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노대는 그제서야 요 깜찍하게 생긴 소년동자가 기실은 일신에 무공(武功)을 갖춘 무림인(武林人)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일시적으로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게 그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되자 주춤주춤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나서 두 손으로 부어오르는 양뺨을 가린 채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일까 하는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아니, 소, 소공자(少公子)!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만일 소년동자의 손속이 조금이라도 허술해 보여서 도노대가 능히 완력으로 누를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결코 그의 입 속에서 그와 같은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는 나오지 않았었을 것이었다.
도노대는 이미 이러한 생활에 있어서 오랜 경륜을 쌓아온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소년동자의
무공수법이 결코 강호상의 하류잡배들의 것과는 다른 아주 정교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파해내고는 금새 아예
처음부터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엄살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기실 이런 술장사를 해먹는다는 것도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어서 몇 가지 반드시 알아두지 않으면 안되는
금시사항들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실제도 도노대가 생각하고 있었던 금기사항들 가운데에서 강호의 무림고수
들에게는 결코 무례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의 도노대로서는 도저히 눈앞의 그 소년공자가 무엇 때문에 느닷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세차게 따귀를
후려쳤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금방 파악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무림인들의 습성인 만큼 필시 여기에는 어떤 부득이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우선은
엄살부터 떨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다지 세파에 사달리지 않고 대갓집에서 곱게 자라나온 사람이었다면 그와 같이 표정을 쉽게 바꿀 수가
없었겠지만, 이 도노대는 이미 그러한 일에는 이력(履歷)이 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천연덕스럽게 표정을 바꾸고 쉽게 연기할 수가 있었다.
그 소년동자는 일단 도노대를 그와 같이 몇 차례 후려갈긴 후에 왠지 다소 상기된 표정이 되어 조금 전의 그
자리에서 다소 오만(傲慢)한 자세로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은 채로 도노대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윽고 눈살을 가볍게 찌루피며 다소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감히 나에게도 그와 같이 무례하게 대할 수가 있나요?"
(……?)
도노대는 이 순간 내심으로 부지런히 대체 자신이 눈앞의 이 소년동자에게 무슨 죄(罪)를 지었을까 하고 생각을
굴리고 있었던 참이라 즉시 소년동자의 말을 듣고는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소년동자는 조금 전에 도노대가 그 서생을 향해 무례하게 대했던 것을 두고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강호상에는 비록 많지는 않으나 이렇게 남의 일에 간섭을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인지라 도노대는 비록
몇 대 얻어맞은 것이 분해서 속으로 빌어먹을! 하고 부르짖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데에서
약간의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第 二 章. 기이한 서생 화검운(花劍雲)
도노대는 한 순간에 눈앞의 소년동자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자 즉시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소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소공자 나으리께서는 틀림이 없는 소인의 귀하신 손님이지요. 소인이 감히 무례하게
대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요?"
도노대의 그와 같은 말에 소년공자는 왠지 다시금 안색을 살짝 붉히는 듯하더니 이윽고 재차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흥! 당신은 결국에는 약한 자들에게만은 강한 척하고 강한 자에게는 슬슬 아부나 하는 못된 작자였군 그래. 흥!
흥! 내가 당신과 같은 사람을 그냥 둘 줄 아는가?"
소년동자는 생각과는 달리 몹시 분개한 듯한 표정이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두 팔을 걷어부치고 도노대를 향해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어디선가 다음과 같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용아(龍兒)! 너는 비록 겉으로는 그와 같이 말하고 있지만 기실은 감히 그 사람을 해칠 수가 없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저 코웃음만 치고 직접 나서서 좀더 매운 맛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지?"
지금 이 순간에는 이 주막의 내부가 매우 조용해져 있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들려온 그 여자아이의 음성은 아주
분명하게 들려왔다.
도노대는 내심으로 약간 궁지에 몰려서 끙끙대고 있다가 무의식중에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다가 이윽고 안색이 그야말로 거뭇하게 변하고 말았다.
방금 전에 그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일신에 화려한 연홍색의 비단 장삼을 걸치고 있는 열두 살 가량의 아주
예쁘게 생긴 계집아이였는데, 그녀는 언제 안으로 들어왔는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쪽을 향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 도노대가 소년동자에게 당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주루의 안으로 들어와서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린 모양이었다.
그 계집아이는 그렇게 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소년동자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틀림없이 그녀가 방금 전에
말한 용아라는 호칭은 바로 눈앞의 이 소년동자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동자는 일순 그 계집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안색부터 붉어지는 것이었다.
도노대는 다음 순간에 그 계집아이와 이 소년동자의 얼굴 생김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두 사람이 같은 일행이며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실 가장 놀랍고 어리벙벙한 사실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그 계집아이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조금 전에
도노대에게 축객령을 받았던 그 서생과 한 탁자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자리이며, 게다가 비록 시선을 분명하게
보내지는 않고 있지만 그 계집아이의 시선은 은연중에 그 서생을 의식하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다는 현실에 있는
것이었다.
도노대는 아직 자신의 눈이 틀림이 없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윽고 그러한 사실을 파악하게 되자 이내 자신의
안목을 불신(不信)하게 되었으며, 절로 아득해져 오는 의식 속에서 대체 지금의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고 내심 중얼중얼하게 되었다.
도노대는 원래 그 서생을 전혀 별볼일없는 녀석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나 실로 이러한 어린 소년 소녀(少年少女)
와 인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예상했던 대로의 별볼일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년동자는 그 어린 계집아이의 말을 듣고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도노대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이미 말했듯이 당신가 같은 사람은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서 당신도 나와 대적할 준비를 하도록
해요!"
도노대는 이미 이 눈앞의 무공을 터득하고 있는 소년동자와 대적을 한다는 것이 천만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매우 황당(荒唐)한 듯이 멍한 표정을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제까지는 다소 어리숙한 태도를 유지하며 잠자코 앉아 있던 예의 그 서생이 돌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그 어린 계집아이를 향해 문득 이렇게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아닌가!
"봉아(鳳兒)! 세상의 사건이라는 것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자꾸만 일을 더욱 귀찮게
만들려고 하느냐? 용아에게 너무 충동질하지 말아라."
그저 단순히 아는 사이로만 짐작하고 있었던 도노대 등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년동자와 어린 계집아이를 향한
서생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는 실로 더욱 의외(意外)의 것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그 서생에 대해서 좀더 주의깊게 바라보려고 하는 다음 순간에 느닷없이 한쪽 구석에서 짧고
아름다운 여자들의 경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느닷없이 경탄성을 터뜨린 사람들은 바로 얼마 전부터 도노대가 은근히 그 자태를 훔쳐보고 있었던 그 일단의
소녀들이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 서생의 말을 듣자마자 그 어린 계집아이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신형을 날려서
마치 팔랑개비처럼 공중에서 돌면서 허공을 지나 도노대의 앞에 서 있는 소년동자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섰기
때문에 저마다 커다란 감탄성을 터뜨렸던 것이었다.
비록 강호상에는 약간의 잔재주를 배워서 그와 같은 공중돌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러나
의자 위에 앉아 있던 자세에서 그대로 깨끗하게 신형(身形)을 뽑아올려 유려(流麗)한 동작(動作)으로 허공을 날아
간 모습 등은 그러한 방문좌도(傍門左道)의 수법(手法)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정통적(正統的)인 명가(名家)의
경공술(輕空術)의 면모(面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감탄성을 자아낼 만했다.
그 어린 계집아이는 나이가 이제 불과 열두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는데도 벌써부터 실로 그와 같은
절기(絶技)를 완벽(完璧)하게 구사할 수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문(奇聞)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지금 구석진 자리에 둘러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경탄성을 터뜨린 그 다섯 명의 소녀들은 비단 외모(外貌)만
특출나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들 가운데에는 더러 병장기(兵仗器)들을 휴대하고 있는 듯했고, 게다가
그녀들의 눈빛이 대부분이 매우 발랄하고 예리(銳利)하게 빛나곤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강호상의
여인들이 분명해 보였다.
소년동자의 옆에 사뿐히 내려선 그 어린 계집아이는 일단 경탄성을 발했던 그 소녀들의 자리를 향해 한 차례
돌아본 연후에, 이윽고 다시 고개를 전면으로 돌려 소년동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도노대를 향해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이 감히 우리의 화 상공(花相公)님께 그와 같은 망발을 하였으니 그 대가로 설사 일백 번을 죽게 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 우리의 화 상공님께서는 마음이 매우 너그러우셔서 구태여 당신과 같은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하시니 우리는 당신에게 손을 쓰지 않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다시 묻겠는데, 당신은
설마하니 아직도 우리 화 상공님을 괄시(恝視)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그 어린 계집아이의 음성은 아주 맑고 또렷하였고, 게다가 그 말의 내용이 매우 논리정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가슴이 일시에 후련해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게 되었다.
이때 도노대는 내심으로 매우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설사 그 어린 계집아이가 조금 전에 그와 같은
놀라운 경공술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도 공손히 따라야 할 입장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그
두 명의 소년 소녀가 마치 어린 용과 봉황(鳳凰)과도 같은 뛰어난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히 조금도
태만하거나 주저할 수가 없었다.
도노대는 즉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 넙죽하니 엎드려서 그 서생과 눈앞의 두 명의 소년 소녀를
향해 쉴새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죽을 죄를 지은 소인(小人)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만도 커다란 은혜(恩惠)이온데, 소인이
어찌 감히 다시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그저 여러분들께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예."
조금 전에 서생을 향해 거만하기 짝이 없었던 도노대의 태도는 지금 그야말로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몸소 나서서 책망을 하려고 했던 그 어린 계집아이도 그러한 광경을 보자 마치 더러운 물건을 대한 듯하여 다소
눈살을 찌푸렸고, 소년동자는 옆에 서 있다가 느닷없이 앞으로 다가들어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도노대의 목덜미를
움켜잡아서 주방이 있는 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서 음식이나 준비해 오도록 해요!"
이 도노대의 체구는 그래도 제법 커다란 편이었는데, 그 소년동자는 그의 몸을 마치 짚단을 잡아서 던지듯이 전혀
힘을 쓰는 모습이 아니었고, 도노대의 몸뚱이는 엉겁결에 허둥거리며 주방으로 날아가서 쿵! 하고 떨어졌으나,
다행히도 심하게 다치지 않았는데 금새 몸을 일으켜서 급히 음식들을 장만하기 위해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주방에는 주방장을 포함한 요리사들이 두 명 정도 있었는데, 느닷없이 주인이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그들마저도 일시 경황이 없는 듯해 보였다.
어린 계집아이는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안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소년동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용아, 다른 것은 몰라도 너의 그 던지는 수법은 제법 쓸 만해 보이는구나. 전설(傳說)에 의하면 석가척상공
(釋迦擲象功)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너의 그 던지는 수법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용아라는 소년동자는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안면에 가벼운 웃음을 떠올리며 그녀을 얼굴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옛날에 석가모니(釋迦牟尼)는 태자였을 당시 길을 막아서는 코끼리를 잡아서 집어던졌는데
그 코끼리가 하늘로 높이 올라가서 사흘 후에야 땅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석가모니가 아닌 용아일
뿐이고, 게다가 내가 집어던진 것은 코끼리가 아니라 그저 한 마리의 빌빌거리는 잡종개일 뿐이었으니
석가척상공이 아니라 차라리 용아척견공(龍兒擲犬功)이라고 해야 할 것이야."
그들의 대화 내용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법 의미심장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용아와 봉아라는 그 어린 계집아이는 일단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나서 이윽고 신형을 돌려 천천히 서생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악 그들이 서생의 앞자리에 이르러 그 탁자 앞에 차례로 자리하고 앉으려고 했을 때였다.
느닷없이 그들의 뒤쪽에서 가벼운 기척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한 줄기의 맑고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와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이 아닌가!
"잠깐! 너희들은 대체 어디서 온 아이들이이지? 우리는 서로 통성명이나 나누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용아와 봉아는 즉시 의자에 앉으려던 몸을 다시 세우고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거기에는 한 명의 아리따운
화의소녀(華衣少女)가 조용한 신색(身色)으로 서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는 바로 조금 전에 경탄성을 발했던 그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던 다섯 명의
미소녀(美少女)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용아는 그것을 보고 잠시 망설였으나 봉아는 그 화의소녀의 등뒤에 붉은 수실이 일렁거리는 한 자루의 장검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게다가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홀릴 것 같은 눈웃음이 감도는
것을 보고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렇게 불쑥 대꾸했다.
"아이들이라고요? 그럼 당신들은 특별한 어른들인가요? 흥! 얼굴이 그렇게 반반하니 남자들을 꽤나 홀렸겠군요?"
(……?)
그 화의소녀는 기실 순수한 호의(好意)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말을 걸었던 것일 뿐이었는데, 느닷없이
봉아의 다소 차가운 듯한 욕설이 섞인 대꾸를 듣고는 일시 멍한 표정이 되어 크게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는 설마하니 자신이 봉아에게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될 줄은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야 새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를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의소녀와 맞은편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던 예의 그 서생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봉아야, 상대방은 순수한 호의에서 서로 통성명을 나누자고 하는 것인데, 네가 그와 같은 말을 해서야 쓰겠느냐?
어서 빨리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서생의 그 말은 비록 느긋했고 조금도 화난 기색이 없어 보였으나, 정작 듣고 있는 봉아에게는 매우 준엄한 질책이
되는 모양이었다.
봉아는 그 소리를 듣게 되자 금새 안색이 다소 붉어지더니 즉시 정색을 하고 눈앞의 화의소녀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봉아(鳳兒)라고 해요. 제가 일시적으로 언니가 너무나도 예쁜 나무지 질투를 하여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래요."
그 화의소녀는 이 순간에 다소 망연한 신색이 되어서 대체 어째서 자신이 그와 같은 욕설을 듣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봉아로부터 자신이 너무나도 예뻐서 질투심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절로 얼굴을
붉히게 되어 말했다.
"예쁜 동생, 내가 너무 잘생겼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말이야. 보아하니 동생이 나보다 훨씬 예쁜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아까 했던 아이들이라는 말은 생각없이 한 말이었지만 취소할께. 앞으로는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겠어, 봉아 동생!"
봉아는 내심으로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분이었으나 상대인 화의소녀가 오히려 자신이 더욱 예쁘다고 말핸주자 그만
그 불만스러운 기분이 금새 풀려지게 되었고, 또한 상대방에 대한 선입관도 바뀌어 안색이 훤하게 변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대체 언니의 이름은 뭐죠?"
화의소녀는 봉아가 아주 예쁜 얼굴로 총명해 보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관심있게 물어 오는 것을 보고 다시 몹시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그녀의 한쪽 손을 잡고서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의 이름은 악산산(岳珊珊)이라고 해. 혹시 너의 친구들의 이름에 대해서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니?'
화의소녀는 처음에는 그저 귀엽다는 생각에 절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봉아가 너무나도 깜찍스러워
보여서 그들과 반드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봉아는 이미 마음을 돌린 뒤여서 친근하게 나오는화의소녀 악산산이 전혀 싫지가 않아서 웃으며 남은 한 손으로
가리키며 즉시 대답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아요. 음, 이 애는 바로 용아(龍兒)이고, 그리고 여기에 계시는 이분은 바로 저희들의
주인(主人)님이신 화 상공님이세요."
용아는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막상 봉아가 손짓으로 가리키며 소개하자 왠지
금새 안색을 가볍게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기실 지금 봉아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이미 악산산도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들이어서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악산산은 쉽게 얼굴을 붉히곤 하는 용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이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서생이 자신들의
주인님이라는 봉아의 말을 듣고는 다소 놀란 표정이 되어 생각했다.
(나는 그저 아는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이들이 주종관계(主從關係)라는 말인가? 정말로
이와 같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 이 서생의 신분은 어떤 것일까?)
그 서생은 원래 겉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남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계속해서 드러나는 기이한 사실들로 말미암아 이제는 화의소녀 악산산도 상당한 관심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악산산은 생각을 하느라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서생을 향해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그 서생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대하자 안면 가득히 미소를 떠올리며 정중하게 이렇게 입을 열어 인사하는 것이었다.
악산산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의 말소리를 듣고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일순 무심결에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가볍게 놀라게 되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게만 보이던 그의 시선이 이제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니 기이하게 깊고
부드러우며 고요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러한 시선은 상대에게 문득 한없이 시원스러운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악산산은 그때까지 봉아의 손을
잡고 있다가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즉시 슬그머니 그 손을 빼고 안색을 은근히 붉히며 대꾸했다.
"원래 화공자(花公子)님이셨군요. 하지만그 말씀은 만부당한 것이예요. 제가 처음부터 봉아 동생에게 결례를
했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저의…… 저의 이름은 악산산이예요."
이 악산산은 기실 강호상에서 자라온 여자로서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그다지 양보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봉아 등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다소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게다가 화검운이라는 서생의
시선을 마주 대하게 되자 왠지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약간 말을 더듬게 되었던 것이었다.
악산산은 그렇게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어이없게도 낯선 남자의 앞에서 말을 더듬은 사실을 알고는
수치심에 더욱 안색을 붉히게 되었다.
하지만 화검운이라는 서생은 보기보다 낯짝이 두꺼운 듯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멀쩡하게 바라보면서도 그저
천역덕스럽고도 태연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악낭자의 방명(芳名)은 익히 들었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일반적으로 그러한 태연한 상대의 표정은 일단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줄 수가 있을
것이었지만, 기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악산산의 경우에는 전혀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화검운도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겸연쩍어 했었다면 악산산은 금새 인사를 하고 핑계김에 뒤로 물러서서
돌아가 버렸을 것이겠지만, 지금 화검운이 너무나도 천역덕스럽고 정중한 표정으로 그와 같이 대꾸해 오자
악산산은 불안한 마음에 더욱 당황한 기분이 들어서 이대로 돌아가자니 모양이 좋지 않을 것 같고, 게다가 뭐라고
얘기를 해서 말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도 쉽게 그런 말이 뇌리에 떠오르지 않아서 잠시 멍하니 상대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마 그녀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어려워하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었을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때 서둘러서 음식들을 장만한 도노대가 다른 요리사 한 명과 함께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와서 탁자 위에
늘어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악산산은 이 순간에 자신이 너무나도 화검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느닷없이 마주보게
되어서 그와 같이 당황해졌던 것이라고 내심으로 판단을 내리고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는 다시 화검을 대할 준비를
했다.
이에 반해서 화검운은 여전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태도로 행동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도노대 등이 탁자 위에 모든
음식들과 술을 차려놓고 물러가자 다시 고개를 들어 악산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차려진 것은 별로 없으나 마음에 드신다면 함께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第 三 章. 종남파(終南派) 장문인의 당숙(堂叔)
악산산은 비로소 이 자리를 피할 핑계거리가 생겼으므로 즉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니예요. 저는 이미 일행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에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보다 세 분이서 즐겁게
드시기를 바래요."
용아와 봉아는 이미 악산산과 화검운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화검운의 맞은편의 두 개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화검운의 수저를 차려주는 등의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악산 산은 비록 그들 두 명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에 워낙에 당황했었던 터라 그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몸을 돌려서 자신의 일행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마악 그녀가 작정을 하고 신형을 돌리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그녀의 뒤쪽에서 일진의 인기척이 느껴지며
여러 사람의 아름다운 음성이 동시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악동생! 네가 새로 사람들을 사귀었으니 기왕이면 그들을 우리에게도 소개시켜 주는 것이 어때?"
"맞아! 우리도 함께 친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
"호호, 설마하니 우리에게 질투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석진 자리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그 악산산의 일행인
사녀일남(四女一男)이 느닷없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악산산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기실 비록 악산산처럼 쉽게 충동적으로 나서지는 못했었지만 아까부터 그들도 서생 화검운 일행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악산산은 실로 뜻밖의 일을 당하자 내심 아연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당황한 속마음을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즉시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예요. 그렇지 않아도 언니들에게 이분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제발로 다가와 주니 고맙군요. 그렇게
소개받고 싶은 심정이라면 어서 한 줄로 나란히 서세요!"
악산산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일행들은 저마다 자세히 화검운 등을 바라보기 위해 대강 옆으로 한 줄로
늘어서 있게 되었다.
화검운 등은 마악 식사를 하려고 하다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고는 일제히 그 새로 몰려온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녀일남은 이미 보았던 대로 하나같이 출중한 용모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그 중에서도
가장 용모가 뛰어나 보이는 소녀는 중간쯤에 위치한 청의소녀(靑衣少女)로서, 엷은 하늘색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계란형의 다소 작은 얼굴에 선이 섬세하고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초(淸楚)하고도 유유(悠悠)한 기운이 전신에 안개처럼 흐르고 있는 듯했는데, 허리춤에는 역시 한 자루의 장검을
멋드러지게 차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 청의소녀가 가장 쉽게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결코 그녀에게 미태(美態)가
뒤지는 것이 아니어서 좌측에 서 있는 연남빛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남의소녀(藍衣少女)는 다소 마른 듯 하였으나
수려(秀麗)한 용모에는 그야말로 깨끗한 기품(氣品)이 느껴져서 그녀의 시선만 마주 보게 되면 그야말로 세속의
혼탁한 기운을 일시에 씻어 버릴 수가 있게 될 것 같았고, 또한 우측에 서 있는 일신에 화려한 무늬옷을 걸치고
있는 채의소녀(彩衣少女)는 비록 체구가 다소 왜소한 듯했으나 그야말로 정교하게 새겨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게다가 구름같이 틀어올린 머리에는 갖은 장신구를 달아서 매우 눈부시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들 일행 가운데에서 그래도 가장 미색이 뒤진다고 생각되는 소녀는 좌측의 남의소녀의 옆에 한 걸음쯤
뒤로 물러서 있는 황의소녀(黃衣少女)로서, 담황색(淡黃色)의 장삼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키가 크고 체형이 상당히 길쭉하고 섬세해 보이지만 얼굴은 다소 누렇게 떠 있어서 약간 음산(陰散)한 기운을 주는
것이 특색이었다.
생각해 보건대 그녀는 자신의 용모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다소 뒤진다고 생각되자 아예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실 다시 유심히 살펴보면 그 화의소녀의 전신에서는 쉽게 간파할 수 없는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미태가 무형 중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녀의 음산해 보이는 얼굴과 어울려서 기이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唯一)하게 청일점(靑一點)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우측의 채의소녀의 옆에 그 눈빛을
의미심장하게 빛내며 서 있었는데, 그는 이목구비가 상당히 영준(英俊)하였고 체격이 헌칠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였으며, 일신에는 화려한 자색(紫色)의 비단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두 손을 단정하게 앞으로 모으고 있는 모습 등은 제법 예의바른 듯도 하였으나, 안광이 안정되지 않고 자주
흔들리는 것이 다소 흠이라면 흠이었다.
나이별로 말하자면 채의소녀가 대략 스물세 살 정도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고, 그 다음이 자삼청년(紫衫靑年)과
청의소녀로서 스물 한 살 정도였고, 남의소녀는 줄잡아 스물 정도, 그리고 화의소녀는 그보다 약간 나이가 어려서
열여덟 정도였고, 보아하니 악산산이 가장 나이가 어려서 열일곱 가량으로 보였다.
악산산은 일단 그렇게 말을 해 놓고 나서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는 화검운 등을 향해 웃는 얼굴로 일행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에 계신 당옥(唐玉), 당언니는 우리들 가운데 가장 언니이고, 바로 천하에 그 유명한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세요. 따라서 독(毒)을 사용하는 방법과 암기술(暗器術) 등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죠."
자신의 내심을 들킨 듯한 일종의 보복심리에서인지는 몰라도 악산산은 아까 자신에 대한 소개는 겨우 이름 석 자에
그쳤으면서도 지금 일행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아주 상세하게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원래 가호의 여인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기왕에 서로
통성명을 하기로 하였으니 그것이야 어쩔 수가 없다고 해도, 채의소녀 당옥은 자신이 가장 연장자라는 악산산의
소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흘겨본 다음에 화검운을 향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화검운 화 공자라고 하셨었나요? 이렇게 만나 인연을 맺게 되어 반가워요. 그런데 아까 당신의 시종들이 썼던
무공은 아무래도 태을신수(太乙神手)와 금안공(金雁功)인 것 같던데, 나의 눈이 잘못되었나요?"
서생 화검운은 당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그렇소. 실로 낭자의 안목은 훌륭하구려."
당옥은 상대가 자신의 질문의 핵심을 피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즉시 다른 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종남파(終南派)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요?"
화검운은 그 질문에 오히려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아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당옥은 웃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이 종남파의 무공을 배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당신의 시종이 그곳의 무공을 배웠으니 역시
당신도 그곳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
화검운은 이에 쉽사리 뭐라고 답변하기 곤란한 듯이 그저 멍하니 당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것을 보고 악산산이 옆에서 다시 나서서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남궁전(南宮筌) 남궁언니는 바로 다름이 아니라 천하의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금지옥엽으로서 역시
얼굴도 아름다우실 뿐만 아니라 일신에 놀라운 검술(劍術)을 터득하고 계신 분이죠."
악산산이 가리킨 사람은 바로 예의 그 청의소녀였는데, 그 청의소녀 남궁전은 악산산의 소개를 받자 다소 안색을
붉히는 듯하더니 그저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들은 대개가 무림의 오대세가(五大世家)의 여식들인 모양이었다.
무림의 오대세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상에 이름을 떨쳐왔던 가문들이었기 때문에 그곳들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뛰어난 여인들이 배출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악산산은 남궁전이 인사를 마치자 다시 그 좌측의 남의소녀를 소개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분 제갈소홍(諸葛素紅) 제갈언니는 역시 훌륭한 양양(襄陽)의 융중(隆中) 제갈세가(諸葛世家)의 귀한
따님으로서, 특별히 지혜(智慧)가 출중하신 분이예요. 화공자께서는 만일 강호의 일에 관해서 무슨 의문이
생기거나 한다면 일단 그녀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남의소녀 제갈소홍은 그러한 소개를 받게 되자 안색을 다소 붉히면서 악산산을 나무래듯이 흘겨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악동생, 너는 무슨 뛰어난 점이 없기만 하면 지혜 운운하며 떼우려고 하는구나. 보아하니 상대방은 내심 속으로
코웃음만 치고 있는 것 같구나. 너는 언제까지나 나를 그런 식으로 소개할 작정이냐?"
악산산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고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다소 떨어져 있는 황의소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여기에 계신 이 황약화(黃若華) 황언니는 겉모습은 비록 이렇지만 매우 놀라우신 분이지요. 만일
화공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신다면 아마도 많은 놀라운 점들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을 했지만, 악산사은 유독 그 황약화라는 황의소녀에 대해서만은
그저 놀랍다는 말로써 어물어물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의소녀 황약화는 악산산의 소개를 듣고도 아까와 조금도 달라진 기색이 없이 묵묵히 시선을 앞쪽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이 통성명에 대해서 가장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무덤덤한 그녀의 태도를 보고는 문득 화검운이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녀도 무림세가(武林世家)의 따님이시오?"
악산산은 화검운이 그렇게 질문해 오자 다소 난처하다는 듯이 황약화를 돌아보며 주저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바로 황산(黃山)의 성수곡(聖手谷)의 사람이예요."
악산산이 워낙에 다소 긴장된 듯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기 때문인지 일단 그 얘기가 나온 순간 왠지 장내에는
가볍게 굳어진 공기의 파동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
화검운은 악산산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저 가볍게 눈빛을 한 차례 빛냈을 뿐 그 외에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악산산은 이에 다음 사람의 소개로 넘어갔다.
다음 사람은 바로 유일한 남자인 자삼청년이었는데, 그에 대한 악산산의 소개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분 당지상(唐志常) 당소협은 바로 사천당문의 자제분이며, 또한 당언니의 친동생이 되시죠.
사천 지방에서는 이미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고 하던데, 아마도 화공자가 겪어보시면 그에게
놀라운 절기(絶技)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자삼청년 당지상은 아까부터 눈앞의 화검운 등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소녀들을 향해 시선을 은근히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도 악산산의 소갯말을 듣고 나자 우선 화검운을 향해 건성으로 가볍게 포권의 인사를 해
보인 연후에 이윽고 악산산을 향해 입을 열어 말했다.
"인중지룡이라니, 악낭자께서 불초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사실 불초에게는 몇 가지의 암기를 던지는
기술밖에는 없지만, 오히려 악낭자께서는 태산북두라고 불리우는 구파일방(九派一幇) 중에서도 화산파(華山派)의
촉망을 받는 여제자(女弟子)로서, 실로 대단한 절기들을 지니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 말은 기실 화검운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는 악산산을 향한 말대꾸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화검운 등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자연히 그 악산산이 화산파의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악산산은 이에 다소 안색을 붉히며 말을 받았다.
"저는 사실 저의 아버지 때문에 강호상에서 약간의 대접을 받고 있는 상태이지만, 정작 실력은 별볼일이 없는
편이예요."
그것은 악산산이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말한 것이었다.
당지상은 그러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했다.
"하하, 그렇지는 않소이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자면 우리들은 모두가 부모님의 후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솔직히 그러한 현실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오. 화산파의 현임 장문인이신 악대협
(岳大俠)께서는 그야말로 천하가 부러워하는 일대의 무학지사(武學之士)가 아니겠소?"
알고보니 이 악산산은 비단 화산파의 여제자일 뿐만 아니라 현임 화산파 장문인의 여식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만일 그저 화산파의 일반 여제자였다면 이렇게 무림세가의 자제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같은 일행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악산산은 당지상이 다시 나서서 자신의 주장을 펴자 이내 반박할 도리가 없어서 그저 가볍게 안색을 붉히고는
잠자코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음에 소개받았던 당옥이 다시 화검운을 향해 입을 열어 말했다.
"자, 이제 우리들의 신분 내력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니, 이번에는 화공자께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이 당옥은 비단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시기적절하게 사태의 흐름을 짚어가는 냉철한 능력이 있었다.
화검운은 묵묵히 이제까지의 얘기들을 듣고 있다가 이윽고 안면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여러분들처럼 무슨 특별히 내세울 가문(家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한 특별히
배운 재간도 별로 없는 상황이니, 따라서 구태여 이름을 붙여가며 소개할 것도 없소이다. 다만 과거에는 제법
부유했었으나 이제는 그러한 영화(榮華)도 거의 사라지고 말아서 쓸모없이 거리를 떠도는 낙방수재(落榜秀才)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오."
당옥은 그의 대답을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고 듣고 있다가 이윽고 가볍게 아미를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의 저 두 명의 시종들이 종남파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명하실 생각이죠?"
그녀는 아마도 화검운이 고의적으로 평범한 듯이 꾸며서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화검운은 이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용아와 봉아가 종남파의 무공을 익힌 것은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이오."
당옥은 그 말에 눈빛을 가볍게 빛내며 다시 질문했다.
"그들의 무공을 당신이 가르쳤나요?"
화검운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무공비급(武功秘 )을 내가 가져다 주었으니 그랬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오."
당옥은 눈을 번쩍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대체 종남파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일파의 무공비급이라는 것은 함부로 밖으로 유출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요?"
당옥의 질문은 상당히 집요하여 쉽게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화검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그녀의 질문공세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현재의 종남파의 장문인은 나의 오촌 당질(堂姪)이라오. 여러분은 부디 내가 그곳의 무공비급을
유출시켰다는 얘기를 발설하지 말기를 바라오."
화검운의 느닷없는 놀라운 내용의 대답에 악산산 등은 일시에 크게 놀라서 안색이 변하는 듯했으나, 내심으로는
역시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자신들에게 중대한 비밀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해주고 나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을 하는 것은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그가 더 이상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당옥은 다소 놀란 표정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이윽고 화검운에게 다시 말했다.
"당신이 현임 종남파(終南派)의 장문인(掌門人)인 종남수사(終南秀士) 화정룡(花廷龍)의 당숙(堂叔)이라니 매우
놀라운 일이로군요. 과연 생각해 보니 화정룡과 당신의 성(姓)도 같고. 이러한 일은 나중에 확인해 보면 자연히
확실해지게 되겠지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곳 장안성(長安城) 내에서 살고 있나요?"
화검운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순순히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원래 과거에는 부유했었지만 이제는 용아와 봉아를 데리고 성내의 한 낡은 장원(莊院)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오."
(……)
당옥 등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유심히 화검운의 용모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매우 평범해 보였고, 이어 점차로 기이하고 신비로운 점이 엿보이는 듯 했으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결국에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이 없는 평범한 낙방수재인 것 같지 않은가!
사람들은 다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으면서도 아까 자신들이 그의 신분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기심을 느끼고
흥분하여 몰려들었던 일에 대해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들 무림세가의 금지옥엽들과 이 몰락한 집안의 한 낙방수재와는 아무래도 약간 격이 맞지 않아서 이렇게
번거롭게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당옥이 다소 아미를 찌푸리며 입을 다물자 이때 문득 이제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청의소녀
남궁전이 약간 호기심이 깃든 얼굴로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그럼 당신도 무공을 가지고 있나요?"
당옥 등은 일순 그 질문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경각시켰으나 이내 그것은 터무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용아와 봉아라는 두 명의 시종들은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두 눈에서 맑고도 예리한 광채가 일어나고 있으니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화검운은 보아하니 체구도 매우 허술할 뿐만 아니라 기운이 없게 마른
몸이어서 무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눈빛에서도 어떤 신광(神光)을 느낄 수가
없으니, 영락없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분명하다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일행 가운데에서 당옥이 매우 냉철하고 여물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가장 곱상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전은 너무나도 곱게 자라온 나머지 생각이 비교적 여물지 못한 편이어서 이번의 그녀의 질문도
다소 어리숙한 것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혹 남궁전이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질문한 말이었다고는 하나 그 결과는 기이하게도 당옥
등의 짐작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나타났다.
화검운은 남궁전의 질문을 받고 나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었다.
"물론이오. 용아와 봉아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무공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일단은 내가 먼저
그 비급들의 무공을 터득한 이후에 그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겠소? 솔직히 그들은 무공비급을 보기는
했지만 역시 나의 지도를 받은 것이오."
남궁전도 내심으로 자신의 질문이 턱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화검운의 그와 같은 대답을 듣고는 약간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공은 그들 시종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주저없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그들의 주인으로서 무공이 그들보다 못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가르칠 수가 있겠으며, 또한
무슨 체면이 서겠소?"
(……?)
남궁전 등은 화검운이 오히려 그와 같이 쉽게 술술 대답해 주자 더욱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실례지만 화공자의 무공수법 가운데 한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있나요?"
남궁전의 질문에 화검운은 눈앞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역시 쉽게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시했다.
"물론이오. 그거야 뭐가 그리 어렵겠소?"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앞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병 하나를 들어서 잠시 흔들어 본 다음에 이윽고 그것을
주둥이가 아래로 가게 거꾸로 허공에 세웠다.
그런데 아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술병 속에서는 술이 가득 들어 있었건만 화검운이 술병을 허공에 거꾸로 세웠는데도
열려 있는 주둥이로 술이 조금도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남궁전 등은 그것을 보고 과연 정말로 화검운이 무공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자신의 내공으로 술병 속의 술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第 四 章. 동문서답(東問西答)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순간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술병 속의 술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건만, 그 술병 위의 허공에는 기이한 백색의 기류(氣流)가
아른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 기류가 점차로 짙고 강렬해 지면서, 마침내 화검운이 술병을 다시 바닥에
원래대로 내려놓자, 허공에서 백색의 구(球)를 이루며 위맹하게 돌아가고 있던 기류가 느닷없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서 무수한 가느다란 줄기로 화해서 이미 텅 비어 있는 그 술병과 그 옆의 술잔 속으로 다투어 날아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남궁전 등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을 뜨고서 자세히 았지만 일순 자신들이 혹시 환각(幻覺)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폭죽을 터드리는 것과도 같은 화려(華麗)한 재주를 선보인 화검운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태도 그대로였는데,
언제 그와 같은 재간을 펼쳤는지 조금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전 등은 혹시 화검운이 사술(邪術)을 펼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결코 사술이 아닌 것 같았다.
남궁전과 심지어 당옥까지 느닷없는 화검운의 놀라운 재주를 보게 되자 일시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며 멍하니
생각이 마비된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때 지금까지 다소 뒷전에 물러서서 방관자(傍觀者)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황의소녀도 일순간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눈빛을 맑게 빛내 보였다.
술병 속의 술은 정확히 한 잔만큼 비워져 있었으며, 그 비워진 한 잔의 술은 지금 그 옆의 술잔 속에 알맞게
채워져 있었는데, 화검운은 우선 오른손으로 그 술잔을 들어서 입에 대고 죽엽청(竹葉淸)을 조금 마신 다음에
이윽고 다시 술잔을 내려놓고 가볍게 웃으며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이러헌 재주는 사실 강호상에서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못되는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지금
놀라고 있는 것인지 대강 그 이유를 알고 있소. 그것은 바로 내가 처음에는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오?"
남의소녀 제갈소홍(諸葛素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기실 당신이 조금 전에 펼친 그 재주는 결코 당신의 말대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들의 능력으로는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죠. 아마도 그것은 최절정(最絶頂)의……"
그때 지금까지 말이 없었던 황의소녀 황약화(黃若華)가 느닷없이 불쑥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최절정의 수법(手法)으로 종남파의 절기인 선천태을강기(先天太乙 氣)와 은하적성지(銀河摘星指)가 완벽하게
펼쳐진 것이죠."
(……?)
제갈소홍은 황약화가 느닷없이 끼어들자 다소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화검운을 향해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당신의 무공(武功)은 정말로 최절정의 경지(境地)에 올라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그 역시 황약화의 얼굴을 잠시 돌아보다가 다시 제갈소홍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가 있소. 이 종남파의 절기들은 이유극강(以柔克剛)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기와는
달리 일단 그러한 절기들에 익숙해지게 되면 누구나 그와 같은 재주를 간단히 펼쳐보일 수가 있는 것이오. 나는
가끔 심심하면 그와 같은 장난들을 생각해 내곤 했었는데, 그것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흥미를 주게 될
줄은 몰랐었소. 사실 나는 그것들은 용아와 봉아아게만 보여주곤 했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
처음인 것이오."
화검운은 제갈소홍이 무슨 최절정의 경지 운운하자 대강 그 질문에 얼버무려 대답을 하고는, 이어 그와 같은
재간이 마치 무슨 장난거리나 되는 것처럼 애기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화검운이 정말로 놀라운 무공을 터득하고 있는 무림의 일대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왠지 그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져가는 기분이었다.
아까 그는 이곳의 주인이게 그와 같은 모멸감이 섞인 욕설과 축객령을 듣고도 마치 어리숙한 낙방수재처럼 전혀
화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와 같은 놀라운 절기들을 구사하고도 마치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을 보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니, 어떻게 그의 심사(心思)를 추측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시 이 허름한 용모의 서생이 실은 천하에 드문 숨은 기인(奇人)이어서 깊은 마음의 수양(修養)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로 어리숙하여 우연히 최절정의 무공을 터득하고도 미처 그것의
가치를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쉽게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당옥이 의구심(疑懼心)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미를 깊게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나는 일전에 무공을 익힌 사람들에게 있어서 간혹 그 흔적이 전혀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모습이 평범하게 보이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아마도 조금 특별한 기질(氣質)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나는 아직 종남파의 현임 장문인을 포함해서
그와 같은 절기들을 그와 같은 완벽完璧)한 경지에 이르도록 연성(練成)했다고 하는 종남파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의 종남파의 최고고수(最高高手)라는 말인가요?"
당옥의 질문은 기실 사리에 맞는 것이고 논리정연한 것이었다.
무릇 무림의 일파(一派)의 최고 무공(最高武功)이라고 하는 것은 워낙에 심오(深奧)한 이치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명문정파(名文正派)의 것일수록 더욱 완벽하게 터득하기가 어려워서 젊어서 그것들을 완전히
터득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은 물론이요, 간혹 인재(人才)가 나타난다고 해도 나이가 고희(古稀)를 훨씬 지나서야
원숙한 경험과 지식(知識)을 토대로 하여 겨우 대성(大成)할 수가 있는 것이었으니, 중년(中年)의 나이에 장문인의
직위에 올라서 아직 종남파의 절기들을 대성하지 못하고 있는 화정룡(花廷龍)이라는 사람에 비교해 보더라도 이
눈앞의 화검운이라는 약관의 서생이 그러한 절기들을 이미 최고의 경지에까지 터득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기이하고 신비로운 일인 것이었다.
화검운은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 데 있어서 다소간의 불편한 일을 겪기도 하는
편이지만,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형편이고 하니 대체 어쩌겠소? 실로 조금 전에도 나는 그와 같은
봉변(逢變)을 당했던 것이었지만,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으니 나는 그저 참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내가 전혀 무공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실례가 되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그리고 그 종남파의 최고 고수냐는 질문은…… 그것은 사실 쉽게 말하기가
곤란한 것인데……"
상대에 대해서 깊은 의구심을 느끼고 수상한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캐어 보려고 노리고 있었던 당옥이 이 순간
화검운이 다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눈빛을 번쩍 빛내며 캐물었다.
"그건 어째서죠? 거기에 어떤 복잡한 사연(事緣)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우수를 들어 가볍게 내저으며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말도 하지 마시오. 비록 그다지 복잡하다고는 할 수가 없지만 실로 이상야릇하고 우스운 사연이 깃들어 있다오?"
(……?)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듣고 있다가 화검운의 말을 듣고 나자 마치 거기에서 어떤 단서라도 찾으려는 듯이
칼날캍은 시선을 화검운의 얼굴에 퍼붓기 시작했다.
당옥이 얼른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얘기를 지금 우리에게 해주실 수는 없나요?"
화검운은 일순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정시(正視)하며 되물었다.
"아니, 정말로 그 얘기를 지금 여기에서 하라는 말이오?"
당옥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약간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신은 혹시 그 얘기를 지금 이곳에서 하지 못할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일순 그녀가 다소 싸늘한 태도로 나오자 다소 겸연쩍은 듯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얘기는 약간 우스운 것이라 쉽게 말하기가 곤란해서…… 하지만
여러분이 모두 듣기를 원한다면 그까짓 것 한 번 얘기를 해주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소? 그 내용인 즉, 실은
이렇소. 솔직히 나의 나이는 이제 갓 스물이고, 나의 오촌 조카인 화정룡의 나이는 나보다 최소한 배는 더 많을
것이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주위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되어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화검운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하하, 이거 우습게도 그는 필시 나와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그러한 무공들을 전수받았을 것인데도
워낙에 자질(資質)이 부족하여, 하하, 나는 뒤늦게 시작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보다도 먼저 그러한 절기들을
연성하게 되었소. 이것은 나의 자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이오.
이른 바 이유극강의 무공이라는 것은 마음을 써야지 기운(氣運)을 써서는 안되는 것이오. 몸이 허(虛)하다면
기운은 생겨나는 것이고, 마음이 편안(便安)해지면 그 기운이 부드러워지고 빈틈이 없어져서 술을 따르는 재주를
보일 때에도 전혀 실수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러한 사소한 이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말이오."
사람들은 열심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무학(武學)의 심오한 이치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자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동굴 속에서 호랑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엉뚱하게도 토끼가 뛰쳐나오는 것을 보는
듯한 심사와 비슷해 보였다.
화검운은 다소 멍해지는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하, 그런데 그는 어이없게도 이미 일파의 장문인이 되었으니, 그 멍청한 조카…… 여러분은 부디 이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기를 바라오. 그 멍청한 조카인 장문인이 그래도 체면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제법 근엄한 척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때가 되자 느닷없이 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더라는 말이오. 하하하……"
화검운은 말을 하다가 말고 우스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한 차례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나서는 눈앞의
사람들이 전혀 따라서 웃으려는 표정이 아니고 다소 안색이 찌푸러진 것을 보고는 다시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그에게 몇 가지의 내용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빌어먹을, 그 멍청한 조카녀석…… 여러분은 부디
이 얘기가 그 화정룡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주시오. 그도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얼굴이 있을 테니 나에게
멍청한 조카녀석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아주 기분이 좋지 않게 될 것이오. 나는 그 녀석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부디 조심해 주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이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오. 화정룡 그 멍청한 녀석 하나라면 별로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지금 그의 주위에는 실로
그보다 더욱 더 멍청한 녀석들이…… 여러분 이 얘기도 종남파의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주시오.
아무튼 그 많은 멍청이들이 한꺼번에 나를 원망스러운 듯이 바라보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소?
아니, 아니지. 내 본론으로 다시 넘어가겠소. 그 멍청한 조카녀석은 그 멍청한 조카녀석은 나에게 약간의 무학을
배웠는데…… 여러분, 내가 주의해야 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어쨌든 그 멍청한 조카녀석은 십 중
팔구는 잊어버리고, 혹은 뻔하게 드러나 있는 이치인데도 빙 돌아가서, 어리석게도 십 중 하나도 제대로 배워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는 장문인이나 하면서 그 모양이니 얼마나 이게 우스운 일이겠소?"
(……)
"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의 아저씨뻘이 되는데, 아저씨가 조카녀석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겉으로 보기에 오히려 그가 나의 아저씨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하하, 정말로 이상야릇한 일이 아니겠소? 나는 비록 아저씨로서의 체면을 차리게 되었지만,
반대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 조카녀석의 심사야말로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일이겠소?
그는 줄을 잘못 서서 나의 조카가 되었다는 말조차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오. 하하하……"
화검운이 다시 한 번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나서 입을 다물자 이윽고 한참이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당옥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다시 물었다.
"당신이 말했던 우습고 이상야릇한 사연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이었나요?"
화검운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다가 천역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 밖에 더 우습고 이상야릇한 사연이 있을 수가 있겠소?"
순간 화검운의 입에서 혹시 보다 중대하고 미묘(微妙)한 얘기를 들을 숙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당옥을 비롯한 사람들은 내심으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검운이 방금 전에 말했던 그 이상야릇한 사연이라는 것은 실은 그들에게는 조금도 흥미가 없는 얘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당옥이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어 그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자신이 종남파의 최고 고수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당신은 종남파의 최고
고수인가요?"
화검운은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용아와 봉아를 그와 같은 나이에 일류고수(一流高手)의
수준으로까지 가르칠 수가 있었겠소?"
(……?)
당옥은 이에 잠시 화검운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당신은 결코 종남파의 최고 고수가 아닐 거예요."
그것은 실로 뜻밖의 말이었다. 이번에는 화검운이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어째서 내가 최고가 아니라는 말이오?"
당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는데, 당금 강호에는 현재 종남파에 한 명의 기인(奇人)이 나타나서 종남파의 세력을 크게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그를 가리켜 종남사부(終南師父)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그리고 젊은 사람인지 늙은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필시 그가 당금의
종남파의 최고 고수일 것이라고 확신해요."
뭔가 신빙성이 있는 기억을 떠올린 듯 당옥의 어조는 상당히 강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화검운은 그 얘기를 듣고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얘기인 것 같은데…… 워낙에 요즈음은 종남파에 가보지 않아서…… 음,
그렇게 좋은 일이 생겼다면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소?"
당옥은 화검운이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를 향해
입을 열어 다시 물었다.
"당신은 혹시 지금 다소 한가한 상태가 아닌가요?"
화검운은 그녀의 질문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아니, 어째서 그렇게 묻는 것이오?"
당옥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대답했다.
"사실 우리는 황 소저(黃小姐)와 함께 종남파로 영웅첩(英雄帖)을 전달하러 가던 길이었어요. 우리는 조금 전에
식사를 마치고 나서 곧장 종남산(終南山)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만일 당신이 그곳의 지리에 밝다면 장문인과
안면이 있는 당신이 우리와 동행(同行)을 하게 된다면 좋지 않겠어요?"
사실 당옥은 다른 이유들도 물론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기이하게 보이는 화검운의 정체를 보다
확실하게 캐기 위해 그렇게 꾀고 있는 것이었다.
화검운이 비록 지금은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해도 정말로 종남파의 장문인의 앞에 가게 되면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검운은 그러한 그녀의 심계(心界)를 눈치챘는지 혹은 모르고 있는지 잠시 곰곰히 생각을 굴리는 듯하다가 이윽고
소리쳐 말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공교롭군, 공교로와!"
화검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당옥은 그 말에 절로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가 그리 이상하고 공교롭다는 말이죠?"
화검운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비록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한가한 편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국 낭자의 부탁에는 응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니 정말로 이상하고 공교롭지 않고 뭐겠소?"
당옥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죠?"
화검운은 자신의 앞 탁자 위에서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들을 한 차례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는 원래 일단 이곳에 들러서 술을 한 잔 하고 나서 곧바로 종남파로 가서 나의 그 멍청한 조카 장문인을
만나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당신이 그와 같은 부탁을 해주니 어찌 공교롭지 않겠소?'
(……?)
사람들은 화검운의 말을 듣자 그 또한 뜻밖의 어이가 없는 얘기였지만, 일단은 차라리 매우 잘됐다고 생각했다.
화검운과 그렇게 자연스럽게 동행을 하게 되면 우선 그의 신분내력에 대해서 보다 확실하게 알아낼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가는 종남파에 가서도 그들의 행동이 다소 편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은 화검운이 정말로 종남파 장문인의 당숙이라는 것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 기이한 서생과 동행을 하게 되면 앞으로 뭔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당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종남파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그 질문에 다소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다소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생활 능력이 없어서,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은자를 타서 쓰는 형편이오.
이번에도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은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장문인을 만나보려는 것이오."
당옥은 화검운의 초라한 옷차람과 그와는 반대로 화려한 두 명의 시종의 옷차림을 보면서 일순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화검운이 초라한 의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야 당연히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두 명의
시종들에게 값비싼 의복들을 입힐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모든 일은 결국 종남파에 직접 가서 부딪쳐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당옥은 그러한 문제로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발할 수가 있나요?"
화검운은 그 질문을 받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바로 출발할수가 없게 되었소."
당옥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니, 그건 어째서죠?"
화검운은 즉시 자신의 앞 탁자 위에 가득하게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기에 있는 음식들은 보아하니 제법 맛있어 보이는 것들인데 어찌 이 많은 음식들을 그냥 버려두고 갈 수가
있겠소? 나는 이런 음식들을 놔두고 간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으니 여러분은 잠시 기다리시오. 내 금방
식사를 끝내도록 하겠소."
당옥은 화검운이 금방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내심 약간 짜증이 치밀어서 그만두게 하고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이미 점심식사를 끝냈으나 눈앞의 세 사람은 아직 식사 전이라면 배가 고플
것이기에 차마 강하게 화검운의 행동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의 두 명의 시종들인 용아와 봉아는 이제까지 탁자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화검운이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자신들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식사를 하는 모습들은 아주 산뜻하면서도 정결해 보이는
것이었다.
오히려 주인인 화검운이 다소 게걸스러운 동작으로 빠르게 음식들을 이것 저것 집어먹었지만, 그들은 단지
젓가락을 들어서 몇 가지의 음식들을 조금씩 맛을 보는 선에서 식사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들 주종간의 행색이나 행동들이 워낙에 다른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화검운이 반대로 하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용아와 봉아는 이미 식사를 마친 듯했으나 화검운이 수저를 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수저를 놓지
않고 그저 이것저것 집어먹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윽고 화검운이 식사를 끝내고 한 차례의 트림을 한 후에
수저를 내려놓자 자신들도 수저를 내려놓고는 급히 한쪽에서 엽차를 집어서 그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은 용아는 다소 굼떠 보였고 대신 봉아가 더욱 빨랐다.
화검운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엽차를 들이킨 후에 아직도 자신들의 앞에서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여섯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용아와 봉아는 오래 전부터 부유한 주인을 모셨었기 때문에 화려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주인도 없는 처지에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것은 자신의 모습과 용아 봉아의 행색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해명하는 말이었다.
당옥은 그의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지만 다시 얘기를 꺼내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동문서답(東問西答)식으로 재촉했다.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는 출발할 수가 있나요?"
화검운은 그 말을 듣고 일행을 둘러보다가 되물었다.
"아니, 그렇게도 바쁘다는 말이오?"
당옥은 너무나도 느긋한 화검운의 동작에 그만 신물이 나는 것 같아서 즉시 약간 냉랭하게 대꾸했다.
"종남파는 이곳에서 그다지 가까운 곳이 아니니 우리가 그곳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객점을 잡으려면 좀더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요?"
화검운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아니, 시간이 늦어지게 되면 그대로 종남파에서 하룻밤을 묵어오면 되지 않겠소? 종남파에는 재산도 많고 게다가
객청(客廳)들도 제법 훌륭해서 내가 나서서 말한다면 그들은 여러분들을 결코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을 것이오."
당옥은 점점 더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종남파에서 천금(千金)을 준다고 해도
그곳에서 쉴 수가 없어요."
당옥은 은근히 자신들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단체로 이 어리숙해 보이는 서생과 마주하여 이제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에 문득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어서 미처 생각지도 않던 말까지도 토해놓고 말았다.
사실 그녀들이 오늘 저녁에 이곳 장안성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숨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화검운은 미처 그러한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이 지금 일어나야 하겠군. 사실 그 멍청한 조카녀석에게 은자를 빌리러 간다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나서 갈까 했었는데. 자자! 어쨌든간에 이제는 그만 가도록 합시다!"
화검운이 오히려 앞으로 나서서 서둘기 시작하자 당옥 등의 일행은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第 五 章. 당금의 무림삼보(武林三寶)
화검운이 미처 주막을 나서기 전에 용아와 봉아가 계산대로 달려가서 먼저 계산을 치르려고 했으나, 도노대는
이미 작정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전혀 음식값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일행은 따라서 화검운의 뒤를 따라서 수월하게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화검운은 대로상에 나오게 되자 즉시
발길을 종남산(終南山)이 있는 방향인 남쪽으로 돌려서 걷기 시작했다.
이 종남파가 자리잡고 있는 종남산은 장안성의 남쪽 방향으로 백여 리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옥
등의 소녀들은 일단은 화검운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가 종남파와 정말로 인연(因緣)이
있는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들이 비록 일신에 훌륭한 무공과 경신술(輕身術)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익히 그 방향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해도 정작 종남파로 찾아가려면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길을 잘 아는 사람의
인도를 받으며 가게 된다면 다소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단지 이 화검운은 아까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무공 실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양쪽에 용아와 봉아를
대동하고 대로상을 아주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미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녀들은 그것을 보자 일순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해져서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마치 그러한 그녀들의 심사(心思)를 알아주기라도 하듯이 화검운은 이윽고 성문을 벗어나게 되자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한적한 방향을 잡아서 경신술을 펼치지 시작했는데, 과연 그의 신법은 아까 보여 주였던 그 무공
수법만큼이나 훌륭해 보이는 것이었다.
비록 그다지 속력을 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힘들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도 거의 파공음이 일지 않고
부드럽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용아와 봉아는 역시 그의 좌우에서 함께 신형을 날려가고 있었는데 마치 기러기가 땅을 박차고 빠르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것과도 같은 그들의 신법은 경쾌하고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당옥 등의 여섯 명의 일행들도 이때에는 제작기 신법절기들을 발휘하여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경신술은 이미 명문정파의 엄격한 교육하에 체득된 것들이어서 용아와 봉아의 신법에 비해서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당옥 등의 일행은 이제는 화검운이 신법을 펼쳐서 빠르게 나아가 주는 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아까의 불쾌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저마다 화검운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경신술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하고 세심하게
살피게 되었는데, 문득 그 가운데 악산산이 신법의 속도를 더해 앞으로 나서서 화검운의 옆으로 바싹 붙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의 시종들의 경신술은 정말로 훌륭하군요. 그것은 아마도 금안공(金雁功)이라는 것이겠죠?"
이 악산산은 원래는 자신이 가장 먼저 화검운 등과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당옥이 나서서 화검운과의
대화를 도맡아서 하는 바람에 다소 위치가 뒤바뀐 것 같았으므로, 이제 다시 나서서 말을 걸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화검운의 눈빛을 보고 가슴이 떨렸으나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그다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고
있었다.
화검운은 이때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며 신형을 날려가고 있었는데, 문득 악산산의 말을 듣고 나자 급격하게 신법의
속도를 늦추더니 악산산을 향해 동문서답식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참! 그런데 아까 당신들은 무슨 영웅첩(英雄帖)을 돌리기 위해 종남파로 간다고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대체
그 영웅첩은 무엇 때문에 돌리는 것이오?"
화검운이 갑자기 신법의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에 자연히 악산산도 신법의 속도를 늦추게 되었고, 따라서 뒤에
쳐져서 오던 당옥 등의 일행과 금새 가까워지게 되었다.
악산산은 의식적으로 뒤에 바싹 따라온 일행들을 한 차례 둘러본 이후에 화검운에게 다시 고개를 돌려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 그 소문을 듣지 못했나요?"
일반적으로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면 내식(內息)이 흐트러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무공을 전개하거나
신법을 펼칠 때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 악산산은 그렇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서도 여유있게
신법을 펼치는 것으로 보아 무공에 상당한 기초가 쌓여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화검운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고개를 전적으로 그녀를 향해 돌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소문 말이오? 무슨 특별한 사건이라도 생겼다는 말이오?"
(……)
악산산은 잠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어 말했다.
"당신은 계속해서 장안성 내에서 살아왔다고 하면서도 아직 그러한 놀라운 소문을 듣지 못했다니 이상한
일이군요."
화검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용아 봉아와 함께 계속해서 장원 내에서만 머물고 외출을 많이 하지 않았었기 때문일 것이오.
대체 무슨 소문이 퍼졌길래 그러는 것이오?"
악산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지금 펼치고 있는 신법은 상당히 훌륭해 보이는군요. 그 신법의 내력(來歷)에 대해서 말해 주면 내가
그 소문에 관해서 가르쳐 드리겠어요."
악산산은 가능하면 이 화검운이라는 사람과 밀접하게 움직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에 쉽게 가르쳐 줄 수가
있는데도 엉뚱한 조건을 걸어 놓는 것이었다.
화검운은 그녀의 느닷없는 제의에 의아해 하다가 대꾸했다.
"이 경신술 말이오? 낭자도 이미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내가 금안공을 펼치지 않으면 또 무슨 다른 신법을
펼치겠소?"
"그게 금안공이라고요?"
악산산은 다소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지금 용아와 봉아가 펼치고 있는 신법의 모양은 그야말로 날쌘 기러기가 우아하게 땅을 박차고 날아가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지만, 화검운의 모습은 그와는 아주 많이 다르고 전혀 기러기의 모양과 같지 않게 비스듬히 지면 위를
날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악산산의 뒤에서 묵묵히 지면을 스치듯이 여유있는 신법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황약화가 불쑥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금안공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치 기러기가 한 줌의 진기(眞氣)만을 가지고 유연하게 땅 위를 스치고
나아가듯이 좀처럼 그 흔적(痕迹)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
(……?)
악산산은 황약화가 다시 그렇게 불쑥 나서서 입을 열어 말하자 다소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것은
그녀가 화검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화검운을 향해 다시 말했다.
"좋아요. 그럼 당신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까요?"
이 악산산은 다시 당옥 등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기가 싫어서 거의 의도적으로 스스로 화검운에게 소문의
얘기를 해주려는 것이었다.
화검운은 물론 그것을 마다할 리가 없는 것이어서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대체 무슨 특별한 얘기인지 한 번 말해 보시오."
(……)
악산산은 마치 그의 마슴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이 깊은 시선으로 한 차례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금의 무림삼보(武林三寶)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화검운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무림삼보라…… 천하에 신기한 보물들도 많이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식의 말인 듯하구려. 무림에서
가장 귀중한 세 가지의 보물들이라면 아마도 그것은 소림사의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이나, 한 알만 복용하면
능히 이 갑자(甲子)의 공력(功力)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전설(傳說)의 대환단(大還丹), 그리고 개방( 幇)의
정형벽록(晶螢碧綠)으로 만들어진 타구봉(打狗棒), 뭐 그런 정도가 아니겠소?"
악산산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러한 것들은 비록 신비하게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당금의 세태(世態)가 달라져서 그다지 놀라운 보물이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요. 물론 잘 생각해 본다면 그 외에도 정말로 훌륭한 보물들이 많이 있을수가 있겠지만,
나의 얘기는 그러니까 당금에 있어서 강호상에 새롭게 전해지고 있는 무림삼보가 어떤 것이냐 하는 말이예요."
화검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그런 것이 다 있었소? 그렇다면 대체 그 무림삼보라는 것은 어떤 것이오?"
다소 시큰둥하니 물어오는 화검운의 태도를 보고는 악산산은 일부러 그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 무림삼보에 대한 얘기가 바로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그 특별한 소문이라는 것이예요. 말하자면 그 무림삼보가
느닷없이 장안성 내에 나타났다는 것이죠."
화검운은 그 얘기를 듣자 다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물었다.
"장안성 내에 무림삼보가 나타났다고? 대체 그것들은 무엇이오?"
악산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소 뜸을 들이는 척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 무림삼보 가운데의 하나는 바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의
장보도(藏寶圖)예요."
"……!"
화검운은 그 얘기를 듣고 일단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문득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뭐라구. 겨우 그러한 것이었구려?"
악산산은 이에 오히려 놀라서 되물었다.
"당신은 그럼 이미 알고 있었나요?"
화검운은 시큰둥하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한 얘기야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오. 진시황릉이 천하에 공개되고
발굴되기 시작한 지 얼마나 오래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러한 장보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
그 말에 악산산은 일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화검운이 전혀 그 내용을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마치 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대꾸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다가가 그의 입술을 꿰매고 거기에다 일정한 수(繡)를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악산산은 다소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제가 하려는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니예요. 당신은 정말로 남의 성의(誠意)를 무시하는 사람이로군요!"
화검운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어떤 얘기라는 말이오?"
악산산은 대답했다.
"천하에 알려져 있는 진시황릉이야 물론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정도로 많이 발굴되었고, 또한 별로 신비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진시황릉에 딸려 있는 어떤 특별한 장보고(藏寶庫)가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화검운은 다시 물었다.
"장보고라니? 그럼 그것은 진시황릉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악산산은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다가 대답했다.
"소문에 의하면 과거의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일을 할 때 비록 대부분의 서책들을 불태워 버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몇 가지 종류의 서책들은 애써 다른 곳에 보관해 두고 불태우지
않았다는 것이예요. 하지만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 서책들이 발견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무덤과 가까운
곳에 하나의 장보고를 만들고 거기에 그 서책들을 영구히 보관하게 하였다는군요. 그 서책들을 차라리 자신이
저승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심보였겠죠."
화검운은 그 얘기를 듣고 있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설령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 서책들은 그저 유교(儒敎)의 경전들이나 아니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술집(學術集)들이 분명할 텐데 대체 그것들이 무림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악산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호의 무학은 근래에 들어서 급격할 발전을 보이게 된 셈이지만, 과거의 상고시대(上古時代)만 해도 전혀 그러한
무학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예요. 아니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무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하여 선학(仙學)에
가까워 졌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당시 진시황은 이론이 분분한 유학자(儒學者)들이 미워진 나머지 그와 같은
분서갱유를 저질렀었는데, 그런 그가 오히려 유교경전 등을 숨겨 놓았을 리는 없는 것이죠."
화검운은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그럼 진시황이 무슨 무공비급이라도 감추어 놓았었다는 말이오?"
악산산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진시황은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어서 나중에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위한 노력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가 그러한
하나의 방편이 될 수가 있는 무공비급들이나 희귀영초(稀貴靈草)들을 수집하지 않았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일이죠. 진시황릉의 장보고에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예요."
화검운은 다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장보도는 그 장보고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지도라는 말이오?"
악산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과거에 그 장보고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던 한 장인(匠人)이 나중에야 비로소 진시황이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자신의 후손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그 비밀지도를 만들어서 몰래
밖으로 유출시켰었나 봐요. 하지만 그 장보도는 그 장인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후손들에게 발견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나오다가 뜻밖에도 근래에 이르러서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는 것이죠."
화검운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장보도는 지금 어디에 있소?"
악산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독 그 얘기는 아직 안개 속에 가려져 있어요. 장보도를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지금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조만간에 그것이 장안성 내에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어요."
"음, 그와 같은 장보고를 찾아내어 영약(靈藥)을 복용하고 무공을 익힐 수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탐내지 않을
수가 없겠지."
화검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뇌리에 떠오른 듯 악산산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오늘 저녁에 장안성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오?"
(……)
악산산은 화검운의 그 질문을 받고 그가 아까 당옥의 얘기를 무심코 듣고 있었던 것 같았으나 사실은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당옥의 얼굴을 한 차례 돌아본 연후에 화검운을 향해 입을 열어 대꾸했다.
"원래 이 영웅첩은 그 소문이 계기가 되어서 발동된 것이겠죠. 원래 이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오늘 저녁에 장안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합(會合)하여 내일
정오에 열리게 되는 영웅대회(英雄大會)에 참석하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죠."
화검운은 다시 놀라서 물었다.
"아니, 영웅대회가 장안성 내에서 열리게 된다는 말이오?"
악산산은 선선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당신은 종남파의 사람이라니 가르쳐 드리겠어요. 내일 정오에 영웅대회는 장안성 내의 금창보(金槍堡)에서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일은 백의맹(白衣盟)에서 주관하고 있는 것이죠."
화검운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내일 열리는 영웅대회라면 그 영웅첩을 아제 돌려서야 사람들이 그 대회에 모두 참석할 수가 있겠소?"
악산산은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정말로 멍청하군요. 이 영웅첩은 이미 천하의 곳곳에 발송되어서 많은 무림인들이 장안성을 향해 몰려
들어오고 있는 중이예요. 이번에 우리의 황언니께서는 여러 곳의 영웅첩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으셨는데, 이미
다른 곳은 모두 돌리고 마지막으로 종남파로 가고 있는 것이죠. 종남파는 장안성과 가까운 곳이므로 오늘 저녁에
전달한다고 해도 그들이 충분히 내일 정오의 영웅대회에 참석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당신은 아직 장안성
내에 무림인들이 많아진 것을 느끼지 못했나요?"
화검운은 그제서야 지금 이 영웅첩을 돌리는 일의 임무를 맡은 주역은 다름이 아닌 황약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그녀를 따라나선 사람들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하긴 이 여섯 명의 남녀들 가운데 그 황약화의 무공이 가장 두드러지게 뛰어난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녀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중대한 임무를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화검운은 황약화의 다소 음산해 보이는 얼굴을한 차례 돌아본 연후에 다시 악산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어
물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대체 그 영웅대회에서는 무슨 일을 논의(論議)한다는 말이오? 설마하니 그 장보도를 취하기
위해 영웅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라는 말이오?"
악산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그를 향해 되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당금의 무림 정세(武林情勢)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 무림의 정세가 장보도와 어떤 연관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악산산은 이에 화검운이 기실은 아직 강호무림(江湖武林)의 정세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문득 그들의 대화 내용을 유심히 들으면서 뒤따르고 있었던 제갈소홍(諸葛素紅)이 가볍게 앞으로 나서며
미소와 함께 화검운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혹시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에 강호 무림의 일백 명의 최절정 고수들이 한꺼번에 의문의 실종을 당했던
사건(事件)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악산산은 그렇지 않아도 다소 난감해 하던 상황이었는데 제갈소홍이 나서서 화검운을 상대하자 핑계김에 그만 뒤로
약간 물러서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화검운은 이 제갈소홍이 뜻밖에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일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그 일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소?"
제갈소홍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그럴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일백 명의 최정정의 고수들을 한꺼번에 잃은 이후에 강호 무림의
사정이 어떻게 변해가기 사작했었는지 알고 있나요?"
이 제갈소홍은 비록 그다지 첫눈에 절세미인(絶世美人)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지극히
수려(秀麗)하고 깨끗한 용모와 그 얼굴 가운데의 맑게 비쳐나오는 듯한 두 개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차로
깊은 매력을 느끼도록 만드는 그런 소녀였다.
지금도 제갈소홍이 다소 웃으며 이야기를 하자 화검운은 일시 그녀의 얼굴이 눈부신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화지만 화검운으로서는 그녀의 질문 내용에 대한 흥미가 보다 강렬했기 때문에 즉시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당시에 실종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파의 명숙(名宿)들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이후로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이 득세(得勢)하게 되지 않았소?"
제갈소홍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래요. 하지만 설령 그 일백 명의 최절정 고수들이 실종되지 않았었다고 해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게
되었을 정도로 그 나중에 나타난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극강(極强)한 힘을 가지고 있었죠. 당신은 그 사마외도의
근원(根源)이 되는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화검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혹시 흑풍사(黑風社)가 아니오?"
이때 일행 중의 사람들은 그저 부담없이 계속해서 신법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화검운의 입에서
흑풍사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저마다 마치 추위를 타는 것처럼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것은 마치 흑풍사라는 존재가 악령(惡靈)의 괴물(怪物)과도 같아서 생각할수록 몸서리가 쳐지고 게다가 흡사
주위에 이미 그것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듯한 공포감(恐怖感)을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제갈소홍도 잠시 길게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바로 그래요. 그들은 당금 무림의 최강(最强)의 여덟 개의 세력인 천상팔패(天上八覇) 가운데에서
천상사패(天上四覇)가 연합(聯合)하여 이루어진 막강한 단체 흑풍사이지요."
화검운은 문득 그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듣자니 백의맹(白衣盟)이라는 것은 그 천상사패의 나머지 사패(四覇)가 힘을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은 사실이오?"
제갈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예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마 황 소저께 물어보시면 보다 정확한 답을 들으실 수가 있을 거예요."
제갈소홍은 말과 함께 은근히 시선을 돌려서 황약화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즉 황약화의 출신지(出身地)인 황산의
성수곡(聖手谷)이 천상팔패의 하나이며 당금에 이르러 백의맹에 가입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검운도 제갈소홍의 시선을 따라서 황약화를 바라보았는데, 이때에도 황약화는 그저 목석과 같은 표정을
한 채 전혀 제갈소홍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주 무신경한 모습이었다.
화검운은 이에 시선을 다시 제갈소홍에게 돌려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흑풍사를 견제하기 위해 백의맹에서 이번에 천하의 명문정파의 사람들에게 영웅첩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오?"
제갈소홍은 황약화의 눈치를 가볍게 살피고는 이어 화검운을 향해 미소하며 대답했다.
"흑풍사는 그 일백 명의 고수들이 실종되기 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단 그들이 실종되고 나자 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었기 때문에 강호상의 많은 사람들이 혹시 그 일백 명의 고수들을 납치해간 자들이 흑풍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죠."
화검운은 즉시 다시 물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第 六 章. 백의맹(白衣盟)과 흑풍사(黑風社)
제갈소홍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의구심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어요. 흑풍사는 일단 강호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천하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을 자신들의 휘하로 끌어들이고는 자신들을 배척하는 명문정파의 사람들을 각처에서 도륙(屠戮)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구파일팡과 오대세가 등의 문파에도 침습을 하여 혈겁(血劫)을 일으키곤 했었는데, 그로
인해서 강호의 명문정파의 세력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고, 또한 미처 그 일백 명의 고수들의 행방에 대해서
의문을 해결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죠."
화검운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흑풍사가 천상팔패의 네 곳이라면 나머지 네 곳의 천상팔패 가운데의 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백의맹은 대체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오?"
제갈소홍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실은 당시에는 아직 백의맹이라는 것이 생겨나지도 않은 상태였지요. 지금 백의맹의 주축을 이루는 천상팔패
가운데의 네 곳인 천륭무가(天隆武家), 검총(劍塚), 도막(刀幕), 성수곡(聖手谷)의 사람들은 원래 시끄러운
강호사(江湖事)에 휩쓸리기 싫어해서 깊은 산중이나 오지(奧地)에서 은거(隱居)를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천하가 흑풍사에 의해 결단이 날 것 같은 상황으로 변하자 하는 수 없이 강호에 나서서 백의맹이라는
연합체(聯合體)를 조직하고 흑풍사의 힘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예요."
화검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다시 물었다.
"그럼 흑풍사는 백의맹이 나타나자 그 세력을 거두고 물러나게 되었소?"
제갈소홍은 이 화검운이 기실은 강호사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모르는 백면서생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흑풍사의 네 개의 주된 세력인 일월마교(日月魔敎), 설산성모궁(雪山聖母宮), 태양마곡(太陽魔谷),
현현각(玄玄閣)은 원래부터가 자체 내에서 세력을 길러왔었기 때문에 자연히 흑풍사의 힘은 백의맹에 비해서
오히려 월등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비록 백의맹이 나타나자마자 기민하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의 명문정파의
세력과 엽합세력을 구축하여 방비했기 때문에 흑풍사의 산하조직(傘下組織)들이 다소 주춤하기는 했지만
지금이라고해도 흑풍사는 능히 천하제패(天下制覇)를 향한 야욕(野慾)의 이빨을 드러낼 만한 상태예요."
제갈소홍은 말을 하는 가운데 보다 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야욕의 이빨이라고 표현했는데, 일단 그런 말을 듣게
되자 사람들은 일시 주위에 마치 거대한 흑풍사의 어둠의 장막(帳幕)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 악마(惡魔)가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어 절로 자신들도 모르게 불안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화검운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번의 그 영웅대회는 그런 흑풍사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오?"
제갈소홍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거예요. 다만 만일 그 진시황의 장보도를 흑풍사의
쪽에서 입수하게 된다면 그들의 세력이 더욱 증대될 것이고 또한 앞으로의 사황이 더욱 난감해질 것이기 때문에,
백의맹에서는 이번에 가능하면 그 장보도를 입수하고 또한 흑풍사의 세력도 쳐부수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죠."
두 개의 세력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그 국면에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는 것을 화검운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화검운은 잠시 생각한 후에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장안에 나타난다는 무림삼보 가운데의 남은 두 가지는 어떤 것이오?"
그런데 이때 제갈소홍은 다소 질린 듯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면서 악산산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그 얘기는 악동생도 잘 알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녀에게 물어보도록 하세요."
원래 생각이 깊은 사람은 비교적 말이 많지 않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제갈소홍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악산산은 지금까지 잠깐 동안 뒤에 물러서서 그간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제갈소홍의 말을 듣고 나자 그다지
싫지 않은 듯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겨 보이고는 다시 화검운의 옆에 이르러 입을 열어 말했다.
"그래, 당신은 남은 두 개의 보물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는 말인가요?"
화검운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미 무림삼보의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이제 어찌 남은 두 가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악산산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한 쌍의 신병이기(神兵利器)와 하나의 신비로운 무공비급이예요."
화검운은 눈을 크게 떴다.
"신병이기와 무공비급? 그런 것들이 다시 장안성 내에 나타난다는 말이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천하에서 그다지
대단한 보물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오?"
비록 강호무림사가 시작된 이후에 신병이기와 무공비급을 둘러싸고 무수한 피비린내가 나는 혈겁들이 이어져
내려오곤 했었지만, 당금에 이르러 강호인들의 무학에 대한 안목과 그 경지가 상당히 많이 진척되어 비단 신병이기
라는 것도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배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노력만 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무공비급을 구할 수가 있을 정도로 무공절기(武功絶技)들이 많이 보급되어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화검운의
질문의 내용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악산산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우선 신병이기만 해도 이제까지 강호사에 출현했었던 그 어떤 병기들보다 뛰어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신검(神劍)과 보도(寶刀)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 번째의 보물인 이 하나의 무공비급(武功秘 )은 더욱 기이
(奇異)한 것이예요."
화검운은 흥미를 느낀 듯이 물었다.
"그 무공비급에 어떤 기이한 점이 있다는 것이오?"
악산산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무아진경(無我眞經)이라는 비급은 원래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모두 여덟 개의 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죠. 그것들은 전대(前代)의 전설적(傳說的)인 기인(奇人)인 무명도성(無名道聖)의 유작(遺作)
이라고 하는데, 아직 확실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만일 그 여덟 개의 비급들을 모두 입수해서 그 내용을
십이성으로 대성(大成)한다면 당금의 최강의 세력들인 천상팔패조차도 우습게 여길 수가 있다는 거예요."
화검운은 그만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들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이오? 으음, 실로 갑자기 장안으로 천하의 무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이유를
알 만한 것이로군. 진시황의 장보도와 한 쌍의 가공할 위력의 신병이기들, 그리고 천하를 뒤엎을 만한 내용의
무공비급, 그런 것들이 있으니 영웅대회가 벌어질 만도 한 것이로군.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그와 같은 놀라운
보물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장안성 내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오?"
악산산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 근래에 장안성 내에 천기(天機)의 흐름이 교차(交叉) 중복되어 그러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하기도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화검운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악산산을 향해 눈빛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영웅대회에 나와 같은 사람이 참석해도 되는 것이오?"
악산산은 그 말에 눈빛을 반짝 빛냈다.
"당신이 종남파의 사람이라면 그야 물론 그들의 일원으로서 참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 백의맹의
영웅대회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뇌들이 모조리 참가하게 되니까요."
화검운은 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 멍청한 조카녀석과 함께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따로 그 대회에 참석했으면 하는 것이오. 설마하니
영웅첩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대회에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