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시대의 국문 사용
1894년 갑오경장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을 단행하는 가운데, 대한제국 정부는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으로 바꾸었다. 450년 만에 언문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 칙령 제14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적 조처도 규정해 두었다. 1883년 1
월 ≪한성주보 漢城周報≫가 이미 그러한 것이었지만, 1894년 12월의 이른바〈홍범(洪範) 14조〉라 불리는〈종묘서고문 宗廟誓告文>과 〈교육입국조서 敎育立國詔書〉는 이에 근거한 공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결정은 점차 변질되어, 본으로 삼는다던 국문보다 과도적인 국한문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원칙은 지나친 이상이었고, 과도적인 3원제는 현실적인 국한문으로 낙착된 것이다. 1895년 7월 소학교 국어 교과
서인 ≪소학독본≫이 우선 국한문만으로 서술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사실 이 갑작스러운 개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의 ≪관보≫를 예로 들면, 갑오경장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다가 이듬 해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8년 2월 6일 ≪관보≫ 관청사항에서 공문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례(規例)에 어긋난다고 경고하고,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
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부득(不得)함이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이 시대 문자 생활의 혼란상을 말해 주는 동시에, 당초의 칙령 공문식이 사문화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종래의 3원제가 인습적으로 잔존했다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여기서 인습이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으로 구분되던 것을 말한다. 즉 서민층의 국문을 본으로 삼으려던 당초의 이상은 깨지고, 평민 하층의 국한문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 계층과 밀접하나, 근대화와 더불어 갑자기 늘어난 어문 생활의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긴급히 요청된 것은 새로운 질서였다. 이는 바로 일반적인 국어의 근대화, 즉 언문일치(言文一致)였다. 언문일치는 일상 언어로 표현하자는 현실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대에 방향을 잡은 국한문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해(諺解) 법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언문일치가 실현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1910년 7월에 발표한 이광수(李光洙)의 논설은 이미 그 진수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용문(用文)에 대해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으로는 순국문을 쓰고 싶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신지식 수입에 저해가 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문으로 된 말만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방안은 물론 궁책이지만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구두어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것이니 언문일치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한문을 국문으로 엇바꾸는 것과 같은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이 순조롭지 못했던 탓이지만, 당시의 당면 과제는 조선 말기의 혼란 상태에서 하나의 국어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한학자의 힘으로 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어에 관한 학자나 어떠한 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이 있을 리 없었고,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실제로 받침을 할 것인지 연철을 할 것인지, 또는 아래아가 무엇인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특히 아래아의 정체와 처리를 둘러싼 문제는 이 시대 최대의 의문이었다.
당시 이에 대해 이봉운(李鳳雲)·주시경·지석영(池錫永) 등이 표명한 의견도 빗나가고, 지석영이 개인적으로 상소한 〈신정국문 新訂國文〉은 기묘하게 창조된 신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절차를 통과해 1905년 7월 공식적으로 백일하에 공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래아 대신에 괴상한 (ㅣㅡ합음)자를 쓰라는 불가능한 명령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학부에 설치된 것이 국문연구소였다.
1907년 7월 최초의 국어 연구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2년 후인 1909년 12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 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타당한 최종안도 경술국치로 인하여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이능화·주시경·어윤적(魚允迪) 등이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이 시대는 정책 부재의 상태로 종말을 고하였다. 즉, 새나라의 국어를 가다듬어 일정한 규범을 세우려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문 생활의 개선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당초의 이상도 빛을 잃고, 국어 순화를 지향한 국어 운동이 개인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져나갔을 뿐이었다.
188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은 순국문에 띄어쓰기를 해서 3 년이나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졍리≫(1897)도 국어 존중에 기여했지만,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한 주시경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국어 규범의 확립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표의적 형태 표기에 착안하여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중의를 모으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2세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가 독자적으로 초기 국어 문법의 수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저술을 통해 주장
한 새받침이 바로 그것이다.
1909년 ≪국문연구≫에는 새받침 17종 93개가 제시되었으나,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최근 발견된 ≪한글모죽보기≫에 의하면, 그는 1907년 7월부터 학교 이외의 국어강습소에서만도 중등과 300 여 명, 고등과 70 여 명, 하기강습생 100 여 명을 각각배출했고, 1908년 8월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전신)를 창립하여 그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것은 1930년대 위세를 떨친 뒤 주시경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대 16년간의 국어 정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에 치우쳐 순국문을 채택했다가 공식 절차도 없이 전통적인 국한문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신정국문〉의 무모한 채택으로 빚어진 문제를 계기로 국문연구소에서 작성한 정부 차원의〈국문연구의정안〉은 중요한 국어 규범의 확립 방안이었으나 당초부터 서둘렀어야 했던 이 작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국어의 근대화라는 중대한 소임은 유기되고, 현실에 이끌려 한문을 국한문으로 바꾼 것이 그 하나의 실효가 되었을 뿐이다.
한편, 시기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던 국어 순화는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민간의 국어 운동으로 맡겨져 침략에 맞서는 자주 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전개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도 현실을 떠난 이성적 이념 아래 이루어졌던 탓에 일반적인 호응이나 사회적인 확산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 시대적 배경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경장이라는 개혁 자체가 일제의 강요로 강행되었고, 청일전쟁과 한일공수동맹 및 청일강화에 따른 1895년 일제의 내정 간섭, 러일전쟁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 러일강화와 제2차 한일협약에 따른 1905년 일제의 통감정치, 고종 양위와 제3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7년 일제의 차관정치, 경찰권 박탈에 이은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던만큼, 근대적 신생국 대한제국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스스로의 정책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특히, 1905년 통감정치를 시행하면서 일본어를 병용하기 위한 편의로 국한문의 시행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체
적으로 수립했을 것으로 보이는 국문연구소의 의정안도 일제에 의하여 폐기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안정이나 새로운 발전을 뒷받침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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