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개녕 경주 곡부 김해 나주 남양(당홍) 남양(토홍) 남영 남원 남평 남해 단양 달성 담양 대전 밀양 부계 부림 수원 순흥 악개 안동 예산 의성 인동 장수 전주 진주 창원 청주 충주 파평 풍산 풍천 함안 홍주 홍천 회인 흥산 총 40개의 본관과 457,567명이 있다.(1985년)
홍씨[洪氏]는 중국 돈황(감숙성 서북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의 공공씨[共工氏] 후손이 원수를 피해 공자[共字]에다 수자[水字]를 붙여 처음으로 홍씨의 성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홍씨의 역사는 당나라 태종 때 8학사의 한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 문화보급에 공헌하고, 삼한통합에 따라 신라에서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어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이 시초가 된다.
홍씨의 본관은 문헌에 111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홍씨는 남양[南陽], 부림[缶林],풍산[豊山], 홍주[洪州], 4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홍씨 중에서도 대본[大本]으로 알려진 남양홍씨는 전혀 근원을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는 당홍계[唐洪系]와 고려 고종 때 금오위 별장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토홍계[土洪系]이며 이 두계통은 역사적으로 구분되어 왔다.
전체 홍씨 인구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남양홍씨에서 8할 이상이 당홍계로 추산된다.
그 외 풍산홍씨는 고려 고종 때 국학직학을 역임한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하며, 역시 고려 때 태조 왕건을 도와 익찬공신으로 해풍부원군에 봉해진 홍규[洪規]는 홍주홍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홍난[洪蘭]의 계통인 부림홍씨는 남양(唐洪系)에서 분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 당홍계(唐洪系)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27대 왕인 영유왕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 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남양)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이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儒)이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은(殷)나라 부열(傅說: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이름을 은열로 하사했다고 한다.
회인 홍씨도 후에 합본하였다고 한다.
[ 대표적 인물 ]
홍처량(處亮):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명원(命元):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홍계희(啓禧):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홍명하(命夏):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토홍계(土洪系)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 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다. 가문의 기틀을 잡아 가세를 크게 번창시켰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천등리(등굴)에 있었으나 없어져서 비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제향한다.
[ 파와 중시조 ]
홍언필(洪彦弼): 문희공파
홍담(洪曇): 정효공파
홍한(洪瀚): 참의공파
홍귀호(洪貴湖, 10세손): 주부공파
홍귀연(洪貴演, 10세손): 대호군공파
[ 대표적 인물 ]
홍언필(彦弼):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부인 여산 송씨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의 딸이다.
홍섬(暹): 홍언필의 아들.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을 세차려나 중임했으며 청백리에도 올랐다.
홍담(曇): 홍언필의 조카. 훈구파의 거두로 선조 때에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도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홍숙(淑):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 예조, 병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 등을 배출하였다.
부계 홍씨(缶溪 洪氏)
시조 홍좌의 조상은 시중을 지낸 홍란이며 한양에서 살다가 부계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의 후손은 알 수 없으며 고려 때 직장동정을 지낸 홍좌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부계(의흥)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홍귀달(貴達):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예종 때에는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명나라에 다녀와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하였다.
홍언국(彦國): 홍귀달의 아들. 형 홍언충(彦忠)과 함께 연산군 때 문장과 글씨로 각각 이름을 날렸다. 언국은 지조가 굳어 연산군이 그의 딸을 탐내 어 입궐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자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년(고려 고종 29년) 문과에 장원하여 국학직학에 이르렀다.
그가 풍산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풍산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북 안동군 풍산면 신성포 오산당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홍주원(柱元): 선조의 부마이다.
홍만용(萬容): 홍주원의 큰아들.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현보(鉉輔): 홍만용의 손자. 영조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봉한(鳳漢), 홍인한(麟漢)형제: 현보의 아들이다. 홍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이들 두 형제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궁중참변의 격동을 맞아 형 봉한은 영조의 실덕(失德)을 힐책하는 시파로, 아우 인환(좌의정)은 사도세자의 실덕을 규탄하는 벽파로 갈리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보호한 사람이 홍국영(國榮)인데, 그는 홍주원의 둘째 아들인 홍 만형(萬衡)의 5대손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와 숙위대장이 되어 세도정치를 휘두르지만 4 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홍양호(良浩):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영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의 석학들과 교류하고 돌아와 고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하였다.
홍만선(萬選): 숙종 때의 실학자로 실학사상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 '산림경제 (山林經濟)'는 후일 실학 연구에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홍주 홍씨(洪州 洪氏)
시조 홍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벌 할 때 홍주에서 처음 만나 계책을 세워 수원을 얻고 견훤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으로 해풍(홍주)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홍주로 하였다.
회인 홍씨(懷仁 洪氏)
시조 홍유(洪儒)는 후고구려(태봉)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 복지겸, 배현경 등과 함께 궁예를 추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여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유는 남양 홍씨(당홍)의 시조 홍은열과 동일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홍측에 의하면, 시조 홍은열의 초명은 유(儒), 자는 술(術)인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웠으므로‘은(殷)나라의 부열(傅說: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는 뜻에서 태조로부터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인할 길은 없다.
남양 홍씨(당홍)와 합본하였다.
[대표적 인물 ]
홍윤성(允成):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이 되고, 예종 때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