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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의 만남-궁을선인 한풀②] "복본의 서약(復本之約)은 숙명"하동=김재동 기자 / 입력 : 2015.05.09 09:00 / 조회 : 6162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 넝쿨에 달린 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白巢氏之族 支巢氏與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신라 박제상이 지었다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우리 민족의 창세설화중 ‘오미(五味)의 변(變)’에 관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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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성을 장식하는 흰천들은 태초의 빛을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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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성 경내의 궁을선인. 그가 세운 돌탑들은 참사람을 향한 원력을 담은 솟대들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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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성시대의 선인들 모습 담은 조각. 귀가 없이 율여를 터득하고 지유만을 먹어 이가 없었다고 한다. |
마고로부터 비롯된 궁희(穹姬)와 소희(巢姬)의 후손들은 마고성에서 지유(地乳)를 먹고 우주의 원리인 율려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에 유한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수명을 누렸고 만물에 깃들인 마음의 본체를 읽는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마음의 본체를 운용하여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을 했고, 마음먹은 곳은 어디든지 갔으며, 형상이 없이도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소로 인해 포도의 다섯 가지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은 번잡하고 사사로운 욕망과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실낙원(失樂園)이다.
“원시반본, 마고복본은 잃었던 우리의 원래 고향, 태고의 자궁인 마고성을 회복하여 인간본성 가장 밑바탕의 근본자리, 시비분별이 없는 그런 자리로 돌아가자는 취지를 담고있죠” 궁을선인은 그리하여 마고성과 삼성궁을 아우르는 영성인큐베이터 81마당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인 선인들을 배출하고싶다고 소망을 밝힌다. 삼성궁과 마고성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돌탑들은 그같은 소망을 담은 ‘원력(願力) 솟대’라고.
궁을선인의 조부는 신선도의 한 종파인 ‘동도교’ 창시자 강한수 옹이고 그런 조부와 문답을 나누는 사이였던 낙천선사를 6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신선도의 경전을 사사했다. 낙천선사(1902~1984)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황해도 구월산에 있던 삼성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소실되자 그곳에 있던 삼성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와서 후학을 키웠다고 한다.
“어렸을적 할아버지께서 산에서 강론을 하실 때면 흰 옷 입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산자락 이곳저곳에 앉아있는 모습이 수백마리 백학이 내려앉은듯 했다”는 궁을선인은 그런 가풍을 따라 그렇게만 살수도 있었지만 속세서 만난 또 다른 세 명의 스승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밝힌다.
그 한 사람의 스승이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고 안호상 박사(1902~1999)라고. “제가 선생님의 마지막 제잡니다. 처음 뵌 날 ‘애가 뭐 저리 당돌한 놈이 있노’하시면서 귀여워해 주셨죠. 삼성궁에서 지낸 천제도 3번이나 내려오셔서 직접 제주로 주관하시기도 했구요.”
궁을선인은 안박사로부터 그저 신앙같았던 ‘민족’의 개념에 철학적, 역사적 해석과 분석을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진정한 애민의 자세와 방법을 배우면서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궁을선인이 다음 스승으로 꼽는 이가 한국민화의 공로자 ‘대갈’ 조자용 선생(1926~2000)이다. 조자용선생은 50년대 하버드서 건축구조공학을 전공한 뒤 귀국후 서울 정동 미국 대사관저, 종로2가 YMCA 빌딩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60년대 전통 건축을 연구하다 민화에 심취해 전국 각지를 돌며 수집, 연구를 해왔으며 충북 보은에 민화 전문 전시공간인 에밀레 박물관을 세우는 등 국내외에 민화의 중요성을 처음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궁을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전개할 때 헌마을 운동을 하신 분”이라고 소개하며 “대갈 선생님을 통해서 고미술의 세계와 미학에 눈을 뜰 수 있었다”고 밝힌다. “설치미술로서 마고성과 삼성궁을 바라본다면 그곳엔 조자용선생님의 미학적 숨결이 살아있습니다”고 전한다.
그리고 김대중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던 농학자 김성훈 박사(1939~)로 부터 중앙대 재학중 인간이 본위인, 개인보다 전체 사회와 인류를 본위에 놓는 실용응용경제를 사사한 덕에 오늘날의 자신이 있었고 마고이즘을 키워낼 수 있었다고 밝힌다.
“올실과 날실을 엮어 완벽하게 짜진것이 경(經)입니다. 논(論), 설(說) 법(法)은 변화가 무쌍하지만 경에 가면 변화가 없어 고금을 통해서도 같은 것이어야 하는데 요즘 세상엔 그 경마저도 이념에 사로잡혀 온전치 못한게 현실이죠. 그마저 타파하는 작업, 본성을 찾아가는 작업, 마고성을 쌓고 삼성궁을 짓고하는 모든 것이 ‘부도지’에 언급된 수증(修證)의 과정이죠”한다.
오미의 변으로 인해 마고성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을때 마고성의 가장 큰 어른 황궁씨는 일족에게 말한다. “여러분의 미혹함이 심히 커서 본바탕이 변이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 안에서 같이 살 수 없게 되었소.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천성을 되찾을(復本)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라고. 복본의 서약(復本之約)이다.
궁을선인은 말을 마친채 찻물로 목을 축인후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다.
“니 이런 거 봤나?”
까까머리가 조선무를 닮은 아이가 소중하게 접은 한지를 한장 펼친다. 어느 여름 날이었고 열려진 차창으로부터 후텁지근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펼쳐진 한지엔 먹으로 그려진 고지도가 펼쳐졌다. 엉덩이가 뜨끈하도록 달아오른 만원 버스의 엔진룸에 앉은 맞은편 아이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을 참아가며 지도에 눈을 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수리가 조선무처럼 삐죽한 아이는 같은 처지의 전학생. 유일하게 말을 주고받는 아이였다.
“뭔데? 이게”
“여가 내나 청학동인기라”
“청학동?”
“그래 청학동. 내가 여기에 돌로 성을 쌓을기라. 올라오기전에 벌써 쪼매 쌓기도 했다.”
“성? 왜?”
“크게 쌓아가 단군할배 모시고 그러고 살기다”
맞은편 아이는 더위와 짜증을 참기보다 황당함을 참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어, 그래” 정도로 말꼬리를 맺고 부리나케 창밖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고개 돌린 얼굴에 실소가 흘렀던 것도 같고. 버스는 흔들렸고 바람은 후텁지근했던 40년 전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