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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나씨 直長公派의 600여년 家基 터 錦溪里
글/나천수(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1. 서두에
시조 부(富)가 북송의 말기에 고려 사행의 일원으로 왔다가 고려 체류 중에 북송이 멸망하자 고려에 귀화하여 정착함으로서 고려인이 된 것이다. 귀화한 부(富)는 감문위 상장군에 봉해져서 귀화 초기에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살았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모든 국민이 오늘날처럼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거주의 지역이 국가로부터 지정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본관제인 것이다.
국가로부터 지정 받은 거주의 지역의 범위에서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신라, 고려, 조선조까지 이어오는 본관제이다.
오늘날은 주민등록법, 호적법 등에 의해 개인이 어디로 이동하든 간에 개인 신분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개인 신분을 확인할 증표가 없었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아예 지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거주하도록 국가통치 방편으로 본관제를 시행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본관제는 오늘날 성관 의미의 본관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2. 시조 부(富)의 거주지 지정의 역사 접목
오늘날에 귀화에 관한 법이 발달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귀화에 관한 법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국가 기록인 왕조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역사기록을 보면 귀화를 향화(向化)로, 귀화인을 향화인(向化人)이라 표기하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향화(向化)란 단어를 검색해 보면 무려 755건이 검색되고, 향화인을 검색해보니 102건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경 근처 지역에는 끊임없이 향화, 향화인의 문제를 다루는 기사가 많았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향화인을 대우하고 관리하는 자세한 사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귀화 업무가 매우 적극적인 행정 분야란 것을 파악할 수 잇다.
시조 부는 국경 마을을 건너는 귀화가 아니라 사행으로 왔던 인물이 귀국을 포기하고 귀화하는 특별한 경우인 것이다.
귀화해 온 향화인에게는 먹고 살 수 있는 경작 터를 주고, 본관지역을 지정해야 했다.
물론 시조 부는 원래 고려인이 아니기에 감문위 상장군을 역임할 때에는 개성에서 살았겠지만, 퇴임을 한 후에는 분명 어느 지역을 지정 받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 지정 받은 곳이 본관지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조 부가 여황에 정착하게 되는 역사 상황논리를 필자가 이미 「나주나씨 뿌리 이야기」에서 밝힌바 있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과 고려를 오가는 해상 뱃길은 대략 3가지가 있었다.
수도 개성의 포구인 예성강에서 출항하는 방법, 경기도 남양항에서 출항하는 방법, 영산강 회진항에서 출항하는 방법이다.
물론 육로로 갈 때는 압록강을 건너면 된다.
그러나 압록강 주변에 오랑캐라고 지목되는 나라가 포진해 있을 때는 육로는 사실상 어려운 선택이다.
예를 들어 송나라 때에도 송의 수도 개봉부(카이펑)에서 육로로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루트는 있지만 금나라라는 오랑캐 나라를 지나야 하므로 부득이 해상 뱃길을 선택한 것이다.
고려 도경이라는 보고서를 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도 뱃길로 오간 사람이다.
서긍이 고려에 다녀간 후 2년 후에 시조 부의 사행 일원이 뱃길 따라 고려에 온 것이다.
만약에 시조 부 일행이 고려 서해를 거슬러 곧바로 예성강 포구로 상륙하였다면 여황이란 지역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뱃길은 항상 풍랑이라는 위험에 노출 되어 있어 과거 신안해저 유물선의 보물 인양의 사례를 보더라도 선체 자체가 침몰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의 배는 오늘날 절강성 영파항에서 출항한다. 영파항 앞바다는 주산군도로 섬이 무려 4천여개가 있어 이 섬이 해로를 알려주는 등대역할을 하며, 이 섬의 등대역할이 끝날 즈음에 고려의 가가도(거거도)가 나타나고, 홍의도(홍도) 등 고려의 섬이 등대역할이 되어 고려의 서쪽 해안을 따라 개성으로 항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풍랑을 만났다면 선원들은 어디로 입항 하려 했을까.
바로 남방 루트인 영산강 회진항이었을 것이다.
흑산도와 영산강 회진항은 항도로 이어진 뱃길이다. 조선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펼 때 흑산도 주민들은 모두 영산강의 영산포로 이거하여 살았다. 그래서 영산포가 흑산도 홍어가 유명해진 이유이다.
고려와 송나라를 오가는 배의 선원은 요즈음 말로 베테랑급 선원이었쓸 것이니, 충분히 해난 사고 미연 방지책으로 당초 뱃길을 변경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역사 상황 논리에 접목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에 대한 증빙 자료, 근거서류를 내놓으라 하면 내 놓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가 「역사 상황 논리 접근」이라 표현한 것이다.
회진항에 입항한 사행 일원은 도보로 또는 나주목사가 제공하는 말이나 수레를 타고 개성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특히 시조 부의 눈에 보이는 나주(羅州)라는 지명이 쉽게 지워졌을까. 나주(羅州)를 굳이 해석하자면 「나씨의 고을」이란 뜻이니 더더욱 정감이 갈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나주목의 발전 된 모습, 수도로 가는 길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 농경지 등이 첫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 정부가 귀화 후에 곧바로, 또는 퇴임 후에 본관(本貫)지역을 지정할 때에 부(富)의 의견을 물었을 수도 있다. 그때에 부(富)는 과연 무어라고 답했을까.
“나주목에 가까운 지역으로 정해 달라”라고 했을 것이다.
일반 서민에게는 이러한 은전을 부여할 수 없다. 부(富)는 송나라에서 온 신분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최소한의 예우를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고려에 귀하는 하였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는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출항하는 근처에 있으면 고향 소식을 들을 수도 있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해진 곳이 여황현(艅艎縣)인 것이다. 오늘날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인바, 이곳의 농경지도 광활하며 필자의 유년시절까지만 해도 본량이 나주나씨 촌이라 할 정도로 나씨들이 포진하여 살았다고 한다.
여황(艅艎)이란 지명 이름으로 보면 큰 배가 닫는 곳이란 뜻이었으니 고려 시대에는 영산강 상류 황룡강의 지류인 여황까지 배가 갈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즉 여황에서도 배를 타면 영산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드디어 황해 바다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곳이란 것이다.
시조 부(富)가 고려 여인과 언제 결혼한지는 알 수 없으나, 손을 이어 왔고, 1413년 조선조 초기에 여황현이 아예 폐하여지고 나주목에 통합 되므로 해서 여황은 곧 나주목이 되었다. 그래서 본관이 여황에서 나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본이 여황일 때는 여황의 지역에서만 살아야 했는데, 여황이 나주목에 통합되어 그때부터 본이 나주가 되었으니 거주의 범위가 나주목 전체로 확대 된 것이다. 그래서 여황에서 나주 시내로 이사올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은 혈통의미의 본이 아니라 본적지 의지 또는 거주 허용지역의 범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나주 시내 금계리를 가기(家基) 터로 잡다
금계리를 가기 터로 잡았다는 족보 기록은 9세 자강공(自康公)의 기록에서 나온다. 족보 기록에 의하면 태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무안현감, 의주부윤을 역임하고 나이 30세 때에 퇴관(退官)하고 은거하였다 하였다.
나주 서수구(西水口) 내의 산수청려(山水淸麗)함을 보고 가기(家基)의 터로 잡았다고 하였고 그 후 18세에 5백 여 년을 지키며 살았다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역사 상황논리를 전개하여 본바 금계리 가기(家基) 터는 1413년 이후 태종 조 때에 잡아진 듯하다.
그 후 족보의 기록으로는 금계리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는데, 필자가 석호공 행록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석호 남간 형제들 그 시기까지 금계리에서 태어났고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호 남간공 행록에 의하면 1630년 금계리의 집이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석호공은 석현마을로, 남간공은 서구수 밖에 정사를 지어 이사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나주 석현마을에서 태어나 3살 때에 나주 남외동으로 이사를 와 초등학교 입학 전 5세 정도 때에 금계동 현재의 집터로 이사를 와서 오늘까지 살고 있다.
필자의 아버지도 여러 번 말씀 하신 것을 들었다. 우리 집이 나주나씨 본 터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자강공 이후 600여년을 지켜 온 터이다.
또 하나 기록상으로 금계리와 인연을 맺는 사연이 있다. 그것은 감찰공 나질(羅晊)이다.
11세 나일손공은 5아들을 두었으니, 곧 창(昶), 고(暠), 요(曜), 질(晊), 서(曙)이다.
안동후인 미호 김원행(金元行)이 쓴 나창의 묘표를 보면 일손공이 일찍 돌아가시어 창(昶)의 형제들이 고아가 되어 창(昶)의 부인이 양육하였다는 사실이다.
창(昶)의 부 일손(逸孫)은 5남1여를 두었으니 창은 문과요 고는 진사요, 요는 문과 감찰이고 질은 무과 감찰이요 서는 진사요 여(女)는 김훈(金勳)이다.
족보에 의하면 일손은 세조 경진생(1460년)으로 돌아가신 연대는 기록이 없이 오직 3월8일 졸(卒)만 기록되어 있다.
공의 부인 창원공씨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연대는 없으며 12월8일 날자만 있다.
나일손공은 살아생전에 세칭 금강11인현계(錦江11人賢稧)를 구성하였던바 , 임승지 붕(林承旨 鵬)과 더불어 박육봉우(朴六峯祐)가 서문(序文)을 찬(撰)하고 공의 장윤(長胤) 지평(持平) 창(昶) 또한 송심죽청지구(松心竹淸之句)를 작(作)하였으니 창(昶)의 사회적 위상이 오른 후에 돌아가신 듯하다. 그리고 양친이 일찍 돌아가시자 창(昶)의 부인이 시동생들을 양육한 듯하다.
창은 성종 정유(1477년) 10월5일생이요, 고는 성종 계묘(1483년) 생이요, 요는 성종 정미생(1487년)이요, 작은 아버지 길손(吉孫)에게 양자 갔으며, 질은 성종 무신(1488년)생이요, 서는 생 연대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昶)의 나이 20세라면 고(暠)는 14살이요, 요(曜)는 10살이요, 질(晊)은 9살이요 요(曙)는 7세 정도 터울이며 창(昶)과 고(暠) 사이에 여동생이 있었으니 아마 이러한 나이 터울로 구성된 가족관계를 미호 선생이 듣고 양친이 돌아가시자 창(昶) 할아버지 내외분이 어린 형제들을 양육하였다고 기록한 듯하다.
그런데 창의 셋째동생 晊이 무오명현(戊午名賢) 금남 최부(崔溥)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질이 장가 갈 정도의 나이에는 양친이 안계시어 장형 창(昶)이 혼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창(昶)과 최부(崔溥)는 똑같이 금계리에서 살았으니, 이웃집 간에 혼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질(晊)의 장인 최부(崔溥)는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 임해현으로 상륙하여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돌아와 성종 왕께 보고하자 표류 사실을 책으로 편찬토록 명을 받아 만든 것이 바로 표해록으로 오늘날 한, 중, 일, 미 4개국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다.
최부가 연산군 시절에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 잡으려 하자 오히려 무오사화에 무고로 당해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죽기 전에 최부의 집을 사위 나질(羅晊)에게 주었다는 것이 나주나씨 대동보 나질(羅晊) 란에 기록되어있다.
「최금남(崔錦南)공의 가택(家宅)이 성수구(城水口)내 종기하(宗基下)수십보에 있어서 공(公)이 수이거지(受而居之)하니라.」기록되어 있다.
종기하(宗基下) 수십보란 말이 가기(家基)가 곧 종기(宗基)되니 바로 이웃집이었던 것이다.
한편 1721년 신축보 기록에 보면 해륜공(海崙公)의 손 천로(天老)가 살고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17세까지 가기(家基) 터를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후에도 가기(家基) 터를 지키고 살았을 것이나 기록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2010년 현재 금계동 마을에는 나주나씨 직장공파 후손으로 오직 필자만 살고 있다. 필자가 「나주나씨 뿌리 이야기」를 쓰고, 선대의 숨은 이야기를 모두 밝혀내도록 하는 힘을 금계리 가기(家基) 터의 명당기운이 후원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필자마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다면 600여년 가기(家基) 터의 맥이 끊어져 버린다.
세상은 마구 요동치는데, 600여년 가기(家基) 터를 지키려는 이 마음이 변치나 말았으면.................
4. 마무리의 글
600여년 가기 터에 조촐한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다. 후손들의 뜻을 모아 담을 것이다. 선현들의 문학(文學)을 새겨놓을 것이다.
<참고> 금계리 터에 사신 선대 추정
9세 자강
10세 계조
11일 일손
12세 창, 질,
13세 사항, 사음,
14세 연, 덕겸, 덕양
15세 해륜, 해구, 해봉, 천기
16세 희
18세 천로
.......
26세 나종빈(금계리 가기 터 1500평을 매입하여 이사를 함)
27세 필자 나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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