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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 부른 부활의 노래
自 序
결국 쓰기로 했다.
무심코 쓸어 넘기다 빠진 머리 칼들을 휴지통에 털어 넣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아직 모른다. 언젠가는 살아온 날들을 글로 옮겨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함부로 살 수 없는 긴장을 스스로에게 심었다. 하루하루를 자서전을 쓰듯
살아가려는 의식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는 기록되어야 해. 우리가 옳든 그르든, 승리하든 패배하든, 머리 속에 기록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외워야 돼. 인디언 추장처럼 머리 속에 집어넣고 외웠다가 때가 되면 풀어 써야해. 글쎄, 우리가 한 육십이 되면 쓸 수 있을까?'
그것은 싸음이었다.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되는 것과 반드시 기록을 남기고 함께 돌려 봐야 하는 것과의 싸음이랄까?
모자를 벗었다.
방 안 거울에 박박 밀어 버린 머리통이 비춰진다.
삭발, 내게는 삭발의 내력이 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친 날 곧바로 삭발하고 산에 올랐다. 그렇게, 재수할 동안 내내 삭발이었다.
대학 1학년 겨울, 학기말 고사가 끝나는 날 또 삭발을 했다. 그 해 겨울은 겨울잠 자는 짐승이었다. 그때 처음 낙서를 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겨울이 다 끝나갈 무렵 종이 뭉치들은 허리까지 찼다. 버렸다. 대학 생활에 삭발이라니.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멀쩡한 전도사 생활 3년 만에 또 박박 밀었다. 자신이 사이비란 사실에 놀란 뒤였다.
"지원아, 나 내일 머리 밀어 버릴께."
나는 모자를 벗으며 얘기했다. 며칠 전부터 모자를 썼다. 지원이 모자다.
"에이, 그래. 깍아라. 요즘 레옹 머리가 유행이래."
영화 <레옹>을 보셨는지. 하긴 레옹도 빡빡이다. 레옹은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형, 예쁜 모자 사 줄께. 우리 방송국 작가애가 <사랑을 위하여>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되는거냐면서 걔가 썼던 하얀 모자 사준다고 그러대?"
지원이가 쓰면 멋진 모자인데 내가 쓰니 멋대가리 없다.
"그래. 형 깍아. 말은 안 했는데 형 머리카락 빠지는 걸 보니 마음 아프더라. 형 맘은 오죽할까 싶어."
지원이의 눈망을이 빠르게 젖는다. 봤다. 코끝이 저린다. 목젖에 뜨거운 김이 삼켜진다.
<사랑을 위하여>
이 영화의 제목은 절묘하다. Dying Young ㅡ 이 <사랑을 위하여>라니.
서른다섯 살에 다시 삭발을 했다.
다행스러운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엔 또 어떤 전환을 위한 삭발일까?
삭발의 내력을 지닌 것이 이렇게 힘이 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삭발이라는 어떤 적극적인 예감으로 우울함을 달랜다.
왜 글을 쓰려 하는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섯밖에 없어서다.
당분간 노동하여 벌어 먹긴 텄다. 다시 말하면 전업 작가와도 같은 생활 조건이 펼쳐지고 있다. 이 조건이 글을 쓰게 만든다.
이럴 때 '제기랄'이라 하나? 이 주건이 글을 쓰게 만든다. 조건은 봉인데 능력과 경험은 황이다.
전업 작가의 조건을 갖췄지만, 능력이 없어 마누라 등쳐먹으며 놀고 자빠져 있는, 모든 이에게 폐끼치는 룸펜 실업자 꼴이라니.
5월 한 달을 보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들이닥친 휴가. 노래 한 곡을 작곡해 보았다. 그 동안 우연이나 인연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 불러 본 노래들이 일곱 꼭.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들을 직접 악보에 옮겨 보았다. 하루 몇 시간인지 모른다.
부활. 부활. 부활하고 싶다.
부활해야 한다. 아, 부활할 수 있을까? 이 글이 끝날 때쯤 부활의 씨았이 싹을 틔우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살아나고 싶어, 부활하고 싶어 글을 쓴다. 그렇다. 나는 죽음의 세월이라 부른다, 오늘을. 주제는 부활, 소재는 상실과 죽음이다. 부활, 그래 부활을 꿈꾸며, 기도하며 오늘의 죽음을, 절망을 노래할거야. 이 무기력한 시간들을 물고 늘어져 따져 보는 거지. 한번은 정리해야 해. 쓰고 털어 버린 후 새로운 시작을 찾아가 보는거야.
글을 쓰기 시작한 첫날,
삭발해 버린 첫날이 저물었다. 삭발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아주 짧은 머리 밑과 뿌리들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무심결에 뽑혀진 머리칼들은 안 그런 체 해도 우울하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내일은 병원에 가는 날이다. 더구나 3주에 한 번 맞기로 한 빨간 주사 날이다. 빨간 주사 이름은 모른다. 지난번엔 멋도 모르고 맞았다. 힘들 거라 했다. 병원에 가면 아침에 피부터 뽑는다. 그리곤 한, 두 시간 기다리다 주시를 맞는다. 엉덩이 주사, 팔뚝에 맞는 하얀 주사, 처음 빨간 주사를 맞는 날은 멀쩡했다. 그 다음날부터였다. 벌레가 되엇다. 열 받고 먹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누워서 2박 3일을 보냈다. 내일은 빨간 주사를 맞는 날이다.
"그래서 물어봤어?"
'뭘' 하고 되묻지 않았다. 오늘은 지원이와 함께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해두 된대"
나는 능청스럽게 말한다. 안 물어봤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치, 피곤하니까 일찍 자야지."
먼저 선을 그으면서도
"어떻게 물어 봤는데?"
말이 재미있을 것 같은지 재차 물어본다. 나는 장난기가 들어 거짓말을 덧붙였다.
"해도 되냐고? 아, 할 수 있으면 하래. 수술하고 아파서 못하지 할 수 있으면 운동도 하고, 먹고 싶으면 또 잘 먹고 할 수 있으면 잘하고, 무리만 안 하면 된대. 과식, 과로, 그런 것처럼 그러래."
말하면서 딴 생각이 든다. 거짓말이지만 그럴듯한 생각이다. 생각이 들면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말로 살짝 운을 띄우며 오늘 한번 해 볼래나 눈치를 보는데, 큰 동요는 없다. 합의가 안 될 것 같아 딴청을 피운다.
"의사한테 '아휴, 그러면 안되겠네요. 우리는 한번 하게 되면 내가 무리하지 않으면 혼나요' 그랬지."
"어이구 주책아."
벌써 지원이의 급한 주먹이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지원이는 정말 피곤한지 먼저 코를 골며 잤다. 혹시나 해서 애꿎은 맨살만 비벼 보는데 영 반응이 없다. 가만히 몸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잠자는 지원이의 모습을 보며 낄낄 웃는다.
전화 벨이 울린다.
잠결에 깨면 지원이는 '어이구 누구야 이 밤중에' 한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얼른 받는다. 어떨 땐 지원이의 전화다. 고소하다.
"여보세요. 종수냐? 지금 몇시냐, 마."
감이 먼데, 어째 밤늦게 전화 걸어 야자 임마 맘마 하는 걸 보니 술이라도 한 잔한 것 같다.
"나 지금 부산인데, 포천 올라가면 전화할게. 너 개고기 잡아줄게."
개고기하면 종수다. 낙골에서 무슨 일 있으면 개잡이는 종수다. 술 먹고 긴장되면 개고기 끼가 발동하긴 하지만, 멀쩡할 땐, 손수 개 잡아 개고기 요리를 해 먹이는게 그의 애정 표현 방식이다.
"나밖에 없지. 너깐 놈 생각해 주는 건 나밖에 없을거야."
종수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게다. 그 어떤 느낌이 가슴에 저며온다.
"날 잡아. 너무 늘어지면 못 하니까. 다음주 토*일로 하고, 돈 있고 차있는 보유 형, 정인 형한테만 연락해라, 장소는 내가 잡아놓을 테니. 딴 사람은 연락하지 마. 노러가냐? 너 약해 먹일려는 거지. 아참, 봄이 엄마는 꼭 데리고 와. 부부 일심 동체야. 약도 같이 먹어야지."
나는 듣고 종수는 떠벌렸다. 기브스는 겨우 풀었는데, 너야 봄이 엄마라도 있지만 자기는 아파 누워 있으면 굶는다는 얘기, 그래 일 다닌다는 얘기, 봄이 엄마 고 똑똑한 게 왜 너 같은 걸 골랐는지 참 모르겠다는 얘기, 지 아들 아름이가 정말 아사 직전에 돈 벌러 나섰다는 얘기, 처음 만난 것 기억하나? 나는 신문 보급소라 했고, 종수는
동동주 집이라 했다.
새벽녘, 창문이 밝아올 무렵 우리는 합방을 했다.
격렬하지도, 무리하지도 않았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까불지도 않았다.
"괜챦아?" 지원이의 사랑스럽게 빰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좋았어?" 나지막이 물으니 지그시 눈을 감은 지원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누워 있었다. 서로 특별한 말은 없었다.
여전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산책을 나섰다. 6시. 항동에 와서 산지가 봄이 나이만큼이니 벌써 4년째였다. 4년만에 처음 나서는 산책길이었다. 예쁜 우리집 맞은편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 뒤로는 논이 있고 밭이 있다. 논 옆으론 야트막한 산이 있다. 작은 산이 누운 여인의 젖가슴처럼 둘로 만나는 점에서 기찻길이 넘어온다. 아침 해는 그곳에서 뜬다. 병들어 건강을 잃어버렸지만, 한편으론 잃어버리고 잊어왔던 것들, 소중하고 감사해야 할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다시 찾아 가는 기회가 되는 것도 같다. 눈뜨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할까 한다.
어제 온 동아일보가 방 바닥에 놓여 있다.
'인도주의 실천 의사 협의회를 창설한 김록호 박사, 하버드 대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와 슈바이처 상 수상. 김록호 원장은 1987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협의회를 창설하고 원진 레이온 근로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증에 걸린 사실을 전 사회에 알린 공로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됐다. 그는 특히 1985년 재개발 지역인 사당동에 사당의원을 차려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을 위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해 왔다.'
사당의원 김록호 원장. 신세를 많이 졌으면서도 약속과 책임을 다하지 못해 얼굴 똑바로 들고 먼저 찾아가 만날 수 없는 단 한 사람. 죄책감과 자괴감에서 다시보길 괴로워했던 유일한 사람.
김록호 원장과 사당의원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순식간에 많은 사연이 떠오르고 심정은 복잡해진다. 그 인연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다. 최근에도 톡톡히 신세를 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인터뷰 말미에 실린 기사를 곱씹는다.
'이제 우리 사회도 상당히 민주화됐고,
활동가보다는 학문적으로 공헌하고 싶다.'
바로 이 한 문장이 발병 원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벌써 4, 5년 동안이나 이 한마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 한마디는 1980년대가 잉태하고 생산해 낸 학생 운동 출신의 무수한 혁명가들, 진보적이고 양심적이었던 인텔리들이 나아가야 할 노선을 잘라 말하고 있다. 이 한마디는 1980년대가 배출해 낸 지식인 출신의 거의 모든 활동가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으며 하나의 새로운 통일된 경향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조용히 받아들여 진 논리다. 나는 아무런 대안이 없지만 아직도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과연 이 말이 옳은 것일까?
"우린 패배를 인정해야 해. 철저하게 인정해야 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면."
신촌에서 만난 유정이의 얘기다.
지원이는 용돈까지 쥐어 주며 바람 잘 피다 오라고 했다. 지원이가 새로 사 준 녹색 체크 무늬의 재캣과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유정이는 느낌이 좋은 동창이다.
"유정아, 우리 밖으로 나갈까?"
복지다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에이, 뭐 가까운 데서 술 한 잔 하지."
틀어진다. 나의 제안을 유정이는 점잖게 거절했다. 이럴 때 '꼬랑지 내린다'고 한다.
'에고, 둘 다 입바람만 피다 말겠군. 자식 뭘 지킬게 있다고 쭈굴쭈굴한 30대 유부녀 유부남이,'
우리는 멀리도 못 갔다. 바로 길 건너편, 아마 예전엔 징검다리였을까, 호프집에 들어갔다. 서로 살아온 내력을 주고 받았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 안부도 물었다. 유정이의 얘기는 그런 거였다.
"어설픈 김영삼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살맛이 없어졌어. 뭘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혼란이야.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린 패배했다는 점이야. 철저히 패배를 인정해야 해. 그리고 이젠 프로페셔널해 져야 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30대, 40대를 살아가고 또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시작하려면 전문가로서, 그 부분에서 프로가 되어야 할 거야."
81학번 유부남 유부녀가 만나 바람피는 날이라고 한두 달 전부터 소문난 미팅인데 너무 건전하다.
프로가 된다. 프로패셔널이라. 패배. 패배와 변화라.
"난 요즘 화두가 아마추어였는데. 그래, 난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로 살다가자, 이런 거였는데."
'그래, 우리 지식인들이야 패배하면 프로페셔널할 수 있갰지.
그러면 패배한 창녀는 프로페셔널하게 평생 씹 파냐?
UR이 판치는 땅에 농사짓는 농민과 그 아들, 딸들은 평생 프로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거냐?
철거민은 프로페셔널하게 철거당하고,
노점강들은 평생 노점하고,
노동자들은 소외된 노동을 프로페셔널하게 해야 한다는 거냐?'
왜 이런 못된 생각이 치받고 드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논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고민의 차이는 가지고 있다.
'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너무 쉽게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패배했다. 패배했어. 사회주의가 패배했다. 그래서 사회는 변화했다. 변화했기 때문에 새로운 실천 양식이 필요하다. 이 말은 인정 할 수 있다.'
나는 '누가 패배 안 했대? 그런데 무슨 변화. 그래, 사회주의가 망하고 혁명이 스스로 무너지고나서 뭐냐고. 전 세계으로 제국주의의 지배권과 자본주의가 만개한 천년 왕국이 시작된 것 아니냐고." 라고 묻고 싶었다.
유정이와 만나 웃고 떠들면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이 그날 바람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런 대화와 토론을 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이번에도 사당의원에 큰 은혜를 입었다.
돌이켜보면 사당의원은 단순히 병원으로만 기억될 수 없는 곳이다.
"야, 지금 몇시냐?"
경원전문대 지하 매점에 왔다.
"5시 50분인데요?"
카운터에 있던 뚱뚱한 홍선이가 말했다.
"빨리 컵라면 하나 먹자. 줘."
"예. 1000원 입니다."
짜식은 꼭 사사로운 꼬장을 건다. 모른 척하고 돈을 냈다.
"왜 시간 묻고 라면 먹어요?"
"6시 이후에는 먹지 말랬어. 내일 아침 내시경 검사 받거든."
"기특하네. 형 아무래도 위나 장, 간에 이상이 와도 왔을 거라고. 눈엔 황달끼가 있지, 밥 안먹고 운전하지, 커피는 하루에 7, 8잔씩 빼 먹지, 담배는 물고 살지. 뭔가 이상이 왔나 보지?"
홍선이가 얘기하자 지저분한 잡병은 골고루 앓는 형관이가 탁자로 끌고 갔다.
"아이구 형님, 잘 생각하셨소. 병원 좀 가 보쇼."
형관이는 자기가 황달 걸렸던 얘기, 요도염 증세, 장염 얘기 등을 해댔다.
"오줌은 노랗고, 똥색깔은 시커매. 피곤하고."
"형님, 아마 황달, 간염 초기, 위염이나 위궤양 정도 나오겠수. 이번에 몸 좀 고쳐요."
좀 한가한지 홍선이도 다가와 까불었다.
"아이고 김 사장님. 내시경 검사 받을려면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아아 괜챦습니다. 저녁 한 10시까지 드시고 싶은 것 드시고, 아침 잠 많으시니 푹 주무시고 10시쯤 가시면 되겠네요. 진단도 증세로 봐서 위궤양 초기올시다. 위염이 지나면 위궤양되고 또 재수없으면 위궤양이 위암도 된답니다. 병원 일찍 가보는 것, 남는 장삽니다."
형관, 홍선, 승우, 모두 후배들이다. 사회 운동의 한 영역으로 '농산물 직거래 유통' 부문 사업을 개척해 보자고 뛰어등었다. 여기에 정섭이가 뜻을 같이 했고, 나도 겹사리로 끼여들었다. 지지 부진하다 우여 곡절 끝에 경원대 매점을 인수하여 기사 회생하고 있었다.
"근데 웬일이야? 스스로 진찰을 받으러 다 가고." 정섭이가 물었다.
"그저께, 지원이가 그러는거야. 여기 의료보험증 있고, 병원비 지가 낼 테니까 아예 밤에 사당의원 가서 호철 형이랑 노래를 부르든 말든 같이 야방 서고 아침에 내시경 검사 받으라는거야. 만약 안 그러면 지랄 떨고 바가지 긁을 테니 각오하라고.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는데 뭐 안할 이유 있겠어? 근데 의료보험증을 안 가져왔어."
밥이란 게 끼닐 거르고 다닐 땐 모르겠더니 맘먹고 안 먹을려니 이것도 일이다. 나는 정섭과 같이 집으로 왔다. 정섭이는 봄이가 보고 싶다는데 오늘따라 봄이는 일찍 잠들었다. 나는 지원이와 얘길 나누며 의료보험증을 챙겼다.
"어휴, 허기진다. 이번에 <이것이 인생이다>는 또 뭐냐?"
지원이는 방송국의 구성 작가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를 맡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람 얘기가 많이 나온다. 첫 날 벼락 시리즈 에서는 벼락을 두 번 맞고도 살아난 사람, 복권이 두 번이나 당첨 돼 돈벼락을 맞은 사람 등의 얘기가 나갔다. 지원이는 요즘 이런 이야기들을 찾아내느라 잡지란 잡지는 싹 훑고 있다.
"아침 예불 때마다 머리로 쇠종을 108번 때리는 스님이 있대. 한 2년 전에 어디에서 다뤘는데, 불교방송이 수소문을 해 봐도 잘 못 찾겠대."
지원이가 방송 소재를 얘기했다.
"골 때리는 스님인데?"
나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머리로 쇠종을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뎅뎅. 살아 있대?"
"못 찾는 것 보니까 지금쯤 사망했을지도 몰라."
낄낄거리다 나는 기겁을 했다.
"얼레. 내가 지금 뭘 집어 먹는거야?"
정섭이와 지원이가 먹던 땅콩 안주를 무의식적으로(얼떨결에) 주워 먹고 있었다.
"어휴, 화상. 어째 그럴까. 더 먹고 내일 또 굶고 모레 가."
억을한 건 그게 아니었다. 사당의원에 전화를 했다. 야근하던 간호사가 애길 다 듣고는 막 웃더니 '괜찮아요. 왜 6시부터 굶어요. 12시까지 드시고 한숨 푹 주무시고 빈 속에 오면 되는데' 라고 했다.
밤이 늦어 정섭이를 데려다 주어야 했다. 정섭이네서 자고 아침에 사당의원으로 가기로 했다.
"정섭에, 청계천에서 물건 사 가지고 사당동 거쳐 성남 가면 되겠다 그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말했다.
"야, 벼원부터 가자. 빨리 끝내고 너 밥부터 먹고 보자. 못 먹은 널 데리고 안스러워 어떻게 하냐?"
사당의원. 나는 접수대로 갔다. 낯익은 간호사들이 제비집의 제비들처럼 재잘거리며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앗! 또 없네. 야, 섭아. 의료보험증 없다야."
정섭이는 자기 머릴 툭 쳤다. 집에 전화를 했더니 혜주 얘기가 걸작이란다. 흥겸이가 의료보험증을 놓고 왔다. 건넌방 책상 위를 봐라. 책상 위에 있냐? 없다. 못 봤냐? 지금 봤다. 어디 있냐? 책상 아래 있다. 정섭이는 밉지 않은 듯 얘기하며 웃었다. 호철이 형에게 호출해 얘기했더니 수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일단 검사부터 받으라고 했다.
잠시 후 진료실에 들어섰다. 낮엔 처음이지만 밤에는 최근 한두 달 도안 일주일에 두세 번은 왔던 방이었다.
"자, 앉으세요. 어이구, 아시는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이 반가워하며 멋적게 웃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캔맥주를 마시며 문화와 노래에 관한 얘기를 같이 나누던 분이다.
"어떠십니까?"
"소화가 안되고, 새벽에 속 쓰리고, 요즘 이상하게 헛트림이 나와요. 조금만 먹어도 헛배가 부르고요."
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나 또한 몸이 전반적으로 맛이 갔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 발로 병원을 찾았을까.
"그 외 다른 증상은 없어요? 혹시 몸무게가 준다든지...."
몸무게가 줄어? 몸무게가? 아차 싶다.
"몸무게요? 선생님, 거 금신이 음반 내는 일 하느라 한두 달 바짝 뛰어다녔더니 한 8kg 빠진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금신이 제1집 <희망의 노래> 만들기.
12월 말에 홍순이가 우스꽝스런 제안을 했다. 홀순이는 민주 대머리 철민이와 형님 아우 하는 사이다.홍순이는 제가 돈 벌어 아우 철민이가 훌륭한 민중 배우로 끝까지 버텨 나가는 데 버팀목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중고차를 사서 철민이와 과일 장사를 나섰다. 이때 어디 바닷가에서 수련회가 있었다나. 극단 현장의 고문을 자처하며 참석했다가 금신이와 눈이 맞았다.
"형님, 형님은 아무래도 배추 나를 사람이 아니십니다. 형님 몫까지 제가 나를 테니 형님은 우리 막둥이 좀 돠와 거 뭐냐 배, 배병수처럼 민중 가수 매니저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매니저란 말에 홍순이도 웃고 나도 껄껄거리며 웃었다. 마침 최진실 등을 키워낸 배병수 씨가 살해되어 시끌벅적하던 때였다.
일단 6월 정도가 되면 금신늬 판이 나올 테니 초기 선전, 홍보, 공연 활동까지는 관리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곡을 쓰는 것부터 시작하여 편곡, 녹음, 유통, 섭외 등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자보면 배울 것도 많이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신명이 났다. 무기력과 좌절, 혼란에 빠져들어 간 듯한 지 몇 년 만에 새롭고 창조적인 활동력이 생겨났다. 그렇게 두세 달을 신경쓰고 뛰어다니니 몸무게가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줄 알았다.
의사 선생님은 표정이 다소 굳어지는 듯 하더니 내시경 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99% 암입니다."
왜 그럴 때 맥없이 웃음이 나왔을까? 아주 빠른 순간에 어떤 전환이 왔다. 의사의 목소리는 젖어들어 갔다. 아주 우울한 음성과 표정이었다. 내 앞에서 마음 아파 힘들어 하는 의사를 편안하게 해 주고 위로해 줘야 할 것만 같앗다.
암. 암이라니, 암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 죽는거야/ 이렇게 끝나는거야? 살 수 있는거야? 김남주 선생처럼? 이범영 의장처럼? 무식하고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애써 삼켰다. 내시경 고무호스를 삼켜 위 안에 집어넣을 때처럼 그 순간 울컥거리며 아픈 것들을 꿀꺽 삼켜 넣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죽어요, 살아요? 라는 질문을 삼키고 빠르게 객관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게산한다.
간호사들은 이미 알았나 보다. 진료실 문을 나서는데 네 명이 나란히 붙어 앉아 바라보았다. 정섭이가 따라 붙었다.
"뭐래?"
"암이래. 위암, 99%래."
밖에 나와서도 정섭이는 아무 말, 아무 표정이 없었다. 햇살은 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4월.
"섭아. 담배 좀 줘라."
정섭이는 순순히 꺼내 주었다. 오늘까진 담배를 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안 왔다 치자.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날, 하늘은 가끔 뒤통수를 친다니까."
정섭이가 중얼거렸다. 새삼 묻지도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어떻게 뒤통수를 맞아 왔는지, 병원 옆 화초대 위에 걸터앉아 깊게 깊게 담배를 빨아 올렸다.
"참, 어쩌자고 인생이 이렇게 쭈글쭈글해지냐. 야, 정섭아. 너무 웃기지 않냐? 암이라니. 참내 웃겨."
피식 웃는데, 정섭이는 말옶이 먼 곳을 보았다. 호철이 형이 달려왔다. 오히려 놀란 건 호철이 형인 듯 뭐라 말도 못 건넸다. 호철이 형은 거의 한 달이나 지나 실토했는데, 의사 선생님과 통화하며 '99% 암이다'란 말을 '암이고 99% 사망' 이라는 말로 잘못 들었단다. 오진이 아니라 와전.
"빨리 가자."
호철이 형은 사당의원 아래에 있는 방사선 의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사당의원엔 계산도 못했다. 또 다급해진 불행은 무료 진료였다. 사당의원은 늘 그랬다.
정섭을 태우고 청계천으로 갔다.
학교 매점에 테이프 매장을 설치했는데, 가격과 종류 등을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어색한지 서로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정섭이는 아버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간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정섭이에게 호출이 왔다. 매점으로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받으라고 했다.
"여보세요. 아이구 홍순이냐?"
"형님, 이게 웬일이요? 어쩌다 글쎄, 아이 참."
알아 버렸다. 홍순이의 목소리는 막혀 있었다.
"뭐가 임마. 괜찮아."
그때까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정섭이가 함께 있어 더욱 감정을 드러낼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정섭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휴, 형님. 잠자다 전화받던 신이가 엉엉 울어버리데요. 호철이 형이 연락해 줬어요."
금신이의 눈이 떠올랐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 시원스럽고 쌍꺼풀진 예쁜 눈, 그러나 강한 눈, 그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눈언저리가 붉어진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목부터 메어 오기 시작했다.
"괜찮다니깐. 신이는 먼저 갔냐?"
나는 말을 돌리려 했다.
"혼자 갔을 거예요. 형님, 아, 형수님이랑 봄이는 어떻게 한대요? 아 참."
홍순이가 마침내 울어 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지금....'(멘트, 지원)
(봄봄봄봄 봄이 아ㅘㅆ어요. 키보드 연주 깔고, 나.)
'그럼 안녕. 안녕히 계세요.'(엔딩, 봄)
소식을 듣고 집에 연락해 보니 이 자동 응답이 흘러 나오는데, 귀여운 4살 봄이랑 지원이가 함께 떠올라 아프더란다.
'형수님이랑 봄이는 어떻한대요/ 란 홍순이의 말 한 마디가 아직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햇던 부분을 슬쩍 건드리고 말앗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렷다.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벌써 두 빰을 지나 턱까지 내려 왓다. 나는 안경을 벗엇다. 정섭이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애꿎은 홍순이에게 화를 낸다.
"짜식들아! 무슨 애길 한거야?"
나는 일단 경원대로 갓다. 오늘 할 일은 먼저 지원이를 만나는 것이다. 지원이를 만난 후 곧바로 분당으로 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그리고 내일 세브란스로 간다. 그런데 아직 지원이가 일 끝낼 시간이 아니었다. 두 시간 반을 보내야 했다.
매점에 들어서니 카운터에 있던 홍선이는 모른 체했다.
"아이고 김사장님, 박사장님 출근하십니까?"
어색했다. 막내 대경이는 멀리서 바쁜 척했다. 물건을 나르던 승우는 '왔어요?' 한마디만 했다.
"형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형관이 녀석이 능청과 수다를 떨었다.
"뭘?"
진단 결과를 얘기해 주며, 곧바로 튀어나온 질문을 받앗다.
'뭐긴 뭐요, 형님 장례식 문제지.'
형관이가 농담을 건네는데, 정섭이가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이것들이 뭘 알지도 못하면서 왜들 이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간."
잠시 머쓱해진다. 정섭이가 화를 내니 내가 분위기를 바꿀 수밖에.
"그러게 말이야. 니들, 의견 있냐?"
"참 안됐수. 아, 형이 아무리 십여 년 동안 도시빈민 운동하며 방방 떳다지만 한 일이 년 아무 일 안 했쟎수. 그러니 뭐 도시빈민장이 될 수도 없잖아. 그렇다고 형이 뭐 문익환 목사님아나 김남주 선생처럼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이름을 날린 것도 아니니 통일 국민장, 민주 시민장 거리도 못 되고,"
[참 못난놈! 요수아처럼
여섯달, 길게 잡아 3년만 하다가지 십년씩이나
해가지고 죽어서까지 괄시당하냐?
괜시리 눈물나게서리...방랑자]
형관이의 너스레에 흥순이와 나는 '맞아, 맞아' 하며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치르기로 했냐?"
나는 남 애기 하듯 물엇다.
"에에 그리하여 '김흥겸 한겨레장'으로 치르기로 했지. 한겨레장, 멋있잖아? 뭐 같기도 하고. 막판에 몸 담고 망해먹은 게 우리 한겨레 농산이잖아. 우리가 독박 써야지. 그날 이 매점에서 영결식 하고 뜨는 거야. 노래야 금신이 누이가 한방 때려 주면 되니깐."
우리들에겐 이런 기질이 잇엇다. 해하과 웃음, 가슴 깊이 저며든 슬픔과 아픔을 탈바가지 속에 꾸겨넣고는 비꼬고 과장하여 반전시키고 절제하는 놀이가 있었다. 이럴 때 잘난 체 하고 삐지면 바보가 된다.
세검정 상명여대 앞 카페 들무새
긴 하루를 보내며 비로소 홀로 있게 됐다. 9시 30분. 지원이가 오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더 있어야 했다. 우유를 시켰다. 커피가 아니라 우유를 시킨 건 이것이 처음이다.
'암. 암이다. 위암이다. 어던 가능성이 있는가? 만약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버렸다면 죽는다. 6개월? 1년? 그쯤 살다 죽는다. 그렇지 않으면? 위를 다 잘라낸다. 잘라내고? 항암 치료를 받는다. 그렇지만 재발하면 사망이다.'
'죽음.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직 끝났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언젠간 다시 사랑하고 싸워 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쉬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날아가 박힐 날이 올 것이라고, 그런 날이 40대고 50대고 다시 오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조급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자, 다시 먼먼 길을 긴 호흡 큰 걸음으로 걸어가야 할 날이 올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새로운 부활은 비껴가는가?'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거야. 그래, 나름대로 수고했어, 열심히 살았어. 최근 2,3년간의 삶도 솔직하고 정직했던 거야. 잘 살아온거야.'
지원이를 기다리며 이렇게 죽음을 생각했다. 슬픔은 자기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다. 살아온 관계 속에서 슬픔은 시작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끝내 아버지께 내 뼛가루를 뿌리고 묻는 아픔마저 안겨 드리는구나. 아버지가 느끼실 허망함, 그 무너져 찟어져 갈 아픔이 가슴에 저며들었다. 오히려 어머니는 어떤 일이 닥쳐도 신앙의 힘으로 감내하실 것 같았다. 예민하고 여린 아버지만 그 아픔, 그 허망함을 스스로 달랠 힘도, 의지하여 맡기실 곳도 없어 보였다.
봄이 생각이 났다. 봄이는 아빠를 기억하지 못할거야. 봄이가 안게 될 서글픔보다는 봄이가 기억조차 해 주지 못할 아빠가 되어 스러져 갈 생각에 서러웠다.
불쌍한 지원이. 지지고 볶아도 지원이가 얼마나 여리고 외로움을 타며 겁이 많은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맨살 비비며 더 살아야 할 나인데...
장모님은 어떠실까? 장인 어른이 위독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뿐인 사위가 수술실과 병실에 있을 때 장인 어른이 돌아가시게 될 것만 같았다. 정말 못할 짓이다. 처가댁의 여러 선하고 따뜻한 분들이 예뻐하고 귀여워해 준 지원이었다.
결혼하고 이렇게 쓰러지는 내가 얼마나 미워질까?
슬픔은 이렇다. 자신의 불행과 죽음은 그다지 억을하지도, 서럽지도 않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들이 느끼게 될 허망함, 괴로움, 원망, 한스러움, 걱정, 절망... 이런 아픔과 표정이 되돌아오면 슬픔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한적한 카페에서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 돼. 말도 안돼. 지금은 아냐. 이번은 아냐. 무조건 살아야 해.'
갑작스런 전환. 감정의 흐름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갑자기 '이번엔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느낌들을 작은 메모지 위에 옮기고 있었다. 메모지를 놓고 일어섰다. 찬물로 세수하고 코 풀고 정신차릴 생각이었다. 문 옆 화장실로 향하는데 지원이가 들어왔다. 감출 길이 없었다. 지원이는 내 붉은 눈망울을 보고 말았다.
"왔어?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지원이는 다소 당황했다.
세면대 위에 있는 거을을 봤다. 세수하고 코 풀고 물기까지 다 닦았지만 아직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멍하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깊고 긴 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해. 놀라고 아프게 해선 안돼. 내가 약한 모습 보여선 안 돼.'
다시 한 번 긴 숨을 훅 들이키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지원이를 바라보았다.
'아차!'
지원이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갈겨 쓴 메모지를 가지런히 모아 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 있었다.
"암이래?"
지원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먼저 눈시울을 붉혔다. 지원이는 잠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지원이가 큰일 앞에선 당차게 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 일에는 한없이 작아져 버리는 지원이는 큰일이 닥치거나 터지면 그만큼 커지곤 했다. 많은 얘기도 없었다. 나는 오늘 진단 결과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애기했다. 지원이는 숨죽이고 긴장한 채 듣고 있었다.
"난 지금 곧바로 분당으로 갈게. 어머니께 말씀 드리고 세브란스병원 알아볼게. 세검정 어머니껜 니가 알아서 판단하고 적절하게 말씀드려. 너랑 나랑 챙겨 드려야지."
우리는 들무새를 나왔다. 나는 세검정 집 앞에 지원이를 내려 주었다.
"조심해서 가. 내일 연락하고."
나는 차에서 내리는 지원이의 뺨을 살며시 만졌다.
밤 11시. 분당으로 가기 전 대림동 스튜디오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어쩌면 내일 병원에 들어가면 적어도 한 달간은 사람들을 못볼지도 모른다. 우선 금신이가 사운드랩에서 작업중일 것 같았다. 오늘은 신곡 <포기하지 마>를 녹음하기로 한 날이다. 털털거리는 내 차 '민들레'의 라디오에선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거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들무새… 석근 형, 지원, 흥겸.
무더운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서철협과 전노련이 함께 사용하던 동대문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지원이구나?"
반가웠다. 여름 내내 지원이는 학교를 졸업한 후, 극단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극단 내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한게에 부딪혔고, 결국 극단을 탈퇴해 나왔다. 더욱이 병건이와의 관계가 게속 꼬여만 갔다. 잘 안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야 그래, 병건이랑 요즘 잘 되냐?"
"아니, 잘 안 돼. 형은?"
지원이는 승연이와 나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
"잘 안 됐어."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어떠한 변화, 질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야야, 그만둬 버려라. 너도 할 만큼은 했다야."
"에이고 지겨워. 형도 그만 둬라. 그래 가지고 누가 연애하겠냐?"
"지원아, 그냥 너랑 나랑 살까? 부산으로 도망가서?"
"형, 그래버릴까?"
우리는 서로의 연애 카운슬러였다. 나는 나의 연애 문제를 미주알 고주알 지원이에게 털어놓았고, 지원이는 또 여자의 입장에서 나에게 부족한 점을 일깨워 주곤 했다. 그 해 여름 그 전화 통화를 하기 전까지 지원이는 7년째 병건이와 연애중이었고, 나는 수미와 5년, 승연이와 5년, 사랑 두 번에 십 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얼버무리며 말장난 같은 통화를 끊었다.'다시 연락하자' 하고. 그런데,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가. 사실 둘 다 지쳐 있었다. 또 둘 다 잘 알고 이었다. 오랜 카운슬링을 통해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별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게 해 주길 바라는 것을 지원이에게 권했고, 지원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서로의 사랑이 잘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근이 형이 나를 만나러 온 날 지원이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나는 지원이의 목소리에서 '우리 그냥 살아 버릴까, 그러자' 햇던 농담이, 지원이에게도 그 어떤 운명의 화살이 되어 나르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나기로 했다.
저녁 7시 30분, 상명여대 앞 '들무새'. 지원이도 나도 살아온 경륜과 통밥이 있었고, 또 자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오늘 같은 날 둘만이 만나 서로 마음트고 술 한잔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너져 버리는거다. 사고 치는거다. 그래서 어떤 안전판이 필요했을까? 지원이는 같은 장소에서 한 시간 후에 친구와 만날 약속을 잡아 왔고, 나는 석근이 형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지원아, 내가 다시 수미를 만나러 미국 가야겠냐?"
"아니."
"그러면 내가 승연이를 더 기다리며 찾아가야겠냐?"
"아니."
"너, 나하고 함께 살면 안 될 특별한 이유 있냐?"
"아니."
내가 빠르게 세 번 물었고, 지원이가 '아니'라고 세 번 답했다. 그리곤 곧바로 한 번 물었다.
"형은?"
"아니."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석근이 형, 지원이랑 나랑 결혼해서 사는데 반대할 이유가 있어?"
"물어 보는거냐?"
"아니"
그렇게 '들무새'에서 지원이와 나의 혼담은 오고갔다. 그것은 스캔들이었다. 벌써 오 년 전 얘기다.
"앗! 형"
금신이가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는데, 벌써 크고 둥그런 눈에 눈물이 맺혔다.
"형, 어때요?"
금신이가 목소릴 낯추며 물어 봤다.
"이거 인생이 왜 이렇게 좆 같냐? 씨부랄, 어떻게 남들은 잘도 위궤양이두만 몸 좀 챙겨야겠다 했더니 한 방에 암이냐, 그치?"
금신이는 따라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어떻게 된대요, 형?' 하고 물었다.
"뭐 어덯개 돼. 전이가 심하면 빨리 일기 쓰는거지. 일기쓰다 가는거야. 영화에 나오잖아. 녹음을 하든, 비디오를 찍든, 하는 거있잖아. 아니면 맹장 잘라내듯 위 통째로 잘라내고, 속 비우고, 맘 비우고 사는거래, 무위 도식하는거야, 무위 도식. 그나저나 녹음 잘했냐?"
이런 걸 야부리 푼다고 한다. 이바구 풀어 놓는다 하기엔 내용이 너무 빈약하고.
"겨우했어요. 자꾸 형 생각도 나고. 이 악물고 불렀는데 너무 세대. <포기하지 마>만 녹음했어요."
"야 신아. 내가 오늘 이 꼴 당하고 나니까 노랫말이 새롭게 다가오더라. <황혼> 노랫말도 그렇고, 박노해의 <작아지자>도 오늘은 다르게 사무치던데. 야, 얼마나 훌륭한 매니저냐? 완전히 노랫말에 필을 주잖아."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 내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
작아지면 내 모든 것 도욱 작아져
내 사랑의 완성은 없어지는 것.
순결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눈물과 시련에 아픔을 담아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린 나
금신이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히 매니저한다고 뛰어다닌 일이 발병 요인이라거나, 아니면 악화시키는 조건이 되었다는 혐의 혹은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신아, 당분간 형이 함께 못 해도 잘해. 얼마나 다행이냐. 만약 그냥 학원에서 영어 강사나 하다가 암 걸렷다고 생각해 봐. 황당하고 허망했을거야. 오랜만에 너랑 한 번 열심히 뛰다 아픈 게 오히려 다행이지 뭐. 열심히 해."
진심이어ㅆ다. 영어 강사는 그저 먹고 사는 일일 뿐이지만, 금신이의 매니저 일은 다시 사람들을 만나는 탯줄과도 같았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 새롭게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하는 활동의 시작이었다.
나는 새로운 기쁨과 활력이 솟아오르기 시작함을 느끼고 있었다.
새벽 길을 달린다.
어머니는 새벽 4시 30분이면 새벽 기도를 가기 위해 어김없이 일어 나신다. 아버지는 청주에 게실 것이다. 민들레는 새벽 바람을 가르며 분당으로 향하고 있다. 분당 아파트 동네 이름이 효자촌이다.
효자촌. 스무 살 때부터 부모님께 걱정과 염려만을 드려왔다. 쉬지 않는 못질, 끝나지 않는 못질. 그것도 부족했던가? 자식이 부모님 가슴에 박아댈 가장 큰 대못을 박으러 이렇게 오고 말았다.
"웬일이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겼니?"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늙으셨구나'란 생각이 새삼스럽다.
"아, 예. 위가 좀 안 좋아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요."
벌써 호흡이 길다. 숨소리가 물기에 젖는다. 목젖에 뜨거운 기운이 오른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이미 마음을 다부지게 묵어 세우시는 듯하다.
"왜, 암이래니?"
어머니의 표정엔 슬픔이나 걱정보다는 노여움이 서렸다.
'그렇게 몸을 막 굴려대더니, 네 몸은 하니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야. 하나님의 성전을 그렇게 학대하니 어떻게 큰일이 안 나겠니? 엄마가 벌써 병원 가 보라고 애기 안 하대. 넌 그렇게도 모르겠니, 헛 똑똑아. 주님의 뜻이 있어 깨우치시는거야. 넌 몰라도 기도 생활하는 사람은 남다른 느낌과 눈이 잇어. 우선 자라.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라"
단호했다. 어찌 놀라고 당황하지 않았을까만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의 경거 망동과 교만함을 꾸짖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새벽에 잠이 들었고, 어머니는 새벽에 깨어 기도하셨다. 그 새벽에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지. 아침에 어머니는 학교에 가시며 차비와 메모를 남기셨다.
'연대 세브란스 암센터 김병수 소장. 연대 부총장. 연락하려무나.'
6월의 거리를 걷고 있다.
청바지에 보랏빛 티를 입고, 새로 산 재킷에다 모자를 썻다. 사람들이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만 같다. 다들 잘 살아가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 앞 횡단보도, 건널 사람, 건너 올 사람, 젊은 대학생들이 서 있었다. 무심코 길 건너 철길을 바라보았다. 철둑길 벽면엔 밝은 색상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철길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불기둥이 떠올랏다. 더 이상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 가는 날은 하루가 깨지고, 빨간 주사를 맞고 나면 3, 4일이 깨진다.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잇는 자신을 본다. 글을 쓰면서도 일을 저지르고 까발리지 못하고 있다. 주저하고 있다. 그래서 글은 자꾸 가벼워지고, 편안한 얘기에만 달라 붙으려 한다. 이것도 결국 부질없는 욕심이고 미련이 아닐까? 여전히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팔아 먹는 것은 아닐까?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침 산책길. 조용하고 벌써 뜨겁다.
산엔 나무가 있다. 나무가 모이면 숲이 된다. 나무는 사람보다 크다. 나무는 가지와 잎사귀가 있다. 저 숲속에 들어가면 시원하겠다. 귀찮아서 오르지 않았던 산길. 게으르던 발걸음이 시원한 그늘을 찾아 부지런해졌다.
수미가 생각난다. 승연이가 생각난다. 지원이와의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본다.
"5년씩 두 번 연애하니까 십 년이 갔다."
곧잘 내뱉던 말이다.
'지원이랑 어떻게 만나 결혼 했어요?'라고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말한다.
"나? 5년씩 두 번 연애해서 십 년 보냈고, 우리 지원이는 한 번에 칠 년 연애했는데 들 다 깨졋어. 지원이랑은 서로의 연애 카운슬러였거든. 둘 다 지쳤어. 결혼하고 싶었지. 에라, 너랑 나랑 살자. 살면서 다시 연애하자."
그래서 결혼해 버렸다고 말한다. 벌써 5년이 흘렀다.
이젠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형식으로 써내려 갈 것이다.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책상 위에 있던 책들을 모두 치워 버렸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도화지가 놓일 것이다. 방을 치웠다. 문방구에 가서 도화지와 가위, 테이프를 사 와야겠다. 새 노트도 필요하다.
부활의 노래.
오늘 이 길엔 비록 좌절과 절망, 패배와 무기력뿐일지라도, 새롭게 피어날 사랑과 다시 일어서는 부활을 그리고 싶다.
첫댓글 광식 형님이요, 곧 이어 아우들이 이어쓰시리라 생각합니다......참, 이 글에 나오는 종수 씨 연락처 알고 계세요? 제 신혼시절 저희 집에 막걸리에 두부 한모 사들고 하룻밤 새우고 갔었는데...종수 씨 궁금하네요.
종수 형 하늘나라갔어요 ㅠ 간경화로 투병하다가, 한 5.6년 된것 같아요. 마지막에 좋은 사람을 만나 그 분이 지극히 간호해줘서 힘들게 산 것 보단 훨씬 행복하게 떠났어요,
뭐?? 왜??.... 뭔가 글 쓰고 싶다며~ 어떻게 글 쓰는 거냐고 해서, 김윤태 형 영등포 노동자문학회에 관계했었는데~뭐 써서 남기지 않았는지~ 아, 종수 형~
광석 형. 이제야 겸이 친구들이 하나 만들었습니다. 겸이 글 갖고 놀다 갈 쉼터 구석방 포장마차가 되었으면 합니다. 늘 건강, 충썽!!
사무실 여러 사람들이 분주히 제 할일 하고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위 글을 읽다가 당시의 풍경이 매몰차게 다가와 또다시 목구멍이 뜨겁고 눈앞이 침침해 진다. 슬픔과 아픔을 비꼬고 반전시키며 절제된 놀이에서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삐지고 공연히 화가나서 바보가 되었다. 나는 정말이지 위중한 경우의 상황판단이나 전혀 낯선 변화에 잘 적응을 못한다. 뿐만아니라 해철의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혼란 스러워하며, 차라리 내가 해철의 경우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만 하고있었다. 해학과,반전과절제된 놀이를 하는 후배들이 그 순간은 참으로 야속했다. 적어도 그 놀이를 진행하는 중에 한번도, 어느 녀석도
진지하게 앞으로,아니 내일 당장 어떤 일이 해철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다. 나 혼자 삐진건 순전히 그런 이유였고, 또한 지금까지 해철이가 살아온 내력과 그 깊이를 한 4~5년 사이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내게 녀석들의 놀이는 조금 짜증이났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짧은 만남을 이어온 후배들도 여유로움으로 해철이를 위로 했는데, 그렇지 못한 당시의 내 모습이 못나게 여겨져 더욱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