다. 즉, 나이가 들수록 결혼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많았던 것이다. 언제나 데이터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법. 현실을 있는 그대로 걸러내는 저울을 정부나 국가기관에서 장만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당신 앞에 웬 젊은 여자가 면접조사를 하러 왔다며 “결혼할래요? 안 할래요?” 하고 묻는다면, 결혼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소신이 아니라면 “안 할래요”라고 냉큼 대답하기 쉽겠는가? 생각과 다른 답을 해서는 안 되는 조사란 없으므로 면접관 보기 민망해서라도 당신은 남들 하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결혼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질문으로는 유효성 있는 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결혼해 아이 낳고 집 늘려 가며 아옹다옹 사는 소박함이 결혼이 주는 행복이라고 역설하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그러기에 총명한 여자들은 ‘사랑’에는 충실하되 ‘결혼’이 갖는 무게와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반(反)결혼, 반(反)부부’의 정서로 무장한다. 만혼 추세와 상승일로의 이혼율은 이 같은 정서를 대변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평균 초혼 연령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4년 남자는 30.6세, 여자는 27.5세로 나타났다. 이는 1972년보다 남자는 3.9세, 여자는 4.9세가 높아진 것. 평균 재혼 연령도 1972년 남자 39.0세, 여자 33.7세에서 2004년 남자 43.8세, 여자 39.2세로 남자는 4.8세, 여자는 5.5세가 각각 높아졌다. 연령별 혼인 추이를 보면 남녀 모두 20대 이하의 혼인은 감소한 반면 30대 이상 혼인 건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 지붕 두 남녀, 위장 부부도 많아 통계의 함정이라는 누명까지 쓰고는 있으나 이혼이 급격히 느는 것은 사실이다. 3쌍이 결혼하면 그중 1쌍은 이혼한다, 아니면 4쌍에 한 쌍이라는 둥. 나머지도 이혼을 안 했다 뿐이지, 잘살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혼인부부 대비 이혼부부의 비율이 1995년에 비해 2004년 2배 이상 늘었다. 프랑스와 한국은 축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도 잘하는 국가로 소문났다. 급증하는 이혼의 원인과 그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가정폭력이나 외도 등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결정적 이혼 사유 외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상대 사회복지학과 이명신 교수와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김유순 교수가 공동으로 발표한 연구 자료 ‘이혼 사유별 이혼 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남녀 모델 비교’가 이를 잘 설명한다. 결혼한 남녀 4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이 논문에서는 남녀 사이에는 이혼에 대한 미묘한 시각차이가 존재하고 여성의 이혼 의향이 높아졌다고 밝히고 있다. 즉, 21%의 남성은 가정의 중요성 및 의미 상실을, 20%의 남성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가를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여성은 21%가 개인주의 성향이 증가했으며, 20%는 남녀 간 의식의 차이라고 밝혔는데,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의 남녀 간 역할 변화와 의식 변화가 이혼을 결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폭력이나 경제력, 배우자의 외도 등의 원인이 이혼의 우선 사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관계 속에 질척거리느니 외롭더라도 보송보송한 삶을 살겠다는-가 더 중대한 이혼 사유가 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황혼이혼은 뒤늦게라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주변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통계에 따르면 20년 이상 장기 동거 부부의 이혼 구성비가 1981년 4.8%에서 2004년 18.3%로 3.8배 늘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혼을 안 했다 뿐이지 이혼한 부부보다 더 심하게 불화를 겪으면서도 한집에서 살고 있는 위장 부부들이다. 이들은 곧 이혼하거나 이혼은 절대 하지 않지만 배우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도 않는 이름뿐인 부부인 경우다. 재혼 전문 결혼정보회사 온리유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오랜 기간(남자 6개월, 여자 5년 이상이 대부분) 이혼을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혼 결심에서 이혼까지 걸리는 시간이 남녀 간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이름뿐인 부부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원수보다 못한 사이를 감수하면서도 이들이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문제, 대외적 체면문제, 이혼해 봤자 나을 것이 없으리라는 현실적 계산 등이다. 이 가운데 이혼해 봤자 나을 것이 없으리라는 계산을 앞세워 남편이 혹은 아내가 눈앞에서 외도를 하고 딴살림 차리는 것까지 묵인하면서 이혼으로 정리하지 않는 부부가 적지 않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남자 주인공처럼 말이다. 배금자 변호사는 한 칼럼을 통해 “우리나라는 분명히 일부일처제인데도 의외로 첩을 둔 남자가 많아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존의 가족법이 지켜내고자 했던 일부일처제는 이렇게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효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셈이다. 쿨한 이혼 드라마 <연애시대>는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는 외국처럼 우리나라도 이제 이 같은 문화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음을 예고했다. 온리유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 배우자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 대답이 38%에 달했다. ‘쿨’한 이혼이 가능하게 된 배경은 사회적으로 이혼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혼은 개인사의 흠이 될지언정 죄는 아니다. 또 경제적 능력이 있는 여성의 경우 치명적 약점이나 결정적 이혼 사유 없이도 성격상 갈등으로 이혼하는 사례가 많아지는 추세다. 따라서 쿨하게 이혼한 후 다음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재혼의 증가는 이혼의 증가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현상이다. 결혼 제도의 변화가 텀블링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좀 과장하면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단계를 넘어 한 번 이혼한 경력의 전문직 여성은 영화나 드라마, 상업적 저널리즘에 의해 능력 있는 여성의 표상으로까지 떠받들어질 정도다. 전체 혼인 건수 중 재혼 구성비는 1972년 남자 5.4%, 여자 2.9%에서 2004년 남자 18.2%, 여자 20.4%로 높아졌다. 특히 여자의 재혼은 1990년 이후, 남자 재혼은 2000년 이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유형별로 보면 여자 초혼+남자 재혼은 1994년 3.4%에서 2004년 3.9%로 소폭 늘어난 반면 남자 초혼+여자 재혼 비율은 1994년 3.3%에서 2004년 6.1%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제 우리 주위에서 아이가 있는 이혼녀와 재혼한 미혼 남자. 띠동갑 어린 여자와 결혼한 중년 남자, 각각 아이를 데리고 결합한 경우 등을 예사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재혼 가정에 아픔을 가져다준 다양한 원인이 호주제 철폐 등 가족법 개정으로 해소될지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재혼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한편, 재혼가정의 경우 일반적 편견과 선입견, 당사자들의 재혼 콤플렉스, 재혼가정을 꾸려 가는 방법론에 대한 직간접적 학습의 부재로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하는 온상으로 자리 잡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낳고 있다. 따라서 재혼가정, 즉 스텝 패밀리는 급변하는 가족제도가 안고 있는 가장 뜨거운 감자이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심스러운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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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숙희_월간중앙 |
저출산 재앙? 힐책할 것도 없다. 이런 생각은 시대?만들어낸 새로운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니까. 사회적 능력이나 성과를 강요당하며 성장해 온 시간이 지어준 당연한 귀결일 뿐이니까. 작가 김낭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연하의 남편과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일종의 칭찬이다. 연하의 남편이란 대략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며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실상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하고 진보적 마인드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사람이라는 이들의 해석이 싫지만은 않다. 사실 내가 결혼하던 8년 전만 해도 ‘연하 남편 연상 아내’는 제법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다. 남편의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얼마나 예쁜지, 돈이 얼마나 많은지 등을 물어오고는 했다.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나이를 은근히 숨기거나 나이 차이를 살짝 줄여 ‘동갑’ 또는 ‘동갑이나 다름없는 한 살 차이’ 정도로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연하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 10대의 학생부터 노년의 연인까지 ‘연상녀 연하남’은 그저 다양한 커플의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남편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사느냐다. 나는 성격적으로 내 자신이 의존적이 되는 것을 못 견딘다. 가족이나 친구관계를 빙자해 치대고 폐를 끼치는 것도 질색이다. 이런 점에서 나와 남편은 매우 친밀하지만 적당히 개입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다 보니 심리적 위안이나 의지는 다른 어디서도 구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그 외의 것들은 그저 공유하는 감각이다. 가족은 내게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밀착관계랄까? 친정이나 시댁에 가서 폭넓고 다양한 가족 구성원으로 보내는 시간이 매우 즐겁지만 한편 불편한 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전통적 가족의 형태를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산은 가장 큰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것 이런 분위기를 강화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결혼한 지 8년이 다 되었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친정 부모님의 만만치 않은 성화와, 행여 아이를 못 갖는 것 아닌가 하는 친척들의 걱정 어린 눈총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부모님께서는 아직 별다른 말씀이 없다는 것. 살다 생기면 낳는 것이고 또한 좋은 일이지만, 굳이 애써 가지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입장이시다. 게다가 아직도 주변에는 30대 중후반의 미혼자가 수두룩하고, 결혼 생각 자체가 없는 40대 선배들도 많다 보니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내 온 것 같다. 지난해에야 비로소 아이에 대해 고려해 보기로 결심했지만, 그것도 ‘꼭 갖고 싶다’ 정도는 아니다. 마음이 그렇다 보니 그다지 노력하지도 않는다. 실상 아이를 갖고 낳아 기르며 느끼게 되는 많은 즐거움이나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느낌들이 궁금하기는 하다. 또 종종 부모님의 단 하나 남은 소원이라는데 그것 하나 못 들어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인생의 중심을 바꾸는 너무 큰 변수임을 알기에 너무 리스크가 큰 투자라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맞다. 심하게 이기적임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문제아’는 나뿐이다. 두 언니와 오빠, 제법 많은 사촌 모두 제때 결혼해 제때 아이들을 두었다. 다들 둘, 큰언니는 셋이나 두었다. 그러나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선후배들을 살펴보면 아직 미혼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일만 하거나 다방면으로 능력을 발휘해 일과 연애에서 동시에 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다. 이들 중 몇몇은 낭만적 연애를 꿈꾸고, 또 몇몇은 결혼에 아예 마음이 없고, 또 더러는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낳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우리 엄마는 “언제부터 가치관이 그렇게 비뚤어졌는지 모르겠다”며 “배울 것 없는 환경이 한심할 따름”이라며 한숨을 쉬고는 하신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갖고 매진해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는 사람들이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이 저출산이라는 이름의 인구 재앙의 시대에 ‘애국’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줄도 안다. 다만 나나 그들 모두 더 이상 전통적인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없을 뿐이다. 힐책할 것도 없다. 이런 생각은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관 중 하나일 뿐이니까. 사회적 능력이나 성과를 강요당하며 성장해 온 시간이 지어준 당연한 귀결일 뿐이니까 말이다. |
김낭 |
[SPECIAL REPORT] 위험한 가족 - 새 출산 & 결혼에 대하여
이제는 가족사진을 찾지 말라
“낳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 |
아이는 통념상의 가족을 구성하는 데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다.(일반적인 가정의 가족사진을 떠올려 보자) 그러므로 아이가 없는 가정은 통념상의 가족으로 분류될 수 없다. 그러나 실상은 아이 없는 가정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가족사의 경계를 넘어 사회경제적 불안과 미래의 비전을 포기하게 한다는 점에서 예사로울 ?없는 현상이다.
1.08. 우리에게는 재앙의 수로 통한다. 바로 2005년 한국의 출산율이 1.08%라는 충격적 결과가 나온 이후 위기감은 계속되고 있다. 다들 힘든 삶을 꾸려가는 줄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갖기 어려울 정도일지는 몰랐다. 출산율은 이처럼 급격히 떨어지는데 한편에서는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불임가정이 크게 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공중절수술이 끝없이 자행되고 있다. 다급해진 정부는 갖은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야말로 고육지책에 불과해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다. 저출산국가라는 낙인이 위험한 것은 낮은 출산율로 인해 인구 고령화 추세가 급격히 진행됨으로써 경제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성장의 한계에 봉착함을 의미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현재 저출산율을 토대로 고령화를 전망할 때 평균성장률이 2020년대에 3%, 2040년대에는 1% 수준으로 꾸준히 하락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것 아닌가? 당장 내가 살기 고달프고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처럼 풍족하게 뒷바라지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낳지 말자는 자조의 분위기 말이다. 안 낳거나, 덜 낳거나, 입양하거나 정부나 사회가 그로 인한 위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대책을 쏟아내든 현실세계에서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경제성장 둔화와 같은 거대명분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개개인의 삶의 질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통계를 보더라도 저출산은 속도를 늦출 것 같지 않다. 관계당국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미혼남성의 93%, 미혼여성의 88%가 자녀를 낳고 싶기는 하나 양육 및 교육비 부담, 소득 불안정, 일과 가정의 양립 곤란 등의 이유를 들어 1자녀만 갖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기혼여성의 경우 64%가 자녀는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20대 초반의 연령층에서는 55.7%, 25∼29세는 60.8%, 30∼34세는 63.5%로 나이가 적을수록 자녀의 필요성에 소극적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 같은 이유 외에 저출산을 부채질하는 원인으로는 갈수록 강화되는 개인주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최근 늘어나는 학교폭력, 비행청소년, 파괴적 행태들이 이혼 등으로 해체된 가족, 결손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성토가 언론을 통해 쏟아짐으로써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인식 또한 급증하는 것이다. 아이의 인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아이의 인생 못지않게 내 인생도 중요하며, 아이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채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이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논리가 저출산으로 결과되어 나타난다. 그동안 우리를 옥죄던 사회적 병리현상은 병든 가정에서 비롯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가 져야 한다는 논리 또한 저출산으로 이어진다. 미국 수퍼볼 영웅 하인스 워드의 금의환향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대표적 결손가정 출신인 그의 사회적 성장동력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그의 긍정적 성장 배경이 오로지 어머니 한 사람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라고 치부하고 사회제도적 장치에 대한 연구와 지원 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과는 무관하지만 가족제도의 변화를 야기하는 요인 중 하나인 입양의 경우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를 중심으로 피로 맺어진 공동체만이 가족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입양이다. 세계 최고의 피입양국가라는 불명예에 대한 자기반성이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가운데 유명인 입양가정을 중심으로 입양 홍보가 이어지고 있다. 숱한 논리적 설득에도 혈연주의와 모성이 강한 우리에게 입양은 참으로 위험한 대안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이만은 최고로 키워 내겠다는 불같은 모성이 입양을 가로막았다. 피도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 불같은 모성이 발휘되겠느냐는 것이다.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가는 아기 가운데 한국 아기의 비율은 4위. 국내 입양아는 1990년 이후 소폭 감소세를, 해외 입양아는 소폭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통계로 한국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아이는 평균 1,301명이다. 반면 인공임신중절로 희생되는 아이는 하루평균 960명. 고려대 의대 산부인과 김해중 교수가 보건복지부의 용역을 받아 실시한 전국 임신중절 실태 조사 결과다. 김 교수팀에 따르면 연간 임신중절 시술 건수는 35만여 건. 파악되지 않은 건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중절수술로 희생되는 40여 만 명의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저출산 대책보다 강력한 대책이 될 것이다. 인공중절 대신 출산을 택하도록 하는 것은 개개인을 대상으로 한 설득의 차원이 아니라 미혼모와 동거가족 등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수용 여부가 관건이다. 저출산 문제로 오래 고민해 온 서구 국가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열린 제도와 인식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다. 이처럼 가족제도의 진화는 저출산 해결을 가능하게 하며, 저출산 해결을 위해서라도 가족제도의 진화는 불가피한 실정이다. 숨은 도화선, 스텝 패밀리 언어는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사회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몇 가지 새로운 단어는 우리 문화, 사회의 변화를 가늠하게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텝 패밀리(step family)’라는 단어다. 영어사전을 살펴보면 스텝 패밀리는 ‘복합(또는 혼성) 가족: 이혼·재혼 등으로 혈연이 없는 가족이 포함되는 가족’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계부(stepfather)·계모(stepmather)다. 좀 더 친근한 용어로 새아빠(new dad) 새엄마(new mom)라는 말이 알려져 있다. 늘고 있는 이혼·재혼의 결과 생겨나는 재혼가정은 적잖은 불씨의 도화선을 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보다 훨씬 일찍 가족제도의 변화와 재혼가정의 문제를 감당해 온 서양사회가 이를 대변한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두 번째 결혼에서는 신중했을 터인데 그만큼 이질적인 두 가정의 결합이 쉽지 않음을 말해 준다. 미국 전체 자녀 중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경우는 70%. 30% 정도는 재혼가정에서 자란다. 친엄마와 사는 자녀는 23.3%이고 친척이 기르는 자녀도 3%나 된다. 30년에 걸쳐 연구한 조사에 의하면, 어른들 중 계모와 친밀감을 갖는 사람은 20%에 불과하다. 20년의 조사에 의하면 계모를 부모로 생각하는 사람은 33% 수준이고, 친모가 재혼하는 것을 용인하는 경우는 48%라고 한다. 그런데 아빠가 재혼하면 좋아하는 자녀는 2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미국사회와 달리 유교적 전통으로 버텨 온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부터 30년 후 우리의 가족은 어떤 통계를 내게 될까? 아픔을 딛고 선택한 상대와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 재혼 당사자들이야 있을 수 있는 갈등에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한쪽 자녀만 혹은 양쪽 자녀 모두 함께 재혼가정을 꾸리는 경우 예상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사실 자녀 양육은 친자녀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을 썩이는 일투성이다. 그러나 계부모로 관계가 재정립된 사이에서는 원활한 생활과 양육 및 교육 등 생활 전반에 걸쳐 갈등의 여지가 다분하다. 더구나 아직 우리는 가족 간 갈등을 인지하고 해결하는 기술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계부모 역할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해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이로 인해 재혼가정이 해체될 위험도 크다. 전문가들은 아직 ‘콩쥐팥쥐’ ‘장화홍련전’의 계모에 대한 인식이 전부인 우리가 스텝 패밀리에 적응하고 더 이상 해체되지 않는 강한 가족으로 스텝 패밀리를 존재하게 하려면 재혼가정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함께 성공하는 재혼가정을 위해 학습하는 성인이 많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제결혼 농업인구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라남도 강진. 이곳에서 의원을 경영하는 황소준 씨는 하루에도 서너 명의 시골스럽지 않은 여자 환자를 만난다. 그녀들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이며 외모로 보아 스물서너 살 정도. 바로 한국농부에게 시집온 아시아의 며느리들이다. 그녀들은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진료를 청한다. 처음 안면을 트고 몇 번 왔다갔다 하는가 싶으면 이제는 갓난아이를 안고 온다. 노인들만 남아 있던 농촌마을에 갓난아기의 울음을 선사한 주인공들이다. 정부당국에 따르면 2005년 한 해 국제결혼 건수는 4만3,121건. 전체 결혼의 13.6%다. 국민 8쌍 가운데 1쌍꼴로 국제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 가운데 한국 남성과 외국 여성의 결혼이 3만1,180건으로 72%를 차지한다. 이미 농촌에서는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가족이 가족의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적 며느리들은 대부분 아시아계 여성으로, 중국 국적자와 베트남 신부가 가장 많다.
하와이로 결혼이민을 감행하던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아시아의 신부들도 결혼을 위해 낯선 땅을 찾아왔다. 그 덕분에 며느리로부터 봉양을 받기는커녕 손수 끼니를 해결하고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는 나이 든 아들이 마지못해 살아가던 농촌마을에 사람이 늘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림으로써 농촌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중국 동포 이외의 아시아 국적 여성들은 언어교육을 받지 못한 채 국내에 유입돼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편으로부터 폭행, 성적·경제적 학대, 폭언 등의 폭력과 가부장제의 권위에 시달리며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 돈을 목적으로 결혼한 여자 등에 대한 냉정한 편견까지 더해져 농촌에 집중된 다문화가족의 미래를 그리 밝게 그려내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하다. 낯선 땅에서 자식을 낳고 살며 안정된 가정을 꾸려 간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한국어 실력과 문화적 적응력으로 이들의 2세인 ‘우리의 아이들’이 엄마가 주도하는 유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새로운 문제를 던진다. 이들이 가난한 농촌생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비전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이들 가족을 우리 가족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애초의 목적과 기대에 부응하려면 이들 가족과 아시아계 신부들에 대한 더욱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관심과 한국어 교육, 한국문화 적응운동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빠·엄마·언니·동생…가족사진을 찾지 말라 최근 초등학교 등에서 새 학기마다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가정환경조사서 작성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편부모나 조부모 등과 사는 학생들의 수가 갈수록 느는 실정에서 가족관계를 대외에 유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다양해진 가족관계가 낳은 결과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에게 가족의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 가족사진을 가져오도록 하던 과정도 생략하기도 한다. 싱글 맘, 싱글 대디, 조손(祖孫)가정,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 사회와 문화의 변화가 낳은 신조어들이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사생활을 감추고 살던 연예인이나 작가 등 이른바 유명인들이 싱글 맘·싱글 대디임을 숨기지 않는다. 농촌에서는 나이 든 부모님께 이혼 후 남은 자녀를 맡겨 놓는 경우가 적지 않아 어린아이가 없는 농촌 초등학교의 학생 수가 늘어나는 이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시각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전통적 가족 개념이 무너지고 신가족이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의 잣대는 여전히 낡았다. 가족이 친화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출산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생기는 병폐가 아니다. 비록 부족해도 구성원이 따뜻하게 정을 나누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2세에 대한 그리움은 높아지게 마련 아닌가? |
송숙희_월간중앙 |
미국의 AP통신은 최근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무대를 휩쓸고 있는 한국 여자선수들의 선전 배경을 분석하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 힘은 한국 특유의 ‘올인’문화에서 나온다. 많은 한국 부모는 자녀가 진로를 선택하고 나면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걸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족주의는 싫든 좋든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국제적 통신사의 이 같은 보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의 비아냥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AP통신의 이 같은 보도가 소개된 것은 한국축구가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1 대 1로 비긴 게임을 한 날이다. 한 일간지의 칼럼은 프랑스 축구의 힘은 ‘톨레랑스’, 즉 관용이라고 소개한다. 칼럼을 쓴 기자는 1998년 월드컵 당시 누벨칼레도니 출신의 미드필더 크리스티앙 카랑뵈. 당시 그는 경기 시작 전 동료 선수들이 프랑스 국가를 부를 때 입을 다물었다.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다는 침묵의 시위였다. 하지만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고는 팀도 프랑스 국민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적 가치라고, 역사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말하는 ‘평등적 개인주의’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어쨌든 ‘대한민국 가족호’는 ‘인습과 전통’의 항구를 떠났다. 항구를 떠난 배는 어디든 가서 닿을 것이다. 그 목적지가 변화로 인한 혼돈의 무인도일지 변화와 혼돈을 되풀이하는 긴 여정 속에서 진화라는 이름의 신천지일지는 가 봐야 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을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혈’에 대해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인종의 장점이 합쳐진 사람으로 생각할 줄 안다. 우리는 이미 히딩크 감독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도 받아들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든 그들의 사생활쯤 덮어줄 줄 아는 관용지심이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또 바쁜 시간을 쪼개 아내에게 한국을 보여 주는 자상한 남편이라는 이유로 아드보가트 감독을 좋아한다. 이제 우리도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나와 같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다는 이해와 공감, 나아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더욱 높은 차원의 수용지심도 누리고 산다. 그리고 또 우리는 <언피니시드 스토리> 같은 영화를 보며 우리의 혈관 깊숙이 흐르는 가족주의의 뜨거움도 되새길 줄 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며느리의 실수로 아들이 죽었다고 원망하며 세상을 피해 살아가는 시아버지, 다른 남자와 살다 그의 폭력을 피해 시아버지를 찾아오는 며느리와 손녀, 시아버지와 가족처럼 살고 있는, 곰에게 공격당한 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 미국의 한 깊은 산속에는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좀 부족해 보이는 몇 사람이 모여 산다. 이들에게는 서로가 상처지만 결국 서로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핥아 줌으로써 치유 가능하다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를 보면 <가족의 탄생>에서 묻고자 했던 질문-가족이라서 기댈 수 있을까? 기댈 수 있어서 가족일까?-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러고는 ‘어쨌든 가족’이라는 탁월한 결론도 스스로 이끌어낼 줄 안다. 이 기획의 도입부에 던졌던 ‘안젤리나 졸리가 한국에서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답은 없다. 안젤리나 졸리는 안젤리나 졸리다. 그는 어디에서든 그다운 결정을 했을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가족은 ‘힘’이다. |
송숙희_월간중앙 |
[SPECIAL REPORT] 위험한 가족 - 위기냐, 기회냐 갈림길
“혈연 아닌 거주 & 역할 중심 새 가족 탄생 가능성 엿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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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나타나는 가족의 형태 내지 가족관은 ‘과거가 옳았고, 현재는 틀렸다’고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양분할 수 없다. 우리의 해석과 평가는 다수결에 의해 동의받을지는 모르나 역시 주관적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가볍게 사회 현상을 단정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변화의 중심에 위치한 가족을 들여다본다. 21세기의 키워드(keyword)를 하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변화’를 택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변화를 생존의 화두로 강조할 뿐 아니라 모든 방송매체에서 변화의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 변화의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가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크게 3가지 범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회의 변화’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현재 이미 후기산업사회에 진입한 상태다. 이 시기의 가족은 대략 3가지 양상을 띤다고 하는데, 하나는 가족 규모의 축소, 다른 하나는 가족 세대의 단순화, 또 다른 하나는 비정형적 가족 형태의 출현이다. 그것들은 소가족화와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이동, 그리고 편부 및 편모 가족, 노인가족, 기러기 가족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들을 압축하면 최근 우리나라에서 크게 부각된 대표적 사회현상을 만날 수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다. 2005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TFR, Total Fertility Rate)은 1.08명으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고, 무자녀를 선호하는 기혼여성은 매년 급증하는 데 비해 반드시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비율은 1991년 90.3%, 1997년 73.7%, 2000년 58.1%, 그리고 지난해에 23.4%로 크게 떨어졌다. 또한 우리나라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이 노인인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것이 2000년인데, 2018년이면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이상인 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로 고령화 속도도 유례없을 정도로 빠르다. 둘째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다. 과거에는 생체리듬까지 같을 정도로 기상에서부터 취침까지 거의 모든 것이 전체를 축으로 해서 환경이 생성되었다면 현대는 세대 간에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요구하고 선호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상은 첨단 과학과 생명공학 등 물질문명의 발달과 이기(利器)들을 현대인들에게 제공해 1, 2차 산업 중심이던 과거의 생활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가사(家事)와 육아(育兒)를 전담하는 주체였던 여성들이 자아실현과 사회·경제활동을 위해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생활방식의 변화를 주도했고, 2004년 7월부터 5단계로 구분돼 공식적으로 시행 중인 주5일근무제 같은 것들이 과거와는 현저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에는 슬로 푸드 운동과 함께 ‘느리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슬로비(slobbie)족’, 인터넷상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활동하는 ‘마이홈족’, 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만 일하고 직장을 떠나는 ‘프리터(free arbeiter의 줄임말)족’ 등 다양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셋째는 ‘사고방식의 변화’다. 주판적 수의 개념을 지녔던 과거 진공관 세대에는 사람들이 획일적 사고를 했지만, 전자계산기적 수의 개념을 지닌 아날로그 세대에는 이중적 사고로, 지금은 컴퓨터식 수의 개념을 지닌 디지털 세대 속에서 다중적 사고로 바뀌었다. 정보 수집도 과거에는 듣고 기억해야 했던 진공관 세대였다면, 이제는 보고 기록하는 아날로그 세대를 거쳐 검색어 하나로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 디지털 세대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항상 위기… 희망·행복 불씨 찾아야 폐쇄적이기만 하던 성(性)은 진보적이고 자유분방한 성으로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하고 있고, 자신만의 블루 오션(blue ocean)을 개척하기 위해 색다른 도전과 시도를 하는 젊은이들이 경직되고 유연하지 못한 사고의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상황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 그래서 가족의 변화를 보면 그 시대의 변화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변화들은 미래학자들에 의해 예견되기도 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베커 교수를 비롯한 많은 사회학자는 ‘시간적 일부다처제’ ‘연속적 결혼’ ‘할부 단혼’이라는 생소한 단어들로 가족의 변화를 표현했고, 혈연을 이어 가는 제도로서의 가족개념은 점차 사라지고 혈연보다 거주 형태 중심, 역할보다 임무 중심의 뉴 패밀리(new family)가 출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보다 행복한 독신이 낫다”는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독신보다 행복한 재혼이 낫다”는 사람들, “여보, 당신 아이와 내 아이가 싸우는 것을 우리 아이가 말리고 있어요”라는 사람들이 그 예상들을 증명하듯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이 곧 ‘예방’은 아니기에 우리는 이 시대에 발생하는 모든 현안에 대해 균형 잡힌 대안과 정책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한다. 현대에 나타나는 가족의 형태 내지 가족관은 ‘과거가 옳았고, 현재는 틀렸다’고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양분할 수 없다. 우리의 해석과 평가는 다수결에 의해 동의받을지는 모르나 역시 주관적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가볍게 사회 현상을 단정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대마다 나타나는 다양하고 특수한 현상들까지 더욱 객관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겸허함을 갖출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최근에 등장하는 가족 형태에 대해 무조건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그들이 또 하나의 대안가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미래 예측 전문지는 미래사회의 가족 형태에 찾아올 변화들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변화들이 가족을 파괴하는 쪽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결론을 내렸다. 가정이 위기에 처할수록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19세기를 자유의 세기로, 20세기를 평등의 세기로 진단하면서, 21세기를 행복의 세기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것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연이어 쏟아지는 사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상 위기가 없었던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태풍의 눈처럼 온 인류에게 희망과 행복의 불씨가 되어 준 것은 바로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해 역사가 진행되었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워 왔다. 이제 그 작은 불씨가 횃불이 되기를 바란다.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 환한 횃불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또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잘 건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
송길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