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한눈금 올라갈 때마다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푸른 바다와 계곡이다. 그래서 여름이 오면 늘 강원도가 그립다. 거칠 게 없이 펼쳐진 드넓은 바다만 봐도 가슴이 탁 트이고, 계곡의 푸른 물빛만으로도 땀이 식는다. 강릉으로 떠난다. 강릉하면 대부분 정동진과 경포대만 떠올리지만 강원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곳들도 많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정동진 선크루즈 호텔 갈림길에서 삼척 쪽으로 열린 왕복 2차선의 고갯길. 조금 달리다보면 감자밭이 활짝 펼쳐진다. 새벽 이슬비에 젖어 있는 밭고랑엔 감자꽃이 수북하게 달려있다. 감자밭 사이로 놓인 황톳길 귀퉁이에는 잘 생긴 소나무도 서 있다. 강원도 어디서나 감자를 볼 수 있지만 정동진은 조금 독특하다. 감자밭 너머로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와 어우러지는 풍광이 이채롭다.
감자밭은 구릉밭이다. 드넓은 전라도처럼 평평하지 않고 물굽이가 뚜렷한 바다처럼 굴곡져 있다. 밭고랑이 만들어내는 선(線)도 참 아름답다. 산그늘에 앉아있던 옛 초가의 처마선이나 파도가 훑어놓은 모래이랑을 닮았다.
감자꽃은 참 투박한 꽃이다. 꽃잎이 새하얗거나 말끔하지도 않다. 매화나 벚꽃이 아트지(紙)처럼 깔끔하고 화사하다면 감자꽃은 결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지처럼 수수하다. 그나마도 자세히 보면 구겨진 것을 펴놓은 것처럼 보인다. 노란 꽃술도 두루뭉실하다. 그래도 감자꽃은 왠지 모르게 정이 간다.
감자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된다. 강원도 사람들은 조팝나무꽃이 피면 모판을 꺼내 모내기를 시작하고, 감자꽃이 꽃상투를 달면 여름준비에 들어간다. 벌써 농부들의 마음도 손도 바빠졌다. 알이 굵고 포실포실한 감자가 매달릴 수 있도록 꽃송이를 일일이 따냈다. 꽃으로 갈 영양분이 감자 열매로 들어가란 뜻이다. 국내 감자 생산량은 연간 73만t. 이 가운데 3분의 1이 강원도에서 난다.
경포대 남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송정해변과 만난다. 북적거리는 경포대와는 달리 송정해변은 늘 호젓하다. 구불구불한 솔숲들이 어우러져 있는 해변은 산책하기에도 좋다. 여름에는 수온이 적당해서 단골이 꽤 많다. 송정 아래에는 안목해변이 있다. 바로 남대천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드는 물목이다.
강릉에는 계곡도 많다.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은 강릉사람들이 쉬쉬하며 다녀가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동해고속도로 안인에서 가둔지마을을 지나면 계곡 입구. 계곡의 길이는 11㎞. 제법 가파른 절벽으로 감싸진 곳도 있고 편편한 곳도 있다. 물은 맑고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길 만한 야트막한 포인트도 여러곳 된다. 물줄기는 끝없이 이어지다가 독가촌을 지나 깊은 산속으로 꼬리를 감춘다.
단경골은 30년 전에 오히려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이었다. 단경골을 넘으면 정선군 임계. 예전에는 나무를 베어 트럭으로 실어나르는 산판로가 이어져 있었다. 지금도 흔적은 있지만 이젠 풀들이 자라 차가 다니긴 힘들다.
단경골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정동진 앞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 때문이었다. 잠수함에서 탈출한 잔당이 숨어든 곳이 단경골. 단경골은 그만큼 오지였다. 동해안에서 차로 30∼40분이면 들어갈 수 있지만 시멘트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이어진다. 단경골 주민은 10여가구다. 계곡 끝자락에는 아담한 농원이 앉아있다.
오대산으로 접어들면 오지마을 부연동을 만날 수 있다. 부연동은 마치 모양새가 가마솥처럼 생겼고 소와 담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이름은 가마소. 부연동은 양양의 어성전과 이어져 있다. 어성전은 고기가 많이 잡혀 이름이 붙었다는 마을이다. 하지만 태풍 ‘루사’와 ‘매미’로 인해 이 일대는 엄청난 수해를 겪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던 아름다운 외나무 다리도 떠내려 가버렸다. 부연동 길은 지금은 많이 복구됐다.
길은 더 편해졌지만 대신 오지마을의 풍광은 많이 퇴색했다. 그래도 계곡은 여전히 아름답다. 제법 경사진 벼랑과 숲 속으로 맑은 개울이 흐른다. 상류에는 칡소와 폭포가 있고, 아래쪽으로는 가마소와 기영소가 있다. 마을주민은 90여명. 집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다. 대부분이 밭농사와 한봉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여름이면 보라색 꽃을 피우는 도라지밭, 고운 메밀밭이 펼쳐지는 정겨운 물골이다. 여름볕이 독할수록 더 마음이 설레는 강릉. 꽃과 숲과 계곡과 파도…. 강원도의 속살을 만날 수 있다.
〈강릉/글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여행길잡이
영동고속도로 강릉IC로 빠진다.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안인에서 빠져 정동진 방면 국도 7호선을 탄다. 해안도로를 따라 통일공원을 지나면 오른쪽에 하슬라 미술관이 있다. 더 직진하면 모래시계 공원. 공원을 지나 헌화로 삼거리에서 정동진 조각공원 선크루즈호텔로 이어지는 오른쪽길을 타고 다시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감자밭이 나타난다. 부연동은 오대산 쪽에서 진입해야 한다. 영동고속도로∼진부IC(우회전)∼6번 국도∼진고개. 진고개 정상 쉼터에서 10㎞쯤 내려가면 왼쪽에 잘 지어놓은 통나무 음식점이 있다. 그 옆길로 부연동 자연휴양림이란 팻말이 붙어 있다. 식당을 끼고 돌아 비포장 산길로 8㎞를 가야 부연동 마을이다.
선교장 인근에 있는 ‘서지초가뜰’(033-646-4430)은 강릉 토박이인 창녕 조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강릉식 한정식집. 메뉴는 못밥, 질상, 정식 3가지. 못밥은 모내기할 때 먹는 밥으로 나무그릇에 밥을 담아 내놓는다. 강릉 경포호에서만 잡힌다는 부새우탕, 초당두부, 문어, 씨종지떡 등 모두 10여가지 찬이 나온다. 질상은 모를 모두 심고난 뒤 함께 어울려 마을 잔치를 열 때 먹는 밥이다. 질이란 모를 심는 사람의 수이다. 개두릅, 새미역 튀각, 문어 등이 따라 나온다. 정식은 질상에 갈비 등이 더 추가된다. 1만~2만원.
선교장 주변에는 초당 두부집들이 몰려있다. 경포대 주변에 강릉관광호텔(641-3771), 경포대 현대호텔(651-2233), 경포비치(644-2277) 등 호텔과 여관이 많다. 부연동에는 민박집들이 있다.
첫댓글 정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