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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세계’ 여름호 평 情恨의 노래 권 혁 모
1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이매창의 시 한 편이 나를 시조의 길로 들게 하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 가까워 오는 세월 전 무렵, 나는 푸른 제복을 입고 포천군 초성리 38선의 ‘열두 개울’ 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이었다. 공병부대 작전과에 있었던 관계로 신문을 빠트림 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어느 중앙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名妓列傳’을 감명 깊이 읽었던 것이다. 매창은 조선 선조 때의 기녀 신분으로 詩歌文學에 능한 정절의 여인이었다. 그의 묘비는 전라북도 부안에 남아 있어 400여 년의 지난 지금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한 여인의 자취가 남아서 이렇게 뭇사람들의 가슴 깊이 파고들고 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부안’을 떠올리는 첫 번째의 이미지가 바로 이매창이다. 심금을 울리는 情恨의 詩篇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사랑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 신문의 연재는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의 홍랑도 있었고,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에 내어~』를 노래한 조선 시대 최고의 시인이자 명기 황진이의 시와 삶의 이런 일화도 있었다. 황진이 옆집에 사는 한 書生이 진이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되어 상사병을 앓았다고 한다. 이윽고 서생은 병이 심하여 죽게 된다. 장례식 날에는 상여가 진이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진이는 자신이 입었던 치마 저고리를 가지고 와서 관 위에 덮으니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어릴적엔 四書三經을 읽고 詩와 書와 音律에 뛰어났으며, 탁월한 詩才로 文人 碩儒들과 교류하는가 하면, 출중한 용모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이야기가 인기리에 연재되었다. 2002년 6월의 대자연은 초록으로 물들어 갔고, 한반도 남쪽 우리들 삶의 현장은 온통 붉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축구를 통하여 이렇게 하나가 되다보니, 적색에 대한 고정 관념은 이제 기피가 아닌 단결의 상징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그보다 기성 세대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온갖 분장(?)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이해의 바탕으로 돌려놓았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비롯된 온 지구 마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름은 작열하는 태양을 앞세워 저마다의 문을 열게 하였지만, 이 가을이 오면 밖으로 열었던 들뜬 마음의 창문을 조용히 닫아야 하나보다. 보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 많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어야 하리. 야생화 한 다발 꺾어들고 그윽한 향기 속에 잠들어 있을, ‘李梅窓之墓’라고 쓰여진 묘비 앞에 서고 싶다. 행여 바람결에 그녀의 섬섬옥수가 彈奏하는 거문고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2 지금 우리가 창작하고 있는 현대시조는 어디쯤인가? 불과 57편을 남기고 400년 세월을 깊이 잠든 매창은 갈수록 향취가 더하는데, 수백 편을 발표하며 무차별 시집을 묶어내는 우리는, 어쩌면 종합 타이틀을 쟁취하듯 賞에 눈먼 자들의 시는 어디쯤 와 있는가. 진정 그들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초대 시」를 비롯하여 「여름 시단 30인 단시조 특집」과, 「단장 시조」, 「10인 신작 특집」, 「소시집」, 「집중 조명」으로 차려진 「시조세계」 여름호를 새겨 읽으며 참 많은 생각과 함께 갈등을 겪게 한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에서 바라보는 E․A 포우의 “미의 운율적 창조”와 워즈워드의 “넘쳐흐르는 情感의 발로”를, 우리가 창작하고 있는 오늘의 작품들과 자꾸만 비교해 보게 한다. 문득 開花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멎는 순간 사람과 꽃송이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아, 지금 내 生의 정점에 子午線이 지나고 있다. - 고정국의 <正午의 시> 전문 하늘나라 고관대작의 밀실서랍에서 슬쩍해 온 수입산 발모 촉진제를 사람 몰래 뿌리는 봄 경칩 녘 대머리 오름 화색 벌써 푸르다. - 고정국의 <봄비> 전문 고정국의 시 2편은 단단하다. <정오의 시>는 시적 동기가 정감이 아니라 예리한 지성 쪽이다. 그만치 독자는 이 시를 단숨에 읽어 갈 수 없다. 짧은 단수이지만 행과 행 사이를 쉽게 넘지 못한다. 한 행을 읽고 ‘왜?’를 생각해야 하고 또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를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풀려진다. 흔히 어려운(?) 시를 난해시라고 하지만, 풀려지지 않는 시는 난해시가 아닌 것이다. 온전한 문장 구조에서 극단적으로 이탈되었거나, 어휘끼리의 상관 관계가 전혀 없는 해괴한 글은 시이기 전에 문장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 非文으로 쓰여진, 소위 난해한 글이 시의 온전한 질서를 흩트리고 있다. <정오의 시>는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비록 지금은 사이렌이 울리지 않지만, 꽃을 피게 하는 사이렌을 동원하여 자신과 꽃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 또한 생의 한 순간에도 자오선이 지나고 있음을 통하여 엄숙한 삶의 현상을 수긍하게 하는 것이다. <봄비>는 앞의 작품에 비하여 직접적인 이야기로 쉽게 이미지를 엮어갔다. 겨울을 넘긴 제주도의 삭막한 ‘오름’(화산 현상이 만든 지형)을 바라보며, 거기 내리는 비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소중한 봄비였기에 그 비는 하늘 나라의 고관 대작이, 그것도 밀실 서랍에 숨겨 둔 것을 슬쩍해서 빼내어 왔다고 했을까? 또한 그것이 오름이라는 대머리 형상에 뿌려지면, 식물이 자라나서 초록으로 물들기에 수입산 발모 촉진제라 하였다. 고정국의 ‘새롭게 보기’는, 자신이 만나는 즉물적 자연 현상을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않고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고민한다. 그 고민은 기존의 外延을 깨트릴 수 있는 일관된 힘을 가지고 있다. 민병도의 시는 자신의 미술 세계에 더한 제 3의 그림이다. 기실 예술 행위는 자신의 내면을 보다 새롭게 창조하려는 일인 것이다. 詩가 문자 언어를 매개로 한 표현라면 그림은 시각 언어의 표현 행위일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으로서의 내면은 그림의 폭을 넓게 하고, 화가로서의 내면은 결국 시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詩와 畵는 不二의 관계로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잃고 매화꽃 속 빈방 몰래 들어서면 누가 올려놓았나 화로엔 찻물 끓고 주인은 달마중 갔다나 촛불만이 흔들리는데. - 민병도의 <不在> 전문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수한 길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길이 우리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때로는 혼돈된 길에서 방황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길에서 온갖 만남의 이야기가 창조되기도 할 것이다. 민병도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잃고,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텅빈 화실(매화꽃 속)에 들어서면 난로엔 누가 다녀간 것처럼 찻물이 끓고 있다고 한다. 이 작은 공간의 참 주인은 누구일지? 어쩌면 현실 앞에서 촛불만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부재는 존재의 부정이다. 그러나 부재의 강조는 존재를 위한 반증이다. 결국 찻물이 끓고 있는 화실은 不在(孤獨)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존재해 있다는 긍정의 공간을 만들려는 작업인 것이다. 민병도는 詩와 畵의 양쪽 길에서, 적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위하여 끝없는 방황(?)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달빛 만 섬 퍼다가 곡간을 가득 채운다 채워도 채워 넣어도 줄지 않는 그리움! 하르르 벚꽃이 지면 그 달빛 도로 쏟는다. - 민병도의 <그리움> 전문 <그리움>에는 情恨이 담겨 있다.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조선조 기녀들의 시가 대부분 정한이었다면, 민병도는 그 대상을 암묵으로 둔 가운데 그리움이 베어나는 달빛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민병도의 달빛은 우리들 마음의 양식이다. 쏟아지는 달빛을 곡간에 가득 채울 때의 기쁨은 얼마나 크랴? 그 그리움은 가이없기에 달빛을 퍼도 퍼도 줄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벚꽃이 지는 봄이 가면, 곡간에 가득 가득 채워진 달빛이라는 그리움을 되돌리는 체념을 순순이 받아들이고 있다. 백이운은 <어린 성자의 별>에서 다함없는 情恨의 이야기가 안타깝게 하고 있다. 원래 이 세상 삶의 이치는 극과 극의 연장선인지, 지극히 고운 이는 언제나 이승 사람이 아니었고, 佳人 薄命이 되었던가? 인간 승리의 드라마 이면에는 항상 피눈물 나는 쓰라림이 있었고,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만날 수 없는 공간에 있었던가? 지상에 잠시잠깐 다니러 왔던 어린 성자 늦잠 깬 꽃잎들에 물 주러 돌아갔나 저 멀리 작은 별에서 등이 반짝 켜진다. - 백이운의 <어린 성자의 별> 전문 어린 성자는 백이운과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아이는 백이운에게 어린 성자로 여겨질 만치 성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저승에서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성자는 “늦잠 깬 꽃잎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성자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리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모습이 눈물겹다. 끝내 어린 성자는 먼 하늘 공간에서 작은 별의 등불이 되어 반짝인다고 하였다. 그렇다.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성스러운 것을 지구 마을 사람들은 별이라고 하였던가? 지난 겨울 예루살렘의 유태인 대학살 추모관인 ‘홀로코스트’에서, 눈 푸른 갈색 머릿결의 유태인 어린이들이 무수히 학살된 어린이 추모관은 온통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뿐이었다. 칠흑 어둠 속 별만 떠있는 공간에서 이미 넋이 되어 떠도는 어린이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있었다. 백이운의 어린 성자는 사실 지상에 잠시 다니러 온 것이 아니었고, 늦잠 깬 꽃잎들에게 물 주러 돌아간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 저 먼 곳의 작은 별빛과 전혀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 아이의 행적을 새롭게 설정하며, 성자로 만들어 반짝이는 별에 관련지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아름답게 분칠하려는 몸부림이며,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진정시키게 하는 詩의 역할인 것이다. 부처님은 내 밥이다 제일 만만하니까 어머니도 내 밥이다 평생 만만하니까 요즈음 두 밥이 부쩍 相通하는 눈치다. - 백이운의 <밥> 전문 ‘밥’은 생명의 근원이자 사랑의 징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의 이미지는 그렇게 밝은 쪽이 아니다. 백이운은 부처님도 어머니도 모두 내 밥이라 하였으니, 이렇게 무엄할 수 있는가? 흔히 식당 종사자와 같이 밥과 맺어진 관계는 고상(?)한 일면보다는 그렇지 않는 쪽으로 가볍게 넘기려는 성향이 있다. 앞의 시 <밥>도 언뜻 보면 「부처님=내 밥, 어머니=내 밥, 밥=만만한 것, 만만한 것 두 가지=상통」이런 등식을 만든다는 것이 백이운의 그 다운 모습이자 역량인 것이다. 백이운의 <밥>은 통상적인 밥이 아닌 사랑의 표상로써의 밥, 적어도 자신을 있게 한 생명의 근원으로의 밥에 다가가려 한다. 佛性을 향한 밥과 육체적 근원을 향한 밥!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는 버릴 수 없는 숙명의 축에 놓인 셈이다. 도시락에 담던 마음 그마저 사치던가 직장 밖 눈에 드는 이팝꽃 조팝꽃들 귀뚜리 울음 사이로 초승달이 혼자 섧다. - 신후식의 <설움> 전문 백이운의 ‘밥’을 ‘사랑의 밥’이라고 한다면 신후식의 ‘밥’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서러운 밥’이다. 신후식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밥 굶던 설움을 회상한다. 한국 전쟁의 상흔을 남긴 기아는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어려운 고비였다. 지금의 기준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때 그 시절의 도시락은 사랑의 메신저였다. 밥을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은 굶으며 도시락을 몰래 전하였던 미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 중식을 건넜던 그 시절에는 꽁보리밥이든, 무슨 밥이든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치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춘궁기에 하필이면 밥을 생각나게 하는 이팝꽃․조팝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니, 시인 자신은 귀뚜리로 울고 아직 가득 차 오를 날이 많고 많은 초승달인양 슬프다고 하였다. 한 사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돌 박힌 시골길의 초가를 배경으로 분꽃이 만발하였다. 꽃은 작은 나팔 모양이었고, 까만 씨앗은 16mm 전쟁 영화에서 보았던 수류탄 같이 생겼는데, 화장 분을 만든다며 씨를 따서 모았던 기억이 난다. 노인정 앞 화단에서 분꽃을 보고 있다. 꽃이 진 자리마다 토끼 똥 같은 씨들이 까맣게 모여 앉아서 찬바람 밀고 있다. - 이한성의 <분꽃을 보며> 전문 이한성은 <분꽃을 보며>에서 노인정 앞 화단의 까만 분꽃 씨앗을 바라보며 노인들을 떠올리고 있다. 사람도 인생의 꽃이 진 자리마다 토끼 똥 같은 씨들이 맺히게 되는데, 이런 까만 씨앗(노인)끼리 모여 앉아서 세월이라는 찬바람을 밀어보내며 餘生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이한성은 분꽃 씨앗을 소재로 한 노인정의 모습을 외견상 조금의 감정 이입이 없이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다. 무리한 관계의 설정은 의미의 단절을 가져오거나 非文을 만드는 모순을 범할 우려가 있지만, 이한성은 「꽃 진 자리 → 토끼똥 같은 씨 → 모여 앉아서 → 찬바람을 밀어낸다」는 연결 고리를 노인정 사람들에게 일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시종 분꽃 씨앗을 이야기하여도 끝에는 쓸쓸한 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무리 없는 대비는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였으며, 이러한 작품을 건강한 시라고 하여 할 것이다. A를 이야기하여도 A가 아닌 B가 되어 그만치 시의 깊이를 더하며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무엇이 뼈에 사무쳐 이 땅은 붉게 우는가. 내 감성의 실핏줄에 잠시 스치고 간 끊일 듯 느낌만 남은 아, 한줄기 바람. - 조주환의 <꽃> 전문 조주환은 <꽃>에서 뼈에 사무친 만남(사랑)이 있었기에, 붉게 타는 빛을 거느리며 울고 있었다. 자신의 감성이 흐르는 실핏줄에 잠시 닿았다 간 그 꽃이었기에 결국은 한 줄기 바람이 되었던가? 그런 사랑이라든가, 추억, 감성, 바람 등의 이야기를 시조 정형의 구조로 노래하였다. 句와 章, 章과 章의 적절한 생략에서 오는 긴장 관계, 그리고 ‘꽃’에게 새롭게 부여한 이미지는 그만치 詩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굳은 담 헐어내고 속 장막도 헐어내고 머리속 한가득히 들어앉은 홍보석을 아뿔사, 손대지 말걸 가슴 허물지 말걸. - 임금자의 <석류를 쪼개며> 전문 임금자의 <석류를 쪼개며>는 숨김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지닌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다 벗기는 것이며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열어야 하고 또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굳은 담과 장막으로 가려진 곳에, 기억의 뇌리에 가득 찰 홍보석을 감추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일까? 그러나 이러한 담과 장막을 헐어 비밀의 세상 밖으로 나온 홍보석은 이제 보석이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사물의 노출이 아닌, 신비의 영역에 쌓여 있을 때임을 석류를 쪼개며 생각해 낸 것이다. 3 시조는 그 한 편에서 완결미를 담을 수 있는 단시조가 근본이다. 그러나 시대의 복잡 다단한 현상과 함께 시조 또한 필연적으로 길어질 수밖에 없다. 연시조로 이어진다는 것은, 수가 거듭되기 위한 이야기 전개의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에 의한 시적 영역의 확보가 없는 수의 늘임은 시조 정형의 아름다움을 감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무한으로 길어지는 연시조의 형식을 취함은 독자로부터의 외면을 초래한다. 그것은 독자의 책임이 아니라, 다분히 시인 자신의 문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설시조만 하여도 그렇다. 사설시조는 길이(분량)로 보아 장시조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자유로운 형식을 허락하되, 초․중․종장 중 어느 한 장이 임의로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사설시조의 외형이 온당하다 하여도, 소재가 복고적으로 진부하다는데 있다. 왜 오늘을 살고 있는 현실에서 수십 년 되돌아간 시점을 끄집어내어 현실감(현장감)을 상실하게 하였는가가 관건이다. 사설시조가 풍자적․시사적․해학적인 특징을 갖는다 하여도, 가락(창)의 요소가 배재된 순수 문학으로서의 우선 기본 요건은 문학성 확보에 있는 것이다. 시조는 시적 동기와 소재 그리고 의미가 무한으로 열려 있는 자유시와 비교 우위의 차원에서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가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고적인 소재와 풍자적․우화적․童的인 발상의 언어만으로는 사설시조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창작의 오류는 ‘왜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으로부터, 단숨에 파악되는 사설시조의 진부한 어휘들이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최근 발표되는 일련의 작품 군을 대하며, 보다 큰 의미에서 시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현대의 사설시조는 시조이기 전에 詩가 되어야 한다. 사설시조도 시에 포함되며, 건강한 시는 반드시 읽혀진다. 김소월의 시 ‘못잊어’ 와 ‘동백아가씨’ 풍의 가요로는 이제 너무 진부하다. 강인순의 <봄빛>은 누구나 한 번쯤 빠져도 좋을 황홀경이다. 대자연은 철마다 形形色色의 그림으로 다가와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우리는 그 속에 하나가 되는 것! 봄은 개나리 가지에 노란 물감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그 개나리꽃에 던진 시선에 자신도 물들어 간다. 이런 봄이 개인전을 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물감이 마르지 않는 수채화 캔버스에 바람이 불면 어떻게 될까? 그림 물감끼리 뒤섞이게 하면 색들은 일제히 군무를 하듯 어우러지게 되는데, 봄이 마치 그와 같다고 한다. 강인순의 봄은 노란 물감을 피워냈고, 마음까지 물들게 하여 개인전을 열고 있다. 독자까지도 대자연의 색깔이 바람결에 아롱진 절묘한 군무 속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봄이 금방 피워낸 개나리 노란 물감 슬쩍 곁눈질의 마음까지 물드는 날 오늘은 어느 봄보다 눈부신 個人展. 붓끝에 묻은 물감 마르지 않은 오후 바람 불어 아름다운 세상 한번쯤 휘저으면 어쩌랴 저 색채의 群舞 말없는 황홀경. - 강인순의 <봄빛> 전문 강인순의 <봄빛>이 섬세한 정물화를 대하는 관객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장영춘의 <베란다의 아침>에는 대자연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역동성이 있다. 장영춘의 아침 풍경은 가시적인 빛을 걸러내는 사진이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지는 사물들에 일제히 생명을 불어넣어 재배열하고 있다. 詩는 可視的인 物象과 微視的인 心象을 재배열하는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 한다면,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일 것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은 아름다운 머릿결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오름’은 천연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도심은 낮은 지형이기에 오름보다 늦게 밝아오는 열대야를 지나야 한다. 지쳐서 늦게 눈뜨고 일어나 커튼을 열면 싸- 하게 박하 냄새가 풍길 듯하다고 한다. 땀띠 나는 짧은 밤을 유도화 반점에 비유하였고, 그 밤을 씻은 나도풍란의 떡잎 위에 윤기나는 신세대 아침을 맞이한다. 길 건너 수목은 조찬 모임을 마치고, 산소로 스미는 평화와 아침 찻잔 위에 상큼한 레몬 즙을 떨군다고 한다. 장영춘의 시를 바라보는 안목은 예리하다 못해 ‘사물을 마음껏 주무른다’는 표현이 더 온당할 것 같다. 아침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자리바꿈을 통한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부여함은 신선한 감동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베란다의 아침에 포함되기도 하고, 밖에서 그 아침을 원격 조종하고 있기도 하다. 천연 샴푸로 머리 감은 오름들이 다가선다. 열대야 뒤척이다 늦게 눈 뜬 건물 사이 커튼을 걷어올리며 박하 냄새 풍기는, 유도화 반점 같은 짧은 밤의 땀띠를 씻고 나도풍란 떡잎 위에 윤기 나는 신세대 아침 연초록 가시 거리에 산 이마가 빛난다. 길 건너 수목들 조찬 모임이 끝나고 일상의 여백으로 산소처럼 스미는 평화 햇살이 내 찻잔 위에다 레몬 즙을 떨군다. - 장영춘의 <베란다의 아침> 전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들라면 누구든 ‘꽃’이라 할 것이다. 花朝月夕은 가이없는 산천 초목에 긷든 평화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흔히 꽃을 비유하여 아름다움과 봄과 젊음을 노래하거나, 꽃을 선사하여 희비를 나눈다. 인간의 손길이 피워낸 假花에서는 생명의 신비감을 발견할 수 없다. 꽃은 이 땅에 생명을 있게 한 근원인 식물의 생식기관으로, 수정을 위하여 곤충을 불러모은다. 인간은 꽃이 보내는 빛 가운데 일곱 가지만 볼 수 있는 원추 세포가 망막이라는 곳에 분포되어 있으나, 사실 꽃은 그 종류마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빛을 자연을 향해 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곤충을 유인하기 위한 온갖 화학물질을 발산한다. 그 중 일부는 사람을 안정시키는 등 치료 행위도 한다. 꽃은 대자연의 걸작품으로 스스로 다양한 舞蹈를 펼쳐 보인다. 꽃 속에는 이런 대자연의 출발 신호가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이 만든 어떤 언어로도 풀 수 없는 그들만의 언약(부호)이 숨어 있다. 정광영의 <꽃>은 허무와 신비 사이를 윤회하는 가운데 ‘환생’하고 있다. 서역(西域) 어느 산중 노승의 결가부좌 백일 안 먹고 안 자고 용맹 정진하는 사이 상념은 다 빠져나가고 툭! 남은 고개가 떨어지다. 뜰엔 앞다투어 눈부시게 꽃이 핀다. 빨간 핏방울 뚝뚝 듣는 꽃이 핀다. 귀대면 막 터져 나온 아기 울음이 흥건하다. - 정광영의 <환생> 전문 정광영은 집 마당의 꽃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보며 <환생>이라는 작품을 썼나 보다. 지는 꽃송이를 보며 서역 어느 산중에서 결가부좌한 老僧을 떠올린다. 그 노승은 백일동안 열심히 苦行精進을 한다. 그러나 노승을 닮은 꽃은 화두를 끝내기도 전에 下山하고마는 아픔을 맞는다고 한다. 이어, 서로 다투어 눈부시게 피는 꽃, 그 가운데 빨간 핏방울 같은 꽃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귀여운 신생아의 울음으로 피는 꽃도 있다. 정광영의 꽃은 수행을 중단한(?) 노승의 허무였고, 새 생명의 핏방울을 담아내는 신생아의 환생이기도 하였다. 단번에 이해가 어려운 작품을 대할 때가 있다. 이 작품은 ‘뭘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어 갈수록 더욱 참신한 비유를 만나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것 마냥 반갑다. 그러나 오영희는 일상 언어에 의한 쉬운 이야기로 心琴을 울린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좋을 차분한 작품이다. 시는 허구가 아닌 진실이기에, 哀調를 띤 오영희의 <장독 생각>은 가슴에 잔잔한 물결을 얹는 듯 하다. 이제 친정 어머니가 되어 딸에게 ‘냉이국 끓여 먹으라’며 된장을 퍼담아 보내고 나서, 다시 자신의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겹다. 그것은 바로 첫살림 날 때 친정 어머니가 골라 주신 장독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도 딸이 女僧으로 출가하였는지? 속세를 멀리한 사찰에서 수행하는 딸을 먼발치에서 보고 온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해마다 장 담글 때 어머니처럼 그리운 존재가 있다면, 여승으로 출가한 딸인지? 오영희는 작품에서 어머니와 딸을 번갈아 그리워한다. 추억과 정이 베인 장독을 회상하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자식을 간절히 생각나게 한다. 냉이국을 끓여서 아이들 먹이라고 된장 가득 퍼담아 딸에게 보낸 아침 첫 살림 친정 엄니가 골라 주신 장독 생각. 아파트 입주 통에 흥국사로 출가한 너 절집 마당서 수행하는 걸 먼 빛으로 보고 왔다. 정월 장 담글 때마다 엄니처럼 그리워라. - 오영희의 <장독 생각> 전문 이즈음 시조를 포함한 시인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어찌된 셈인가? 韻을 모르거나 문장이 아니 되는 글을 시(시조)라며 발표하는 이들이 많다. 韻文이라고 볼 수 없는 글을 작품이라며 발표하는 것이다. 추천은 마음만 먹으면, 혹은 해당 출판사에 기여만 한다면 쉬이 이루어지는 작금이기에 오늘의 문단사가 슬프기만 하다. 이러한 싯점에서 나는 시조를 대할 때, 도구에 불과한 3장 6구에 얽메어 그 단어와 문장을 공중 분해하여 ‘시조이다’, ‘아니다’를 논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3장 6구라는 작은 돌의 구조를 이리 저리 굴리며 다듬고 있는 사이에 큰 산이 무너져 내리는 愚를 범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詩의 완성도’에 있는 것이다. 또한 시조는 詩(志)와 歌(韻)의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하므로 歌의 요소가 덜한 자유시보다는 분명히 비교 우위에 있어야 한다. 이제 잡지와 동인지를 포함한 시집의 홍수 속에서 만나는 작품 가운데에서 남을 수 있는 시조는 과연 얼마나 될까? 30년 전 신문에서 읽었던 妓女들의 시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내 앞에서 향기로운 옷고름 풀고 있다. 구중중한 비의 계절에, 참 무더운 생각으로 ‘시조세계’ 여름호를 새겨 읽었다. 시조를 향한 반가움과 서글픔이 교차한다. 김정숙의 <바람 부는 날은>을 비롯하여 서우승의 <별이 되어>, 신필영의 <풍경 소리>, 원용문의 <겨울 들판>, 이은방의 <山寺 안부>, 조근호의 <달빛 밟기 79>, 김종의 <섬> 그리고 정용국의 <別辭 1>를 다시 한 번 펼쳐 보이지 못하여 아쉽다. 하늘에서 샛노란 쟁반이 부서져 내리는 용계동 은행나무 밑에 서서 나도 그렇게 물들고 싶다. 이 가을에는…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