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동(仙花洞)
신화동은 옛날 사창(私娼衝)가 있어 유명했던 곳이다.
1883년 인천항 개항(開港) 이후에 생긴 마을인데, 인천부 다소면(多所面) 선창리(船倉里)에 속했지만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에 화개동(花開洞)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화개(花開)’라는 땅 이름은 대개 두 가지의 뜻을 갖는다.
하나는 ‘화(花)’가 ‘곶(串)’을 뜻하고, ‘개(閉)’는 개펄이나 포구처럼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 우리말 ‘개’를 한자(漢字)의 뜻과는 관계없이 소리만 밀려서 쓴 경우다.(→‘곶’에 대해서는 동구 ‘화도진’ 편 참고)
이런 경우의 화개동은 ‘바다 쪽으로 삐죽하게 뻗어 나온 갯벌 지역’을 뜻할 뿐 ‘꽃〈花〉이 핀〈開〉 동네〈洞〉’와 같은 식의 한자 뜻풀이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와는 달리 화개동이 사창가 마을을 뜻하는 곳도 있다.
여성을 ‘꽃’에 비유해 ‘꽃이 핀 동네’ 라고 비유적인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곳 중구 화개동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곳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1900년대 초부터 유곽(遊廓)이 생겨 그 뒤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됐다.
‘유곽’이란 사창가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인데, 개항 뒤 인천에 밀려들어 온 일본인들을 따라 몸을 파는 일본 여성들이 들어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자유공원 아래 일본인 조계(租界) 안에 일본식 유곽이 하나둘씩 생기다가 일본인들이 계속 늘어나자 조계 밖으로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897년 무렵 인천에는 기녀(妓女)들을 접대부로 고용한 요릿집이 17곳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와 답동성당 언덕 아래, 또는 전동 인일여자고등학교 아랫길 주변 등에 모여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 기녀들을 따라 같은 일을 하는 우리나라 여인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 상가(商家)가 계속 늘어나자 이 요리점들은 1902년 함께 돈을 내서 이곳 선화동에 ‘부도루(敷島樓)’라는 이름의 유곽을 열었는데, 지금의 신흥시장 일대에 있었다.
그 전까지 바닷가인 이 동네에는 논과 밭이 조금 있고, 주변에는 공동묘지와 기와를 만드는 공장 등이 있었다. 그랬던 동네가 유곽이 생기면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곳의 유곽은 일제 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공창(公娼)이었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만석동 지역에도 공창이 있었다. 하지만 만석동 일대에 있던 유곽은 이곳 선화동 유곽에게 밀려 일찍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고 한다.
1932년도의 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천의 한국인 인구가 5만 명, 일본인 인구가 1만2000 명이었다. 이 중에 몸을 파는 한국인 여자가 84명, 일본인 여자가 78명 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유곽 은영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어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기한도 없이 이곳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이곳 선화동의 유곽들은 대부분 보잘것없는 간이식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름만은 ‘송학루(松鶴樓)’, ‘송죽루(松竹樓)’, ‘대흥루(大興樓)’, ‘영춘루(迎春樓)’ 등으로 꽤나 거창했다. 이름이 이러했기에 당시 이런 곳에서 여인들과 하룻밤 보내는 것을 “높다란 누각(樓閣)에 오른다”는 뜻의 ‘등루(登樓)’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유곽의 여인들과 정을 통했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경우도 흔했다. 이 때문에 신문에 「유곽애화(遊廓哀話)」라는 제목의 기사가 심심찮게 실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린 동네 화개동을 흔히 조금 발음이 바뀐 ‘화가동’이라 부르기도 했고, 순 우리말로 ‘꽃골말’이라고도 불렀다. ‘꽃’은 물론 여성을 비유한 것이고, ‘골’과 ‘말’은 ‘마을’을 뜻하는 단어가 겹쳐 쓰인 것이다.
이 선화동의 유곽지 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처럼 행정 당국이 윤락행위를 묵인하는 이른바 ‘특정 지역’은 주변의 숭의동과 학익동 등지로 옮겨가 계속 이어졌다.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도 인천의 대표적 사창가로 널리 알려졌던 숭의동의 ‘옐로우하우스’는 이들이 선화동에서 자리를 옮겨와 만든 것이다.
화개동은 1914년 일제가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일본식으로 ‘화정(花町)’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화정’은 ‘花(꽃 화)’자를 쓴 것으로 보아 화개동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화정이 광복 뒤인 1946년에 선화동으로 바뀌어 오늘의 이름이 된다.
선화동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신선〈山〉과 꽃〈花〉 동네’이니 화개동이나 화정을 벗어나지 못한 이름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꽃과 함께 신선놀음을 한다”는, 더욱더 노골적인 뜻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