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 값진 날이다. 나를 시험한 날이다.나의 존재를 다시 대오각성한 날이다.
신촌리 처가에 내자를 내려주었다. 김장을 한다고 집수선을 한다고 야단이지만
돌아나올 때 내게 주어진 여유만만한 시간이야말로 내겐 금싸라기 같은 시간이다.
늘 시간이 게으른 나에게 산책과 운동을 채근한다. 그래-. 차를 포도과수원 곁에 세우고
손학규별장이 있던 안막으로 걷는다. 거두리-. 다른 곳보다 지대가 훨 높아 정오에 걷기 안성마춤이다.
습하지 않다. 벌걸음이 여간 사뿐사뿐하지 않았다. 기분이 짱이다. 대룡이 누워있는 곳까지 근접해
숨소리를 확인하고 하산하다가 감툰고개가 나를 손짓한다. -. 감투니 고개라고 주위에서 불렀는데
정식명칭은 갑둔리고개이다. 방아다리 막국수길로 해서 거두리로 올라와 이 고개를 넘으면 오지 두메였던
동면 공골 상걸리가 나온다.
상걸리-. 유년기때 큰 누님이 공골 남양홍씨네로 출가해 엄니 손을 잡고 새벽같이 이 길을 넘던 추억이 남다르다.
사이다 음료처럼, 약숫물처럼 부글부글 솟구치는 추억들이 내 등을 밀어 벌써 중간을 오른다.
643미터의 명봉-. 언젠가 한번 오른 적이 있지만 무엇인가 떠밀려 대충 다녀왔던 그 고개를 다시 올랐다.
노란 눈이 흩날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색 낙엽송 잎이 눈처럼 낙엽져 내리는 감투니 고개를 오르며 만추의 가을을 성큼
베어먹는다. 여유롭게 앉아 흩날리는 노란 눈발을 보면서 친구에게 지인에게 문자를 넣느라 부산을 떤다.
명봉-. 친구 하나는 예전에 이 고개를 매일 넘어 상걸리 명성초등학교로 출근을 했다고 감회에 젖어 핸드폰으로 즉석 답을 보내와 젖은 목소리를 울려준다. 아! 추억들이 지금 노란눈처럼 친구의 가슴에 펄펄 내리겠지-.
너무 상쾌한 산행이다. 그 무엇에 떠밀리지 않고 사유의 폭을 한껏 키워가면서 전후 좌우를 보고 멀리 조망을 하면서
55년전의 내 발자국 엄니 발자국이 새겨진 감투니 고개를 오르는 심정을 재현하니 그야말로 설레임이 산울음같다.
예전 김툰고개를 넘을 때-. 산골 총각들이 콩, 팥 옥수수등을 자루에 넣어 어깨에 메고 훌훌 이 고개를 넘어 거두리로
내려가 애막골 진선이 고개에서 곡식을 팔고 오던 모습들이 순간 되새긴다. 그 때 힘이 여간 장사가 아니었다.
당시 얼마나 험했던 그 길, 오직 대룡산을 넘나들던 통로니 반질반질했지만 지금은 상배조차 어렵다.
더우기 동홍천으로 고속도로가 나서 대룡산을 넘나드는 차량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추억들은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
소장수들이 소를 사서 끌고 넘던 고개, 화전민들이 곡석(사투리)을 팔러가던 곳이며, 화전을 하면서 처녀 총각들이
정분을 나누며 해맑은 소리로 골이 떠나가도록 몸을 떨며 육감의 사랑을 퍼주던 그 두메산골이 아니었던가!
노란 눈이 펄펄 내린다. 내린 눈은 바위를 덮고 등걸을 덮으며 화려한 엘로우 산길을 만들어 나를 반긴다.
그래-. 손으로 내린 낙엽송을 한웅큼 잡는다. 보드랍다. 예전 안남미 쌀보다 조금 길다. 예전에 기르던 강아지 털같기도 하고 비에 맞아 웅크리고 있던 나비의 등어리같다. 이 노란비가 다 내리면 무섭게 나목들은 비탈에 서서 하얀겨울 절규하며 인고의 세월이 시작되리라.
간간이 등산객들이 스친다. 춘천시가 속살을 보이지 않고 있다. 농무가 조금은 엷게 봄가을 커튼으로 치듯 나를 응시한다. 낙엽들이 골짜기로 모여 웅크리고 있다. 냉추위에 대비해 옷을 벗는 나무들이다. 모두는 가슴 한켠에 나무 한그루를 심고 산다고 했다. 어떤 나무를 심어 가꿀 것인가!
가을산은 이제 겨울산으로 진입하면서 화려함에서 벗어난다. 김장하듯 자연도 단단히 준비에 서두르고 있다.
계절이 인간을 교육한다. 일침을 놓는다. 각성을 준다. 겨울나기에 신경을 쓰는 지금은 아직 시월 상달이 아닌가!
명봉에서 좁아진 혜안을 넓히고 도랑을 치고 내려온 날이다. (글-德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