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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출(供出) 공출(供出) 민족항일기와 미군정시대의 식량 부족에 대한 대책으로, 식량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제하고 농민으로 하여금 할당받은 일정량의 농산물을 정부에 의무적으로 팔도록 한 제도로 민족항일기의 공출제도는 1939년 대흉작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된 가운데 전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1940년부터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제는 1939년〈미곡배급조합통제법〉을 제정하여 미곡의 시장 유통을 금지하고 농민의 자가 소비분 대부분까지도 헐값으로 강제 공출시켰으며, 그 대신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콩이나 피 등의 동물용 사료를 배급하였다. 그 뒤 미곡 공출실적이 저조하자 1943년 〈식량관리법〉을 제정하여 맥류·면화·마류(麻類)·고사리 등에 이르기까지 40여 종에 대하여 공출제도를 확대하고, 강제 공출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무력까지 사용하는 등, 전시군량 확보를 위하여 온갖 강압적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8·15광복으로 한국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종식되었으나, 곧이어 9월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모든 경제정책은 미군정청의 지시에 따라 시행되었다. 군정청은 민족항일기의 전시경제체제를 평시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일차적인 조처로, 1945년 10월 5일 〈일반고시 제1호〉를 발표하여 미곡의 자유시장을 개설하고, 일제하에서 강제적으로 실시되었던 식량공출제도와 배급제를 폐지하였다. 군정청은 미곡의 최고가격을 54㎏당 32원으로 결정하고, 그 수급은 완전히 자유화시켰다. 최고가격만 정해 놓으면 수급은 자동적으로 조절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후 농업생산이 전반적으로 감소한 데 반하여 그 동안 공출제도와 배급제 실시로 굶주려 왔던 농민과 일반 국민들의 반작용으로 식량 수요가 증대하고, 또한 일제에 의하여 징용·징병되어 해외에 나갔던 동포들의 귀환과, 약 80만 명에 이르는 북한동포의 월남으로 식량수요가 급격히 증대함에 따라, 식량수급의 균형이 깨질 위험이 생기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광복 직전의 통화 남발과 재정 적자의 누적으로 인플레가 급격히 진행되고, 물가 등귀를 예상한 미곡상과 지주 등 일부 모리배들이 쌀을 매점매석하여 유통시장의 혼란을 가중시킴에 따라 심각한 식량 부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군정청은 자유시장 개설을 공포한 지 1개월 반이 지난, 같은 해 11월 〈일반고시 제6호〉를 발표하여 미곡 자유시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46년 1월 식량의 유통을 재통제하기 위하여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미곡공출제도와 배급제로의 환원을 단행함과 동시에 그 담당기관으로 ‘중앙식량행정처’를 설치하였다. 〈미곡수집령〉에 따르면, 농가에서는 상주 가족 1인당 백미나 현미 4두5되를 뺀 나머지를 군정청이 결정한 공정가격으로 공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기초하여 1946년 2월부터 전년산 미곡의 수집이 실시되었지만, 이 해의 수집실적은 농민의 비협조와 공출 회피, 그리고 불충분한 법령 등으로 처음 목표의 12.6%를 달성하는 데 그치게 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법령을 수정, 보완하여 공출 농가를 자작농과 소작농으로 구분하고, 소작료의 경우 전량을 소작농이 직접 해당기관에 공출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공출량 할당도 각 농가가 다음해 사용할 종자 및 상주 가족 1인당 6두의 쌀을 남기고 모두 공출하도록 조정되었다. 이와 같이 법령을 개정하고 강권적인 행정력을 발동하여 공출제도를 강화한 결과 1946 년산 미곡의 수집실적은 처음 목표의 82.9%에 달하게 되었다. 다음해 1947년산 미곡의 수집은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의해 제정되어 같은 해 9월 공포된 미곡수집법에 기초해서 실시되었다. 여기에서는 공출 의무자를 경작 규모에 따라 보다 세분하여 규정하고, 공출량 할당 및 수집 업무를 더욱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각 읍·면·이장의 자문기관인 미곡수집대책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공출제도가 정비되고, 조기 공출 농가에 대한 할당량 감면조처가 취해지는 등 군정청의 적극적인 미곡 수집정책에 의하여, 1947년산 미곡에 대해서는 목표의 97.1%에 달하는 높은 수집실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미곡의 공출가격은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높은 수집실적은 오히려 농민의 희생을 강요한 결과를 낳았으며, 소작료 전량을 공출해야 했던 지주로서도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8월 미군정이 종결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전의 미곡수집정책은 재고되었는데, 정부는 당시의 식량 사정을 고려하여 식량 유통에 대한 통제는 강하게 실시하면서도 농민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준 공출제도를 시정하기 위하여 같은 해 10월 〈양곡매입법〉을 제정, 공포하여 정부가 농민으로부터 적당한 가격으로 미곡을 매입하는 식으로 통제방법을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정부가 각 농가에 매도량을 개별적으로 할당하고 농민 할당량을 강제적으로 공출해야 하는 공출제도는 폐지되고, 정부의 양곡매입은 일반 농가의 자유매도를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민족항일기와 미군정시대에 실시된 공출제도는 전쟁 수행 및 전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강제적 수단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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