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 대한불교진흥원, 크리스토퍼 거머 박사 특강
이 글은 지난 11월 20일,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와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민병천)이 공동 주최한 ‘불교와 사회 포럼’ 특별강좌에 초청된 하버드대 의대 임상심리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거머 박사의 강연 내용이다.
서양 정신치료, 왜 불교일까? Why Buddhism in Psychotherapy? - 개인의 체험적 여정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매우 영광이고 특히 진흥원과 서광 스님께서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할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님은 절친한 친구이자 영감을 주는 불교 스승입니다. 또 제 친구이자 대학 동료인 로널드 시글 박사가 작년에 이곳에서 강연을 하여, 불교심리학이 서양 심리학과 심리치료에 어떻게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보여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시글 박사가 존 카밧-진이라는 분에 대해 언급했을 텐데, 이 분은 만성 통증, 불안, 우울증과 같은 치료하기 어려운 병, 심지어 에이즈와 같은 자기면역 질환을 완화하기 위해서, 1979년부터 시작하여 세계의 병원과 임상진료소에 불교 명상법을 소개해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이즈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명상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연구 결론으로, 환자들이 명상 시간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CD4-T세포가 증가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CD4-T 세포라는 것은 HIV 바이러스가 몸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는 면역세포입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불교심리학이 심리치료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미국인)는 불교를 지지할 만한 문화적 유산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의 2~3%만 불교 신도) 심리치료에서의 불교심리학의 인기는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으로 두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사실 이러한 새 치료법이 그들을 불교 신자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을 갖고 있는 몇몇 종교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료법의 배경에 있는 원리에 대해 탐구하면서 그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효과성에 근거하여 심리치료에서 세속적 불교가 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인 심리치료사 중 41%가 그들의 치료에 마음챙김을 통합시켜 실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음챙김에 근거한 치료를 연구하여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학생은 거의 모든 미국의 대학에서도 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는 소위 마음챙김 및 수용에 근거한 심리치료 또는 불교적 심리치료가 가장 현대적이고 두드러진 형태의 행동치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서광 스님이 오늘 강연에서는 좀 더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서양 심리치료에서 불교 개념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동안의 제 개인적인 여정과 함께 전문가로서의 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자기중심적이라 생각되어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나 여기서 그런 인상을 받으신다면 그건 다 스님 탓입니다. 농담입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스위스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와의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에 살았습니다. 다른 독일인, 이탈리아인과 함께 영국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었는데 아버지는 영국령 인도에 사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하인리히 해러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탈옥해 히말라야 산을 넘어 티베트로 가서 달라이 라마의 영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자라면서 인도와 티베트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1976년에 혼자서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산스크리트 만트라 명상을 배웠는데 1970년대 당시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습니다. 인도에 머물며 나는 스리랑카의 외딴 수행처에서 위빠사나(Vipassana) 명상을 배웠습니다. 6주 동안 동굴 안에서 명상을 하며 보냈는데, 시간의 대부분을 1만 2,874km나 떨어져 계신 어머니와 머릿속으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니 추측컨대 그때 나는 어머니로부터 실제로 독립하는 것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후 20년 넘게 인도에 12차례 이상 가서 다양한 요가와 명상을 공부했습니다. 1978년에 나는 임상심리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시작한 지 2주 후에 첫 환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에게는 불안발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랐고 단지 명상하는 방법만 알아, 그녀에게 명상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다음 학기에는 반 전체 학생이 일방 투시 거울(one-way mirror)을 통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척 안절부절했습니다. 나는 내 환자에게 명상으로 상담회기를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필요하다면 하지요!” 하더군요. 분명히 환자보다 내가 더 치료가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보다 3년 전, 허버트 벤슨 박사가 만트라 명상(사마타 수행)이 혈압을 낮춰주고 심장병을 막아준다고 보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에 틱낫한 베트남 선사가 미국에서 첫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불교적 접근법(특히 sati, 위빠사나)이 힌두 만트라나 집중(사마타)법보다 훨씬 인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트라와 같은 명상법으로 깊은 수준의 집중이나 평화에 도달할 수는 있어도,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고, 남들도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는 모든 경험을 친절과 알아차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단지 하나의 초점 대상(만트라, 숨, 감각)으로 계속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공부하고 있는데 방해를 받으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나는 아마도 내가 화가 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상대방에게 거친 말을 하기보다는 나중에 다시 오라고 정중하게 요청할 것입니다. 공부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라면 방해를 친절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명상하지 않는 나머지 23시간을 훨씬 편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집중 명상 대신 위빠사나(통찰/마음챙김) 명상으로 전향한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 시로 이사하여 케임브리지 병원과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심리치료학자인 서양 불자 그
룹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이후 지난 25년간 매달 꾸준히 모이는 토론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나눈 대화 중 많은 부분이 론 시글 박사와 함께 편집한 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마음챙김과 심리치료』(김재성 역, 무우수, 2009)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토론 그룹이 1996년도에 명상심리치료연구소가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에게 심리치료에 불교심리학을 통합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관입니다.
◎ 마음챙김 불교가 심리치료에 주는 핵심 메시지는 지금까지는 마음챙김 -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입니다. 이는 순간순간의 경험을 ‘바꾸려는’ 기존의 치료 형태와 매우 다릅니다. 치료를 받으러 올 때 환자들은, “나는 덜 불안하기를 원해요”고 말할 것입니다. 치료자는 이에 동의하고 불안을 줄여주도록 노력해왔습니다. 내 환자는 여러 해 동안 공황발작으로 고통받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고속도로 운전)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법, 이완하는 법(근육 이완), 자신에게 말하는 법(“이건 단지 두려움일 뿐이야, 심장마비는 아니야” 등)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운전을 하고 출근할 때 여전히 긴장되고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녀가 불안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온갖 기법들을 동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챙김 접근법은 그 반대입니다. 불안함 등이 왔다 가게끔 내버려두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 이에 저항하고, 싸우거나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컨트롤은 문제를 만들 뿐 해결책이 아닙니다.” 나는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얼마나 자주 공황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공황이 생겼을 때 얼마나 그것을 수용하는지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 연민과 자기-연민
심리치료에서 불교의 두 번째 메시지는 ‘연민’입니다. 연민은 수용의 한 형태입니다. 고통스러운 ‘사람’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연민 특히 자기-연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년간 마음챙김 명상을 수행했으나(호흡에 초점을 맞추고, 산만함을 알아차리고 명칭 붙이기), 충분한 연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5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대중 앞에서 말할 때의 불안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미국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느끼는 첫 번째 공포는 대중 앞에서 말하기입니다. 두 번째 공포는 죽음이라고 하지요. 이게 맞는 말입니까? 이는 곧 보통 사람에게는, 장례식에서 고인을 기리는 영결사를 말하는 것보다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이 훨씬 편할 거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중요한 강연 계획이 있을 때, 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또 근육이 긴장하고 복부에서 압박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예상 가능한 불편한 상태는 특히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새로운 주제에 대해 얘기할 때 더욱더 심했습니다. 헛기침을 너무 자주 하고, 말을 더듬는 내 자신을 상상했고, 아무도 안 웃어주는 농담을 하고, 나 때문에 청중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한 7년 전에는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실제로 나에게 “숨 좀 쉬세요!”라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배경에는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길 바라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즉 지적이며 매력적이고 청중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습니다. 당시 나의 그릇된 생각은, 모든 청중이 나를 좋게 생각하면 내가 진정으로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타인에게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중 앞에서 말할 때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쪽으로 나 자신을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제가 뇌과학이면, 강연이 끝나기 전에 뇌과학에 대한 몇 가지 유용한 내용을 반드시 전달하기로 명심합니다. ‘나’에게서 다른 곳으로 초점을 옮기는 방법이 항상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중 앞에서 불안해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다면, 이 기법은 단지 부분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말하면서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 불안해 보이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내 머릿속에 작은 모니터가 달려 있어 계속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너 불안하니? … 너 지금 불안하니?” 결국은 이렇게 끈질기게 묻는 것 자체가 내가 억압하려는 그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일단 불안해지면 불안해진 상태를 또 불안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 앞에서 말할 때 느끼는 불안에 대한 유일하게 남은 해결책은 그냥 불안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4~5년 전이 되어서야 전환점을 경험했습니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자애명상을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하버드 의과대학 학회에서 500명의 동료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나는 정말로 존중받기 원했습니다. 내가 말하려고 일어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자애의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편안하기를. 내가 편안하기를. 내가 편안하기를. 그들이 행복하기를.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그러자 마치 마술처럼 내 공포가 녹아 없어졌습니다. 이로써 좋은 의미로 자기-연민의 힘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심리치료자로서, 나는 충분한 수용과 연민 없이, 단지 알아차림만으로 심리치료에서 그다지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마음챙김은 연민과 자애를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심리치료에서 피할 수 없는, 강력하고 방해하는 정서를 다룰 때에는 연민과 친절을 뚜렷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연민의 마음 자세(compassionate frame of mind)를 지니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 정서적인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 이를 변화시킬 만큼 오랫동안 - 열려 있을 수 없습니다. 건강 의료에서 연민은 보통 치료자와 임상가의 태도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환자에게 친절하게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을 말해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서 그들의 고통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도록 격려하고 이러한 대화가 환자에게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만약 한밤중에 혼자 침대에서 이불을 잡아당기며 뒤척이고, 수면제도 별 효과 없고, 명상도 효과가 없는데, 심리치료는 일주일 후에나 잡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1. 따라서 내가 자문하기 시작한 첫 번째 질문은 “환자가 회기와 회기 사이 혼자 있을 때, 친절이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스스로에게 친절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2. 또 임상가들은 보통 연민이 얼마나 마음을 열어주고, 오래된 상처를 노출하고, 치유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심리치료자들은 특히 정신적 심리적 외상(트라우마) 환자를 대할 때 이런 방법을 주의 깊게 조절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한편 치료실에서 마음을 연 후, 어떤 환자들은 치료실을 떠날 때 오히려 벽에 부딪친 느낌을 받았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나는 자주 생각하고 궁리했습니다: 내 환자들이 회기 사이에 상처를 덜 느끼고, 보다 회복 탄력성(resilient)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자기-연민 실천이 우리 환자 대부분을 위한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연민에 이르는 마음 챙기는 길』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연민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며 불교 전통에서는 2500년간 수행되어온 것입니다.
◎ 정서적 고통에 대한 새로운 관계방식 심리치료자로서 내가 배우고 다시 배우기 가장 힘든 것은 연민을 갖고 고통을 향해 마주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정서적 고통에 대한 새로운 관계 방식을 확립시킨 것이야말로 서양 심리치료에 불교가 가장 크게 공헌한 바입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 자신의 것이든 또는 남의 문제이든 불편함에 저항합니다. 우리의 뇌는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붓다의 위대한 메시지는 - 사성제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 인생은 힘들다는 것(苦), 그리고 그 힘든 것(苦)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더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함과 불편함을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은 페마 최드론이라는 티베트 비구니 스님에 의해 가장 잘 표현되었습니다. 페마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 오랜 세월 후에도 우리는 아직 광분해 있을 수 있다. 오랜 세월 후에도 아직도 분노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소심하거나 질투하거나 무가치한 느낌으로 꽉 차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를 내버리지 않고 조금 나은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우리와 친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여러분들께는 치료처럼 들리십니까? 우리 자신에 대한 불안하고 우울하거나 나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인데요? 사실은 맞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경험에 대한 우리의 관계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고치고 변화시키고 개선하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힘든 경험들을 넓고 부드럽고 연민에 가득 찬 알아차림 속에 두고, 마침내 그 스스로가 해소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서적인 고통에 대한 관계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치료에서 가장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서적 치유의 초석이 되는 것인데, 불교는 이것을 서양에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수용하는 법을 배울 때 자연스럽게 더 좋은 느낌이 생깁니다.
◎ 연민 배우기: 심리치료에서 발견한 개인적인 이야기들 수용과 연민으로 고통의 치유를 처음 경험한 것은 대학원 재학 당시 내가 치료받을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슬픈 사건을 얘기하자 치료자가 대놓고 울었습니다. 나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앉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잠깐 그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 내 치료자보다 내가 더 “남자답다는” 생각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가 내 얘기에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고 나는 현명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몇 달간의 치료 시간마다 내가 울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 치료자의 자발적이며 연민에 찬 반응이 내 마음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이 치료 경험 이후, 그 은혜를 갚을 기회가 수없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메레디스(Meredith)란 여성은 무기력하게 마약에 취한 상태로 우울한 엄마가 보는 앞에서 의붓아버지한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메레디스는 화장실 거울에서 자신을 볼 때 구토기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슬프고, 알고자 하는 눈으로 바라보니까 그녀는 “내 친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텅 빈, 얼어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나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내 고통은 타당한가요?”, “당신은 내 고통이 보이세요?”, “내 고통이 보일 가치는 있는 건가요?”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원래 개념화를 잘하는 유형의 사람이라서, 고통을 [몸으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있는 머리로 가지고 가서, 머릿속에서 분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메레디스의 사례는 엄마가 사랑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 이런 대화가 시작될 때, 희미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작은 힘을 느끼게 되어, 그 말을 삼킬 수 있었습니다. 배 근육이 이완되면서 내 눈에 눈물이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네, 우리가 정말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요”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는 촉촉해진 눈빛으로 교감하였습니다. 고통에 대해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운 다른 임상 얘기가 있습니다. 몇 달 전, 나는 에단과 상담이 있었습니다. - 그는 아주 우울한 중년 남성이며, 치료를 1년 간 쉰 후 였습니다. 에단은 이혼을 겪고 있는 중이었는데, 당시 일시적으로 친구와 함께 볼품없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경제 상황 때문에 안 좋았습니다. 그가 지은 집은 매달 내야 할 돈을 내지 못해 잃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식욕을 잃어 몸무게가 줄었으며, 항우울제 및 항불안제는 듣지 않았습니다. 에단은 (인생의) 가득 찬 재난(full carastrophe)1)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살하고자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계획은 없었습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자살에 대한 생각이 큰 위로가 된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힘든 밤을 견디게 된다.”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나는 에단을 안 지 거의 10년이 되었지만, 그가 이런 지경이 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보통의 (치료) 형식은 그의 경제적인 상황과 기타 인생 문제에 대해 함께 터놓고(brainstorm) 얘기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던지는 질문마다 그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문제더미에 부딪치게 되어 나는 금방 짜증이 났습니다. 결국 에단이 내 말을 멈추게 하더니, 내가 그에게 지쳐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호소하는 듯이 “우리가 거의 10년간 알아왔는데, 나를 안 좋아 하신 적이 있나요?”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속도를 늦추고, 그냥 에단과 시간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를 치료해서 자살 가능성을 방지하고, 집이 차압당하거나 정서적으로 무력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서두르는 마음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아무리 고통스러울지언정 이 순간은 우리 삶에서 유일한 순간이다. 지금은 단지 에단과 나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에단의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도록 두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내가 느끼는 것에 얼마나 압도되었는지, 내가 에단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에단도 똑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도움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단이 계속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어요. 난 중년인데 그에 걸맞게 보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인생 전체가 환상이었죠”였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훨씬 간단해졌습니다.
에단: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거머: 나도 모르겠네요. 에단: 난 이제 정말 혼자예요, 아내도 직장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거머: 정말 안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 둘 다 여기 있잖아요. 에단: 난 너무나 과로한 상태입니다. 공포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요. 에단: 어떤 공포예요? 에단: 주로 돈 걱정이죠; 내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거죠. 거머: 당신 몸 어느 부위에서 공포를 느낍니까? 에단: 여기 배 속이요. 매일 일어날 때마다 내 위장이 꼬인 것 같아요. 그 순간에 나도 똑같은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에단이 배 속에서 공포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직감을 확인하고 싶었고, 또 에단에게 마음챙기면서 자기 몸을 탐험해볼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에단이 자기 경험을 말할 때, 나는 에단이 그날 하루를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로 돌아올 준비가 되기 전에 내 몸이 이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에단이 나를 이겼습니다. 그는 스스로 “완전한 실패”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고, 병원을 벗어나 지내는 방법, 즉 규칙적으로 식사하기, 더 자주 야외에 나가기, 뜬눈으로 깨어서 되씹는 생각(반추)을 하는 대신에, 피곤을 느낄 때 잠자리에 드는 것에 대해 더 상의하길 바랐습니다. 처음으로 당황스럽고 무기력한 내 자신의 경험을 연민의 태도로 탐색하기 위해 멈추었을 때, 우리 둘 다에게 새로운 통찰과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고통을 안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까지 고통이 가슴을 부드럽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나오미 나이(Naomi Nye)의 시 <친절>에서 마지막 두 단락을 소개합니다.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것, 친절을 알기 전에 또 다른 가장 깊은 것, 슬픔을 알아야 한다. 슬픔으로 잠에서 깨어야 한다. 당신의 목소리가 모든 슬픔의 실타래를 잡을 때까지, 그 실로 짠 천 전체를 알아볼 때까지 그 슬픔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친절함만이 더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되며, 오직 친절함만이 당신의 신발끈을 매주고 편지를 부치고 빵을 사는 일과를 하도록 만들어준다. 오직 친절함만이 머리를 들어 세상의 여러 군중들 중에 나서서 여러분들이 찾아온 것은 바로 나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부터 친절은 당신이 가는 곳에 어디든 함께 다닐 것이다. 그림자 또는 친구처럼.
◎ 다음 단계: 지혜 불교와 심리치료와 함께한 개인적인 여정에서, 현재 내가 와 있는 이 지점은 마음챙김과 연민으로 나의 환자들과 내 자신에게 열려 있기를 배우는 단계입니다. 미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교와 서양 심리치료의 미래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요? 아마도 다음 단계는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발전 단계를 예상하여 론 시글 박사와 함께 하버드 의과대학 학회를 개최하여 달라이 라마를 모시고 “심리치료에서 지혜와 연민 개발하기”의 주제로 토론하였습니다. 서광 스님도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주제에 대해 새로운 책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치료자가 필요해서 개인적으로 치료자를 찾는다면 어떤 유형의 치료자를 원하는지 자문해보면, 그 대답은 반드시 특정 접근법이나 기법에 대한 지식이나 훈련 또는 심지어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명한 사람 - 삶을 잘 사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연민이 많은 사람 -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로 대할 줄 아는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심리치료에서 직접적으로 연민과 지혜에 관해 자주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좋은 심리치료의 중요한 요소라고 묵시적으로 인정합니다. 진실로, 현명하지 못하거나(unwise) 연민이 없는(uncompassionate) 치료자와의 대화에서 유익함을 얻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쪾 토론 주제 지혜와 연민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롭고 연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고 그 외의 여러분이 토론하고 싶은 어떤 것도 환영합니다. 큰 절 올리며
질의응답
◎ 강연 중 말씀하신 메레디스(Meredith)의 사례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말하려던 참에 희미하게 선생님을 끌어당기는 작은 힘을 느껴서 그 말을 삼킬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작은 힘이 현명함을 유발했던 원인 같은데, 저도 가끔 그런 힘을 느끼곤 하거든요. 선생님께선 그 힘이 무어라 생각하시는지요? 거머 박사 누구에게나 현명한 순간은 있겠죠. 메레디스와의 경우도 그런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힘이 항상 현명함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 상처가 되는 말을 들을 때도 그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느껴요. 상처는 되나 은연중에 무얼 깨닫게 되는 순간에 그런 힘을 느끼죠.
◎ 내면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스스로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뭔가 표출하기 꺼려지는 것을 말하려는 경우 안에서 끌어당기는 거죠. 스스로 약간의 시간을 두고 본다면 그런 꺼려짐을 잘 헤아려서 자제하거나 현명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평소 알아차림 훈련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고요. 끌어당기는 힘이 정말 옳은 경우라면 약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머 박사 그런 순간에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면 현명함, 지혜로 연결된다는 스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멈추고 그 현상 그대로를 느끼는 그 순간이 매우 중요하고, 그것이 지혜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 우리나라 불교도들은 명상 외에도 108배나 다라니 수행 등 각자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서양 심리학과 접목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거머 박사 우리 서양에서 정신치료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보통 불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수행법은 꺼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전 그중에서도 원칙을 끌어내 적용하려 합니다. 신도로서의 절실한 믿음이 빠지므로 모자란 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현실에선 불가피한 일입니다.
◎ 서양의 정신치료에서 다른 것도 아닌 불교의 역할이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건지요? 다른 지혜의 전통은 없나요? 특히 불교에서 그런 지혜를 찾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거머 박사 불교 심리 전통이 다른 것들보다 더 자연스럽고도 효과적으로 서양 심리학과 접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지만 특별히 더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 있지 않습니까? 같은 이치입니다.
정리|편집부, 통역|김솔하
주) 1) 존 카밧-진의 저서 『Full Catastrophe Living』에서 가져온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