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안군 임자도 섬 이해와 개요
섬은 남겨진 땅이다. 섬은 물에 잠긴 대륙에 대한 기억의 조각이다. 15,000여년 전 신안군 부근은 바다가 아니었다. 황해는 물이 비워진 거대한 대륙 이었다. 지금의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모두 하나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황해 바다 밑에서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짐승들이 풀을 뜯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동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 때는 빙하기로서 세상의 물 대부분이 결빙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해수면은 지금의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얼음이 풀리며 대홍수가 시작되어 대 범람은 모든 것을 삼켰으나 남겨 놓은 것이 높은 산 이었다. 산들은 발꿈치를 들고 머리꼭지만을 바다물 위에 내어 놓은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이 섬이었고 임자도 역시 이렇게 탄생되었으며 임자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바닷물은 솟아올라 있던 산머리와 산머리 사이에 갯벌을 두껍게 침전시키고 이 갯벌 위에 황해의 은모래들이 날라와 쌓였다. 여기에 사람들이 달려들어 산머리들 사이에 돌다리를 놓았고 농지를 만들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으며 섬 사나이 한 명이 한 바작의 흙을 지고와 바다에 부리면 그 뒤를 이어 섬 아낙 한 명도 한 메꾸리의 흙을 쏟아 부었다. 그들이 흘린 땀은 버려지지 않고 한 방울씩 모아져 바다를 가로지르는 제방이 되어 산과 산을 이었다. 이처럼 임자도는 수 천년을 두고 바닷물과 싸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땅인 육섬 이라 불렸던 나누어진 자연 천년의 땀을 더하여 진리를 포함하여 하나의 임자도 본 섬이 탄생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임자도는 사토질의 땅에 특히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임자도란 유래를 갖게 되었으며 선사시대와 청동기/철기 시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흔적으로 패총과 토기 그리고 지석묘인 고인돌 등이 발견되어 학술적 뒷받침을 하고 있으며 삼별초 소탕을 이유로한 공도령과 왜구 약탈의 치안 부재로 유지와 멀리 떨어져 배도 많지 않고 또 빠른 배도 없었던 조선시대에 섬을 비우라는 공도정책 등으로 정든 집과 농토 등을 뒤로하고 인근 육지인 영광의 낙월도로 이주하여 지척의 고향을 그리며 100년이 넘도록 풀리기만 기다리며 타향살이를 했던 임자도 사람들의 고통은 그 어느 지역보다 심했으며 이후 최초 주민의 입도 시기는 17세기 초 김해 김씨를 비롯 4개의 성씨로 조사되고 있다. 또한 임자도는 6.25전 까지만 해도 대광해수욕장 바로 앞에서 민어와 부서(부세)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 일본과 중국어선 등으로 물 반 고깃배 반의 바다였었다. 특히 일본 기생들이 뭉탱(뭉치)이 돈을 벌어 갔던 민어 파시로 유명한 타리도와 6.25 이후 70년대까지 파시 조성 지역인 재원도 등 유인도 3곳과 무인도 60여개로 되어있으며 바다를 경계로 남으로는 자은도, 북으로는 영광군 낙월면과 인접해있고 동일군의 섬으로 지도와 증도가 주변 관광지로 자리하고 있다. 2002년 현재 인구 3800정도에 면적의 크기는 46.60km²로 목포의 크기보다는 좀 작은 편이고 가장 큰 마을 진리와 육암리를 비 롯 22개의 마을로 주로 85%가 농업이고 나머지는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 어느 곳 보다 특이한 것은 중동의 사막의 나라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면적의 약 8%가 모래로만 된 사막의 땅과 다름없으며 유일하게 사막의 오아시스 형태까지 갖추고 있는 모래치(주민들이 부르는 물치 또는 칫돌)가 있다. 그래서 임자도 아가씨는 모래 3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는 유명한 설화가 있으며 한국의 유일한 사막의 땅이라고 불리고 있다. 70년대 한때 이 중동의 사막의 모래와 똑 같은 미세하고 고운 모래가 유리원료와 반도체 원료인 규사질의 모래로 유리업자들과 세상을 깜짝 뒤집어 놓은 반도체 업자들이 30년 동안 모래를 사갔으나 결국 마을 청년회의 노력으로 더 이상 판매를 중단 시켰던 사실이 있으며 이러한 사토질의 땅이 튤립 제배의 적격지라 목포대가 국내 최초로 3만평 시험 생산에 성공하였다. 또 역사적 유물유적의 측면에서 볼 때 1711년 (숙종 37)에 임자진이 진리에 설치되었고 임자도 대기리, 구산리, 화산리 등 4개 마을에 고인돌(지석묘) 4개소와 선사/철기시대의 토기를 포함한 패총이 교동의 남창식씨 집 뒤 뜰을 포함 대기리, 대흥리, 진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신안군의 섬주에서도 서해와 중국의 황해로 통하는 군사 요충지로 오늘날의 해군부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최근에 임자진 터를 말해주는 임자진 표지석이 면사무소 앞 팽나무 밑에서 발굴어 화제며 이처럼 진리의 임자진과 더불어 추정된 몽고의 침략을 대비한 320메타의 대둔산(한동산) 정상에 있는 100메타 길이의 성터가 역사 유물로 남아 있으며 조선 말 우리나라 시문화의 영수이자 대가인 유배자 우봉 조희룡의 유배 적거지인 육암리와 그의 용난굴 전설이 있고, 마을 앞 길이가 2km 내외로 국민관광지인 대광해수욕장의 조연급인 어머리(대머리)해수욕장과 은동해수욕장 두개가 명물이고 골통품이다. 특산품으로는 민어와 병어 그리고 대파와 소금 등이 있으며 국내 60%의 새우젓 공급지인 전장포가 임자도 끝자락에 있다. 이처럼 임자도는 역사와 자연 유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막의 땅이다.
2. 문화적 유물 유적과 주요 관광거리
1) 대광해수욕장 83년도에 개장하여 90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임자도의 얼굴인 대광해수욕장은 자연적 모래자원과 우거진 해송들의 그늘, 아카시아와 해당화의 향이 진동하는 천혜의 모래해수욕장이다. 동양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길다고 하는 필리핀 보라카이(7㎞) 해변보다 무려 두 배 가까이 더 길고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누소두아 모래해변 역시 서로 다른 정서의 독특한 해변과 리조트(휴양시설)시설 등으로 세계적 명소지만 적어도 단일 해수욕장으로 대광해수욕장 보다 큰 곳은 찾기 힘들다. 그 길이가 장장 12km고 폭이 300m로 해수욕장 해안 전체를 도는데 걸어서 3시간이 걸리는 명사 30리의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조건과 비경을 갖추고 있으며 아직도 연육이 되지 않은 교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년 피서 철에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일일 8천명이 넘는다. 신안군의 섬들 대부분이 다 그렇듯이 뭍과 멀리 떨어진 교통의 장애로 60년대 까지만 해도 목포에서 배를 타고 6시간이 넘는 항해로 임자도에 도착하는 그런 불편한 지리적 교통 여건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숨겨져 들어나지 않다가 70년대부터 신안군 지도와 육지인 무안군 해제간의 다리가 들어서 지도는 신안군의 섬 중 육지가 되었다. 이 다리로 인해 지도의 점암과 임자도간 철부도선이 20분 이내로 그 시간을 크게 앞당겼지만 연육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이처럼 아직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접근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안국제공항 개통과 무안-광주간의 고속도로 개통, 목포-무안간 고속도로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 등 여러 면에서 좋아지는 SOC확충과 급진적 주변 인프라 구축의 덕택에 접근성이 크게 개선된 상황에 있다. 해수욕장 주변에 다목적 잔디 축구장과 국제 해변승마장 그리고 청소년 수련관을 비 롯 관광지로소 거의 모든 편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손색없는 구비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숙소 주인에게 말하면 4,5만원하는 5kg 정도의 민어 한 마리로 20명이 횟감으로 즐기기에 충분하고 임자도의 모래사막 체험의 숙원 이었던 20마리의 낙타를 국내 최초로 수입하여 모름지기 국내 최초의 낙타타고 사막 체험하기 프로그램을 2008년도에 신안군에서 계획 중이니 낙타 체험 장만 들어서면 그야말로 테마관광으로 금상첨화이고 초,중고 대학생은 물론 일반일들 까지 가족 단위의 사막체험이 이루어질 것이니 사막의 땅 중동이 바로 임자도가 될 것이다. 또한 바로 가까이의 광활한 도찬리의 갯벌 머드 체험과 함께 적어도 중동으로 가는 사막의 여행자와 신혼부부 여행자도 발걸음을 돌려 급증할 걸로 큰 기대가 되는 곳이다. 게다가 2007년 까지만 해도 시즌은 차체하고라도 6,7,8,9월에만 찾던 자전거여행 및 피서 관광객들이 2008년도부터는 1월에서 5월 그리고 10월에서 12월 까지 비수기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자전거와 자동차 진입 도로를 완성 개방하여 12km 해수욕장의 파도소리를 듣고 아득히 멀리 보이는 서정적 섬들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해변을 달리는 그야말로 지상 천국의 여행지이자 동시에 관광지로서의 대광해수욕장이 될 것이다. 신안군이 이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에 있어 임자도 사람으로 찬사를 보낸다. 사실 필자는 최근 2007년 11월에 목포와 신안군 문화관광해설가 50명과 함께 자가용을 타고 사람이 거의 한적한 틈을 타 오전 오후에 각각 한번씩 완주하고 온 탄성의 소감을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으니 아쉽다. 물론 여름철 시즌은 나름대로 폭염을 피하는 더 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라면 자동차나 자전거로 파도 끝 해변을 따라 서서히 달리거나 젊은 남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파도를 밟으며 완주하는 밀어의 추억을 갖는 것이 사람들로 발 딛을 틈이 없는 시즌 보다 오히려 낳을 걸로 권장하고 싶다. 여기서 한가지 정보를 첨언하면 대광해수욕장의 해변으로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단 한가지 방법은 대기리라는 마을을 물어 그 곳 주민들에게 자동차를 가지고 대광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거기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해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 다른 곳에서 들어가다가 모래에 차가 빠져 모처럼의 여행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외도 사막의 오아시스 덕택에 물 걱정이 없는 곳이 대광해수욕장이며 현재 목포가 관광에 총력을 다 하고, 완공될 목포대교와 완공된 목포-압해도 간의 압해대교 그리고 목전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압해도와 육지인 무안군의 운남 간의 운남대교로 목포에서 1시간 이내에 임자도 도착이 곧 가능해 질 것이고 또한 해남 화원 레저 관광단지와 정부의 서남권 집중개발 정책에 힘입어 신안군 각 섬들의 26개의 다리의 천국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압해도 그리고 지도와 임자도간 다리만 완료되면 증도와 더불어 국제적 팩키지 관광지로 신안군 에서도 가장 큰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는 관광지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며 다리가 완공되면 특히 시즌에 일일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1만5천명이 넘을 걸로 추정되는 세계적 명소임에 분명하다.
2) 백사장 튤립 재배단지
지금까지 주로 네델란드 화훼단지에서 수입만 의존해 오던 아름다운 튤립을 목포대학교의 오랜 연구 노력 끝에 일차적으로 최적지인 임자도에 3만평을 재배하여 홍홍 색색의 아름다운 꽃의 바다가 대광해수욕장의 운치를 한층 더 하고 있다. 2008년 4월에 첫 축제를 열 것이며 현재 네덜란드에서 생산 수입하는 백합․글라디올러스․아이리스․프리지아 등을 점진적으로 임자도 에서 재배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 수출로 FTA를 극복하는 한편 관광객들의 멋진 낭만과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3) 사막의 오아시스인 모래치 (물치 또는 칫돌)
임자도 에는 중동을 비 롯 사막의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물치가 폭 8m, 길이 700m의 크기로 3개가 있다. 이것은 모래가 머금고 있던 물을 골진 곳으로 쏟아 내려서 이루어진 것으로 희귀하게만 보인다. 주민들은 이를 '물치' 또는 '모래치'라고 부른다. 신안군 섬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이 물로 오아시스 농업을 하는 곳이 임자도이며 가는 곳 마다 스프링클러가 춤을 추고 있다.
이 물은 바로 인근 대광해수욕장의 바닷물과 전혀 상관없이 민물로 어린시절 친구들과 해당화의 열매인 메람을 따서먹고 목에 걸고 대광해수욕장으로 해수욕을 하러 다닐 때 목마르면 오아시스인 칫돌(모래치)물 위에 모래를 먹지 않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 솔잎을 깔고 엎드려 목을 축이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임자도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임자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임자도 사람들처럼 똑 같이 그런 물 마시기 체험을 하고 있으며 맑은 물속에 모래가 올라오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엎드려 솔잎속의 물을 빨아 마시는 것도 임자도를 찾은 큰 추억이 될 것이다.
4) 도찬리 갯벌과 생태계
반달 모양을 한 대광해수욕장 12km 끝 지점에 도찬리와 전장포 마을이 있는데
물이 빠진 대광해수욕장의 드넓은 모래해변은 단단하여 어떤 스포츠도 가능하며 심지어 자가용으로 시작과 끝을 드라이브해도 해변을 크게 훼손함이 없는 그렇게 좋은 해변이다. 헌데 모래해변 끝 쪽에 있는 도찬리 앞 해변은 전혀 다른 갯벌뿐이다. 짱둥어와 칠게가 숨바꼭질하고 낙지, 고동, 갯지렁이 등 다양한 갯벌 생태계들이 합창을 하며 퉁퉁마디 함초와 함께 갯벌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상태에서도 미네랄과 마그네슘이 풍부한 갯벌 맛사지가 가능하고 부모님과 애들의 자유로운 체험관광을 하는 곳이다. 신안군에서 도찬리 앞 갯벌을 보호하여 관광 상품으로 이용할 계획에 있다.
5) 월하재(어라지 잔등)와 상여소리 유래
대기리에서 도찬리로 넘어가는 모래만의 언덕이 있었다.
언덕의 경사는 40도에 넘어야 할 거리는 60m정도였다. 시골의 초등학교 어린시절 친구들과 도찬리의 버드나무에 매미가 많아 소꼬리 털로 매미를 잡기위해서 힘들게 모래언덕을 넘어 다녔으며 임자도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이 어라지 잔등을 각종 농사진 곡물을 이고지고 전통 어장이 발달한 전장포로 새우젓과 생선을 사기위해서 넘어야 했다. 헌데 이 월하재가 푹푹 빠지는 모래로 쌓여 있는 곳이라 한발 뛰고 미끄러져 내려오고 또 한발 뛰어도 미끄러져 내려와 그 잔등(언덕)을 넘는데 몸부림을 치며 넘어야 했던 정말로 넘기에 힘든 언덕이었다. 우리같이 초등시절에 등에 짐도 지지 않고 넘어도 힘들었었는데 곡물을 이고지고 어라지 잔등을 넘어 생을 이어가고 자식을 가르쳤던 70년대까지의 임자도 주민들의 애환이 오죽했으랴! 그런 이유에서 인지 특히 전장포, 괘길리, 도찬리 등은 어라지 잔등을 넘을 필요가 없는 어업을 하거나 어촌 옆 평지모래 땅에서 농업을 하며 살기 때문에 ‘어허리’라는 단어로 상여소리를 하고 어라지(정식명칭 월하재)잔등을 넘어야 단거리로 가는 내 고향 구산리 사람들과 옆 대기리 그리고 대흥리 등은 상여소리 중 ‘어허리’를 ‘어라지’로 바꾸어 정말로 가기 싫은 죽음의 길!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망자의 마음을 넘기 힘들었던 ‘어라지’란 단어로 바꾸어 선창자(소리매기는 사람)를 따라 하고 있으니 이를 소개해 본다.
6) 전통어촌 전장포와 새우젓 토굴
전장포는 임자도 선착장이 있는 진리에서 안으로 들어와 화산리 가는 쪽의 길 다란 갯벌 뚝 바다를 장포라 했으며 이 장포의 앞쪽에 있는 배가 많은 포구라 하여 전장포(압장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임자도 내에서도 전장포는 선착장의 위치 측면에서 진리와 전장포의 관계는 목포와 부산과의 관계와 비슷한 임자도 섬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새우젓 60%를 공급해온 새우젓의 대명사이다. 섬의 서북쪽에 위치한 전장포는 색이 고운 '백화새우'가 많이 잡힌다.
새우는 바다모래와 갯벌에서 산란을 하며 성장하는데 뻘과 모래로 이루어진 임자 해역은 규조류까지 풍부해 최고의 조건을 갖춘 우리나라 최대의 새우젓 산지이다. 옛날에는 빠른 배들이 없었으며 그나마 소형의 젓 중선 배도 느린데다 육지로 공급 할 물량의 새우젓 양은 많고 수요는 급증하여 공급 전에 신선도가 떨어져 좋은 김치 맛을 내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를 걱정하던 주민들이 결국 1970년도에 도찬리 산기슭에 바위를 깨고 흙을 파서 길이 102m 너비 3.5m 높이 2.4m인 대형 새우젓 숙성토굴을 4개나 만들어 이용했으나 내부 온도 섭씨 5c°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빠른 공급을 할 수 있는 배들이 나오자 지금은 그 길고 큰 토굴들의 문이 닫혀 있지만 토종 술 등의 숙성 장소나 다른 용도로 활용 할 계획에 있으며 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의 굴속 체험 장으로 활용도 하고 있다. 이처럼 주부들과 뗄 수 없는 새우젓 공급으로 친숙해 온 곳이 임자도의 전장포이며 김치를 쉽게 시지 않고 오랫동안 감칠 맛 내는 새우젓 공급의 원조인 셈이다.
7) 모래에 얽힌 임자도 주민들을 찾아 들은 그들의 이야기와 언어의 특징 소개
(섬사람들의 언어에는 옛말이 많이 살아있음은 물론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말들이 흔히 발견된다. 옛말로는 특히 인도의 드라비다어의 특징이 강하게 살아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의 고대언어가 해로를 통해 한반도 남부에 흘러들어와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임자도가 그 대표적인 사투리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임자도는 전라도 중에서 고유의 사투리가 아직도 가는 곳 마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곳이라 어쩜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영향을 받은 것도 많다고 볼 수 있다. 지역마다의 옛 스러운 사투리도 요즘에 와서는 관광 상품이 될 정도로 언어문화 추적에도 관심이 크다는 걸 알고 최근에 전라도 닷컴의 김태성 기자가 그들의 임자도 이야기와 사투리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 실재 지역민들의 녹음 취재의 말들과 인도의 언어가 임자도에 살아있다는 강길운 저자의 임자도 사투리 언어를 가능한 그대로 일부 소개하며 옮기고자 한다.)
"밥도 써글써글 김치도 찌금찌금...
임자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 등이 있던데 임자도 여러 이야기와 사투리 좀 알고 싶습니다.
“임자도는 거의 사방이 온통 모래여서 바람 불면 가는 모래들이 날렸을 터이니 ‘임자도 처녀는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이 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만은 그 말은 번지수가 잘못 된 말이여. 임자도 전체를 다 두고 하는 말이 아녀, 전장포제. 전장포가 순전히 모래 땅인디, 모래땅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께. 머 이런말 있잖아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불안한 일을 말할 때 쓰는 말, 그래서 그런지 옛날에는 큰 바람 불면 모래 땅의 집들이 무너져 수차례 다시 지어야 했당께, 특히 전장포는 (땅모양이) 쥐 꼬랑지마니로 (바다로) 쭉 빠져가지고 바람 불믄 모래가 날려 갖고 입으로 들가고(들어가고), 코로 들가고, 있는 구멍 없는 구멍 싹 들가고. 음식에 들가고…. 아, 서 말만 묵었겄어.”
전장포는 임자도 북쪽 맨 끝 동네. 대광해수욕장 맨 끝, 윗자락에 자리한 동네. 우리나라 새우젓의 대명사인 곳. ‘전장포 큰 애기(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 그 말 찾으러 전장포로 가본다.
“전장포 큰 애기들이 모래 서 말 묵어야 시집가제”라는 말이 의아하다. 전장포에는 모래가 많지 않다. 한쪽 작은 바닷가만 모래밭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집왔다는 정정숙(49)씨는 모래 때문에 고생한 ‘모래타령’을 늘어놓는다.
“밥도 써글써글, 김치도 찌금찌금, 맨날 방 쓸다가 판났단께. 암만 쓸고 닦아도 잘라고 허믄 등거리가 껄끄라. 옷 빨아서 널어노믄, 갤라고 허믄 모래가 수북수북 떨어진단께.”
모래하고 대파는 인연이 맞는가보다. 임자도는 대파 주산지다.
20여 년 전 경상도 사람들이 모래를 파가버린 이후 한 평당 70원 정도 하던, 땅값이 싼 임자도에 들어와 대파 농사를 시작해 소득을 올리자 주민들도 재배하게 됐다. 임자도 모래밭 대파가 가장 좋다는 소비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대파 가격 불안으로 일부 농민들은 대파 대체작물로 튤립을 재배하고 있기도 하다. 4월 임자도에 가면 노랗고 빨간 튤립 꽃이 활짝 피어 있어 볼 것이다.
이처럼 집이 무너지는 이유에서 인지 전장포는 아주 옛날부터 선착장이 조성되고 길 포장되며 시멘트 바닥이 된 곳이 많다.
“시집 올 때만 해도 발이 풍풍, 푹푹 빠져 걷기도 힘든 모래 땅이었는디 유리만든 사람들이 모래 땅을 사가지고 다 퍼가버려 모래가 많지 않고 거기다가 대파 농사를 저케 많이 하고 있지 않소.” 라고 한다. 지금은 마을 뒤, 뒷불에만 그 모래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단다 .
“걸어가믄 뒤로 밀려. 급헌 일 있으믄 환장허제. 담박질을 못헌께. 저녁에 애기들 시쳐(씻겨)노믄 방에 들어감시롱 발에 모래 묻히고 들어가. 백모래, 먼지처럼 가늘어 갖고 뵈도 않은 것이….” 그리고 또 물 고생한 얘기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물을 벌컥벌컥 마셔 보질 못했다. 지금은 물 사정이 좋지만 옛날에 모래땅에서 나온 물은 짰다. 목 말라도 삼키지 못하고 입에 물고 있다 뱉어냈다. 시원한 물 생각 못 참을 때는 할 수 없이 음료수를 사다 마셨다고 한다.
전장포 할머니들에게서 ‘전장포 큰 애기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김금임(66) 할머니는 “나는, 모래 서 말이 뭐여” 하고 얘기한다. 이곳에서 나서 이곳 남자와 혼인하고 여태 이곳에서 살았는디 열 말도 더 묵었겄네. 모래 묵고 고 힘으로 애기 낳고 살았는께. 모래 구덕에서 살았어. 겨울에 바람 불믄 없는 뚝이 사방에 생겨. 여름 남풍 불믄 자연히 없어지고. 길이고 뭐고 없어. 모래에 묻혔다가 사람 댕기믄 길이 나고 . 바람 쪼금만 불어도 뒤집어 써야 살제 못 살아. 싸우디(사우디아라비아) 마냥 눈만 빼꼼시 내놓고 댕겼어. 치매(치마)로 머리 둘러쓰고. 눈도 못 뜬디 부끄런게 있가니?”
“전장포 가서 음식 자랑하지 마라”
주명심(67) 할머니도 모래 열 말 정도는 먹은 전장포 큰 애기다. 가용으로 고추나무 몇 그루 심은 어촌마을, 모래땅은 일할 때도 애물단지였다.
“활개중선이라고 바다하고도 하늘하고도 막 싸우는 배를 했어. 면사 그물 두갱이 떠서 활개에다 그 놈 달아갖고 새우를 잡았는디 그때는 시방보다 젓갈을 더 많이 했제. 새우 잡아오믄 지게 바작으로 지(져) 나른디 모래 땜시 한번 왔다갔다 하믄 금방 지쳐불어. 리아까(손수레)도 모래 속에 배겨(박혀) 갖고 못 끌고 다니고….”
새우젓으로 이름난 전장포. 살기 힘들 정도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땅이었으나 선창이 조성되고 길이 포장되며‘콘크리트땅’이 됐다. 한 할머니가 덤장으로 잡은 고기를 손수레로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건애 하는’(고기 널어 말리는) 것도 일이었다고 한다.
“까래(짚으로 짠 깔개)에다 새우 빈지래기(밴댕이) 북새기(북새우) 널어노믄 그냥은 못 묵어. 얼맹이(채)를 크게 맹글어갖고 지붕에다 끈 달고 얼맹이질을 해야(모래를 가려내야) 물건이 돼제. 고놈 목포로 보내갖고 돈 사갖고 보쌀(보리쌀)도 폴아오고 참지름도 폴아오고 해서 살았어.”
짚으로 짠 까래는 집으로 모래가 못 들어오게 막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바람이 불 때면 둘둘 말아 골목 어귀에 쌓아 모래를 막았다. 할머니는 모래 때문에 물동이 깬 얘기를 해 준다.
“새미물(우물), 모래땅이라 민물 솟아나는 디가 있는디, 물 잘 나왔어. 근디 엄청 가물 때는 물을 대려(물이 모일 때 까지 한동안 기다리는 것) 묵어. 어매가 ‘물 한 동 대려 갖고 온나’ 글제. 물 찔금찔금 나오믄 쪽박으로 차리차리 떠 갖고 물동이에 채우는 거여. 한번은 밤에 잠 못 자고 물 대려 갖고 온디 모래바탕에 발이 빠져 갖고 넘어져 불었어. 물동이 깨고 밤새 대린 물 다 엎질러 버렸제. 얼매나 서럽던지.”
“비 내리는 날이 좋았다. 모래 가라앉고 모래땅 단단히 굳어져 걸어 다니기가 좋았다. 손수레도 척척 밀고 다닐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날 만났다는 듯이 담박질(달리기)을 했다.”
할머니는 ‘전장포 큰 애기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 말고, 말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전장포 가서 음식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그것.
전장포 여자들이 음식을 잘한단다. 배로 먹고살기 때문에 그 날 잡은 고기로 매일 요리를 한다. 계절 따라 잡히는 고기, 국 반찬의 종류가 많다. 무엇보다 전장포에서 나온 새우젓에 젓국이 어우러지면 김치 맛이 그만이다.
게다가 모래 때문에 음식 맛이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다. “전장포 여자들이 음식을 정침하게(깔끔하게) 해. 안 글믄 (모래 들어가서) 써글써글 싸그락싸그락 거려 분께. 보쌀 이룰(조리질을 할) 때도 반찬 하나를 해도 모래 무서운께 신경을 쓰제. 그렇게 하나하나 정성 들어간 티가 밥상에 나타나.”
늘 모래 때문에 고생했지만 전장포에서 모래는 주민들을 먹고살게끔 해준 고마운 존재다. ‘풀등’이라는 게 있다. 바닷속 길다랗게 이어진 모랫등. 바람 거세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닷속 모래산맥. 그 주위는 항상 흰 바다거품이 일고 배가 걸려 좌초되기도 하지만 풀등은 물고기들의 산란 처이자 서식처이다.
“백화새우가 모래 속에서 모래 묵고 살잔애. 근게 색깔이 모래처럼 고와. 우리는 고놈 잡아 ‘오젓’ ‘육젓’ 하며 살고. 황석어 병어 민어 꽃게 대하 다 금모래 속에서 나거든. 모래 속에서 난께 최고 맛있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모래 퍼가분디(장소)는 고기 씨알도 없어.”
“모래땅 논에 ‘호미모’ ‘짝대기모’ 심고, ‘치’파서 물 대고 했으니 얼매나 힘들었겠어.” 모래는 독특한 농사 방법도 만들어냈다. 대광해수욕장 뒤쪽에 자리한 대기리, 그리고 광산, 도찬리, 하우리, 괘길리, 전장포, 회산마을 등은 오랜 세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섬 안으로 들어오며 사막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 김택관(59)씨는 “모심을 때 논 굳어져 불믄 손톱이 다 빠져”하며 모래땅에 농사짓는 어려움부터 얘기한다.
전장포 바닷가. ‘전장포 큰 애기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의 실체를 증언이라도 하려는 듯 한쪽 바닷가에는 모래가 남아 있다.
바닷가로 꼬리를 길게 내민 전장포는 그만큼 바람도 많았고 모래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살기 힘든 곳이기도 한 전장포 였기에 그는 또 광주 태생으로 전장포에 고기 사러 왔던 시인 김재구님의 “전장포 아리랑”을 소개했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눈물 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킨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베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그늘에 띄우면서
* 덤장은 막장식 그물을 가리키는 임자도 사투리
* 산마이는 일자그물을 가리키는 임자도 사투리
“써레질 막 허고 난 똥구멍(뒤를) 따라서 숨거야(심어야) 이양이 되제, 땅 굳어져 불믄 포크레인이 와서 숨궈도(심어도) 못 숨궈.”
‘강노’라는 논이 있다. 물을 대지 못하는 모래땅 논, 사람 손으로는 모를 심지 못하는 논이다. 그래서 손 대신 심는 ‘호미모’ ‘짝대기모’라는 게 생겼다.
“여자들이 호미로 파서 숨근디 남자들이 모 포기를 떼 갖고 갖다 주믄 숨고(심고) 숨고 했어. 여자 셋에 남자 하나가 달라 붙었는께 인력이 겁나게 들어가 불제. 짝대기모는 지게 짝대기로 모래땅 구멍 뚫어 갖고 숨는 거고.”
임자도에만 있는 농법이 있다. 이른바 ‘사막 농법’. 지금은 ‘포항’이라 하는, 새마을운동 때 농지정리를 하며 논 사이사이 커다란 수로가 생겼지만, 하늘 보고 농사지을 때는 ‘치,를 (파거나물이 모여 흐르는 또랑 이라는 것) 이용했다.
“황토 땅은 물이 안나, 모래땅에서 물이 나제. 물 나올 만한 모래땅을 파는 거여. 그것이 ‘치’여. 농사지을 때 되믄 동네 사람들 다 달라들어 모래땅을 깊이 파. 농사짓다가 가물믄 또 파고. 고 물을 오늘은 1∼5번 내일은 6∼10번 정해서 물 대고(논에 물을 넣는 것) 했제.”
‘치’ 파는 것이 한 해 농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오랜 농사 경험으로 물 나올 만한 모래땅을 알았다. 치는 계단식 논의 위쪽에 팠다. 그래야 논에 물을 차례차례 댈 수 있었다. 치 위에 자리한 논은 ‘마누라 품앗이는 해도 두레 품앗이는 못한다’는 두레질로 물을 댔다. 치에서 물을 대기 쉬운 논이 상답이었고 물하고 먼 논이 하답이었다.
“치 팔 때는 다 나와야 해. 어른 없으믄 아이들이라도 나와 시늉을 해. 몸 아파서 안 나오고 객지에 나가 있었거나 하믄 대신 동네에 술을 냈고 참회를 하고. 벌금도 성의껏 내고 그랬어.”
농사 때 닥치면 치 파는 것 외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심한 겨울 바람은 논을 모래로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모래등성이 된 논을 삽으로 다 떠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김영소(69) 할아버지는 모래가 있어서 지을 수 있었던 농사 얘기를 하나 더 내놓는다. ‘화염(소등)’이다. 모래가 섞인 ‘모래뻘등’이 있어 소금을 구워낼 수 있었다. 소금을 옛날 사람들은 ‘벗’이라 했는데 임자도에는 ‘버던’ ‘벋우게’ ‘들버지’ 등 이와 관련된 땅이름이 있고 모두 모래가 많은 서쪽 대광해수욕장을 포함한 해안에 자리해 있다.
“소 가지고 모래뻘등 쟁기질을 해. 지게로 갯물(바닷물) 져다가 붓고 또 써레질해서 몰리고(말리고), 또 한 번 붓고 써레질허고. 뙤약볕(뜨거운 햇빛)에 소가 힘든께 드러눕고 죽기도 허고 했어. 모래뻘등 모르믄(마르면) ‘섯등’을 맨들어. 둠벙 파서 나무 작대기 걸고 솔 (소나무)잎싹을 엉거(얹어). 그 섯등 우게(위에) 모른 모래뻘을 영거. 글고 거그에 갯물을 부서(부어). 물 빠지믄 고놈을 궈. 가마솥이 5평 정도로 큰디 화부가 밤낮으로 일주일간 불을 때고 있어. 화부가 불 잘못 때믄 소금이 누렇게 누릉지 돼 불어.”
‘진서방’이라는 소금신이 있었다. 소금을 구울 때는 목욕하고 솥 앞에 걸게 상을 차려 진서방에게 빌었다. 소금이 잘 되면 ‘진서방 덕을 보았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진서방이 훼방을 놓았다’고 말을 했다.
‘타리 기생 50여 명의 한이 묻힌 하우리 ‘모래무덤’이 있다고 하여 임자도 최대 포구, 하우리로 간다. 먼 옛날 하우리 모래밭에는 ‘모래무덤’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하우리 일대는 그야말로 번창가 였다. 동양제일의 민어 어장 ‘타리’(대광해수욕장 맞은편에 있는 섬)가 있었기 때문이다. 타리파시다. 고기잡이배들과 고기를 받아내는 부선들이 모여들어 타리까지 다리처럼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파시가 열렸다. ‘돈 뭉치가 굴러다니던 곳이라 일본의 어선과 기생들이 판을 치던 곳이라 일본사람들은 목포는 몰라도 타리는 안다’는 말이 생겨났고 면소재지에도 없었던 파출소와 병원이 들어섰던 곳이다.
“아, 모래 서 말만 묵었겄어. 이라고 늙어 불었는디.” 찾아간 날 대기리 회산마을 노인잔치가 있었다. 뜻있는 22명이 돈을 거출해 하우리에 가서 민어 덕자 꼴뚜기도 사오고 닭도 잡고 술도 사왔다. “별 것 차린 것 없지만 …”하며 노인들을 대접했다.
일제시대 파시가 들어서는 6월이면 집 한 채도 없는 모래밭에 상인들이 몰려와 수 백호의 초막을 지어 장사를 했다. 하우리 모래무덤은 뱃사람들과 일본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던 ‘타리기생’과 관련된 것이다. 하우리 허영식(80) 할아버지는 “기생들이 오빠라고 부르던 최판동이라는 사람이 해방되고 나서까지 타리기생들 혼을 달랠라고 칠월칠석이면 제사를 크게 지냈어”라고 말한다.
임자도 출신 김영회씨에 의하면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본사람 한 떼가 타리파시에 들렀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기생을 칼로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한다. 타리기생들과 뱃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일본 사람들은 유유히 웃으며 일본으로 떠났다. 나라 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떠나는 날 타리기생 50여 명은 모래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었다 한다. 종일 울다 저녁에 머리기생의 초막에 모두 모였고 일본 사람들의 횡포에 항의하는 뜻으로, 나라 잃은 설움에 양잿물을 모두 마시고 숨을 끊었다. 뱃사람들이 그들의 주검을 수습해 모래밭에 모래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다. 바람에 모래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곳 터는 알 수 있었다.
임자도 모래 속에 감춰진 슬픈 역사가 하나 더 있다. 이직도 감내하지 못한 슬픔이 임자도 버던(대광해수욕장과 딸린 20km길이로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사막) 모래 속에 있다.
해방 전후 임자도는 전라도 도서지역 중에 좌·우익 갈등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1400여 명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주민 1만 여명이 살았던 시대다. 그리고 그 죽음의 처참한 방식에 사라진 사람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모래가 있다.
“그런 것 생각하믄 바다 가기 무솨(무서워).”
모래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시켰다. 시신을 찾으러 모래구덩이를 파면 모두가 모래를 한 입씩 물고 죽어 있었다. 최술(76) 할아버지는 “처참했제” 하며, 다 지난 일이라고 말을 아낀다.
없어진 모래, 주민들의 ‘모래 지키기 운동’에 대해서도 늘어놓는다.
“요(이) 대광해수욕장 주변이 이라고(이렇게) 평평한 디가 아녀. 아카시아 우거진 산이었어. 모래산. 근디 유리 맹근다고 다 퍼가불었제.”
우리나라는 1980년대 강모래가 바닥을 드러내자 바다에서 모래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지가 충남 태안군과 신안군 이었다. 김택관씨는 “그 당시에는 모래를 퍼 나르는 화물차 먼지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타리도 섬 쪽도 그랬고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바지선들이 모래 뽑아 올리기에 밤낮이 없었다. 모래 채취로 인한 세수(稅收)는 군 재정에 무시못할 존재였다.
그러나 어민들은 해양생태계 파괴에 따른 어획량 급감을 실감했다. 전장포 젓새우 어획량이 급감했다. 섬을 떠나는 어민들이 생겨났다. 꽃게도 잡히지 않았다. 섬에 있던 신안수협 북부출장소도 육지가 된 지도의 송도로 옮겨졌다.
주민들은 “더 이상은 안 된다”며 ‘모래 지키기 운동’을 전개했다. 신안군도 2003년 해안 유실을 이유로 신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2001년 신안군이 해안 유실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 해안선 1270km 중 17%에 달하는 75.7km가 사라졌다. 임자도는 14.5km의 해안이 없어졌다. 모래 채취로 물 흐름이 바뀌며 해안에 쌓이던 모래 흐름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자도의 모래 채취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갖은 수법이 동원돼 불법 채취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전남도 바다모래 불법 채취행위 적발 건수만 60여 건. 어두운 밤 시간대를 틈타, 기상 악화를 틈타, 연안 해역으로 들어와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임자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 혹은 ‘전장포 큰애기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 간다’는 그 말도 해양생태계를 생각하지 않은 무분별한 개발로 살아남기 힘들게 된 것이다.
최술(76) 할아버지의 또 하나의 놀랜 얘기는... “여그 아카시아가 많지요? 왜? 임자도만 유별나게 아카시아 나무가 많은지 아시오? 그건 일제 때 여그가 두 팔로도 훨씬 넘는 소나무들이 많았지라. 헌데 일본 놈들이 이순신 장군한테 영금보고 배를 못 만들게 아카시아나무를 주고 소나무는 다 짤라 가버린 그놈들의 흔적이랑께.”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8)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대의 타리도의 타리민어파시의 기생, 선옥이의 실화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바로 앞에 타리도에 민어파시가 광복 전 까지 있었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아가씨 한명이 어떻게 해 흘러 들어와 기생으로 있으며 타리를 빛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본 사람들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일본사람들이 돈 뭉치를 주면서 일본에 가서 살기를 권했지만 마치 논개와 같은 절개로 우리민족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그들과는 타협한번 해 본적이 없었다 한다.
해방 이후 그들이 물러가고 100여년이 흘러간 후 많은 학자들과 타리기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타리파시가 있었던 장소를 찾았으나 타리도 불등에는 그녀가 없었고, 손님도 없었고, 파시도 없었으며 마을도 사람도 없지만 변하지 않은 그때의 섬 모습만 남아 있다. 오히려 서울 봉천동에서 타리파시의 미락식당이 없어진 것을 슬퍼하는 한 외로운 할머니의 목쉰 아리랑 가락 속에만 그녀의 이름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뜻밖의 이야기다. 줄거리를 말하면 전라도 광주를 고향으로 두고/ 처녀시절 타리도의 도구포에 임시잠깐 몸을 두었다가/ 아리랑 가락 속에 영원히 이름을 실은 그녀의 이름은 산옥이 이다는 것이다.
ㅡ산옥이의 이름이 남은 아리랑 구절ㅡ
산옥이 고향은 전라도 광준디
임시잠깐 몸둔디는 임자라 도구포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흥흥 아라리가 났네....
위의 타리파시 아리랑의 실화적 설화를 기초하여 아래의 타리파시라는 것이 나왔는데 타리파시 아가씨인 선옥이를 대상으로 서정주님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 속에 담아 표현한 이가 있었다.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의 내용은 :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詩
타리파시
임자도라 타리로
타리파시 아가씰 보러 갔더니
아가씨는 이미 가서 보이질 않았고
서울 사는 할머니의 아리랑 가락 속에
성도 없이 이름만 남았습디다.
그것도 한이되어 남았습디다.
9) 임자도 유배자 조희룡과 전설의 용난굴 그리고 김령의 유배일기 소개
ㅡ. 조희룡 : 임자도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임자도에서 문화의 정수를 꽃 피워냈던 우봉 조희룡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희룡은 조선 말기의 이름난 화가로, 시·글·그림에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851년 조정의 예송논쟁(禮訟論爭-조선 현종 때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사건)이 있었는데 여기에 개입하다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의 이흑암리(여서개의 바위가 조삼리의 재를 넘어가 육바구 진입로에 있어 유래된 육바구(바구는 바위돌)로 현재는 육암리라 부름)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는 외딴섬 임자도 유배지 이흑암리 오두막집에‘만구음관(萬鷗音館-만 마리 갈매기가 우는 집)’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임자도에 머무는 3년 동 안, 묵죽법과 괴석도에서 완숙한 기량을 보이며 그의 예술을 정점으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 조희룡에게 임자도의 3년이 없었다면, 그의 예술세계가 완숙함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희생물로 임자도에 유배된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련의 남종 문인화를 집대성한 운림산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적 문인화를 개발하고 추사 김정희와 달리 이념보다 개인의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을 주장한 시서화의 영수이다. 그가 머물던 이흑암리와 은동마을은 임자도에 3년간 유배시 조희룡의 슬픔과 기쁨이 서린 곳이다. 마을 앞의 어머리해수욕장 오른쪽 산길을 한 굽이 돌아내려가면 또 하나의 아담한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숨을 은(隱) 자를 쓰는 은동 해수욕장이다. 조희룡은 유배시절 따르는 제자들과 주민들이 용이 승천했다는 말을 듣고 용난굴을 구경 갔지만, 용은 없고 용난굴만 구경하고 왔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은동 뒷산인 한동산에서 “평생 달구경 중에 가장 멋진 보름달”을 감상하며 시름을 잊기도 했다. 외로울 때 한동산과 용난굴이 친구였던 그가 고향을 그리던 시를 소개하면 :
“삿갓에 나막신 신고 바람 맞으며 산에 올라
푸른 바다 내려보니 바닷속 하늘 개었네
작년 서울의 1만채 집을 비추던 달이
지금은 어룡의 등 위를 가고 있네.”
그는 매화도와 난을 잘 그린 화가였으며 그의 유명 작품 중에서 반이 넘은 8덟개의 작품이 임자도에서 그린 것으로 남아 있고 홍매도대련은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난굴은 폭이 7m 높이 8m에 물이 빠지면 길이가 100m나 되며 입구 측에 얼굴바위와 거북바위가 특이하다. 얼굴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고 거북바위 앞에서 건강과장수를 빌었다는 설화가 있다. 임자도의 초등시절 누구든 이곳으로 소풍을 안간 사람은 없고 보물찾기 하지 않은 학생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결국 그는 1853년도에 임자도 주민들의 후한 대접과 사랑에 감사하며 유배기간을 마치고 임자도를 기리며 13년 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흔적의 숨결을 임자도가 외면하지 않고 조희룡비를 이흑암리(육암리) 마을에 새웠으며 그의 적거지 복원과 그림 등을 수집 비치하고 체험 학습장을 추진 중 이다.
10) 임자도 진리 유배자인 김령의 ‘역대천자문’과 유배일기 간정일록 소개
1853년 조희룡이 3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9년 후 임자도 진리에 김령이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의 흔적인 ‘역대천자문’과 ‘유배일기 간정일록’이 2007년에야 밝혀져 큰 가 치는 물론 화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유배자와 유배문화를 알리기 위한 최근 연합뉴스의 조근영 기자의 글과 문화의 산물을 소개해 보면 :
ㅡ. 역대천자문
조선시대 천자문과 다른 '역대천자문'이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발견됐다.
신안군은 "조선후기인 1862년 임자도에 유배를 와 1863년 음력 2월 임자도 진리 박윤량의 초가에서 김령에 의해 완성된 역대천자문이 발견됐다"고 10일 밝혔다.
신안군은 이 역대천자문이 최근 신안군 임자도 성헌장 서초당 기념회에서 김령의 일기와 역대천자문 해제 작업을 하던 중 발견됐다며 그 일부의 기록과 고문서를 공개했다.
이번에 발견한 일기와 역대천자문의 해제가 완료되면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유배 생활의 전모를 상세히 파악하고 유배인들이 신안군 내 각 섬들에 끼쳤던 문화 영향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령은 역대천자문을 완성한 1863년 2월 23일의 유배일기에 "뜻은 사기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주홍사가 지은 백수문에 나오는 자(字)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다. 들창문 아래 놓아두고 어린 학동들 공부에 작은 보조 자료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해서로 써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천자문을 짓느라 깊이 생각하느라 몸과 마음이 고달파져 술을 따라 마시고 잠을 청했다"고 썼다.
이 문서는 현재 임자도 성헌장 서초당 기념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신안군 관계자는 "기존의 천자문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역대천자문은 유배인에 의하여 처음으로 우리의 시각에 맞춰 지역 향민들을 애틋하게 생각하며 기록한 최초의 우리식 천자문"이라면서 "조선 후기 고문서 전적류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신안=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2007.10.12>
11) 임자도 재원도의 백화새우로 만든 오젓과 육젓 소개
재원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 동경 126°10′, 북위 35°07′에 위치하며 면적 3.025㎢, 해안선 길이 11㎞, 인구는 161명(2001년)이다.
동쪽 중앙부 해안에 인접한 부속도서 상항월도(上項越島)는 돌을 쌓은 징검다리로 연결되어 육계도(陸繫島)처럼 되어 있다.
모래 사막과 오아시스, 그리고 그 모래를 깔고 있는 티 없이 맑은 바닷물, 새빨간 입술로 30리 해안선을 수놓은 해당화, 이렇게 말하면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을 얼른 머리에 떠올릴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재원도는 바로 이곳 맞은편에 있는 섬이다.
약 240년 전, 여량 진 씨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앞 바다에 풍랑이 심하여 겨울에 항해하기가 힘들자 중국에 보낼 양식을 겨울동안 이 섬에 보관했다가 날씨가 풀리는 3∼4월에 수송했다고 한다. 이때 양곡을 보관하던 장소라 하여 섬이름을 재원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 왕래하는 선박이 이곳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신안 해저 유물지라고 하는 '송원대 유물 매장 해역'인 증도의 도덕도 앞바다가 재원도에서 그리 멀지(4km) 않은 지역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최고높이는 북쪽의 244m로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며, 해안 곳곳에 소규모의 만과 갑이 이어져 있고 특히 북서쪽 해안과 곳곳의 소규모의 만과 갑이 이어져 있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이며 특히 북서쪽 해안과 곳곳의 돌출부는 높은 해식애가 발달했다. 서쪽 해안 예미마을과 동쪽 해안 재원리에 취락이 분포한다.
이러한 재원도는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이다. 새우젓 하면 으레 임자도 전장포나 낙월도를 손꼽고 있으나 실은 그곳 배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와 새우를 잡는 것이다. 여기에서 잡은 새우젓이 전장포와 함께 전국 생산량의 60∼70%를 차지한다고 하니 그 규모에 놀랄만하다. 5월에 잡히는 '오젓', 6월에 잡히는 '육젓'은 그 빛깔이 얼마나 하얗고 곱던지 '백화새우'라고 부르는 이유를 절로 알게 된다. 기타 주요 수산물은 민어와 병어, 꽃게 등이고 타리도를 이어 1970년대 까지 파시로 유명한 어족의 보고이며 교회도 1개 있고 낚시꾼들이 임자도 본 섬과 딸린 하우리에서 2km 떨어진 별도의 섬, 재원도 까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12) 군량미 수송 해상 요충지며 조선시대 최대의 타리도 민어파시
하우리 뒷 섬타리(나박바구)쪽은 파시(波市)로 소문났다.
1925년 동아일보는 타리 어장은 민어로 조선에서 제일 큰 곳으로 소개했다.
농가 한 채만 있던 곳에 파시 때 초막 수백호가 생기고 어부 수천 명 외에 놀러오는 사람이 매일 2∼300명씩 왕래하여 전국 산업시찰의 대상지가 됐다. 가게 116곳(잡화상14·욕탕1·세탁4·이발5·음식점61·요리점18·선구상6·병원2·중계업5)에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창기술집 (기생)만 130명이 있어 일본을 비 롯 중국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전라도와 임자도는 몰라도 타리도는 안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했던 곳이지만 일제가 물러가고 광복이 되자 현재는 대광해수욕장 바로 앞(80m) 정박한 어선들만 보일 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전제줄거리 요약]
임자도는 신안군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로부터 90㎞, 목포와의 거리는 66.6㎞, 지도 점암에서는 12㎞ 지점(동경126。5", 북위 34。5")에 위치해 있다. 임자도 서쪽에 자리 잡은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수욕장 이다. 넓은 백사장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 또한 서정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한 천혜의 해수욕장이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교통과 접근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무안 해제∼신안 지도간 연륙교가 세워지고 지도읍 점암과 임자도를 왕래하는 철부선이 운항하면서, 승용차로 당일로도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코스가 되어 점점 찾는 인파가 늘고 있다. 지난 '90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대광해수욕장은 완만한 경사와 따뜻한 수온, 광활한 백사장에 넓은 야영장과 천연 잔디운동장, 체육시설, 샤워장, 주차장, 숙 박시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위의 피서객은 물론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M.T 및 운동선수의 전지훈련장으로도 사랑받는 곳이다. 또한, 해수욕장 앞에 떠있는 타리도, 재원도, 대태이도, 혈도, 어유미도, 바람막기도, 고깔섬 등 이름도 아름다운 수많은 크고 작은 유,무인도가 낚시꾼을 유혹하며 떠있는데, 이들 섬에서는 농어, 돔, 장어, 민어 등이 잘 낚이는 낚시터로도 유명할 뿐만 아니라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줌으로써, 대광 해수욕장의 바다는 언제나 잔잔하다. 백사장의 모래는 유리와 반도체 원료로 쓰이는 규사토로서 입자가 아주 곱고 부드러우며, 백사장 뒤로는 해당화, 해송, 아카시아나무가 숲을 이루어, 야영장 및 한낮의 폭 염을 식혀줄 수 있는 천혜의 요건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신안군의 군화인 해당화가 대규모로 자생하고 있는 곳이다. 바닷가 에는 해당화가 둘러 핀 모래언덕이나, 산중턱에 오아시스가 형성돼 있는 것이 특징인데 대광해수욕장 바로 옆에 이 섬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어 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임자도는 섬 전체가 모래언덕으로 형성되어 있어, 갯바람이 심하게 불고나면 들과 산조차도 모래로 뒤덮여 버리고 만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임자도의 지형은 중동에서나 보는 사막의 지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단다. 그래서 이곳 임자도를 뭇 사람들은 한국의 유일한 사막이라 부른다. 임자도는 대광해수욕장과 함께 새우젓으로도 유명하다. 전장포의 먼지모래를 딛고 사는 백화새우는 특히 그 몸집과 색깔이 먼지모래처럼 고우며, 전장포에서는 해마다 1천여톤의 새우를 져내 전국 새우젓 어획고의 60%를 차지하며 민어, 병어, 농어, 돔 등 어족의 보고이다. 고인돌과 토기 및 패총 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임자진이 있었고 대둔산 성터가 있으며 우봉 조희룡 같은 시.글.그림의 대가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유배문화 는 크게 발전시켜야 한다. 아울러 좋은 관광지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연을 보호하며 앞서가는 관광마인드로 끝없는 프로그램 개발에 노력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임자도가 되면 좋겠고 또 그런 노력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어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