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빙계리 얼음골
․ 종 목 경상북도 천연 기념물 제527호
․ 지정일자 2011.01.13
․ 소 유 자 국유 및 사유(신명환 외5인, 김해수)
․ 소 재 지 1.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 70(19,835㎡, 국유)
2.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 69(80,926㎡, 신명환 외5인)
3.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 68(397㎡, 김해수)
영천시 보현산(1124m) 줄기가 서북으로 뻗어 올라 의성군 춘산면에 들어서면 매봉(800m)을 거쳐 북두산(565m)에 이른다. 북두산 서북쪽 산록은 춘산면 골골의 물을 받아 안아 흘러내리는 쌍계천을 만나면서 기이한 절경을 빗었는데 이름하여 의성 빙계리 얼음골이다.
이 골을 얼음골이라 붙인 연유는 더운 여름날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구멍(빙혈-氷穴)이 있고 바위틈마다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바람구멍(풍혈-風穴)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상식을 거스른 이 같은 현상 또한 자연이 하는 일이라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사람들은 자못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신기해 여긴다.
일찍이 군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던 의성 빙계 계곡은 2011년에 국가 지정 천연 기념물이 되면서 ‘의성 빙계리 얼음골’로 거듭 나게 되었다.
문화재청장이 의성 빙계리 얼음골을 천연 기념물로 지정한 사유에 ‘경사면에 쌓인 암괴들(Talus, 애추(崖錐))이 만드는 자연 현상으로, 암괴들 틈에 저장된 찬공기가 여름철에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을 만들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와 오히려 얼음이 얼지 않는 희귀한 자연 현상을 보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교적 평탄하게 흐르던 쌍계천 상류의 물줄기는 의성 빙계리 얼음골 서북쪽 들머리에서부터는 서→남으로 둥글게 반원을 그리다가 이번에는 서→북→서→북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둥글게 사행(蛇行)하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계곡을 베풀어 놓았다.
언젠가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빙계8경을 꼽아 그 아름다움을 기렸는데 얼음구멍(빙혈-氷穴), 바람구멍(풍혈-風穴), 용추(龍湫), 물레방아(수대-水碓), 어진바위(의암-義巖), 의각(義閣), 석탑, 부처막(불정-佛頂)이 그것이다.
제1경 얼음구멍(빙혈-氷穴)
얼음골 가운데 있는 빙계3리, 서원(書院) 마을 뒷산 산기슭에 너덧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크기의 바위굴이 바로 얼음구멍이다. 이 얼음구멍은 입춘(立春)이 지나면 찬 기운이 나오고 한 여름에는 얼음이 얼었다가 입추(立秋)가 지나면 차차 녹아 동지(冬至) 때부터는 훈훈한 바람이 불어나온다. 현재는 빙혈을 보호하는 작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는데, 통로 안 벽에는 태일전 설치에 관한 내력 등을 기록한 돌판이 붙여져 있다.
제2경 바람구멍(풍혈-風穴)
얼음골을 지나는 길가에 흩어져 있는 바위틈이 모두 바람구멍이다. 땅속에 얼마가 쌓여 있을지 모르는 바위덩어리(애추(崖錐)-바위덩어리의 집합체) 틈새를 통해 지하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진 차가운 공기가 밖으로 나오니 그 시원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다. 빙혈 자리에 세운 작은 구조물에 난 계단을 올라가면 얼음골을 대표하는 바람구멍을 볼 수 있다.
제3경 인암(仁巖)
서원마을 뒤 빙산사지5층석탑이 있는 곳은 현재 아담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 한켠에 너비 1.2m, 높이 2.4m가 넘는 큰 바위를 인암이라 한다. 인암은 커다란 느티나무를 가운데 안고 서 있는데, 맑은 날 정오에 햇빛이 바위를 비추면 바위면에 어질 인(仁)자 모양의 그늘이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사람들에게 어질게 살라는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라 여겼다.
제4경 의각(義閣)
임진왜란 때 윤은보(尹殷甫)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청송 주왕산으로 피난하여 들어가 7년 동안 삭망 시 향화를 이어오다가 평란 뒤 서원에 다시 안주시켰다. 그의 가륵한 의사를 기려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빙계서원 옛 터 입구에 윤은보의 의각과 파평 윤씨의 재실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제5경 물레방아(수대-水碓)
예부터 빙계계곡 입구에 아주 큰 물레방아가 있었다. 기계가 없던 그 시절 동네 사람들의 수고를 크게 덜어주었을 물레방아 대신 현재는 볼거리용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지만 빙계 계곡의 정취를 자아내는 데는 여전히 한 목을 하고 있다.
제6경 석탑(石塔)
보물 제327호로 지정된 빙산사지지5층석탑을 말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세워진 이 탑은 빙산사(氷山寺)에 속한 탑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태워진 빙산사 터에 임란 직후 그 자리에 빙계서원이 들어섰다. 인고(忍苦)의 세월을 감당하면서도 석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7경 불정(佛頂)
서원 마을 뒷산, 불정봉(佛頂峰) 꼭대기 가운데 쯤 움푹 파인 곳이 불정이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어느 옛날 부처와 용이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용이 꼬리를 내리쳐 찍힌 자국이라 한다. 불정 아래 산마루에는 조선 초에 세웠던 태일전(太一殿) 터가 남아 있다.
제8경 용추(龍湫)
가음면 현리에서 얼음골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 얼음골물이 공원 오른쪽으로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돌아 나가다가 깍아지른 바위 절벽과 부딪치는 곳에 용추가 있다. 부처와 싸우던 용의 머리가 바위 절벽에 부딪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빙혈에서 산길을 따라 10여분만 오르면 불정 바로 아래에 200여 평 남짓되는 넓은 터가 나온다. 조선 초 도교의 여러 신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태일전 옛터인 것이다.
천제신(天帝神)인 태일(太一)은 아래로는 구궁(九宮)을 맡아 중앙에 황극(皇極)을 세우고 아홉 방위를 순행하는데, 공경하고 순종하면 이륜(彛倫)이 펴지고 태만하여 방치하면 삼정(三正)이 문란해진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에 좌사간(左司諫) 신인손(辛引孫)을 경상도관찰사로 보내 이 곳 빙계리 얼음골 불정 아래 태일전을 세우고 1434년(세종 16년)부터 매년 상원(上元-정월 15일)에 임금이 내린 향(香)으로 초제(醮祭-도교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로부터 45년 후인 1478년(성종 9년)에 성종(재위 1469~1494)은 이곳에 있던 태일전을 충청도 태안군 백화산(白華山)으로 이건(移建)토록 하고 그 이듬해부터는 태안군 백화산의 태일전에서 초제를 모시도록 했다. 이는 최호원(崔灝元, 1431~?)의 상소(上疏)에서 주장한 ‘사십오년 주기 구궁 순이설(四十五年週期九宮循移說)’에 따른 조처였다.
‘사십오년 주기 구궁 순이설’은 아홉 방위를 뜻하는 구궁(九宮)의 변화 원리에 따라 45년 마다 한 번씩 태일전을 옮겨야 한다는 이론이다. 최호원은 문과 출신이나 천문․음양․풍수지리에 밝아 1488년(성종 19년)에 태을력(太乙曆)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성종 때 성리학을 숭배하는 사림 세력이 성장하면서 최호원은 그들로부터 학문이 부정(不正)하다는 탄핵을 받아 고신(告身-관직 임명사령장)이 몰수되고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16세기)에 들어 사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들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모든 종교나 사상을 더욱 탄압하면서 도교․불교․민간 신앙 등은 더욱 더 위축되어갔다.
불정으로 오르는 울창한 숲을 다치지 않고 태일전을 복원할 수 있다면 다양성을 중시하는 미래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도교 문화를 일구는데 일조할 뿐 아리라 빙계리 얼음골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편집회의 때 여러 의견을 반영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에 있는 태일전 부문은 따로 설명하는 것으로 하고 의성 빙계리 얼음골 부문만 본문에 넣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