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단이라기 보다는 거친 마(麻)가 더 어울릴 듯한 금산 남해가 고향인 장일도선생님으로부터 평소에 입이 닿도록 자랑하는 금산의 일출과 보리암을 가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학년말 휴가를 틈타 금산을 등산겸 보리암 일출을 보기위해서 상주에서 1박 예정하고 카메라 달랑메고 영덕에서 2002년 2월 26일 12시경에 차를 몰았다. 지도상에서 살펴보니 3~4시간은 족히 달려야 되는 원거리였다.장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금산 등산겸 보리암 가는길은 두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제1코스는 / 상주쪽 금산입구 주차→등산로 이용(1시간)→쌍홍문→장군암→ 용굴.음성굴→제석봉→흔들바위→저두암.코끼리 바위→좌선대→팔선대→ 구정암.감로수.상사바위(금산전경 조망)→문장암→봉수대→금산 정상→ 보리암→탑대(삼불암.용호농주암.일월봉.상사바위 등 조망)→하산 제2코스는 / 앵강고개 →복곡저수지 도로 진입→복곡주차장 주차→셔틀버스→보리암→ 탑대(삼불암.용호농주암.일월봉.상사바위 등 조망)→용굴.음성굴→쌍홍문→ 장군암→제석봉(향로촛대봉.형리암.대장봉 조망)→흔들바위→좌선대(저두 암.코끼리 바위 조망)→팔선대→구정암.감로수.상사바위(금산전경 조망)→ 문장암→봉수대→금산정상→복곡주차장 그런데 제1코스인 상주마을 입구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는 울창한 숲과 한려수도가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산행코스라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 했다. 자동차로 이동면 앵강고개를 타고 보리암으로 들어가는 2코스 길이 있단다.그런데 장선생님께서는 제1코스인 상주마을 금산사 등산 코스로 산행을 하여야만 "아기 자기한 남해바다, 울창한 숲, 기묘 절묘한 바위들을 소재로 신이 조경한 비단산"을 골고루 감상할 수 있다고 강력히 권했다. 양코스를 다 가보리라 마음먹고, 7번국도를 타고 포항,경주,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구포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진영 휴게소에 잠시 들러 차한잔 마시고 줄곧 달려 진교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남해의 관문인 "남해대교"를 향해 달려가는 차창에 비치는 풍광은 어느듯 봄이다. 체감,시감(視感) 모두가 봄이다.하동 바닷가 산자락에는 어느사이 매화가 만발하고 중부지방에서는 아직 땅에 붙은 마늘싹이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랗다.
남녘의 봄기분에 취해서 하동 바닷가를 휘감아 도니 어느듯 눈앞에 웅장한 남해대교가 나타난다. 여기가 경남 남해군 남해대교 입구였다. 날씨가 따뜻하여 좋았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서 선명한 사진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 남해도의 관문인 웅장한 남해대교
남해 대교를 통과하니 군경이 검문를 했다.수방사 초병 총기 탈취 사건 때문이란다. 충무공전몰 유적지를 뒤로하고 남해중심 시가지를 지나 이동면 앵강고개에 다달으니 오른쪽으로는 한려해상 국립공원 다도해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좌측으로 화강암으로 세워진 보리암 이정표가 눈에 보인다. 계획대로 상주리쪽에서 금산 등반을 위해서 차를 곧장 몰고 구비구비 도니 "국립공원 금산" 안내 간판이 나타났다. 이미 시간이 오후 4시 50분이었다. 영덕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봄에 취해서 새로운 풍광에 취해서 사진 촬영도 하고 기웃데다 보니 꾀나 시간이 흘렀다. 산불 감시원 할아버지를 만나서 이곳의 궁굼증을 물어보니 시원 시원히 이야기해 주었다. 연세가 칠십세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어른은 이 마을이 고향으로 어렸을 때는 보리암에 기도를 드리러 오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옛날 교통이 불편하였던 그 당시에도 보리암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스럽고 자비스런 기도 도량으로 소문난 사찰이었기 때문이란다. 근래에 들어 이곳(상주리쪽 보리암 가는길)으로 보리암을 찾는이는 등산객 말고는 별로 없단다." 저 꼭대기 보세요, 안테나 전신주등 ....사람으로 치면 얼굴 앞면은 상주리 쪽이고 모든 구경거리가 상주리쪽에 있는데, 뒤통수 부분에 산을 깍아 길을 만들어 자동차를 타고 보리암을 간단다. 한발짝 한발짝 비단산 자락을 밟으면서 기묘한 바위와 수목 사이로 한려 수도를 내려다 보면서 비단산을 올라야 제 멋이란다.
▲ 상주리쪽에서 바라다본 금산과 이정표
할아버지께서 "오늘이 보름이라 요밑 상주해수욕장에서 정월대보름 행사를 하니 볼 것이 좀 있을 겁니다" 라고 일러 주신다.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 차를 몰아 상주면 소재지인 상주리를 한 바퀴 둘러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 모여서 웅성거린다. 상주리 해수욕장 해송에는 오색등이 달리고 달집을 짓고,해상에는 수많은 배들이 이리저리 해상 선박 퍼레이드를 한단다. 오늘 밤에는 달맞이 놀이가 걸판지게 열리게 된다고 한다. 시간이 좀 남아서 상주리 밑에 위치하고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씨가 "따뜻한 남쪽 나라"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미조항도 이곳에서 가깝고, 송림으로 둘러싸여 아름답다는 송정 해수욕장을 둘러 보기로 하고 차를 미조항으로 몰았다. 이름 그대로 미조항(美朝港)이었다.조각배 오가는 방파제 앞으로는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마주하고 ,빨간등대,갈매기와 차창에 서치는 해송들이 아름답다. 한려수도 경치에 취해서 드라이브를 하다보니 어느사이 송정 해수욕장곁을 달리고 있었다.송림으로 둘러쌓인 반달모양의 해변이 아름답다. 상주에서의 일박을 위해서 차를 우회전하여 상주마을에 도착하여 조금전에 보아둔 상주장 모텔에 투숙 했다 2층방에서 남쪽 커텐을 여니 한눈으로 상주해수욕장 풍광이 펼쳐 진다. 이미 해는 지고 바닷가 해송에 메단 오색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바닷가에는 학동들이 쥐불놀이를 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서쪽 언덕에서는 달집이 높이 세워지고 확성기 소리가 요란하다. 이윽고 행사가 시작되는가 보다.쥐불놀이,해상선박 퍼레이드 불꽃놀이, 달집태우기등 남해섬의 전통놀이가 재미있게 펼쳐 졌다. 생각지도 않게 남해섬의 정월대보름 민속놀이를 접할 수 있었다.
이튿날 05시에 기상하여 등산 준비를 서둘렀다.그러나 밖을 내다 보니 짙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금산의 일출은 볼 수 없도록 하늘이 말리는가 보다.
일출을 못볼 바에야 일찍 등산할 필요가 없어서 7시경에 등산을 시작하였다. 산행의 출발지는 상주해수욕장인근의 상주 매표소. 완만한 돌길로 시작된다. 이곳에서 보리암까지 4.6㎞에 산행시간 왕복 3시간정도. 천천히 여유를 갖고 돌아보아도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한다. 현재까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데 2002년 3월1일 부터는 1,300원씩의 입장료 를 징수 한다고 한다. 이름이 비단산(錦山)이다. 바깥에서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다. 유난히 바위가 많아 비단이라기 보다는 거친 마(麻)가 더 어울릴 듯하다. 산자락에 들어 한참 오르다 보면 비로소 짐작이 간다. 가깝게 다가가 바라보는 바위 덩어리들의 조화가 범상치 않다. 고운 비단에 힘찬 수를 놓은 듯 화려하고 아름답게 출렁인다. 경남 남해도(남해군)의 금산(해발 681m)은 산의 규모에 비해 꽤 유명하다. 9부 능선에 자리한 기도 도량 보리암 덕분이라고 한다. 보리암은 강화 보문사(서해), 양양 낙산사 홍련암(동해)과 더불어 3대 기도터로 꼽힌다. 비단결에 푹 빠지려면 직접 발로 상주리 방향 등산로를 올라야 한다. 약 20분 거리의 돌길은 산행을 준비하는 워밍 업 코스로 제격이다. 돌길이 끝나면 돌계단이다. 조금 가파르지만 힘들지는 않다. 약 50여 분 땀을 흘리다 보면 기이한 모습의 바위에 닿는다. 쌍홍문(雙虹門)이다.
▲ 남해 금산의 주요 볼거리와 이정표
▲ 금산사 쌍홍문(雙虹門)
쌍홍문은 커다란 바위에 두개골의 눈 구멍 같은 두 개의 굴이 나 있다. 그 굴이 둥근 모양이어서 ‘한 쌍의 무지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석가 세존이 금산에서 득도를 하고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인도로 가기 위해 무념무상으로 걸어 가는데 산이 가로 막고 있다가 갑자기 웅장한 바위에 무지개 같은 구멍이 생기면서 석가세존이 가는 길을 열어 주어 세존도를 통하여 인도로 갔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시작된다. 등산로는 왼쪽 구멍속으로 나 있다. 굴 속에 들어 뒤로 돌면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 금산사 쌍홍문(雙虹門)에서 내려다 본 금산 등산로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닷물이 반짝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아가는 고깃배들의 모습이 꿈결 같다. 쌍홍문에서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은 보리암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이고, 왼쪽은 상사바위에 이르는 등산로이다. 보리암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능선을 타고 상사바위를 거쳐 왼쪽길로 내려 오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이다. 약 5분을 더 오르면 보리암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 인 보리암은 683년(신문왕 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고 한다. 보리암의 뜻은 허리에 구름띠를 두르고 서 있는 금산의 이마에 자리잡고 앉아, 망망한 남해의 하늘 끝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보리암의 '보리'는 '깨달 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유서 깊은 사찰들은 대부분 깊은 산속의 울창한 산림 속에 세워져 있는데, 보리암은 유독 신선들만이 내려 쉬었을 것으로 느껴지는 금산의 영봉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보리암에는 두 가지 사찰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아들인 인도 중부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장유선사는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다. 그런데 중인도의 아유타국 공주가 허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아유타국이 멸망하여 인도와 인접해 있는 중국으로 옮겨와 있을 때, 중국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공주의 삼촌인 장유선사가 인도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사이에서 열 왕자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 왕자를 장유선사가 데리고 출가를 했다는 것이다. 일곱 왕자를 데리고 출가한 장유선사가 거쳐간 곳은 영남일대에 많이 있는데 김해의 장유암은 그 확실한 사적지이고, 가야산과 지리산의 칠부처가 모두 장유선사의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장유선사가 처음 찾아든 곳이 가락국이 자리잡고 있는 김해에서 멀지 않은 이 금산 보리암이라는 것이다. 장유선사는 금산의 천태망상의 변화에 매혹되어 보리암에 터를 잡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효대사 창건설이다.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행하다가 이산의 승경에 끌려 들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옥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보리암에서 100여m 떨어진 바위에서 기도를 드리고 세상을 얻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산만큼 큰 비단을 얻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이름으로 산을 덮었다. 이후 현종이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자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금산에 대한 전설은 이러하다.
▲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100일 기도를 올렸다는 기도처인 이씨기단(李氏祈壇)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전국의 유명한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제를 올리고 기도를 하다가, 이곳 보광산에 제단을 쌓고 100일 기도를 하며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보광산의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 기도의 효험이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태조 이성계가 정작 자기의 목적을 이룬 다음에 크게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고민은 다름이 아닌 보광산의 전체를 어떤 방식으로 실제 비단으로 둘러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이 사정을 알아차린 신하 중에 한 사람이 하루는 이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는 것이다. "폐하! 폐하께서는 너무 상심치 마시옵소서, 저에게 좋은 방도가 있사옵니다"."그래! 좋은 방도가 있다니 다행이구려, 그럼 그 방도를 말씀해 보시오". 그러자. 신하는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폐하 그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錦山: 비단산)으로 바꾸어 부른다면 보광산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들은 태조는 "그래 그게 아주 좋은 생각이오." 하며, 크게 기뻐하면서 하루 속히 보광산 이름을 바꾸어 금산으로 부르도록 온 나라에 방을 부치도록, 각 지방의 도백에게 하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산이름 보광산이 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100일 기도를 올렸다는 기도처인 이씨기단(李氏祈壇)에는 매년 가을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 금산 보리암 삼층석탑
남해금산 상봉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 앞에 상주해수욕장을바라보고 서 있는 경상남도도 유형문화재 74호인 삼층석탑은 여러 가지 전설과 얘기를 남기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 오게 된 것이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이 삼층석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파손이 약간 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게 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住)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불가사의한 일도 있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침반을 놓는 곳에 따라 북쪽을 가르켜야 하는 나침반이 놓는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모른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탑 아래로 우주의 지기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 금산 보리암의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해 금산의 선경(仙境)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의 미소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해수관음상은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뒤로는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 보리암에서 내려다 본 상주리 해수욕장
보리암을 빠져 나와 대나무가 빽빽한 산길을 약 10분 정도 오르면 산 정상이다. 정상에 고려시대에 축조된 봉수대(일명 망대)가 있다. 망대에 서면 동서남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맑으면 지리산 자락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부지런을 떤다면 망대에서 일출을 만날 수 있다. 남쪽 바다의 일출은 동해바다의 그것과 분위기가 다르다. 금산 38경 중 가장 첫 손에 꼽는 것은 정상과 보리암에서 보는 일출. 상사바위에서 보는 일출도 그에 못지 않다. 수평선과 구름사이를 뚫고 물 속에서 솟구쳐나오는 듯한 일출은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수면위로 침묵을 지키며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을 깨우면서 붉은 빛으로 피어 오르는 금산 일출. 수평선이 아니라 섬의 뒤에서 해가 떠오른다는 일출은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황홀한 금산 절경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는데 오늘따라 구름이 짙게 끼어 그 장엄한 경관을 못보는 것이 한스럽다.
▲ 남해 금산의 상사바위
망대에서 금산산장을 거쳐 상사바위까지는 약 20분 거리. 금산의 서쪽 끝인 상사바위는 바다 건너 여수쪽의 해안선을 잘 볼 수 있는 곳. 돌산도, 금오도 등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상사바위는 평평하고 넓다. 수십 명이 누워도 남는다. 편안하게 허리와 다리를 펴고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짧지만, 소득이 많은 뿌듯한 산행이다.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평면 바위로 이 곳에 서서 바라보는 금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쪽으로는 금산의 기암괴석들이 산맥처럼 정상을 향해 뻗어오르고, 남으로는 미조항, 송정,상주 등의 해안과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한 서쪽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던 노도와 남면 해안을 배경으로 마치 금강산의 만불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상사바위에는 서로 다른 러브 스토리가 전해 온다.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 전라남도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을 살러왔다. 주인은 자태가 빼어난 과수댁이었다. 돌쇠는 주인마님의 빼어난 자태에 반하여 애간장을 태우다가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병이 상사병인지라 청년은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과수댁은 사람이 없는 금산으로 돌쇠를 불러내었다. 금산의 벼랑에서 돌쇠는 소원대로 상사를 풀게 되었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으며, 지금도 상사풀이할 때 썼던 샘이 벼랑에 남아 있다. 이것이 구정암이다.
또 다른 전설은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이 하인들 중에 문제를 일으킨 하인은 돌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는 '감히'주인의 딸을 사랑했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 돌쇠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슴속에 장작불을 태우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병이 걸렸다. 상사병이었다. 돌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돌쇠의 혼이 뱀이 되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여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승에서 못한 원을 풀려고 한 것이다. 뒤늦게 이것을 본 부모는 굿을 하는 등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돌쇠의 혼백은 여인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수염을 길게 한 노인이 홀연히 부잣집에 나타났다.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해보시오" 말하고는 역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부모는 뱀을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 위에서 굿을 시작했다. 굿을 마치자 여인을 감고 있던 뱀은 서서히 몸을 풀고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슬픈 전설이다.
금산의 기암과 전설(아래 6매의 사진은 feedhouse.co.kr 인용)
▲ 천마암: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개구리의 형태를 가진 바위로서 하늘에서 큰개구리가 내려와서 변해 버린것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 사선대:동서남북,사방에 흩어져 있는 신선들이 이 암봉에 모여 놀았다하여 사선대라고 한다. |
▲ 삼불암:세 개의 미륵과 같다고 하여 삼불이라 하는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기 전에는 이 바위들이 모두 누워있었는데 기도가 끝나자 두 개의 바위가 모두 일어났다고 한다. 바위 세 개가 모두 일어나 앉았더라면 이성계는 중국 땅까지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성계의 기도가 좀 부족했던 모양이다. |
▲ 음성굴:굴의 길이는 3m로 옛날 보연 ,보배,보원의 세 여승이사명대사의 행방을 알기 위해 수일을 이 굴에서 기도한 끝에 경남 거제 앞바다 연화동에서 친견했다는 전설이 얽힌굴로서 사명당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
▲일월봉:가까이서 보면 일자(日字),멀리서 보면 월자(月字) 모양으로 나타나므로 일월봉이라 칭하는데 겨울철에 이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장관이라한다 |
▲화엄봉:바위 자체가 빛날 화(華)자(字)의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고, 신라초 원효대사가 이바위 위에서 화음경을 독경하였다고 하여 화엄봉이라한다. |
비단산과 보리암에 취해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구경하고 사진찍고,물어보고 헤메다 보니 어느듯 11시가 넘었다. 아쉬운점은 금산정상에서 아기자기한 한폭의 동양화 같은 리아스식해안인 한려수도의 원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짙은 구름으로 시야가 너무 흐리다.하산 하니 11시40분. 이왕 여기 까지 왔으니 보리암을 자동차로 가보고 싶은 욕심에 차를 몰아 남해군 이동면 앵강고개길에서 "보리암"가는 길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고갯길을 따라 한참오르니 복곡저수지를 지나 주차장에 닿았다.이곳 주차장에서는 주차료를 달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복곡주차장에서 다시 보리암 이정표를 따라 거친 시멘트 1차선포장길을 따라 차도 사람도 헐떡이면서 오르다 보면 보리암 주차장에 이른다.
장일도선생님의 말씀처럼 이길은 무미건조하고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혹 이 기행문을 보시고 남해도 금산과 보리암을 여행하실분은 참고가 되리라 본다. 상주해수욕장 등산로길로 오르면 경치가 아름답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이곳 자동차길은 진입은 쉽지만 볼 것이 별로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등산은 상주 해수욕장 쪽으로 오르고 보리암만 보실려면 자동차길로 들어가면 쉽다는 것입니다. 역마살이 낀 여행자가 전국의 유명한 곳을 여행해 보았지만, 금산과 보리암은 한마디로 다시 찾고 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
첫댓글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