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의 역사
인장은 본래 정치에 있어 신비하게 하는 신물 또는 璽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인장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경우,찍이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 세개를 주어 보냈다는 군고사에 나타나는 천부인삼방(天符印三方), 중국의 연대를 알 수 없는 삼과(三顆),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Sumer)인들이 사용했던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이집트 고대 무덤에서 비롯된 청금석 도장 흑은 반지로 끼고 다니던 반지도장, 인도의 모헨조다로(Mohenjo Daro)와 하랍빠(Harappa) 유적지에서 출토된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여러 문자가 새겨진 도장들, 남미의 마야와 잉카 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도장, 그리고 고대 미노스(Menos) 문명을 꽃피웠던 레타 (Creta)섬에서 발굴된 도장 등 혹은 인장에 쓰이는 목적과 용도에 따라 크게 官印과 私印으로 구별한다.
먼저 관인에게는 황제가 쓰던 璽를 포함하여 印과 章 등이 있는데, 관인이란 말 그대로 집정에 쓰이던 도장 을 한다. 관인은 모두 정해진 인장 제도에 따라 계급과 신분지위에 따라 그에 알맞게 만들어졌으며 황제가 쓰던璽, 열후가 쓰던 章, 그리고 그 이하의 관리가 쓰던 印, 그리고 그보다 더 하급관리가 사용하던 검기(鈴 記) 혹은 착기(칙記) 등이 있었다.
이와같이 인장은 國民을 통치하고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신표였기 때문에 인장의 규격과 사용에는 예로 부터 엄격한 제도가 있어 그 제도가 규정한 대로 인장의 규격이나 재질 그리고 용도는 물론이고, 신분 에 따라 인장이 규격이나 재질 그리고 용도는 물론이고, 신분에 따라 인장이 새길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그 리고 인장을 매는 끈의 색깔까지도 제한을 두어 인장이 그 착용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표였다. 이러한 인장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은 진시황 때부터인데, 진시황은 옥으로 새를 만들어 옥새라 칭하였다 고 한다.
그 이전에는 常駐 時代로부터 줄곧 쓰여오던 信憑의 工具를 나타내는 말인 녑을 사용하였는데 그 것이 고대의 사(璽)였다. 녑의 형상은 위에 人을, 그리고 川을 아래에 두어 눌러 찍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璽의 받침으로 士가 아닌 玉을 쓰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이 신표의 재질을 玉으로 쓰면서부터였으며 그 이 후에는 계속 璽를 황제의 신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와 같은 말인 寶란 당나라 무후(武后, 685∼704 A.D.)가 璽의 음이 死와 같다 하여 寶로 고쳤으므로 그뒤 황 제의璽를 寶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章은 악(樂)과 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音과 十을 취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음악과 같이 시종일관 이치에 맞는 것, 즉 음악에서 화음을 이루듯이 제도를 시행하는데에도 이치 에 맞게 시행함을 뜻한다고 한다. "印"은 갑골문에 보면 손으로 사람을 눌러 꿇어 앉히는 형상인으로서 "璽"자와 더불어 눌러찍는 다는 염(厭) 뜻이며, 說文解字에는 "印은 執政을 하는데 필요한 信이다 "라고 하 였다. 이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璽란 황제가 天命을 받들어 신민을 다스리므로 璽라 했고.
印은 관리가 황제제후의 명을 공명정대하게 집행하므로 印이라 했으며, 章은 제후의 역할이란 황제아 그 밑의 관리들을 음악에서 화음을 이루듯이 조율하는 것이므로 그 뜻을 빌어 章이라고 했다 한다.
私印이란 일반 평민들이 쓰던 것으로 姓名印, 雅號印, 宇印 등이 있으며, 옛날에는 동장에 대개 이름만 새긴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印 혹은 之印 등의 글자를 보태거나 字, 號 혹은 생년월일 등을 새기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관인과 사인에 뚜렸한 구분이 생기게 된 것은 宋代以後 圖書를 수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印에 동某某圖書라는 印文을 새기면서 圖書는 곧 印章의 새로운 별명이 되었으며, 격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公과 私를 가려 관인은 印이나 章 혹은 印章으로 불리웠고, 私記, 圖書, 圖章은 私印이라고 하는 官印과 사인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 인장의 역사
우리나라의 인장역사는 일찍이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보냈다는 高麗時代 一然의 著書 三國遺事 의 단군고사에 나타나는 천부인 삼방 (天符印三方) 이 최초의 설이다.
인장에 대한 영적숭앙(靈的崇仰) 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국왕이 바뀔 때마다 왕이 명당에 앉아 국새(國璽)를 손수 전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이것은 국새가 왕권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직 (社稷)의 안태(安泰)를 빌었다는 기원적(祈願的)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이미 국새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대 (當代) 에는 이미, 개인들도 인장을 사용 하였고, 이것을 극히 숭상하였음을 볼 수 있다.
즉, 개인의 인장에도 용·봉(龍·鳳)을 새겼다든가, 청자 (靑磁)를 구어 인형(印形)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인장에 대한 예술적인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는 마치 불상예술(佛像藝術)이 불교의 깊은 신앙의 표상이었듯이 이 같은 인장 예술도 인장이 인간에게 주는 영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감정은 近世의 李朝時代 까지 연면히 이어져 이조 왕실에는 보인소(寶印所) 라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두어 이를 관장케 하였고, 현존하는 국새(國璽)와 보인(寶印)이 1000개를 넘는 것을 볼 때에, 이는 인장이라는 것이 단순한 필요성 이상의 기원적(祈願的)인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인장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필수품인 동시에 소중한 우리문화의 유산이 된 것이다. 세월이 바뀌면서 전통과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고 그 가치가 날로 쇠퇴하고 있는 지금에 인장이라는 것을 소중하고 고귀한 문화적 가치와 전통을 보전계승 발전하고자 인장인들이 노력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