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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opatra VII
로마를 굴복시키려고 했던 여인
출생 | BC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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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30 |
국적 | 이집트 |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왜곡은 기원전 1세기 그녀가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때부터 키케로(Cicero)와 같은 당대의 로마인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각주1) 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장장 2000년에 걸쳐서 줄기차게 시도되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팜므 파탈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대의 로마인들은 이집트의 부를 약탈하려는 자신들의 탐욕을 감추고 이집트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녀를 비난했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와 같은 로마의 역사가들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로마 제국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이 동방의 여왕을 매춘부의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렸다. 후대의 유럽 출신 역사가들과 작가들은 이러한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무리 역사를 왜곡해서 여왕을 매춘부로 둔갑시킨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당시 로마와 옥타비아누스는 가해자였고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는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은 한때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정복했던 대제국 로마에 대해서 진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디오 카시우스의 오만하고 왜곡된 역사관은 셰익스피어와 푸슈킨, 버나드 쇼, 브리태니커 편집자들, 그리고 유럽이 아닌 일본 출신의 시오노 나나미에게까지 고스란히 승계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클레오파트라는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의 후계를 다투었던 네 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말한다. 라지드 왕가에는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의미인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 이름 역시 클레오파트라로, 클레오파트라 5세이다. 라지드 왕가의 적통자인 그녀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삼대 위의 할머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시집 온 시리아의 공주이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가의 혈통도 섞여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날 당시에 이미 이집트는 로마에게 정복당해 속주로 전락할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있었고, 유일하게 이집트와 현재의 이스라엘인 조그마한 유대 땅만이 로마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치면서 가까스로 독립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이라고 불렀다. '우리들의 바다'라는 뜻이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약 10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세계의 무역항이었다. 물을 정화해 도시에 공급하는 정교한 상수도 시스템이 있었고, 효율적인 운하와 여러 개의 구획으로 잘 정리된 시가지에서는 중국과 인도로부터 수입되는 갖가지 진기한 물품과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옷감이 지중해 전역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에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서기들이 과학과 수학, 철학에 관한 저서들을 필사해 전 로마 제국에 공급하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로마인들이 이러한 지중해의 보물을 감상만 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였다. 그는 '아울레테스(Aulete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피리 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통치보다는 유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회를 열었고 술에 취하면 무희들 사이에 끼어들어 피리를 불어댔다.
피리 부는 파라오는 로마에 엄청난 자금을 풀어 '로마의 친구'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이집트의 중요한 전략 거점인 키프로스 섬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집트 주민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아울레테스를 축출하고 그의 장녀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언니인 베레니케 4세(Berenice IV)에게 왕위를 넘겼다. 아울레테스는 막대한 빚을 져 가면서까지 원로원 의원직을 사서 자신의 딸과 대립하며 로마군의 출병을 요구했다.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의 권력다툼에 끼어들기를 주저했지만, 아울레테스가 딸의 목에 1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자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부관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를 출동시켰다. 이집트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전투에서 패배했고 군을 지휘하던 베레니케의 남편은 전사했다. 아울레테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면서 베레니케를 처형했다.
이로부터 4년 후에 아울레테스는 죽고 장녀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왕가의 법에 따라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서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각주2)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고 남편이자 동생의 나이는 열 살을 갓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지만 라지드 왕가는 곧 고질적인 내분에 빠져들었다. 환관 포티누스(Photinus)를 주축으로 한 소년 왕 프톨레마이오스파와 클레오파트라 바로 밑의 여동생인 아르시노에가 손을 잡고 클레오파트라를 축출한 것이다.각주3)
겉보기에는 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 투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진정한 파라오가 되기를 원하는 여왕과 여인에게 특권을 빼앗기기 싫은 기득권 세력이 충돌한 양상이었으며, 클레오파트라 본인의 성향이 중요한 변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가진 파라오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왕가를 따라 이주해 온 그리스계 주민들로 삼지 않고 대다수 민중인 토착 이집트인들로 삼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즉위할 당시 이집트의 경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에서 물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 와중에 부동산과 금화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돈을 벌어들였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더욱이 불안한 물가 때문에 부의 원천인 수출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습적으로 이집트 화폐의 가치를 3분의 1로 평가절하했다.
금본위제를 근간으로 하는 이집트에서 발행된 금화의 대부분은 소수 그리스계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서민들의 수입은 세 배로 늘어난 반면 특권을 누리던 소수의 재산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자 생산과 소비가 늘고 수출이 정상화되었다. 반면에 기득권 세력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클레오파트라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집트 전통 신앙을 지키던 사제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스 주민들의 신앙은 당연히 올림포스 12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가 역시 대대로 이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태양신 '라'나 지혜의 여신 '이시스'를 섬기는 이집트 종교를 배척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직접 이시스로 분장하면서 사제들의 지원을 끌어냈다.
이집트는 종교의 나라였다. 사제들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의 삶을 극적으로 개선시킨 군주인데다가 사제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자신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전임 파라오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라지드 왕조에서 이집트인들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숨어 있는 뇌관이었으며, 이것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 전임 파라오들은 군대를 동원했다. 그렇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색다른 접근방법으로 이 민족주의를 어느 정도 순화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시점까지 250년이나 지속된 라지드 왕가에서 민중의 언어인 이집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파라오였다. 그녀의 전임 파라오들은 피정복민인 이집트인들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그녀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로마의 힘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당시 로마의 최고 권력자였던 폼페이우스를 지원했다. 바로 얼마 전에 군대를 파견해서 알렉산드리아를 약탈하고 자신의 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흥분한 것은 당연했다.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한 클레오파트라는 그저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용병들을 모아서 군대를 조직한 다음 직접 이들을 지휘해서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성격으로 볼 때 만약 이때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제국과 전 지중해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을 것이다.
비극은 카이사르의 개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소년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측근 포티누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울레테스의 자녀들을 찾았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포티누스는 여기까지 쫓겨 온 패배자(폼페이우스)를 처단하면 카이사르의 환심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의 갤리선에 작은 배를 대고 그를 정중하게 모셨다. 그를 모시러 온 사람은 한때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던 군인이었다.
작은 배가 알렉산드리아 항을 향해 나아가다 활의 사정거리를 벗어나자 폼페이우스의 가족들이 갤리선에서 뻔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폼페이우스가 살해되었다. 사흘 후에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항에 나타나자 암살자들은 자랑스럽게 폼페이우스의 머리와 반지를 카이사르에게 내밀었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이집트군에 대해서 병력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집트의 통치자를 결정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을 때에도 시민들이 로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일단 라지드 왕가의 통치권을 인정한다고 시민들을 진정시킨 후 로마의 집정관 자격으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중재를 자청했다. 바로 여기에서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명장면이 나온다. 한밤중에 자신의 나신을 카펫에 둘둘 말아서 은밀하게 카이사르의 처소에 잠입하는 여왕과 카펫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는 카이사르, 격정적인 하룻밤의 사랑. 애석하지만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어느 날 아침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카이사르의 호출을 받고 왕궁에 들어왔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을 보고는 울면서 뛰쳐나간 것 정도가 역사적 사실이다. 폼페이우스까지 죽이면서 카이사르의 지원을 기대했던 소년 왕과 그 측근들이 카이사르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정황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들은 로마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이 1만 명 남짓한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왔기 때문에 수세에 몰렸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불을 질러 그 유명한 도서관을 완전히 태운 것도 대규모의 이집트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해군에게 항구를 장악당해 원군이 상륙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로마군이 정박해 있던 이집트 함대에 불을 놓았는데, 이 불이 마침 불어오던 강한 바람을 타고 크게 번지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도 클레오파트라가 마음먹고 카이사르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전력이 열세인 가운데 두 사람이 함께 왕궁에 있었기 때문에 전투 중에 관계가 급진전됐을 확률이 훨씬 높다. 두 사람 사이가 뜨거워지고 로마의 원군이 도착하고 때마침 나일 강의 홍수가 이집트군의 진영을 덮쳐 프톨레마이오스가 많은 병사들과 함께 익사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다시 10살짜리 막내 동생과 결혼했다. 달리 할 일이 없던 카이사르는 나일 강 탐험을 계획했다. 신비에 쌓여 있던 이 강의 발원지를 찾으려는 과학 탐사를 위한 대모험이었다. 그는 배를 타고 나일 강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모험에 클레오파트라를 초청했다. 카이사르는 강의 발원지를 찾는 탐험의 원래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클레오파트라를 임신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각주4)
클레오파트라가 정말 남자들이 보기만 하면 넘어갈 정도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나 하는 문제는 과거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디오 카시우스는 '사랑을 거부하는 어떤 남자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미인이었다고 했지만, 그리스 출신인 《플루타크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쿠스(Mestrius Plutarchus)는 타고난 미모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 모두 클레오파트라의 목소리와 화술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클레오파트라가 대략 서른 살 전후였을 때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을 소장하고 있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을 기준으로 하면 플루타르쿠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 키는 150센티 정도로 그 당시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으로 날카로운 매부리코와 겹쳐지는 두 개의 턱과 두툼한 목덜미를 가지고 있었다. 육체는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질로 전반적으로 통통한 편이었다.
그녀가 카이사르에게 뿜어낸 매력은 미모나 육체, 성적인 기교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시대에 살았던 전 세계의 여성들 중에서 최고라고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비정상적인 지력의 소유자인데다 어렸을 적부터 문학, 과학, 수학, 철학, 천문학, 수사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특히 아홉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학 분야의 천재였다. 악기 연주와 노래에도 능했으며 어릴 적부터 엄격한 체육과 군사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승마에 능했다.
사실 여자의 미모라는 것은 전망 좋은 방과 같다. 처음 들어서면 감탄하지만 오래 머물게 되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은 다르다. 클레오파트라 같은 유형의 여자라면 언제 어떤 종류의 대화라도 막힘이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 역시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의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되기 직전 클레오파트라는 '작은 카이사르'라는 의미의 '캐사리온(Caesarion)'이라는 별명이 붙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로마를 방문했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참관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집트에 대한 탐욕을 감추는 대신 여왕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당대의 논객이었던 키케로(Cicero)는 여왕의 오만함을 공격했지만, 다른 로마인들은 근거 없이 여왕의 방탕함을 공격했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아찔한 일이기도 했다. 캐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직계 혈육이었다. 그에게는 율리아(Julia)라는 딸이 하나 있었지만 폼페이우스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는 이 이집트 여왕의 아들이 자신들의 통치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캐사리온이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 주려고 여왕을 방탕한 여인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들의 주장 중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가 마련해 준 티베르 강변의 빌라에서 하루 저녁에 100명의 젊은 귀족 남자들과 난교를 벌였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클레오파트라가 방탕한 것이 아니라 로마 귀족들이 그녀를 끔찍하게 윤간한 것이 분명하다. 모두 근거 없는 소문이었지만 후일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사실로 각색하여 기록했다.
사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쪽은 카이사르였다. 그는 워낙 소문난 당대의 바람둥이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여왕이 상징하는 이집트의 막대한 부와 막강한 이집트 해군이 무척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는 가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등장하면서 정황이 무척 어수선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왕은 로마에 2년 가까이 머물렀다. 카이사르는 이 위험할 정도로 영리한 여자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막내 동생이자 공식적인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캐사리온을 데리고 급히 로마를 탈출했다. 로마 제국은 카이사르파와 공화파로 분열되었고,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하면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집트 역시 기근이 들고 페스트가 창궐하여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 허울만 남편이었던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병으로 죽었다. 캐사리온이 그의 뒤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했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잡고 여기에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이었던 레피두스가 가세해 제2기 삼두정치가 성립되면서 공화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여왕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했던 키케로도 살해되었다. 브루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에서 마지막 저항을 벌였던 공화파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하고 브루투스가 자살하자 완전히 몰락했다.
이 혼란한 와중에서도 클레오파트라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공화파들은 주로 시리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동방을 근거지로 삼았고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하던 로마군까지 공화파에 가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충직한 카이사르파의 장군 돌라벨라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파견하거나 하는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다. 여왕의 직접 통치가 다시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안정을 되찾았고 혼란스럽기만 했던 로마의 정세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은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3년 후에 이루어졌다. 형식적으로는 동방 원정에 나선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주둔군이 공화파에 가담한 사태를 설명하라며 여왕을 호출한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여왕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위압적이기까지 했던 안토니우스의 편지를 여러 번 묵살하여 그를 안달이 나게 만들고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두 사람은 현재 터키 남쪽 해안선에 위치한 타르수스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당시에도 큰 화제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아프로디테로 분장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타르수스까지 화려한 여왕의 전용 갤리선으로 이동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스스로를 축제와 유흥의 신인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했다. 플루타르쿠스는 이 장면을 멋지게 묘사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금으로 장식된 뱃머리, 진홍색의 돛, 은으로 만든 노는 갖가지 악기가 연주하는 장단에 맞춰서 움직였다. 여왕인 아프로디테는 금으로 만든 별실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그 주변에 큐피드로 분장한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신처럼 차려 입은 아름다운 시녀들이 방향타와 밧줄을 잡고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스승은 위대한 정복자 카이사르였다. 반면 키케로의 표현에 의하면, 안토니우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하게 검투사와 같은' 사나이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주도권을 잡은 쪽은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녀는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9년 동안이나 부부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의 전성기를 재현하는 듯했다. 안토니우스가 정복한 영토를 여왕이 통치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예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개선식도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되었다. 로마인들은 들끓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교묘한 여론 조작을 통해서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이집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다. 두 사람의 몰락을 초래한 악티움 해전은 분명히 로마와 이집트 함대 간의 교전이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향락과 여색으로 안토니우스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돈과 그녀가 모아 주는 군대를 가지고 전투를 했으며, 제2차 파르티아 원정에서 로마군이 처참한 상황에 몰렸을 때 구원해 준 사람도 바로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녀가 방탕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평생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단 두 사람의 연인하고만 관계를 했었다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비열한 쪽은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인기와 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자신의 누나인 옥타비아를 그와 결혼시키면서까지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옥타비아는 클레오파트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우아한 품위와 고매한 인격까지 갖춘 뛰어난 여자였지만, 안토니우스를 가운데 두고 클레오파트라와 벌인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래서 남녀 사이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자마자 카이사르의 편지를 모두 불태우고 서둘러 캐사리온을 살해했다. 분명히 카이사르가 캐사리온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는 내용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관계된 모든 서류도 폐기했으며, 오직 그에게 아부하려 했던 사이비 역사가들의 기록만을 후대에 남겼다.
옥타비아누스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랐던 당대 로마의 사학자들, 그리고 오만한 민족적 자긍심으로 무장한 그들의 후배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사로잡기 위해 벌였던 성대한 파티는 '모방할 수 없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왕궁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난 저녁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나가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는 여왕의 모습은 간단한 가십거리 정도로 취급했다.
그 당시에도 그리스나 시리아, 이집트 사람들은 로마인들과 견해를 달리 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 가장 사려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후일 제노비아 여왕이 잠시나마 로마로부터 이집트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약 3세기 후에 태어난 시리아의 여왕 제노비아는 클레오파트라의 직계 후손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남긴 네 명의 자녀 중에서 세 아들은 모두 죽었으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란성 쌍둥이 중에서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Cleopatra Selene)뿐이다. 안토니우스의 공식적인 미망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이 아이를 거두었다. 그녀는 로마의 동맹국인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의 주바(Juba) 2세와 결혼했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해안에 새로운 도시 캐사리아(Caesaria)각주5) 를 건설했다.
아랍어 기록으로는 '알 자바의 딸 자니비야(Znwbya Bat Zabbai)'인 율리아 아우렐리아 제노비아(Julia Aurelia Zenobia)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녀의 선조인 클레오파트라와 유사한 캐릭터를 가진 여왕이다. 그녀는 시리아에 있던 팔미라(Palmyra) 왕국의 정복군주였으며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전투에 참여하는 전사였다. 당시 팔미라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그녀는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공격당하고 있던 로마의 동쪽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일대를 통일해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축출하고 현재 터키의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까지 정복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칼끝을 로마로 돌렸다. 그녀는 군대를 몰아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면서 '선조들의 땅'을 요구했다. 이집트인들이 내부로부터 호응하자 로마의 통치는 손쉽게 와해되었다. 그녀는 로마 총독 테나지노 프로부스(Tenagino Probus)가 지휘하는 로마군을 격파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인 '5현제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던 로마인들에게 30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로마 본국으로부터 대군이 급파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안티오크 부근에서 양쪽의 군대가 격전을 벌였다. 결국 팔미라군은 패배하고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제노비아의 운명은 클레오파트라와는 많이 달랐다. 당시 로마 황제는 《명상록》의 저자인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였다. 제노비아에게 감복한 황제는 그녀를 사면하고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 위치한 멋진 장원을 하사했다. 스스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제노비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그 시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팔미라 왕국 최고 전사의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로마에서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후손들 중에서 로마의 명사들이 여러 명 나왔다.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린 것은 황제 개인의 취향도 원인이었겠지만, 그 기간 동안 수없이 다른 민족과 충돌하면서 로마 사회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질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사회적인 의식의 성숙이 제국의 약화를 가져왔다고도 한다. 사실 정복국가는 그 바탕이 되는 야만성을 잃었을 때 급속히 약회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한다.
클레오파트라 시절의 로마는 아직도 폭력을 숭상하고 탐욕을 추구하는 순수한 야만성이 충만해 있던 시절이었다. 이 시대의 로마인들이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를 로마의 영웅을 추락시킨 팜므 파탈로 간주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시대에도 올바른 평가가 될 수는 없다. 초강대국이 자신의 조국을 병합하기 위해 조여 오고 있을 때 약소국의 통치자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조국과 민중에게 최선을 다했던 헌신적인 파라오였다는 사실을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와의 개인적인 연인 관계와 함께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를 방탕한 요부로 매도하는 것은 단순히 속물적인 잡담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역사관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로마는 분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약탈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했다. 갈리아인, 게르만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의 희생 위에서 번영했던 야만적인 피의 제국이다. 그런데도 유럽인들은 항상 로마 제국이 재현되기를 꿈꾸었다. 그들은 로마의 영광만을 기억했지 그 역사 뒤에 감추어진 야만성을 기억하지 않는다.
형제 살해자인 샤를마뉴가 초대 황제였던 신성로마 제국이나 인류 역사상 가장 우매한 결정이었던 십자군 원정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잠시 성공을 거둔 적도 있었다. 대양 항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5세기 무렵부터 그들은 폭력을 동원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정복했다. 무적함대를 앞세운 스페인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분명히 로마 제국의 복사본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는데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반복된다. 그래서 혹시 지금의 미국 역시 그 시절의 로마를 복사하고 있지는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