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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34)-제3부 해방정국(2)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좌파와 중간세력 뿐만 아니라 우파인 송진우와도 협력을 모색했다. 8월 15일 오후 건국동맹의 이여성이 송진우를 찾아가 협력을 권유했고, 그 뒤 여운형이 직접 송진우를 만나 함께 일하자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내가 착수하는 일에 잘못이 있다고 그대가 생각한다면 서로 의논해서 고치도록 하겠고 또 우리들 사이에 다소의 견해차가 있다 하더라도 건국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위해서 허심탄회하게 합심협력하자”고 간곡하게 청했다. 그러나 송진우은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며 여운형의 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일제시기 자치운동‧민족개량주의의 본산으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동아일보 사장 출신의 송진우로서는 좌우합작, 민족연합전선 조직에 참여해 주도권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충칭임시정부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주1)
사회사업가 최송설당(경북 김천고 설립자)의 자택을 방문한 송진우와 여운형(1935년)
(사진=위키백과사전)
송진우의 건준 불참은 많은 점에서 아쉬운 일이었다. 송진우가 참여했다면 건준은 명실상부한 좌우합작체, 민족통일전선체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진우가 건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송진우로 대표되는 동아일보계열의 친일행적이 큰 약점으로 작용해 주도권을 쥐기 어려운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송진우 등 동아일보계는 기층민중 조직의 기반도 없었고,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것처럼 노선상의 차이도 중요했다. 특히 8월 말경 소련군이 서울을 점령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할 것이라는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송진우 등 우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이 이남 지역에 진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송진우는 미군의 진주에 희망을 걸었고, ‘임시정부 봉대’를 내세우며 건준의 활동에 대해서도 견제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군의 남한 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8월 말부터 건준에 참여했던 우익세력들이 대거 빠져나갔고, 박헌영의 공산당계열이 적극 참여하면서 그 빈공간을 메우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인민공화국 선포라는 좌경 노선으로 이어졌다.(주2)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여운형(YMCA 사무실)
건준은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이영·최익한·정백 등을 중심으로 한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과 박헌영·이강국·최영달 등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등이 연합한 조직이었다. 여운형은 우익민족주의 세력의 유력인물인 송진우도 함께 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면서 건준 내에서 좌익의 비중이 커졌다. 우익의 입장에서는 건준이 좌경노선을 걷고 있다고 보게 되었고, 김병로, 백관수, 이인, 박명환 등 우익민족진영 인사들은 건준의 ‘좌경적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 참여해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계획은 건준 내의 좌익의 반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 또한 유억겸·강낙원 등이 별도로 보안대를 조직해 건준 치안대에 합류하겠다고 하자 안재홍은 승낙했으나 여운형은 장권의 치안대와 충돌할 것을 염려해 이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안재홍은 건준 부위원장을 사퇴하고 독자적으로 국민당을 창당, 분리해 나갔다.(주3)
이 무렵, 건준의 혼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건준의 주요 간부였던 고경흠, 정백, 윤형식 등이 위원장 여운형이나 다른 간부들과 일체의 상의도 없이 8월 20일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경성지부를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했던 것이다. 이처럼 건준 조직은 다양한 세력과 인물이 모인 관계로 각 세력의 입장 차이가 크고 돌출행동을 하는 인사들도 없지 않아서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건준이 좌우 양측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고 내부적으로도 혼란이 계속되자 여운형은 8월 31일 밤 긴급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위원장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안재홍 부위원장과 각부 간부들도 내부 혼란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를 표명했다.(주4)
그러나 9월 4일 확대집행위원회가 소집되어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유임이 결정되었으며, 또 한명의 부위원장으로 허헌이 추대되었다. 하지만 안재홍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건준을 떠나고 말았다. 이날 회의에서 중앙집행위원회가 개편되었는데 14명이 떠나고 11여명이 새로 선임되었다. 그 개편 결과는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허헌, 총무부 최근우‧전규홍, 조직부 이강국‧이상훈, 선전부 이여성‧양재하, 치안부 최용달‧유석현‧정의식‧장권‧이병학, 문화부 함병업‧이종수, 건설부 윤형수‧박용칠, 조사부 최익한‧고경흠, 양정부 이광‧이정구, 후생부 정구충‧이강봉, 재정부 김세용‧오재일, 교통부 김형선‧권태휘, 기획부 박문규‧이순근, 서기국 최성환‧정처묵‧정화준 등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주5)
그런데 놀랍게도 건준은 부서 개편 이틀 후인 9월 6일 저녁 이른바 ‘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됨으로써 그 다음날 발전적인 해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의 출범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불과 20일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는데, 건준에서 인민공화국으로의 전환은 ‘좌경 노선’으로 심각한 과오였다. 건준의 주요 기반은 대부분 인공으로 이전되었지만, 건준과 인공은 기본적으로 다른 조직이었다.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건준은 활동에서 혼선도 있었고 오류도 적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해방 직후의 혼돈 상황을 조직적으로 통제하고 치안을 확보하는 등 큰 역할을 해냈다. 건준은 해방 후 최초로 민중이 결성한 자치조직으로 지방의 지부조직들은 대부분 지역인민위원회로 이어졌다.
조선인민공화국 출범의 좌경적 오류
1945년 9월 6일 오후 7시 경기고등여학교(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에서 1,000여명의 건준, 인민위원회 관련자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인민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여운형은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만이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다며 “우리의 새국가는 노동자·농민 등 일체 인민대중을 위한 국가가 아니면 안 된다. 새 정권은 전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세력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봉건적 잔재세력과 반동적·반민주주의적 세력과 또 과감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주6)
여운형의 인사말에 이어서 “민주주의적 정부를 즉시 수립하자”는 결의가 있었다. 미군 진주라는 비상한 시국을 앞에 두고 비상한 방식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군중대회를 통해 정권 수립이라는 비상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대회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임시 조직법안’이 상정, 통과되었고, 인민위원 55명과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이 선출, 발표되었다.
인민위원으로는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요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전, 최용달, 이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이승엽, 강기덕, 조두원, 이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호,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이 선출되었다. 후보위원으로는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이, 고문으로는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항규,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이영이 각각 선출되었다.(주7)
인민공화국 출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처음 제안된 명칭은 ‘조선민주공화국’이었으나 공산당 계열이 다수였던 상황에서 어떤 대의원이 ‘인민공화국’이란 명칭의 타당성을 열렬히 주장하였고, 참석자들이 삽시간에 이에 동조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명칭이 채택되었다. 이 명칭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으로도 이날의 대회가 치밀한 조직적 준비없이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원 선출 후 여운형은 “갑자기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로서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의 비상시니 비상조치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준비 부족을 시인했다. 또한 여운형은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이는 아주 완전하다고 할 수 없고 이제부터 인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의 잠정적 위원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연합국의 진주가 금명간에 있을 것이니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해 이러한 조치가 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급조되었음을 드러냈다.(주8)
조선인민공화국_선언문(1945.9.7.)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은 『몽양 여운형』에서 “이것은 예정되었던 일도 아니며 더욱이 형님이 진심으로 마음 내켜한 일도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 즉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정부를 수립하여 놓으면 미군이 입성한 후에 그것이 기정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적 조직을 이용하여 과감한 항쟁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에서였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인공 선포 이틀 후인 9월 8일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가 건준본부에서 개최되었다. 인공을 운영할 중앙인민위원회 부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는데 여운형은 9월 7일 해방 후 두 번째 테러를 당해 요양차 가평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여운형은 해방 3일만인 8월 18일 밤늦게 귀가하던 중 계동 자택 앞에서 괴한에게 1차 테러를 당해 1주일간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었다. 그가 누워있던 1주일간은 건준의 활동과 진로, 참여 인사의 확대 등과 관련해서 중요한 기간이었으나 공백이 불가피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인민대표자 대회 다음날인 9월 7일 2차 테러를 당했는데, 2차 테러로 여운형이 누워 있던 시기 또한 중요했다. 여운형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9월 14일 부서 명단과 선언·강령, 시정방침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이 이끄는 재건파 공산당의 영향력이 최대한 반영되었다. 여운형은 정부를 조직, 발표하는 데는 미국의 양해를 얻는 것이 필요하고 정부로서 체면을 유지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부서 발표를 미루려고 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정치세력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배치하고 안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신중한 고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다른 정치세력과의 협상과 타협이 필요했지만, 여운형이라는 정치 협상력을 갖춘 지도자가 요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공은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주9)
이승만의 부상을 도와준 인공 부서 발표
이처럼 조급한 인공 선포와 부서 책임자 발표는 공산당이 주도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급진적인 돌출 행위는 미군정의 인공 부정과 우익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인공은 미군정과 우익의 집중적인 공격 타켓이 되었다. 좌익세력은 이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공을 수립해 이를 기정사실화하려 했으나 그러한 기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좌익은 성급한 인공 선포라는 잘못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부서 책임자 선정에서도 자의적인 판단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먼저, 중앙인민위원회 부서와 그 책임자를 살펴보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정부장 김구(임시대리 허헌), 대리 조동우 김계림
외교부장 김규식, 대리 최근우 강진
재정부장 조만식, 대리 박문규 강병도
군사부장 김원봉, 대리 김세용
경제부장 하필원, 대리 김형선 정태식
농림부장 강기덕, 대리 유축운 이광
보건부장 이만규, 대리 이정윤 김점권
교통부장 홍남표, 대리 이순근 정종근
보안부장 최용달, 대리 무정 이기석
사법부장 김병로(임시대리 허헌), 대리 이승엽 정진태
문교부장 김성수, 대리 김태준 김기전
선전부장 이관술, 대리 이여성 서중석
체신부장 신익희(임시대리 이강국), 대리 김철수 조두원
노동부장 이주상, 대리 김상혁 이순금
서기장 이강국, 대리 최성환
법제국장 최익한, 대리 김용암
기획부장 정백, 대리 안기성
인공 주석에 이승만이 선임된 것은 박헌영의 공산당과 여운형·허헌 등 좌익 지도부의 의사가 합치해서 이뤄진 것이었지만 이는 큰 실책이었다. 이승만은 1912년 3월 조선을 떠난 뒤 한 번도 돌아오지 않고 미주와 하와이 등지에서만 활동했기에 국내에 정치기반 취약했다. 일제 말기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 단파방송 관련자 등 상층부에는 친이승만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지만 여운형처럼 대중적인 기반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인으로서 프린스턴이라는 명문대 출신의 미국 최초의 정치학 박사이자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는 점, 미국과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미국 조야와 군부에 다양한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 등의 강점도 없지 않았다. 특히 단파 방송 사건 때 ‘미국의 소리’를 통해 이승만의 소식이 국내에 전해짐으로써 이승만에 대한 국내 상층부 인사들의 기대감이 컸었고, 여운형 또한 이들을 통해 소식을 접하면서 이승만의 명성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인공 주석에 이승만을 올리는 것에 동의했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은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까지 추종하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주10)
박헌영과 여운형. 두 사람은 1920년대 상하이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시절부터 관계를 맺었다. 해방 후 두 사람은 협력자이면서 정치적 경쟁자 관계였다.
공산당과 좌익은 사실상 대중에게 잊힌 존재였던 이승만을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 후 얼마간 추이를 관망하던 이승만은 결국 인공을 버리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결집에 나서게 된다. 이로써 이승만을 이용해 보려 했던 인공은 오히려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
인민공화국의 경우, 좌익이 주도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좌익 일변도는 아니었다. 중앙인민위원 54명 중 38명, 후보위원 20명 중 15명, 각부서원 52명 중 38명이 후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혹은 좌익에 우호적인 인물로 드러났지만, 좌익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주석), 김구(내정부장), 김규식(외교부장), 김원봉(군사부장), 무정(보안부장 대리) 등 해외세력을 포괄하려 했고, 국내 민족주의세력을 대표해 조만식(재정부장), 김병로(사법부장), 김성수(문교부장) 등을 지명하기도 했다. 좌익에 치우쳤지만, 좌우합작정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후에 여운형은 자신의 구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 북위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여 결연하게 모든 질서를 회복시키고 인민에 줄 것을 착착 주었다. 그래서 38도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 38도 이북의 소련군과 같은 처리를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에 시급한 비상조치로 연합군이 진주하여 즉석에서라도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즉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인민이 승인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대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1945.10.1. 기자회견)(주11)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부서 발표(1945.9.10.)
그러나 이같은 여운형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미국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인민공화국처럼 좌익주도의 민중권력, 조선인의 자치적인 권력기관이 아니었다. 미군은 처음에 조선총독부를 당분간 그대로 두려고 했으나 한국민의 반발 때문에 미군정을 실시하게 되지만, 좌익정부는 물론이고 좌우합작정부도 전혀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에서 OSS와 함께 한반도 진공작전을 함께 준비했던 충칭임시정부조차도 바라지 않았다. 한반도의 혁명적 상황을 통제, 제어, 평정하고 미국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미군의 물리력을 바탕으로 한 미군정에 의한 직접통치였다.
9월 8일 서울에 들어온 미군은 다음날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권력을 넘겨받았다. 9일 9일 오후 3시 45분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 케이드 제독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일본조선군관구 사령관 카미츠키 요시오 중장, 진해만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브로 중장으로부터 항복문서의 서명을 받았다. 오후 4시 일본기가 내려가고 미국기가 게양되었다. 미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 사령관의 명의로 포고령 제1호, 제2호, 제3호가 연속적으로 발표되었고, 38선 이남의 모든 권한이 미 점령군 아래 놓이게 됨을 선언하였다. 9월 12일 군정장관에 제7사단장 아놀드 소장이 임명되고 경무국장에 조선주둔 미 헌병대장 쉬크가 임명되었다.
초대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 10월 10일 아놀드는 인공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미군정과 인공 등 좌익세력 사이에는 갈등과 긴장이 기본관계가 되었다.
9월 14일 인공이 선언, 강령, 시정방침 및 내각부서 책임자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10월 10일 미군정 장관 아놀드는 인공을 배격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놀드는 “38선 이남에는 오직 하나의 정부가 있을 뿐이다. 맥아더 원수 포고에 의한 미군정이 절대적 지배력을 가진다.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나 그 내각은 실재가 없는 것이며 괴뢰극에 불과하다.”며 인공을 격렬히 비난했다. 이로써 미점령군으로부터 정부로 승인받으려던 인공의 기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미군정과의 갈등관계를 어떻게 조정, 풀어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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