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 폐지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한순간 식어버렸다. 이유는 분분하다. 일단 교과부는 다음 달 초까지 정리된 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외고는 수년간 입시경쟁과 사교육 팽창을 가속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교과부가 외고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제시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외고를 자율고로 전환하면
외고 학교당국은 현재 외고를 유지하면서 입시전형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부와 외고의 줄다리기 싸움의 결과를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 싸움은 언제나 외고의 승리로 이어졌다.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다면 또다시 외고 문제는 외고의 요구대로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외고 폐지 방안은 과감한 개혁으로 지지받을 만하다. 하지만 정 의원의 외고 대책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외고를 특성화고로 전환하되 자율형 사립고(자율고)로 지정하도록 한 내용이다.
현행 고교체제를 보자. 전체 고교는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영재고, 특목고, 자사고 등의 전기학교와 후기학교인 일반계고로 나뉜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평준화와 비평준화 지역으로 나뉜다. 평준화 지역은 대부분 학교별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지원 후추첨의 방식으로 선발하지만 ‘지역 명문고’에 내신 성적이 좋은 학생의 지원이 몰리게 마련이다. 비평준화 지역은 학교별로 시험을 치러 학생을 선발하므로 학교별 격차가 더 벌어지고 ‘지역 명문고’ 선호현상이 뚜렷하다.
이렇게 전체 고교를 놓고 보면 고교를 진학하려는 학생들 중 상위권 학생은 먼저 특목고, 자사고를 가기 위해 경쟁하며, 여기서 탈락한 학생과 나머지 학생들은 일반계고 내에서도 대학진학에 유리한 ‘지역 명문고’를 중심으로 경쟁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서울에서 교육여건이 열악한 지역구의 경우, 1등은 외고로 진학하고, 2~3등은 인근 비평준화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그 지역 명문고에 입학하고, 4~7등은 공동학군의 명문고에 지원하는 현실이다. 그런 서울지역도 올해 말부터 선지원 후추첨을 확대해 전 지역에서 고교선택제를 실시한다. 수능성적 공개 등으로 인한 고교서열화와 맞물려 입시경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질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외고를 자율고로 전환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성적 우수자를 골라 뽑아’ 명문대 진학을 시켜왔던 외고에 비해 ‘내신 50퍼센트 이상인 지원자 중 추첨 선발’이라는 자율고는 입시경쟁이나 사교육을 완화시키는데 당장은 도움이 될 것이다. 중상위권 학생들을 모아놨을 때 현재 외고와 같은 ‘1등급’ 수능성적 결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는 인식이 커서 경쟁률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2의 외고’ 될 가능성 커
장기적으로는 봤을 때는 자율고가 ‘제2의 외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비평준화 지역에서는 자율고도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 필기고사를 제외하고도 학생에게 각종 서류와 심층면접 등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다. 외고가 입시경쟁과 사교육비 팽창의 주범이 된 가장 큰 이유가 학생 선발방법의 문제임을 감안하면 비평준화 지역의 자율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실제 자율고의 전신 격인 자사고의 경우, 학생 선발 시 서류전형과 주요과목 심층면접, 내신 등을 두루 본다. 이러한 난이도 높은 입시전형 때문에 각 입시학원에는 외고와 함께 자사고 대비반이 따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비평준화 지역에만 학생선발의 특혜를 주는 것은 평준화 지역에도 영향을 끼쳐 더욱 문제가 된다. 평준화 지역의 자율고 역시 형평성의 논리를 대며 끊임없이 학생 선발권을 달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율고는 교육과정 운영에 있어서도 기존의 자사고보다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받았다. 전체 교육과정의 6분의 5를 학교에서 알아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각 학교에 교육과정에 대한 자율권을 주는 것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문제는 외고와 마찬가지로 자율고 역시 학교설립의 취지에 무색하게 국영수 위주의 입시과목을 확대 편성하는 등 입시 위주의 교육과정으로 치우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서울지역 자율고의 교육과정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대부분의 자율고가 영어와 수학 수업시간을 크게 늘리고, 예체능 과목은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13개 학교가 수학을 주당 2시간에서 8시간 늘렸고, 9개 학교는 영어를 주당 1시간에서 12시간 가량 늘려서 교육과정을 편성했다. 대신 예체능 과목은 8개 학교에서 수업시간이 줄었다. 얼마 전 공개된 수능성적에서 자사고가 특목고와 나란히 상위권의 다수를 차지한 결과는 자사고가 교육과정의 자율권을 ‘입시준비의 자율권’으로 악용한 결과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최상위권’에서 ‘상위권’ 학생으로 경쟁의 폭 커져
이렇듯 자율고가 대입준비에 유리한 학교가 되면 외고 폐지로 인한 수요가 고스란히 자율고로 몰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사교육업계에서는 당장은 ‘내신 50퍼센트 이상 선발’이 사교육 억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나, 향후에는 오히려 ‘악재’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외고가 성적 최상위 학생만 모여 있어 내신에 불리했다면 자율고는 중상위권 학생만 모아 입시교육을 하기 때문에 대입에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내신 기준을 상위 50퍼센트에서 더 높이는 방안이 벌써 검토된 것은 이러한 우려를 가중시킨다. 이런 식으로는 ‘최상위권’ 학생이 아닌 ‘상위권’ 학생이 갈 수 있는 ‘입시학원’을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의 목표는 2012년까지 150개의 자율고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껏 성적 상위 2~3퍼센트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특목고에 가기 위해 경쟁을 해왔다면, 이제 전체 중학생의 절반이 자율고에 가기 위해 경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신 사교육 팽창 우려
자율고로 진학하기 위한 경쟁이 촉발되면 그에 따라 사교육비는 자연히 커진다. 따라서 자율고에 따른 사교육비 문제는 앞서 밝힌 자율고의 선발전형과 교육과정의 변질 여부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학원계는 ‘외고 폐지’로 특목고 대비반을 운영해 온 대형학원은 위축되고 대신 내신 위주로 운영해 온 동네 보습학원은 오히려 호재를 맞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실제 사교육 현황을 보면 상위권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수강하는 특목고 준비를 위한 사교육과 내신성적을 위한 사교육 참여율은 엇비슷하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8년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중학생이 사교육을 받는 이유 중 특목고 진학준비와 밀접한 ‘선행학습’을 답한 학생(56.6퍼센트)이 내신과 밀접한 ‘학교수업 보충’을 답한 학생(57.9퍼센트)보다 적었다. 자율고가 내신으로만 선발전형을 제한한다 해도 입시명문고가 되는 이상 사교육비를 억제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자율고 지정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그에 맞게 운영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다.
외고보다 교육비 더 높은 ‘귀족학교’ 될 수 있어
자율고는 등록금이 일반계고의 3배 이내로 규정돼 있다. 대략 350~450만 원 선이다. 학교운영비나 보충수업비와 같은 수익자부담 경비를 더하면 4배에 이른다. 외고의 경우에도 등록금이 일반계고의 2~3배 수준이라고 하나, 실제 교육비는 6~7배 이상으로 1000만 원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자율고는 특목고와 달리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는 학교다. 오로지 사학의 법인전입금과 등록금, 수익자부담경비 등으로 운영된다는 의미다. 사학이 투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학부모에게 넘어가게 돼 있다.
그런데 현재 외고 중 자율고의 법인전입금 기준을 충족시키는 학교는 별로 없다. 서울에서는 6개의 사립외고 중 이대부고 한 군데 뿐이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자율고의 법인전입금 기준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외고의 자율고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학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가 외고보다 더 높은 ‘귀족학교’가 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외고/자율고를 통해 본 고교체제의 개편 방향
외고를 자율고로 전환시키는 것은 고교서열화의 꼭대기 자리를 차치했던 외고를 자율고로 대체하는 형국에 지나지 않는다. 학벌주의와 대학서열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자율고는 외고의 핵심적인 세 가지 문제 즉, 학생선발부터 대학진학까지 입시기관화 된 점, 사교육 광풍을 몰고 온 점, 서민은 들어가지 못할 귀족학교인 점 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이러한 외고와 자율고 문제를 보면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몇몇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선발권’이 아니라 학생의 ‘학교선택권’이다. 소수의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주면 그 학교는 우수학생을 모아 명문고로 부상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적으로 입증됐다.
학교가 우수학생을 뽑는 것보다 보통학생을 우수학생으로 키우는데 중점을 두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체 학교를 고르게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 모든 학교가 질 높은 교육환경과 교육내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학생의 학교선택권이 유효해질 것이다. 학생 각자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월성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교육과정의 자율성이 전체 교육의 공공성을 해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실 모든 학교와 교사는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그것을 학생들의 능력에 맞게 융통성 있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자율권을 가진 학교는 소수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명문대 진학률 높이기에 혈안이 되어 ‘입시를 위한 자율권’으로 악용하고 있다.
각 학교에 자율권을 부여하는 이유는 교육의 다양화, 특성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가령, 어떤 학교에서 무학년제나 특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려 할 때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꽉 짜여진 과목별 수업시수나 고정된 수업내용, 평가요소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작 자율권이 부여된 학교는 교육을 다양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욱 획일화시키는 입시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각 학교를 평가하는 요소가 대입결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각 학교에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인성교육을 실시했을 때 좋은 학교로 평가받지 못하면 아무도 이런 실험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제2의 외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교육 공공성의 테두리를 지키는 선에서 다양화, 특성화 교육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학교에 인센티브를 주며 자율성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학부모가 부담하는 교육비는 학교별로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 분야에 대한 학업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값비싼 학비 때문에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학교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현 정부의 다양성/수월성 교육정책 기조에도 위배된다.
진정한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적용하려면 각 분야의 인재양성으로 수익을 얻을 국가와 지역사회, 기업이 함께 교육비를 지원하는 것이 옳다. 능력이 뛰어난 학생에게 그 능력에 맞는 값을 치루고 교육받으라는 것은 정부가 인재를 키우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외고 문제의 해결방안은 이러한 결론들을 전제로 모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외고 논란이 특목고, 나아가 전체 고교체제의 개편으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다음 글에서는 고교체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대안을 모색해본다.
최민선/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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