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자욱한 엉성한 진열품 너머 회벽에 걸린 낡은 흑판 동네 사람들 살림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로 쓴 외상 장부 곽병호…… 곽효환/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목장갑 네 켤레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운 깨알 같은 글씨 가득한 한 뼘들이 전화번호부에도 인명록에도 꼭 하나뿐이던 내 이름. 수십 가구 작은 마을에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으로 존재하네
그것이 허세 없는 내 이름값이려니
천지 사방이 오방색 병풍으로 휘감기는 시월의 오후 세시. 만해마을 백담개울도 단풍물이 흐른다. 설악산에는 단풍나무보다 사람이 더 많이 꽂혀있다. 높은 곳으로 오르고 올라 구름 아래 휘 감긴 단풍의 바다에 자기의 흔적을 새기고 싶은가 보다. 오르는 재주가 시원찮아 세상의 지나간 이야긴지 지금도 진행되는 이야긴지 아는 사람에게 조용히 듣는 자리를 찾아갔다. 다른 시인은 시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 어떨 때 시를 쓰고 싶을까, 어떤 시간에 어떻게 쓰고 시인의 자리를 매김하고 있는지 곽효환 시인에게 말 걸어 보자.
김미애 : 안녕하세요 오늘 주제가 대문자 HISTORY와 소문자 history 인데 무슨 이야기가 이속에 담겨있는지 듣고 싶어요. 곽효환 :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내 얘기를 할 때 제일 잘 하는 것이지요. 라디오 방송이었는데 아마추어 시 프로그램에서 대화의 시간 질문을 받는 시간이었어요. 시인께서는 글 쓰기의 영감이 언제 얻으세요? 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시 영감은 청탁서 받을 때입니다’ 그러니 청취자가 그럼 글은 언제 잘 써집니까? 하길래 또 대답했지요 글은 마감이 다가오면 잘 써집니다 했더니 또 진지하게 글쓰기의 보람은 언제 느끼시나요? 하시네요 해서 또 대답했지요 글 쓰기의 보람은 통장에 원고료 들어왔을 때입니다 라고 농담으로 했지만 결코 농담도 아닙니다. 특히 시쓰기는 일상성이라 늘 상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특별할 게 없는 것이지요. 김미애 : 나와 타자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나는 다르다. 나는 독창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는 것이 문학이 출발점이다 라고 하셨어요? 곽효환 : 북학파였던 홍대용은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곳 이곳이 중심이다. 나는 내가 시작하는 이 모든 것을 담아 시쓰기로 풀어내고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고 했어요. 난 그의 생각에 동감해요. 문학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한시대의 삶과 그 시대 사람들이 지난한 삶을, 시 쓰기로 통해 아픔을 대변하고 나누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대 사람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생각을 바꾸게 되는 엄청난 계기가 된 것 처럼 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김미애 : 선생님은 글 쓰는 순간이 즐거운가요? 곽효환 : 박치기 레슬링선수 김일 얘기를 해봅시다. 그는 박치기를 가장 잘 합니다. 덩치도 작고 그다지 특기도 없는 그에게 스승인 역도산은 ‘그냥 넌 박치기를 해라’라고 했는데 그때에 김일은 ‘내가 박치기를 잘 하는구나’하고 그때부터 박치기 연습을 했답니다. 매 경기 때마다 박치기로 상대선수를 쓰러뜨렸으나 그가 박치기 할 때마다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고 합니다. 이기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박치기를 하였으나 레슬링에서 제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박치기’였다 하는 것처럼 글쟁이에게 제일 힘든 것이 글쓰기가 아니라 글을 쓰므로서 자기 속에 것을 덜어내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김미애 : 현대사회 문학의 특성은 무어라 생각하는지요? 곽효환 : 문학은 고도로 다원화된 고도로 엇갈려 있는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화두이다. 100살까지 살고 싶은 자의 어리석은 대답처럼 문학도 오래 지속해 가고 싶다면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문학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위대하다는 것은 특별하고 새로워야 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뭔가 다른 삶을 살고 뭔가 다른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다르지만 여러분과 소통하고 당신들과 다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싶은 것이다. 문학은 대문자 HISTORY(역사)와 소문자 history(문학) 사이에서 존재한다. 나는 이것에 동의하면서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발전을 낙관하지도 않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공존하며 단단하게 결부되어 변주하는 것이다. 또 그것들은 과거와 현재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학은 HISTORY 대문자 history 소문자 모두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저마다 삶에 따라서 부딪치고 서툴지만 시대와 시대 사람들의 삶이 나의 글쓰기의 중요한 화두이다. HISTORY(역사)와 소문자 history(문학) 그늘이 깊으면 깊을수록 시인의 섬세한 눈길과 사유가 한편의 소설이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투사나 치료사가 아니다 치유사인 것이다. 김미애 :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의 시적 전략이 따로 있으면, 어떤 것인지요? 곽효환 : 나의 시적 전략은 서사와 서정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나의 전략기지이다. 대문자 HISTORY(역사)와 소문자 history(문학) 사이가 나의 시적 거점지이고, 다른 사람에게 말 걸기, 세상에게 말 거는 것이다.
곽효환 시인 약력 - 출생 : 1967년 전주출생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 - 데뷔 : 1996년 세계일보 시 ‘벽화 속의 고양이 3’ 발표 - 경력 :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 시집 : <지도에 없는 집> 2010.8.23 <아버지 그리운 당신> 2009.11.25 <한국근대시의 북방의식>2008.8.20 <인디오 여인> 2006.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