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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Me Kong) 텔타 쿠르즈
6시에 호텔을 나와 신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메콩(Me Kong) 델타로 향했다.
이날 버스도 국산차였으며 승객은 35명이였다. 모두 서양 여행자들이고 동양인은 나 혼자다. 어제 쿠치 터널 투어에 함께 참여한 흑인 여자가 안면이 있다고 친절을 베풀어 준다. 버스가 남쪽을 향해서 4시간 정도 달렸을 때 조그만 메콩 지류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한 농가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쌀 국수를 만드는 곳으로 옛날 우리 나라 막국수 뽑는 요령과 같으나 쌀을 가루로 만드는 방법이 특이했다. 이 국수가 베트남 사람의 주식이나 다름없는 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작은 보트에 여러 대에 나누어 타고 메콩 지류를 따라 나갔다. 양옆에는 코코넛 나무가 무성한 가운데 물길은 이곳 저곳으로 나 있어 지리를 모르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강 연안에는 라이스 페이퍼를 만드는 공장도 있고 어부들이 그물과 낚시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진출하니 바다와 같은 강에 다다르니 큰배들이 오가고 이강을 건너 맞은편 섬에 도착하여 조금 걸으니 한 농가가 있고 주변은 모두 과수원이 였다. 여기서 점심 식사와 열대 과일을 대접받고 농장을 구경하고 반대쪽으로 가니 다른 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보트를 운전하는 베트남 여자가 나를 향해 자기 배에 타라고 손짓한다. 전부 유럽 사람 속에 동양 사람이 있어선지 소리까지 지른다. 마이(my)라는 이 여자는 보트의 운전을 나에게 맡기기도 하며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해 주었다. 메콩 델타 지역에서 관광객의 운송을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여인이다.
작은 수로를 타고 한참을 간 후에 또 다른 섬에 도착하니 그곳은 또 다른 열대 과수원이 전개되고 양봉도 하고 있는 지역이 였다. 역시 열대 과일과 꿀을 대접받고 코코넛 아일랜드로 향했다. 배에서 내려 작은 길이 난 주택가를 20여분 걸어 한 농가에 들어가니 수많은 코코넛 열매를 까서 흰 과육을 빼어 내고 있는 작업이 한참이 였다. 이 과육을 가루를 내서 끊여 가지고 코코넛 캔디를 만드는데 제품을 먹어 보니 상당히 맛이 있었다.
다시 보트를 타고 작은 지류를 돌아 거대한 강에 나와 큰배에 옮겨 탔다. 보트를 몰던 여자가 큰배까지 올라와 악수를 청하며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큰배는 먼저의 장소로 가지 않고 빈롱이라는 시내의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선착장밖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고 버스는 사이공을 향해 달렸다. 저녁 7시가 되어서 신카페 앞에 도착하여 나는 내일 다랏(Da Lat)으로 떠나는 버스를 예약했다.
아주 싼 여행 경비가 아닐 수 없다.
高原 都市 다랏(Da Lat)
함께 떠날 여행객은 20여명 45인승에 자리도 넉넉하고 에어컨이 나오는 국산차다. 옆에 앉은 홀랜드의 아가씨는 보기 드문 미인이다. 일행이 3명인데 하나 같이 미인이다. 나는 이들에게 미스 홀랜드라 이름을 붙여 주었다. 뒷자리에 앉은 호주인 롤라라는 40대의 여자는 모든 사람들에 친절했고 나에겐 부산과 인천에 사는 한국 친구도 있다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단다. 50대의 미국인은 베트남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고 온 사람으로 여행자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준 호감이 가는 사람이다.
다랏(Da Lat)을 향해 몇 시간을 달려서야 서서히 산악 지역이 나타나고 계속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차는 아무 이상 없이 잘도 달렸다.
한 강가에 도착하자 다리 목에서 차를 세우고 강바닥에서 모래를 채취하는 선상 가옥군을 볼 수 있었는데 베트남의 토질은 대부분 황토 흙이라서 모래가 귀한 모양이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소나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한결 같이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이곳의 작은 가계에서 미국인, 호주인, 홀랜드 그리고 나, 6명이 커피와 맥주, 음료수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게 되어 계산을 하는데 어김없이 자기 먹은 금액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들의 생활 습관이기도 하지만 여행자들은 자기 몫을 자신이 내는 것은 철칙이다. 다시 산을 힘겹게 오르고 22살이라는 홀랜드 아가씨는 배낭 속에서 계속 먹을 것을 꺼내 권한다. 나도 무언가 대접을 하고 싶지만 나에겐 생수 한병 외엔 먹을 것이 없다. 얼마를 또 달려 길가에 버스를 세웠다. 주변은 끝간데 없는 커피 농장이였다.
멀리 베트남 여인들이 커피 밭에서 일들을 하고 있다. 커피밭 속에 들어가 아직 덜 익은 커피를 따서 겉껍질을 까고 안에 들어 있는 열매의 맛을 보니 이것은 도저히 먹을 수 없이 혀가 아려 온다.
베트남의 커피 농장은 근년에 들어 급속히 늘어가고 있고 계속해서 서구의 자본으로 중부 산악 지대에 커피 농장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베트남 커피 값이 가장 싸서 우리 나라에도 수입량의 절반 가까이 되는 실정이다. 커피 농업은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저 임금 지역이라야 경쟁력에서 이길 수 있으니 베트남이 투자에 적정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2시간 정도 달려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다랏의 시내가 보였다. 건물이 불란서 풍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이다.
다랏은 해발 1500m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울창한 소나무 숲에 쌓여 있다. 바람이 매우 상쾌하며 기온이 낮아 베트남 최고의 피서지이다. 언덕 마다엔 불란서풍 빌라가 지어져 있고 시내 중심부에 스언흐엉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시가지 중심이 되는 다랏 시장 로터리 앞을 지나 시내 외곽에 떨어진 도이 탄(Doi Tan)호텔에 차를 세웠다.
신카페에서 알선해 준 호텔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호텔에 실어다 준단다. 나는 싱글 룸을 6달러에 묵기로 했는데 엄청나게 큰방에 온수까지 공급되고 가격에 비해 시설이 너무 좋았다. 저녁에 시내까지 차편을 신카페에서 제공해 준단다. 홀랜드 여자애들은 다른 곳을 알아 본다고 어디론가 떠났다가 한시간 후 다시 우리가 묵는 호텔로 돌아와 숙소를 잡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신카페의 차편을 기다리는데 홀랜드 여자들 3명이 와서 내일 다랏 관광을 함께 하자고 제의해 온다. 어떻게 할거냐고 물으니 오토바이 쎄콥을 타고 가자고 한다. 오토바이는 위험하니 신카페에서 미니 버스를 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그들은 굳이 오토바이를 택하고 나는 미니 버스를 선택했다. 언덕길을 오토바이 뒷 꽁무니에 하루 종일 시달리다 보면 허리에 이상이 올 것 같았다. 미니 버스로 시내에 나와 다랏 야시장에서 베트남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 보다가 중국 음식점에 들러 푸짐한 식사를 했다. 거금 5달러를 들이니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다.
스언흐엉 호수(Xuan Huon Lake)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먹으며 11시간의 버스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다랏(Da Lat) 觀光
아침 7시에 신카페의 미니 버스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오늘 관광에는 50대의 미국인, 호주의 롤라, 유럽의 남녀를 합해 5명이 같이 떠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어제 함께 다랏으로 온 미국인 마크가 오늘 나짱으로 간다며 자기가 아침을 내겠다고 해 함께 했다. 그에게 부담 지워 준 금액은 1달러, 내 몫을 내고 싶었지만 섭섭해 할 것 같아 그에게 맡겼다.
우리가 탄 미니 버스란 우리 나라의 기아에서 생산한 베스타였다. 웬만한 버스는 일제와 국산이 태반이다.
출발은 스언흐엉 호수(xuan Huon Lake)에서 시작했다. 이 스언흐엉 호수는 도시의 중심에 있으며 둘레가 약5km이며 주변의 소나무 숲이 호수에 비쳐 아름답다. 호수 주변에서 모터보트를 빌려 크르즈도 즐길 수 있으며 바로 호수 옆에 골프장이 있다.
바오다이 황제의 여름 별장은 다랏 시내를 바라보며 서 있고 맞은편 언덕에는 프랑스식 빌라가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다가온다. 이 별장은 호텔로 이용되고 있지만 이곳의 내부 장식품과 예술품은 황제 일가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2층은 숙박객이 이용하므로 들어갈 수 없다. 이곳에 묵으려면 40~50달러면 1박 할 수 있다.
트홍바오(Thoag Bao)는 구릉지대의 작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 불교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커다란 동종을 보관하고 일부분은 중국식 풍으로 지어져 있고 언덕 아래 호수까지 계단으로 잘 정비해 놓았다.
다시 캄리 폭포(Cam Ly Falls)로 갔는데 좁은 산길을 따라 걸으니 우리 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폭포가 있는데 나에겐 전혀 관광할 만한 가치가 없으나 베트남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8km쯤을 이동하여 찾아간 곳이 나탕가 폭포다.
이 폭포는 수량도 많고 특히 폭포의 절벽 밑이 깊이 파여져 있어 폭포 뒤로 걸어다닐 수 있는데 물안개가 자욱한 곳을 걸어 보는 것이 재미있다. 주위는 공원으로 잘 정비가 되어 있다.
이곳 카페에서 음료수 한잔씩 하면서 한참을 담소하다 치킨 빌리지(Lang Ga)로 향했다. 다랏에서 판랑(Phan Rang)으로 가는 도중에 시멘트로 만든 5m쯤되고 커다란 수탉이 세워져 있는 곳이 치킨 빌리지(Lang Ga)이다. 여기는 원주민들이 문명의 혜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생활을 하며 농사는 토마토 감자 등을 심어 생활하며 관광객이 들리면 그들이 직접 손으로 짠 천을 파는데 그 색깔이 현란한 무늬다. 그들이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운전사에게 점심 먹을 곳을 안내하라고 하니 시골길의 한 식당에 차를 대었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식사를 많이 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오토바이로 관광한다던 미스 홀랜드도 벌써 식사를 하고 있다. 각기 음료와 식사를 시켜 먹는데 서양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한다지만 이들의 수다는 별 것 아닌 얘기 가지고 말들이 많다. 간단한 식사를 하는데 1시간 30분이 소요되니 답답할 지경이다. 이것도 호주 여자 롤라에게 이제 출발하자고 눈짓을 해서 얻은 수확이다. 늦은 점심을 하고 좀 멀리 떨어진 폭포를 찾았는데 이곳은 입장료가 없었다.
가파른 절벽을 대나무를 잡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폭포의 밑에 다다르고 다시 폭포를 따라 올라 갈 수 있게 되는데 여러 갈래의 폭포가 수량도 많아 볼 만한 곳이였다. 홀랜드 여자아이들이 폭포 밑에서 땀흘리고 올라 온 나에게 콜라를 권한다.
여기서 동행인 5명이 관광을 일찍 끝내기로 합의하고 마지막으로 전 프랑스 총독 관저를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가게 됐다.
총독 관저는 한적한 소나무 숲 속에 있는데 내부는 응접실, 연회실등 25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어 30달러에 1박할 수 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걸어서 시내로 나왔다. 먼저 다랏 시장에 들려 노상에 앉아 그들이 즐겨 먹은 퍼(국수)를 사 먹으니 현지인들이 웃으며 구경하고 아줌마는 솥에서 고기를 건져 더 먹으라고 내 그릇에 언져 준다. 시장에는 고원 지방에서 생산되는 온대성 야채가 풍성하고 딸기, 사과, 감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시장 입구에는 꽃가게가 즐비하고 2층에는 이곳 주변의 소수 민족의 수공예품도 있다.
시장 주변과 중심가의 야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이것저것 조금씩 음식 맛을 보며 다니는데 호주의 롤라씨를 야시장을 기웃거리다 만나 카페에 들려 맥주를 하고 헤어졌다.
호숫가에는 관광 온 현지인들이 두툼한 옷과 어린아이들은 토끼털로 된 모자로 무장을 했다. 나는 반바지 차림이지만 조금 춥다고 느껴지는데 그들에겐 상당히 추운 모양이다. 신 카페에 들려 내일 떠나는 나짱행 버스를 예약하고 밤거리를 걸어오는데 조금 변두리 길가에 가라오케가 있어 들여다보니 젊은 주인이 들어오라고 한다. 베트남 노래를 몰라서 안 들어가겠다고 하니 커피라도 한잔하란다.
가라오케란 것이 인도네시아에서 의자에 앉아 주인이 순번대로 마이크를 옮겨 주는 형식으로 우리 나라의 노래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커피를 갖다 준 주인은 노래를 신청해 불러 보라지만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대신 주인에게 노래 한곡을 불러 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베트남에 근무할 당시 제일 유행하던 「텝부람 사이공」을 요청했다. 아름다운 사이공이란 곡으로 이 주인이 이 곡을 알고 있다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노래 였던가!
나는 이 노래를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특히 전후 세대가 이 곡을 알고 있다는 것은 통일 이전의 노래가 그대로 불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깜깜한 길 위에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짱(Nha Trang)으로 가는 길
나트랑(Nha Trang)이라고 영어식 발음을 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침 7시에 호텔 앞에 떠날 사람들을 보니 호주의 롤라씨, 서구의 남녀는 사이공서부터 붙어 다녀 부부간 인줄 알았더니 어제 저녁 틀어졌는지 말도 안하고 각각이다. 홀랜드 아가씨 3명 미국인이 악수를 청하며 자기는 하루 더 있다 떠난 다면서 일일이 인사를 한다. 시내 사무실 앞에서 다른 여행객을 태우니 큰 버스에 20여명이다. 큰 좌석을 하나씩 앉으니 넓고 좋다.
버스가 다랏 시내 복판에 있는 호수를 서비스로 한바퀴 돈다음 동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험준한 산굽이를 돌아가며 달리는데 먼 산에서 화전을 일구기 위한 산불이 거세게 일고 있다. 2시간 이상을 달려 고갯마루에 차를 세워 내려다보니 이곳이 산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북쪽으로는 끝없는 평원이 아득히 펼쳐 있다. 이 산마루에서 한시간 정도 달리니 평지에 다다르고 조그만 마을의 장터에 버스를 세웠다. 여기서 점심을 해결해야 되는데 식당다운 곳이 없고 길거리의 좌판에서 해결해야 될 판이다.
서양 사람들은 길거리에 바나나와 불란서식 바켓트를 갖고 요기를 하는데 나는 커피 한잔으로 점심을 하려는데 한 젊은이가 만두 상자 같은 것을 내밀며 사먹으라고 한다. 코코넛 가루로 만들었다는 것이 우선 모양이 생과자 같은 것이 먹음직하여 먹어 보니 맛이 그만이였다. 롤라씨와 홀란드 여자 애들에게 맛이 좋다고 하니 서양 사람들이 너도 나도 사 먹는 바람에 코코넛 과자는 모두 동이 나고 말았다. 정말 이 시골 마을엔 먹을 것이 없었다. 요기를 마치고 바다 쪽을 향해 달리니 염전이 끝없이 전개된다. 이처럼 더운 날씨에 염전에는 소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시간 반쯤 더 지나서 한 마을옆 조그만 동산에 참 유적지가 보여 카메라를 꺼내 몇 컷을 찍었는데 버스가 그 유적지에 정지하고 구경할 시간을 주었다.
이곳의 포나가르 참 사원(Po Nagar Cham Tower)은 참족이 남쪽에 이주한 이후에 만든 것이다. 인도의 힌두교가 이곳에 전파되어 참족들은 가장 척박한 중부 지역에서 그 세력을 떨치며 왕국을 건설했지만 이곳이 그 마지막 소멸되기 전의 유적이다. 인도의 힌두 문화를 많이 보아온터라 금방 이해가 되었고 다만 인도의 것은 돌을 깍아 만든 것이지만 이곳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링가가 모셔져 있다. 철따라 참족들의 행사가 지금도 이어진다고 한다.
후카인省의 省都 나짱(Nha Trang)
나짱(Nha Trang)에 도착은 오후 3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인구 26만의 나짱(Nha Trang)은 베트남 리조트지역으로 해안으로 산책로가 이어지고 하얀 모래사장과 야자수가 남국의 정취를 북돋워 준다. 배낭을 메고 비엔동 호텔까지 걸어갔으나 시설을 확충한 이 호텔은 최하 요금이 28달러로 비싼 게 흠이였다. 다시 해안 도로로 나와 야자수 늘어선 해안을 걸으며 호텔을 찾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몇 개의 호텔을 전전하다. 해안에서 3분거리인 Thong Nhat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제일 싼 방을 하루 7달러에 얻었는데 베드가 2개인 이방은 건물 뒤편에 있어 어두운 방이지만 잠만 편히 잔다면 무엇이 문제랴. 곧바로 샤워를 하고 비취에 나가니 풍경이 아주 좋다.
야자수 밑에서 사탕수수 즙을 파는 곳에서 한잔 마시니 시원하다. 나이든 노인이 찾아와 한국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다.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하니 옛날 이곳에 있었냐고 하길래 아니라고 대답했다. 옆에 있던 여자 두명이 과일을 갖다 무엇을 찍어 먹으며 함께 먹자고 권한다. 먹어 보니 영 먹을 수가 없었다. 산책로를 걸어가던 호주인 롤라가 숙소를 정했냐고 물으며 지나간다. 주변에 나이든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있어 노인정 같은 역할을 하는데 아까 네게 말을 걸어 온 노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남주띤이 왔다고 수군거린다. 두 베트남 여자가 가라오케에 가서 술을 하자며 유혹을 한다.
그들을 떨치고 길 건너에 있는 여신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이드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알렉산더 여신은 1895년에 베트남에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고 중부 고원 지방을 여행하다 다랏을 발견하고 이곳을 개발하는데 기여했다. 베트남에 고무나무와 키니네 나무를 처음 들여왔고 베트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 이곳 나짱에서 80세로 운명한다. 외국인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은 사람이 여신 박사로 사후 이곳에 박물관을 건립하여 그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 학자로서 의사로서 여행가인 이분을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면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미스 홀랜드를 만났다. 사진관에 간다며 내일 비취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저녁 식사를 비취에 있는 카페에서 맥주를 곁들여 먹었다. 카페에서는 60년대의 팝이 울려 나오고 있다.
야자수 밑에서 나짱의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 출렁이고 나는 홀로 출렁이는 파도에 그리움의 머리를 헹군다.
나짱(Nha Trang)에서 만난 하노이 아가씨들
새벽에 일어나 호텔 앞에 나와 보니 나짱의 남녀노소가 줄지어 걷거나 자전거 오토바이을 타고 해안으로 몰려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입은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 들어 수영을 하다 젖은 옷 그대로 돌아가곤 한다. 어제 저녁 보아 둔 국수집에서 퍼를 먹었다. 호텔 정문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1달러에 하루를 빌렸다.
나짱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한국군 야전 사령부가 있었고 야전병원, 한국군 장교 클럽과 십자성 부대의 주둔지 였다. 백마 사단이 이곳으로 상륙을 하던 지점이기도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저녁 무렵 거리를 걸으면 곳곳에서 태권도 연습을 하고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타고 무조건 한쪽 길을 택해 달려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해안 부락에 도착한 곳은 바닷가의 서민들이 살아가고 부락의 아이들이 내 뒤를 따라 온다. 어떤 놈은 내 몸을 건드려 보기도 한다. 다시 자전거를 돌려 담(Dam)시장으로 향했다.
나짱 최대의 시장으로 어물과 과일 시장, 잡화물 등을 팔지만 역시 어물 시장이 가장 번잡하다. 먹자 골목의 음식들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아 먹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도는데 왠 여자가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니 큼직한 그의 아들보고 안내를 해 주란다. 싫다고 해도 계속 쫓아온다. 이곳에는 한국인 2세를 종종 만날 수 있는 지역이라 잘못 휘말리면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어 그들을 뿌리치고 포나가르 참 사원(Po Nagar Cham Tower)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한참 달려 다리를 두 개 건너니 참 사원이 앞에 보인다. 도착하여 자전거를 보관해 주는 곳에 자전거를 맡기고 사원으로 올라갔다.
이 사원은 7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세워진 힌두 사원으로 현재는 불교 신자들이 드나들며 복을 빌고 있다. 입구의 걸인 틈을 지나면 10개의 기둥만 남아 있는 명상전이 있고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붉은 벽돌의 고색 창연한 탑이 나오는데 8개가 있던 것이 4개만 남아 있다. 본당은 전형적인 힌두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내부에는 시바와 노란 옷을 입는 부처가 있고 옆의 탑에는 링가가 모셔져 있다. 이 사원에서는 코이(Coi)강 건너로 나짱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자전거를 찾아 창바위 곶을 향해 달렸는데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그곳 젊은이들에게 창바위 곶을 물으니 도저히 의사가 소통되지 않아 포기하고 대로에 나와 계속 달리다 한 골목 어귀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니 골목길을 따라가라 일러준다. 골목을 벗어나니 바로 바다가 나오고 오른쪽 길로 조금 달리니 상점이 나오고 자전거 보관소가 있었다.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고 있자니 주인 여자가 남주띤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옛날 한국 사람이 이곳에 많이 있었다고 말하며 여러 가지를 물어 온다. 낯선 곳에서 말대답하기가 싫어 해안 쪽으로 나 있는 바위 곶으로 향하니 몇 개의 커다란 바위가 풍화되어 괴석을 이루고 있었다. 바위 사이를 빠져 끝쪽으로 가는데 이곳에 음료수와 야자를 파는 남자와 놀러 온 베트남 여자 3명이 쉬어 가라고 자리를 권한다.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 한국인이라고 밝히니 더 관심을 가지고 대한다. 이 여자들은 비디오 카메라까지 휴대하고 유난히 피부가 하얀 미인들이었다. 수영을 하라고 권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아 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창바위 부처님 손자국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니 제일 어린 여자가 흔쾌히 쫓아와 사진을 찍어 준다. 한 시간여 이야기를 하던 중 이 여자들이 나짱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노이에서 휴가차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후 하노이에 간다니까 연락하라고 주소를 적어 준다. 공식적으로 신분을 밝힌 북쪽 사람을 처음 대하는 것이다. 제일 나이 어린 23살의 보탄하양과 26살 되었다는 2명의 여자들은 모두 같은 회사에 직원이라 했다.
하노이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자전거 보관소에서 자전거를 찾아 롱손사를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아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영 의사가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는데 한 가게의 노인이 손짓을 하며 들어오라고 한다. 그곳에 들어가니 음료수를 사 먹으란다. 싫다고 하니 그럼 담배를 달란다. 한가치 주려고 담뱃갑을 꺼내니 그 노인은 담뱃갑에서 3가치를 꺼내서 챙긴다. 롱손사를 찾아간다고 하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일러준다. 내가 가던 방향이 맞았다. 한참을 달리고 보니 오른편에 롱손사가 나타났다.
이 절은 중국식 사원으로 한자로 쓰면 용산사이다. 정면에 커다란 용의 얼굴을 장식했고 지붕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장식했다. 본당 오른쪽 길을 따라 155개 계단을 오르면 14m 높이의 거대한 부처 상이 나오는데 주변에는 남 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다 분신 자살한 턱광덕 스님의 모습을 부조해 놓았다. 내친 김에 내일 아침 떠날 버스 편을 알아보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용산사에서 한참을 가는 거리지만 자전거로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었고 새벽 5시에 위년(Qui Nhon)으로 가는 버스가 5달러 정도로 갈 수 있었다. 타고 갈 버스를 확인해 보니 기가 찼다. 이 더위에 저 차를 타고 수많은 베트남 사람 틈에서 견디어 낼 것 같지 않아 끔찍했다. 더위에 저 차가 목적지까지 갈 수나 있을지가 의심이 였다. 호텔로 돌아와 프론트에서 내일 떠날 버스 편을 문의했다. 다낭(Da Nang)까지 가는 미니 버스가 있는데 15달러를 내고 중간에서 내리면 된단다. 상당히 빨리 가기 때문에 5~6시간이면 도착이 된단다. 편히 가기로 하고 예약을 했다.
호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비치로 나갔다. 현지인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피해 백사장에 나가니 미스 홀랜드들이 손짓을 한다. 어디를 갔었냐고 물으며 자기들은 내일 구경을 다닐거라 한다. 그곳에 의자와 파라솔이 있어 앉아 있으니 왠 아주머니가 와서 1개만 쓸 거냐고 말해 그렇다고 하니 5,000동을 내란다. 5,000동을 주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갑자기 파라솔이 없어지고 햇볕이 얼굴에 내려 쬔다. 어찌된 일이냐고 말하니 홀랜드 여자들이 파라솔 요금이 5,000동이란다. 웃음이 절로 난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이 아가씨들과는 서로 짐을 보아주며 오후를 보냈지만 이들은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사이공에서 만났던 이들은 결국 나짱에서 헤어졌다.
統一 후의 남베트남 軍人들
점점 저녁때가 되니 베트남 현지인들이 바다로 몰려들기 시작하여 옷을 입은채로 수영을 하고 젊은 애들은 백사장에서 축구에 열중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거다.
파라솔 밑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왠 사내가 와서 깨운다. 어떤 놈인가 하고 쳐다 보니 얼굴이 생활에 찌든 몰골로 자기 오토바이를 타라고 권한다. 오토바이 운전사 였다.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게 데려다 주겠다면서 나짱을 일주 하잔다. 나는 이미 다 구경을 해서 갈 곳이 없다고 하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금새 얼굴이 밝아지면서 나짱에 한국군이 많았으며 맹호부대, 백마 부대, 십자성, 청룡 부대를 들먹이며 한국군이 용맹스럽게 잘 싸우는 부대라고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한국 사람은 태권도를 잘한다며 신이 나서 떠들어대었다.
조심스럽게 너는 통일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니 자신은 남베트남 군의 하사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는데 통일 후에 북쪽 사람들에게 잡혀 산 속에 들어가 5년간 노역에 참가했는데 5년동안 죽을 고생을 다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풀려나 가까스로 오토바이를 구해 이것으로 사람들을 태워 주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단다.
당시에 군인이 였던 사람들은 등급에 따라 노역과 재교육이 혹독하게 시행되었고 그들은 공공 기관에 취직도 되지 않아 노동과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처지이며 이들의 불만이 보통이 아니였다.
이자가 한때 나와 같은 편에서 싸우던 처지가 아니였던가.
씁쓸한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를 돌려보내고 비취의 카페에 앉아 짧은 남국의 한 여름 밤을 맥주로 달랬다.
내일은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위년에 가는 날.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