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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천장어일번지 원문보기 글쓴이: 털보
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이 성씨는 소주(蘇州) 가씨 단본으로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그 시원(始原)은 요제(堯帝)가 작은아들 公明을 가(賈)에 봉함으로써 賈로 성씨를 삼게되어, 주나라 혜왕때 가화(賈華)란 사람이 있었고, 한나라 고려 후기에 가수(賈壽)는 랑중령(郞中令)이 되었으며, 진(晋)나라 때 가효(賈孝)는 나라에 공을 세워 가(賈)성을 하사 받았다. 우리 나라의 가(賈)씨는 선조 때에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賈維鍮가 시초라 함. 이 성씨는 가평(加平) 외에도 남양(南陽), 서산(瑞山), 영광(靈光), 경주(慶州), 인동(仁同), 배양(裵陽), 해주(海州)등 여러 본이 전하고 있지만 "가평"이 주된 본관이다. 원래는 중국의 성씨로써 간백(簡伯)의 후예로 전하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가평간씨의 시조 간유(簡有)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중랑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후손 간홍(簡弘)이 역시 장군으로 가평간씨의 일파를 이루었고, 또, 간세진(簡世縝)을 파조로 하는 또 다른 일파가 있다. 이 성씨는 제갈씨에서 갈린 성씨라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덕흥왕 때 귀화한 성인데 고종 때 제갈홍(諸葛泓)의 형제가 복성을 각각 1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諸)씨로 동생은 갈(葛)씨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별로 없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으로 갈노(葛盧)란 사람이 있다. 감씨는 본관이 합포(合浦)감씨 단본이다. 또는 창원(昌源)감씨로 부르기도 한다. 감씨는 중국의 성씨로써 은나라때 감반(甘盤)이란 사람이 있고 후한(後漢)의 감영(甘英)은 경략가(經略家)로 유명한 반초(班超)의 부장(部將)으로써 안식국(지금의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으로 진격하려다가 지세가 불리하여 회군하고 말았지만 중군인이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감씨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합포 감씨의 시조는 고려말 우왕 때 사람인 감위조(甘威朝)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감상중(甘尙中)이 문과에 올라 군위현감 (軍威縣監)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등을 역임했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백여 본이 나타나 있으나, 오늘날까지 분명히 전해오는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백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봉일(鳳壹), 법전(法田)등 9본뿐인데, 그것도 모두가 대종(大宗)인 진주에서 갈려진 것으로, 다만, 강씨가 모여사는 지방 이름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모든 강씨의 첫 시조가 된다. 시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隨)나라 사람으로 수양제(隨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정동대원수(征東大元帥)로 출정했다가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고구려 사람으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출정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진주강씨의 80%는 강창서(姜彰瑞)의 후손으로 그 가운데서는 강사첨(姜師瞻)의 자손이 가장 많다. 대종파(大宗派)는 시조에서부터 강창서(姜彰瑞)에 이르기까지 계보(系譜)를 달고 있지만 분명치 않고, 은열공파(殷烈公派)의 본을 따르고 있다. 금천강씨파(衿川姜氏派)는 시조에서 강한찬(姜邯贊)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각각 따르고 있으나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은열공파의 중시조(中始祖)인 강민첩과 금천강씨파의 강감찬은 다같이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병장들이다. 고려 초엽인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약 80년 사이에 세 차례나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 3차 침입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때 소배압(簫排押) 이끄는 거란 대군을 귀주(龜州) 싸움에서 상원수(上元帥) 강민첩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각각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상 유례 없는 대첩을 장식하였다. 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5명, 대제학(大提學) 1명, 청백리 7명을 냈다. 통정공파(通亭公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를 꼽는다. 조부인 강준백(姜准伯)은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역임하였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뒤에 호조참의(號曹參議)를 지냈다. 강희맹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 병조정랑을 거쳐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케 했다. 강희맹은 강희안의 조카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수양대군의 등극을 도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참찬, 우의정,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귀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다. 통계공파의 姜동은 세종때 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의 아들로, 성종 때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화를 입었으나, 그의 세 아들 호(滸), 택(澤), 온(溫)은 모두 영달하였다. 온(溫)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강사상(姜士尙)은 명종 때 대제학(大提學),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등을 지냈고, 선조 때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우 가운데 사안(士安)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고, 사필(士弼)은 관찰사를 지냈다. 강사안(姜士安)의 아들 강신(姜神)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강인(姜絪)은 임진왜란 때 왕을 잘 호위하여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적진을 왕래하며 외교로써 공을 세웠다. 은열공파(殷烈公派)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가 유명하다. 강백년(姜栢年)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효종 때 충청,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뽑혔다. 그의 아들 강현도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강세황(姜世晃)은 강삼(姜三)의 아들로써 육조의 참판을 고루 지냈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 )는 강세황(姜世晃)의 증손인데, 철종 때는 대사간을 지냈고, 뒤에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인헌공파(仁憲公派)의 강석기(姜碩期)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 명신(名臣)으로는 광해군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사필(士弼)의 아들 정, 명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顯) 등을 들 수 있고, 학자로는 강항(姜沆)이 이름났다. 그 밖에 청련하고 강직하여 강경파로 일컬어진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활약항 인물로는 특히 강석보(姜碩寶), 강복(姜樸), 강필신(姜必愼), 강필경(姜必慶) 등을 꼽을 수 있다. 강석보(姜碩寶)는 현종 때 문과에 올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강복(姜樸)은 영조 때 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강필신(姜必愼)은 지평(持平)을, 강필경(姜必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발행인의 한사람인 강위(姜瑋)는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근세에 와서는 독립투사였던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꼽을 수 있다. 강(康)씨의 본광은 십여본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이 대본으로 오늘날엔 이 세본 이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씨의 도시조는 기자조선 시대 기자(箕子)의 막료였던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으로 전한다.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 성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 부터 각지로 유랑하다가 송도(개성)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또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이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 되는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강씨의 중시조이며 실질적인 시조는 충렬공 강지연(康之淵)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몽고 침입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신성부원군(新城은 신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신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강씨는 이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다. 강득용(康得龍)은 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친 오라버니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관악산에 들어가 연주암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에 올라 송경(松景,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연주암 연주대의 명칭은 이 때 생겼다. 조선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정안공(靖安公)이란 호를 내렸고,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했다. 강씨는 고려조에 강조(康兆, 목종 때 무신, 도총관)을 비롯 강증(康拯, 예종시 평장사), 강호문(康好文, 공밍왕조 판전교사사), 강순룡(康舜龍, 공민왕와조 찬성사) 등을 배출하여 명문에 속했지만 이조에 와서는 왕후를 냈으면서도 왕자의 난으로 인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때 문과 급제자는 36명인데 신천(新川)이 20명, 곡산(谷山)이 7명, 재령(載寧)이 2명, 본관을 알 수 없는 사람이 7명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진(晋)나라의 대부 강채(强釵)의 후손으로 전하는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제양(濟陽)에서 남 백익(伯益)의 후예, 강국(江國)이 있어 씨로 정함 주요본관은 황?(黃?)이며, 시조는 견훤(甄萱)으로 되어있다. 앞서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 원래 본성이 李씨로써 농사를 짓다가 신라 말기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 되어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라 말기에 세력을 떨친셈이다. 그의 아들 견훤은 유명한 후백제의 왕이다.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신라 진흥왕의 후손이 되는데, 견훤이 아직 젖먹이 였을 때 밭에서 일을 하면서 그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자라면서 몸집이 크고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여기 저기서 군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게 되자, 이 틈을 탄 견훤(眞聖女王 6년)은 무리를 모아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끝에 8년 뒤인 효공왕 4년에는 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그 뒤 후고구려의 궁예와 자주 충돌하고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왕건(王建)의 고려와도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한편,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한 때 군사적으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본관은 천령(川寧, 여주지방)과 사양(沙梁,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으며,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견권(堅權)이다. 이 성씨의 시조는 경차(景磋)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후손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요직에 있었다. 아들 설정(洩淨)은 보문각대재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설정(洩淨)의 아들 상조(祥組)는 직제학 대사공(大司空)을, 상록(祥祿)은 좌복야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 중 경기도병마절도사(京畿道兵馬節度使)를 한 경세정(景世貞), 세정의 아들 일창(日昌)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역임했다. 8세손 세양(世楊)은 조선태조 때 무과에 올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이 성씨는 청주 경씨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경진(慶珍)이다. 그의 아들 경대승(慶大升)은 의협심이 강하여, 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경복흥(慶復興)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이 조선 개국 후에 각각 벼슬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 인물로는 경세창(慶世昌), 경세인(慶世仁) 등이 있다. 경세창(慶世昌)은 선조 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 황해도관찰사,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그리고, 경혼(慶渾)은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부제학 호조참판을 지낸 경섬(慶暹)이 있다. 이 성씨는 수안(遂安)계씨 단본으로 명대(明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졌다. 시조는 명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계석손(桂碩遜)이다. 역사상 대표 인물로는 계덕해(桂德海)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 때의 학자로써 별식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 찰방(察訪) 등을 역임했으며, 문집 계찰방집(桂察訪集)을 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화(桂和)가 있다. 고(高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함께 탐라(耽羅, 제주도의 옛 이름)의 지배 씨족으로 이들 3성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과 만물이 없었을 때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신이 솟아났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가 그들이다. 그들은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융성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결국 삼신 중의 고을나(高乙那)가 고씨의 시조라는 것이다. 앞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씨의 본관은 제주를 대종으로 하고, 장흥(長興),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선령(宣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횡성(橫城), 금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본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두 제주에서 떨어져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제주고씨 세보(濟州高氏 世譜)에 따르면 탐라의 군주는 고을나(高乙那)로 부터 45세(世)까지 高씨가 세습해 내려오다가 46세(世) 고말로(高末老)가 고려 신하가 되니 이가 곧 고씨의 중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 무렵부터 고씨는 속속 육지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고(高)씨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총 77명인데 본관별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장흥(長興) 29명, 제주(濟州) 28명, 개성(開城) 8명, 안동(安東) 2명, 횡성(橫城) 2명, 강화(江華)·장진(長津) 각 1명, 나머지 6명은 본관이 미상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고득종(高得宗)이다. 그는 조선태종 때 효행이 두터워서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사판관(禮賓寺判官) 등 벼슬을 지내고 세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고경명(高敬命)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중종 때 문신이자 화가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친교를 맺었다가 을묘사화에 연루된 고운(高雲)의 손자요. 명종 때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교리,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다.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떠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에서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광해군 때 우산판관을 지내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자로 전하는 고상안(高尙顔) 등 문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영조때 창령현감(昌寧縣監)으로 어진 정사를 베풀어 고창령(高昌寧)이란 별명을 듣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유(高裕), 조선 중엽의 대표적 시인으로 세조에서 영조 대의 서민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엮어낸 고득언(高得彦)이 빼어났다. 곡(曲)씨의 본은 용궁(龍宮), 면천(沔川)이며, 고려 태조 때에 평찰(評察) 벼슬을 한 곡근회(曲矜會)가 있다. 계출이 불명하나 수양제(隋楊帝) 때의 골의(骨儀), 본래 천축(天竺) 사람으로 장안(長安)에 살며 군승(郡承) 중국 광평(廣平)에서 남. 아들을 공후(貢後)자(字)로써 씨를 정함. 공(孔)씨는 곡위(曲韋) 공(孔)씨 단본이다. 시조는 공자(孔子). 그의 53대손 공소(孔紹)가 고려 충정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와서 평장사의 벼슬을 받고 고려에 귀화했다. 조선정조 때에 공자의 고향인 곡위(曲韋)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공소(孔紹)의 아들 노(努)는 고려조에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냈다. 노(努)의 큰 아들 공부(孔府)는 우왕 때 문과에 올라 집현전태학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둘째 아들 공은(孔隱)은 우왕 때 문과에 올라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은퇴했다. 태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서?(孔瑞?)은 중종 때의 강직한 신하로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8명이다. 본관은 김포(金浦) 공(公)씨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대 장군 공순영(公純永)으로 전한다. 그의 선대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손으로써 공윤보(公允輔)가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난을 피해 신라 경덕왕 14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기도 김포에 살았다고 한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중종 때 사람 공규(公珪)가 있다. 그는 중종 17년에 문과에 합격되여 서작(薯作), 정언(正言)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이르렀는데, 시문(詩文)에 능했다고 한다.
곽(郭)씨는 문헌에 6본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엔 현풍(玄風)과 청주(淸州) 2본 뿐이다. 현풍(玄風) 곽(郭)씨의 시조 곽경(郭鏡)은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른 사람이다. 청주(淸州) 곽(郭)씨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풍(玄風) 곽(郭)씨 조선시대 때 이름난 도덕 가문으로 정려(충신이나 열녀가 난 고장에 나라에서 세워 표창하던 문)가 12개나 되었다. 때문에 12정려하면 으레 현풍(玄風) 곽(郭)씨의 애기가 따른다. 현풍(玄風) 곽(郭)씨중에서도 청백리 곽안방(郭安邦, 세조 때 익산군수)의 자손이 그러했다. 그의 현손에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곽월(郭越, 선조 때 부사), 곽준(선조 때 안음현감), 곽율(선조 때 초계군수) 3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당시 현풍 8주의 호칭으로 영남 일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중 곽준의 집안은 1문3강(一門三綱)의 집으로 유명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으로써 호남의 황석산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 때 그의 두 아들 곽리상(郭履常), 곽리후(郭履厚)도 뒤따라 전사했다.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도 남편이 전사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뒤따라 죽었다. 이리하여 한 집안에 삼강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나라에서는 정려를 세워 길이 표방했음은 물론이다. 곽재우(郭再祐)는 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조식의 문인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붉은 구름무늬 비단갑옷을 입고, 투구에 백금 날개를 달고, 단숨에 천리를 달리는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곳곳에서 무찔렀다. 의령, 삼가, 초계, 창령 등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게릴라식 전투로 크게 기세를 올렸다. 종내 영남의 모든 고을이 함락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의령을 지켯다. 그 뒤 진주목사겸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었지만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했다. 조정에서 여러차례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의 벼슬을 주었지만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한 때 자기의 경륜을 펴보기 위해 부총관(副摠官), 한성부좌윤, 함경도좌윤으로 나갔으나 조야가 어지러움을 탄하여 다시 은둔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때 곽씨의 문과 급제자 수는 57명이며 본관별로는 현풍(玄風)이 30명, 청주(淸州) 14명, 해미(海美) 4명, 선산(善山)과 풍산(風山)이 각 3명이고, 본관 미상이 3명이다. 구(具씨)는 세조에서 11대 영조까지 약 3백년간 많은 장수와 공신을 배출하여 무관집안으로 손꼽힌다. 구(具씨)는 문헌상으로나 현존하는 실제로나 능성(綾城) 단본으로 알려져 왔으나 창원(昌原)에 관적한 또 다른 구씨가 있다. 창원(昌原) 구(具)씨는 원래 구(仇)씨였는데 이조 중엽에 공훈을 세워 구성(具姓)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의 시조는 고려 벽상공신, 검교상장군인 구재유(具在裕)다. 그는 송나라 한림학사 주잠(朱潛)의 사위인데 주잠이 우리 나라에 귀화할 때 사위인 그도 따라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6대손 대에서 아홉파로 갈라진다. 그 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이조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들은 크게 번창하여 오늘날 구씨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이들 대에 와서 비로소 빛을 내기 시작하여 세조 때에 구치관(具致寬)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2명을 비롯하여 공신 9명과 부마 3명을 배출했다. 공신 9명은 씨족수에 비하여 굉장히 많은 슷자이다. 더구나 중종반정 공신 구현휘(具賢暉), 구서영(具書永), 인조반정 공신 구굉(具宏), 구인후(具仁 ), 구인즐(具仁 )등 5명이 반정 공신이고, 나머지도 왕위 옹립과 관련이 있는 공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능성(綾城) 구(具)씨는 조선시대에 총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냈는데, 그 중 진사가 144명, 문과가 55명, 무과가 363명으로 무과가 단연 우세하다. 그 중에서도 영조 때까지 장신(將臣)급이 9명이나 나왔는데 그 숫자는 그 때까지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 명단을 보면 구사직(具思稷, 광해조, 병사, 수사), 구굉(具宏, 인조조, 훈련대장, 어영대장), 구인후(具仁 , 인조조, 어영대장), 구인기(현종조, 총술사), 구문치(具文治, 현종조, 훈련대장, 어영대장),구감(具鑑, 숙종조, 총술사), 구성임(具聖任, 영조조, 금위대장,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 영조조,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으로 이들 장신은 대부분 한양의 경비 혹은 군사의 훈련을 맡은 사람들이라 자연히 왕권의 향방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구치관(具致寬)은 구씨 중 첫 번째 공신인데 예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에 오르고 세조의 심복이 되어 나중에 영의정에 까지 이르렀다. 뒤에 세조의 손자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어린 임금의 지위를 빼앗았던 세조의 선례가 되풀이 될까 두려워 가장 위협적 존재인 구성군 이준(세조의 손자로 28세에 영의정)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때 그와 6촌간인 구문신(具文信)도 가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다. 구인후(具仁 )는 원래 김장생의 문인이었는 데 선조 때 국난을 당하자 문과를 뜻했던 그의 생각을 버리고 무과를 택해 인조반정 후 각기 무반의 요직을 두루 지냈고, 효종 때 병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구굉(具宏)은 형조·공조·이조판서 등을 전 후 아홉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능성(綾城) 구(具)씨의 정치적 위세는 중종에서 인조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정조초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의 역모와 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좌정승과 시조인 구?이 있다. 그는 고려 우왕 때 좌시중(左侍中, 좌의정급)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숨어 조선태조가 좌정승을 주어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성씨는 편해구씨 단본으로 시조는 구대림(丘大林)이다. 그는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일본을 가다 풍랑을 만나 편해에 표착하여 그곳에서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가 6명이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른 구종직(丘從直)이다. 그는 문장과 경학·역학의 대가였으며, 그의 아들 구달손(丘達孫)은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숙손(夙孫)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고대 중국의 구(丘)씨 가운데는 공자의 휘(諱, 이름)가 丘인 것을 피해 구(邱)씨로 개성(改姓)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전한다. 본관이나 시조 등 자세한 것은 전하는 것이 없으나 현존하고는 있다. 본관이 담양 국씨 단본으로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와 살게된 국양(鞠樑)이다. 그의 아들 대애(代崖) 국유(鞠 )가 공민왕때 부통사가 되어 도통사 최영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토격하고 병부상서겸 판의금부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자손에 학자로 강직한 국경례(鞠經禮)가 있으며, 그의 후손에 벼슬한 사람이 많아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번창했다. 본관은 담양(潭陽), 풍천(豊川), 현풍(玄風), 영양(英陽), 금성(金城), 대명(大明) 등이 있다. 국씨는 원래 옛 백제의 대성(大姓)으로써 번성하였으나 고려 이 후 소멸하고, 현재는 통털어 2백 여명이 생존할 뿐이다. 역사적 인물로는 백제 무왕(武王) 때 벼슬한 국지모(國智牟)와 고려 태조(太祖) 때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한 국현(國鉉)이란 사람이 있다. 군(君)씨는 국세조사당시(1960년)에 나타난 성시이다. 본관은 토산(兎山)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숙종 때의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궁제(弓濟)이다. 그의 후손 궁원일(弓元一)이 조선시대 고종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궁달초(弓澾楚), 궁억노(弓億魯), 궁현섭(弓顯燮), 궁인성(弓寅聖) 등이 있는데, 그 중 궁인성(弓寅聖, 평함, 순천출신)은 독립단의 평남 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5년간의 옥살이를 겪고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권(權씨)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대성으로 꼽히면서도 안동(安東) 권씨와 예천(醴泉) 권씨 단 두 본 뿐이다. 그 두 본이 모두 고려조에 내려진 것이 특색이다. 안동(安東) 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으로 원래는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였다. 고창군(現 安東) 별장인 그는 신라 말엽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데 격분하여 견훤과 싸우는 한편 고려 창업에 한창이던 태조 왕건에게 넘어갔다. 태조는 김행(金幸)과 함께 고려 신하가 되기를 자청한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란 벼슬을 내리고 특히 큰 공을 세운 김행(金幸)에게 권(權)씨 성을 하사했다. 예천(醴泉) 권씨의 시조 권섬(權暹)은 원래 성이 흔(昕)씨 였다.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휘(諱)가 역시 같은 흔(昕)이어서 나라에서 그의 외가의 성인 권씨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 권씨의 일부가 한 때, 왕(王) 씨가 되었던 일이 있어 재미있다. 권행(權幸)의 12대손인 권담(權潭)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넷째인 재(載)가 충선왕의 귀여움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다. 왕은 그에게 왕?이란 이름을 내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바뀌자 다시 권씨로 돌아왔다. 오늘날 안동 권씨들이 왕?의 자손을 가리켜 왕권(王權)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것이다. 능동실기(陵洞實記)에 따르면 권씨도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무려 390명이나 되는데 그 중 359명이 안동이고, 12명이 예천이다. 단위 씨족별로 이만큼 화려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안동 권씨는 고려 말엽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그들은 10세를 전후하여 크게 14파로 갈라졌는데 그 중에서는 추밀원 부사공파(樞密院 副使公派)와 복야공파(僕射公派), 그리고 인가파(仁可派)에서 인물이 낳이 났다. 부사공파(副使公派)의 권담(權潭)은 그 자신은 물론 다섯 아들과 세명의 사위 등 아홉명이 모두 군(君)으로 봉해져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대 9명이 봉군된 일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게 안동 권씨들의 자랑이다. 권근(權近)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면서 그들 두사람에 버금가는 고려말의 대 학자다. 그는 고려조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선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예문관대재학(藝文館大提學), 대사성(大司成),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등을 지내고 왕의 명령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에 뛰어났고, 양촌집(陽村集),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입학도서(入學圖書) 등 저서를 남겼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된 후 광주 목사가 되어 왜병을 무찌르고 전라도 순찰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행주산성에서 2청8백의 적은 병력으로 왜장 소조천(小早川)의 3만의 대군을 맞아 유명한 행주대첩(幸州大捷0을 올렸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시조 권섬(權暹)의 증손 맹손(孟孫)은 조선문종(文宗) 때 이조판서와 중추부원사를 지냈고, 맹손(孟孫)의 손자 오복(五福)은 호당(湖堂)에 뽑히고, 연산군 때 교리로써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을 받았다. 그는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본관은 청주 하나 뿐이고 역사에 자세히 나타난 것은 아직 없다. 이 성씨의 본관은 봉화(奉化), 계양(桂陽), 강화(江華), 안동(安東) 등이 문헌에 전하나 지급은 봉화금(奉化琴)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금용식(琴容式)이며, 중시조 금의(琴儀)를 1세로 하고 있으며, 그는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문장에 뛰어나 지공거시관(知貢擧試官)을 맡아보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琴학사(學士)라고 불리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금난수(琴蘭秀)와 금응협(琴應夾)을 들 수 있는데, 금난수(琴蘭秀)는 명종 때 장노원사평을 지냈다. 그 외에 많은 학자들이 있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행주로써 단본이다. 이 성씨는 고려조의 번창한 씨족으로 고종 때 기윤위(奇允偉), 기윤?(奇允?)이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1명의 영상(領相)과 22명의 문과 급제자와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단종 대 대사헌(大司憲)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맑고 깨끗한 관리였다. 그의 증손 기준(奇遵)은 을묘팔현(乙卯八賢)의 한 사람으로써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을묘사화로 여러 선비들과 화를 당해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 대항(大恒)은 부제학 및 대사헌등 여러 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했다. 학문으로 유명한 기고봉(奇高峰)이 있다. 기자훈(奇自獻)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항일운동을 한 기정진(奇正鎭)은 구한말 사람으로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六大家)의 한 분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하나뿐이며, 시조는 옛 기씨(箕氏)조선의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일컬고 있다. 그런데, 옛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전해오는 행주기(幸州箕)씨가 따로 있는데, 기씨(箕氏)는 이미 기(奇)씨의 동원(同源)인 것으로 짐작된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단본이다. 이 성씨가 오늘날 명문이라 일컬어짐은 고려말 3은(三隱)의 한 사람인 길재(吉再, 야은(冶隱))의 음덕이 두고두고 빛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경상도 선산부 해평에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낸 길원진(吉元進)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들한테 성리학을 배웠으며,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와 문하주서(門下注書) 등을 지내다가 고향에 와서 효도를 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유도(儒道)의 참다운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의로웠으며, 효행(孝行)은 극진하였다. 吉?는 선조 때 문과에 올라 시평,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시대 때의 문과 급제자는 7명이다. 근대 인물로는 길선주(吉善宙)가 있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기독교 목사가 되었으며, 육영사업에도 노력했고, 3·1운동 때에는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로 강대보감(講臺寶鑑)과 말세론(末世論) 등이 있다. 김씨의 본관은 무려 600여 본이 나와 있으나 시조가 뚜렷이 밝혀져 있는 것은 약 1백여 본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여러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金海) 김씨 계(系)와 신라의 알지(閼知)를 시조로 하는 경주(慶州) 김씨 계(系)두 갈래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금 사용되고 있는 김씨는 거의 모두가 수로와 알지계에서 갈리어 나간 것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 기록에 의하면 가락에는 본디 9명의 촌장(村長)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이들 9명은 어느 해 (後漢 建武 18년) 구지봉(龜旨峰)이란 산에 올라 신탁(神託, 신의 뜻에 맡김)에 의해 가락국을 다스릴 군장(軍長)을 얻고자 의식을 거행했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상자가 내려왔다. 이튿날 이 여섯알이 동자(童子)로 변하여 그 중 먼저 나온 수로(首露)를 가락의 임금으로 삼았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각 5가야(伽倻)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라 제 4대 탈해왕(脫解王) 9년 봄, 어느날 새벽 경주 계림(鷄林)에서 이상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에 가 보았더니, 울창한 소나무 숲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가져와 열어 보니 뜻밖이도 용모가 비범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하늘이 내려주신 아들"이라고 크게 기뻐하며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이 아이가 곧 알지(閼知)다.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金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세성중의 하나인 바로 그 김씨 이다. 시조 김생명(金生溟)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금강위(金剛尉)를 지냈다. 시조 김만추(金萬秋)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해질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문과 급제자로 전하며 후손들이 본관을 감천이라 했다. 강릉 김씨의 시조 주원(周元)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그는 신라 혜공왕 13년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신라 선덕왕 6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시조 주원의 8세손 상기(上琦 )가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을 거쳐 개성부사가 된 후에 상서예부원외랑, 기거사인, 기거랑 등을 역임하고, 1102년(숙종 7) 이부낭중 겸 시강학사로 승진하고, 중서사인이 되었다. 1105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로 요나라에 다녀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에 올랐다. 예종 때 한림 학상승지, 병부, 예부, 호부의 상서, 정당문학,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상주국에 올랐다. 인종 때 판비서성사 감수국사의 한직에 있다가 뒤에 익성동덕공신이 되었고, 삼증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문하시중에 이어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가 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학자로서 중요한 국사마다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았다으며,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고(金沽)도 평장사를 지냈다. 한편 인존의 아들 3명도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조선 때 와서 가문에 우뚝선 인물은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매서운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시습(時習)을 들수 있다. 5세에서 13세까지 성균관 대상성 김반(金泮)의 문하에서 [공자] [맹자] [시경] [서경] [춘추]를, 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윤상(尹祥)에게서 [예서]와 [제자백가]를 배웠다. 세조 1년 나이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세조 4년 [탕유관서록후지]를, 세조 6년에는 [탕유관동록후지]를 썼으며, 세조 9년에는 [탕유호남록후지]를 저작했다. 세조 4년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세조 11 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산거백영>을 썼다. 성종 12년에 47세에 환속, 성종 16년에 [독산원기]를 썼다. 그후 수차에 걸쳐 <금오신화>와 <매월당집>< 십현요해>등의 명작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ㆍ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정조 6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육신사에 재향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예조 판서를 역임한 첨경(添慶)의 현손 시혁(始奕)은 판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시환(始煥)과 시형(始炯)도 예조 및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시환의 아들 상성(尙星)은 호조 및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시영의 아들 상집(尙集)은 영조 31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을 거쳐 영조 37년 정언이 되어 이듬해 경현당의 문신 제술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시혁의 아들 상철(尙喆)은 영조 1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ㆍ교리에 이어 영조 29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 한성부 판윤, 이조,병조,형조의 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영조 42년 우의정에 오르고 영조 48년에 좌의정 영조 51년(177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 문물과 제도를 부분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찬칩청을 두어 1770년 (영조 46) <동국문헌비고>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왔다. 1781년 (정조 5) 기로소에 들어간 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외 계락(啓洛)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참찬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사백가에 통달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철명(哲命)의 아들 기종(起宗)이 광해군 10년 문과에 장원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 무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라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의 문신 행(行)은 국평(國平)의 아들로 명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8년 무장현감이 되어 안평대군의 중도가를 간각하여 간행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조 김반은 자가 사원(詞源), 호는 송정(松亭)이다. 그는 1399년(정종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05년(태종5)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선사(繕寫)하여 성균관 주부가 된 후 성균관에 40여년간 재직했다. 세종때 여러차례 대사성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으며, 만년을 강서(江西)에서 보냈다. 그의 선계와 관향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강릉으로, 거주지는 강서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강릉김씨에서 분적, 그가 살던 강서를 본관으로 한 것 같다. 강서의 학동서원(鶴洞書院)에 제향, 경북 영주군 풍기읍 창낙2동 915번지에 후손 김윤식이 살고 있다. 시조 김제(金濟)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라 전해질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지중추를 지냈다고 전할 뿐 연대와 사적은 상고할 수 없다. 한편 경주 김씨 계림군(鷄林君) 파조 균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는 점으로 보아 후손들이 선계를 설정하여 거주지인 강양(江陽:합천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하고 제를 시조로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 김처곤(金處坤)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유실되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김양묵(金養默)의 아들로 1768년(영조44) 정시문과에 병과로, 1800년(정조24)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음(江陰:金泉)으로 한 연유와 전후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 후손 김근오(金根五)가 조선 철종조에 진사, 김응룡(金應龍)이 서화에 능했다. 그 외에 찰방 정윤(正允)의 후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강화김씨(江華金氏)는 같은 신라계 김씨이면서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는 개성파(開城派), 김송학(金松鶴)을 시조로 하는 용천파(龍川派), 그리고 김광(金光)을 시조로 하는 숙천파(肅川派)등 세 파가 있는데 그 중 용천파와 숙천파는 같은 혈족이면서도 그 상계의 휘자(諱字)에 차이가 있어 일원화하지 못하고 족보를 따로 하고 있다. 개성파 시조 김성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은열의 8세손 세응(世應)의 둘째아들로 1144년(고종24)에 출생하여 고려 명종조에 참지저사(參知政事)를 지내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다. 하음은 강화(江華)의 옛이름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고 한다. 용천파 시조 김송학(자:千生)은 1497년(연산군3)에 출생,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내다가 1542년에 의주(義州)로 들어왔다. 그의 조부 태후(泰厚)는 김임경의 8세손으로 장연(長淵)에서 출생,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은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강화로 몸을 피했지만 류자광(柳子光)의 탄핵으로 용천(龍川)에 유배당했다. 이듬해 사면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용천에서 세거하면서 분관을 강화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숙천파의 족보에 의하면 용천파 시조 송학의 조부 태후의 휘가 옥점(玉點)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유래는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계통이 아닌가 싶다. 숙천파는 개성파와는 달리 명종(鳴鍾)계의 분적종이다. 숙천파 족보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의 후손인 정숙공(貞肅公) 김인경이 고려 고종 초에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조충(趙沖)과 함께 이를 토평한 공으로 장연군(長淵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장연으로 삼았으나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난을 피해 왕이 강화로 몽진할 때 인경의 아들 궤(軌)가 상서(尙書)로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간 후에 그 자손이 그곳에 남아 살면서부터 본관을 강화로 고쳤다. 그 후 궤의 6세손 영직(永直)이 강화에 경성으로 이사해 살다가 그의 아들 도정공(都正公) 옥점(玉點)이 다시 용천으로 이거하여 용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궤의 현손 윤의 둘째아들 참판공 광(光:永直과 형제간)이 숙천으로 유배당해 숙천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김현선(金玄繕)은 고려조에 장군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혹은 경주인으로 전할 뿐 세계를 알 수 없다. 개성 김씨 시조 용주(龍株)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한 후 개성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여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준(畯)은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며 준의 세 아들중 차남 지경(之慶)이 상서를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滉)이 조선 명조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거쳐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아우 유(濡), 지(漬)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에 주둔하여 학행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이라 불렀다. 조선의 이름난 화가로 상의원 별제에 이른 응환(應煥)은 정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일본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 부산에서 죽었다. 이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득신(得臣)은 인물화를 잘 그려 심사정(沈師 正)ㆍ정선(鄭敾)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로 불리웠고 그의 동생 석신(碩臣)은 풍속화로 유명했다. 결성김씨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이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녕김씨 시조 김시홍의 10세손 김연의 둘째아들 김예철의 후손으로 전하는 상주파 외에 <김씨분종보>에 의하면 이조판서를 지낸 김달손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후손들이 본관을 결성으로했다. 평북 위원군 화창면 문명리에 살던 위원파는 6·25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유실하여 중간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인궤(金仁軌)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8자 일선군(一善君) 추(錘:善山金氏 시조)의 아들 위옹(渭翁:三陟金氏 시조)의 9세손 윤성(允成)의 맏아들로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좌복야, 상장군등을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육화(育和)를 1세조로, 본관을 경산(慶山)으로 하여 삼척김씨(三陟金氏)에서 분적했다. 고려 말의 김룡(金龍)은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 1세조 육화의 7세손이며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지낸 영수(英秀)의 증손이다. 그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녘으로 몽진할 때 중랑장으로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해적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교섭했다. 또 정료위(定遼衛)에 사신으로 가서 고가노(高家奴)와 수교를 맺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전고대방(典故大方)>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조에 찬성사를 지내고 경산군(慶山君)에 봉해진 김이(金怡)를 시조로 하는 춘양김씨(春陽金氏)가 있는데, 김이의 상계가 경산김씨의 시조 인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혈족이면서도 이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의 속현 촌양이기 때문에 사적(賜籍)지는 경산이나 출생지인 춘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양김씨가 경산김씨의 분적종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김한(金翰)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경산김씨가 문헌에 보인다. 김알지계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인 경주김씨는 파계가 복잡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서로 계통을 알지 못하는 분파를 포함하여 대충 8∼9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은설공(殷設公)파, 태사공(太師公)파,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 영분공(永芬公)파, 호장공(戶長公)파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역사상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설공파와 태사공파가 으뜸이며,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재상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파에서 나왔다. 은설(大安君)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전한다. 이 은설공파는 고려 때의 장군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피가 대표적이다. 김순웅의 12대손에 김균이란 이가 있다. 그는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등에 올라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세 사람의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숱한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김종순(金從舜)은 김균의 손자로써 세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 : 결백한 관리)에도 뽑혀져 있는데, 그 자손에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신하가 잇달아 나왔다. 그의 아들 치운(致運)은 이조참판, 치운의 아들 천령(千齡)은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천령의 아들 만균(萬鈞)은 중종 대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판서,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명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명원(命元)이 선조 때의 좌의정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이퇴계의 문인(門人)으로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란공신(平亂功臣)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호조·예조·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겸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우고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유학에도 깊었으며, 특히, 병서(兵書)와 궁마(弓馬)에 능했다. 그의 아들이 수렴(守廉)이며, 손자가 남중(南重)이다. 김수겸은 인조 때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남중은 광해군 때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효종 때 공조·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김사목(金思穆)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부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정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황해도·경기도·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김?집(金?集)은 사목의 손자다. 그는 헌종 때 좌참찬(左參贊),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을 역임했으며, 역사학에 밝았다. 김창희(金는昌熙)는 정집의 아들로써, 고종 때 벼슬에 올라 호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임오군란때는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는 영접관이 되고, 뒤에 공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김영작(金永爵)은 김사목(金思穆)의 조카로써 철종 때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시와 글에 능하며 소정집(邵亭集)이 전한다. 김홍집(金弘集)은 바로 영락의 아들이다. 그는 개화파(開化派)의 거두(巨頭)로써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면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 사임했다. 그 뒤 동학혁명의 혼란을 틈타서 침투한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1∼2차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써 갑오경장의 혁신정책을 수행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그는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정책을 폄으로써 국민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은 국민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갖가지 사회제도의 개혁과 양력 사용, 종두법 및 우편제도의 실시 등은 우리 나라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려말의 절개가 굳은 신하로 유명한 김자수(金自粹)는 태사공의 8대 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상시(左常侍 : 정 3품)에 이르렀다가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에 은거했다. 뒤에 조선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나라(고려)망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영유(金永濡)는 자수의 손자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내고 황해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때 두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개유 등을 지냈다. 김임(金任)은 김자수의 증손으로 사사를 지냈고, 세필(世弼)은 自의 현손으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사화(士禍)때 마다 임금의 잘못을 규탄하다가 유배 되었다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홍랑(金弘郞)은 자수의 8세손이다. 그는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그의 자손에서만 3명의 재상과 왕비 한사람이 나와 은설공파의 좌의정 김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김흥경(金興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경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되었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이듬해 우참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영조의 탄평책(蕩平策)에 반대 했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한개(金漢 )은 흥경의 아들로써 영조의 딸과 화순숨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 제조(提調) 등을 지냈는데, 글씨에 뛰어나 八법을 다 잘써 애익주문(哀謚州文)을 자주 썼다. 김석주(金碩柱)는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김한개(金漢 )의 아들이요. 김석주(金碩柱)의 아들이 노경이다. 김노경(金魯敬)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육(六)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순조 말엽에 권력을 전횡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헌종 때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숨졌으며, 철종 때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글씨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이 김정희다. 김정희(金正喜)는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設書), 검열(檢閱), 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을 거쳐 헌종 때 대사성·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두 차례에 걸쳐 도합 13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는 스물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당세의 거유(巨儒)들과 사귀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했고, 서예(書藝)에 있어서는 역대 명필의 장점을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어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림에 있어서는 난초와 대, 그리고 산수가 뛰어났고, 사실(寫實)보다는 품격(品格)을 위주로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北漢山碑)가 종래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것이라는 설을 부인하고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밝혀냈다. 그는 아호가 추사(秋史), 완당(玩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백여개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순조 때 형조·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시와 글에도 뛰어났던 김어응(金魚應)은 노경과 4촌간이며, 그의 아들 김도희(金道喜)는 헌종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김한구(金漢耉)는 영조의 국부(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貞純王后)로써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순조 때 우의정에 오른 김귀주(金龜柱), 영조 때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김유경(金有慶) 등이 있다. 중종 때의 학자인 김정(金淨)은 정랑(正郞) 효정(孝貞)의 아들로써 대표 인물인데, 그는 중종 2년에 문과에 급제, 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했다. 조광조(趙光組)와 더불어 미신의 타파, 향약(鄕約)의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와 글에도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고려 인종 때의 명신(名臣)이요 사학자로 유명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은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때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있으면서 국부 이자겸(李資謙)이 군신(君臣)의 예의를 지키지 않으므로 이를 충고 했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했으며,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로써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난을 평정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오르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당시의 송나라에까지도 크게 알려졌음은 물론 음악에도 퍽 능했다고 한다. 태위(太尉)의 벼슬을 지낸 부?은 그의 형이고 사공(司空)을 지낸 부의(富儀)는 그의 아우이다. 삼형제가 모두 당대의 손꼽힌 학자이고 명신으로써 함께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시조 김구사(金九思)는 경순왕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17세손이다. 그는 숙천부사를 지내고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김종(金琮)의 손자로 벼슬은 승정에 이르렀다.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그가 계림김씨 시조로 되어있다. 1805년(순조5) 대전두후평복(大殿痘後平復)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경리(金璟履)의 본관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계림(鷄林)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경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으로 한 것 같다. 시조 남득(南得)은 고려때 전리좌랑을 지낸 선(宣)의 아들로 고려 충해왕 1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집의를 거쳐 공민왕때 양광도 안렴사를 역임하고 판개성 부사문하평리에 올랐다. 그후 원나라에 가서 예부상서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에 책록하고 고양부원군으로 봉하여 득어영남지의라고 사명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득의 아들 무(畝)가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의 4명의 아들도 모두 벼슬에 올라 나라에 충성했다. 남득(南得)의 6세손 수문(秀文)은 중종 2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후 종성에 침입한 야인들이 사람을 납치해 가자 영달만호로서 역전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명종 10년 을묘왜변때는 제주목사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에 특진하였고 명종 1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걸쳐 호인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수문의 조카 면(沔)은 조선의 이름난 의병장으로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며, 경원부사를 역 임한 세문(世文)의 아들이다. 정구와 가까이 지내며 이황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사퇴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 곽준, 문위(文緯)등과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 개령간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에서 대치, 공격해 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 또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 전라도의 의병과 함께 금산, 개령에 진주, 선산이 적을 칠 준비를 마치고 돌연 병사했다. 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외 군자감정을 지낸 연과 판결사 양이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지훈련원사를 역임한 결(潔)이 유명하다. 자는 영조 18년 무과에 급제하고 하동군수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후 어영별장에 이르렀다. 시조 김환(金紈)은 윤옥(潤屋)의 아들로서 151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문적(文蹟)이 없어서 연원과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이 씨족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곡리에 29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고산김씨(高山金氏)는 황간김씨(黃澗金氏)와 동원이거나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고산김씨 시조도 김환이라 되어 있고 또 황간김씨 시조 역시 김환이라 되어 있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김환의 본관이 황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황간이었는데 중간에 고산으로 개관을 하였거나 아니면 고산·황간을 병용하였던 것 같다. 시조 김말로왕은 김수로왕의 막내동생으로 설화에 의하면 구지봉에 다섯 형들과 함께 탄강하여 소가야국을 창건하고 도읍을 고성으로 정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가문을 이어온 대표적 인물은 김말로왕의 34세손으로 조선의 태조때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삼도수군 도절제사에 오른 빈길이 유명하다. 그는 태조 7년 멸악산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병조 판서,정헌대부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어 낙안의 삼충사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희량은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희량의 동생 문량은 음보로 사직이 되어 태조 6년 문관에 급제하여 부사,도사를 지내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니면서 외교적 공을 세워 예문관 교관을 지낸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후손 경현은 이만주의 난에 어유소를 도와 공을 세우고 함길도 순문중군을 역임한 후 가선대부가 되었다. 그외 효자로 이름난 복광은 향당에서 효행비를 세울 정도로 효행이 뛰어나, 성리학에서 평생을 바친 학자 민환과 함께 고성 김씨를 빛나게 하였다. 시조 김용한(金龍翰)은 경순왕의 후손이라 전한다. 그는 김진찬의 아들로 1755년(영조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직강·정랑을 지냈다. 문헌이 없어 전후 세계를 알 수 없고, 또 본관을 고양(高揚)으로 하게 된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이 평남 평원군 동암면 용삼리에 21호가 살고 있었다. 시조 김의손(金義孫)은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김지대(金之岱)의 9세손이다. <공주김씨세보(公州金氏世譜)> 에 의하면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說)의 8세손 지대가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로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청도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지대의 8세손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의 둘째아들 의손은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을 지내고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 의손에게는 여의(麗儀), 일동(逸東), 응동(應東),용(龍), 구(龜), 타, 봉(鳳), 기(麒)등 아들 8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용, 구, 타는 아버지의 작위를 따라 공주김씨로 분적하였고, 그 나머지는 청도김씨를 계승했다고 한다. 공주김씨는 의손을 시조로 하고, 용을 공주파(公州派), 구를 평양파(平壤派), 타를 곽산파(郭山派)의 1세조로 하고 있다. 용은 후손이 공주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파, 구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공주의 부전촌(浮田村)에서 평양성 밖의 인현리(仁賢里)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평양파, 타는 예조정랑을 지내고 청주로부터 곽산으로 이주하여 곽산파라 하였다. 공주김씨는 비록 역사는 짧지만 문과 급제자 10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관서지방의 저족(著族)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해군 때 부차(富車)의 전투와 인조 때 정묘호란 당시 순절, 오열사(五烈祠)에 제향된 김룡(金龍), 김무의(金務義), 김천경(金天慶), 김응철(金應哲), 김응삼(金應參)등을 들 수 있다. 김룡과 그의 종질 김무의는 1618년(광해군10) 명군(明軍)과 연합하여 건주위(建州衛)을 치기 위해 명나라에 원병을 파병할 때 김응하(金應河)의 막료로 참전, 심하(深河)에서 전사했다. 김천경과 그의 재종제 응철·응삼 등은 인조조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지키다가 동시에 순절했다. 광산(光山) 김(金)씨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가문중의 하나이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대제학 7명을 낳았는데 그들 모두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한 사람의 자손이다.대제학 7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씨 말고도 전주(全州) 이(李)씨와 연안(延安) 이(李)시가 있으나, 한 사람의 자손에서만 7명이 나온 예는 광산김시 뿐이다. 또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이 다같이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로써 이조 중기 이후 손꼽히는 석학중에는 이들의 제자가 많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본관별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남양홍시, 안동김씨, 청주한씨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또 그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서만 상신·대제학·청백리·왕비 등이 나왔다.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세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 에는 신라 49 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선계는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광주 서일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평장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손에서는 시조 흥광의 아들 식(拭)이 신라에서 각간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준(埈)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에 이르렀으며,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 전중시어사를 거쳐 1043년(정종 9) 재사시랑 평장사, 동년 11 월에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일찍이 문과에 올라 23세에 조호부 도감판관을 거쳐 감찰어사로 연천에서 여진족을 물리쳐 공을 세워 1122 년(예종 17) 병부시랑이 되고,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 문하평장사에 이르러 치사하였고 그의 아 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와 비서감을 역임하였다. 주정(周鼎)은 몽고군의 침입을 막아 권지병마녹사에 오르고 1264 년(원종 5)에 문과에 장원하여 이부시랑 등을 거쳐 1278 년(충렬왕 4) 행종도감사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좌부승지가 되었다. 대린(大鱗)의 아들 연(璉)은 충렬왕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로 동정하려 할 때 출정을 앞둔 어느 날 밤 차고 있던 금어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 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랑ㆍ찬성사를 역임하였다. 문정공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을 거쳐 도관정랑에 올랐다가 1344 년(충혜왕 복위 5) 충목왕이 즉위하자 판도판서ㆍ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충정왕 때 참의평리ㆍ전리판 서 등을 지냈다. 공민왕 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거상하여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로 정표를 세우려 하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 년 (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를 지냈으며 음률에 밝아 아악을 교정하고 의례에도 정통했다. 국광(國光)은 감찰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어 감찰ㆍ지평 등을 역임하고 1467 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병조판서로서 평정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에 이르러 광산군에 봉해졌다. 세조가 죽자 신숙주 등과 워상이 되어 서정을 맡았고 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 1 등이 되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경국대전>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鎌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세조 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 및 우부승지를 거쳐 1471 년(성종 2) 좌리공신이 되어 광성군 에 봉해졌다. 예몽(禮蒙)은 1432 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중시와 발영시에 등제하고 이조 및 공조판서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대대로 석학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의 대가 장생(長生) 은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조선의 학자이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1548 년(명종 3) 대사헌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전수 받고,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 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 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창릉 참봉ㆍ순릉 참봉 등을 거쳐 동몽 교관ㆍ정산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군사감 첨정, 1597년 남야 부사 등을 역임. 이듬해 안성 군수로 있다가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 전부가 되었다. 1602년(선조 35) 청백리에 녹선, 3년 후 익산군수를 지내고, 1609 년(광해군 1) 회양(淮陽) 철원(鐵原)의 부사를 역임, 1613년 계축옥사에 심문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은 뒤 관직을 사퇴, 연산에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보직, 사업ㆍ상의원정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 고 다음해 행호군에 보직,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했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고 안성의 도기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은 18세에 진사가 되고 참보에 이르러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으로 등용되어 지평ㆍ집의를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공서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 부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여섯 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 때 대사성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에 추봉되어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 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를 거쳐 형조참의ㆍ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에 올랐다. 1674(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이 채택되자 양성에 유배되었다. 조선의 이름 난 소설가 만중(萬重) 은 익겸의 유복자로 자는 중숙(重叔)이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자원,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삼남의 진정을 조사했다. 이듬해 겸문학ㆍ헌납을 역임,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예조 참의, 1683년 공조 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지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 사실까지 겹쳐 처벌됨을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 1688년 방환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 여기서 <구운몽>을 집필한 후 병사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구운몽>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 이라는 문학관을 피력했다. 1706년(숙중 32) 효행에 대해 정표가 내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다. 조선 초기 한호(韓濩)ㆍ양사언(楊士彦)ㆍ안평대군과 함께 4대 서가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에서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로 불렀다. 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고종때 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등은 가문의 기백을 지킨 인물들이다. 시조 김녹광(金祿光)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5자 김석(金錫:義城金氏의 시조)의 6세손 언미(彦美)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236년(고종23) 상장군으로서 몽고군을 격파하는 데에 공을 세우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의성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광주김씨는 고려 말에 성세를 누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겨우 문과 급제자 4명밖에 내지 못했는데 이는 서북 지방민의 관계 진출의 억제 정책을 써온 조선시대의 정책적인 영향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광주김씨들은 서북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계 진출이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시조의 아들 김굉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굉의 아들 김훤(金暄)은 원종·충렬왕 양조에 걸친 명신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예서(隸書)에 능한 그의 자찬묘지(自撰墓誌)가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남물(金南物)은 훤의 아들로서 20세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거쳐 안동부사를 지내고 만년에 안동으로 낙향했다. 그의 아우 김개물(金開物)은 과거에는 누차 낙방했으나 세자(世子)때부터 그를 총애하던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사(監察使)에 기용되어 충숙왕 때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시·서·화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때 울산 군수로서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도총관(都摠官), 호위대장(扈衛大將)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김수겸(金守謙)은 안동영장(安東營將)을 지내고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공신이 되었다. 김기(金埼)는 임진왜란때 판관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했다. 어모장군·훈련원정에 추증되었으며,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수인은 태허의 조카로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는 폐륜을 범하자 낙향하여 선비의 기개를 보였다. 시조 김맹정(金孟貞)은 신라 제 56대 경순왕의 제 2자 굉의 14세손이며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7세손이다. 그는 1136년(인종14)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서경(西京:현 平壤)에서 반란을 일으킨 요승 묘청(妙淸)과 그 잔당 조광(趙匡)등을 토평한 공으로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交河)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현손 김득성(金得成)이 있다. 그는 1319년(충숙왕 복위 8) 산원(散員)이 되고, 그 후 사헌부의 감찰(監察)·규정(糾正)·장령(掌令)등을 거쳐 전객령(典客令)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김전(金田)은 충목왕 때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김관(金琯)은 전의 손자로 우왕 때 직장(直長)으로 등용되어 조선 세종 때 곡산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모두 3명으로, 김정석(金廷碩)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김성구(金成九)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김희신(金喜臣)이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일세조 김중구(金仲龜)는 가락국 제 15대 무위왕(武威王:武得)의 후손이다. 무위왕은 양왕(讓王)의 제 3자로서 562년 솔지왕(率支王:率友)이 왕위에 오른 즉시 왕좌를 버리고 방장산(方丈山)의 태조묘(太祖廟)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가락의 구신(舊臣)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해 가락국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이 가락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 무위왕에게 시랑 겸 대총관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는데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관적을 금릉이라 하고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이 확실하지 못하므로 후손 중구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김중구는 고려 고종조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문하시랑 평장사·서경유수 등을 역임하면서 충절과 청검으로 명성이 높았고, 태자태사에 올라 금릉군(金陵君)으로 봉해졌다. 시조 김문부(金文富)는 경순왕의 제 5자 의성김씨 시조 석(錫)의 후손 용주(龍珠)의 7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員外郞)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이라 했다. 후손 김시창(金始昌)은 자가 정양(廷楊), 호는 남정(嵐亭)으로 조선 명종 때 효자로 부모상에 여막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맹호가 보호했다. 1519년(중종14) 제현(諸賢)의 추천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후 누차에 걸쳐 추천하였으나 끝내 불응, 명종 때 정려가 명해졌다. 시조 김신(金侁)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 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김정보(金正寶)의 13세손으로 고려 원종때 원나라에 들어가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어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조정에서 그의 출신지인 부리현(富利縣)을 금주(錦州)로 승격시켜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금주가 금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금산(錦山)으로 하였다. 금산 김씨는 농암(籠巖) 김지(金摯) 대에 이르러 번영하였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금주의 진락산(進樂山)으로 은거,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의 손자 김효공(金孝恭)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광주판관(廣州判官)·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청파(淸坡) 김희옹(金希雍)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고 경기감사·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석곡(石谷) 김감(金鑑)은 광해군 때 이조정랑으로 사신 이상길(李尙吉)의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정치가 문란함을 개탄하고 사임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다시 기용되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시조 김대경(金臺卿)의 자는 중시(仲始), 호는 월당(月塘)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나주김씨의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15세손으로 1326년(충숙왕13)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후손들이 금성(錦城)에 살면서 나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금성으로 했다. 무안의 우산사(牛山祠)에 제향, 후손이 현재 금성시에 살고 있다.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의 네째 아들인 은열의 8세손 이며 동정공 봉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인조 때 평장사를 역임하고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명종때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여 일천호의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그후 금주에 김녕대도호부가 설치되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오다가 고려 말 지명이 김해로 바뀌면서 관향을 김해로 하였다. 그러나 수로계의 김해 김씨와 혼동되어 선김ㆍ후김으로 칭하다가 조선 고종 2년에 왕명으로 본관을 김녕으로 다시 환원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흥의 아들 상이 고려 인종 때 병부 상서를 지내고 평장사에 올랐으며 그의 동생 수는 사헌부 지평을 거쳐 찬성사에 추증되었다. 상의 증손 귀갑(貴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응교를 거쳐 밀직사사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순절하였다. 공민왕때 병부 상서를 역임한 정병은 상의 5대손으로 1361년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분성군에 봉해졌으며 광저(光儲)는 현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이렇게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명문 김녕 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시켜 가문을 빛나게 하였는데 그 중에 백촌 문기(文起)가 대표적이다. 그의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 김시홍의 9세손이고 호조판서 순의 손자이며, 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백지리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 1426년 생원시 및 문과의 대제과에 합격, 예문관 검열을 시작하여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주요관직을 두루걸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함경감사때는 학문을 널리 장려하였으므로 유림에서 생사를 세웠으며, 단종때 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관찰사와 도절제사 때는 둔전법을 실시하여, 공적이 컸다. 또한 한어ㆍ외어와 외교에 능숙하여 문무겸전한 실력을 높이 인정받아 공조판서겸삼구노진무직에 이르렀으며, 1456년에 내외종간인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城源) ㆍ이개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주동하다가 김질의 밀고와 동지들의 자백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끝내는 아들인 현석과 함께 순절하였다. 영조 7년에 그의 9대손 정구의 송원으로 2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온갖 수난을 겪다가 1731년에 복관작되고, 정조2년에는 시호를 받고 승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고 1791년에 불천위의 부조묘에 재향하라는 왕명과 또 정려의 왕명이 내렸다. 사육신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보다 신원이 약 40여년간 늦었으며, 또한 남효온이 쓴 육신전의 오기로 사육신의 주동자이면서도 사중신으로 전해져 오다가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원래의 사육신으로 가결되어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가묘를 봉안하고 매년 10월 9일에 재향을 지내고 있다. 응수(應壽)는 판서를 역임한 복용의 아들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형제가 함께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에 올라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그의 노모를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충효공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 기남, 난생 형제는 병자호란때 순절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담양부사 언공은 정묘호란때 호남에서 의병을 인솔하여 진주성을 방어하고 섬진강의 적을 막아 방어사가 되어 노량대첩때는 충무공 진중에서 공을 세웠다. 이 밖에도 세조 때 병조 참판 구룡(九龍)과 중종 때 형조 판서를 지낸 경의(敬義)ㆍ선조때의 공신 준영(俊榮)등이 있다. 시조 김학경(金學敬)은 경순왕의 후예로 남평김씨와 동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경주김씨세보)》에 충선공(忠宣公) 김혼(金琿)의 10세손 우연(遇然)의 배위가 금천(衿川)김씨 거의 딸이며, 묘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합지자전우 건좌에 있는 것으로 보아 금천김씨는 같은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김한흥(金漢興)의 아들 진사 김상렬(金商烈)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있다. 시조 김적(金適)의 자는 희정(希正), 호는 취암(鷲巖)으로 금성김씨 시조 대경(臺卿)의 9세손이요, 현령 우운(祐雲)의 증손이다. 그는 1537년(중종3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5년(명종10) 호남지방에 왜적이 침입하자 김제군수로서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증군이 되어 전라도 좌방어사 남치근(南致勤)등과 함께 영암·남평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고 광주목사에 승진되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 충수(忠秀)·덕수(德秀)와 함께 왕의 서행을 호종하다가 의주에서 순절하였다. 그래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나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후손들이 금성김씨에서 분관한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연원을 상고할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목이 확실지 않은 효진(孝鎭)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해지고 있다. 시조 김천서(金天瑞)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본관은 그의 7세손 정걸(正傑)이 조선 태종 때 김제군(金堤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金堤)로 하였다. 김제김씨를 중흥시킨 가헌(可軒) 김정걸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401년(태종1) 태종이 공신 류습(柳濕)등과 함께 동갑계를 조직할 때 그는 한 살 아래여서 참여하지 못하자 태종이 이를 아쉬워하며〈재주는 문무를 겸했고 , 품행은 충효를 겸전했는 데 포상이 없어서야 되겠느냐?〉하고 김제군(金堤君)에 봉했다. 그의 묘소는 김제 옥녀산(玉女山)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김제군 김제읍 요촌리에 단을 모아 매년 9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명재(知命齎) 김극혜가 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오성(五聖)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여 남한산성에 대피시킨 공으로 원종공신(原綜功臣)에 올랐다. 뒤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주부(主簿), 호조좌랑(戶曹佐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등을 거쳐 안음(安陰)·군위(軍威)의 현령을 지냈다. 김정은 중종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공주로 낙향하여 그 지역의 입향조가 되고, 그의 아들 철견(鐵堅)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김영립(金永立)은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1678년(숙종4) 공주목(公州牧)에서 발급한 그의 호적부터 그의 8세손 김응록(金應祿)까지의 호적이 전해오고 있다. 시조 김화는 경순왕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참봉을 지냈으며, 뒤에 남원의 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외에 사정을 지낸 김사찬(金沙餐)의 후손 또는 부령김씨와 동원이라는 문헌도 전한다. 후손들이 본관을 김천으로 하였다. 시조 김규(金珪)는 경순왕 제4자 대안군 은열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김포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김포로 했다. 이 성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유신(金庾信)장군(수로왕 12대 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조와 고려조를 통해 많은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장수를 배출했다. 고려조에서만은 정승(門下侍中)급 14명을 비롯하여 이름 높은 신하, 공이 큰 신하 10여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 학자) 1명 등 숱한 인물을 내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렇듯 번창했던 김해 김씨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자못 쇠퇴한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연산군때의 학자인 성현(成俔)은 옛날에는 흥성했다가 지금은 쇠퇴한 씨족을 열거하는 가운데 김해 김씨를 그 중의 하나로 들고 있다. 이 성씨의 후손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있다. 그는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仇衡)의 손자이다. 그가 소년시절에 화랑이 되고 뒷날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을 통합하여 벼슬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신라 최고의 벼슬)에 이르고, 죽은 뒤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극일(金克一)은 고려 때의 이름난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그 둘째 아들 김맹(金孟)은 조선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그의 세 아들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 모두 문장은 물론, 과거에 올라, 김씨 3주(三珠)라는 칭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써 문과에 급제, 예문관의 호당에 뽑혔다. 뒤에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그릇된 것을 역사에 기록함으로써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 때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그가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 옛날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중국의 일화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글)을 역사에 넣은 것이 이극돈의 눈에 띄었다. 이극돈은 일손에게 원한을 풀고자 당대의 권신(權臣)인 유자광(柳子光)등과 그 것을 꼬투리 삼아 일대 옥사(獄事)를 일으켜 김종직 문하의 학자들은 전부 잡아들이니 이 사건이 곧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그는 이 사화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당했는데,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준손(駿孫)의 아들 김대유(金大有)는 아버지와 함께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그를 가리켜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김현성(金玄成)은 김극일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 등 벼슬살이를 했는데, 당대의 명필이요(詩文家), 그의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는 특히 유명하다. 김요(金?)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해시계, 물시계 등을 장영실(蔣英實)등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문학으로도 그 재질을 발휘, 세종대왕의 아낌을 받았다. 김우항(金宇杭)은 조선시대에 김해 김씨가 낳은 오직 하나뿐인 정승이다. 그는 숙종 때에 문과에 올라 부사,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호조, 병조, 형조등 다섯 판서를 고루 지내고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고, 그가 사망했을 때 왕은 관을 하사하여 장례했다. 김홍복(金洪福)은 김우항의 숙부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는데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름난 장군으로는 김경서(金景瑞)와 김완(金完)을 들 수 있다. 김경서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터지자 평양 방어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평안도 방어사(防御使)가 되었고, 이듬해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했다. 그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와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김완은 광해군 때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대장으로 길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삼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고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한편 학자로는 김자정(金自貞)과 김덕승(金德承)을 꼽을 수 있다. 김자정(金自貞)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성종 때 노사신(盧思愼과), 노희맹(盧希孟)등과 신찬여지승람(新撰與地勝覽)을 편찬했다. 김덕승(金德承)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에 이르렀는데, 경사(經史) 등 모든 학문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조선시대 화가 중의 제일인으로 꼽히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있다. 그는 정조 때 현간(縣監)등 벼슬살이를 했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 : 인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 정조의 진영(眞影)을 그렸다. 그는 화단(畵壇)에 고착된 무력한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고 남화(南畵) 양식을 받아들여 신선한 조형미(造形美)를 완성하여 개성이 강한 독특한 경지를 이룩했으며, 한국적인 풍토감각을 다분히 표현했다. 특히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諧謔)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닦았다. 특히 투견도(鬪犬圖)는 찬탄을 받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아버지의 재질을 이어받아 산과 물, 집과 나무를 잘 그렸다. 시조 김경언(金景言)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은열(殷說)의 증손인 김해군(金海君) 염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 시중(侍中)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등을 지내고 김화군(金化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화(金化)로 하였다. 김화김씨는 시조 경언의 15세손 김로(金輅)가 고려조에 태자태부에 태사(太師)를 지내고 김화의 비룡동(飛龍洞)에 세거하다가 그 후대에 평산(平山)으로 이주하였고, 21세손 김유기(金有器)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상소한 것이 왕의 뜻을 거슬러 가산(嘉山)으로 유배당했다가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세거하였다. 또한 김로의 동생 하가 호조참판을 지내고 숙천(肅川)으로 낙향했으며, 셋째 명(銘)이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1394년(태조3)참소를 입어 평양으로 유배당한 후 숙천으로 은거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평양, 순안, 숙천, 안주, 영변, 선천, 의주등 관서지방에 본거를 두고 살아오다가 남북이 분단되자 그 일부가 월남하여 종친회를 구성하고 피난 족보를 간행, 족의(族誼)를 다지고 있다. 나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운발(雲發)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가 망하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으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전 두 아들을 고려조에서 예우하여 장자 운발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나주군으로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삼았다. 나주 김씨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월당 대경(坮卿)을 들수 있다. 그는 132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당세에 이름을 날렸으며 한때 목운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에서 유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 조선때 와서는 일경의 손자 정준(廷儁)이 정종때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부총제를 지냈으며 정준의 둘째 아들은 김종서의 사위가 되었다. 정준의 현손 경석(景錫)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로 종질(從姪) 적(滴)과 함께 영암포에서 무찔렀으며, 적의 아들 충수(忠秀)는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어 호조참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순사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 공주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덕수(德秀), 공조좌랑 복남(福南)을 비롯하여 부호군 세빈(世彬)이 유명하다. 시조 김수징(金粹澄)은 신라 제26대 경순왕의 제 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11세손인 영고(永固)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감무(監務)로 있으면서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오르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낙안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고창군 성내면 부덕리 엄동에 낙흥단(樂興壇)을 모아 매년 음2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낙안김씨는 조선 초엽 지금의 승주군 낙안을 중심으로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훈을 세운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장군을 증조로 섬기고 있다. 그는 1394년(태조3) 전라 수군첨절제사로서 왜선 3척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풀리고, 1401년(태종즉위) 3도 수군절제사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부사 가 되고, 1405년 김해에서 싸우다가 순사했다. 진안의 화천사(華川祠)에 제향되었다. 무열공(武烈公) 김광습(金光襲)은 고려 명종·신종 양조에 걸쳐 벼슬이 금오위대장 검상사인 검교대장 좌승상에 올랐고, 김윤견(金允堅)은 문과에 올라 조정대부 사재경 이부상서를 지내고 상장군에 올랐다. 김지겸(金之謙)은 충선왕 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경화공주(慶華公主)의 명으로 정동성(征東省) 사무를 맡아 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김효자(金孝慈)는 광록대부 판각문하평리를 지냈고, 김남정(金南正)은 병부상서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규(金糾)는 판각참찬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고, 김수(金隋)는 충정왕 때 강릉존무사를 지내고 낙천군(樂川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민(忠愍)으로 내려졌다. 그는 예문(藝文)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들 양평공(良平公) 김미(金彌)도 출중한 인물이다. 우왕 3년에 진사에 합격, 전객시승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낸 뒤 공안부윤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간공(恭簡公) 김주(金湊)는 문과에 급제, 성균직강으로 정추(鄭樞)등이 신돈(辛旽)을 탄핵하다 투옥된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비서감승을 거쳐 우왕 때 사헌집의, 지신사, 밀직제학을 역임하고, 공양왕 초에 문하평리 겸 대사 헌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예문춘추관 태학사, 좌복야를 겨쳐 신도궁궐조성도감 도청으로서 종묘·궁궐 신축에 공이컸다. 1397년 문하시랑 찬성사·서북면 도찰리사로 왜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공민왕 때 영남루를 창건하였다. 김함(金涵)은 우왕 2년에 문과에 올라 대호 부사와 평리를 지냈고 왜구와 싸우다 순절하였다. 양혜공(襄惠公) 김빈길은 낙안김씨 인물 중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다. 1394년(태조3) 왜구를 섬멸하고 전라도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 도내 각 요충지에 만호(萬戶)를 두어 병선을 정박시키면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대의 식량이 충족되도록 하였다. 1405년 김해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낙안은 현재 민속 마을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주(昇州)의 낙안성은 김빈길이 축조한 것이란 설이 있다. 김가외(金可畏)는 봉열대부 첨지통례문사(僉知通禮門事)를 지냈고, 특히 세종과는 내외종 6촌간으로 6촌계를 만들어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정익은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때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충직과 청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시조 김적의 선계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의종때의 인물로 국난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경기도 남양의 산중으로 은거했다고 하나 그의 선계와 그 후 250여 년 동안의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의 후손 김약해(金躍海)가 조선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우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하였고 약해의 아들 계(桂)는 1437년(세종19)에 출생, 김종직(金宗直)과 동문학으로 성종때 진사가 되었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정주(定州)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에게 죄가 가중되어 전 가족이 평북 정주군 마산면 원동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입북한 김계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평북 박천군 용계면 은봉동 은봉산에 있다. 김계의 5세손 김장유(金長孺)는 1561년(명종16) 임거정(林巨正)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이끌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당안공파(棠岸公派) 파조 김언량(金彦良)은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계해두(桂海杜) 등과 창의하여 역전 끝에 순절했다. 송암공파(松菴公派) 파조 김경록(金景祿)은 1619년(광해군11)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명(明)나라의 원군으로 의주까지 갔다가 모친상을 당해 돌아왔다. 그 후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 심양(瀋陽)까지 갔다왔다. 순절공파(殉節公派) 파조 김응록(金應祿) 또한 병자호란 때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아들 여상(汝商)과 함께 능한산성(凌漢山城) 싸움에서 순절했다. 시조 김사지(金四知)는 경순왕 부(傅)의 제 8자 추(錘:一善君)의 8세손 중(仲)의 셋째 아들이다.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이조 때 조방장을 지낸 김경로(金敬老),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한 김기욱(金基郁)으로 이어져 왔다. 후손들이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 및 함경남도 고원군 등지에 세거하다가 6·25동란 때 월남하면서 보첩과 가장(家狀)등 모든 문헌을 봉지하지 못하여 중간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자료에 의하면 평북 초산군 송면 송정동에 18호, 함남 고원군 상산면 주당리에 27호가 분포 거주하였는데, 동란 때 남하하여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포김씨(藍浦金氏)는 주로 평북 철산 등지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6·25 때 월남하면서 족보를 봉지하지 못해 그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김씨2000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시조 김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지만 연대와 행적 및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김시중(金始重)의 아들 성일(聲一)이 1729년(영조5)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김성일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 성일의 고조인 김충길(金忠吉)을 시조로 삼는 문헌도 있다. 김여용(金礪用)의 아들 봉서(鳳瑞)는 1741년(영조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평북 철산군 철산면 영산동에 65가구,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에 4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조 김창협(金昌協)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인 양주김씨(楊州金氏) 시조 김원보(金元寶)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남평군(南平君) 김기홍(金器弘)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괴전리에 35호가 살고 있었다. 후손 김규진(金圭鎭)은 조선 말기의 서화가로 이름이 높다.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으로 대수는 알 수 없으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기범(起範)의 아들이다. 8세에 장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서화의 명적을 연구, 10여년 만에 귀국했다. 글씨는 전서·예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하여 묘경을 이루었으며, 그림은 산수·화조를 잘 그렸고, 특히 난죽이 절묘했다. 그는 왕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서화연구회를 창설, 서화연구에 공헌했다. 후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 심사위원을 지내며 때때로 경향 각지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여 예술 발전에 공이 컸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김규진의 작품으로 저서 난죽보, 서법진결, 육체필론과 글씨에는 미륵불, 천하기절, 법기보살, 금수강산, 대웅전, 백마장강, 촉석루, 가야산해인사, 보신각, 희정당대조전, 태극전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외금강만물상도, 해금강총석정도, 소상대죽도, 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남해김씨(南海金氏)의 시조는 김태진(金泰辰)이다.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掌隷院直長)을 지냈다. 그가 남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남해로 하였다. 김태진은 본디 광산김씨의 후예다. 그의 증조인 김극신(金克愼)은 조선 연산군 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아갔으나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시조인 김태진으로부터 4세손까지는 남해에 복고했고, 5세손인 김의경(金義慶)부터 9세손 김낙운(金洛雲)대까지는 김포군 하성면에 세거하였다. 능주(綾州)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속면이다. 시조 김계원(金繼元)은 안주(安州)에서 살았다. 그의 큰아들 명하(鳴夏)의 자는 성숙(成叔)이고, 1657년(효종8)생으로, 1695년(숙종21) 평안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통례(通禮)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명은(鳴殷)의 자는 용녀고, 1660년(현종1)생으로, 1687년(숙종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지중추에 이르렀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남동에 2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길주로 입북했는지, 또 본관을 능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 의하면 달성김씨(達城金氏)의 시조 김담(金淡)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진사를 지냈다고만 되어 있어 여타 사적이나 연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또 전후 세계와 본관을 달성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힐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 나타나지 않아 후손들의 집성촌도 알 수 없다. 시조 김인(金忍)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3자 명종(鳴鍾)의 19세손이다. 그는 오위도총부(五衛都憁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태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무안현 대굴포(務安縣大掘浦: 현 함평군 학고면 대곡리)에 있을 때 좌막(佐幕)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20리쯤 올라온 나주군 마산면 귀업리(현 나주군 왕곡면 송죽리 귀업부락)에 터를 잡아 세거지를 마련했다 한다. 본관은 그의 증조 김남보(金南寶)가 고려 말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조선개국 후 해남(海南)으로 은거하였기 때문에 해남 또는 당시의 지명인 당악(棠岳)을 따서 당악김씨(棠岳金氏)라고도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으며, 음력 3월 3일에 향사한다. 당악김씨는 수군계(水軍系) 집안으로 큰 인물은 내지 못했다. 외손인 박순(朴淳)이 정승 자리에 14년간 있으면서 전남 선비들의 정계 진출에 크게 공헌했는데도 당악김씨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시조 인의 손자 종(琮)이 정언(正言)을 지냈는데, 이 분이 전남의 조선조 인맥에서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사암(思菴) 박순의 외조부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당악김씨의 세거지인 귀업(龜業)은 쑥밭이 되고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으며 원경(元慶)의 아들 준(浚)은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23년만에 돌아와서 다섯 아들을 두어 이 집안의 중심을 이루었다. 원록(元祿)의 손자 만영(萬英)은 학문이 높아 남평(南平)의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죽은 후에 풍산사(楓山祠)에 제향되었다. 당진김씨(唐津金氏)의 시조 김자진(金子盡)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 희조(希祖)의 7세손이라 한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 의하면 확실한 세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382년(우왕8) 문과에 급제하여 선공서령 보문각 대제학(繕工署令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졌다. 한편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의하면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상장군을 지낸 익지(益之)를 시조로 하고, 그의 손자 안경(安敬)과 자익(子益)을 파조로 하는 통진(通津)김씨가 있는데 당진김씨와 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관을 당진으로 하게 된 유래는 확실한 설명이 없다. 시조 김삼준(金三俊)은 경순왕의 일곱째아들인 언양김씨(彦陽金氏) 시조인 김선(金鐥)의 후손으로 1486년(성종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김제 군수 등을 지냈다. 언양김씨에서 분적한 연원과 본관을 담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언양으로 되어 있고, 또 족보 세계에 그의 아들 난무(蘭茂)·송무(松茂) 형제 중 난무는 달성계이고, 송무는 언양계로 되어 있어 난무의 후대에서 개성으로 입북하여 조상의 선향인 담양을 본관으로 한 것으로 짐작케 한다. 시조 김락(金樂)은 신라 신무왕의 5세손 무력(武力)의 아들로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통합삼한공신1등으로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으며, 대아찬에서 원보(元甫)겸 대장군으로 승진되었다. 927년(태조10) 7월에 대량성(大良城)을 쳐서 강주(康州)등 제성(諸城)을 획득했다. 그 해 10월,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군에게 포위당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태조를 덤불에 숨기고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왕의 수레를 대신 타고 격전하다 전사했다. 익대효절광위갈충위사전망공신 1등에 추봉,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940년(태조23) 공신당(功臣堂)을 설치, 벽상에 도형하였고,994년(성종13)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022년(현종13) 대구의 사우가 표충사(表忠祠)로 사액되고, 1052년(문종2) 삼중대광 당악현 개국공(唐岳縣開國公)에 추봉되었으며, 1120년(예종15) 예종이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그리하여 후손이 태조가 사적한 당악(唐岳)을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의 도로동( 老洞)에 있다고 하나 남북이 가로막혀 향화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 시조 김달(金達)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 중시조인 김방경(金方慶)의 제4자 론의 증손이다. 그는 원래 경북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거주하던 무과(武科) 출신으로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난 때 함경도 길주로 유배당하자 자손들이 배소로 따라가 그곳에 정착하면서 조상들의 세거지였던 대구(大邱)를 본관으로 삼았다. 대구김씨는 원래 무관 가문으로 조선조 5백년을 통해 시조의 아들 여연(麗淵)·부형(富亨) 형제의 후손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분거하면서 국경 수비에 기여하였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해 있을때에 전 가문이 충성을 다바쳐 숙종조에 충의 가문으로 포상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대구김씨는 우리나라 동·서북 지방에서 벌족을 이루고 살다가 해방 후에 4백여 가구가 월남, 종친회를 구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다. 시조 김량(金亮)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는 진사에 합격, 후손들이 본관을 덕산(德山)으로 했다. 그 외에 김충한(金沖漢), 김준신(金浚臣)의 후손, 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분파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덕수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이면서 해풍김씨가 족보를 창간할 때 덕수 지방에 거주하던 지파가 참여하지 못했다가 후일에 자기들끼리 족보를 간행하면서 중간세계를 밝히지 못한채 본관을 거주지인 덕수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덕수김씨세보(德水金氏世譜)>에는 해풍 부원군 김숭선을 시조로 하고 중간셰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김수연을 1세조로 하였다. 한편 <해풍김씨세보>에는 김수연을 시조 숭선의 8세손으로 정리하고 있어 이 두 집안의 족보는 본관만 다를 뿐 시조와 연원이 동일하다. 이에 대해 해풍김씨측에서는 고려 말의 사회적 혼란과 조선 개국 당시의 변혁, 그리고 해풍현과 덕수현(지금의 개성, 풍덕)의 지역적 혼란, 그 후에 닥쳐온 임진왜란 등 여러 난리를 겪는 동안 모든 문헌이 소실되고 혈족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각기 가승만 만들어 가지고 내려오던 중 1764년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후손들의 가승과 세단(世單)등을 수집하여 1791년 제1차 세보(世譜)를 창간할 때 참여하지 못한 혈손들이 후일에 족보를 간행하면서 상계를 밝히지 못한 채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조 희조(希調)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와 병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을 지내고 도강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도강으로 하였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어 원경,을경,일,을상등 동본 4파로 분류하여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의 개국공신 회련(檜鍊)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서설(瑞設)은 절도사를 거쳐 강계부윤 등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 약묵(若默)은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52년 한산군수로 제임하면서 선정으로 표창을 받고 뒤에 집의,목사,내자시정등을 역임하였다. 그외 학자로 이름난 후진(後進)은 일찌기 이항의 문하에서 경서와 역서를 연구하고 임진왜란때 이귀(李貴)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많은 군량을 바쳤다. 도언(道彦)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과 병조좌랑등을 지내고 1624년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의금부 도사로 평정하여 분무공신일등에 녹훈되었다. 한말의 우국지사 영상(永相)은 학자로도 명망이 높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이 주는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천술(天述)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여 우물에 투신자살한 애국지사이다. 시조 김흥도(金興濤)는 신라 김씨의 분적종으로 경순왕 부(傅)의 후손이라고만 전해질 뿐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조에 이조참의를 거쳐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나갔다가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마지막 임지였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파계는 5세 덕붕(德鵬)·덕린(德麟) 형제 대에서 두 파로 분류되지만 덕붕은 후사가 없어 덕린의 아들 수(洙)가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오늘의 동래김씨들은 모두 김덕린의 혈손인 셈이다. 시조의 4세손 선략장군(宣略將軍) 응현(應鉉)의 아들 덕린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덕린의 아들 김렴(金濂)과 김세진(金世珍)은 숙질간으로 각각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참봉 김여집(金汝鏶)의 아들 수함(守咸)은 김렴의 증손으로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이다. 그는 1755년(영조31) 함경도과(咸鏡道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찰방(察訪)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등주김씨(登州金氏)는 본관을 같이 쓰는 중국계 귀화족과 신라계 분적종으로 구분된다. 중국계 귀화족의 시조 김장생(金長生)은 명(明)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하여 등주(登州:지금의 安邊)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등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다른 한 계통의 시조 김식(金軾)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의 13세 손인 계림군 김균의 장자인 맹성(孟誠)의 증손자로 전해지고 있으나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김중정(金重貞)의 아들로 무과 출신이며 판관(判官)을 지냈다고 하지만 연대와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시조 김희제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만경의 군산도(群山島)에서 살았으나 선조가 상선(商船)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살면서 관적을 개성으로 했다. 그는 충청도 안찰사를 거쳐 장군이 되고, 1221년(고종8) 의주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금나라의 우가하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다. 1226년 서북면 병마부사로 있을 때 의주·정주지방에 쳐들어온 우가하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석성(石城)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 순문사로 있을 때 최우(崔瑀)가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무고를 믿고 사람을 나주에 보내어 체포하려 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만경(萬頃:現 金城의 속면)을 본관으로 했다. 1930년도 국세조사 통계에 의하면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 공덕면 병공리에 40호가 살고 있었다. 무장김씨(茂長金氏)는 전북 옥구와 황해도 장연에 각각 분산 거주해 왔으나 그 선계에 대해서는 신라계 혹은 가락계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1925년에 옥구(沃溝)에서 발행한 <무장김씨세보(茂長金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충절공(忠節公) 김선(金璇)은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장사가 무장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충(庶)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자진(自珍)은 대사헌을 지내고 옥구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이 옥구에 세거하게 되었고, 둘째 자무(自武)는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부제학을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사육신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해주의 어차리(馭車里)에 은거, 종적을 감추게 되자 그 후손들이 장연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같은 혈족이면서 옥구와 장연으로 분산되어 4백여년이 지나도록 왕래가 막혀 전연 모르고 지내오다가 1841년 장연파 문중에서 옥구로 찾아가 같은 혈손임을 확인하고 1925년 비로소 통합된 족보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연에서 살다가 6·25동란 후 월남한 무장김씨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조 김자무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선대의 사적이 유실되어 상계를 밝히지 못한다고 한다. 김자무는 박팽년의 사위로 관직은 제주목사였으며, 장인이 화를 당할 때 연루되어 장연에 은거하면서 무장으로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족보를 편찬하지 못하다가 1924년에 옥구의 무장김씨와 합보하면서 선계를 김수로왕에게 잇대어 시조를 김선으로 하였지만 이를 고증하기 위해 <신라세보(新羅世譜)>등 여러 문헌을 찾아보았으나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고 기타 <김씨본원세보(金氏本源世譜)>등 여러 문헌에 김알지의 후손으로 밝혀져 있다고 한다. 시조 김자무(金自茂)는 원래 무주(茂朱)사람이며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그는 단종조에 제주목사를 지내다가 1456년(세조2) 장인이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성삼문(成三問)등 6신과 함께 처형되고 그도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자 황해도 장연으로 도피하여 신분을 감추고 관향도 무장(茂長)으로 바꾸고 은거했다. 그 뒤 숙종 때 사육신이 신원될 때까지 그 후손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겨우 혈맥을 이어 오다가 가야계 무장김씨 선(璇)계에 편입하여 족보를 간행하고 가야계로 행세해 왔다. 그러다가 해방 후 월남하여 여러 문헌을 상고한 바 가야계가 아님이 뚜렷하고 특히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에 의하면 「그는 제주목사로 본래 무주인이었는데 박팽년의 사위로 장인이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자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 본관을 무장으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가야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무 이상의 세계를 가리지 못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그래서 이족의 동성동본이 생기게 되었다. 무장김씨는 4세 김유광(金有光)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연군 11개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고 1930년도 국세조사 자료에는 장연군 대동면 강화군 양사면 등지에 집성촌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주김씨(茂朱金氏)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 국자감 좨주를 지내고 조선 태종 때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러 무주백(茂州伯)에 봉해진 김성(金晟)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무주김씨족보(茂州金氏族譜)》에 의하면 신무왕의 계통이라 하였고, 시조 성은 고려조에 문하찬성사를 지낸 충정공(忠貞公) 김의원(金義元)의 13세손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인 김길(金佶) 이상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간 세대가 단종 손위 때 화를 입어 문적이 유실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 의하면 무주김씨의 시조는 신무왕의 16대손이고, 길의 13대손이며 의원의 8대손인 남우(南雨)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우가 의원의 8대손(신라김씨연원도)이고, 성은 의원의 12대손(무주김씨족보)이라 하였으니 남우와 성과의 사이 3대가 실전되었는지 아니면 남우와 성과는 전혀 다른 계통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6세 김우정(金禹禎)의 후손은 서산의 해미·성연 등지에, 10세 김승서(金承緖)의 후손은 아산의 온양·배방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7세 김숙(金淑)의 대를 전후해서 보령의 청소 등지에 일부가 살게 되었고, 4세 김자무(金自茂)의 후손은 황해도 장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의 인물로는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검교평리로 의금부 판결사·부제학을 겸직한 김생려(金生麗)와 그의 아들로 세종조에 홍문관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지낸 김규(金葵)가 있다. 이밖에 문종조에 집현전 교리를 지내고 뒤에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동생 한지(漢之)·아들 유인(有仁)과 함께 화를 입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된 김선지(金善之)가 있다. 시조 김식(金湜)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할 뿐 문헌이 없어 세계를 알 수 없고 시호가 충간(忠簡)으로만 전한다. 판관을 지낸 김천극(金天克)의 후손, 옥천김씨(沃川金氏)와 동원으로 전하나 미상이며, 본관을 문소로 하게 된 유래도 알 수 없다. 후손 김진화(金鎭華)는 자가 성관(聖觀), 호는 탄와(坦窩)이다. 1793년(정조17) 창릉참봉으로서 누진되어 한성판윤, 아산, 진산, 무장, 능주 목사를 역임했다. 김응택(金應澤)은 자가 취용(就用)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서생포 전투에서 전사했다. 벼슬은 훈련원정을 지냈다. 시조 김검달(金檢達)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 되어 그의 세계와 사적 및 연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의 후손들이 평남 평원군에 정착, 세거하면서 조상의 발원지인 문화(文化)를 본관으로 하였는데 문화의 옛이름이 유주(儒州)인 까닭으로 유주김씨(儒州金氏)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느 조상이 언제부터 평안도 지방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후손 김호익(金虎翼)이 1643년(인조21) 평안도과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조 김승조(金承祖)는 신라 제 56대 경순왕 부(傅)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이다. 그는 1271년(원종12) 사직(司直)으로 있을 때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장군으로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금릉군 증산면 은상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영조조에 김봉욱(金鳳郁)이, 정조조에 김성진(金成珍)이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종환(金宗煥)이 헌종 때 문과에 급제,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지냈다. 이밖의 인물로는 김견(金堅)이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김경발(金景發)은 사복시 내승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으며, 인조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급거 상경하여 왕을 호종하다가 순절,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진무공신(振武功臣)의 녹권이 내려졌다. 송정(松亭) 김중명(金重鳴)은 현종 때 무과에 급제, 운봉현감(雲峰縣監)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숙종 때 허견(許堅)등의 모반사건을 염탐, 미연에 방지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조 김선(金善)은 신라 제56대 경순왕 (傅)의 제3자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25세손이다. 그는 조선 성종 때 전라도 좌수사(左水使)로 있으면서 화를 입어 1476년(성종7) 의주(義州)로 유배갔다가 그곳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백천(白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응상(金應祥)과 김득경(金得景)이 있다. 김응상은 임진왜란때 조방장(助防將)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의주의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으며, 김득경 역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고 구암사에 제향되었다. 김계립(金繼立)은 병자호란 때 많은 전과를 거두고 삼학사(三學士)가 후금(後金)으로 끌려갈 때 의주로 돌아와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철수하는 적군을 기습, 포로로 잡혀가던 수백명을 구해냈다. 근세의 인물로는 김승학(金承學), 김경하(金景河), 김시형(金時馨) 등이 있다. 이들은 일제 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김승학은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김경하와 김시형은 1963년에 건국공로 대통령포상을 받았다. 시조 김억적(金億積)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라고 전해질 뿐 그 선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관직이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인물로 추정되나 확실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관을 보령(保寧)으로 하게 된 연원도 확실하지 않다. 그 후손 김효순(金孝舜)이 임진왜란 때 역관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왜적이 연안(延安)을 공격하려 하자 그가 〈적병은 보잘 것 없다. 명(明)나라 군사가 와서 곧 격퇴할 것이니 역전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화살에 꽂아 성 안으로 쏘았다. 부사 이정암이 이 글을 보고 사병을 격려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가 탈출하여 행재소(行在所)로 갔을 때 이정암이 이 사실을 알고 상소하여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고, 그 후 누진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시조 김징(金徵)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天年史)》에 의하면 그는 학행으로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당한 김태암(金泰巖)의 후손으로 대사간을 지냈다 한다. 그러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김태암의 본관이 보은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징 이전부터 보은에 관적한 것으로 보이나 문적이 없어 본관의 유래와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명진(金明晋)은 경순왕의 23세손으로 전하나 문헌이 없으므로 세계를 알 수 없다. 김이상(金履祥)의 후손이라 하고 상산김씨(商山金氏)와 동원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본관을 봉산으로 삼게 된 유래와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羅(나)氏 나(羅)씨는 본관이 7본으로 문헌에 전하고 있지만 금성(錦城) 나(羅)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주(羅州) 나(羅)씨에서 갈려져 나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나주(羅州) 나(羅)씨로 통합하고 있다. 시조 나총례(羅聰禮)는 고려 초에 삼한공신으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선계는 당나라 태종 때 상서좌복야였던 나지강(羅至强)으로 그는 고구려를 정복하자는 조정의 의견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발라현(發羅縣:나주의 옛 이름)에 정착, 신라조에 벼슬하여 좌승상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나씨가 나주에 살게 되었으며, 신라 효공왕 때 그의 원손 나경이 나주사찬에 봉해져서 본관을 나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와 세계가 확실치 않고 또 나주는 당나라 태종 때는 발라로 백제 땅이었고, 신라 효공왕 때는 금산(錦山)혹은 금성(錦城)이라 하여 후백제 견훤(甄萱)의 치하에 있었다가 903년 고려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비로소 나주로 개칭하게 된 점으로 보아 나지강이 신라에서 벼슬하였다는 사실과 나경이 나주사찬에 봉해졌다 함은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부족하므로 연대와 세계가 확실한 나총례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한다. 나부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원래 여황나씨였으나 고려성종 때 여황현이 나주에 귀속되면서 나주로 개관하여 이족이면서도 본관을 같이 하여 수백 년을 살아오다가 나총례를 시조로 하는 시조로 하는 나주나씨는 영조때 무신란(戊申亂)의 화를 면하기 위해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음을연유하여 금성으로 이관하였다. 금성나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10세손 나유(羅裕)가 있다. 그는 지밀직사사 득황(得璜)의 아들로, 원종 때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를 진압했다. 그 후 충렬왕 때 합단(哈丹)이 동북 변경을침범하였을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에 승진하고, 전조사로 원나라에 가서 회원대장군의 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는 충렬왕 말기에 신호위 호군이 되었으나 충선왕의신법(新法) 제정에 반대하다가 면직되었다. 10년 뒤에 상의평리에오르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가 되었다. 말년에 거평(居平:지금의 나주군 문평면)으로 돌아와정착함으로 해서 그 후손이 문평(文平)과 영광(靈光)에서 거평파(居平派)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나영걸(羅英傑)은 공민왕 때판밀직사사를 지냈고, 영걸의 아들 나문규(羅文奎)는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다.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은 직(織)의 아들로 공민왕 때 문과에급제, 춘추관 검열ㆍ수찬 등을 지내고, 공양왕 때 예문관 제학에 올랐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나주로돌아와서 은거, 나주파(羅州派)의 연원을 이루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뚜렷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희민공(僖敏公) 나세찬(羅世纘)이 호당(湖堂)출신으로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봉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시에 응할 때 대책문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통박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성(固城)에 안치당했다. 그후 김안로가 사사되자 복직되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 한성부 우윤, 전주 부윤 등을 지냈다. 시조 나부(羅富)는 원래 중국 예장(豫章)사람으로 송(宋)나라가 남쪽으로 쫓겨갈 무렵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주(羅州)에 정착, 고려조에 벼슬하여 감문위상장군을 지냈다. 그러나 시조 나부가 동래한 연대와 정착한 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다. 1982년에 간행한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옛 가승 및 고려 말의 공조전서 진(璡)의 묘비문에 <당(唐)나라 태종 때 한림수찬관이 해외로 귀양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발라(發羅:나주의 옛이름)에 표착하여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고 씌어 있고, 용강(龍岡), 강화(江華), 수원(水原)에 있는 옛 문적에는 <시조 부(富)가 봉명(奉命)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체류중 송(宋)나라가 망하자 여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라고 씌어 있어 시조의 동래 연대와 정착지점이 각 지역 또는 각 파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975년에 주한중화민국 대사 나영덕(羅英德)이 제시한 <예장나씨광동파보(豫章羅氏廣東派譜)>에 의하면 나영덕 대사의 25대조인 금상(錦裳)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부(富)는 이름자만 씌어 있었고, 차자 귀(貴)는 송나라 소흥(紹興:1131~1162)연간에 황비의 난을 피해 남웅(南雄)으로 옮겨와 광동파 파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시조 부가 사신으로 왔다가 송나 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못했다는 연대(1127년)와 귀가 남쪽으로 옮겼다는 소흥 연간이 비슷한 연대이고 또 양측의 정황이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광동파보에 나오는 부와 나주나씨 시조부가 동일인이라는 의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나부 이하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가능한 나득규를 제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나득규는 고려조에 영동정을 지냈다. 시조의 묘소와 유허지, 그리고 1세조부터 4세까지의 묘소가 모두 실전되어 직장공파조 나원(羅源)의 묘 옆에 시조의 제단을 설단하였고, 1세조부터 4세까지의 제단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설단, 매년 제향을 드리고 있다. 나주나씨는 5세를 전후해서 고려 후기에 많은 인물을 냈는데, 그 대표적인 전서 위(位)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지낸 나동길, 금양군(錦陽君) 석(碩)의 아들로 지제고를 지낸 나중우(羅仲佑), 직장공(直長公)의 원(源)의 아들인 전서 나진(羅璡)과 손자인 전농시정 나공언(羅公彦)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에서는 2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특히 3세8효(三世八孝)의 정려와 4세8족(四世八旌閭)가 나와 호남의 명문, 나주의 토반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나안세(羅安世)는 금양군(錦陽君) 석(碩)의 6세손으로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교리를 지냈으며 효행이 뛰어나서 정려가 내려졌다. 그의 동생 안인(安仁) 안의(安義), 아들 응허(應虛), 응삼(應參), 손자 의, 표(表), 계가 효행으로 정려를 받아 나씨 <3세8효>로 이름났고, 김제읍 용동리에 팔효사(八孝사)가 세워졌다. 나사침은 직장(直長) 원(源)의 9세손으로 선조조에 도백(道伯) 송찬(宋贊)의 천거로 이성현감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고, 아들 6형제 중 넷째 덕현(德顯)과 손자 후소(後素), 득소(得素), 증손 호(祜)는 효자 정려, 덕명(德明) 덕윤(德潤), 덕신(德愼)ㆍ덕헌(德憲)등 아들 사형제와 손자 계소(繼素), 위소(緯素), 증손 도 등이 충신 정려, 자부 정씨(鄭氏:德顯의 처), 딸(尹沆의 처), 손녀 모두 열녀로 정려를 받아 <4세5효7충4열> 의 삼강문(三綱門)이 세워졌다. 그러나 나사침의 둘째아들 덕준(德峻)의 6세손 나숭대(羅崇大) 가 영조조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기도 했다. 나덕헌(羅德憲)은 조선 통어사(統禦使)를 지냈으며,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엄(莊嚴)이다. 1603년(선조36) 무과에 급제, 2년 후 선전관이 되고,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 싸움에서 공을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의 심양에 다녀왔고, 1628년봉산군수, 1631년 길주목사로 있다가 덕천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 창성부사 의주부윤을 지내고, 다음해 춘신사로 다시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을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있어 황제참칭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들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를 받고 삼도 통어사에 특진, 1639년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남(南)씨의 본관은 영양(英陽), 선령(宣寧), 고성(固城), 남원(南原)이 있지만 모두 한 시조의 자손이다. 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문헌에는 5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세히 알수 없다. 이들 세 본관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영의공 남민(南敏)을 유일조로 삼고 있다. 시조 남민은 원래 중국 봉양부 여남(汝南:지금의 하남성 여남현(河南省 汝南縣))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었다. 그는 775년(경덕왕 14) 당나라 현종 때 이부상서로 안렴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 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착, 신라에 영주할 뜻을 밝히자 경덕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하여 성은 <남(南)>, 이름은 <민(敏)>으로 사성명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사후에 시호를 영의(英毅)로 내렸다. 그러나 시조 이하 누대가 실전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있어 맏이 홍보(洪輔:관직 삼중대광 도검의찬성사)는 영양남씨, 둘째 군보(君甫: 호 백천(栢川), 관직 밀직부사)는 의령남씨, 막내 광보(匡甫: 고성군(固城君))는 고성남씨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그 중 둘째 집인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고 인물도 많이 나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영양현북도항동대항구(英陽縣北道項洞大項邱 : 지금의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에 있었다고 전하나 실전되고, 1675년 그 산서편에 제단을 모아 매년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척연을 맺거나 당쟁에 깊숙히 관여하였고, 또 대대로 현신과 석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열좌에 올랐다. 남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6명, 대제학 6명 호당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상신 6명은 본관별 서열로는 20위에 지나지 않지만 씨족 규모에 비해서 대단한 숫자요,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 연안이씨 광산김씨의 각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과 조선조에서 충무(忠武)로 시호를 받은 인물 9명 중 한 사람인 남이(南怡)를 내어 더욱 빛난다. 남효온(南孝溫)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와 친교가 있었다. 1478년(성종9) 앞서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단종모)가 나타나 아들의 살해를 책했다고 하여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遜)의 저지로 실패하자 이로부터 유랑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복위를 상소했다고 하여 부관 참시되었다. 1513년(중종8) 소릉이 추복되면서 신원되고, 좌승지에 추증, 장흥의 예양서원, 의령의 의양서원, 고양의 문봉서원, 오현사 등에 제향, 1782년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에 제향되었다. 남이(南怡)는 시호(諡號)가 충무(忠武)이고,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서북변의 건주위를 정벌하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하던 어느날 밤,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생길 징조라고 말했다. 이에 평소 그의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류자광(柳子光)이 이것을 엿듣고 역모를 꾸민다고 모한, 강순(康純)과 함께 처형되었다 문과 급제자는 모두 180명으로, 이를 본관별로 분류하면 의령남씨가 139명, 영양남씨가 28명, 고성남씨가 8명, 본관미상이 5명이다. 의령남씨의 1세조 남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중 을진은 고려 말기의 명신으로 국운이 기울자 사천(沙川: 양주(楊州)의 속령)에 은거, 조선 개국 후 태조가 불렀지만 불응했다. 그의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했으나 이를 오히려 수치로 알고 감악산(紺嶽山) 깊숙한 석굴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을번은 고려 말에 밀직 부사를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이 된 아들 재(在) 은(誾)의 공으로 검교시중이 되었다. 남재, 남은 형제는 같은 개국공신이면서도 태조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남은은 방원(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조선 개국의 중추 세력이었다. 남은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삼척에 들어온 왜구를 격퇴하고, 사복시정이 되었다. 1388년(우왕14)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조했고,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판서를 거쳐 밀직부사에 올랐다.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이성계 일파와 활약하던 중 정몽주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동지밀직사사가 되었다. 이어 정도전, 조준, 윤소종, 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을 추진하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원사, 우군절제사에 이르렀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방원에게 처형되었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남재는 조선 영의정을 지냈다.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범정(範亭). 시호는 충경(忠景).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 좌부대언을 지내고 아우 은과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1392년(태조 1) 포상을 피하여 은거하였으나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져 「재(在)」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공신 1등으로 중추원학사 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의령부원군에 봉해지고 여러 관직을 거쳐 1396연도 병마사로서 대마도 정벌했다.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난 때 아우 은이 살해됨과 함께 일시 유배되었다가 태종 즉위 후 세자사부가 되고, 수문전 대제학을 지냈으며, 1416년(태종16)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남씨의 첫 정승이 되었다. 경제에 밝고, 문장이뛰어났으며 산수에도 능하였다. 그의 손자 남지(南智)는 좌의정, 남간(南簡)은 예문관 직제학, 남휘(南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었다. 남이 장군은 남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자,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그는 세조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적개공신에 올랐으며, 북변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무훈을 쌓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시기하는 류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 즉위년에 죽임을 당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남간의 증손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시습(金時習)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묵살당하자 실의에 빠져 유랑 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복위를 상소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만녕에 저술한 <육신전(六臣傳)>은 빛을 못보다가 숙종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지족당(知足堂) 남곤(南滾)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중종 때 훈구파(勳舊派) 대신으로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숙청한 후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남씨는 이렇듯 부분적으로 화를 입기도 했으나 그 세력은 꾸준히 확장되어 성종 때는 남지의 증손 치원(致元) 섭원(燮元)이 부마가 되어 왕실과 척연을 굳게 했고, 선조조 이후는 사색당쟁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일가이면서도 정치적 이해로 당파를 달리하기도 했다. 남씨 중에서도, 특히 좌의정 남지의 후손들이 북인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南以恭)은 남지의 6대손으로 본래 북인의 강자였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자 류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소북을 영도했다. 그러나 선조 말년에 이르러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소북과 대북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대북이 추대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소북은 쇠운을 맞았다. 한편 서인의 분파인 <소론>의 영수였던 문충공(文忠公) 남구만(南九萬)은 남지의 셋째아들 남구의 7대손이며, 자는 운로(雲路).호는 약천(藥泉).시호는 문충(文忠). 송준길의 문인이다.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1679년 한성부 좌윤으로서 윤휴,허견(許堅)등 남인을 탄핵하다가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 이때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 영수가 되고, 1684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사사를 결정하자 낙향했다. 그 후 부처 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서용, 1707년(숙종 33) 치사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문사와 서화에 뛰어났다. 문헌공(文獻公) 남공철(南公轍)은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로 순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학자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다. 철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은 남유용의 형 남유상(南有常)의 5대손이다. 문정공 남이웅(南以雄)은 남공의 사촌으로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 오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은 부총관 포도대장 등을 지내고 이괄의 난을 평정, 진무공신에 올랐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성(安州城)을 사수하다가 끝내 순절했다. 한편 고성파(固城派)로 집현전 출신 학자 남수문(南秀文)이 <고려사절요(高麗使節要)>의 초고를 썼으며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남주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일파로 몰려 남곤에 의해 추방당한 후 시문에 전심했다. 영양파(英陽派)로는 남사고(南師古)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역학(易學)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법(相法) 등에 도통하였고, 특히 풍수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주유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밖에 남치리(南致利) 남해준(南海準) 남용만(南龍萬) 등이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낭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양주(楊州) 단본이다. 낭씨의 시조는 낭충정공(浪忠正公)이라고 전해질 뿐, 그 휘자와 연대 및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며, 오직 한 벌밖에 없던 족보가 없어져 세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낭씨가 중국 강소성(江蘇省) 양주(楊州)에서 나왔다고 하며,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 전인 명나라 숭정(崇禎)연간, 즉 1628~1644(인조 22)사이에 명나라의 병부시랑 낭초(浪礎)가 아우와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 했다고 실려 있다. 또 <앙엽기(像葉記)>에도 낭씨는 야인으로 투화(投化)한 사람의 후예라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내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이며, 본관은 개성이라고 전한다. 내씨는 조선 개국 초에 고려를 재건하려는 세력과 왕씨 일족을 숙청할 때 귀한 신분에 있는 왕씨 한 사람이 화를 면하기 위해 내씨로 변성하고 왕씨의 본관인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신라 때 내숙(乃宿)이 이벌찬으로 소지왕(炤知王)의 국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고려사(高麗史)>에 충혜왕의 사부가 내원(乃圓)이었음을 미루어 보아 이조 개국 이전부터 있었던 씨족이었으나 병란 등으로 가첩 및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이조 현종때 첨지중추 부사를 지낸 득균(得均: 일명 득선)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일세조의 묘소는 파주군 교하면 상지석리 오미산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내씨는 옛 문헌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로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충북 서천군에 2가구, 황해도 수안군에 2가구 등으로 총4가구가 나타났다. 그 중 수안군 율계면 지석리에 살던 내재원(奈在元)에 의하면, 그때로부터 약 50년 전에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 그들은 본관을 나주(羅州)로 쓰고 있었다. 1985년도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체 인구수가 68명으로 나타났다. 노(盧)씨의 도시조는 노수(盧穗)라고 한다. 그는 당나라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들 아홉을 데리고 뱃길로 신라에 왔다고 한다. 그의 아들 9형제가 모두 신라에 벼슬을 하여 이들이 곧 9관(九貫) 노(盧)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씨는 고려말 이후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조에서는 정승 3명, 대제학 1명, 청백리 2명이 나왔다. 고려 때 가장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장연(長淵) 노씨의 중시조인 노단(盧旦)이다. 그는 문종, 선조 때의 학자로 벼슬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두 차례나 과거의 고시관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고,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광산노씨는 도시조 수의 맏아들 해(垓)가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세우고 광산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공을 세우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진 만(蔓)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검교 우의정을 지낸 경평공(敬平公) 숭(嵩)의 묘지를근거로 하여 고려조에 감문위 대호군을 지낸 서(恕)를 1세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모두 상계가 실전되어 일조지손이면서도 계촌이불가능하다. 광주노씨는 9관 노씨 중에서도 가장 번성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별제 홍(鴻)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들고 문형을 맡았으며, 선조조에 영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외에 이황의 문인 노수(盧遂), 조식(曺植)의 문인 노흠(盧欽) 등도 유명하다 곡산노씨의 시조는 도시조 수의 아홉째아들 노원(盧垣)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곡산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 때 영동정 판도판서를 지내고 문경으로 증시된 노조(盧兆)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곡산노씨는 관적지인 곡산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세거해 왔다. 8세 문정공(文靖公) 노경린(盧慶麟)은 이이(李珥)의 장인으로,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서원을 세워 유학을 정리하였고, 숙천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가자까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해주에 터를 굳혔고, 동생 노경룡(盧慶龍)의 후손들은 용진에서 살았다. 그 밖에 평산ㆍ김포 등지에도 일부 후손들이 살았다. 교하노씨는 도시조 수의 둘째아들 오가 신라조에서 교하백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를 지내고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노강필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 노강필(盧康弼)은 본래 기계(杞溪) 사람으로 본관이 장산(章山:경산의 옛이름)이었는데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뒤에 교하로 이적하였다. 교하노씨는 10세 책의 아들대에서 4파로 갈리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큰아들 제가 시중을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져서 서원군파로, 둘째 진이 공민왕조에 창성군파로, 셋째 균(鈞)이 경원군에 봉해져서 경원군파로, 넷째 영(渶)이 신양군에 봉해져서 신양군파로 갈린다. 그중 창성군파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한은 진의 손자이고 연산군조에 영의정으로 무오사화 때 많은 사림을 구출한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은 한의 손자이다. 만경노씨는 시조 수의 여덟째아들 판(坂)이 신라조에 요동양척(遼東攘斥)의 공이 있어 평양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평양으로 하였는데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평장사를 지내고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진 노극청(盧克淸)을 1세조로 하고 본관도 1세조의 사적지인 만경으로 개관하였다. 그런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 문헌에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홍주목사를 지낸 노혁이 시조로 되어 있으나 노혁(盧革)은 극청의 6대손이고, 또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만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노혁이 최초의문과 급제자로 만경노씨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그가 시조라고 잘못 기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집안은 임진왜란(壬辰倭亂)등 국난 때 의사들이 많이 나와 조국에 공헌하였다. 수암(守庵) 노응환(盧應晥)은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창의, 금산 싸움에서 스승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아우 응탁(應晫)ㆍ응호(應晧) 역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응완의 아들 관류당(觀流堂) 숙은 이괄(李适)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몽진할 때 많은 군량을 제공하여 공을 세웠다. 신창노씨(新昌盧氏)는 교하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1세조 노지유(盧智儒)는 교하노씨 1세조 노강필(盧康弼)의 손자 영순(永醇)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으로 훈공이 있어 판도판서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분적,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신창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후(老後)와 노순(盧錞)이 있다. 장연노씨(長淵盧氏)의 시조 노구(盧坵)는 도시조 수(穗)의 아들이다. 수는 원래 당나라 한림학사로 자국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아들 9형제가 양척(攘斥)의 공이 있어 국가에서 봉지(封地)할 때, 구(坵)는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고, 본관은 노안필(盧安弼)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으로 거란족을 물리치고 연강군(淵康君)에 봉해짐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이때부터 장연에 관적하였다고 한다. 안강노씨(安康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여섯째아들 노곤(盧坤)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강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곤의 후손 광한(光漢)의 아들로 첨정을 지낸 노종선(盧從善)을 첨정공파 1세조로, 목사를 지낸 노희선(盧禧善)을 목사공파 1세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주요 분파로는 첨정공파에서 역정공<경필>파, 역락재공<경륜>파, 경암공<경임>파, 동래공<상건>파로 갈리어 경북 선산과 상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고, 목사공파는 사간공(司諫公)파 단일파로 경북 군위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암공 노경임(盧景任)을 들 수 있다. 안동노씨(安東盧氏)의시조는 도시조 수(穗)의 다섯째아들 노만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평장사를 지내고 안동에 세거의 터를 마련한 노우를 1세조로 하였고, 손자 노영길(盧永吉)이 고려조에서 안동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안동으로 확정하였다. 안동노씨는 관적지는 안동이지만 안동부원군 노영길이 세거지를 떠나 전북 옥구로 옮긴 이후부터 후손들이 옥구와 완주 등지에 세거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7세 노중리(盧重理)의 후손이 완주로 옮겨가 그곳에 터를 닦았고, 6세 노결(盧潔)과 노침의 후손들이 김제와 익산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안동노씨가 전북 옥구군 성산면과 임피면, 완주군 봉동읍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길의 아들 숭(崇)이 있다. 그는 한림학사 지냈고, 아들 4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연일노씨(延日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일곱째 아들 노증(盧增)이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연일백(延日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후손 노경령(盧慶齡)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첩을 상고하지 못하여 노경령이 어느 시대 인물인지 또는 그의 행적과 그 이하의 세계를 알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는 조사 착오였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풍천노씨(豊川盧氏)의 시조 노지(盧址)는 도시조 수(穗)의 셋째아들로서 9형제가 모두 국가에 공을 세우고 분봉될 때 그는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풍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국자진사를 지낸 노유(盧裕)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풍천노씨는 관적지인 풍천을 떠나 주로 경남과 전북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5세 서린(瑞麟)의 대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처음 경북 청도로 남하 하였고, 아들 천주(天柱)가 다시 경남 창녕으로 옮겨 그곳에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며, 그 후대에서 일부가 전북 장수와 진안 등지로 이주 하였다. 그래서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북 임실군 삼계면, 남원군 주천면, 순창군 쌍치면과 경남 진양군 문안면, 하동군 악양면, 함양군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해주노씨(海州盧氏)는 광주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시조 노시헌(盧始憲)은 광주노씨 1세조 서(恕)의 후손 덕기(德基)의 6대손으로 조선 태종 때 해주(海州)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광주노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노씨보>에는 노덕기는 1389년(공양왕 1) 생으로 조선 세종조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상 차이가 있는데 확실한 사실은 알기가 어렵다. 한편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등 문헌에는 시조가 노세걸(盧世傑)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盧說之)의 후손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 예조정랑을 지낸 노광협(盧光協), 예조좌랑을 지낸 노수(弩手),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노계종(盧繼宗), 부사를 지낸 노성지(盧性之) 등을 꼽을 수 있다.
주요 본관은 함평(咸平), 강화(江華)이며, 시조 노계(魯啓)가 고려말 공민왕 때 정윤 벼슬을 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에도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魯)씨는 조선시대에 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역사상으로는 함평노씨의 노인(魯認)과 강화노씨의 노춘근(魯이春根)이 두드러진다. 시조 노용신(魯龍臣: 일명 休臣, 시호 忠襄)은 진(秦)나라에 의해 주(周)나라가 망할 때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애왕(哀王)을 섬겨 기자의 8조와 정제를 다시 일으키고 갑비군(甲比君:갑비는 지금의 江華)에 봉해진 노중련(魯仲連)의 손자 노계(魯啓)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신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때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1232년(고종 19) 강화현령으로 몽고군의 침입 때 강화 수비에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노신손(魯伸遜)과 그의 아들 노춘근(魯春根) 부자를 들 수 있다. 노춘근은 무과에 급제, 수문장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당포(唐浦)해전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다시 고하도(高下島)싸움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주노씨(廣州魯氏)는 강화노씨와 동원(同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를 가리지 못해 계대가 가능한 노필상(魯弼商)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그는 광주(光州)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선대부터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본다. 시조 노형권(魯衡權)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遠孫)이다. 그는 1359년 (공민왕 8) 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파천할 때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홍건적을 대파했다. 난이 평정된 후 밀산군(密山君:밀산은 지금의 密陽)에 봉해지고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며, 조선 개국 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형권의 아들 노서(魯恕)는 조선조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증손 노복(魯馥)은 군수를 지냈다. 복의 아들 노요좌(魯堯佐)는 참의를 지냈고, 요좌의 아들 노식(魯植)이 참판을 지냈다. 시조 노목(魯穆)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함풍군(咸豊君:함풍은 지금의 咸平)에 봉해졌으며 또 7세손 노신(魯愼)이 공민왕조에 함풍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咸平)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평노씨는 시조가 함평으로 관직을 받았다고 하지만 시조의 아랫대에서 함평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함평노씨 족보(咸平魯氏族譜)>에 의하면 시조 노목의 묘소가 합천군 봉산면 대평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또 4세 노관도(魯貫道)의 아들 노창문(魯彰文)의 부인이 나주의 손씨(孫氏)이며, 손녀가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에게 출가했다는 사실로 보아 노관도의 대에 함평에 연고를 맺은 듯 싶다. 함평노씨의 중흥조인 무열공(武烈公) 노신(魯愼)은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입 때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녹훈, 함풍군에 봉해지고, 상호군(上護軍), 정윤(正尹)들을 지냈다. 그는 역전의 용장으로 이성계(李成桂)와는 막역한 사이이면서도 이성계가 고려를 멸할 기미를 보이자 이성계 반대파에 속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의 묘소는 실전되어 1960년에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설단,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종주(魯宗周), 노인, 노홍(魯鴻) 등을 들 수 있다. 노종주는 단종조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 나주옥에 갇혔으나 탈옥하여 영암 서호(西湖)의 은적산에 은거했다. 금계(錦溪) 노인은 1597년(선조 30)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년만에 탈출, 명(明)나라로 건너가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의 유고집 <금계일기(錦溪日記)> 는 보물 제 311호로 지정받았다. 관암(冠巖) 노홍(魯鴻)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전공을 세우고 원종2등 공신(原從二等功臣)이 되었다. 이 외에 노극명(魯克明), 노연령(魯延齡), 노성택(魯聖澤)등이 각각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이다. 개성노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황제의 후손이 노(路)에 봉해져서 생긴 성이라고 한다.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1351(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 개성에 정착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노씨는 문헌에 개성노씨 외에 태원(太原)ㆍ북청(北靑)ㆍ대원(大元) 등 3본이 전해지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개성노씨 외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은 개성노씨만 실존한 것으로 생각된다. 뇌씨는 교동(喬桐)단본으로 시조는 미고이다. 교동(喬桐)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의 유배지 이기도 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40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34가구가 수안(遂安) 황주(黃州) 서흥(瑞興) 등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뇌씨의 선조는 본래 교동에서 살다 가 그 곳과 지호지간에 있는 황해도로 이주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옛날 육지에서 귀양갔던 선비의 후예 인 듯 싶다. 옛 문헌에는 나오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시로서 시조와 본관은 상고할수 없다. 주요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시조는 이조 때 현감(縣監)을 지낸 단유인(段由仁)이다. 고사(古史)에 나타나는 단씨로는 백제의 학자인 단양우(段楊雨, 五經博士) 가 있는데, 양쪽의 관련은 참고할 길이 없다. 시조 단희상(段希詳)은 본래 중국 강음현(江陰縣) 사람이다. 그는 1598년(선조31)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우고 귀화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 그의 선계와 관직 및 정착지점은 상고할 수 없다. 후손들이 맨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온 그를 동래시조로 삼고,본관은 시조의 본향이 강음이기 때문에 강음으로 하였다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에는 경기도에 11세대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조 단유인(段由仁)은 조선조에 현감을 지냈다는 사실 외에 그의 선계 또는 본관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된 연유와 어느 시대 인물인지는 상고할 수 없다. 그 후손으로 계양상사(啓洋商事) 사장·한국제강(韓國製鋼) 회장·해성(海成) 그룹회장으로 있는 단사천이 있다. 연안 단(單)씨는 우리나라 성씨의 298성이 실려 잇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이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 옛 문헌은 물론 중국에도 없던 성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 내리에 살던 단명선(單明先) 1가구가 나타났다. 그의 아버지 단명선(單明善)이 어려서 고양·수원 등지를 전전하다가 그곳으로 왔다고 한다. 본관이 연안이란 것으로 보아 문헌에 나오는 연안탄씨나 연안단씨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한산 단(端)씨의 본관은 한산 단본으로 옛 문헌에도 나오는 성씨아나 시조는 상고 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남 동래군 사하면 암남리에 단명복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 당씨 시조 당성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사람으로, 송나라 휘종 때의 승상 당각의 6세손이다. 그는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하여 정동행성의 연리를 거쳐 사평순위부 평사에 올랐다. 그는 문장에 능하여 당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맡아 보았고, 조선 개국 후에는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전서를 거쳐 공안부윤에 이르고, 많은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의 녹권을 하사받았다. 본관은 태종이 밀양(密陽)으로 사관했기 때문에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당씨의 인물로는 당윤문(唐允文)이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 사복시정 등을 지냈다. 또한 선조조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 선무 원종공신에 오른 당언량(唐彦良)과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병마절도사 당부흥(唐復興),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오른 부흥의 아우 대호군 당득흥(唐得興), 개령현감으로 선조 때 호성 원종공신에 오른 당계흥(唐繼興),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진무원종공신에 오른 당의남(唐義男)이 시조 당성과 함께 <당씨6공신(唐氏六功臣)>으로 유명하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월봉리에 25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대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개 성씨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에 비로소 나타난 성씨로 본관은 밀양과 대산 2본이다. 대씨는 본래 발해국(渤海國)의 시조왕 대조영(大祚榮)의 성이다. 발해는 신라에 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더불어 송화강(松花江)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확보, 해동의 성국을 이룩하여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에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하자 대조영의 후손 광현(光顯)이 926년에 고려 태조에게 투화하여 왕씨를 사성받았다는 것은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대산대씨와 발해대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 국세 조사 때 밝혀진 것을 보면 전남 영광에 10여가구 등 12가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원래 당나라 무장으로 말갈(靺鞨)을 통관 하였고, 당제로부터 진국공에 봉해졌다. 그의 초명은 걸걸중상이었는데, 걸걸은 우리말로 <걸지다, 걸걸하다>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대(大)> 자로 풀어대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은 699년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과 말갈족을 이끌고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여 발해국을 세우고 왕이 되니 이 분이 바로 고왕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물려받고 당나라 관제와 문화의 영향을 입어 해동의 성국으로 국세를 떨치다가 신라 말엽인 926년 14대 228년만에 요나라에게 망했다. 그러자 그의 후손인 대탁(大鐸)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망명, 지금의 경남 밀양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밀양대씨는 주로 전남 영광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영남에서 호남 으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조는 도진(都陣)이고, 본관은 성주(星州) 단본이다. 성주도씨의 근원은, 한나라 무제 때(B. C112년) 남월의 재상 여가(呂嘉)가 왕 건덕(建德)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계가 복파장군이 되어 여가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임채후에 봉해지고 도씨로 수성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의 후손 도조(都祖)는 한나라 성제(成帝) 대에 중국 장안으로부터 고구려에 들어와서 동명왕이 죽고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沸流), 온조(溫祚)등과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다스리는 대 공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 나라 도씨의 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백제 개루왕 때의 재상 도미(都彌), 신라 진흥왕 때의 도도(都刀), 진평왕 때 도비(都非)와 그의 아들 눌최(訥催), 통일신라 시대에 도유(都儒)등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도진(都陣)이 성산부원군에 봉해짐 으로써 비로소 성주도씨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문헌이 실전 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 중기에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都順)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도홍정(都洪正)·도응(都膺)을 들 수 있다. 도홍정은 공민왕 때 삼한 공신으로 시중에 오르면서부터 정계의 중추에 진출하였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공민왕조의 실권자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자 동향인으로 벼슬이 찬성사에 올라 세력을 떨치다가 우왕조에 이인임의 실각과 함께 몰락하였다. 청송당 도응은 태조 이성계와 가까운 친구로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옛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상장군에 임명하고 경창의 쌀 7백석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홍주의 노은동에 은거, 다섯 차례나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태조가 청송당이란 호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 도씨는 조선시대에 1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취애(翠厓) 도응유(都應兪)는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으로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고, 인조조의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의병장으로, 정묘호란 때는 정경세(鄭經世)에 의해 소모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배척하자 그 잘못됨을 지적했고, 박이립(朴而立)이 정구를 모함하자 항소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씻었다. 양직 도성유(都聖兪) 역시 정구, 서사원 문하의 성리학자로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역시 정구, 서사원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당세에 문명을 떨친 학자로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대 공이 컸으며 병자호란 후에는 산림에 묻혀 후진양성에 힘썼다. 여유의 맏아들 도신수(都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함흥부사등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으며, 둘째 아들 도신징(都愼徵)은 성리학에 뛰어나 영남의 유림에서 이름높은 학자였다. 그는 1674년(현종15)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의 비)가 죽고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 대공설(大功說)로 예론이 기울어지자 상소하여 이를 맹렬히 반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마침내 이를 따르게 했다. 숙종 초에 남인의 천거로 강릉참봉, 주부를 거쳐 용궁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통훈대부에 승진했다. 이 밖에도 도씨 문중의 인물로 도형(圖形), 도경유(都慶兪) 등을 꼽을 수 있다. 고성 도씨의 본관은 고성 단본이다. 도씨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도곡총설(陶谷叢說)>, <전고대방(典故大方)>등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 국세조사 때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옹포리에서 도응선 (道應善) 단 1가구가 신고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난 성이다. 1930년도에 1가구가 오늘날의 숫자만큼 번창한 것인지. 당시 조사가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역사에 나오는 도선(道詵), 도안(圖案), 도윤(道允), 도의(道義), 도증(道證), 도침(道琛), 도현(道顯) 등은 모두 승적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법명이지 성씨는 아니다. 도씨는 풍양, 순천 두 본 외에도 남양, 청주, 유곡, 별양, 죽청, 경주, 병양, 밀양, 순천 등의 본관이 <조선씨족통보>에 나타나 있다. 현재 도씨 인구의 80%가 경기도 김포군에 살고 있다. 순천도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시조 도구원(陶球元)은 원나라의 진사이다. 그는 1296년(충렬왕22)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가 고려에 들어올 때 부마도위로 공주를 배종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고려조에서 벼슬하다가 만년에 순천으로 퇴거했다. 후손들이 도씨의 선계는 당나라 때 대장군을 지낸 도간(陶侃), 간의증손 도연명(陶淵明) 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문적이 없어 구원 이상의 세계를 알 수가 없으므로 구원을 동래시조로 하고 순천에 퇴거 정착하였기 때문에 순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가 순천에서 살다가 다시 경기도 풍덕(지금의 개성)으로 옮겼고 그 후대에 김포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통진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관적지는 단순 연고지에 불과하고 본거지는 통진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묘소는 개성군 진봉면 북대족리 도궁곡에 있다. 순천도씨는 시조가 동래한후 현재까지 20여 대가 지났지만 후손이 영락하고 또 이렇다 할 인물을 내지 못해 씨족 전체의 족보를 만들지 못하여 같은 씨족이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낸 것을 안타까워하는 구절이 족보 서문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태까지 족보를 만들지 못하다가 근세에 와서 창보한 것으로 짐작된다. 순천도씨는 고려조에서 2세 도정흠(陶正欽)이 문하시랑을 지내고 개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광세(匡世)가 소부소감을 지냈고,4세 도동명(陶東明)이 고려 말에 어사를 지내다가 조선조에서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도제만(陶濟萬)이 성균관 진사였고, 11세 도진민(陶晉民)이 가선대부,그의 아들 도계동(陶啓東)이 무과에 올랐을 뿐 특별한 인물을 내지 못했다. 도(陶)씨는 중국의 사서에 한나라의 제상으로 도청이 있었고, 도겸, 도곡등의 이름이 기억되어 있으며 <조선씨족통보>에서도 나타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중국계의 귀화 성씨인 듯하다. 풍양도씨는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나타나 있고, 충렬왕 때의 인몰로는 도성기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나 시조와 본관을 풍양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돈씨의 본관은 목천(木川) 단본이고, 시조는 미고이며, 8·15광복 이전에는 남한에는 없던 성씨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고분고분하게 순응하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으므로 미워하여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 상, 우, 장등 짐승의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는데, 이들이 후에 돈(豚), 상(象), 우(牛), 장(獐)씨로 개성 했다고 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36가구가 있었는데 그중 31 가구가 평안남도에 있었고 나머지는 황해도와 평안북도에 있었다. 돈씨의 본관은 청주(淸州) 단본으로 시조와 본관을 청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옛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1930년도 국세 조사 때는 보이지 않다가 60년도 국세조사 때 비로소 나타났다. 시조 동승선(董承宣)은 한무제 때의 대유로 광천백에 봉해진 동중서(董仲舒)의 원손이다. 그는 고려 말엽에 명나라의 접위사(接慰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영주(營州)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5대손 대에서 함남 북청과 단천, 함북명천 등 세 고을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광천동씨에는 동승선의 후선 외에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도진사로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고 우리 나라에 온 명장 동일원(董一元)의 후손이 있다. 동일원은 명국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따라 종군했던 아들 대순(大順)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후금(後金)의 난>이 일어 나자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동일원은 동승선의 친제인 동인선(董印宣)의 7대손으로 성종 때 명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간 동월(董越)의 동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동덕현(董德賢)과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우봉현령·갑산부사 등을 지낸 동응란(董膺蘭), 일원의 손자로 인조 때 감역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분개,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한 동한필(董漢弼) 등을 들 수 있다. 두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본관은 두릉 단본이다. 두릉은 중국의 지명으로 본국에서의 관향을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대로 쓰고 있는 성씨인데, 같은 두릉 사람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후예로 지칭하면서도 동래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그 하나는 고려 목종(穆宗), 즉 송나라 진종 때 귀화한 두경녕(杜慶寧)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정착한 두사충(杜師忠)의 아버지 두교림(杜喬林)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경녕계> 시조 두경령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후예이다. 그는 송나라 태종 때의 병부상서로 왕위 계승의 논의가 있을 때 진종의 옹립을 반대하다가 소주자사로 좌천되어 아들 중서사인 지건과 좌습유 지방을 데리고 해로로 부임하던 중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7)우리나라 궁지현(宮池縣: 지금의 김제군 만경)에 표착, 귀화했다. 고려조에서는 송조 특청에 따라 궁지현을 식읍으로 내리고 두릉군에 봉했다. 그래서 본관을 두릉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고, 매년 음력10월 초3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두경승(杜景升)과 조선조의 두정란(杜廷蘭)을 들 수 있다. 두경승은 고려 명종 때 무신으로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용명을 떨쳤고,뒤에 삼한후벽상공신에 이르렀다. 그는 1197년(명종27)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세우려 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조선시대에는 두정란이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선조 때 마도만호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과 함께 역전하다가 금산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우 두정래(杜廷萊)도 훈련원 봉사로 형과 함께 옥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선전하다가 금산에서 순절했다. 두기문(杜起文)은 벽동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모두 전공이 있어 행주산성에 현공비가 세워졌다. 두만형(杜萬馨)은 정조때 문필이 탁월하여 왕으로부터 <초당>이라는 호가 하사되고 고향인 금구에 어필각이 세워졌다. <교림계> 시조 두교림(杜喬林)은 중국 두릉 사람으로, 진나라 무제 때의 명장 두예(杜預)의 26세손이며 당나라 시인 두보의 14세손이다. 벼슬은 명조에 기주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두사충(杜思忠)은 명나라 신종 때 상서복야 겸 태사를 지내다가 1592년(선조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으로 매부인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두 차례나 와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회군할 때 압록강에서 진린을 보내면서 <내 차라리 예의지국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 않아 오랑캐 땅이 될 나라로 돌아갈 수는 없다>하고 귀국을 단념, 달구현(達句縣: 지금의 대구)에 정착하여 호를 모명(慕明)이라 하였으며,동네 이름도 <대명(大明)>으로 고쳤다. 그리고 동구 밖에 단을 모아 초하루, 보름으로 관복을 입고 북녘을 향해 절하고 울면서 망향의 시름을 본관은 목천(木川), 장흥(長興) 두 본이 있으나 장흥은 본래 목천에서 갈려진 같은 본의 분파인 것이다. 마씨는 본래 영성으로 백익(伯益)의 후손이었는데, 조나라 종실 사가 장수가 되어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마복군에 봉해진 후 마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마씨의 시원에 대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략할 때 까지 저항했던 목천지방 사람들을 미워하여 우(友) 마(馬) 상(象) 등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마씨는 이미 삼한시대부터 마씨성을 쓴 사람이 사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로 이는 후세에 잘못 전해진 말이라 생각된다. <마씨세보>에 의하면 마한 때 마겸(馬謙)이란 사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으며, 시조인 마여(馬黎)도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시조 마여는 동명왕의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따로 나라를 세우려고 남하할 때 좌보(左輔)로서 시종하여 백제 창업에 본관은 중시조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의 아들 현(鉉)과 혁인(赫仁) 형제 대에서 목천과 장흥으로 갈라졌다. 종파는 중시조의 9세손 순흥이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 평장사로 목천군에 봉해졌고, 또 그의 아들 점중이 문종 때 이부상서로 목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지파는 조상이 세거한 마사량현이 고려 때 회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회령을 본관으로 삼았다가 혁인의 11세손 마천목(馬天牧)이 조선 초에 장흥부원군에 봉해졌고, 또 회령이 장흥도호부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장흥으로 개관하였다 한다. 마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는 공신 1명,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는데, 목천파가 5명, 장흥파가 2명이다. 마씨의 대표적인 인물을 파별로 살펴보면 목천파의 의상(衣裳) 의경(義警) 형제가 효렴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마상원(馬尙遠)은 의상의 손자로 문장이 뛰어나서 차천로 형제와 어깨를 겨루었으며, 세상에서이르기를 <양차일마>라고 하였다. 마사종(馬嗣宗)은 의경의 손자로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오륜통의> <사례비요> 등예법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마맹하(馬孟河)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 학유를 지냈고, 그의 아들 지휘(之徽) 역시 영조조에 문과에 급제, 직강을 지냈다. 마유(馬遊)는 조유선(趙有善) 김이안(金履安)의 문인으로 정조 때 진사시에 합격, 분교관을 거쳐 중부령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노곡에 은거, 후진을 가르쳤다. 남이형(南履炯)이 개성유수로있으면서 그의 기개와 의리를 존중, 깊이 사귀면서 학문과 정치를 논했다. 장흥파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의 무신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이 유명하다. 그는 고려 말에 대장군이 되고, 조선 초에 상장군이 되었다. 태종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 3등으로 장흥군에 봉해지고, 동지총제가 되었다. 그 후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판나주 목사 도총제 판우군부사 등을 지내고, 장흥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주촌(舟村) 마하수(馬河秀)는 임진왜란 때 선공감 주부로서 창의, 배 10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포위되자 적진에 돌입, 분전하다 전사했다. 마계변(馬繼卞)은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고, 미산(眉山) 마성린(馬聖麟)은 해서와 초서에 능한 명필로 목판에 새긴 작품이 지금도 전한다. 마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나타난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마로(麻盧), <고려사(高麗史)>,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나타난 고려 태조 때의 개국공신 2 등에 오른 마난 등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연조가 깊은 성씨로 보이나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본관은 영평(永平), 열산(烈山) 두 본이 문헌에 전하지만 영평마씨는 마난의 후예로 알려져 있고, 열산 마씨는 미고이다. 그 외에 정유재란 때 명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던 마귀 제독의 후예인 상곡마씨가 있다. 마귀는 회회국왕 마립(麻立)의 원손으로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6천 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과 함께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와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9년(선조 32) 3월에 귀국했다. 그 뒤 청나라가 일어나고 명나라가 망하게 되자 마암은 청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쟁했기때문에 마씨일가는 큰 수난을 겪어 암의 아들이자 귀의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마순상이 남경통판 호부낭중 겸 조병독량사로 산동성 등주 및 묘도의 군량미를 배로 수송하다가 폭풍을 만나 1627년(인조 5) 9월에 황해도 풍천에 표착,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회회국왕 마립을 원조로, 마귀를중시조로 하고 중국의 관향인 상곡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있다. 마순상이 처음 황해도 풍천에 표착하여 살다가 뒤에 홍주(지금의 홍성)를 거쳐 전남 광주군 외차면 용산리에 옮겨 살았고, 그의 6대손 마하백(麻夏帛)이 경남 합천군 봉산면 거안리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철종 연대에 봉산면 송림리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상곡마씨의 대종가가 현재까지 봉산면 송림리에 살게 되었다. 만씨의 본관은 개성, 강화를 비롯하여 진강, 광주, 홍주, 강릉, 익곡, 영풍 등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나타나 있으나 시조와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신라 진평왕 때 대내마를 지낸 만세(萬世), 경덕왕 때 상대등 만종(萬宗), 고려 태조 때 전공을 세우고 대광 벼슬에 오른 만세(萬歲), 신종 때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로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만적(萬積) 등의 이름이 보이나 오늘날의 만씨와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현존하는 만씨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던 명나라의 경리사(經理使) 만세덕(萬世德)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만씨의 인구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39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35가구가 북한 지역이고, 남한에는 경기도와 충남에 각각 2가구씩 있었다. 매씨의 본관은 충주(忠州)단본으로 시조와 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의하면 <황간(黃澗) 사람으로서 매한손(梅漢孫)이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국에 타서 먹이고 병을 낫게 하여 1519년(중종 14) 정문이 세워졌다. 매씨의 선계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부(濟南府)에서 나왔다고 한다>라고 하였을 뿐 어느 때 누가 우리나라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총 16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10가구가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부천 안성 시흥 등지에 살았으며, 전북 김제와 황해도 서홍에 각각 2가구, 충남 논산과 함북 청진에 각각 1가구씩 살고 있었다. 맹씨의 본관은 신창(新昌) 단본이다. 맹씨는 중국의 성씨로서 문헌에는 <노환공(魯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후예이다. 경부를 맹손(孟孫)이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맹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나라 맹씨는 중국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을 뿐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내력과 연대 및 인물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다. 맹씨는 고려조에 내시령동정, 예조의랑, 이부전서 등을 지낸 맹의를 시조로 하고 있다. <맹씨세보>에 의하면 "맹씨는 중국으로부터 나와서 신창으로 관적을 했는데 전서공(全書公) 의(儀) 이전의 계보는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시조 이전에 신창에뿌리를 내린 성씨라 생각된다. 맹씨는 충청도에서 손꼽히는 명문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상이요,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을낳아 더욱 유명하다. 맹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1명, 청백리 1명, 공신 1명, 문과 급제자13명을 배출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말 공양왕조에 수문전 제학을 지내다가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온양으로 은거한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가 있다. 효성이 지극한 그가 부모상을 당해시묘할 때 흰제비가 여막에 집을 짓는 기적이 있어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은 희도의 아들이자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고려 말 우왕조에 문과에 급제,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판관ㆍ내사사인 등을 거쳐 태종 때 대사헌에 이르렀을 때 태종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이 사치하고 방자하므로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잡아다 신문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곧 풀려났다. 세종 초에 이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그 후 우의정에 승진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 창달에 기여했으며,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집에 비가 샜다는 이야기는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도 제작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그 외의 인물로는 세조 때 적개공신 2등으로 신창군에 봉해진 맹석흠(孟碩欽),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 안동부사 등을 역임하고 시정을 여섯 차례나 지낸 맹세형(孟世衡),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안동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푼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특진관이 된 세형의 아들 맹주서(孟胄瑞), 서화로 유명하고, 특히 소를 잘 그린 맹만시(孟萬始),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현종의 딸 명선공주와 정혼했다가 공주가 죽자 신안위에 봉해지고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글씨를 잘 써서 안진경(顔眞卿), 류공권(柳公權)의 체를 터득한 맹만택(孟萬澤) 등이 유명하다. 시조 명옥진(明玉珍)은 1362년(공민왕 11) 촉에 본거를 두고 운남을 공격, 함락시키고 자칭 농촉왕이라 일컫다가 이듬해 성도(成都)에서 스스로 칭제, 국호를 대하라 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명승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역시 현군으로서 덕망이 높았다. 그 무렵 세력을 떨치던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도처에서 군웅이 할거, 중국 천하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명옥진보다 2년 앞서 무창의 진우량(陳友諒)이 스스로 칭제하고 국호를 한이라 했으며 1364년(공민왕 13)에는 홍건적에 속해 있던 주원장(朱元璋)도 오왕이라, 일컬으며 세력을 넓히더니 한의 진우량을 멸하고 그의 아들 진리의 항복을 받은 후 1368년 명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1371년 명승(明昇)은 명나라 태조에게 잠시 항복, 귀의후에 봉해졌다가 다음해에 진리와 함께 남녀 27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관리로 삼지 않고, 백성으로도 삼지 않는다> 하여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후에 명승은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결혼하여 개성에서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우리나라 명씨의 시초이다. 본관은 시조가 자립했던 서촉으로 하였는데, 후대에 내려와서 우리나라에서의 연고지인 연안을 본관으로 쓰는 파도 있으나 모두 같은 핏줄이다. 명승은 이성계의 잠저에 자주 드나들며 바둑을 즐겼고, 그의 어머니 팽씨는 태조 이성계가 즉위할 때 용포곤의를 지어 올려 태조가 감읍 했다고 한다. 태종 때 명승은 화촉군에 봉함을 받고, 충훈세록을 하사 받았다. 명씨는 연조가 별로 오래지 않아 조선조에서 겨우 5명의 문과 급제 자를 냈을 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명광계(明光啓)가 있다. 그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평택현령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휘하의 정예병을 인솔, 조헌(趙憲)의 의병과 합세, 금산에서 격전하다 절사했다. 명정구(明廷耉)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 찰방, 보령현감 등을 역임했다. 명완벽(明完璧)은 철종 때 장악원 전악에 임명되어 악사, 국악사, 아악사 등을 거쳐 아악사장이 되었다. 이외에 근세 인물로 3ㆍ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뒤에 오성학교, 협성실업학교, 광신상업학교, 영변여중 등을 설립한 모씨(毛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에 중국의 광주, 공산이에 서산, 김해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 시조와 본관의 유래는 상고할 문헌이 없다. 다만 중국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모씨는 평북 정주군 해산면 납천리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는 것을로 보아 정주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모씨는 광주모씨이고, 그 외는 모두 광주모씨의 분파로 생각하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는 백제의 장군으로 신라의 대아성을 함락시킨 모척(毛尺),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묵호자를 숨겨준 모례(毛禮), 원성왕 때의 집사리 모초(毛肖), 궁예(弓裔)의 휘하에서 활약한 모흔(毛昕)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의 모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사기에 모수 등 모씨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모씨가 한국에 귀화한 것으로 추측된다. 모씨는 중국의 성씨로서 축융(祝融)의 후손이 모자(牟子)가 되어 읍명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본관은 함평(咸平) 단본이다. 문헌에는 함평 외에 진주모씨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함평에서 진주로 이거한 같은 혈손이다. 시조 모경(牟慶)은 원래 중국의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이다. <모씨세보>에 의하면 그는 송나라 흠종 때의 대장군으로 1126년(고려 인종 4) 금나라 사람이 흠종을 데리고 북으로 가던 날 송나라 고종의 명을 받아 형부상서 양응성(楊應誠)과 함께 사신으로 고려에 입국하였다. 당시 송나라는 이미 남쪽으로 밀려나고 북쪽은 금나라가 건국 되어 있어 고려조에서는 금나라를 두려워하고 칙서를 모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모순(牟恂)이 있다.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좌사간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그는 뛰어난 효자로 절강선생이라 불렀고, 나라에서는 정려를 내렸다. 모세번(牟世蕃) 모세무(牟世茂) 형제는 각각 현종조와 순종조에 문과에 급제, 다같이 현감을 지냈고 모경관(牟景觀)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좌랑 판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모달겸(牟達謙)은 정조 때 문과에 급제,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고 당시의 권신 간배들을 가차없이 탄핵, <모 장령의 직언>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초 모수명(牟受明)은 이삼만(李三晩)에게서 글씨를 배워 해서와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모체>라 일컬었다. 시조 목효기(睦孝基)는 고려 때 낭장 동정을 지냈다. 목씨의 본관은 사천(泗川)단본이나 성씨와 본관의 연원은 밝혀지지 않고, 다만 상고 시대에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매우 화목하게 지내어 <목>으로 사성했다는 전설만이 전하나 확실한 문헌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다. 목씨는 고려 말에 무반으로 기반을 굳히고 조선 중종 때 학자인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중흥시켰다. 특히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상신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문과급제자 33명을 내어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대성들과 어깨를 겨루었던 성씨로 다른 희성들보다는 특징이 있는 성씨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삼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은 공민왕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조전병마사, 밀직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목인길은 공민왕 때 기철(奇轍)의 일당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로 왕의 남행에 호종, 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우왕조에 문하찬성사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목자안 역시 우왕조에 밀직부사로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다시 강릉킿도체찰사가 되어 평해부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세칭 목첨(睦詹) 부자와 첨의 아들인 목서흠(睦 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가 있다. 목세칭은 조선 중종때 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목씨의 유일한 상신인 목내선(睦來善)이 있다. 그는 서흠의 아들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으며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이후 서인이 실세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5년 뒤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당하면서 유배되었다.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 대흠에게 입양한 목행선(睦行善)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 때 남인으로서 병조판사를 지내고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주(朔州)에 귀양가서 죽었다. 목씨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꼐 세력을 잃었다. 다른 파계의 목호룡(睦虎龍)이 신임사화(辛任士禍)의 고변자가 됨으로써 목씨의 명예가 다소 손상되었다. 순조 초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도 이 문중의 인물이다. 묵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광녕(廣寧) 단본이며, 시조는 명나라의 병부상서를 지낸 묵사(墨泗)이다. 묵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는 보이지 않고,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비로소 등장했던 성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성씨로 여겨진다. 6 25동란 때 묵희열(墨熙烈)이 가지고 월남했다는 가승에 의하면, 시조 묵사의 아들 만근(萬根)이 명나라 말기에 요동(遼洞)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금화(金貨)에서 14세를 세거하였고, 경기도 수원 서울 충북 진천 제천 청원 경남 고성 등지에 거주한 묵씨도 모두 광녕 묵씨라고 되어 있다. 한편 문헌에는 묵씨의 본관이 요동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들과 관련이 있는 지는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광녕묵씨가 요동으로부터 동래했다는 설에 비추어 볼 때 광녕묵씨를 지칭한 것으로 풀이 된다. 계속작업중입니다. 문(文씨)의 본관은 문헌에 132본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감천(甘泉)과 정선(旌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중인 남평(南平) 문씨에서 갈리어 나갔으며, 오늘날에는 남평 단본으로 통일되어 있다. 감천(甘泉) 문씨와 정선(旌善) 문씨는 본래가 타성으로 성만 같을 뿐 본관은 다르고 조상도 다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수는 총 54명이다. 그중 40명이 남평문씨이고, 그 밖에 감천 문씨 5명, 개령(開寧) 문시 4명, 영산(靈山) 문씨 3명, 안동(安東) 문씨 1명, 본관 미상이 1명이다. 감천문씨는 남평문씨의 지파로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내고 감천군에 봉해진 문구(文龜)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감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문구는 남평문씨 1세조 경절공(敬節公) 익(翼)의 12세손이요, 고려조에 집현전 태학사에 이어 평장사를 지낸 양간공(襄簡公) 문득걸(文得傑)의 현손으로 밝혀졌고, 남평문씨와 동원임이 확인되어 남평문씨의 <임술대동보> 간행 때 남평으로 환본. 남평문씨 감천군파로 합보하였다. 그래서 사실상으로는 감천문씨는 없어진 셈인데 관례에 따라 아직도 흔히 감천문씨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는 달리 문세광(文世光)을 1세조로 하고 문구를 4세로 하여, 계대한 또 한 계통의 감천문씨가 있었으나 이 역시 남평으로 환본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 김고벽이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씨로 사성되었고, 그의 아들 문원길(文原吉)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낭장을 지내고 감천문씨의 시조가 되었다고한다. 그리고 문세광을 시조로 하는 또 한 파가 있다고 하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문근(文瑾)이 문과에 급제, 참찬을 지냈고 아우 문관(文瓘) 역시 문과에 급제, 장령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만성보>에도 역시 시조는 문세광이라 하였고 그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문원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선과환록(朝鮮科宦錄)>, <한국과거사(韓國科擧史)> 등 여러 문헌에 문근 형제가 모두 남평문씨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문씨로 사성된 감천문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매계(梅溪) 문근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기사관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중종 때 대사간, 도승지 등을 지냈다. 특히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삭직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우 죽계(竹溪) 문관 역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안음현감으로 나가 전임자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전정후문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으로서 그의 탄생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라는 큰못이 있고, 그 못가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 군주가 그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상히 여긴 군주가 바위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속에는 피부가 옥설 같이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다. 군주가 아이를 데려다 기르매 나이 5세에 문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었다. 그래서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주군남평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서너 마장쯤 가면 장자지라는 큰 못이있고, 그 곁에 우뚝 솟은바위가 있어 남평문씨 시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바위 위에는 후손들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강지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못가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조의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 문다성이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에오르고 남평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으로 관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공원(文公元)·문공유(文公裕) 형제의 묘지명에 의해 고려 숙종 때 우산기상시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 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문씨는 고려조에서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세족의 영예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 절의를 지키고은거불사한 영향을 받아 벼슬 열력이 고려조에 비해 적은 편이다.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6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다. 경절공(敬節公) 문익은 남평문씨를 명문으로 끌어올린 중흥조이다. 그는 고려 숙종조에 우산기상시로 정계의 중추에 자리를 굳혔고, 그의 큰 아들 충의공(忠毅公) 문공인(文公仁)은 고려 인종 때 중서시랑평장사, 감수국사 등을 지냈다. 둘째 아들 정경공(貞敬公) 문공원은의종 때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셋째 아들 문가관(文可觀)은 조계종 대선사가 되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고려조의 명필로 유명한 경정공(敬靖公) 문공유로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작품으로 묘향산 보현사의 창사비 비명 및 음기가 전한다.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은 공유의 아들로 문무를 겸전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근검 충직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1170년(의종24)정중부의 난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앞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벼슬은 권판상서이부사에 이르렀으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두 아들 문후식(文候軾)은 동북면 병마사를, 문유필(文惟弼)은 판예부사를 지냈다. 남평문씨는 문후식의 8대손 문익점의 집안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문유필 집안의 문달한(文達漢)이 고려 말에 왜구를 무찌르는데 공을 세워 순평군이 되었으며, 문근(文瑾)이판도판서에 올랐다. 남평문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들여와 의류혁명을 이룩한 충선공(忠宣公) 문익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공민왕 때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들여와 우리 나라 목화재배의 시초가 되게 했다. 벼슬은 공민왕 때 우문관 제학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가 친히 불렀으나 끝내 거절, 절의를 지켰다. 목화를 전파한 공으로 조선 태종 때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으며, 세종 때 부민후에 추봉, 세조 때 사당이 세워졌다. 그의 손자 정혜공 문래(文萊)는 조부가 거둔 목화를 베로 만들기 위해 <물레>를 고안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작방차(作紡車)라 부르다가 뒤에 그의 이름을 따서 <물레>라 불러오고 있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산수, 율려에 정통한 학자이다. 조선조의 인물로는 문익점의 손자 평익공(平翼公) 문빈(文彬)이 태종때 좌명공신 4등으로 월천군에 봉해졌고, 문달한의 아들 문효종(文孝宗)이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치사했다. 경숙공(敬肅公) 문상행(文尙行)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용담현령을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으며, 문민(文敏)은 중종 때 정국공신 4등으로 문원군에 봉해졌다. 창계(滄溪)문경동(文敬仝)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편수관, 사성이 되었다. 문근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중종 때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남곤, 심정등의 무고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삭직된 기묘명현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동생 문관(文瓘)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을 지냈다. 모계(茅溪) 문위(文緯)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김면이 병사하자 뒷일을맡아 처리했으며 김옹,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감찰을 거쳐현감이 되었다. 풍암(楓庵) 문위세(文緯世)는 류희춘(柳希春),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 적의 퇴로를차단하여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목사가 되었다. 경암(敬庵)문홍헌(文弘獻)은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를 좇아 진주성에서 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와 함께 투신 자살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인물로는 형조좌랑 문덕교(文德敎)와 수문장 문기방(文紀房)등이 있다. 문희는 인조 때 진무공신 3등으로 오천군에 봉해졌고, 문재도(文載道)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근세 인물로는 호남 의병장으로 항일전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대구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이 된 문태수(文泰洙), 최익현(崔益鉉)의문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관군, 일군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체포되어 12의사의 한 사람으로 불리운 문달환(文達煥), 상해 임시정부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文昌範), 재미동포 항일 단체인 대동보국회 회장을 지낸 문양목(文讓穆),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문일평(文一平), 우리 나라 최초의 사전인 <새국어사전>을 펴낸 문세영(文世榮)등이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 문헌에 의하면 시조 문임간(文林幹)은 원래 전씨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황제로 부터로 <문씨(文氏)>로 사성받았다 하며, 귀국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랑 평장사, 태자소부를 지냈다고한다. 그러나 본관을 정선으로 하게 된 유래가 확실치 않은 점으로 보아 원래 정선전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아들 문관은 고려조의 <명장록(名將錄)>에 기록된 인물로, 벼슬은 참지정사에 이르고, 장경(章敬)이라는 시호가 내려 후손들이 중조로 삼고 있다. <중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문씨(門氏) 본관이 인천, 송림, 남포, 죽산, 인동, 함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1930도 1960년도, 1970년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는 성씨이다. 인천문씨의 시조는 고려 때 감문위 낭장을 지낸 문필대(門必大)이다. 그리고 고려 때 시어사 중승을 지낸 문사명(門思明)을 시조로 하는 파도 있다. 미씨의 본관은 문헌에 재령(載寧), 송림(松林), 유성(儒城), 방산(方山)등 4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재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조와 본관의 유래를 상고할 수 없다. 재령미씨의 시조는 미영성(米榮盛)으로 백호장을 지내고, 함북 종성군 행영의 도통사로 있으면서 국경 경비에 참여하였다. 후에 경성(鏡城)에서 세거했다고 하나 연대는 알 수 없고, 본관을 재령으로 하게 된 연원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조선시대 명의(名醫) 미병제(米秉濟)부터 세수를 헤아리고 있다. 민씨는 선대에 중국으로부터 나왔다고도 하고, 또는 여주(驪州)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본관은 여흥(驪興) 단본이다. 문헌에는 여흥 외에도 황려(黃驪), 영주(榮州)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황려는 여흥의 옛이름이고, 영주민씨는 여흥 민씨의 지파로서 근세에 와서 여흥으로 통합되었다. 시조는 고려 때 상의봉어를 지낸 민칭도(閔稱道)인데 그의 상계는 전해지지 않고, 또 본관을 여흥으로 하게 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민씨는 한말의 세도 가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상 3차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첫 번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 두 번째는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세 번째는 한말 고종 때이다. 민씨는 조선조에서 왕비 4명, 상신 12명, 대제학 3명, 호당 6명,청백리 3명, 공신 7명, 장신 8명, 문과 급제자 249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왕비 4명은 청주 한씨 6명의 다음이고, 상신 12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의 다음으로 제 5위이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는 제 6위이다. 민씨는 시조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중앙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첫 번째 융성기를 맞는다. 그는 명종조에 판이부사, 태자태사 들을 지냈고, 그의 아들 민식(閔湜)은 신종조에 형부상서, 민공규(閔公珪) 역시 진종조에 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지냈다. 식의 증손 민지(閔漬)는 충숙왕조에 수정승으로 여흥군에 봉해졌고, 지의 아들 민상정(閔祥正)은 찬성사를 지냈다. 민종유(閔宗儒)는 공규의 증손으로 찬성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민적은 충혜왕조에 진현관대제학을 지냈다. 적의 아들 민사평(閔思平)은 공민왕 때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등을 지냈고, 아우 민유(閔愉)는 공민왕조에 제학을 지냈다. 이상이 민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은 인물들로서 모두 10촌 안팎의 친족들이다. 조선이 개국되면서 민상정의 손자 민여익(閔汝翼)이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비 문경왕후(文敬王候)의 아버지 민제(民霽)가 좌의정, 그의 아우 민개(閔開)가 대사헌이 되었으며, 개의 아들 민불탐(閔不貪)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민씨 일문은 이때부터 탄탄대로로 내닫는가 했었으나 태종조에 이르러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민무구, 민무질(閔無疾) 형제는 민제의 아들로서 제 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에까지 올랐으나 태종 때 종실의 이간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민무구의 옥사 이후 숙종조에 이르기까지는 별반 두드러진 열력이 없었다. 그 동안 문인공파에서 상정의 5세손 민효증(閔孝曾)이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그의 증손 민몽룡(閔夢龍)이 광해군 때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에 추탈당했다. 문손공파에서 민기(閔箕)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그의 9촌숙인 민순(閔純)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업, 학자로 유명하다. 문순공파의 주축인 입암파의 파조 민제인(閔齊仁)은 예종 때 이른바 <민수사옥(閔粹史獄)>의 장본인인 민수(閔粹)의 손자로 명종 때 소윤일파들이 안명세(安明世)가 기록한 <시정기(市政記)>를 고치려는 것을 제지하다가 공주로 유배되어 죽었다. 숙종조 이후, 두 번째 융성기를 연 삼방파의 파조인 민광훈(閔光勳)은 민수의 6대손이자 민제인의 현손이다. 삼방파는 민광훈의 아들 3형제 시중(蓍重), 정중(鼎重), 유중(維重)의 후손 일문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삼방파는 이름난 노론집으로 숙종조 이후 1대에 걸쳐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인재파의 민시중은 현종조에 문과에 장원하여 숙종 때 대사헌을 지냈고, 그의 아우인 노봉파의 민정중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숙종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또 그의 아우인 여양파의 민유중은 송준길(宋浚吉)의 사위로 그의 딸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이다. 그 중 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도 문과에 장원하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내어 부자 정승이 나왔다. 정중의 아버지 민광훈(閔光勳)도 인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세칭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민유중은 노론의 중진으로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고, 그의 둘째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한말의 민씨 세도는 삼방파 중에서도 여양파를 주축으로 이루어 졌다.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는 남인과 서인 사이의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때 폐위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같은 여흥민씨에서도 삼방파의 민시중, 민정중, 민유중, 민진원은 노론의 영수, 숙종조 좌의정을 지낸 전서공파의 민희(閔熙), 우의정을 지낸 민암은 남인의 영수로서 싸움을 벌였다. 따라서 노론에 속한 삼방파에서만 숙종조 이후 상신이 7명, 묘정 배향 6명, 판서급 32명을 포함해서 정삼품 당상관 이상을 50여 명이나 배출하였다. 여흥민씨의 세 번째 융성기인 한말 세도 정치는 민유중의 5세손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고종비, 즉 명성황후(明成皇候)가 되고, 10년간 집정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하여 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시작되었고, 고종 32년 민비가 시해됨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민씨 세도는 삼방파의 치(致), 호(鎬), 영(泳), 식(植)자 돌림의 4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은 고종의 외조부인 민치구(閔致久)의 손자이고 , 병조·이조 판서를 지낸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민씨의 요인들은 대개가 민비의 책립을 전후하여 문과에 급제, 불과 10년 미만의 단기간에 병조, 이조 판서 등의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여흥민씨의 세도는 을미사변(乙未事變),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등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타격을 받기도 했으나 세도정치의 가장 완벽한 전형을 보여 주었다. 박(朴)씨는 시조(중조)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대략 70본 안팎이다. 그리고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전설이 보인다. 신라이전 원시 부족사회인 기로육촌(欺盧六村)의 촌장들이 하루는 알(연)천(閼川) 언덕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차 양산(陽山) 아래 멀리 나정(蘿井) 수풀사이에 무지개 같은 서기가 뻗히고 용마 한 필이 끓어 절하는 것을 보고, 그 곳에 가보니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포(胞)가 있어 기이하게 여겨 헤쳐보니 그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가 서력 기원전 69년의 일이요. 뒷날 그를 왕으로 삼아 신라를 세우니 그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이야기다.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이 되고 일성왕(逸聖王)의 대에서 크게 갈리는데 그 각파의 분적종을 보면 밀성대군파(密城大君)파, 고양대군(高陽大君)파, 속함대군(速咸大君)파, 죽성대군(竹城大君)파, 사벌대군(沙伐大君)파, 완산대군(完山大君)파, 강남대군(江南大君)파, 월성대군(月城大君)파, 국상공(國相公)파등 이렇게 아홉으로 나뉜다. 중시조 박순(朴純)은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31세손이요,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4세손이다. 그는 고려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 보문각 시어가 되고 좌승선, 남경유수 등을 거쳐 병부상서가 되었다가 1187년(명종17) 조원정(曺元正), 석린(石麟) 등이 모반하여 난을 일으 키자 대장군이 되어 이를 평정하고 공신이 되었다. 그 후 정당문학, 중서시랑 평장사에 오르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만년에 강릉으로 낙향해서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고려조에서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순의 현손박지계(朴之桂)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부시랑, 서운관 부정을 거쳐 예문관 저핵과 참지정사를 지냈다.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 홍륜(洪倫) 등에게 살해당한 후 9년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정몽주(鄭夢周)의 천거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은거했다. 조선 정조조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충경군에 봉해졌다. 강릉박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그 중 박중신(朴中信)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강릉부사를 지냈으며 박시형(朴始亨)과 박시문(朴始文)은 중신의 아들로 각각 세조와 성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형은 1459년(세조5) 발영시에 급제,사헌부 장령,호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박사, 교리, 동부승지, 안동부사등을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호조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시문은 강릉도호부사를 지냈다. 박공달(朴公達)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고, 그의 종질 박수량(朴遂良)은 단상법이 엄하던 연산군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효자 정문이 세워지고 유일로 천거되어 용궁현감, 사섬시 주부 등을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경주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영해(寧海), 면천(沔川), 강릉(江陵)등 박씨와 함께 상고세계에서 분적한 파사왕 계통이다. 따라서 경명왕의 여덟째 왕자인 언의(彦儀)가 월성대군에 봉해져서 월성으로 관적한 월성박씨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 경주박씨는 파사왕의 25대손이요. 영해박씨의 시조 박제상(朴堤上)의 21대손인 박도덕(朴度德)을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1033년(덕종 2) 문과에 급제, 합문지후가 되고 1036년(정종2) 한림학사, 정당문학·검교태부 등을 역임했다. 1044년(정종 10) 이부상서, 문하시중, 참지정사가 되고 1054년(문종 8)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 그는 나라에 이바지한 충성과 공훈도 컸으려니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죽으매 왕이 조제를 내리고 정문을 세우게 했으며 특히 문효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경주박씨는 고려조의 명문으로서 관적지는 경주이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옮겨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영화와 번영을 누려오다가 중조 도덕의 11대손 앙(1451년, 문종2 문과에 급제)이 단종조에 홍문관 저작으로 있을 때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수양산에 은둔하였다. 만년에 함안군 서부 광평리 백이산에 은거하면서 「동로( 김시습)와 함께 어느 해에 수양산에 있었던고? 꿋꿋한 충성,곧은 절개는 가을 서리보다 늠름했도다. 백이산 무성한 고사리 지금 누가 같이 캘꼬? 고마정 아래 시내에서 나 혼자 슬퍼하노라」라고 시를 지었다. 그는 복지한 후 유덕자와 학자들이 대를 이어 군내의 파벌이 되었으므로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명동 풍계산에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 도덕의 증손 황(璜)과 소부자를 들 수 있다. 자는 한향(漢鄕).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공 황은 1126년(인종 4) 문과에 등과하여 이부시랑, 간의 대부,중서시랑 등을 역임했다. 1135년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들어 갔는데 금나라 임금이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도를 돌보지 않으므로 짐이 폐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하고 묻자 그는 「임금 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신은 비록 죽을지언정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화를 내어 「네가 속국의 신하로서 천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하고 형벌을 가했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금나라도 그의 충성에 감동하여 시신을 고국으로 보냈는데 왕이 분개하고 추모 하면서「 박황은 살아서는 된서리를 맞아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졌고 죽어서는 해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박제상이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에 흘러 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비단 일백 단과 쌀 이천 섬을 부조하였으며, 예관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왕례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또 정려를 세우게 했으며 개부의 동삼사사 문하시중에 추증하고 문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소는 1341년(인종 19)등과하여 예문관 수찬이 되고 감찰어사에 옮긴 후 한림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후 이부시랑에 승진되었다. 의종 때 대장군 박지순(朴之順), 병마사 김영석(金永錫) 등과 함께 강서의 도적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정당문학 겸 간관이 되었다. 그 때 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이 무고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성재대관 14인과 함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북을 울린 후 물러났다. 문하평장사에 추증되고 월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절효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1세조 앙의 5대손 제현(齊賢), 제인(齊仁) 형제가 빛난다. 송암 박제현은 재주가 뛰어나서 책을 읽으면 곧 외웠고 문자도 잘 지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20일동안이나 회생을 시켰다. 황암 박제인 역시 조식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학문과 덕을 닦는데 힘을 쓰자 정탁(鄭琢)이 「박제인은 남에게 알려 지지 않은 덕행을 지닌 군자다」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태릉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 송라도 찰방이 되고 1601년 사임했다. 이듬해 시직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왕자사부로 부름을 받아 왕이 「왕자를 가르치는 데는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먼저 대학을 가르쳐야 하는데 소주까지 겸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왕은 왕자를 돌아보고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힘써 배우라」고 하였다. 1605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이어 군위현감으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제용감 판관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세조 앙의 아우 근무 역시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자 형과 함께 남하하여 진도로 들어가 그 후손이 진도에서 대성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대동보를 수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중시조 박언성(朴彦成)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둘째 아들로 고양대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사인공파 파조 박섬(朴暹), 부창정공파 파조 박환(朴還), 주부공파 파조 박련(朴連) 등 3파로 나뉘어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령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56명, 상신 1명, 청백리 4명, 호당 1명, 공신 1명을 배출하여 벼슬 열력으로는 밀양박씨, 반남박씨, 죽산박씨에 버금간다. 3파 중에서도 사인공파와 부창정공파가 인물을 많이 냈는데, 부창정공파는 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성세를 보인 반면 사인공파는 조선 후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사인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은(朴誾), 박장원(朴長遠), 박양한(朴亮漢), 박문수(朴文秀) 등을 들 수 있다. 읍취헌(相翠軒) 박은(자는 중설(仲說), 호는 읍취헌(相翠軒))은 박담손(朴聃孫)의 아들로 한시로 조선 5백년에 걸쳐 으뜸가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5세에 이미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연산군 1년(14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 18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98년 사가독서를 했다. 승문원에 발탁되어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고, 호당을 거쳐 경연관으로 5년간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여 연산군이나 대신들로부터 경원되었다. 당시의 권신인 류자광(柳子光), 이극균(李克均) 등을 규탄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파직당했다. 이 때부터 산수를 주유하면서 문주로써 소일, 독서에 열중하여 많은 책을 일었고, 1504년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나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당했다. 1506년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읍취헌유고(相翠軒遺稿)>가 있다. 문효공(文孝公) 박장원은 현종 때 서인의 중진으로서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인 매옹(梅翁)박양한은 숙종~영조대의 학자로 고산현감을 지냈다. 그의 저서 <매옹한록(梅翁閑錄)>은 인조대부터 숙종대까지의 시사를 엮은 것으로 귀중한 사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충헌공(忠憲公) 박문수(자는 성보(成甫), 시호는 충헌(忠憲))는 문효공 박장원의 증손이며, 박긍한의 아들이다. 그는 1723년(경종 3년)때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1724년(영조 1)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직되었다. 뒤에 소론이 집권하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를 뿌리뽑아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착되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호서어사로서 기민을 구제,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1737년 병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경상도 곡식 1만 석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다음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 지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손사부 등을 역임,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의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됐으나 다음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으며, 암행어사 시절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고령박씨가 낸 유일한 상신인 문익공(文翼公) 박영원(朴永元)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 철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도 사인공파에 속한다. 부창정공파의 박광순(朴光純)은 고려 말엽에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박광우(朴光佑)는 문하시중을 지냈다. 박우생(朴雨生) 역시 문하시중을 지냈고, 박임종(朴林宗)은 우왕조에 여러 차례 왜구를 방어하고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박임종의 아들 무숙공(武肅公) 박만(朴蔓)이 건국 초 야인의 침입이 잦자 도원수로 출정, 이를 격퇴시켰으며 정종조 제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예조판서로 이에 동조하지 않은 탓으로 유배되었다. 박처륜(朴處綸)은 성종 때 등과,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대사간·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준(朴永俊) 역시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충숙공(忠肅公) 박난영(朴蘭英)은 선조 때 면천군수와 중군 등을 거쳐 1619년(광해군11) 강홍립을 따라 후금국 정벌에 나가 포로가 되었다가 8년만인 1627년(인조5)에 풀려나 귀국하여, 조선을 괴롭히는 후금에 회답관, 선유사, 선위사, 추신사, 춘신사 등으로 수차 왕래하면서 회유에 힘썼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장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등과 청영에서 청군이 화친 조건으로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자 왕족인 능봉군을 왕자로, 형조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가장시킨 것이 탄로되어 청나라 장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암(鶴巖) 박정번은 선조대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의 유현들과 깊이 사귀었다. 삼오당(三吾堂) 박만중(朴萬重)은 인조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숙종조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폐위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리학을 연구하여 제식을 작정했다. 근대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있다. 한국의 5대 대통령으로 박숙동의 후손이며, 박성빈의 아들로 1961년 육군소장으로 5·16군사 혁명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1962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해 10월 5대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그 후 6, 7, 8, 9대까지 역임했다. 재임중 2,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과 조국 근대화에 몰두 하였으며,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여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중화학공업 육성, 자주국방등을 주창하는 등 우리나라 조국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장기집권 및 군사독재자라는 말도 듣고 있다. 74년 8월15일 광복절에 육영수여사를 문세광의 총탄에 잃고, 그도 79년 10월 26일 그렇게 믿었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지도자도(指導者道)> <민족 중흥의 길> 등이 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제 4자인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조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몽고군은 구주를 버리고 개경을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구주를 공격하자 이를 다시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뒤에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철성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죽산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그 후 6백여 년을 고성에 관적해 오다가 1839년(현종5)예조의 승인을 얻어 죽산(竹山)으로 복관, 현재는 죽산박씨의 한 분파를 이루고 있다. 경렬공(敬烈公) 박보로는 1375년 고려 우왕 1년에 밀직부사로 서해도 부원수겸 도체찰사가 되어 여러 번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우고, 서북면 원수 겸 도순문사로 승진했다. 뒤에 상원수가 되어 풍주(豊州)에 침입한 왜구와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서해도 조전원수가 되고, 1378년(우왕 4) 문하평리로서 안주 상운수 겸 서북변 도체찰사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세조 때 박식(朴埴)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2등으로 철성군에 봉해졌다. 중조 박명훈(朴明勳)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할 뿐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전서를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게 된 유래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상들이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광주를 본관으로 삼은 듯 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후손이 경기도 옹진군 흥미면 식여리에 47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광주에서 언제 옹진(甕津)으로 옮겼는지도 알 수 없다. 중조 박천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9세손인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언침(彦沈) 의 15세손이다. 그는 우왕조에 형 박위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워 구산군에 봉해지고 의흥현(義興縣)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구산(龜山)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의 흥면 수북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산 아래 중조가 살던터에 무검단을 모으고 무검재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단과 재실의 명칭을 무검이라 하게 된 연유는 원래 그곳의 지명이 무검동 이었으나 중조가 생전에 검소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았고, 또 그곳 사람들이 중조의 위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무검의 두 글자를 인용해서 무검동으로 고쳐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의를 지낸 겸산재(兼山齋) 박간(朴艮), 공조판서를 지낸 박진(朴震)등이 있다. 또 선조 때 한성부 판관을 지낸 회보(晦甫) 박경장(朴景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화왕산성 수비에 공을 세웠다. 중조 박헌(朴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2세손인 하신(河信)의 아들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셋째 아들인 속함대군 언신(彦信)의 15세손이다. 그는 고려 우왕조에 문과에 급제, 도사를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공조전서에 올랐다. 본관은 원래 함양(咸陽)이었으나 그의 원종공신 녹권에 본관이 군위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함양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군위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699년(숙종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낸 박희안과 1719년(숙종45) 별시문과에 병과롤 급제하여 정랑을 지낸 희안의 아들 태휘(泰彙), 그리고 희안의 손자로 1783년(정조7) 식년 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을 지낸 현보(顯輔) 등이 있다. 중조 박병묵(朴炳默)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 이 본관을 나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범박씨세보(汎朴氏世譜)>에 의하면 조선조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좌정승에 추증된 박취생(朴就生)을 중조로 하는 다른 계통의 나주박씨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 역시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이 집안의 중요 인물로는 중조 병묵의 아들로 고려말에 호군을 지낸 박덕영(朴德瑛)과 덕영의 아들로 조선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박도가 있다. 또 호조정랑을 지낸 박선문(朴瑄文)과 사복정(司僕正)을 지낸 선문의 아들 제창(齊唱)도 이 집안을 빛낸 인물이다. 중조 박연(朴延)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사헌부감찰을 지냈다고 한다. 노성(魯城)은 지금의 논산군의 일부로 이를 본관으로 하게된 연유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중조 이후 노성에서 세거했기 때문에 이를 본관으로 삼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충남(朴忠男)과 경남(慶南)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선조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평안남도 성천군 능중면 덕연리와 삼덕면 삼덕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조 박득의(朴得宜)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24세손으로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21세손이다. 그는 고려 태조 때 대승을 지내고 혜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혜성이 뒤에 면천(沔川)으로 개칭되고, 또 그 의 아들 박술희(朴述熙)가 면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면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술희의 아들 정원(精元)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신기도령을 지낸 주를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엄의공(嚴毅公) 박술희는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었다가 후 에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광에 올랐다. 936년(태조19) 후백제를 칠 때 보기1만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왕의 임종시에 군국대사를 부탁받고,훈요 10조를 전수받았다.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 데 공이 컸고, 뒤에 혜종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자 신변 보호를 위해 백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 리고 다니다가 새로 즉위한 정종으로부터 다른 뜻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된 후 왕명을 사칭한 왕규에 의해 살해 당한다. 태사삼중대광에 추증되었으며, 묘정에 배향되었다. 해은(海隱) 박심(朴諶)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고려 말 공조전서 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배를 타고 해주의 입암촌으로 들어가 불사 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여 살게 되었다. 박삼길(朴三吉)은 박효순의 아들로 학문에 열중, 제자백가에 통달했고, 1474년(성종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 등을 거쳐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다. 연산군 때 병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연산군조에 난정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력, 기로개 선생이라 일컫어졌다. 문온공(文溫公) 박여룡(朴汝龍)은 부호군 김수의(金守義)의 아들로서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율곡의 유집을 간행했다. 1573년(선조6) 중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81년(선조14)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사옹원 직장에서 평양현감, 호조좌랑, 평시서령을 거쳐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1830년(순조30) 이조참판 겸 좨주찬선에, 1835년(헌종 즉위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해주의 방현서원에 제향되었다. 중조 박진승(朴進昇)은 시조왕 혁거세의 38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이 국자좨주에 이르고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주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무안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어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에 경기묘를 세워 중조 이하 15위의 제향을 드리고 있다. 무안박씨는 고려 초 무안 지방의 토호로서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21명,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 21명은 박씨 중에서 본관별로 일곱 번째 가는 숫자이다. 고려조에서는 중조의 아들 박섬(朴暹)이 현종 때 상서우복야를 지내고 문종 때 명신으로 각상에 도형 되었다. 또 그의 증손 박승중(朴昇中)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상안부 녹사를 거쳐 중서주서가 되었다. 예종 때 한림시독학사를 지내고, 이재(李載), 박경작(朴景綽) 등과 함께 예식을 정하고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찬진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사에 오르고 참지정사를 거쳐 수태위, 증서시랑 평장사에 올랐으나 이자겸(李資謙)이 죽자 그 일파로 몰려 곧 유배당했다. 조선조에서는 풍정(楓亭) 박의룡(朴義龍)이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훈으로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의암(義庵) 박익경은 성삼문(成三問)의 사위로 장인인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등과 도의로 사귀다가 1456년 그들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자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묻어 주고 무안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세조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병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효행이 출증하고 경학에 뛰어나 단종조에 효행으로 정릉 참봉을 제수받았다.그의 아들 박호(朴壕)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판서를 지냈다.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은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 경주 탈환전에서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사용, 적을 대파한 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승진되었다. 그의 동생 박홍장(朴弘長)은 임진왜란 때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순천부사에 올랐다. 박대근(朴大根)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정을 정찰한 공으로 서부 참봉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특진되었고, 능을 범한적을 색출했으며, 사신을 따라 여러 차례 대마도를 왕래했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박상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으로 무령군에 봉해지고 6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조선중기의 시인 여락당(余樂堂) 박창하(朴昌夏)는 고율시 5,6백 편을 남겼고, 그의 아들 박징(朴澄)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구한말 의병장 박윤식(朴潤植)은 궁내부 팔궁관으로 재직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그는 총지휘 겸 운영대장이 되어 활약중 홍천 전투에서 적에게 피체, 경성 평리원에 수감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암살단과 결사대를 조직,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박두성(朴斗星)은 서울맹아학교의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취임한 이래 한평생 맹아 교육에 헌신하였다. 1920년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성, 점자로 번역한 도서가 성경을 비롯하여 76종에 이른다. 중조 박의중(朴宜中)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6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6 세손인 인기(仁杞)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사예를 지내고 우왕 때 대사성, 밀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388년(우왕14) 사신 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에 오르고 문의군에 봉해졌다. 또 공양왕 때 서운관에서 한양 천도를 상소하자 음양설의 허황함을 역설하여 이를 반대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 뒤에 검교참찬 의정부사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박연(朴衍)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제학을 지내고 정사공신으로문의군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들 박행(朴行) 역시 문의백에 봉해져서 문의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박씨에서 분적, 박의중(朴宜中)을 중조로 하고 본관을 문의로 하였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녕(朴寧)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72현의 한 사람이 되어 충절을 지켰다. 조선조에서는 박윤성(朴允成)이 조선 초에 평리전서를 지냈고, 박문덕(朴文德)이 홍문관 대 제학을, 박귀덕(朴貴德)이 부제학을 지냈다. 박윤경(朴潤卿)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조광조(趙光祖)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1513년(중종8) 식년문과에 을 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고,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을 지낸 뒤 낙향하여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성순(朴性淳)은 174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이외에 임진왜란 때 해서(海西)에서 창의하여 절묘한 지략으로 왜적 6백여명을 수양산지성산성으로 유인, 지성 폭포에 모두 추락케 하여 수장시킨 박현민(朴顯民), 선조조에 훈련원 판관 겸 주부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박린(朴璘), 임진왜란 때 낙안 군수로 조령(鳥嶺)에서 전사한 박인정(朴仁定), 그리고 많은 적함을 불질러 침몰시키고 녹도 앞바다에서 순절한 박란(朴蘭) 등이 유명하다. 근세 인물로는 1907년 정미7조약(丁米七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해주 신천 등지에서 여러차례 왜병을 격파하는 등 많은 활약 을 하다가 문화의 구월산에서 전사한 박기로(朴基魯), 3 1운동 때 해주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고, 독립군에게 많은 군자금을 제공한 박기주(朴基周) 등이 있다. 중조 박한보(朴閑甫)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전하 나 문헌이 실전되어 전후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일설에는 인제대군의 후예라 하고, 또 그의 아들 박광(朴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度祖)의 장인으로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문주는 문천 (文川)의 별호인데 어째서 본관을 문주로 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도 상고할 수 없다. 중시조 박언침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로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 (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성(密城) 이 뒤에 밀양(密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라고도 한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중시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12파로는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언부(彦孚)파,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상(彦祥)파, 좌복야공(左僕射公) 언인(彦仁)파,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양언(良彦)파, 판도판각공(版圖板刻公) 천익(天翊)파, 삼사좌윤공 (三司左尹公) 을재(乙材)파, 규정공(糾正公) 현(鉉)파,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원(元)파, 밀성군(密城君) 척(陟)파,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中美)파, 영동정공(令同正公) 원광(元光)파, 정국공 (靖國公) 위파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 밀양박씨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사문진사공파 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문형 1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특히 문과 급제자 261명은 우리나라 전체 씨족중에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광산김씨에 다음가는 숫자인데 비해 상신과 문형이 적었다는 것은 밀양박씨가 조선조의 정치 권력 구조에 깊이 찹여하지 못했음을 뜻하며, 그 원인은 밀양박씨와 왕실 권려고가의 상관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규정공파의 중추적인 인물로는 나산경수 박강생(朴剛生)과 그의 아들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을 들 수 있다. 박강생은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현손으로 고려 말에 집현전 제학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태종∼세종대에 수원부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충정공(忠貞公) 박심문은 박강생의 아들로 절신으로 유명하다. 1436년(세종18) 친시문과에 급제, 기주관, 평안도 판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자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1456년(세조2) 질정광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성삼문 등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음독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은 심문의 중형 절문의 아들로 계유정난에 가담, 정난공신 2등으로 밀산군에 봉해지고 세조 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니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은 중손의 아들로 단종 때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내고 중종 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3 등 으로 밀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박조의 아들로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 교리, 영월군수 등을 지내고, 1546년(명종 1) 성천부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 후 사가독서를 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성, 우부승지를 역임한 후 명종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선조조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 후 동부승지, 대사성, 양관대제학,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문장공(文莊公) 박계현(朴啓賢)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충정공(忠靖公) 박숭원(朴崇元)은 충원의 종제로 도승지,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죽은 뒤 호성공신에 추록되고 밀천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무렵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흉모를 꾸미자 그는 이를 적극 말리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등 폭정에는 휘말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는 아들 자흥(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며느리로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권세를 누렸음을 자책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이 외에도 중종대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문목공(文穆公) 박영(朴英),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돈령록(敦寧錄)>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 등이 유명하다. 사문진사공파에서는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이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 검교 참찬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다. 의중의 손자 평간공(平簡公) 박거겸(朴居謙)은 무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명궁이었다. 그는 도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성종 때 좌리공신으로 밀산군에 봉해졌다. 이정공(夷靖公) 박열(朴說)은 중종 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박종남(朴宗南)은 무신으로 선조 때 호적(胡賊)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의 주사 조방장이 되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은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막다가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던 중 포로가 되어 참살을 당한 절신이다. 좌복야공파의 인물로는 문헌공(文獻公) 박연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박천석의 아들로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 지평, 문학 등을 역임하고,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편경 12매를 제작하는 등 궁전 음악의 미비점을 대폭 변경,수정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 등을 역임,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명음악가로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운다.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악기를 개량하는 등 민족 음악 발전에 큰 업적을남겼다. 그의 사촌 박흥생(朴興生)은 세종 때 1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7세에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밀성군파에서는 파조 박척(朴陟)이 충선왕 때 흥위위의 무장으로 공이 있어 밀성군에 봉해 졌다. 그의 7세손 박척(朴瘠)은 정종의 부마가 되어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청숙공(淸肅公) 박신규(朴信圭)는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충간공(忠簡公) 박이서는 척의 11세손으로 선조 말에 이이첨(李爾瞻)을 논핵하다 파직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나오자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한 후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으로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7세손인 효정공(孝靖公) 박장복(朴長復)은 순조 때 판서를 지냈고, 문정공(文貞公) 박승휘(朴承輝)는 척의 11세손으로 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했다. 위에서 열거한 각 파의 주요 인물도 인물이지만 밀양박씨는 영조∼정조대에 실학의 대가 박제가(朴齊家)를 배출하여 더욱 유명하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이덕무(李德懋), 류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시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2)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이조원(李調元)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했고,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하고 오위장을 거쳐 그 후 영평현감을 지냈다. 반남박씨의 세계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潘南縣) 호장을 지낸 박응주 (朴應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계보와 분적의 연원을 밝히지 못한 다. 그래서 반남박씨는 그를 시조라 하지 않고 선조로, 박혁거세를 도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조의 발상지와 세거지가 반남이므로 이를 본관으로 하였다. 선조 박응주의 묘소는 나주군 반남면 흥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반남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5명, 왕비 2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호당 5명, 청백리 1명, 공신 6명, 장신 3명에 문묘에 배향된 분도 1명이 있어 모든 박씨 중에서 벼슬 열력이 가장 화려하다. 반남박씨가 이토록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이 고려 말에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이 조선조에 들어와서 반남박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문정공 박상충(자는 성부(誠夫), 시호는 문정(文正))은 공문왕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다. 당시 예의사에서 관장하는 향사의 의식이 일정하지 못하므로 그가 고서를 참고, 사전(祀典)을 작성했다. 우왕 초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했는데 김의의 종자가 돌아오자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 등친원파가 대우를 극진히 하므로 그가 「김의가 명사를 죽인 죄는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인데 재상이 그 종자를 후대한 것은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에 화가 미칠 것이다」고 상소하여 안사기를 처형케 했다. 이인임등이 백관과 연서하여 북원의 중서성에 글을 보내려 하자 그는 선왕이 이미 명을 섬기기로 하였는데 다시 북원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서명을 거절했다. 판전교시사로 있을 때 북원의 사신이 오자 또 상소, 원을 섬김이 불가하다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게 했다.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친원파의 죄를 다스리라고 상소하다 도리어 연루, 장류 도중죽었다. 경사와 역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예도에 밝았다. 그의 아들인 평도공 박은은 고려 말에 개성부 소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두차례의 왕자 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르고 태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박규(朴葵), 박강(朴薑), 박훤(朴萱)은 박은의 아들 로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박규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문정공(文貞公) 박응남은 명종조에 참의를 지냈으며 박응인은 도정을 지냈다. 이들 5형제 중에서도 맏이 응천, 넷째 응복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은 응천의 아들로 선조조에 보덕을 지냈고, 동생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 은 인조조에 좌참찬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은 동선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에 오르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박태보(朴泰輔)는 세당의 아들로 백부 세후에게 입양 됐다. 그는 숙종 때 호당을 거쳐 암행어사 등을 지내고 기사환국(己巳 換局)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죽었다. 문정공(文 貞公) 박종훈(朴宗薰)은 태보의 5대손으로 헌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순조의 행장을 지었다. 한말에 개화파 인사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핵심이었던 문익공(文翼公) 박정양(朴定陽)도 응천의 후손이다. 그는 한말 총리대신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판관 박제근의 아들로 1866년(고종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참파 등 을 걸쳐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일,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 와 이용사 당상 경리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참판, 협판교섭통상사무, 도승지, 협판내무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887년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도미, 미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 했다. 1889년 귀국한 후 호조판서, 교정청 당상, 한성부 판윤등을 거쳐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가그이 학부대신이 되고, 이어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1)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이 살해되고,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참정대신이 되었다. 한편 박응복의 가계에서는 그의 아들 박동열(朴東說)이 1608년(광해군1) 충주목사, 대사성에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을 깎아 버렸다. 그러자 이에 대로한 광해군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 실패, 조정에 있기를 꺼려 나주목사로 나갔다. 충익공(忠翼公) 박동량(朴東亮)은 그는 대사헌 박응복의 아들이자 동열의 아우로 1590년(선조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검염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에 호종하고,승지에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이어 동지증추부사·도승지를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봉해지고 형조판서를 지낸 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하여 금양군에 봉해졌고, 미의 동생 박의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로 인조조에 호당에 뽑히고 홍문관의 수찬,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종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박의의 아들로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충희공(忠僖公) 박명원(朴明源)은 박미의 5대손으로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결혼, 금성위가 되었다. 글씨를 곱게 써서 나라의 애경사 때 여러번 금옥보책명정서관에 임명되었고, 죽은 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실학파 학자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실학자이며,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지돈령부사 박필균의 손자이며 박사유의 아들이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1780년(정조4)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을 거쳐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에 승진했다가 1801년 (순조1)사직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당시 홍대용.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그가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고루한 양반을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정경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허생전(許生傳)> <과농소초(課農小抄)>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는 박지원의 손자이며, 박종채의 아들로서 1848년(현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좌랑 등을 거쳐 1864년(고종 1) 병조참판,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873년 우의정에 올라 사임, 다음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이에 호응,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으며,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헌공(忠憲公) 박종악(朴宗岳)은 박미 의 6대손으로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한말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이자 철종의 부마인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도 미의 후손 이다. 그는 한말 궁내부대신을 지냈으며,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1882년 수신사로 도일,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했다. 일본의 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정치적 개혁을 기도했으나 수구파들의 정권장악으로 실패, 이어 한성부 판윤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일만에 실패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 1894년 갑오경장으로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그 후 반역음모 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에 임명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 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은 세조조에 좌익공신 3등으로 금천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박용(朴墉)은 딸이 세자빈 (인종의 비인 인현왕후)에 책봉됨으로 해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의 아들 공순공(恭順公) 박숭질(朴崇質)은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올랐 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후일 중종반정 때 일문이 무사하게 되 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조 박우(朴瑀)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 (朴堤上)의 동생 지상(地上)의 25세손이며, 고려조에 상서를 지낸 영주 (英柱)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벽상공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병산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병산사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병산이 비안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비안으로 하였다. 비안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7명을 배출했다. 중조 박우의 9대 손 박서생(朴瑞生)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판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수차의 사용을 건의하여 관개에 혁신을 가져와 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서생의 손자 박효원(朴孝 元)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사간을 지냈다. 박대인(朴大仁)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박준(朴峻)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선조조에 참봉, 현감 등을 지냈고, 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징빈(朴徵賓)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령을 지냈고, 그의 아들 박수유(朴垂裕)는 영조 때 문과에 급제, 현감을 지냈다. 또 박징좌(朴徵佐)도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을 지냈다. 중조 박자문(朴自文)은 신라 제2대 남해왕의 둘째아들로 사수군주에 봉해진 환(桓)의 46세손이며, 고려 충렬왕조에 공부상서, 첨의평리 등 을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진 인겸(仁謙)의 손자이다. 그도 역시 고려 공민왕조에 공부상서를 지내고 사주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사주(泗州) 가 뒤에 사천(泗川)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사천으로 관적하였다. 사천 박씨는 관적지를 떠나 주로 함경남도 일대에서 살아왔는데 그 까닭은 중조 박자문이 고려 말에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함경남도 안변에 은거 했다가 뒤에 영흥으로 들어가 살았고 또 그의 10세손 용계(龍桂)가 함흥으로 가서 세거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인 박창조(朴昌朝)는 1783년(정조7) 식년 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 직강, 사예 등을 거쳐 연서도 찰방을 지냈다. 중조 박원경(朴元鏡)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9세손인 박제상(朴堤上)의 동생 지상(池上)의 3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삼척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삼척(三陟)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신단비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삼척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박여량 (朴汝樑)은 1600년(선조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 사간 등을 지냈고 박홍규(朴鴻逵)는 1733년(영조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중조 박언창(朴彦昌)은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자 신라 제54 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917년(경명왕1) 사벌대군에 봉함을 받아 사벌방어장으로 외적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와 후백제 의 침략을 받아 영토가 낙동강 동쪽으로 축소됨에 따라 사벌주가 고립 되자 그는 사벌주를 사벌국이라 하고 왕으로 자립, 통치하다가 11년 만에 후백제에게 패해 망했다. 이 사실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이언적 (李彦迪)이 사벌국사를 저술, 비장했던 것을 후손 박세준(朴世俊)이 발췌, 유전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덕천창 부사를 지낸 견을 1세조로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사벌국이 고려 초에 상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상산이라 하였다. 상산박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2명, 호당 1명, 공신 2명을 배출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臣)이 있다. 그는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408년(태종8) 사간원 좌정언이 되고,1424년(세종6) 회례사가 되어 불경을 가지고 일본에 다년온 뒤,우사간에 이어 병조, 예조, 형조, 공조, 이조참판, 대사헌,황해도를 비롯해 각 도의 관찰사,형조판서, 우참찬, 공조판서 등을 지냈고 치사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조 이조판서에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다. 그의아들 박이창(朴以昌)은 문종조에 참판, 관찰사 등을 지내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갈 때 원로에 대비, 양미를 많이 가지고 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자 국법을 어기어 면목 이 없다 하고 자결했다. 문강공(文剛公) 박세희(朴世熹)는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뽑히고 기묘사화 때 좌승지로 있다가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아우 박세후(朴世煦) 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박충간(朴忠侃)은 세후의 아들로 음보로 여러 청환직을 거쳐 1589년(선조22) 재령군수로 재직중 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알려 평난공신 1등으로 상산군에 봉해졌다. 뒤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선곡(選曲) 박건중(朴建中) 은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경전의 주소와 제가의 예설을 증보하여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를 편찬하였다. 중조 박선민(朴善敏)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1세손 이다. 그는 목사를 지내고 관적을 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선산박씨는 주로 함경남, 북도에 본거를 두고 있는 성씨인데, 그 까닭은 중조 선민의 증손 박숭이 조선 초에 부원군의 신분으로 함경 북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당했고, 그의 아들 박임창(朴林昌)이 수군 절도사를 지내고 함경북도 길주로 들어가 세거했으며 임창의 아들 박장(朴章), 박원후(朴元厚), 박근손(朴根孫) 3형제 중 원후의 아들 박술량(朴述良)이 그의 숙부인 우후 박근손과 함께 함경남도 단천(端 川)으로 이사하여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순창박씨는 전주박씨에서 분적한 씨족이라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통을 상고할 수 없다. 중조는 훈련원첨정을 지낸 박두간(朴斗 幹)으로 그의 선대 중 박제세(朴濟世)가 고려조에서 순창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세 와 두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세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계대가 가능 한 박두간을 중조로 하게 된 것이다. 중조의 묘소는 개성(開城)의 용흥동(龍興洞) 부소산(扶蘇山)에 있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거제 부사를 지낸 박창식(朴昌植)과 군수를 지낸 박우현(朴宇鉉)이 있다. 유일한 문과 급제자 박문규(朴文逵)는 1887년(철종24)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순천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일곱째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아들 영규(英規)를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 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 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 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명문의 기반을 굳혔고,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35명, 상신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8명을 배출했다. 1세조 숙정의 손자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가흥(朴可興)은 고려말에 좌정승을 지내고 가흥의 동생 박가실(朴可實)은 판계림부윤, 박가권(朴 可權)은 판개성부윤를 지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석명(朴錫命),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박중선(朴仲善), 박원종(朴元宗)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숙공 (文肅公) 박석명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때 우부대언, 병조판서를 역임하고,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때 은거했다가 1399년(정종1) 좌산기상시에 등용된 뒤 안주목사, 도승지를 거쳐 1401년 태종을 옹립한 공으로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지고 뒤에 지신사를 거쳐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은 이조판서 박중림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정(忠正),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를 거쳐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1456년(세조2) 형조참판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기, 류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사형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과천의 민절서원, 흥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중선(朴仲善)은 조선 판돈영부사. 자는 자숙(子淑). 시호는 양소(襄昭). 지돈령 박거소의 아들이다. 음보로 선전관 등을 거쳐 1460년(세조6) 무과에 장원하고, 훈련원 부사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 판군기감사, 지병조사,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로장군으로서 난을 진압, 적개공신 1등으로 평양군에 봉해진뒤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이 되고, 숭정대부에 승진했으며 1471년(성종2) 좌리공신 3등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곤찰사를 거쳐 판돈령 부사에 이르렀다. 박원종(朴元宗)은 시호가 무열(武烈)이며, 박중선의 아들이다. 음보로 기용된 뒤 선전관으로서 무과 급제한 후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 공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연산군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공신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고, 그 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으며, 평성부원군에 개봉되었다. 중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박성명의 손자인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 적개공신에 오르고 예종조에 남이(南怡) 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고 판돈령 부사를 지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은 목사 안생의 아들이며 팽년의 아버지이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히고 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러댜 사형 당했다. 문하에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배출되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고 호당에 뽑혔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 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 등 일문이 참화를 입었다. 이 때 같이 화를 당한 사육신은 모두 멸문 의 화를 입어 정통 후손이 없게 되었으나 그의 둘째며느리(순(珣)의 부인)가 아들을 낳아 같은 무렵에 낳은 여종의 딸과 서로 바꾸어 키워서 생명을 보전, 오직 그만이 정통 후손을 이어왔다. 무열공(武烈 公) 박원종은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 중종반정에 주동적 역할을하여 정국공신 1 등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 등에 오르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과 함께 역사상 단 두 사람뿐이다. 같은 무렵에 박이검(朴而儉), 박이온(朴而溫) 역시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각기 순성군과 승평군에 봉해졌다. 이 외에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서 순절했고.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는 창의사가 되어 호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 춘무의 아들 충경공(忠景公) 박동명(朴東命)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고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던 중 무계(茂溪)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전사했다. 숙종 때의 학자 문숙공(文肅公) 박광일(朴光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으로 왕자사부, 시강원 자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 했다. 박기정(朴基正)은 팽년의 후손으로 정조조에 승지·참판 등을 지내고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했다. 시조 박명달(朴命達)은 방적도위를 지낸 인물이라고 전해오지만 문헌 이 없어 그 세계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安東) 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안동박씨에서는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노계(盧 溪) 박인로(朴仁老)를 낳았다. 그는 승의부위를 지낸 석(碩)의 아들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난 인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시명을 떨친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의 막하로 종군, 공을 세우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하자 군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태평사>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수문장 선전관을 지낸 후 조라포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 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1630년(인조 8) 노인직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도학과 조국애,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 전쟁중에도 서정과 조국애가 넘치 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웅장한 시풍을 이룩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켰고, 시조 60여 수가 전한다. 영천의 도계향사에 제향되었다. 중조 박지석(朴之碩)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이요, 밀양박씨 시조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20세손으로 고려조에 중훈대부 사재감 부정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환(奐)이 고려조에서 중랑장을 지낸 후 여주(驪州)에서 함흥(咸興)으로 이주하였고, 또 환의 종손 서창(徐昌)이 함길도 관찰사를 지낸 뒤 함경북도에 정착 했으며 지석의 아들 성장(聖章)은 조선 초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이원(利原)에 유배되어 3년만에 풀려나 경성(鏡城)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경북도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되었으며 본관은 조상의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여주로 하였다. 이 밖에 같은 계통이면서 상계를 가리지 못해 사헌부 지평 공조정랑 등을 지내고 1451년(문종 1) 호조참의에 오른 박윤검(朴潤儉)을 1세조로 하는 파도 있다.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9세손이요,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좌정승을 지내고 영암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통(博通) 역시 고려 명종조에 공이 있어 영암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암(靈巖)으로 하게 되었다. 영암박씨는 고려조에서 대대로 영화를 누렸으나 고려 말에 박성좌(朴成佐)가 절의를 지키고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체 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조에서는 통의 아들 박광(朴光)이 시중을 지냈고, 광의 손자 박기 (朴璣)가 충숙왕 때 이부상서를 지냈다. 기의 증손 박성좌는 이색(李穡)의 생질로 외숙에게서 수업하고 고려 말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와 죽마고우로 고려조에서 같이 국사를 논의하던 처지 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종적을 감추고 태조가 승상의 자리 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끝내 거절했다. 박세보(朴世甫)는 성좌의 증손 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제조에 이르렀으나 연산군 때 정치 가 문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경원(朴慶元)은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중조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그의 26세손 박명천(朴命天)이 고려조에 전법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지고 예원이 영해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영해(寧 海)로 하였다. 박제상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내물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실성왕은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일본 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수교를 하였다. 그 후 내물왕의 제일 왕자 눌지(訥祗)가 실성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볼모로 이국에 가 있는 왕제들을 그리워하며 근심하자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을 쩜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 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 으니 그 노래가 유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을 떠나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 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 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 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 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 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기(阿奇) 아경(阿慶)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 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 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 은 <신라 천년에 으뜸하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 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중조 박중화(朴仲華)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상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조에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운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 을 운봉(雲峰)으로 하였다. 중조의 묘소는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조의 증손 박신(朴信)과 그의 아들 박종우(朴從 愚)를 들 수 있다. 혜숙공(惠肅公) 박신은 박지의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85년(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규정을 거쳐 예조 형조의 좌랑을 역임 했다. 조선 초에 봉상시 소경을 거쳐 대사성이 되고, 정종조에 형조 전서가 되었다. 태종 때 개성유후 한성부윤 등을 지내고 대사헌이 되어 언사로써 왕의 비위에 거슬려 귀양갔었으나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후 지의금부사 찬성사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부하 직원이 저지른 부정 사건에 관련되어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3년 만에 풀려났다. 성렬공 (成烈公) 박종우는 태종의 사위로 운성군에 봉해지고, 명나라에 사신 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후 경상좌도 도병마절제사, 삼군장수 등 을 거쳐 호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세종조에 함길도 도 체찰사 등을 지내고 단종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을 도와 정난공신 1등으로 운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조 박윤웅(朴允雄)은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6세손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숙종 때 동여진의 침범을 막았고, 다시 예종 때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과 함께 동여진을 격퇴하고 돌아와서 대장군이 되고 흥려백(興麗伯)에 봉해졌다. 본관은 흥려가 울산 (蔚山)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울산으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박추(朴諏), 박유(朴愈), 조선 조의 박홍(朴泓), 박율, 박응한(朴應漢) 등을 들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11명이다. 여은(汝隱) 박추는 고려 말에 지한주사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유은(柳隱) 박유 역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서 벼슬하고 남평감무로 나갔다 가 고려가 망하자 대흥(大興)으로 은퇴하여 절의를 지켰다. 박홍은 1556년(명종11) 무과에 급제,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평양으로 피난가는 선조를 호종했우며, 성천(成川)에서 우위대장이 되었으나 다음해 전사했다. 오리(梧里) 박율은 효종 때 문과에 급제, 현종 조에 은산현감을 지내고 숙종 때 장령에 이르렀다. 저서에 <주학본원 (籌學本原)>이 전한다. 그의 아들 박두세(朴斗世)는 1682년(숙종8)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목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당시 국가사회의 정책, 제도를 문답식으로 풍자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가 전하며, 《삼운통고보유》를 편찬했다. 김재현(金在顯),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박응한(朴應漢)은 음보 로 경릉령이 되었으며,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중조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대 경명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는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월성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으며, 월성이 경주로 개칭된 연유로 경주박씨라고 한다. 월성 박씨는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조 언의의 13세손 박구(朴龜)는 고려말에 중군사정 부령 등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인천의 장아산에 은거,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 위에 망경대를 세워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그의 아들 박간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 청양현감, 단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성종조에 이조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간의 아들 박휘지(朴徽之)는 장례원 판결사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신겸(信謙) 호겸(好謙) 종겸(宗謙) 아들 3형제 를 두었는데, 둘째 호겸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관포(灌圃) 박홍미(朴泓美)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인조조에 창원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의복을 하사받았으며 지방관 중에서 치적 이 제일이라 하여 경주부윤에 올랐다. 그의 아들 박대익(朴大益)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다. 흥미의 종제 박홍중(朴弘中)은 음보로 세마를 거쳐 장령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공박하고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몰래 야식을 바치다가 탄로되어 원도(遠島)로 유배당했다. 문장으로 당시의 명인 석학들과 교유했다. 황암 박제인(朴齊仁)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선조조에 태릉 참봉 왕자사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김면(金沔) 등과 서로 격려하며 면학했다. 뒤에 왕자사부 형조좌랑 군위현감 제용감 판관 등을 지냈다. 중조 박치온(朴致溫)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이라고 전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혈연 계보와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에 군수를 지냈다는 사실 외에 다른 사적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본관을 은풍(殷豊)으로 하게 된 연유도 알 수 없다. 중조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 죽성대군(竹城大 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그는 죽산박씨의 지손으로 고려 고종조 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구주(龜州)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朔州 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 장군 김경손 등과 함께 구주에 모여 성을 사수, 누차 대포차 운제 등 온갖 무기로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이를 격퇴했다. 구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군세를 정비하여 돌아가는 길 에 다시 구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또다시 대파,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때 그에게 지병마사(智兵馬使) 최임수(崔林壽), 감찰 어사 민희(閔曦)가 와서 왕명이라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어기지 못해 항복했다. 뒤에 문하 평장사에 오르고 음성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죽산 박씨에서 분적,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음성(陰城) 으로 하였다. 음성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순(朴淳) 박광옥(朴光玉) 등을 들 수 있다. 충민공(忠愍公) 박순은 박문길(朴文吉)의 아들로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 장수로 요동정벌에 참가,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 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왕자를 죽이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상왕과 친분이 두터운 그가 사신되기를 자원하여 1402년(태종 2) 함흥에 내려가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건널 무렵을 어림하여 신하 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며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원공(景瑗公) 박광옥(朴光玉)은 사예 박곤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 봉상시정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학행으로 피천, 내시교관 종부시 주부를 지냈다. 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춘추관 기사관, 전라 충청도의 도사, 지평, 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봉상시정 때 신병으로 사직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는 한편, 군량을 수집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권율(權慄)을 도왔다. 1593년 나주목사에 임명받아 병을 무릅쓰고 민심을 수습하며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던 중 죽었다. 광주의 의열사, 운봉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의흥박씨의 선계는 고려 왕족인 왕씨였는데, 고려말에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 때 왕씨 일족에 대한 탄압을 모면하기 위해 박씨로 변성하였다고 한다. 시조 박을규(朴乙規)는 형 갑규(甲規)와 함께 고려 말에 병부상서와 이부상서를 각각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씨 일족에 대한 학살정책을 자행하므로 이들은 화를 피해 형은 중국으로 도피하였고, 아우인 을규는 지금의 충북 단양의 영춘에 숨어 살면서 성을 박씨로 고쳐 목숨을 보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의흥박씨세보>에도 나타나 있고 또 시조의 제단 비문에 <을규공은 신변과 후손 보전을 위해 영춘의 차의동으로 낙향, 성을 의흥박씨로 개성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래서 의흥박씨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본관을 의흥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다. <세보>의 서문에 의하면 시조 박을규가 처음에 지금의 단양 차의동에 은거하였고, 4세 박근(朴瑾)의 대 이후부터 지금의 제원군 금성 청풍 학송 등지로 옮겨 많은 후손들이 살면서 세천지로 지켜왔고, 11세 이후 일부 자손들이 강원도 영월 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경북의 의흥과는 하 등의 연고가 없는데 어째서 의흥으로 관적하였는지 알수 없고 도 후손들이 의흥으로 옮긴 사실도 <세보>에 나타나 있지 않는데 1930년도 국세조사에 충북 제원군 금성면에 40호, 경북 군위군 부계면 의흥면 등지에 170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으로 보아 시조가 왕씨 성을 감추기 위해 외가의 성인 박씨를 따랐다는 족보 서문에 미루어 외가의 성이 의흥 박씨였고 따라서 군위에서 산 의흥박씨는 을규 외가의 후손으로 을규의 계통과는 다른 박씨로 짐작된다. 시조와 2, 3세까지의 묘소가 실전되어 1973년에 제천시 장락동 4세 박근(朴瑾)의 묘역 왼쪽 에 제단비를 세워 매년 향사하고 있다. 이러한 곡절을 지닌 의흥박씨가 관로를 트기 시작한 것은 3세 박득서(朴得瑞)부터이다. 그의 아들 박근은 관계에서 크게 활약하여 의흥박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흥박씨의 시조가 박득서로 되어 있고 또 <의흥박씨세보>에 박근을 <기복종덕지조(基福種德之祖)>라 하여 받들고 있다. 박득서는 운산유학교도를 지냈고, 아들 근은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충주목의 판관을 거쳐 성종 때 교하현감 나주목사 영암군수 소격서령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했다. 박수검(朴守儉)은 의흥박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현종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진주목사 경상병사 예빈시정 등을 지내면서 김수항(金壽恒) 김만중(金萬重) 등과 보사공신 1 등에 책록되었다. 박양한(朴良漢)은 수검의 아들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장으로 안무사를 제수받아 공을 세우고 정려가 명해졌다. 한창 번성해 오던 의흥박씨가 영조조를 고비로 인물을 내지 못해 오늘날 희성의 반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조 박률(朴律)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 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인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인제(麟蹄)로 하였다. 그의 손자 박통(朴通)은 고려조에서 영암군에 봉함을 받고 후 에 함경남도 문천으로 들어갔으며, 통의 아들 박광(朴光)은 천호 벼슬 을 지냈다. 그리고 광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조부 춘(椿)에게 출가 한 후 조선이 개국되자 춘은 도조로 추존되고 부인 박씨는 경순왕비로 추존되었다. 그리고 광은 문하시중에 추증, 안변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조 박언화(朴彦華)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경명왕이 8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그는 완산대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은 완산(完山)이 전주(全州)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전주로 하였다. 우리 나라 박씨는 모두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주로 경명왕의 아들 8대군 아랫대에 분적되었는데, 이 전주박씨에서도 무안(無顔) 우주(紆州) 순창(淳昌) 평택(平澤) 안남(安南) 등의 박씨가 분적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주로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언제 입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조 언화 의 아들 박웅(朴雄)이 고려 개국공신에 올랐고, 증손 박보진(朴輔辰)은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7세손 박혁(朴奕)은 평장사를 지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시조가 박지화(朴枝華)라고 되어 있으나 <세보>를 상고하지 못해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화 (1513~1592)의 호는 수암(守菴)이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현감을 지냈다. 시문이 고절하고 예서에 박통하여 <수암유고(守菴遺稿)>가 전하며 청안의 구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죽산박씨의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죽산박씨의 세계는 박기오의 후손에서 철성백<서>파 찬성공<훤>파 태복경<의지>파 문광공<전지>파의 4파로 크게 갈린다. 철성백파의 파조 박서는 고려 고종 때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몽고군이 대거 침입할 때 구주성(龜州城)을 사수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城)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에서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분적하게 되었다. 문광공파의 파조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는 문과에 급제, 사국 한림원의 벼슬을 역임.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양반 자제들을 뽑아 입시시킬 때 선발되어 정동성 도사 가 되었다. 귀국 후 안동부사를 거쳐 전중윤 지제교를 지내고,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삼사 좌사 한림 학사승지 밀직부사 개성부윤 등 을 역임하고 연흥군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 정승에 이르렀다. 충숙왕 때 수첨의찬성사 정당문학을 지내고 경원에 봉해진 문강공(文康公) 박원(朴遠)은 그의 아들이고, 죽산군 문보 문충공 덕룡 판서 수룡 제학 문화 충현공 문수는 모두 박원의 아들이다. 조선조에서는 55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 그리고 호당 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의 수는 박씨의 여러 본관 가운데 서 밀양(密陽) 반남(潘南) 함양(咸陽) 고령(高靈) 박씨의 다음가는 숫자이며, 상신 2명은 반남박씨의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문헌공(文憲公)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은 연흥군 박고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직장 의금부 도사 등을 역임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좌승지 겸 지형조사를 거쳐 다음해 사가독서를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여러 판서직을 거쳐 좌의정 에 오르고, 145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으로, 호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내고, 1466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2등으로 연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이어 영의정에도 올랐다. 그는 세종∼예종조에 걸친 충신으로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극히 청렴하고 검소했다. 어느 해 그의 생일날에 아들 정안공(靖 安公) 안성(安城)이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는 기쁘게 마시고 나서 <오늘밤 등불 앞에 몇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서른 둘이라. 우리 집 가보로는 오직 청백뿐이니 부디 잘 전해다오>라는 시를 읊어 후손 을 경계했다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호(梨湖) 박홍구(朴弘耉)는 원형의 5대손으로 광해군 말년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삭직되고 이괄(李 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의 사건 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 때 신원 복관되었다. 박명현(朴名賢)은 영의정 박원형의 후손으로 선조조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목사 홍가신(洪可臣)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방어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 면서 전공을 세워 1604년 청난공신 2등이 되고 연창군에 봉해졌다. 충민공(忠愍 公) 박명룡(朴命龍)은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 고부 군수 병마우후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의 방위전에서 전사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죽성군에 봉해졌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방간(芳幹)측에 가담, 방원(芳遠)과 충돌했다가 참살당한 박포(朴苞),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으로 참전하고 뒤에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를 지낸 한천(寒 泉) 박경신(朴慶新), 영조 때의 학자로 경전과 백가에 통달하고 시 서 화에도 능한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 등을 들 수 있다. 중조 박진문(朴進文)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인 신라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후손으로 고려조 에 대장군을 지냈다. 본관은 중조 이하 대대로 진원에서 세거하였고, 또 가문을 중흥시킨 박희중이 진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진원(珍原) 으로 하였다. 진원박씨는 고려조에서 특별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고려가 망할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토반으로 등장했고, 특히 조선 중기의 석학 박광전(朴光前)을 낳아 전남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진원박씨가 고려조에서 세력을 펴지 못했던 원인은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울 때 진원의 관할지인 대전면에서 기병하였고, 또 견훤의 아들 신검(神 劒)의 전설이 아직도 남면(南面)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 지방 토호들이 왕건에 대항한 세력의 중추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의 미움을 산 이 지방 사람들이 중앙에 진출을 못하게 된 것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중조 진문의 현손 박첨(朴瞻)을 들 수 있다. 그는 고려조에 공을 세워 순충론도 동덕좌명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 우문관 대제학 등을 지내고 익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박홍서(朴洪瑞)는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홍서의 아들 박온(朴溫)은 구례감무를 지냈다. 진원박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이다. 그의 초명은 희종이었으나 태종이 그의 기국을 중히 여겨 희중으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전라도 경차관이 되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축조에 크게 기여하여 주민들이 제방 위에 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 통사가 되어 일본에 가서 국위를 선양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권자의 권리 남용을 시정,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집권자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왕자사부, 감찰, 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의 아들 박근효(朴根孝)는 동생 박근제와 함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합세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인 아버지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근세 인물로는 항일 운동가요, <향교의 제주>사건으로 유명한 양정 (陽亭) 박남현(朴南鉉)을 들 수 있다. 그는 한말 규장각제조를 지냈으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후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을 탄압할 계략으로 향교의 제주를 밀주라고 취체 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 초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유림계를 탄압하기 위하여 1차로 유림의 집결체인 향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향교제향에 절대 필요한 제주를 밀주라 하여 취체한 일본인 사와다를 그가 선동하여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형형식을 취하세 하고 항일하였다. 이에 분격한 일제는 그를 처형코자 하였으나 그 방대한 유림세력의 위세에 눌려 일보후퇴정책으로 이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방안 으로 일체는 전국 각 향교의 제주를 직접 제조케 허가하였다. 이는 항일운동사상 쾌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애국애족의 정신 이 투철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이며 의병의 자금 조달에 헌신 노력 하였고, 일생 동안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중조 박령(朴齡)은 시조왕 혁거세의 46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 언침의 17세손이다. 그가 고려 공민왕때 창원도호부사를 지내고 창원군에 봉해진 까닭으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남 마산시 남산에 있다. 창원박씨는 관적지인 창원보다 전라남도 고흥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 까닭은 증조의 손자인 진사 박동지(朴東智)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세 아들과 함께 지금의 고흥의 속면인 흥양으로 낙향하여 세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흥 일대의 창원박씨 후손들은 그를 입향 중조로 삼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지의 맏아들 박유원(朴由元)을 둘 수 있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헌납, 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당시의 집권자들과 뜻이 맛지 않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를 방유정이라하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박경은 1470년(성종 2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집의, 군수 등을 지냈다. 박사문은 1702(영조 38) 식년 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지냈다. 중조 박항(朴恒)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0세손이며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 보직되고, 충주 목사, 우정언 등을 거쳐 충렬왕 때 승선이 되어 전주를 주관했다. 동지밀직 사사로 왕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와서 좌명공신으로 춘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참문학사, 찬성사 등을 역임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군기, 군량, 군비를 징발할 때 원나라 원수 흔도와 우승 홍다구 등이 이를 감독하면서 행패를 부리자 왕에게 건의, 원나라 세조에게 글을 올려 왕을 좌승상행중서성사에, 김방경(金方慶)을 정동 도원수에 임명케 하여 흔도와 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일처리가 공명정대했다. 본관은 중조가 봉군된 춘성이 뒤 에 춘천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춘천으로 하였다. 중종의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발산리에 있다. 춘천박씨는 고려조에서 성세를 누렸으나 조선조에서는 특출한 인물을 내지 못했고, 문과 급제자도 겨우 3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중조 항의 맏아들 박원굉(朴元宏)이 평장사, 둘째아들 박원비(朴元庇)는판사를 지냈고, 원굉의 아들 박안구(朴安具)는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박광선(朴光先)의 아들 박려(朴旅)가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직강을 지냈고, 박성근(朴聖根)이 1883년 (고종20) 식년문과에 을과로, 박상범(朴尙範)이 1890년(고종27) 경과에 병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중조 박영(朴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1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12세손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충주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이를 취하여 진흥왕 때 소경을 두어 그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던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선대부터 토착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박씨는 조선조에서 20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의 상신 및 대제학, 그리고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상(朴祥)과 박순 (朴淳)을 들 수 있다. 문간공(文簡公) 박상은 조선 목사를 지냇으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다. 1501년(연산군7) 진사로 문과에 급제, 전라도사 재임시 연산군의 폐희 (嬖姬)의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 대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사했다. 사간원 헌납 재임시 종친의월자승당을 반대하여 한산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호당에 뽑혔다.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 재임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중종반정 후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반정훈신의 추죄를 상소, 권신의 격렬한 반발로 남평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 나주목사로 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평생을 직절강명으로 일관, 귄귀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복상중이라서 참화를 면하고 피화자들을 구휼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성현 (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한문4가>로 일컬어진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충공(文忠公) 박순은 상의 조카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이조참의, 대제학,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했다. 시, 문, 서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시는 당시의 풍을 따랐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상의 아우 인 박우는 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이다. 1510년(중종5) 진사로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역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전횡을 일삼자 자청하여 남원부사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로 있다가 허항(許沆) 등의 모함으로 공주목사로 좌천, 이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병조, 이조참의, 개성유수, 한성좌우윤을 지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 만년에 전주부윤을 역임했다. 뒤에 도승지, 참의, 동지춘추관사 등을 거쳐 명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의 근질긴 모함을 받았다. 청백리에 녹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희수(朴希壽)는 명종조의 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로 선조조에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형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떠나가는 배>의 작가 박용철(朴龍喆)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 외국 문학 소개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신문학지>를 창간 주재했다. 애수, 회의, 상징이 주조를 이룬 섬세한 감각의 시를 썼다. 경향파에 대항, 순수시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고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신극운동에도 참여했다. 중조 박원의(朴元義)는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 大君) 언침의 8세손인 삼사좌윤 을재(乙材)의 현손이다. 원의는 고려조에 문과에 장원, 벼슬이 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오르고 태안부 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양박씨에서 분적, 본관을 태안(泰安)으로 하였다. 그 후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 하여 번영을 누려 오다가 8세손 박비가 고흥감무 겸 근농병마 단련판관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송경에서 청산현 동면 대동리로 낙향했다. 그 후 비의 아들 박상덕(朴尙德)이 진주(晉州)로 이거하면서, 둘째아들 자주(自胄)에게 「너는 청산으로 가서 선영을 받들라」하여 자주는 청산에 남게 되었다. 이 때부터 후손이 진주와 청산에 분거 하여진주파·청산파로 갈라졌고, 자주의 둘째아들 일종(一宗)이 정읍 (井邑)으로 이거하여 다시 정읍파를 이루어 3파로 나뉘어졌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안도(朴安道)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으로 맞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고, 진주의 충민사에 제향되었다. 박민(朴敏)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과 행의가 뛰어난 인물로 정묘호란 때 창의했다. 진주의 정강서원에 제향 되었다. 중조 박언상(朴彦祥)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 城大君) 언침의 8세손으로 밀양박씨 12파 중 도평의사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8세손 박거인(朴居仁)이 고려 말에 인의(仁義:지금의 태인)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자 그의 증손 박언생이 태인으로 본관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밀양박씨와 통합 하여 도평의사공파 안에 문정공파라 일컫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遂良)이 있다. 그는 김개(金漑)의 문인으로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급제, 지평, 승문원 정자 등을 거쳐 장령을 지냈다. 함경도 경차관이 되어 지방 관아를 순시할 때 안원보 권관 김주남(金周男)이 야인들에게 임의로 우마를 주어 불법을 행한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한성부 판윤,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고, 30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을 장만하지 못할 만큼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박영건(朴永健)은 1514년(중종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정을 지냈다. 중조 박지윤(朴智胤)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제4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후손으로 전해지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벼슬은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평산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수경(守卿)의 딸이 고려 태조의 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토착한 호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수경(朴守卿), 박인량(朴寅亮), 박경인(朴景仁)을 들 수 있다. 박수경은 중조지윤의 아들로 고려 초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후백제가 자주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진압, 견훤(甄萱)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사워 이긴 공으로 원보가 되었으며 발성 싸움에서는 적에게 포위된 태조를 구출했다. 정종 초에 내란을 평정할 때도 공을 세웠으나 광종 때 아들 3형제가 무고로 체포되자 걱정이 되어 병사했다. 딸은 태조의 비 몽량원부인이 되었다. 문열공(文烈公)박인량은 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요나라가 압록강 동족을 국경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를 지어 압록강을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 요나라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 후 예부시랑이 되어 류홍(柳泓), 김근(金覲) 등과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뒤에 김근의 글을 곁들인 <소화집(少華集)>이 중국인에 의해 발간되기까지 했다. 귀국 후 참지정사로 재임중 죽었다.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다. 또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다. 장간공(章簡公) 박경인(朴景仁)은 예종 때 병마부사가 되어 윤관(尹瓘)의 여진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부상당하여 정주(定州)에서 요향중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그 방비의 불가능함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전중감직문하로 있을 대 송나라와 의 사신 교환을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국자쇄주를 거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평주박씨는 평산박씨와 동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관계를 따지지 못해 평산·평주로 갈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 으로 평주박씨의 중조 박수경(朴守卿)이 평산박씨의 중조 박지윤(朴智 胤)의 아들이고, 또 평주는 평산의 고호로서 관적지가 같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주박씨족보>에 의하면 <중조 박수경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윤이 되고,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태조가 그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했다. 조물성(曹物城)과 발성(勃城)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밭 2백 결을 하사받고 광종 때 삼중대광이 되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그 이상의 세계와 그 이하 박광렴(朴光廉)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가 없어서 그를 중조로, 박광렴을 1세조로 하였다.>고 한다. 중조 박지영(朴之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 54대 경명왕의 다섯째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후손 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박지영은 조선 태조 때 평택현사를 지내고 그곳에 정착하여 평택으로 관적했다. 그의 아들 박산(朴山)은 조선 초에 이조정랑을 거쳐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1456년(세조2) 함경북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원으로 이배당한 후 풀려나지 못해서 자손들이 그곳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후손들이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주요 인물로는 사과를 지낸 박준검(朴俊儉), 온성진관 황척파 권관을 지낸 박인규(朴寅奎) 등이 있다. 박규능(朴圭能)은 유일한 문과 급제자 로 1886년(고종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함양박씨는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 의 셋째아들인 속함대군(速咸大君) 언신(彦信)의 정통 후손이다. 경명왕이 여덟 왕자에게 각기 분봉할 때 셋째 언신이 속함대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중조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속함(速咸) 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으로 하였다. 1세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함양박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세조 선의 현손 박신유는 고려 고종조에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호남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에 봉해졌다. 그에게 여섯 아들이 있어 6파로 갈리는데 첫째 박지문(朴之文)은 검교 군기소감을, 둘째 문원공(文元公) 박지빈(朴之彬)은 위위윤을 지냈다. 셋째 박지량(朴之亮)은 충렬왕조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연합군 의 고려군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휘하 중군병마사로 대마도(對馬島) 를 무찌르고 일기도(壹岐島)를 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의 벼슬을 받았고, 뒤에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넷째 박지수(朴之秀)는 밀직부사를, 다섯째 박지온(朴之溫)은 감찰어사를, 여섯째 박지영(朴之 穎)은 금오위 중랑장을 지냈다. 이들 6형제의 6개 파에서 둘째 문원공 파의 수가 제일 많고, 넷째 밀직공파와 함께 인물도 많이 났다. 박장(朴莊)은 문원공 지빈의 아들로 군부총랑을 지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그의 아우 문양공 박리(朴理)는 충렬왕 때 국자좨주에 이르렀다.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는 박장의 아들로 충목왕 때 찬성사, 판삼사사를 지냈고 공신으로 함양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청백해서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집과 의복은 선비로 있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박초(朴礎)는 박리의 손자로 고려 말에 척불소를 올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조선조에 들어 와서 태종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오른 인물로 세종 때 여진의 침범을 피해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려는 것을 적극 반대, 국토의 위축을 막았다. 박우는 지수의 아들로 공민왕 때 판삼사사를 지내쏙, 그의 아들 박인계(朴仁桂)는 호부상서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우왕 때 왜구를 무찌르다 전사,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인계의 아들 박원렴(朴 元廉)도 호부상서를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문과 급제자 69명, 호당 2명, 청백리1명, 공신 2명, 장신 1명을 배출했는데 급제자 수는 밀양박씨와 반남박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박습(朴習)은 원렴(元廉)의 손자로 태종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를 쌓아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세종 즉위년 병조판서로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그의 아들 박의손(朴義孫)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함양박씨는 한동안 쇠운 을 맞이한 듯하다가 조선조 중기에 <향오린(鄕五鱗), 경팔립(京八立)>이 나와 활기를 되찾는다. <향오린>이란 함양군(咸陽君) 박전(朴琠)의 6대손 눌(訥)의 다섯 아들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從鱗)을 말하고, <경팔립>은 박세영(朴世榮)의 세아들 대립(對立), 사립(私立), 희립(希立)과 박세무(朴世茂)의 세 아들 소립(素立), 응립(應立), 성립(成立), 그리고 박세옹의 두 아들 정립(定立), 명립(名立)의 8종항간을 말한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현직에 있으면서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그 중 박대립은 의손(義孫)의 현손으로 선조조에 부제학, 대사헌, 형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냈다. 그리고 대립의 아버지 박세영은 중종 때 돈령부 도정으로 글씨를 잘썼고, 세영의 아우 박세무는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초학자가 읽는 <동몽선습(童夢先習)>을 편찬했다. 박세옹 역시 세영의 아우로 한성 좌윤, 참의 등을 지냈으며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다. 세무의 아들 박소립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박응립은 수안군수를 지냈으며, 응립의 아들 문목공(文穆公) 박지계(朴智誡)는 벼슬이 동부 승지에 그쳤으나 도덕과 학문이 높았다. 박영문(朴英文), 박영창(朴永昌)은 충좌의 5대손으로 종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오르고 함양부원군과 천령군에 각각 봉해졌다. 이밖에 중종 때 문과 에 급제, 호당을 거쳐 대사헌을 지낸 박홍린(朴洪鱗), 영조 때 무장 으로 총융사,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분무공신 박찬신 등도 유명한 인물들이다. <대동운부군옥편(大東韻府群玉編)>에 의하면 주문왕(周文王)의 여섯 째아들 필공(畢公)의 후손인 계손(季孫)이 반에 봉해져서 반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반씨의 시조는 반부(潘阜)이다. 그는 원래 중국 노나라 횡성(橫城) 사람으로 송나라 도종 때 이부상서로 있다가, 원나라의 침입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어 원나라 세조의 회유를 거절 하고 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볼모로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의 세자 심(諶:충렬왕)은 그의 절의에 감탄, 원나라 세조에게 진언하여 화를 면하게 하여 사신으로 원나라에 왔던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려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 해 8월 기거사인이 되어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하는 원나라의 국서와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가 조서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답서를 받지 못하고 이듬해에 돌아와 원나라 세조에게 그 경위를 보고했다. 그 해 9월에 다시 지문하성사 신사전 (申思佺)과 함께 원나라 사신 흑적을 인도, 일본에 갔으나 대마도에서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도민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원나라에 보냈다. 그 후 비서승, 국자사업 등을 역임하고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 지병마 부사로 출전했으나 일기도에서 풍랑으로 배가 부서져 회군했다. 뒤에 좌사의대부, 문하시중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시조의 묘소 는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아주리에 있다. 본관은 거제(巨濟) 단본이다. 원래는 시조 반부가 기성부원군에 봉해 졌기 때문에 기성반씨라 하였다가 부의 6세손 반자건(潘自健)이 영평군(永平君:남평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그 후손들이 남평으로 칭관 했다. 그러가 자건의 둘째아들 반충(潘忠)이 해양군(海陽君)에 봉해 지자 그 후손들이 광주로 칭관했고, 부의 7세손 반련(潘璉)의 후손들은 결성으로 칭관해 오다가 오늘날에는 거제 반씨로 통합, 종전의 본관을 분파로 하여 기성파, 남평파, 광주파, 결성파 등으로 일컫고 있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반익순(潘益淳)과 그의 아들 반복해(潘福海)를 들 수 있다. 반익순은 부의 증손으로 우왕조에 문하평리, 좌시중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 반복해는 우왕이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구출한 공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씨 성을 하사 받고 수양아들이 되었으며, 벼슬은 문하찬성사에 이르고 공신의 칭호 를 받았다. 그 뒤 딴 마음을 품고 최영(崔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나서 우왕이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그의 장인인 임견미(林堅味)의 험담을 하자 장인을 두둔했다가 사형되었다. 반씨는 조선조에서는 초기부터 개국에 참여, 번영을 누리는 듯했으나 중기부터 쇠운을 맞아 겨우 문과 급제자 5명, 공신 1명을 배출하는 데 에 그쳤다. 조선조에서의 대표적인 인물은 문효공 반우형(潘佑亨)이다. 그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중종 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으로 판서, 도총관 등을 지내고 기성군에 봉해 졌다. 그 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유배되었다. 그의 현손 장절공 (壯節公) 반석평(潘碩枰)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8도의 관찰사,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으며 청백한 명신 으로 유명했다. 남평파의 파조 충간공(忠簡公) 반자건(潘自健)은 고려 말~조선 초에 홍문관 직제학, 예조판서, 좌찬성을 지내고 영평군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 반침(潘琛)이 진도군수를 지내고 남평으로 낙향 했고, 침의 증손 반상주(潘尙周)가 장성으로 옮겨 대대로 세거했다. 특히 장선군 서삼면 외연리는 반여경(潘汝慶)이 숙종조에, 반행도(潘行 棹)가 헌종조에, 반영구(潘永龜)가 고종조에 차례로 진사에 급제하여 <반씨 3진사 마을>로 알려져 있다. 반씨의 본관은 개성(開城), 고성(固城), 평해(平海) 등 3본으로 전한다. 반씨는 원래 중국 상고시대 전욱( 頊)의 후손으로서 초나라 때의 투반(鬪班)의 후손이 그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어느 때 들어왔는지, 또 시조와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도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5가구가 산재해 있었다. 방씨는 중국의 성씨로 염제신농씨의 13세손인 뇌가 하남의 방산을 봉토로 받아 이를 연유로 <방>을 성으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초기 당나라의 문화 사절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화한 방지이다. <온양방씨세보>에 의하면 방지(方智) 는 뇌의 134세손으로 당나라 고종 때 한림학사였다. 그는 669년(문무 왕9) 문화 사절로 신라에 와서 설총(薛聰)과 더불어 동방유학과 예교 의 진흥에 힘쓰다가 끝내는 이 땅에서 결혼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그의 원손 방운(方雲)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방운은 원래 상주 사람으로 고려 초 왕건의 제2차 견훤 정벌에 종군 하여 공을 세우고 광종 때 벼슬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으며 온수군에 봉해졌다. 그의 만년에 왕은 그를 온양의 과안산에서 살게 하고, 그 산 이름을 배방산이라 명명하는 한편 식읍으로 세 고을을 하사 하였다. 뒷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유신들을 부를 때 운의 15대손 방유정(方有程)을 불렀으나 응하니 않자 이에 분노한 태조가 온양의 사패지를 몰수하는 한편 <배방산(拜方山)>을 <배방산 (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본관은 1세조 방운이 온수군 에 봉해졌고, 온양에 입향하여 세거지를 마련했기 때문에 온양으로 하였다. 문헌에는 온양 외에 상주(尙州), 신창(新昌), 군위(軍威) 등 몇 본이 전하나 모두 동원으로 세거지명에 불과하므로 오늘날에는 온양 방씨로 일원화했다. 아직도 군위로 칭관하는 방씨가 더러 있으나 모두 같은 혈족들이다. 방씨는 고려시대에 대대로 벼슬을 했는데 운의 6세손 방유(方裕)는 숙종 때 평장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방재(方宰)는 인종 때 절도사를 지냈다. 온양방씨의 세계는 방재의 6대손에서 판서공<서>파, 간의공<현>파, 안렴사공<훤>파, 태상경<적>파, 대장군공<가달>파, 상락부원군<신우>파, 광록대부<신제>파 등 7파로 갈라진다. 이 7파 중 에서도 특히 충렬왕조에 판도판서를 지낸 방서(方曙)의 후손이 대종 으로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밖에 간의공파, 태상경파, 대장군파의 후손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들은 모두 당대에 현달하여 상락부원군 방신우(方臣佑)는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장정사를 지내고 돌아와 충선, 충숙왕조에 걸쳐 원나라에 자주 왕래하며 대원 외교에 공헌했다. 방신제(方臣悌)는 신우의 형으로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평장사를 지내고 중국에 귀화했다. 명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방효유(方孝儒)가 바로 그의 5대손이다. 이 외에도 고려사에 이름을 빛낸 인물로는 공민왕조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 수복 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온양부원군에 봉해진 방절(方節)과 고려 말 절신 방순(方恂) 등이 있다. 방순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 사인, 판전교시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 으나 광주에 숨어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말기 충신들의 후손인 까닭에 벼슬에는 별로 나아 가지 않았으나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 은 중종반정 후에 대사헌, 이조참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방유령이다. 무신으로는 성종때 4도의 병마절도사를 진낸 방륜(方輪)이 지용과 기사에 뛰어났다. 방우정(方禹鼎)은 정조~순조대의 무장으로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정주성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 때 쓴 <서정일기(西征日記)>는 그 방면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근대 인물로는 아동문학가인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유명하다. 房 (방)씨 이 성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증보문헌비고>등에 남양(南陽) , 수원(水原) 외에 천녕(天寧), 포천(抱川), 서산(瑞山) 등 20여 본이 전하나 모두가 대종인 남양방씨의 분파 세거지를 나타낸 것이고 오늘날에는 남양방씨 외의 본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조 방준(房俊)은 당나라 태종 때의 재상 현령(玄齡)의 둘째아들로 고구려 보장왕 때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남양에 정착 하여 남양(南陽)으로 관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 삼중대광 보국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방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냈다. 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이 평장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 부사 겸예부상서 를 지냈다. 진유의 손자 방지백(房之伯)은 감찰어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태보(台輔)와 태경(台慶)은 각기 문하찬성사, 상호군을 지냈으며 태경은 공신에 올라 의춘군에 봉해졌다. 태보의 손자 방주(房柱)는 문하평리, 주의 아들 방사량(房士良)은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 과 전의시승을 지냈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했다. 그 중 방구달(房九達)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승문원 박사, 이조정랑, 군자감정 등을 지냈 으며 방구행(房九行)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군자감정을 지냈다. 방귀원(房貴元)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를 지냈고, 방귀온(房貴溫)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때 현량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유배당했다. 선조 때의 학자인 방응현(房應賢)의 손자 방원진(房元震)은 장경세(張經世)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뒤에 사마시에 합격, 광해군 때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가 정치가 문란해지자 낙향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신흠(申欽)의 천거로 찰방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김장생(金長生) 휘하에서 소모사로 활약했고, 병자호란 때도 역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수원방씨의 시조 방정유(房貞儒)는 관직이 대광이라고 전해졌을 뿐 그외의 연대나 상계 또는 하계 및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방씨의 대종인 남양방씨와의 혈연관계도 확실치 않으나 남양방씨에서 분파한 계통으로 세거지명에 따라 수원으로 관적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요 본관은 개성이며, 이 외에도 몇몇 본이 나타나 있다.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주나라 현왕 때 방연(龐涓), 한(漢) 나라 광무제 때 방맹(龐萌)이 모두 장군이었다고 한다. 태원(太原)은 중국 지명이다. 시조 방발(龐渤)은 원래 중국 태원 사람 으로 지휘도총장을 지내다가 우리나라에 귀화, 정착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시조의 고향인 태원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본관을 태원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화 연대나 기타 사적에 대해서는 전연 상고할 수 없고 개성방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1930년도 국세 조사에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이다. 시조 방두현(龐斗賢)은 원래 중국 노나라 사람으로 주나라 현왕 때 인물인 방연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1351년(충정왕3)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입국할 때 배행한 6시랑 8학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 개성에 정착세거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 로 하고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시조의 6세손 방대건(龐大建)과 그의 아들 방종일(龐宗逸) 부자는 조선조에서 공조참의를 지냈고, 종일의 아들 방세진(龐世珍)이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근세 인물로는 문학박사 로 국제대학 학장을 지낸 방용구(龐溶九), 대한전척토목부장을 지낸 방회철(龐會澈) 등이 있다. 주요 본관은 광광주(廣州), 기주(岐州), 파주(坡州)등이며, 이 성의 역사는 비교적 오랜 듯하나 드러난 인물은 없다. 다만 근대 인물로 방기창(邦基昌)목사(1851∼1911)가 있는데,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우리 나라 기독교 사상 최초의 목사로서, 관서(關西)지방에 많은 교회를 세우는 등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우리나라 모든 배씨의 시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 6촌 중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이다. 그는 B.C.57년 다른 5부촌장과 함께 알천(閼川) 양산(楊山:지금의 경주 남산) 아래 나정(蘿井) 수풀 사이에 있는 큰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길러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1등원훈에 오르고 총재태사가 되었다. 그 후 32년(유리왕9)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승격시키고, 그에게 <배씨>를 사성함으로써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배씨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 를 밝히지 못하므로 지타를 득성 도시조로,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헤아리고 있다. 중시조 배현경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무장으로 궁예(弓裔)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울 때 이를 도와 행오(行伍)로 출발, 기장(騎將)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으로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처자를 죽이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횡포가 심해지자 그는 918년 6월에 동료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검필(庾黔弼), 홍유(洪儒) 등과 함께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 개국 1등공신에 올랐다. 이듬해 도읍을 송도(松都)로 옮길 때 개주도찰사로 공을 세웠고, 또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공을 세워 대상 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 도통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11) 그가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여 손을 어루만지며 「경에게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돌아간 후 이윽고 숨을 거두자 부음을 접한 왕은 가마를 멈추고 통곡했다고 한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고, 평산 태백산성에 태사사를 세워 철상 4기를 주립, 매년 춘추에 향사 하였다. 본관은 시조의 발상지인 한지부가 경주(慶州)로 개칭됨에 따라 경주라 하였다. 배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려조에 공이 있어 분성군에 봉해진 원룡 (元龍)의 후손이 분성배씨, 고려 원종 때 홍안부원군에 봉해진 인경(仁 慶)의 고조 위준(位俊)의 후손이 성산배씨, 고려조에 나라에 공이 있어 달성군에 봉해진 운룡(雲龍)의 후손이 달성배씨, 충숙왕 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의 5대조 경분(景分)의 후손이 흥해배씨, 달성배씨 에서 9세손 맹달(孟達)이 세조 때 곤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 이 곤양배씨 등으로 분적되었고, 그밖에 경주 처사공<충과>파, 성산 복야공<영찬>파, 화순 진사공<연>파, 함흥 교서공<덕수>파,협계 합문 사인공<진>파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모두 경주배씨의 분파로 득성시조 와 중시조의 통일 혈손이므로 근래에는 경주로 일원화하였다. 배씨는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의 후광을 받아 고려조에서 번영을 누렸고, 조선조에서도 영의정 1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47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를 각 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성파에서는 파조 배원룡(裵元龍)이 고려조에서 출장입상한 공으로 분성군에 봉해졌다. 계당(桂堂) 배맹후(裵孟厚)는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성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고, 정곡(靜谷) 배세적(裵世績)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벼슬은 현감에 그쳤지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이조참의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 대북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삭직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배경남(裵慶男)은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의 유격장으로 공을 세우고, 당항포의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 좌별도장으로 참전, 승리를 거두어 조방장이 되었다. 그의 아들 배홍우(裵弘祐)는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 인조 반정 후 현감을 지냈다. 성산파에서는 파조 배위준(裵位俊)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 벽상공신에 올랐고, 그의 5대손 인경(仁慶)이 보문각 직학사와 지추밀원사 등을 지내고 충숙왕조 때 흥안안부원군에 봉해졌다. 인경의 현손 배규(裵規)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조선 세종 때 대사간을 지냈다.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고려 말에 문하우시중을 지내고 이성계의 혁명을 도와 조선 개국1등공신으로 성산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다.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뒤에 공조참판, 영흥 대도호부사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 배시량(裵時亮)은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민영(民營)의 막하에서 선전하다가 민영이 전사하자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했고, 뒤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경기도수군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배명순(裵命純)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결전을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후 철수하는 청병과 철령에서 싸워 이기고 계속 추적, 안변에 서 적과 분전하다 전사했다. 달성파에서는 배정지(裵廷芝)가 충렬왕 때 별장으로 연기에서 합단을 격파하고 중랑장이 되었으며 충선왕 때 호군으로 전농사 유비창의 일을 관장했다. 그리고 충숙왕 때 탐라에서 김성(金成)이 반란을 일으 키자 존무사가 되어 이를 토평하고 밀직부사가 되었다가 옥사가 일어나 유배당했다. 그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배성경(裵成慶)은 공민왕조에 홍건적의 침입을 막다가 과천에서 아들 광유(光裕) 와 함께 전사했다. 둘째아들 배천경(裵天慶)은 공민왕 때 판추밀원사, 경주 부윤 등을 지내고, 달성군에 봉해졌다. 셋째아들 배함경(裵咸慶) 은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형 성경과 함께 참전, 검교장군이 되었다. 양호공(襄胡公) 배맹달(裵孟達)은 세조조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 적개 공신 2등으로 곤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곤산배씨 라고도 한다. 흥해파에서는 파조 배경분(裵景分)이 고려조에 검교장군이 되었고, 6세손 배전이 충숙왕 때 조적의 난을 당해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흥해군에 봉해졌다. 전의 아들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 尙志)는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안동으로 돌아와 은둔하고 절의를 지켰다. 상지의 아들 배환(裵桓)은 조용(趙庸) 의 문인으로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전라 감사를 지냈다. 배삼익(裵三益)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글씨를 잘썼다. 성산 복야공파에서는 배응경이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 왜란 당시 나주목사가 되어 혼자서 금산성을 지켰다. 이순신(李舜臣)이 불러다가 막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아들 배상익(裵尙益)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동료유생들이 인목대비의 폐위상소를 올리자고 했으나 불참 했고, 인조 때 판관을 지냈다.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 좌복야 사공 대사도 등을 지내다가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780년 (선덕왕 1)에 신라에 귀화하여 계림의 자옥산 아래 (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살면서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에 이르렀다. 그가 자옥산 아래에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워 거처하고 있는데 선덕왕이 친림하여 만세암을 정혜사라 개명하고 어필로 영월당의 현판에 <경춘>이라 쓰고 사운시를 지어 주어 이를 각자해서 걸었다고 한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자옥산에 있고,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연계하지 못하고 신라 경덕왕 때 중랑장을 지낸 창직(昌稷)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과거에는 창직을 시조의 14대손으로 연계하여 계대한 적도 있었지만 시조의 입국 연대와 창직의 활동 연대를 따져 볼 때 불과 140여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창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수원(水原) 단본이다. 문헌에는 수원 외에 남포(藍浦), 직산(稷山), 임천(林川), 태천(泰川), 적성(赤城:순창(淳昌)), 문경(聞慶), 청도(淸道), 해미(海美), 남해(南海), 해안(海岸:대구), 개성(開城), 선산(善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태인(泰仁) 등 10여 본이 전해 지고 있으나 모두 한 핏줄이므로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발간할 때 각 파의 대표들이 모여 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한 후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령의 이재공<이정>파 후손들은 남포로 쓰고 있고, 대흥, 청도, 부여, 임천, 태인 등으로 칭관하는 파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백씨는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많은 석학과 명유를 배출한 기호지방 과 관서지방의 문벌가다. 문간공(文簡公) 백문절(白文節)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국자좨주를 지냈다. 1269년 복위한 원종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폐위 사실을 감추려고 그에게 전왕이 병으로 물러났다는 표를 쓰라고 했으나 눈물로 간하여 사실대로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게 하였다. 충렬왕 때 국학 대사성 보문각 학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백이정은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1275년(충령왕 1) 문과에 급제, 1298년 (충렬왕 24)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가서 10여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에게 전수,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상의회의도감사에 이르고 상당군에 봉해졌다. 충간공(忠簡公) 백문보(白文寶)는 공민왕 때 왕자사부 정당문학 등을 지내고 직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80명, 공신 2명, 장신 2명,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문과 급제자를 본관별로 구분하면 수원 65명, 선산 3명, 대흥과 남포에서 각 2명, 직산 해미 개성 홍성에서 각 1명, 본관 미상이 4명이다. 백수장(白壽長)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으로 정해군에 봉해졌고, 백응범(白應範)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공신으로 한남군에 봉해졌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은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庵).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선조대의 명신이요,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중종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많은 동문을 중종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많은 동문을 잃고 금강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돌아와 1537년 식년문광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남평현감 호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했다.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고, 선조 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공조참판,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남평의 봉산서원,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다.선조조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된 관리로 벼슬을 그만두자 끼니조차 끓이지 못할 정도로 청빈해서 조정에서 쌀을 내려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성격이 강직하고 소신이 굳은 그는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에게 미움을 사서 파직을 당하기도 했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는 조정의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논책했다. 그의 형 인호(仁豪) 와 4촌인 인영(仁英) 인웅(仁雄)등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4백문장>이라고 불렸다. 조선조에서는 주로 이들 4종형제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수원백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백인영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인걸의 아들 백유함(白惟咸)은 선조조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나 1591년 세자 책봉을 놓고 당론이 일어나 정철(鄭澈) 등 서인이 물러날 때 그는 경흥으로 유배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호군 으로 명사(明使) 정응태(丁應泰)를 접대, 일본과의 강화를 논의하다가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인호의 아들 백유양(白惟讓)은 선조 때 부제학을 지내다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 나자 아들 수민이 정여립의 형인 정여흥(鄭汝興)의 딸과 혼인한 사실 이 밝혀져 유배되어 죽었다. 여기에는 기이한 사연이 전한다. 백인걸이 을사사화로 오래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가세마저 빈곤하자 딸이 과년해도 출가시킬 곳이 없었다. 그래서 조카인 백유양에게 「의령군을 사위로 맞고자 하는데 어떠한가?」하고 묻자 유양이 「의령군은 종실의 미천한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와 숙모가 시중의 속인이어서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통혼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인걸의 딸이 그의 시아버지에게 고해 바쳐 유양을 미워하게 되었다. 또 의령군의 아들 이춘영(李春英)도 유양 부자를 원수같이 여기다가 유양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자 무근한 사실을 날조 하여 네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했다. 백인호의 후손에서는 대대로 무관이 많이 나왔다. 숙종 때 무과에 급제,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경종조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일파가 노론의 4대신을 유배시킨 신임사화(辛任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耉)는 인호의 5대손 이다. 이 사화에 화를 입은 삼장신과 오절도사를 세칭 <팔곤수>라 하여 <팔곤수집>으로 경모되어 왔다. 백시구의 손자인 참판 백사근(白師謹) 판서 백사은(白師誾) 형제의 자손 4대가 거의 모두 무과 출신 이어서 <무관집>으로 유명했다. 그 중 사은의 아들 백동원이 순조 때 훈련대장, 사근의 손자 백은진(白殷鎭)이 철종 때 어영대장, 동원의 증손자 백낙윤(白樂倫)이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또한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은 어려서부터 시재가 있어 13세때 상경하여 양응남(梁應南), 노수신(盧守愼) 등에게 사사했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서에 열중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로 제술관이 되어 사신을 감탄게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정릉, 예빈시, 소격서의 참봉을 지냈다. 선조 때의 시인으로 문필로 1세를 풍미하여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 처음으로 성당의 시풍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으로 일컬어졌으며, 강진의 서봉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아들 백진남(白振南)도 당대의 시객으로 명성으로 떨쳤다. 광훈의 형 백광홍(白光弘) 역시 시문에 뛰어나 그의 작품 <관서별곡(關西別曲)> 은 국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이다. 근세 인물 가운데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기독교 세례를 받고 최초의 전도사로 최초의 순교자가 된 백홍준 (白鴻俊),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白龍城), 2 8독립선언 주동자의 한 사람인 백관수(白寬洙),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무기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한 백정기(白貞基) 등이 유명하다. 백정기(白貞基)는 한말 독립운동가다. 19세에 상경했다가 마침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후 경향 각지를 잠행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북경으로 망명하여 일제의 군사시설을 파괴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25년 상해로 내려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1928년에 개최된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33년 3월 17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상해 홍구에서 주중 일본대사 유길(有吉)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다 가 발각되어 피체, 장기재판소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고 복역중 옥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범(凡)씨의 본관은 안주 단본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범씨는 고려말 우왕 때 벼슬했던 범영부(凡永富)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남 영암군 영암면 역리 살던 범기영(凡基永)의 1가구가 나타났는데 범영부(凡永富)와의 관련은 상고할 수 없다. 금성범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주나라 선왕 때 두백(杜伯)이 어떤 사건 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습숙(濕叔)이 진나라로 도망해 살던 중 그의 증손 사회가 나라에 공을 세워 범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범씨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범씨는 고려 충렬왕 때 범승조(范承祖)가 고려에 귀화함 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중국 낭야 사람으로 1274년(원종 15) 제국공주 를 배종, 고려에 와서 귀화하여 나주에 살게 됨으로 해서 우리나라 범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이하 4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가 근세에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 천사동에서 시조의 증손 범세동(范世東)의 묘소 를 찾은 뒤, 1966년 이 묘역에 시조 이하 3세 3위의 제단을 설치, 매년 양력 4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의 아들 범유휴가 충숙왕 때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금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금성으로 하였다. 범씨는 시조의 증손 범세동(范世東)이 고려 말에 새 왕조에 창건을 거부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군자의 도를 이어받아 벼슬을 멀리 하고 생업에 힘쓰며 수신 제가의 학문을 닦는 선비 가문의 전통을 세움으로 해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호남의 명문이다. 복애 범세동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고려 말에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덕령부윤 간의대부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새 왕조를 거부하고 뜻을 같이하는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가 그들을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불을 질러 위협하므로 두문동에서 빠져나와 고향인 나주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이성계 일파가 혁명의 구실로 내세웠던 우왕과 창왕이 요승 신돈(辛旽)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거짓이라고 밝혀 후세에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은 학봉(鶴峰) 범가용(范可容)과 용계(龍溪) 범천배(范天培)이다. 이들은 다 같이 이름 높은 학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으며 나주에서 광주로 입향했다. 범기생(范起生)과 범기봉(范起鳳) 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1593년 진주에서 김천일(金千鎰) ,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순국했다. 근세 인물로는 범윤두(范潤斗)가 3 1운동 당시 광주 지방의 주동적 인물로 거사 후 왜경의 수배망을 피해 10여 년을 숨어 다니며 공소시효를 넘겼다. 갖은 고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일제가 망할 때까지 타협을 거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본관은 현재 해주(海州), 원주(原州9, 장연(長淵0의 3본뿐이며, 그중 원주변씨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변(邊)씨는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에서 들어온 성씨로 전하는데 항주변씨의 선조는 본래 중국 용서(龍西) 지방에 살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어와 황해도(海州)에 살았다고 한다.한편 원주(原州)변씨의 시조 변순(邊順)은 황주(黃州)변씨의 시조 변여(邊呂)의 후손으로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의 벼슬을 지냈다. 뒤에 변순의 손자인 변안열(邊安烈)이 원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를 본관으로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원주 변씨의 시초이다. 시조 변안열(邊安烈)은 본래 중국 사람으로 원나라에서 원수로 있다 가 노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들어와 귀화했다. 변안열은 양의 둘째아들로 원나라에서 원수를 지내다가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를 배종, 고려에 들어와 장군으로 많은 공을 세워 원주부원군에 봉해져서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안열은 1361년 (공민왕 10) 안우(安祐)와 함께 홍건적을 격퇴시켜 2등공신으로 판소부 감사에 승진, 이듬해 서울을 수복하고 1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의판서에 승진되면서 추성보조공신에 올랐다. 판밀직사사로 최영 과함께 제주를 정벌한 후 지문하부사 문하평리를 역임했다. 우왕 때 양광 전라도 도지휘사 겸 조전원수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어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운봉(雲峰)에서 왜적을 대파 하고 정방제조가 되었다. 단양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후 원주부원군 에 봉해지고, 판삼사사 영삼사사가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남양주군 진건면 용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하고 있다. 원주변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8명, 부마 2명, 공신 3명, 명장 1명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정종의 부마인 변상복(邊尙服)과 그의 조카로 태종의 부마가 된 변효순(邊孝順)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 을 들 수 있다. 그 중 벼슬 열력이 뛰어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변수(邊脩)는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2등으로 원천군에 봉해지고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양호공(襄胡公) 변사겸(邊士謙) 역시 정국공신 4등으로 원양군에 봉해졌다. 양정공(良靖公) 변협(邊協)은 을묘왜변 때 해남현감으로 왜구를 격퇴하고 장흥부사가 되었다. 후에 제주목사가 되어 조정의 명으로 유배중인 요승 보우를 참형하고, 돌아와서 공조 판서 겸 도총관 포도대장에 이르렀다. 충장공(忠壯公) 변응정(邊應井)은 임진왜란 때 적의 전함을 크게 격파하고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금산의 적을 쳐서 전과를 크게 올렸으나 적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정의공(貞毅公) 변양걸(邊良傑)은 선조조 경원부 번호의 난 당시 조방장으로 길주목사가 되어 부임했다가 병사 들에 대한 명망을 시기한 주장의 무고로 서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강화를 방어했고, 뒤에 훈련대장 도총관 수원부사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변응성(邊應星)은 협의 아들로 광해군 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변흡은 인조조 이괄 (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진무공신 2등으로 원흥군에 봉해졌다. 시조 변유령(邊有寧)은 본래 중국 농서 사람으로 송나라에서 대아찬을 지낸 변경(邊鏡)의 증손이다. 그는 1138년(인종 16) 고려에 귀화, 벼슬이 중문지후에 이르고 연성부원군에 봉해짐으로 해서 후손 들이 본관을 장연으로 하였다. 역사적인 인물로는 변처후(邊處厚)와 변사정(邊士貞)을 들 수 있다. 수정(水晶) 변처후는 태조 때 문과에 급제, 판승문원사에 올랐다가 1404년(태종 4) 노비오결의 죄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상서사 소윤 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세종조 판정주목사, 동지중추원사, 중추원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도탄(桃灘) 변사정은 이항(李恒)의 문인이며 음보로 경기전 참봉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천에서 의병을 모집, 의병장에 추대되어 왜병 2천여 명을 사살했다. 장령에 추증되고 운봉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시조 변려는 장연변씨의 시조 변유령(邊有寧)의 현손으로 태천(泰川) 사람이다. 고려가 몽고병의 침입으로 도성을 강화로 옮기니 적병이 강화를 치고자 변려를 붙잡아 단근질을 가하면서 바닷길을 물었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다만 해로가 매우 험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몽고병들은 그의 말을 믿고 배를 불살라 버린 뒤 퇴각했다. 조정에서 그 공으로 상장군에 제수하고 태천백에 봉했다. 황주변씨는 오늘날 전남 장성에 4백여 가구를 비롯해서 전북 부안, 정읍 등지에 많이 살고 있는데, 그 까닭은 변정(邊靜)이 공민왕 때 중군사정으로 종숙 부인 광수(光秀)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나 신돈 (辛旽)의 모함으로 광수는 삼척으로 유배되고, 그는 장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 배출된 문과 급제자는 9명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의 학자 변이중(邊以中)을 들 수 있다. 망암(望菴) 변이중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전라도 소모어사가 되어 병마, 군기를 수습한 뒤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지방에 침입하는 왜적에 대비했다. 그 후 조도사가 되어 양천에 주둔하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 3백 량을 만들어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했다. 그는 전란중 조도사를 세 번, 독운사를 두 번 역임하면서 군량 수십만 석을 거두어 명군에 조달했다. 난이 끝난 뒤 함안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조카 자하(紫霞) 변경윤(邊慶胤)도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에 이르 렀으나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 삭직되었다. 취은(醉隱) 변유(邊攸)는 변이중의 현손으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을 지냈다. 변치명(邊致明)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의 아들 변득양(邊得讓) 역시 영조조에 문과에 급제,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변씨는 중국의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아들 조숙진탁(曺叔振鐸) 의 후손이 변읍(卞邑)을 식읍으로 받아 <변(卞)>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변씨는 당나라에서 예부상서를 지낸 변원(卞源)이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 경덕왕 때 <효경(孝經)> 한 질을 가지고 들어와서 귀화한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초계(草溪)의옛이름) 에 봉해진 변원의 후손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은 초계(草溪) 밀양(密陽) 두 본이 있으나 같은 혈족으로 시조 변정실의 증손 변고적(卞高迪)이 밀양에 입향함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여 밀양으로 관적했다가 해방이후 두 집안이 종의를 거쳐 초계변씨 를 종파, 밀양변씨를 지파로 하여 대종회를 같이 하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에 있고, 그곳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변씨는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대제학을 비롯, 많은 명유와 석학을 배출한 영남의 명문으로 조선조에서 대제학 1명, 청백리 1명, 공신 1명,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했는데, 이를 파별로 보면 초계가 10명, 밀양이 5명이다. 대표적인 인물을 본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계파의 변효문(卞孝文)은 한성판윤 남룡(南龍)의 아들로 태종 때 알 성문과에 급제, 세종 때 직제학을 지내고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하였고, 최치운(崔致雲) 이세형(李世衡) 등과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의 증손 변형량(卞亨良)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초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 정자로 있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변훈남(卞勳男)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변헌(卞獻)은 효문의 6대손으로 중이 되어 휴정(休靜) 유정(惟政)에게 사사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으로 참천, 공을 세우고 환속 했다. 시서에 뛰어나 그의 시는 명나라 <황화집(皇華集)>에, 문장은 <동국필원(東國筆苑)>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인물도 많았다. 변연수(卞延壽)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옥포해전에서 적선을 크게 격파하고 다시 당포 해전에 참가했다가 아들 입(笠)과 함께 전사, 뒷날 고향에 충신 정문이 세워졌다. 또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성리학자였던 평천 변옥희(卞玉希)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 역시 충신 정문이 세워졌다. 밀양파에서는 변옥란(卞玉蘭)이 고려 말 공양왕 때 판서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에 책록, 개국 초 검교판 중추원사가 되었다. 그의 둘째아들 변중량(卞仲良)은 태조의 이복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로 조선 개국 후 우부승지 우산기상시를 지냈 는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몰려 방원(芳遠) 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옥란의 셋째아들로 이색(異色)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업, 일찍부터 문명 을 드러냈다. 조선조에 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제2대 대제학에 올라 20년 동안 문형을 맡아보면서 역대 실록 중 가장 복잡 다단한 <태조 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고,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문장과 시에 뛰어나 당대의 1인자로 손꼽혔다.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은 중량의 현손으로 전후 열두 차례나 각 도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면서 국방 강화에 크게 이바지했고 연산군 때 공조판서를 지냈다. 구한말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로는 변상태(卞相泰)가 유명하다. 복씨는 중국의 성씨이다. 우리나라 복씨는 신라 말에 당나라 학사가 오계의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면천(沔川)에 정착, 당시 서해안에 들끓던 해적들을 소탕하여 주민의 생활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이 때부터 면천에 복씨가 살게 되었으나 세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복지겸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시조 복지겸(卜智謙)은 태봉의 마군장군으로 궁예의 횡포가 심해져 민심이 이탈되자 918년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 고려를 세우게 했다. 당시 장군 환선길(桓宣吉)이 반역을 꾀하자 이를 왕에게 밀고 하여 반역의 무리를 주살하였고, 그 후 순군리 임춘길(林春吉)이 반역을 기도하자 이를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 태사에 추증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류리에 제단을 모아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복규(卜奎)를 들 수 있다.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이 철령(鐵嶺)을 넘어 침입해 오자 모든 주군은 성을 버리고 흩어졌으나 당시 원주 방어별감으로 있던 그는 원충갑(元沖甲) 등과 함께 홀로 버티어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적을 소탕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 공으로 지서경유수가 되고 뒤에 충선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으며, 원주의 주민들은 공물과 노역을 3년간 면제받았다. 면천복씨가 조선조에서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7명이고, 첫 번째로 벼슬한 사람은 구암(久庵) 복한이다. 그는 조선 초에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 복여(卜予)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강을 지냈고, 손자 복승정(卜承貞)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거쳐 관찰사에 이르렀다. 복응길(卜應吉)은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창의,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시조 봉우(奉佑)는 고려 인종 때 인물로 그의 탄생에 대해 기이한 설화가 전한다. <하음봉씨세보>에 의하면 1106년(예종 1) 3월 7일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하음산 아래에 한 노파가 물을 긷기 위해 동구 앞 못가로 나가니 그 못에서 서기가 하늘로 뻗치며 우뢰 같은 소리와 함께 못 가운데서 석함이 떠올랐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석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하늘에서 보낸 천사라고 여겨 왕에게 봉헌하였다. 왕은 이를 총애하며 궁중에서 길렀는데 재주와 기능이 뛰어나므로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인물이라 하고 노파가 봉헌했다 하여 성을 <봉(奉)>으로, 국가를 보우 할 인재라 하여 이름을 <우(佑)>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 위위시경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지내고 하음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하음으로 하였다. 본관이 문헌에는 하음 외에도 10여본이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하음봉씨의 분파 세거지에 불과하다. 시조의 묘소는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마니산에 있고, 매년 3월 7일과 10월 8일에 향사한다. 봉씨는 충숙왕 때 지밀직사사를 지낸 문겸공(文謙公) 봉천우(奉天祐) 를 비롯, 조선 초엽에 적지 않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봉여해(奉汝諧)이다. 묵헌(默軒) 봉여해는 당대의 유학자로 저명한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스승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옹원 별좌가 되어 차츰 중용되려던 차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 그에 가담한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넓어 <사경석의(四經釋義)> 등 많은 저술이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아깝게 모두 불타 없어졌다. 공숙공(恭肅公) 봉려(奉礪)는 세종 때 이조참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딸이 세자(문종)의 두 번째 정실 순빈이 되었다가 뒤에 폐함을 당했다. 봉석주(奉石柱)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계유정난에 가담, 정난공신 2등으로 강성군에 봉해지고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역모죄로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 때 신원되었다. 봉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로 본관은 경주 단본이다. 당시 전남 해남과 부산에 각각 1가구씩 있었는데,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살던 봉금복(鳳今卜)의 말에 의하면 1926년에 전남 보성에서 이주하였다고 하며, 원래는 봉씨였는데 민적법 시행 당시 오기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음봉씨의 혈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조 부을나는 고을나 양을나와 함께 제주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용출하여 탁라를 개국, 바다 건너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5곡의 종자와 육축을 가지고 온 세 공주를 맞아 각각 배필로 삼고, 일도(一徒:지금의 제주), 이도(二徒:대정(大靜)), 삼도(三徒:정의(正義)) 등 세 지역에 정착, 목축과 농사를 지어 나라를 융성케 했다고 하며, 그로부터 그의 후손이 고씨 양씨와 함께 900여 년 동안 탁라를 분할 통치해 왔다고 한다. 3을나의 발상지인 삼성혈(三姓穴)은 선사시대 이래 탁라 시조의 성탄지로 성역화되어 왔고,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숭조 치적으로 더한층 존엄시되어 왔던 곳으로 그 후손들이 매년 4월 10일과 10월 10일에 춘추대제를 봉향하고 있으며, 12월 10일에는 제주도 지사가 초헌관이 되어 3을나의 위업을 기리고 도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민제로 향사하고 있다. 부을나의 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삼국시대에 탐라왕자인 부계량(夫繼良)을 들 수 있다. 그는 신라 무열왕 때 안무사로 신라를 예방하여 탐라와의 평화 외교의 길을 트고 왕자의 작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탐라를 치려고 할 때 그가 사신으로 건너가 왕을 설득, 중상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후 고려시대의 인물로 1057년(문종 3) 탐라국 사신으로 고려에 간 부을잉(夫乙仍), 충렬왕조에 총관부영사 행서부사를 지낸 부정재(夫貞才) 등이 문헌에 보이고 조선초 태조 이성계의 어릴 때 스승이었던 변남룡(卞南龍)을 사사한 부일성(夫日誠)의 행적이 초계변씨의 족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대의 세계가 모두 실전되어 소목을 밝힐 수가 없으므로 그 연대와 사적이 확실한 조선 초에 진용교위 후령별장 등을 지낸 부언경을 중시조(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 언경의 증손 부삼로(夫三老)에게 아들 유렴(有廉)과 유성(有成) 형제가 있었고, 유렴의 아들 부세영(夫世榮)이 아들 각(恪) 협 열 (悅) 신(愼) 픽 홍(弘) 등 6형제를 낳았는데 제주 6파의 파조가 되어 그 후손들이 현재 고씨 양씨와 함께 제주도의 지배성을 이루고 있다. 한편 아우 유성은 육지로 건너와 경기도 양주와 연천지방에 자리를 잡아 부씨 역사상 최초로 육지에 뿌리를 내렸는데 현재는 그 집성촌이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하여 친족 일부가 이북에 살고 있다. 부유렴은 아우 유성과는 달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탐라에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탐라는 고려시대부터 동부와 서부 해안에 방호소를 두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그 하나가 별방진이다. 부유렴은 세종조에 어모장군이 되어 별방진에 부임하여 제주 동부지역의 방위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부세영 등 9명의 어모장군과 10명의 절충장군이 나와 전통적으로 탐라를 방어하는 무관집으로 성장해 왔다고 전한다. 현재 제주도 곳곳에 삼을나에 얽힌 유적지와 유적이 많이 보존돼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3신인이 용출했다는 모흥혈(삼성혈)이 1964년 지정문화재 사적 제 134호로 지정되어 정부 보조로 삼성전(三聖殿), 건시문(乾始門), 숭보당(崇報堂)이 중건되었고, 3신인이 정착지를 찾기 위해 활을 쏘았다는 삼사석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으며 바다 건너 온 벽랑공주를 맞았다는 혼인지가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에 있다. 빙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경주 단본이다. 빙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중국에서 온 성씨로서 전라도 곡성현에 많이 있다>고 되어 있지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496성이나 <도곡총설(陶谷叢說)>의298성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비로소 나타난 성씨이다. 시조 빙여경은 원래 명나라 헌종 때 문연각 학사 예부시랑 한림학사 등을 지내고 황제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로 오니 세조가 그를 국빈으로 예우하여 이조참의에 제수하고 경주부원군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시조의 아들 빙청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청의 아들 빙규현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 황해도 수군절도사 중화부사 등을 지냈다. 규현의 손자 빙성의는 선조조에 문천 군수 좌승지 등을 지냈고, 그의 아들 빙황일은 삼척부사를 지냈다. 인조 때의 학자로 유명한 쌍구암(雙龜庵) 빙한익은 황일의 손자이다. 빈(賓)씨의 본관은 수성, 달성, 대구, 영광 등 4본으로 전하나 수성은 달성의 고호이고, 대구는 달성군에서 분립되었기 때문에 수성, 달성, 대구는 오늘날 달성빈씨로 일원화하였다. 다만 영광빈씨만은 상고할 자료가 없어서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우리나라 빈씨의 연원에 대하여 <달성군지> 및 <빈씨보>를 보면 달성빈씨의 시조 빈우광(賓于光)은 빈모가의 후예로서 호가 송헌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제과에 급제, 송나라 말엽에 한림학사 였는데,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귀중한 서적 1만 7천권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학풍을 크게 진작시켰으므로 고려 충숙왕이 수성군에 봉하고 후대했다고 한다. 빈(彬)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대구, 담양 두본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경기도에만 10가구가 있었는데, 그 때 용인군 수여면 운학리에 살던 빈영선(彬永先)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청나라 덕종 때 원외랑(員外郞)으로 있던 빈문(彬文)이 대구에 와서 살았다]고 하며 그 당시로 해서 약 20년저에 용인으로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이 성씨는 동성동본이 있는데 고려말에 명나라로부터 귀화한 거창 사씨와 그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있던 사씨이다. 거창 사씨는 우리 나라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토착 성씨으로 시조와 유래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역사에 나타난 인물로는 고려 예종(16대)때 이부상서 사영과 명종(19대)때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사정유, 고종(23대)때 삼지정사 사흥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청주 사씨의 시조가 명나라에서 귀화하기 이전의 인물이며 거창 사씨로 짐작된다. 1985년 현재 1,11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청주 사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주나라 때 사일 이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그벼슬의 이름을 따서 사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청주 사씨의 시조 사요는 중국 산동성 청주 사람으로 명나라의 개국공신이다. 그가 예부상서에 오르자 소인의 모함을 받자 고려 공민왕(31대)때 우리나라로 망명을 하여 파주에 정착하여 살았다. 후손들이 본관을 중국의 청주로 하였다. 본관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사씨는 모두 청주 사씨로 합본되었다는 설도 있다. 1985년 현재 6,53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중국계 성씨로 옛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1930년 국세조사 때 전북 순창 등지에 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잇으며 1960년 국세조사 때 전국에 1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한산과 진주 2본이다. 중중국의 초군(楚郡)에서 남. 초군이란 지금의 호남(湖南), 호북(湖北)을 통털어 초(楚)라 하였음. 명(明)라 헌종 때 선위사(宣慰使) 사병(思柄)이 있음 1930년 국세 조사 당시 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김씨에서 사씨로 개성했다는 설도 있다. <증보 문헌 비고><전고대방>등 문헌에 있는 성씨인데 1930년 국세조사 때는 볼 수 없다가 1960년 국세조사 때 전국에 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 졌다. <시조 상국진(尙國珍)은 원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자 백제의 재건을 위해 목천 상왕산(확성산) 아래에 숨어지내며 여러 차례에 걸쳐 항쟁을 하자 화가난 태조 왕건이 동물성씨인 상(象)을 주었다. 그후 그의 아들 득유가 1059년(문종14년) 최충이 설치한 시빙제의 학사가 되자 원래의 성인 상(尙)을 회복했다. 후손들이 시조의 근거지인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 간좌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 3일이다. 1985년 현재 2,11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徐씨의 대종은 이천(利川)이다. 서씨의 본관은 「중보문헌비고」에는 153본, 「조선씨족통보」에는 176본이 기록되어 있지만 본서에 기록된 성씨는 11본에 불과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러나 모든 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신일의 후손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땅 서아성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조라고 한다. 우리나라 서씨 가운데서 기자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은 서씨 청주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기씨 등이다. 서씨는 대종이 이천 서씨이지만 명벌로 빼어난 집안은 달성 서씨이다. 삼대 정승에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으로는 달성 서씨를 비롯하여 청송 심씨 청풍김씨가 있을 따름으로 그중에서도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달성서씨 뿐이다. 達成徐씨는 조선조에 정승 9명과 대제학(大提學) 6명, 그리고 왕비 1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달성 서시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다. 그는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에 걸쳐 45년간 6조의 판서와 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 보다도 그는 대학자로써 오히려 이름이 높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한문학과 천문, 지리, 의학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대동여지승람(大同與地勝覽)의 편찬에도 관계했고, 왕의 명령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우리말로 옮겼다. 서거정은 당시 쟁쟁한 세도가였던 안동권씨의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인데 그 무렵부터 달성서씨가 중앙 무대에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성 서씨를 명문에 오르게 한 공은 유명한 서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율곡(李栗谷), 송구봉(宋龜峰)의 제자로 선조 때 5도의 관찰사와 호조, 형조, 공조판서 등을 두루 지내다가 광해군 5년 계축옥사에 걸려 11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서인(西人) 주동이 되었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고비로 그의 가문도 비로소 전성기를 맞게 된다. 3대 정승, 3대 대제학, 3대 학자에 참판(參判)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가 30명이나 나왔으니, 선조조에서 고종조(高宗朝)에 이르기까지 가히 정계를 주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서거정과 쌍벽을 이룰 수 있는 달성 서씨의 후예다. 그는 가세가 청빈하여 독학으로도 13살 때 이미 서경(西經)을 읽을 만큼 천재였다. 그즈음 그는 복잡한 태음력(太陰歷)의 계산을 스스로 했다고 한다. 스무살에 경기, 영남, 호남지방을 유람하고 학문 연구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개성의 동문 밖에 초막을 지어 놓고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하고, 성리학은 물론 도학, 수학, 역학에도 통달했다. 그는 유명한 기생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로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퇴계(退溪), 율곡(栗谷)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알컬어 진다. 이천서(利川徐)씨의 시조는 신라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다. 그러므로 서신일은 모든 서씨의 으뜸 시조라 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인 기준(箕準)의 후예라 한다. 기씨 조선의 끝왕인 기준이 9세기 중엽 위만(衛滿)에게 좇겨 지금의 이천 땅 서아성(徐阿城)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조라고 한다. 서씨사적정해(徐氏史蹟精解)에 따르면 기준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계통(系統)은 이천 서씨, 작은 아들은 청주(淸州) 한(韓)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기준의 7대 손에 만주(萬周)라는 이가 있었는데 나이 40이 넘도록 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 후 꿈에 신령이 나타나 그 일을 크게 칭찬하면서 「자손이 대대로 큰 벼슬을 할 것이다」고 했다. 그 뒤 만주(萬周)는 사냥 나왔던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눈에 들어 서씨라는 성을 받고 「신의 가르침으로 평안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 그는 나이가 80에 이르러 아들 필(弼, 서희의 아버지)을 낳아 번창해 졌다. 서필(徐弼)은 고려 광종(光宗) 때에 벼슬을 한 어진 신하로 명필로 등용되어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이라는 높은 벼슬에 까지 올랐다. 그는 올바른 말로 왕을 받들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광종이 지나친 사치를 하는 것을 보고 옳지 못함을 말하고,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을 특별 대우하는 것을 시정케 했다. 심지어는 왕이 아끼는 말이 죽었을 때 말을 관리하는 신하를 목 베려는 것을 보고 공자가 마굿간이 탓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먼저 물었다는 고사를 들어 왕의 마음이 풀렸다는 일화가 있다. 서희(徐熙는) 광종 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그 때까지 10여년간 끊어져 있던 국교를 다시 트고 송태조(宋太租)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높은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 거란이 침입하자 적장 소손녕(蘇孫寧)과 단독으로 담판하여 마침내 그를 굴복시킨 외교관이요 정략가로 역사상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石(석)氏 고려말의 유명한 학자 우탁(禹倬)을 배출하고 우현보(禹賢寶)·우성전(禹性傳)등의 인물이 나온 우(禹)씨는 문헌에 단양(丹陽)·예안(禮安)·영주(榮州)·강주(剛州)·목천(木川)등 5본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목천(木川)을 제외한다른 모든 우(禹)씨는 모두 단양(丹陽)에서 갈려진 것으로 오늘 날에는 단양우(丹陽禹)씨 단본으로 일원화 되었다. 현재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는 목천우(木川禹)씨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애기가 전해지고 있다.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세울 무렵 목천(木川, 지금의 충남 천원군) 지방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간했다는 것이다. 이에, 몹시 노한 왕건(王建)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상(象, 꼬끼리)·돈(豚, 돼지)·장(獐, 노루) 등의 성을 붙여주었다는데 그중 우(牛)씨가 뒷날 천(千)씨로, 다시 우(禹)씨로 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문헌을 보면 목천상(木川尙)씨, 목천돈(木川頓)씨, 목천장(木川張)씨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꾼게 아닌가 하는 신빙성을 주기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단양우(丹陽禹)씨는 시조 우현(禹玄)의 9대손 내지 10대손에서 크게 10파로 나눠진다. 대제학공(洪書)파·예안군(洪富)파·집의공(洪得)파·판서공(洪命)파 등 5파로 모두 고려말(高麗末) 정승 우현보(禹賢寶)의 아들 형제들이고, 창의공(元光)파·봉상정공(元明)파·문강공(國珍)파·정평공(仁烈)파·문숙공(希烈)파 등 10파가 그것이다. 그 중 우현보(禹賢寶)의 아들 5파가 특히 번창하여 지금 우(禹)씨의 80%를 차지하고 파별로는 예안군(洪富)파와 안정공파가 대파로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단양우(丹陽禹)씨는 시조 우현(禹玄)의 5대손인 우중대(禹仲大)의 아들 5형제 천규(天珪)·천계(天啓)·천석(天錫)·천우(天佑)·천성(天成)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게 되면서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 때가 고려 충렬왕조 전후 무렵이다. 우현보(禹賢寶)는 고려 말엽의 청렴 강직한 명신(名臣)이다. 그는 그 때의 가장 유명한 이색·정몽주 등과 가깝게 지냈다. 한 때 정몽주와 한 패라는 죄로 조선에서 구양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그의 아들 5형제는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고 일을 꾀하다가 모두 귀양을 갔다. 귀양지에서 홍서(洪書)·홍득(洪得)·홍명(洪命)은 죽음을 당했다. 둘째 홍부(洪富)와 셋째 홍강(洪康)은 풀려나와 조선에서 벼슬을 했다. 우성전(禹性傳)은 선조 때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려지면서 남인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다. 그가 남산 밑에 살았기 때문에 그와 그를 따르는 벼슬아치들은 남인이라 불렀었다. 이퇴계 문인으로 선조 1년에 문과에 급제한 우성전(禹性傳)은 홍문관, 교리, 의정부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 그의 반대파인 북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고 대사성(大司成)으로 특진되어 왜병을 경남 의령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평에서 죽었다. 지은 책으로는 역리(易理, 역학의 이치)와 이기설(理氣說) 등이 있다. 우희열(禹希烈)은 태종 대 충청·경기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거쳐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특히 관개(灌漑, 농사 짓는데 필요한 물을 끌어들이는 일)에 식견이 높아 각 도에 파견되어 제방공사를 독려했다. 그의 5대손으로 나주·충주 목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고 유학자로 이름이 알려진 우복룡(禹伏龍)이 있다. 조선시대에 단양우(丹陽禹)씨는 3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유(류, 柳)씨는 차(車)씨와 같은 시조에서 갈린 동족이성(同族異姓)으로 예로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려 병? 유(류, 柳)씨는 고려시대에 4대 명족(名族)의 하나로 꼽을 만큼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유(류, 柳)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의 대승(大丞) 유(류)차달(柳車達)이다. 원래 유주(儒州)지방의 부호였던 그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사재를 털어 수레 1천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이 되었으며, 태조로 부터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효전은 차성(車姓)을,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유성(柳姓)을 잇게 했다고 한다. 장자가 차(車)성을 이은 것은 유차달(柳車達)의 6대 조상의 성이 차(車)씨였기 때문이다. 그의 선대에서 차씨에서 류씨로 변성한 사실을 알게된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수 없고, 또한 류씨로 변성한 지 이미 6세가 지났으니 이 또한 폐할수 없다>하고 그의 큰아들 효전은 조상의 본성인 차씨를 계승케 하고, 둘째아들 효금은 유주에 머물러 살면서 류씨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유(류, 柳)씨의 본은 문헌에 130본이 전하고 있지만, 현재는 대종인 문화유(文化柳)씨를 비롯하여 서산(瑞山), 풍산(豊山), 진주(晉州), 전주(全州), 고흥(高興)등 7본 뿐이라는게 유(류, 柳)씨 대종회의 애기다. 고려 때 명족이었던 류씨는 조선 초기부터 정계의 중추에 자리를 굳혀 상신 13명, 문형 2명, 호당 10명, 청백리 12명, 공신 23명, 장신 4명, 문과 급제자 425명에 정승 14명을 배출했는데, 특히 청백리 12명은 성씨별로 이씨 52명, 김씨 2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이를 본관별로 구분하면 문화류씨가 상신 8명, 문형 1명, 호당 5명, 청백리 4명, 공신 13명, 장신 1명, 풍산류씨가 상신 2명, 문형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진주류씨가 상신 2명, 호당 1명, 청백리 4명, 공신 5명, 장신 3명, 선산류씨가 호당 2명, 전주류씨가 청백리 3명, 공신 2명이다. 시조 류영(柳英)은 신라시대 호족의 후예로 신라 말에 정국이 어수선 해지자 흥양(興陽)으로 낙향하여 고려에 불복하고 호장이 되었다. 그 후 그의 7세손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정승을 지내고 고흥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시조가 낙향한 흥양이 고흥으로 바뀌고, 중조 류청신의 사적지 역시 고흥이기 때문에 본관을 고흥으로 하게 되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류청신과 그의 손자 류탁(柳濯)을 들 수 있다. 영밀공(英密公) 류청신의 자는 수장(守長)이고, 승무의 아들이다.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몽고어를 배워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이 되었다. 그 후 왕의 특명으로 고향인 고이부곡(高伊部曲)을 고흥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어장군에 특진, 밀직승선, 동지밀직, 감찰대부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1298년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부사를 거쳐 판밀직사사를 지내고, 1308년 찬성사에 이어 어 첨의정승에 올라 고흥군에 봉해 졌다. 1321년 정조사로 원나라에 가서 죽었다. 천안의 부조묘, 고흥의 운곡사(雲谷祠)에 제향되었다. 그의 손자인 충정공 류탁의 자는 춘향(春鄕)이고, 호는 성제(誠齊).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청신의 손자다. 음보로 등용되었으며,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귀국했다. 감문위 대호군이 된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고흥군에 봉해졌다. 합포만호를 거쳐 찬성사가 되었으며, 충정왕 때 전라도 만호가 되어 해적의 침범을 막았으며,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에 올리기도했다. 1353년(공민왕2) 첨의찬성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좌정승으로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하여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으며,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65연도 첨의정승으로 고흥부원군에 진봉되고, 1369년 노국대장 공주의영전 신축을 방대하다가 투옥되었으나 이색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371년(공민왕20) 신돈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조선시대에서는 류준(柳濬), 류습(柳濕) 등이 개국 초부터 정계의 중추에 참여하여 기반을 굳히고 호당 3명, 공신2명, 문과 급제자 23명을 배출했다. 호안공 류준은 고려 말에 밀직부사상의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에 봉해졌으며, 정종 때 판삼사사로 치사 했다. 양정공 류습은 탁의 아들로 조선 건국 후 과의 상장군이 되고, 태종 때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후 중군 도총제에 승진, 세종 초에 우군 원수로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다. 류세웅(柳世雄)과 류경(柳涇)은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3등이 되고 흥양군과 고흥군에 각각 봉해졌다. 조선 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 어우당 류몽인(柳夢寅)의 자는 응문(應文)이며, 호는 어우당(於于堂)이고, 시호는 의정(義貞)이다. 1582년(선조15)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 1593년 문학이 되었다. 선조 말년에 황해도 관찰사 등을거쳐 좌승지, 도승지를 역임했다. 1612년 광해군 4년에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이조참판에 전임했다. 중북파의 영수로 폐모론이 일자 이이첨(李爾瞻)과 대립, 그에 가담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에 화를 면했으나 이괄의 난에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아들 약과 함께 처형되었으나, 류응시(柳應時)의 무고로 처형되었으나 정조 때 신원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세 번이나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으며 설화문학의 대가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흥의 운곡사, 고산의 삼현영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우야담(於于野談)> <어우집(於于集)>등이 있다. 류숙(柳潚)은 선조 때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부제학에 오르고 영주군에 봉해졌다. 인조반정 후 역신의 심복이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이괄의 난 때 숙부 류몽인의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당했다. 류활 또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의정부 검상이 되었으나 이괄의 난 때 숙부 류몽인 사건에 연루되어 보성에 유배 되었다. 근세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류홍석, 의병장 류인석, 3·1운동 때 순국한 류관순등이 유명하다. 유(류)홍석은 한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자는 효백(孝伯). 호는 외당(畏堂)이다. 1895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만주 봉천으로피신했다. 1897년(광무1)에 귀국, 진위대 특무 민긍호(閔肯鎬)와 이강년등과 함께 다시 항일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의병 1천여명을 모아 가평에서 싸우다가 부상하여 중국으로 망명, 요동 회인성에서 죽었다. 유(류)관순열사는 한말 순국처녀로 류중권의 딸이다. 1916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교구의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에 교비생으로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 때 대한독립운동 결사대를 조직하여 중앙에서 활약하였고,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사람들과 협의하여 그 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병천)장터에서 수천의 군중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주모자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공주재판소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서울로 압송 되어 7년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끊임없이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단장이 수여되고, 파리의 잔다르크 기념관에 영정이 봉안되었고 서울, 천안 등지에 동상이 세워졌다.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유주(儒州)지방의 부호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사재를 털어 수레 1천량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해 주었다. 그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선대에서 차씨에서 류씨로 변성한 사실을 알게된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수 없고, 또한 류씨로 변성한 지 이미 6세가 지났으니 이 또한 폐할수 없다>하고 그의 큰아들 효전은 조상의 본성인 차씨를 계승케 하고, 둘째아들 효금은 유주에 머물러 살면서 류씨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그후 10세를 전후해서 풍산(豊山: 세대 미상 자성(資成)), 서령<서산>(瑞寧;<瑞山>), 전주(全州), 진주(晉州), 선산(善山) 등 6개 본으로 분적되었으나 계보상으로는 문화류씨의 한 분파로 다루어지고 있다. 고려조의 명족이었던 류씨는 조선 초기부터 정계의 중추에 자리를 굳혀 상신 13명, 문형 2명, 호당 10명, 청백리 12명, 공신 23명, 장신 4명, 문과 급제자 425명을 배출했는데, 특히 청백리 12명은 성씨별로 이씨 52명, 김씨 2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이를 본관별로 구분하면 문화류씨가 상신 8명, 문형 1명, 호당 5명, 청백리 4명, 공신 13명, 장신 1명, 풍산류씨가 상신 2명, 문형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진주류씨가 상신 2명, 호당 1명, 청백리 4명, 공신 5명, 장신 3명, 선산류씨가 호당 2명, 전주류씨가 청백리 3명, 공신 2명이다. 문화류씨를 중흥시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류공권(柳公權)과 류경(柳璥)을 들 수 있다. 문간공(文簡公) 류공권은 고려 명종조에 정당문학, 참지정사, 판예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문학에 능하고 서예에도 뛰어나서 특히 초서, 예서를 잘 썼다. 그의 손자 문정공 류경은 고려의 검의중찬으로 자는 천년(千年)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 때 대사성에 이르렀다. 당시는 최씨가 무단정치를 한 때로서 최항(崔沆)이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최의가 정권을 한손에 쥐고 행패가 심하자 1258년(고종45)년 김준(金俊)등과 협력하여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반환, 좌우위 상장군에 올라우부승선을 겸임하고, 추성위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정방(政房)을 편전에 설치, 전주를 장악하고 국가의 기무를 결재했다. 추밀원 부사를지내고, 1262년(원종3)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 다음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를 역임했다. 1270년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강화도에서 적에게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와서 평장사 판병부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파직되어 애도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276년(충렬왕2)첨의시랑찬성사 감수국사판판도사사가 되어 무고를 받은 김방경(金方慶)을 구출하고, 다음해세자부를 거쳐 1278년 찬성사 판전리사로 사직을 청하여 첨의 주찬이 더해지고 치사했다. 문자에 뛰어나 신종, 회종, 강종, 고종등 4대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여러 번 지공거를 역임했다. 이존비(李尊庇), 안향(安珦) 등 많은 학자가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류만수(柳曼殊)는 경의 현손으로 우왕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던 중 개경 숭인문에서 최영(崔瑩)에게 패했으나 회군의 공으로 지문하부사가 되고 창왕 즉위년에 윤호(尹虎)등과 함께 폐위된 우왕을 강릉으로 압송했다. 공양왕때 문하찬성사로 재임중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문하시랑 찬성사에 있었으나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살해 되었다. 충경공(忠景公) 류량(柳亮)은 공양왕때 이조전서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중추원 부사로서 강릉도 관찰출철사를 겸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4등으로 문성군에 봉해지고 1415년 우의정에 올랐다. 정숙공(貞肅公) 류정현(柳廷顯)은 공양왕때 좌대언으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후 풀려났다. 태조때 완산부윤 태종 때 병조판서, 찬성사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문간공(文簡公) 류관(柳寬)은 개국원종 공신에 녹훈되고 태종 때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를 겸했으며, <태조실록(太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 때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문희공(文僖公) 류순(柳洵)은 성종 때 형조참판이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2 등에 녹훈되고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충숙공(忠肅公) 류관(柳灌)은 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유배도중 사사되었다. 문정공(文貞公) 류전(柳琠)은 선조조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평난공신 2 등에 추록되고, 시령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충간공(忠簡公)류상운(柳尙運)은 숙종 때 영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의 배척을 받는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 삭직되었으나 곧 판중추부사에 전임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당쟁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노론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들 류봉휘(柳鳳輝)의 자는 계창(季昌)이며, 호는 만암(晩菴)이다. 1684년(숙종10)진사가 되고, 1699년 정지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 부제학, 동지의 금부사를 거쳐, 1721년(경종1)사직으로 노론이 세제(영조)책봉을 주장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실패했다.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현되자 소론의 영수로서 극간하여 이를 철회케 하여 노론을 실각시켰다. 다음해 우부빈객이 되고, 1723년 이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 왕의 탕평책으로 노론, 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이 되고, 이어 소론 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올랐으나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 외에 사육신의 한사람인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실학자의 태두(泰斗) 류형원(柳馨遠)등이 유명하다. 류형원(柳馨遠)의 자는 덕천(德天)이며, 호는 반계(磻溪)이다. 165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1665년(현종6)과 다음해 학행으로 각각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지평, 여주 등지로 옮겨 살다가 1668년 부안현에 정착한 후 저술과 학문연구에 전심하면서 여행을즐겨 수차 전국을 유람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시작되는 맹아기(萌芽期)에 실학을 학문으로서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자신의농촌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불합리한 사회제도 개혁과 경제적 혁신을 조선, 중국의 역사적 문헌에서 고증하여 정밀한 실증적 태도로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유교적인 윤리와 정치의 시정을 사회개혁의 전제로 하고, 이를 경제적 관계로 결부시켜 국가의 체계를 근본적으로수정하고자 했다. 특히 토지는 천하의 근본이라는 중농사상을 기반으로 조세, 역, 공, 과거, 교육, 관료·군사등 전반적인 면의 혁신을 병해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상은 이이(李珥)의 영향을 받았고,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었다. 1770년(영조46)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이 간행되고, 기타 많은 저서는 목록 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호조참의, 찬서에 추증되고 부안의 동림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기행목록(紀行目錄)>, <속강목의보(續講目疑補)>, <정음지남(正音指南)> 외 14권이 있다. 풍산류씨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들수있다. 그의 자는 이견(異見)이며,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4년(명종19년)에 사라마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고, 다음해 검열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 1569년(선조2)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하여 감찰, 전적,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이 해 수찬으로써 사가독서를 했다. 그후 정언, 이조좌랑, 응교, 검상을 거쳐 1579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 부제학을 거쳐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고, 1581년 부제학이 되었나, 1582년 대사간에 승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다음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584년 예조판서로 지경연 춘추관사를 겸직했고 1588년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그 후 대사헌,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1590년 우의정에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 졌다. 다음해 좌의정이되어 이조판서를 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군무를 총괄하여 이순신, 권율등 명장을 등용했고, 이어 영의정이되어 왕을 호종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차사가 되어 다음해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 그 수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 화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등 군비 확충에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했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간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삭,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측히 영남유생들의 추창을 받았다. 안동의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영모록(永慕錄)>, <환화록(歡花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喪禮攷證)>, <무오당보(戊午黨譜)>, <침경요의(鍼經要義)>등이 있다. 그의 형 문경공(文敬公) 류운룡(柳雲龍)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임진왜란때 사복시 첨정을 지낸후 풍기군수로 나가 토적을 소탕하고 뒤에 원주목사를 지냈다. 문헌공(文獻公) 류후조(柳厚祚)는 철종 때 문과에 급제, 고종조에 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류세명(柳世鳴)은 류원지(柳元之)의 문인으로 숙종때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 교리 등을 지내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일찍이 공충도 도사로 있을 때 서천군수의 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한 바 있으며 성리학에 밝고 문명이 있었다. 서령류씨가 낳은 인물중 고려조에서는 문희공(文僖公) 류숙(柳淑)이 유명하다. 그는 충혜왕때 문과에 급제, 강릉대군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가 있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함께 귀국하여 좌사의 대부를 지내다가 조일신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조일신(趙日新)이 죽은 뒤에 다시 등용되어 지추밀원사에 이르고 기철(奇轍) 일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워 안사공신이 되었다. 그후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충근절의찬화공신이 되고 서령군에 봉해졌다.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에도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벼슬이 지춘추관사에 이르렀으나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는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교살당했다. 조선조에는 류숙의 증손의 태재(泰齋) 류방선(柳方善)이 유명하다.그는 세종때의 학자로 유일로 천거되어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역학에 전심하여 서거정(徐居正)ㆍ이보흠(李甫欽)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시문에 뛰어나고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의 아들 류윤겸(柳允謙)은 아버지에게서 두보의 시를 배우고 세조의 부름을 받아 두시 찬주에 백의로 참여했다. 성종 때는 젊은 문신들에세 두시를 가르쳤고,왕명으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25권을 완성하여 간행했다. 그후 다시 왕명으로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변역했다. 벼슬은 돈령부 도정에 이르렸다. 설강(雪江) 류사(柳泗)는 증종 2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承旨)가 되어 권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를 받고 퇴직했다.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등과 교유가 있었고 당대의 대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동촌(東村) 류대춘(柳帶春)은 성혼(成婚)ㆍ이이(李珥)의 문인으로 경서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전주류씨는 조선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 상당한 세력을 평었으나 사화, 당쟁에서 큰 타격을 받은 씨족으로 기록된다. 그 대표적인 예를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에게서 볼 수 있다. 류영경은 임진왜란 때 초유어사가 되어 많은 사병을 모집하고 호조참의에 올랐다. 효정공(孝靖公) 류정량(柳廷亮)은 류영경(柳永慶)의 손자로 선조의 딸 정휘옹주와 결혼, 전창위에 봉해졌고, 광해군 4년 류영경 일가가 멸족될때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복관되어 도총관에 이르렀다. 정간공(貞簡公) 류복명(柳復明)은 경종 때 지평이 되어 세제(世弟: 영조(英祖)) 책봉을 반대하는 소론의 류봉휘, 조태구 등을 탄핵했다. 이어 신임사화(辛任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가 영조 즉위 후 김일경(金一鏡) 등의 처형을 상소하고 복직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어 기로소에 들어가고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류경창(柳慶昌)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현종때 대사헌, 대사성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진주류씨는 분관조(分貫祖) 류인비(柳仁庇)의 손자대에서 익양공파와 안간공파로 대별된다. 조선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문화류씨에 버금가는데, 거의가 익양공파에서 나왔다. 익양공 혜방(惠芳)의 아들로 조선태조 때 예문관제학을 지낸 정평공(靖平公) 류순(柳珣)은 세종 때 형조참의,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아들 류겸(柳謙)과 함께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문간공 류담은 순(珣)의 4촌이고, 겸(謙)의 5대손 충정공(忠正公) 류빈(柳濱)은 갑자사화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중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문성공(文成公) 류순정(柳順汀)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때 알성문과에 장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진 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4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진 류홍(柳泓)은 그의 아들 이고, 정국공신 4등으로 진양군에 봉해진 류영(柳英)은 그의 조카이다. 그리고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중종조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오른 류부(柳簿)도 그의 조카이다. 정민공(貞敏公) 류진동(柳辰仝)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 도총관 등을 지내 벼슬 열력도 화려하지만 그보다 문한으로 이름이 높았다. 문사에 뛰어나고 죽화를 잘 그렸으며, 글씨도 능해서 남대문의 현판 <숭례문(崇禮門)>이 그의 글씨라는 설도 있다.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인조조에 진무공신 2등으로 진양군에 봉해진 장의공(莊毅公) 류효걸(柳孝傑)과 효종조에 훈련대장, 총융사 등을 지낸 무민공(武愍公) 류혁연(柳赫然) 부자, 인조조에 총융사를 지낸 충장공(忠壯公) 류림(柳琳), 현종조에 훈련대장, 우포도대장, 형조판서 등을 지낸 무숙공(武肅公) 류상필(柳相弼)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밖에도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경상도, 평안도, 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충경공(忠景公) 류형(柳珩),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 3등으로 청천군에 봉해진 충정공(忠靖公) 류순익(柳舜翼), 현종 때 부총관, 포대대장 숙종 때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충의공(忠毅公) 류병연(柳炳然), 숙종조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경종 때 훈련중군으로 신임사화에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사형된 무민공(武愍公) 류취장(柳就章), 영조조에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진양군에 봉해진 문장가로 고명했던 혜정공(惠靖公) 류엄(柳儼) 등도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다. 그리고 진주류씨에서 갈렸다는 영광파에서는 세조 때 호조참의, 경주부윤 등을 지낸 정숙공(靖肅公) 류규(柳規)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3등으로 오성군에 봉해진 문양공(文襄公) 류자환(柳子煥), 연산군 때 권세를 누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 류자광 3부자가 나왔다. 류자광은 조선 도총관을 지냈으며, 자는 우복(于復)이다. 일찍이 건춘문을 지키던 갑사로서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자원해서 종군, 돌아와서 병조정랑이 되고, 온양 별시문과에서 장원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옥사를 일으켜 이들을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1 등에 무령군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에 임명되자 서자 출신이라 하여 대간의 논핵이 많았다. 그 후 정조사, 등극사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91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일찍이 함양군에덜러 시를 지어 현판케 했으나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이를철거함으로써 이때부터 그에게 사원을 품게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을 것을 기화롤 세조의 찬위에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하여 마침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스스로 옥사를 다스리고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제거하여 훈구파의 기반을 굳혔고, 권세의 정상에 올라 승록대부에 승진했다. 그후 대간의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 때 성희안(成希顔)과의 인연으로 의거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1등으로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음해 대간, 홍문관, 예문관 등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흥양에 부처, 해평에 유배되었다. 이어 경상도의 변군에 유배되었고, 실명한 뒤에 배소에서 죽었다. 선산류씨에서는 나옹(懶翁) 류성춘(柳成春)과 문절공(文節公) 류희춘(柳希春)이 나왔다. 류성춘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로 유배된 후 윤구(尹衢), 최산두(崔山斗) 등과 시주로 교유, 호남의 삼걸이라 불렸다. 그의 아우 류희춘은 최산두,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명종 때 양재역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류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 때 전라도 관찰사·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경사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저서 <미암일기(眉巖日記)>는 1568년에서 1577년에 이르는 사이의 공사의 경력을 쓴 것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의 부인 송덕봉(宋德峰)도 당대에 손꼽히는 여류시인으로서 <송씨시고(宋氏詩藁)>를 남겼다. 시조 류정은 고려 중엽에 발신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좌우 위상장군에 오르고 진강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들 숙(淑)이 진령부원군, 손자 돈식(敦植)이 진원부원군, 증손 홍림(洪林)이 진양부원군, 현손 부가 진흥부원군에 봉해져 5세가 내리 지금의 진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류씨는 모두 고려조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이라 하고, 진주류씨의 근원도 문화류씨의 분적종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에 대한 문헌적 고증이 분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양군 원당리에 4세 홍림이 살던 터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또 1219년에 매몰된 최충헌(崔忠獻)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진강국부인 류씨로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상장군 류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조 이전부터 진주를 본거로 삼고 토착하였음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정계의 진주류씨를 <본진주(本晉州)>,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진주류씨를 <이진주(移晉州)>로 구분하고 있다. 진주류씨는 고려 중엽에 중흥하여 5세가 내리 봉군된 명문으로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문과급제자 47명, 문형 1명, 호당 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다. 문정공(文靖公) 류근(柳根)의 자는 매부이며, 호는 서경(西坰).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1572년(선조5)별시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1587년 이조좌랑 으로서 문신정시에 다시 장원했다. 이 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나 선위사에 특임되어 이를 맞았고, 1591년 좌승지로서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에 호종하여 예조참판에 특진되었으며, 호성공신 3 등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지고 1593년 도승지로 경성 안무사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어 한성부 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597년 운량검찰사로 명나라로부터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했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다녀왔고, 1604년 호성공신 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농단하므로 사직하고 괴산에 은거, 1613년(광해군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한 파의 한 사람이라 하여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보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저서에 <西坰集>이 있다. 류계종(柳繼宗)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으로 청양군에 봉해졌고, 영희공(榮僖公) 류구는 근의 손자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으로 진주군에 봉해졌다. 이 밖의 인물로는 양정공(良靖公) 류용생(柳龍生), 문정공(文貞公) 류인숙(柳仁淑)등이 있다. 류용생은 태종 때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벼슬이 형조판서에 올랐다. 류인숙의 자는 원명(原明). 호는 쟁호.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헌에 이어 1519년 부제학·도승지를 역임, 이 해 기묘사화에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투옥되었다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도움으로 석방,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1538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한성부 좌윤, 대사헌, 대사간에 이어 형조, 호조, 공조, 이조의 판서가 되고,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대윤 윤임(尹任)의 일당으로 명종의 즉위에 반대하고 계림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아 무장에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1570년(선조3)신원되고, 1577년 복관되었다. 류희령(柳希齡)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원년에 이조참의에 올랐으나 명종 원년에 일어난 을사사화 때 대윤 일파로 몰려 금산에 유배되었다. 류응수(柳應秀)는 임진왜란 때 토적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삼수군수에 이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함흥의 3걸로 불렸다. 유(劉)씨는 원래 중국 제요의 후손이 유땅에 봉해지면서 유씨로 성을 받은 것이다. 그후 수천년을 지나 초한 시대에 이르러 유방(한고조)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창건하면서 유씨가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유(劉)씨는 강릉유씨를 대종으로 충주(忠州), 거창(居昌), 금성(金城), 백천(白川), 연안(延安), 전주(全州), 경산(慶山), 평산(平山) 등 여러 본이 전한다. 그러나 지금도 현존하는 본이 얼마인지 확실하지 않다. 역사가 오랜 충주유(忠州劉)씨를 제외한 이들 유씨는 대부분 강릉유(江陵劉)씨에서 갈려 나간 것이다. 우리나라 유(劉)씨의 도시조인 유전(劉筌, 諱는 筌, 字는 原甫, 號는 竹諫, 謚은 文襄公)은 한고조의 41세손으로 도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송나라에서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한(漢, 한고조)나라 유방(劉邦, 高皇帝, 國號는 漢, 묘는 長陵, 壽 53세, 在王位 4년, 在帝位 8년)의 40대손으로 송(宋)나라 인종황우신묘(仁宗皇祐辛卯, 서기 1051년) 4월 8일 팽성(中國江蘇省에 있는 縣으로써 송나라의 邑이)에서 출생하였으며, 신종원풍임신(神宗元豊壬戌, 서기 1082년) 8월에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로 망명하였다. 그 때 나이 32세요, 고려(高麗) 문종(文宗) 36년이다.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조선시대의 兵曹判書와 같고, 현재의 國防長官에 해당됨)를 지냈으며, 예종(睿宗) 17년 임인(壬寅, 서기 1122년)년 2월 7일에 졸(卒향)하시니 향년(享年) 72세다. 유전의 묘소는 경북영천군 영천읍 녹전동에 있다. 강릉유씨 세보(江陵劉氏 世譜)에 의하면 유전(劉筌)은 고려에 들어온 후 경북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그를 위한 사우가 건립되고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그의 맏아들 유견규(劉堅規)가 거타군(居陀君, 居陀는 거창의 옛 이름)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거창유씨라 하였고, 유전의 12세손인 유창(劉敞, 諱는 敬, 字는 太和, 號는 仙菴(태조가 아호(雅號)를 줌, 1352∼1420.10. 9, 朝鮮 世宗 2년 69세 卒)의 증조 유승비(劉承備)가 좌복야 벼슬을 지내고 강릉으로 은퇴했다고 한다. 그 후 유창(劉敞, )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옥천은 강릉우계 지방) 그의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강릉(江陵)과 거창(居昌) 두 본으로 갈라진 원인이다. 백천유씨는 유전의 8세손 유국추가 백천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백천으로 삼았다. 유창(劉敞)은 일찍이 전록생(田祿生)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대성했다. 공민왕 20년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박사, 문학주서를 역임했다. 평소 이성계와 친하여 가까이서 학문을 애기했고, 이성계의 건국을 뒤에서 도와 개국공신 2등이 되었다. 그후 1394년 좌부승지(左副承旨),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예문관대제학(藝文?大提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태종(太宗) 15년에 숭정대부 옥천부원군(崇政大夫 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선암문집(仙庵文集)을 남겼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어짐을 높이 사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어필(御筆)를 내렸다. 사후(1421년)에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봉해졌으며, 익(謚)은 문희(文僖)공이다. 유호인(劉好仁), 유한량(劉漢良)은 그의 후손으로 뛰어난 학자다. 유호인(劉好仁)은 선조 때 이율곡(李栗谷) 문하에서 배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조정에서는 그의 어짐을 듣고 여러번 벼슬길에 나오길 권했지만 그 권을 뿌리쳤다. 유한량(劉漢良)은 선조 때 효행으로 천거되어 무장현감을 지내면서 어진 정치를 해서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 방어에 참가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이 밖에 이름난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임진강 방어선에서 전사한 유극량(劉克良, 전라수찬), 예학자로 유명한 유희경(劉希慶), 영조 때의 학자 유언일(劉彦一), 고종 때의 학자이자 시인이며 전서(篆書), 해서(楷書)에 뛰어난 유재건(劉在建), 산수화의 대가이던 유재소(劉在紹), 산수, 인물, 화조에 뛰어났던 화가 유숙(劉淑)등이 있다. 근세의 인믈로는 한말의 선각자 유대치(劉大致)와 독립운동가 휴호대(劉好大)가 두드러진다. 조선시대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23명이다. 이중 충주(忠州)와 강릉(江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劉永三)는 유방(劉邦)의 70대손이요. 유전(劉筌)의 31대손이며, 유창(劉敞)의 20대손이다. ★ 1985년 조사시 강릉계 161,634명, 거창계 32,790명, 백천계 8,91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엇다. 유씨(劉氏) 행렬도(行列圖)- 돌림자 (행렬도란 이름의 돌림자를 말함) 19세손 : 원(源) 20세손 : 병(秉) 21세손 : 묵(默) 또는 열(烈) 22세손 : 시(時) 또는 재(載) 23세손 : 호(鎬) 또는 종(鍾) 24세손 : 승(承) 또는 영(永) 25세손 : 근(根) 또는 상(相) 26세손 : 용(容) 또는 환(煥) 27세손 : 균(均) 또는 식(埴) 28세손 : 진(鎭) 또는 현(鉉) 29세손 : 제(濟) 또는 수(洙) 30세손 : 환(桓) 또는 동(東) 31세손 : 영(榮) 또는 변(變) 32세손 : 규(圭) 또는 기(基) 33세손 : 선(善) 또는 익(謚) 34세손 : 순(淳) 또는 태(泰) 35세손 : 환(模) 또는 래(來) 36세손 : 희(熙) 또는 연(然) 37세손 : 배(培) 또는 곤(坤) 38세손 : 은(銀) 또는 기(錡) 39세손 : 해(海) 또는 홍(洪) 40세손 : 채(彩) 또는 정(楨) 41세손 : 훈(勳) 또는 노(魯) 42세손 : 완( ) 또는 중(重) 43세손 : 연(鍊) 또는 록(錄) 44세손 : 택(澤) 또는 현(泫) 45세손 : 표,작(杓) 또는 빈(彬) 46세손 : 령(寧) 또는 지(志) 47세손 : 환,선(還) 또는 진(珍) 정(鄭)씨의 본관은 247본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전하는 것은 대략 30본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정(鄭)씨의 원조(元祖)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新羅) 6촌중 자산 진지촌의 촌장(村長)인 지백호이다. 오늘날 정(鄭)씨의 각 본관별 시조는 서산(瑞山) 랑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같이 지백호를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경주정(慶州鄭)씨가 큰 집이라는 데는 반론이 없는 것 같다. 종손(宗孫)으로 정(鄭)씨의 장종손(長宗孫), 큰집 격이라는 경주정(慶州鄭)씨의 족보를 보면 지백호를 1세(世)로 하고, 연일정(延日鄭)씨의 시조 정종은(鄭宗殷)은 지손(支孫) 계통으로 31세, 온양정(溫陽鄭)씨의 시조 정보천(鄭普天)은 장손(長孫) 계통으로 34세, 초계정(草溪鄭)씨의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36세, 경주정(慶州鄭)씨의 시조 정진후(鄭珍厚)는 42세로 나타나 있다. 정(鄭)씨 가운데 같은 혈통이 아닌 동성이족(同性異族)으로 서산정(瑞山鄭)씨가 있다. 서산정(瑞山鄭)씨의 시조는 중국(中國) 사람으로 송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해 온 것으로 전한다. 금화부 포강현 절강인 정옹중의 증손 정신보(鄭臣保)가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서산(瑞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인경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을 남긴 정(鄭)씨로는 의종 때의 명신(名臣) 정습명(鄭襲明)과 그의 6대손인 유명한 정몽주(鄭夢周) 등이 있고, 무신(武臣)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 쟁쟁한 학자이며, 문인이었던 정항(鄭沆)과 정과정곡(鄭瓜亭曲)을 남긴 그의 아들 정서(鄭敍), 그리고 고려 중엽에 시인(詩人)으로 이름 높았던 정지상(鄭知常), 문종 때 이름난 학자 정배걸(鄭倍傑) 등이 두드러진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동래 정씨가 두각을 나타내어 영의정 5명, 좌의정 7명, 우의정 5명 등 도합 17명의 재상이 나와 정(鄭)씨 가운데 으뜸이었고, 그 다음이 연일정씨, 청주정씨, 온양정씨, 봉화정씨의 순이다. 정씨는 1930년 통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106,082세대로서 전국 성씨중 5위를 차지하는 대성이다. 1985년 조사에서 우리나라에는 122개의 본관과 1,780,6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주정(慶州鄭)씨의 시조 지백호(知伯虎)는 경주 화산에 강임하여 부족국가이던 함한시대의 진한사로 6부 가운데 수장(首長)으로서 동남쪽에 위치한 진지부의 촌장이 되고 서기전 69년 3월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서기전 57년(朴赫居世)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국왕으로 추재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그는 건국좌명공신(建國佐命功臣)이 되고, 서기 32년(유리왕 9년)에 진지부가 본피부라 개칭되면서 낙랑후에 봉해졌으며, 정(鄭)씨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 정씨중에서도 경주정(慶州鄭)씨는 바로 지백호(知伯虎)의 정통(正統) 후손이다. 그러므로 경주정(慶州鄭)씨는 옛부터 한반도에 자리잡고 살았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이다. 이 성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정진후(鄭珍厚, 시호 문정)는 지백호(知伯虎)의 40대손이 된다. 정진후(鄭珍厚)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 병부상서겸군기사윤, 평장사(平章事)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월성(경주)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득관조로 하고 본관을 경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이 성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2명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정희계(鄭熙啓)가 유명한데, 그는 고려말 문하평리(門下評理) 정휘(鄭暉)의 아들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최영장군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뒤에 이성계의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올랐으며,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항 유명한 장군인 정발(鄭撥)은 바로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5대손인 군수(郡守) 정명선(鄭明善)의 아들이다. 정발(鄭撥)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나기 직전에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발령을 받았다. 그 밖에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사예(司藝)를 역임하고 좌찬성에 추종된 정지연(鄭知年)이 있는데, 그의 아들 정효항(鄭孝恒), 정효상(鄭孝常), 정효종(鄭孝終), 정효본(鄭孝本) 등 4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 하엿다. 1985년 조사에서 300,731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김포정(金浦鄭)씨
시조 자여(子與, 시호:문경)는 고려 현종 때의 추충진국공신이며, 은청광록대부, 태자태사문하시랑평장사, 판추밀원사 등 요직을 역임하고 장기백에 봉해졌으며, 식읍을 하사받아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장기로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에 있다. 1985년 조사에서 2,795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丁(정)氏 차(車)씨는 유(류, 柳)씨와 같은 시조에서 갈린 동족이성(同族異姓)으로 예로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려 병? 유(류, 柳)씨는 고려시대에 4대 명족(名族)의 하나로 꼽을 만큼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유(류, 柳)씨의 시조인 고려 태조 때의 대승(大丞) 유(류)차달(柳車達)은 원래 유주(儒州)지방의 부호였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사재를 털어 수레 1천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이 되었으며, 태조로 부터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효전은 차성(車姓)을,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유성(柳姓)을 잇게 했다고 한다. 장자가 차(車)성을 이은 것은 유차달(柳車達)의 6대 조상의 성이 차(車)씨였기 때문이다. 그의 선대에서 차씨에서 류씨로 변성한 사실을 알게된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수 없고, 또한 류씨로 변성한 지 이미 6세가 지났으니 이 또한 폐할수 없다>하고 그의 큰아들 효전은 조상의 본성인 차씨를 계승케 하고, 둘째아들 효금은 유주에 머물러 살면서 류씨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차씨(車氏)의 본관은 연안(延安) 외에도 용성(龍城) 남해(南海) 평산(平山)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실은 연안 단본이며, 나머지는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분파 세거지를 뜻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시조 차효전(車孝全)은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큰아들로 원래의 성은 류씨였으나 그의 선대에 차씨로 변성했다고 한다. 시조 효전의 6대조인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 때 좌상이었다. 그는 애장왕의 서숙 언승(헌덕왕)이 왕과 왕자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에서 물러나와 전왕의 원수를 갚고자 왕이 사냥가는 길목에서 죽이려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왕이 그의 체포령을 내리자 그는 황해도 구월산에 은거, 조모의 성인 양씨(楊氏)로 변성하려다가 <변양위류(變楊爲柳)> 하여 성은 류씨, 이름은 색(穡)으로 고쳤다. 시조 효전의 아버지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을 칠 때 많은 군량을 공급해 줌으로써 대승을 거두게 한 공신으로 통합 삼한익찬벽상공신으로 대승에 올랐으며, 또 그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인 효전에게는 원성인 차씨(車氏)로 복귀하게 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연안으로 하였다. 차씨는 고려 말엽부터 중앙 정계에서 크게 두각을 들어냈는데 11세손 거수(擧首)의 두 아들 중 큰아들 차약춘(車若春)은 무예로써 입신하여 명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병부시랑에 이르렀고, 둘째아들 차약송(車若松)은 신종 때 수태위 중서평장사에 이르렀다. 약춘의 손자 차척(車倜)은 고종 때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참지정사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차송우(車松祐)는 고종 때 최의(崔誼) 일당을 제거, 왕정 복고에 공을 세우고 지복주사가 되었다. 문절공(文節公) 차원부는 월파(月波) 차종로(車宗老)의 아들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간의대부에 이르렀다. 그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태조의 공신녹권과 벼슬을 고사하고 평산의 수운암동에 은거하면서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가 주는 공신녹권을 거절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암살당했다. 이때 그의 친족들 다수가 유배되는 등 사실상 멸문의 화를 입었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며 매화를 잘 그렸다. 시중에 추증, 순천의 운암사에 제향되었다 뒷날 세종 때 신원되면서 차차 자손들도 등용되었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 31명을 비롯하여 유명한 <3세 5문장>과 4의사 6절사 등 많은 충신 열사를 배출했다. <車門三世五文章>이란 원부의 5대손 차광운(車廣運), 광운의 아들인 이재 차식(車軾), 식의 아들 차은로(車殷輅) 차천로(車天輅) 차운로(車雲輅) 등을 말함인데, 이들은 다같이 문장에 뛰어나 조부와 아버지를 합쳐 이들을 3세 5문장이라 일컬어었으며, 당나라 삼소(三蘇)에 비유되었다. 또 <車門四義士>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한 차충량(車忠亮) 차예량(車禮亮) 형제와 종제 차원철(車元轍), 그리고 충량의 아들 차맹윤(車孟胤) 등을 칭하는 것이다. 차천로(車天輅)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며, 1577년(선조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개성교수를 지내고, 1583년 문과증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6년 정자로 있으면서 여계선(呂繼先)에게 표문을 지어 주어 장원 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을 유배되었다가 1588년 풀러나와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로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하여 문명이 명나라까지 떨쳐 동방문사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광해군 때 봉상시 첨정을 지냈다. 한시와 서예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오산집(五山集)> <오산설림(五山說林)>등이 있으며, 가사로는 <강촌별곡(江村別谷)>이 전한다. 순조초에 시문가로 이름을 날렸던 차우일(車佑一)은 그의 6대손이다. 차우일은 서화에 뛰어났고, 음율에도 밝아 시우들과 어울리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무과에 응시, 만호를 지내기도 했지만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곧 물러나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4명자 시집(四名子詩集)>이 전한다. 끝으로 <六節士>란 임진왜란 때 평안도에서 의병으로 싸운 차득도(車得道) 차응린(車應麟) 차덕홍(車德弘)과 평안도와 호남 일대에서 싸운 차은진(車殷軫) 차은로(車殷輅), 그리고 광해군조에 요동 출병시 김응하(金應河) 휘하에서 순절한 차재중(車載重) 등을 말한다. 차재중(車載重)은 1618년(광해군10)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 등이 명나라에 원병으로 갈 때 김응하(金應河)의 중군장이 되어 동생 차예중, 차영중과 종제 차임중, 차치중, 아들 경량 등과 함께 명나라로 갔다. 강홍립, 김경서가 적에게 항복하자 김응하와 같이 고전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1619년 3월 4일 자제 5인과 함께 모두 순절했다. 이 밖에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오른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등이 있다. 창씨(昌氏)의 본관은 공주(公州)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長城) 강릉(江陵) 등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 시조와 본관의 유래는 상고할 수 없다. 창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황제의 아들 창혜(昌慧)의 후예라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주 진안 익산 등지의 31가구 등 모두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창씨(倉氏)의 본관은 아산(牙山) 단본으로 전하지만 시조와 본관의 유래는 상고할 수 없다. 창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당시 전국에 15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11가구가 서울과 경기도 양평에, 충남 아산에 2가구, 그리고 충북 청주와 강원도 원주에 1가구씩 살고 있었다. 채(蔡)씨의 본관은 평강(平康)·인천(仁川)·음성(陰城) 4본이 있지만 같은 조상에서 갈려진 것이다. 그 중 평강(平康)과 인천(仁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씨의 시조는 고대 중국 고신(高辛)씨의 아들인 契의 후손으로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사람이라는 설과 평강(平康) 채씨의 시조 채원광(蔡元光)이 신라 내물왕의 사위인 채보한(蔡輔漢)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데 확실하지는 않다. 민간 전설에는 오색 영롱한 거북 한 마리가 평강에 나와 사람으로 화하니 왕이 이를 듣고 채(蔡)성을 내리고 평강백(平康伯)에 봉했다고도 전하고 있어 시조의 탄생에 대한 전설로 흥미롭다. 조선시대 채(蔡)씨의 문과 급제 자는 65명인데 평강(平康)이 41명, 인천(仁川)이 22명이고 이천(利川)과 인동(仁同)이 각 1명씩이다. 평강(平康)채(蔡)씨를 일으킨 사람은 고려 고종 때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채송연(蔡松年)이다. 그의 아들 전( , 평장사)·화(華, 평장사)·손자 인발(仁撥, 도검의장찬)·모(謨, 장찬·평장사)·증손 종린(宗璘, 정승)등 모두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시대 이름을 떨친 명신 채세영(蔡世英)·대제학 유후(裕後)와 이름난 정승 제공(濟恭)을 낳았다. 세영(世英)은 중종∼명조에 호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 그가 벼슬에 있는 동안 을묘·을사 두 사화로 많은 선비가 화를 입었지만 홀로 우둑 남아 아무도 범하지 못하였다. 학문이 깊었고, 천문·의약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 유후(裕後)는 인조 1년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을 거쳐 효종 때 대제학·대사헌을 지내고 현종초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은 수(壽)와 지홍(之洪)이다. 수(壽)는 예종 1년 21세때 문과에 관시·회시·전시에 모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과거가 시작된 이래 3장원 한 사람은 그와 단 셋뿐이다. 그는 성종 때 호당을 거쳐 홍문관의 교리로 있을 때 권신인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되게 하였다. 이 일로 임사홍은 두고두고 그를 원망했다. 뒤에 대사간 ·호조참판등을 엮임 정국공신으로 봉해졌으나 벼슬을 버리고 함창으로 낙향하여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지홍(之洪)은 영조 때 권상하 문하의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시조는 알 수 없으나 본관은 진주(晉州)라고 전한다. 척씨의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고려 인종 때 척준경(拓俊京)이 문하시중이 되었다.
전주(추계)추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전주(全州)·추계(秋溪) 등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전주추계세보(全州秋溪世譜)》에 의하면 시조 추엽은 원래 중국인으로 송 고종 때 문과에 급제,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인종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와 함흥 연화도에 살았다. 그의 손자 추적(秋適)은 고려 충렬왕 때 민부상서·예문관 제학을 거쳐 문하시중에 오른 명신이다. 또한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스승에 의하여 송나라에서 수입된 정주학의 보급에 큰공적을 남겼으며, 우탁(禹倬)·백이정등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국학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유명한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그의 편저이다. 추적의 손자 덕암(德菴) 추유(秋濡)는 아우 협(浹)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명나라 태조 때 호부상서를 지냈고, 그 후 자손들이 중국에서 살았다. 유의 5대손 세심당(洗心堂) 추수경(秋水鏡)은 명나라 신종 때 무강 자사로 있다가 우리 나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이여송의 부장으로 아들 5형제를 데리고 우리 나라에 건너와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난이 끝난 뒤 전주에서 살았으며 죽은 뒤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하게 되었다. 추씨(鄒氏)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경북 상주군 낙동면 성동리에 추석숭(鄒石崇) 1가구가 나타났는데 시조와 본관은 미 상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대무신왕 때 비류부장으로 추발소(鄒勃素) 가 있었고, 또 후백제 견훤(甄萱)의 부하 장수로 고려 태조에게 사로잡힌 추허조(鄒許祖)가 나오는데 오늘의 추씨와의 관련 여부는 상고할 수 없다 태(太)씨는 본관이 협계(浹溪)를 대종으로 영순, 밀양, 남원, 통천 등이 있다. 고려에 귀화 변성했다는 설이 있다. 남원태씨의 중시조인 송암(松庵) 태맹례(太孟禮)는 협계태씨(陜磎太氏)의 중시조 태집성(太集成)의 9세손으로 목사 태이(太異)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진사로 1454년(단종2) 간교한 무리들의 참소를 입어 남원에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태맹례를 시조로 하고 그의 출생지인 남원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총1천43가구의 태씨중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었고, 특히 함경북도에 478가구나 집중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태맹례 이전, 발해가 멸망할 무렵부터 태씨가 북방에서 이주해 와서 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조 태금룡(太金龍)은 진국의 개국조인 태중상(太仲象)의 19세손으로 협계태씨(浹溪太氏) 중조 태집성(太集成)의 아우 웅성(雄成)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금교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고, 영순군(영순은 상주의 옛이름)에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합계태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순(永順)으로 하였다. 영순태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서암(西庵) 태두남(太斗南)은 김진양(金震陽)의 문인으로 중종 ㄸ 문과에 급제, 종부시정이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고 있을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진양의 장례를 성의껏 보살폈다가 김안로에 의해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쇄언(蔘言)》이 있다. 시조 태집성(太集成)은 진국의 개국조인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이며, 진국의 마지막 왕인 애왕 대인선의 10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낭장을 지내고 대장군으로 서북면 병 마사가 되었다 1231년(고종18) 몽고군의 침입때 신서문에서 싸우고 이듬해 자주부사 최춘명 (崔椿明)이 항복을 거부하자 몽고 관리와 함께 가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뒤에 수사공에 오르고 협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협계로 하였다. 시조 의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 조천리에 있다. 시조의 6세손 초곡(草谷) 태응진(太應辰)은 정종 때 담양 병마도호부사를 지내고, 태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남원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전북남원·옥구·임실 등지 에 분포되어 있다. 합계태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북재(拱北齋) 태색(太穡)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종당(宗黨) 태구·태시경(太時慶)·태귀생(太貴生)·태천생(太賤生) 등과 창의하여 성을 지탱하고 군량 3백석을 명나라 군대에 보내어 명장 유정(劉綎)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 다. 선조 때의 태구련(太九連)은 임진왜란 때 칼을 잘 만들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과 그의 조방장 신호(申浩), 박종남(朴宗男) 및 충청도 수군절도사 선거이(宣居怡) 등의 환도를 동료 언복(彦福)과 함께 만들었다.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는 충남 아산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탁씨는 본관은 광산(光山) 단본이다. 시조 탁지엽(卓之葉: 자 玉立, 호 學圃, 시호 文成)은 고려 선종 때 학행으로 한림학사에 천거되고, 그 후 태사에 올라 광산군(광산은 지금의 광주)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광산 탁씨는 고려 경종조의 대제학 탁도민(卓道敏), 현종 조의 어사중승 탁사정(卓思正), 신종조의 대제학 탁종성(卓宗成), 고종조의 평장사 탁영(卓英) 등 많은 명신을 비롯하여 탁광무(卓光茂), 탁신(卓愼) 등을 배출했다. 문정공(文正公) 탁광무는 문민공(文愍公) 문위(文位)의 아들이다. 1331년(충혜왕1)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내서사인, 좌간의대부를 거쳐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성주의 오계사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경렴정집(景濂亭集)>이있다. 그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탁신은 좌간의대부 탁광무의 아들이다. 1398년(정종즉위) 효행으로 천거되어 우습유가 되고 용담현령, 좌정언, 정령 등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설화 사건으로 유배, 다시 전농정, 성균관 사성, 동부대언 등 여러 관직을 역임, 태종 때 지신사, 경승부윤, 이조참판,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1421년(세종3)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경학, 무예, 음률에 능했다. 성주 오계사에 제향되었다. 조선조에서도 문과급제자 9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탁성(卓誠)·탁중(卓中)을 꼽을 수 있다. 탁성은 태조 때 문과에 급제, 한성부윤을 지냈고, 탁중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탄씨(彈氏)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496성에나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성씨로 본관은 해주·진주 2본이고 시조는 모두 미상이다. 당시 경기도 고양·부천에 4가구, 강원도 평창·강릉에 3가구, 도합 7가구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강원도 평창도 구정면에 살던 2가구와 평창군 대화면에 살던 1가구는 본관이 해주였고,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지금의 신설동)에 살던 3가구는 본관을 진주로 쓰고 있었다. 판씨의 본관은 해주(海州) 단본이고, 시조는 미상이다. 판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도 보이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비로소 나타난 성이다. 당시 분포상황에 의하면 전국에 20가구가 있었으며, 그 중 18가구가 서울과 경기도 고양군 에 살았고, 2가구는 함북 청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성씨는 절강(浙江)과 용강(龍岡)이 대본이다. 시조 팽우덕(彭友德)은 원래 중국 절강 사람으로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의 중군 부총병서로서 동원장사로 뽑힌 아들 신고(信古) 장군과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국했다. 《용강팽씨세보(龍岡彭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팽조적은 원래 중국 금릉 사람으로 1351년(충정왕3)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 원나라 내각학사로 공주를 호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용강백에 봉해졌다. 편씨(扁氏)의 본관은 희천(熙川)단본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편창락(扁昌樂) 1가구가 있었다. 절강편씨 시조 편갈송(片碣頌:자 景修, 호 幕幹)의 선대는 당나라 종실의 후예로 원래는 이씨였다. 그의 고조 이지(李址)가 명나라 한림학사로 있을 때 영종이 동궁에 있으면서 궁인 원씨(袁氏)를 총애하다가 제위에 오르자 원씨가 황후의 망상을 품고 암약하자 모든 신하들은 원씨를 비호했으나 그는 「정실을 황후로 책봉하는 것이 천리에 마땅하다. 」고 극간 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하옥 당했다. 그러나 끝내 굽히지 않고 정도를 주장하자 임금이 그의 충절을 치하하며 일편단심의 <편(片)>자를 따서 사성함으로써 편씨가 되었고, 그의 아들 일(鎰: 시호 貞武)이 이부시랑으로 절강백에 봉해져서 절강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 나라 편씨의 시조인 편갈송은 명나라 어양총절사로 있다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에 유격장군으로 어양병 2천을 거느리고 이여송의 아장이 되어 우리 나라에 와서 평양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이듬해 8월 귀국했다. 정유재란 때 다시 마귀의 중군도독으로 나와 경략 중군도곡 겸 병부상서 총독군문 부원수가 되어 직산에서 대첩을 거두고 선조로부터 노고를 치하하는 친서를 받았으며, 서생포에서 적을 궤멸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본국 조정에 아첨과 모해를 좋아하는 간신 정응태(丁應泰)가 그의 영예를 시기하여 모함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단념, 경주의 금오산에 은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들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보(山甫) 3형제가 우리 나라로 들어와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상을 당해 금오산에 안장하고 3년상을 치른 후 경주를 떠나 풍세·풍원은 나주에 산보는 만경에 세거처를 마련했다. 경남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편장군 승첩동>이라는 마애비가 있고, 그곳의 창표당에 마귀와 함께 제향되었다. 평씨(平氏)의 본관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충주외에도 부평(富平), 인천(仁川), 예산(禮山), 가흥(嘉興), 평원(平原)등이 나타나 있으나 모두 동원 분파로 사실상 충주 단 본이다. 평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한나라 성제 때 평당(平當)이라는 사람이 평릉을 식읍으 로 받아 <平>을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평씨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931년 (고려태조14) 평환(平喚)이 강덕진두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오늘날의 평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충주평씨가보(忠州平氏家譜)》에 의하면 시조는 선조∼인조대의 사람인 평우성(平友聖)이 라고 하는 데 그의 사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인천시 남구 서창동 앞산에 있다. 표씨(表氏)는 중국계 귀화성씨로 본관은 신창(新昌)단본이다. 시조 표대박은 오계시대에 후주의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을 이끌고 960년(광종11)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 온창(지금의 신창)에 정착했다.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충숙왕 때 합문지후로 좌리공신에 올라 온창백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조 1세로, 본관을 신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신창표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5명, 호당1명, 청백리1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1년(성종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84년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로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어 장령, 시독관, 사간 등을 지내고, 1495년(연산군1) 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직제학으로 폐비윤씨의 추승을 반대하였다. 그후 승지, 대사간을 지내고 소릉(단종의 모후 현덕황후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사초에 적은것과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경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에서 죽었다. 그후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당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당대의 문장가로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뒤에 신원되고 함양의 구천서원,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남계문집(藍溪文集)>이 있다. 선조 때 의 표헌(表憲)과 광해군 때의 표정로(表廷老)부자는 다같이 명역관·명문장으로 유명했고, 인조때의 무관 표정준(表廷俊)은 김상헌(金尙憲)과 절친해서 병자호란때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표정로는 역관 표헌의 아들이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선조 때 원접사의 역관이 되어 의주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나와 상대할 문장가가 없을 것이다」하고 은행을 먹으면서 <은행갑중장벽옥>이란 시를 지어 대구를 청하므로 그가 즉석에서 <석류피리점주사>라 하자 명나라 사신이 놀라며 격찬하였다. 통사를 거쳐 1616년(광해군8)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풍씨(馮氏)는 주나라 문왕의 제15자 필고가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위나라의 후가 되어 풍성을 식읍으로 받음으로써 고을 이름인 <馮>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풍씨의 본관은 임구단본이고 시조는 풍삼사(馮三仕)이다. 풍삼사는 원래 중국 산동성 임구현 사람으로 명나라 말엽에 태학이었는데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석권하게 되자 청에 대항하여 의병활동을 하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심양관에 억류당했다. 때마침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와 심양에 억류된 봉림대군(효종)과 만나 명나라의 광복을 협의하다가 1645년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수행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귀화했다. 이때 같이 수행해 온 명나라 의사 아홉 사람을 구의사라고 한다. 그는 궁중에서 봉림대군과 같이 침식을 하다시피 하며 명나라의 광복을 논의하였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진 계획을 추진하던 중 효종의 급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임구를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양주군구리면 양원리에 있었으나 남양주군 진접면 팔야리로 이장하였다. 시조 피경정(皮慶廷:초명 起光)은 원래 중국사람으로 원나라 순제때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 록대부 신경위 대장이 되어 남변을 정벌하였으나 전세가 불리,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 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하고자 가족을 거느리고 고려에 와서 망명했는데, 공민왕은 그 를 우대하여 괴산 군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괴산(槐山)으로 하 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괴산 피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피득창(皮得昌)이다. 그는 시조 경정의 현손이요, 이부상서 성무(成茂)의 아들로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개국공신에 책록, 병조판서·전라감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 시조로 받들고 있다. 괴산 피씨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후 6백년이란 짧지 않는 역사를 지닌 성씨임에도 특출한 인 물을 내지 못하고 후손도 영락 하여 족세를 떨치지 못해 오늘날 소성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세만(皮世萬)을 들 수 있다. 그는 숙종 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조 정희량(鄭希良)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柳萬元)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 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에 기공비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송나라의 금오위 상장이었는데, 고려 정종 때 동 국안렴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자연히 우리나라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자 정종이 크게 기뻐하며 병부시랑에 제수하고 죽은뒤에 좌사의대부에 추증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근 3백년 동안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 에 명종조에 중서평장사를 지냈다는 피형문(皮瀅文)이 있으나 시조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피맹인은 고려 충복왕 때 진사에 급제, 직학사를 지냈고, 맹문의 아들 피원휴는 공양왕 때 한림학사를 지냈다. 맹인의 아들 피자휴는 박학하고 시문에 뛰어 난 학자로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종부시 주부를 거쳐 상서에 이르렀다. 피원량은 고려말 순창현령으로 있으면서 왜구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이름이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피상의(皮尙宜)를 들수 있다. 그는 세종조에서 세조조에 이르는 동안 일어 통사로 있으면서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험악할 때 수차례 쓰시마에 드나들며 도주와 교섭, 국교를 정상화한 공으로 상호군이 되었다. 근세인물로는 오촌(梧村) 피중락(皮中洛)이 있다. 그는 고명한 학자로서 <오촌설림(梧村說林)>, <동남아탐견기(東南亞探見記)> 등의 저서를 남겼고, 중국에서 공자성상을 모셔와 장개석(蔣介石)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필씨(弼氏)의 문헌에 본관이 대흥(大興), 전주(全州) 등 2본이 전해지는데 전주관은 1985년도 8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흥필씨의 시조는 필몽량(弼夢良)으로 무과 출신이다. 그의 후손 두만(斗萬)이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두만의 증손 성뢰(聖賚)는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에 이르렀는데, 그의 이름이 <동국명신록>에 올라있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 7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그 중 65가구가 함주(咸州), 영흥(永興), 신흥(新興)등 북쪽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하씨(河氏)는 진주(晋州)의 토성으로서 본관이 문헌에 70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그것은 모두 진주에서 갈린 분파로서 하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일원화되었다 그런데 진주하씨의 세계는 서로 계통을 대지 못하는 세파로 갈리어 족보가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시랑공파(侍郞公派)로 시조는 고려 현신의 한 사람인 하공진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압강도 구당사가 되고, 1009년(목종12) 중랑장·상서좌사 낭중이 되었다. 그해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하자 거란의 성종이 강조를 문책한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입해왔다. 그때 강화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시켰다. 둘째는 사직공파(司直公派)로 시조는 고려 정종∼문종대에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이고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은 그의 후손이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서로 계보를 상고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하연이 1451년(문종1) 에 《경태보(景泰譜)》를 처음 내면서 그 서문에 <오하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에 타주(진주의 옛이름)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하고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시랑 하공진(河拱辰)과 동원이라 하나 분파계대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라 했을 뿐 휘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며 고려 정종∼문종양조에 사직을 지낸 하진을 시조로 하였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한파는 사육신의 한사람인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집안이다. 흔히 하위지의 호를 따서 단계 하씨(丹溪河氏)로 일컬어지지만 역시 진주 하씨이다. 파계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조의 주부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진주 하씨는 조선조에서 영의정2명, 호당1명, 공신2명, 문과급제자39명과 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의 명문이다. 그 중에서도 하륜과 하연 그리고 하위지가 두드러진다. 호정(浩亭) 하륜은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으로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지영주사로 좌천되고 1371년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1로 보고하여 고공좌랑에 올랐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 조선개국 후 경 기도 도관찰사가 되어 계룡산 천도를 반대, 한양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다음해 첨서중추원사 로 전임, 명나라 태조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1396년(태조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보고함으로써 해명에 성공했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에 승진, 정사공 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때도 방원을 도왔고, 이어 판 의홍삼군부사를거쳐 우의정에 되어 진산백으로 진봉, 이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1 등에 책록, 다음해 관직을 사임했다. 1402년 좌정승이 되어 판승추부사를 겸임, 이해 등극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은 판서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 홍문관과 승정원을 거쳐 예조참판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금은 세공을 면하도록 했다. 1423년(세종5) 대사헌으로 조계종 등 7개 종파를 선·교 2종으로 통합하고 사사·사전을 줄이도록 건의하여 실시하게 했다. 경상·강원·전라·평안4도 관찰사, 병조·형조참판, 대제학, 형조·이조판서, 판이조사 등을 거쳐 1445년(세종27) 우의정이 되어 괘장을 하사 받고 좌의정에 승진했다. 1449년(세종31) 영의정·새자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입사, 1451년(문종1)에 치사했다. 문종 묘정에 배향, 문의의 우록, 무주의 백산, 합천의 신천, 진주의 종천 서원에 제향, 주일영당·문원영당이 있다. 편저에 《경상도지리시(慶尙道地理誌)》, 저서에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단계(丹溪) 하위지는 하담(河澹)의 아들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8년(세종20) 식년문과에 장원, 이해 사가독서를 했고, 1444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상정에 참여했다. 1451년(중종1)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을 보좌, 앞서 신정한《진설(陣說)》의 교정과《역대병요(歷代兵要)》편찬에 참여했다. 1454년(단종2) 부제학·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1)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침착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그 동안 집현전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에서 시정을 보필했으며 세조의 간청으로 부득이 벼슬하는 동안 받은 녹을 먹지 않고 별실에 저장해 두었다. 다음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거사가 실패하자 체포되어 차열형에 처해졌다.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아 과천의 밀절서원, 연산의 충곡서원, 의성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그의 형 강지(綱地)와 아우 기지(紀地)·소지(紹地)도 모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하씨(夏氏)는 송나라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달성(達城) 단본이다. 시조 하흠(夏欽)은 원래 송나라의 대도독으로 고려 제 17대 인종 때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 달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주요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효자로 정문이 세워진 하광신(夏光臣)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등이 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하인경(夏仁敬)이 선조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하운서(夏雲瑞)는 판관을 지냈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고구려 산상왕 때 한평주 사람 하요(夏瑤) 등 1천여 가구가 고구려에 투항해오자 왕이 책성을 쌓고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이 지금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현재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의 달성과 경산, 경남의 밀양, 전북의 순창과 장수, 강원도의 원주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 한(韓)씨는 한국에서 제일 오랜 역사를 지닌 이른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특히 조선 때에는 많은 공을 세운 신하와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오늘날 한씨들은 청주 한씨 하나 뿐이라고 내세우지만, 문헌에는 평산(平山), 한양(漢陽), 안변(安邊), 양주(楊州), 곡산(谷山), 단주(湍州), ?주(?州), 가주(嘉州), 대흥(大興), 부안(扶安), 당진(唐津), 개성(開城), 함흥(咸興), 금산(錦山), 신평(新平) 등 10여 본이 있으나 모두가 청주 한씨에서 갈리어 나왔다고 한다. 한씨의 시조는 멀리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의 후손으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삼형제가 있어, 각각 기(奇)씨, 선우(鮮于)씨, 한(韓)씨가 되었다고 한다. 즉, 청주 한씨의 시조 난(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友諒)의 자손이 되는데, 기자(箕子)는 원래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니고 우리 나라 땅에서 태어난 기(箕)씨가 아닌 한(韓)씨라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학설에 따르면 箕(韓) 시조인 마지막 왕 준(準)이 위만에서 쫓겨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진국(辰國)에 들어가 조그만 나라를 건설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일컬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성이 기(箕)씨가 아니고 한(韓)씨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한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많은 명신(名臣)과 명상(名相)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큰 세력을 가진 명벌(名閥)로서 오랫동안 정치권좌를 주물렀다. 청주 한씨는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동안 봉군(封君)과 지역 분적(分籍)으로 인해 30여파로 나뉘는 데 그 중 후손이 많기로는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左議政)파와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左贊成)파, 충간공(忠簡公) 한리(韓理, 吏部尙書)파, 몽계공(夢溪公) 한철충(韓哲沖, 禮部尙書)파, 한연(韓漣)의 관북(關北)파,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파 등 6파가 청주 한씨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청주 한씨의 인물 가운데 여러모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이다. 그는 단종을 내몰고 세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그를 맨 윗 조상으로 삼는 충성공(忠成公)파가 성립되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써 단종 즉위년 계유정란(癸酉靖亂)에 가담하여 성공을 하자 정란공신(靖亂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다시 2년 뒤에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며, 성종 때에는 귀성군(龜城君)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오르기도 했다. 한명회는 이러한 삼대에 걸친 공훈과 권좌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과 권좌의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은 세종 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거쳐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세조 때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딸은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비(妃)가 되었으며, 그의 누이 둘은 각각 명나라의 태종비(太宗妃)와 선종비(宣宗妃)가 되었다. 선조 때의 명상인 한응인(韓應寅)은 한확의 6세손이 된다. 그는 선조 10년 알성시에 급제한 후 광국공신(光國功臣), 평난공신(平難功臣)에 각각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팔도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로 활약했다. 또 양절공파에도 역시 많은 공신(功臣)과 명신(名臣), 그리고 학자들이 쏟아져 나와 명성이 드높았다.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左贊成)는 관찰사 혜(惠)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과 인품이 높아 선배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세자(世子)의 스승이 됐고, 3년 후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다시 그의 스승이 되었다. 문정공의 후손으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한 실학의 선구자 한백겸(韓百謙)이 있고,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인 한원진(韓元震)은 심리학의 대가 이동(李東)과 낙론(洛論)의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 한리(韓理)를 파조로 하는 충간공(忠簡公)파와, 고려말에 전법판서를 지낸 한철충(韓哲沖)을 파조로 하는 몽계공(夢溪公)파, 그리고 북변 일대에 몰려사는 소위 관북(關北)파 등이 있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냈다. 한씨(漢氏)는 중국의 성씨로서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본관은 충부 단본으로 알려졌으나 시조는 미상이다. 경북 영일군에 몇 가구만이 살았다. 함씨(咸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강릉(江陵)외에 60여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은 강릉함씨(江陵咸氏)의 세거지를 뜻할 뿐 모두가 동원분파이다.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한 함혁(咸赫:시호 文簡)인데 그의 동래 연대에는 양설이 있다. 일설에는 주무왕 때 기자를 따라 왔다고 하며, 다른 일설에는 당나라 무종때 대사마 대장군으로 조서를 받들고 신라에 들어와 문성왕으로부터 익화자사(익화는 지금의 양평)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 조양·복홀의 두현을 합하여 양근군(지금의 양평)을 만들었기 때문에 본관을 양근으로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양평땅에는 <함공성>이니 <함씨대왕성>이니 하는 함씨에 관한 전설이 많다고 한다. 그의 후손중 함신(咸信)이 신라 원성왕 초에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를 따라 명주 땅에 들어온 이후 후손들이 강릉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함씨는 시조 이하 약 20대의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고려 개국공신으로 광평시랑 평장사를 지낸 함규(咸規:시호 襄厚)를 1계조로하고 규의 14세손 함부림(咸傅霖)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동원군(동원은 강릉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본관을 양근에서 강릉으로 이적했다. 함부림은 검교중추원 학사 함승경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 검열·좌정언 등을 거쳐 1389년(공양왕 즉위) 우헌납이 되었다. 그 후 형조정랑을 거쳐 1392년 병조정랑겸 도평의사사 경력사 도사가 되고, 이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 3 등에 책록되었다. 예조의랑에 이어 좌산기상시로 상서소윤을 겸임했고 명성 군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3) 참지의정부사가 되어 동원군에 개봉되었고,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1408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경기·충청·경상·황해등 각도의 도관찰출척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를 역임했다. 강릉 함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에서는 양경공(襄敬公) 함유일(咸有一)이다. 함유일은 광평시랑 함규의 5대손이자 상의봉어동정 함덕후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서울에 올라와 아버지의 친구인 재상 이준양(李俊陽)의 집에 묵다가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이부기관으로서 준양을 따라 대궐을 지켰으며 1135년 서경 반란 대 말단 관리로 종군, 공을 세워 서경유수 녹사가 되었다 그 후 선군기사를 거쳐 보성을 청렴하게 잘 다스렸으며, 의종때 내시에 들어가 교로도감을 관장하며서 무당을 교외로 추방, 음사를 불지르는 등 미신 타파에 힘썼다. 감찰어사, 황주판관, 삭방도 감창사 등을 거쳐 1170년(명종즉위) 다시 내시에 불려 들어가 곧 병부낭중이 되었다. 뒤에 성서좌승을 지내고 1179년 공부상서에 이르러 치사했다. 일생을 베옷만을 입고 질그릇을 쓰며 청빈하게 살았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함순(咸淳)은 문장과 덕행이 높아 당대의 명유인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등과 함께 강좌칠현으로 알려졌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정평공(定平公) 함부림(咸傅霖)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우 함부열(咸傅說)은 고려말에 예부상서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자손들이 종전의 관향인 양근(楊根)을 본관으로 써오다가 최근에 합보했다. 부림의 아들 문희공(文僖公) 함우치(咸禹治)는 참지의정부사 함부림의 아들이다. 음보로 감찰이 되고 고부군수·군기시 부정·나주목사 등을 거쳐 1453년(단종1) 판사복시사·첨지중추원사·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457년(세조3) 공주목사·함질도 관찰사를 지냈다. 1459년 대사헌·중추원 부사를 지내고 이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66년 경상도·충청도의 관찰사, 개성부 유수를 역임, 형조참판으로 동원군에 습봉되고, 이어 지의금부사·함흥부윤을 거쳐 1468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471년(성종2) 형조판서에 올라 좌리공신 4등이 되고 좌참찬을 거쳐 1479년 봉조하가 되었다. 강릉 함씨의 유일한 문과급제자 함헌(咸軒)은 중종 때 서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공자유상을 가지고 돌아와서 강릉에 오봉서원을 세우고 거기에 봉안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함진태(咸鎭泰)·함진숭(咸鎭嵩)형제가 순조∼현종 대에 각각 예학과 시문으로 이름이 났었고, 함제홍(咸濟弘)·함재영(咸在 )·함재운(咸在韻) 3부자가 국악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 평양(平陽). 당나라 숙우(叔虞) 후 주나라(周) 영왕(靈王) 때 해호(解狐)가 있어 진(晋) 나라 사람 한(漢의) 성제(成帝) 때 해만년(解萬年)이 있으니 장작대장 진대부 해양(解揚)의 후 읍으로써 시가 됨. 시조 해서필(海瑞必:호 陽村)은 원래 명나라 사람으로 명나라 태조 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우리나라에 와서 김해군에 봉해졌다. 《중광보(重光譜)》에 의하면 해서필이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대도독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공을 세우고 김해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에 있고, 매년 4월 5일에 향사한다. 그러나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 문헌에 해씨의 본관을 <靈巖>이라 하였고, 시조나 그 밖의 사항은 미고라 하였는데 김해해씨의 시조묘가 영암에 있는 것으로 보아 김해해씨와 영암해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김해해씨가 전남 영암에 5가구가 살고 있었고, 목포와 나주에 2가구씩 살고 있었는데 본관을 미상으로 조사되었다. 허(許)씨는 그 연원을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인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 왕후는 원래 인도의 한나라인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로써 배를 타고 지금의 창원군 응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그의 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 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 왕후의 뜻을 살려 허(許)씨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 하여 성불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김해 김(金)씨와 부성 허(許)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한 셈이다. 그래서 김해 김(金)씨와 허(許)씨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 허(許)씨의 본관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泰仁), 함창(咸昌), 수원(水原), 양주(梁州) 등이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泰仁)의 4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각 본관의 시조는 가락국이 신라에 망하면서 각 지방으로 흩어진 가락의 왕조들이라고 한다. 시조 허염(許琰)은 수로왕비인 보주태후 허씨(許氏)의 35세손으로 고려 무종 때 탄생, 고려조에 벼슬하여 삼중대광에 오르고 가락국에 봉해졌다. 김해허씨(金海許氏)는 허씨 중에서 종통으로 가락이 신라에 의해 망하면서 왕손들이 각지방으로 유리하였으나 종파는 김해에 머물러 있었고 시조 허염도 김해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김해허씨는 고려조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16명, 호당 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허유전(許有全),과 조선조의 허백기(許伯琦)를 꼽을 수 있다. 충목공(忠穆公) 허유전은 원종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5년(충렬왕21) 감찰시사로 있을 때 폐신의 무고로 순마소에 갇힌 후 사형 직전에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98년 국학사예로서 전라도 안렴사가 되고, 1307년 감찰대부·권수동지밀직사사가 되어 지공거를 겸임했다. 근대 인물로는 구한말에 일본 정부로부터 칙임관 2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있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병서를 탐독했다. 1897년(광무1) 이은찬(李殷燦),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성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고종황제가 해산을 종용하자 해산하고 귀향했다. 다음해 참봉·성균관 박사·중추원 의관 등을 지내고 1904년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반대의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어 일본의 회유책으로 칙임관 2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7년 의병장 이인영(李麟榮)등과 원주에서 전국의병연합부대를 조직,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고 한국의 정식군대로서의 발족을 선언하고,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자 의병의 군사장이 되어 일본통감부를 격파하기로 결정, 3백여 명의 선발대를 인솔하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후속부대가 일보군에게 진로를 차단 당하자 포위되어 싸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이다. 그의 선대는 공암(지금의 양촌)에 세거하면서 농사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마침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모자라 병졸들의 사기가 저하되자 많은 군량을 보급하여 군의 사기를 드높여 견훤군을 대파하게 했다. 태조가 그를 존경하여 가부라 칭하여 공암촌주에 봉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양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허씨 중에서 양천 허씨가 가장 번성했다. 고려조에서는 허재(許載)·허공(許珙), 허숭(許嵩), 허금(許錦)등 명신을 배출했는가 하면 조선조에서는 상신 5명, 호당 6명, 청백리 5명, 공신 9명, 문과급제자 93명을 배출하여 대성의 지위를 누렸다. 허공(許珙)은 추밀원 부사 홍수의 아들이다. 고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고, 추천으로 내시에 소속하여 정사점필원이 되고 국학박사를 거쳐 원종 초 합문지후가 되었다. 1267년(원종8) 호부 시랑으로 신종, 희종, 강종 등 3조의 실록을 수찬하는데 참여,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이때 권신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자고 제의했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받았으며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그는 중용되어 첨서추밀원사에 올랐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뒤한 전선 300척을 고려에서 건조할 것을 명하자 추밀원 부사로서 전주 도지 휘사가 되어 전선의 건조를 담당했고, 다음해 지추밀원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밀직사사·판밀직사사를 지내고 1279년에 원나라의 명으로 다시 90척의 전선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 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했다. 다음해 참문학사세자보가 되고, 1284년 수국사를 겸하여 원부(元傅)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참술, 1288년 첨의중찬이 되어 지공거를 겸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종(許琮), 허침(許琛)형제와 허엽(許曄), 허목(許穆)형제를 들 수 있다. 충정공(忠貞公) 허종은 시중 허공의 후손이다. 1457년(세조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지제고 등을 거쳐 선전 관을 역임했다. 1460년 평안도 도절제사도사가 되고, 그 후 함길도 도사, 정언, 지평 , 동부승지 등을 역임, 1465년 함길도 절도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 자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1등으로 양천군에 봉해졌 다, 1469년(예종1) 평안도 관찰사·대사헌을 지낸 뒤 이해 전라도에서 장영기(張永奇) 가 난을 일으키자 전라도 절도사로 나가 이를 평정,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71년(성 종2) 좌리공신 4등이 되고,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건주위의 여진족이 침공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한 후 우참찬에 이어 좌참찬에 올랐다. 1481년 호 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우찬성이 되고, 1483년 세자이사를 겸임, 이어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양천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91년 영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로 2만 4천의 군사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다음해 우의정 에 승진했다. 궁마에 뛰어났고 문명이 높아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여러 차례 북변 에 파견되어 양인의 침입을 막았다. 앞서 1488년(성종19) 에는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했으며 철저한 배불론을 주 장, 세조의 불교신봉을 반대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종 때 허종은 어느 날 성조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폐하는 정의가 열릴 것을 알고 대궐로 가는 도중 다리 위에서 짐짓 개울로 떨어져 정의에 참석을 피하여 뒤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앞서 폐비를 위한 정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무더기로 숙청될 때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하는 인물로 그가 떨어진 다리를 종침교라고 불렀다.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은 현감 허교의 아들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의 석유로서 학문·문장·서예에 모두 뛰어나 <學·文·書>의 <三古>로 불리고 특히 전세에 능하여 동방의 제1인자로 일컬어졌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 지지 않고 제자백가의 서를 연구하다가 다시 경서의 연구에 전심하였다. 특히 예학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1650년(효종1)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57년 지평에 초임, 다음해 장령이 되고, 1660년(현종1)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 이 일어나자 집권층인 서인 송시열(宋時烈)등이 채택한 기년설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모두 숙청당할 때 그는 삼 척부사로 좌천당했다가 2년 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74년 (숙종즉위) 제2차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채택케 하는데 송공 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이해 장기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나자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 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과 대립,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탁남인 허적을 탄 핵하다 사직 후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했다. 독특한 도해법을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 를 지어 가르쳤다. 전의 미강서원, 나주의 미산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후 허적은 조부 잠(潛)의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중종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으로 대죄 하던 중 서자 견(堅)의 역무 사건에 연좌되어 사사 당했다가 뒤에 경신대출척으로 신원 되었다.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목공(貞穆公) 허욱(許頊)은 종의 현손으로 광해군 초에 원주에 유배되어 죽었다. 뒷날 인조반정 후에 신원 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초당(草堂) 허엽은 선조조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로 슬하에 허성(許筬), 허봉(許 ),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이 있어 모두 시문에 뛰어났다. 특히 허난설헌은 여류시인으로 이름나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 여류시인으로 꼽히고, 허균은 서손을 차별대우하는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로 널리 이름났으며 허엽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검열·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중시문과에 장원, 다음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 이어 춘추관 기주관·형조정랑을 거쳐 1602년 사예·사복시정을 역임, 이어 전적·수안군수를 지낸 뒤 1606년 원 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 이때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사의원정, 삼척부사, 내자시정, 공주목사, 형조참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2)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교의가 깊었던 서자 출신의 박응서(朴應犀)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정을 위해 당시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숭문원 부제조를 거쳐 1614년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해 좌참찬에 승진, 다음해 하인준(河仁俊)등과 반란을 계획하기기 탄로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처형되었다. 그의 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를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허적은 1637년(인조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부수찬을 지낸 뒤 1641년 의주부 윤으로 관향사를 겸했다. 그 후 경상도 관찰사·명조판서를 거쳐 1659년(효종10) 형조 판서에 전임,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에 대해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호조·병조의 판서를 지 내고 1662년(현종3)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664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해 사은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1668년 좌의정에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 나 다음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1674년 인선대비 가 죽어 자의대비의 제2차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 기년설을 주장 해 채택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 남인정권을 이룩했다. 그후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 열의 처벌문제로 청남·탁남으로 갈라질 때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은겸 진부변무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5도 도체찰사가 되고, 1678년 재정으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 이를 사용케 했으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남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허적(許積)과 의견이 맞서 강경론자인 허목은 청남으로 온건파인 허적은 탁남으로 분파 되었다. 그 후 허적은 조부 잠(潛)의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중종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으로 대죄 하던 중 서자 견(堅)의 역무 사건에 연좌되어 사사 당했다가 뒤에 경신대출척으로 신원 되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효민공(孝敏公) 허계(許棨)가 현종 때 좌포도대장, 철종 때 금위대장, 고종 때 도총관을 역임했다.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 허황옥(許皇玉)의 30세손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마가 되어 시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산이 태인(泰仁)의 옛이름인 까닭에 본관을 태인으로 하였다. 《태인허씨세보(泰仁許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사문이 양천허씨(陽川許氏) 시조 선문(宣文)과 함께 고려 태조를 섬겨 공을 세웠고, 그의 큰아들 즙(楫)의 묘소가 공암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문과 사문은 친형제로 생각되나 문헌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다고하였다. 그리고 둘째아들 도(棹)는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공이 있어 성은 이(李), 이름은 허겸(許謙)으로 하사받고 소성백에 봉해져서 인천이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3세 징(澄)이 대아찬을 지내고 송도로 이주한 후 인물과 벼슬이 끝이지 않아 고려의 대성이 되었는데 고려말에 경(慶)이 좌우위보승산원 중랑장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전라도 태인으로 낙향하여 충절을 지켰다. 허경에게 아들 6형제가 있었다. 큰아들 사인(斯仁)은 일찍 죽었고, 둘째 지재(止齋) 사문(斯文)은 교리·지평 등을 지낸 뒤 고부로 이거하였으며 사문의 둘째아들 곤원(昆元)이 다시 옥과로 이주했다. 셋째 사의(斯義)는 동복으로, 넷째 사행(斯行)은 직장을 지내고 부안으로 다섯째 사효(斯孝)는 진안현감을 지내고 고부로 여섯째 사제(斯悌)가 사평을 지내고 금구로 각각 이주하여 5파로 갈리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순평공(順平公) 허경(許慶)을 꼽을수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청렴충직하여 부료로 뽑혀서 잠저 시절의 숙종을 모시다가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추밀원 승선이 되어 금중에 출입하며 총애를 받았다. 1101년(숙종6) 상서좌승으로 즉위사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으며, 1109 년(예종4) 동지추밀원사, 형부상서, 추밀원사,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거쳐 중서시랑 등평장사가 되고 검교사도, 상서예부사에 이어 1113년 검교태위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허사문이 유일의 문과 급제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 허황옥(許皇玉)의 33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호부 낭장을 지내고 하주자사가 되어 그 곳에 거주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후에 하주가 화성으로, 화성이 다시 하양(河陽)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하양으로 하였다. 하양허씨는 조선조 초기부터 정계에 진출, 상신 1명, 문과 급제자 1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는 개성부윤 허귀룡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정랑이 되고, 1385년(우왕11)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그 후 지안성군사, 개성소윤, 공조와 호조의 정랑, 경기우도의 염문계정사, 안렴사 등을 역임하고 1392년(태조1) 조선이 개국되자 내부경이 되어 1397년 사헌중승을 겸직했다. 같은 해 노비변정도감 도청사가 되어 노비 소유에 대한 소송사건을 공정히 처결했으며, 1399년(정종1) 판사수감사·지형조사극 역임하고 1401년(태종1) 판전농시가로서 경상도 안렴출척사가 되었다. 1405년 형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호조좌참의·판홍주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 1409년 다시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참지의정부사·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뒤에 개성유후사 유후를 거쳐 1418년(세종 즉위) 판한성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공사를 공정하게 처리했다. 그의 동생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허귀룡의 아들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1390년(공양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후 좌보궐에 특임되고, 봉상시승으로서 예제의 제도화에 힘썼다. 1397년(태조6) 성균전적에 올라 석전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400년(정종2) 사헌부 집단을 거쳐 완산부 판관, 이조정랑, 집의, 판내섬시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1년(태종11) 예조참의가 되어 처음으로 학당을 세우게 하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 등을 법전화하는 데 노력했고, 계속하여 의례상정소 제조를 겸임했다. 뒤에 병조·이조의 참의를 거쳐 1416년 예조참판에 승진, 이어 봉상시 제조·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그후 두차례에 걸쳐 이조판서를 지낸 뒤 1433년 판중추원사로 판예조사를 겸임, 1438년(세종20) 우의정을 거쳐 다음해 좌의정에 올라 치사했다. 경사에 정통했으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신망을 얻었다. 그의 아들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는 좌의정 허조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8) 식년문과에 급제, 직제학을 지내고, 143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1442년 한성부윤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45년 대사헌·형조참판을 지내고, 예조판서를 거쳐 1451년(문종1)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지춘추관사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1)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필했다. 이 해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여 효수하자 이를 반대하여 거제도에 유배,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공간공(恭簡公) 허성(許誠)은 조(稠)의 조카이며 한성판윤 주(周)의 아들로 태종때 문과에 급제, 세종때 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밖의 인물로는 성종때 부제학·대사간을 지내고 명필로 알려진 허계(許誡)가 있다. 현(玄)씨의 본관은 연주(延州), 창원(昌原), 성주(星州), 천령(川寧) 등 여럿이 전하나 모두 연주현시를 대종으로 갈려진 것이다. 시조 현담윤(玄覃胤: 시호 敬獻)은 고려 의종조에 장군이 되었고,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으며 연산군에 봉해졌다. 연주와 연산은 평안도 영변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주(延州)로 하였다. 현씨는 시조 현담윤 이전부터 연주의 토호로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씨가 처음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명조조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운 것에 기인하는데 당시 현담윤의 직책은 도령이었다. 도령은 도령중랑장을 가르키는 것으로 고려시대 주현군 조직의 최고위직이다. 그러니까 현씨는 연주의 향리 조직 중에서도 상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시조 현담윤과 덕수(德秀), 이후(利厚), 덕유(德裕) 세아들이 조위총의 난 때 중앙 정부에 세운 공을 기반으로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평북 영변군 연산면 관동에 있는데 분단으로 길이 막혀 충남 천원에 모선재를 세워 매년 음력 3월 1일 및 10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 시조 현담윤에 대해선 《고려사(高麗史)》에 그의 큰아들 <현덕수전>에서 볼수 있다. 현덕수(玄德秀, 高麗 官職: 兵部尙書)는 어려서 연주분도 장군 김치규(金稚圭)에게 발탁되어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고 여러번 과거에 실패한 후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1174년(명종4)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인정권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절령 이북의 40여성이 모두 그에 호응하였다. 이 때 현담윤은 도령으로 연주의 주군을 거느리고 아들 덕수와 함께 반군 측에서 보낸 사자를 잡아 죽이고 성을 고수하여 덕수는 주민들에 의해 권감창사가 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후 내시지후에 임명되고, 이어 안남도호부 부사가 되었다. 정치가 청렴 결백하여 이민들이 존경했고, 음사를 엄금했다. 병부낭중·사재소감을 지내고 신종조에 전중감을 거쳐 병부상서에 이르러 치사했다. 처음에 팔거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성산부원군에 봉해졌다. 현이후는 난이 평정된 후 경상안렴사에 제수되고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연주성에서 반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주민들에 의해 권행병마사에 추대되기도 했다. 현씨는 현담윤과 덕수 부자가 중앙정계에 기반을 굳힌 후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덕수의 아들 현원렬(玄元烈)은 충렬왕조에 태복윤을 지냈고 이후의 아들 현원도(玄元燾)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큰인물을 내지 못해 족세를 떨치지 못했으나 회당 현익수(玄翼洙)가 나와 가문을 빛냈다. 그는 형빈의 아들이다. 가세가 빈궁하였으나 청백하여 처사로 이름났다. 19세 때 이구암(李龜巖)의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연구하는데 적은 것부터 시작하여 식견을 넓혔으며 빈곤에 처하여도 지조를 굳게 하였으므로 명성이 높았다. 상서 김이양(金履陽)의 천거로 지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를 위해 나아가지 않았고 다시 상국 김이교(金履喬)가 찬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젊어서는 마반·한구의 글을 애독하다가 뒤에 《주자서(朱子書)》에만 전심하였고 역학에 대해서는 태극서명을 탐구하였다. 스승이 죽은 뒤 3년 동안 심상을 치르고 동문들과 더불어 유고를 정리하여 문집을 발행하였다. 현석문(玄錫文)은 조선말기의 천주교신자로 《기해일기(己亥日記)》의 저자이다. 玄錫文(朝鮮 교명:칼로로 天主敎殉敎者)은 역관 현계흠의 아들이다. 아버지 계흠(啓欽)이 신유교난에 순교하자 더욱 신앙을 굳게 하여 1836년(헌종2) 에는 의주까지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으며 전도에 힘써 천주교 한양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헌종5) 기해박해로 아내와 누이가 순교하자, 이해 엥베르 주교의 부탁으로《천주교순교자열전(天主敎殉敎者列傳)》의 집필을 시작해서 3년만에 《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이름으로 완성했다. 1846년(헌종12) 김대건(金大建)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 1925년 교황비오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시조 현덕유(玄德裕: 시호 正獻)는 연주현씨(延州玄氏)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1186년(고려 명종16)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아갔는데 뜻이 크고 기개가있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을 꺼려 오랫동안 산지에 있다가 뒤에 이부시랑·예부시랑·서경유수를 거쳐 참지정사·대사공에 이르렀고 회원군에 봉해졌다. 회원은 창원(昌原)의 옛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연주현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창원현씨는 고려조의 명족으로 시조 덕유의 아들 현승(玄昇)은 이부상서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현장(玄璋)은 추밀원사를 지냈다. 현문혁(玄文爀)은 장의 아들로 도원수를 지냈고, 그의 동생 현상혁(玄象爀)은 삼사사를 지냈다. 상의사도를 지낸 현간(玄簡)의 아들 현태로(玄台老)는 평장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현유의(玄惟義) 역시 평장사에 이르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좌참찬을 지낸 현효생(玄孝生)의 아들인 문헌공(文憲公) 현석규(玄錫圭)를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효령대군의 아들인 서원군의 사위로 1460년(세조6) 문과에 급제하였다. 위인이 정직 청렴하여 매사에 공의를 주장하였고, 명석한 판단으로 공사를 잘 처리하였다. 성종이 특히 총애하여 모든 동료들의 참소에 대하여 성종이 「그 사람의 낯은 옻과 같이 검으나 그 마음은 맑아 물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사헌부 감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평안도 관찰사·우참찬 등을 지내는 동안 왕의신임이 두터웠으며 은권이 깊었다. 때로는 선은 진수와 어선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첨정을 지낸 현사원(玄士元), 관찰사를 지낸 현지준(玄之俊), 부사를 지낸 현수간(玄守諫), 지중추부사를 지낸 현성운(玄星運), 한말에 내부협판을 역임한 현호민(玄好敏)등이 씨족을 빛낸 인물들이다. 시조 현원고(玄元羔)는 고려 명종조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 문하시랑 평장사에 오르고 연산군에 봉해진 연주현씨(延州玄氏)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손자이며 성산부원군 현덕수(玄德秀)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 영동정을 지내고 순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연주현씨에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현씨 역시 고려조에서는 현담윤의 후광을 받아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현보(玄甫)는 시조 원고의 아들로 영동정을 지냈고, 그의 아들 현병성(玄秉性)은 찬성사를 지냈다. 현충수(玄忠守)는 병서의 아들로 승지동정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현광수(玄光壽)는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오와서는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현광우(玄光宇)는 영조조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양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이 밖에 현인량(玄仁亮)은 수군절제사를 지냈고, 현극(玄極)은 방어사를 역임했다. 현지후(玄之厚)는 도호부사를, 현벽(玄璧)은 오위장을 현말승(玄末丞)은 참의를 지냈으며, 현석로(玄碩老)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 외에 학자로 이름을 날린 청금당(聽琴堂) 현두찬(玄斗燦)과 옥천(玉泉) 현서익, 그리고 효자로 칭송을 받은 현적복(玄積福), 현범렬(玄範烈)등이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시조 현규(玄珪)는 조선 세종조에 군자감정·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연주현씨(延州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큰아들로 고려조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성산부원군에 봉해진 현덕수(玄德秀)의 8세손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성주에 오래도록 세거하면서 연주현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성주로 하였다. 그 후 언제 관적지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충남 천원군 일원과 전남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에 주된 세거지를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상벽은 영조 때 고명한 성리학자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강문팔학사의 한사람으로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에 속해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고,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저서에 《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 등을 남겼다. 현약호는 참봉 현징(玄徵)의 아들이며 당대의 석학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숙종조 기사환국 때 제주도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위해 당액을 썼으며 학행으로 유명하였다. 저서에 《병계집(屛溪集)》이 전한다. 사환으로는 현덕량(玄德良)이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에 공을 세우고 안동현감을 지냈으며, 현덕승(玄德升)이 선조조에 증광문과에 급제, 지평을 지내다가 광해군의 난정으로 물러나 학문에 전념했다. 형씨(邢氏)는 중국의 성씨로 주공의 제4자를 형후에 봉함으로써 <邢>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형씨의 본관이 문헌에 반성(班城)·진주(晋州)외에 몇본이 전하고 있은 반성은 원래 진주의 속현이므로 다 같은 동원분파이고 나머지는 모두 진주형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이어서 요즘에는 진주형씨로 일원화하고 있다. 시조 형옹은 원래 당나라의 학사로서 634년(당태종8, 고구려 영류왕17) 에 8학사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서 귀화, 벼슬이 대광보국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 때 신호위 상호군을 지낸 형적(邢積), 역시 고려 태조조에 예빈경을 지내고 밀직사에 추증된 형순(邢順)등이 있었다고 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계대를 상고할수 없으므로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비로서 진주의 반성에 정착 세거한 형방(邢昉)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방(昉)의 손자 공미(公美)가 고려 충렬왕조에 문하시중·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정왜 도원수로 왜구를 격파, 1등공신에 오르고 진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형씨는 고려조에서 이부상서·정당문학 등을 지내고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이 전하는 형군소(邢君紹)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특수한 인물을 내지 못해 퇴조한 느낌이 든다. 그는 중종 때 조광조가 혁신 정치를 단행하기 위해 한나라의 과거 제도인 현량방정과를 본따서 실시하던 현량과에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군수 등을 역임했다. 신평(新平)·보안(保安)·나주(羅州)등 호씨(扈氏)는 모두 동조 동원이다. 시조 호의(扈義:일명 元甫 시호 禧開)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堅萱)과의싸움에서 여러 군장을 거느리고 남하할 때 가담, 승전케 함으로써 개국공신에 책록,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태사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호철(扈哲)이 배천군에 봉함을 받아 배천으로 본관을 삼았다. 또 호철의 첫째 아우 호은열(扈殷悅)이 보안군에 둘째아우 호흥인(扈興仁)이 나주군에 봉해져서 각각 보안과 나주를 본관으로 삼음으로써 배천·보안·나주 3관으로 갈라졌다. 그 뒤 배천호씨는 17세손 호종국(扈從國)이 공민왕때 승록대부·정당문학·수문전 태학사·감수국사·상장군에 이어 대사도에 오른 뒤 개국공신으로 책록, 신평군에 봉해지고 신평을 식읍으로 하사 받음으로써 호종국을 중흥조로 삼고 신평으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이들 3관 호씨는 모두 동조 동원임을 확인하고 1956년에《병신대동보(丙申大同譜)》를 간행하였다. 전주호씨(全州扈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이다. 시조 호준(扈浚)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낼 때 이여송장군의 부장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많은 전공을 세운 뒤 귀국을 단념, 귀화했다. 그는 명나라의 유신으로서 조선의 왕을 섬길 수 없다 하고 전주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쳤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그의 후손 호중권(扈仲權)이 고종때 대호군을 지냈으며, 호영택(扈榮澤)이 군수를 지냈고, 호영욱(扈榮旭)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호(胡)씨의 본관은 파능(巴陵)·아산(牙山) 등 7∼8본으로 전한다. 호씨(胡氏)의 본관이 문헌에 8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파릉(巴陵) 외에는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파릉호씨의 시조 호극기(胡克己: 자 禮復)는 송나라 때의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15세손인 이부상서 호사표(胡士表)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 말엽에 한림학사로서 1643년(인조21) 답례사가 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가 이듬해에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귀국하지 않고 가평군 대명연에 은거하다가 북청군 덕성면 중장에 초가를 지어 <치암우>라 이름짓고 여생을 보내니 효종이 그의 충성심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로 녹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시조의 고향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파릉으로 하였다. 한편 송나라 복주 사람으로 상선을 타고 고려에 와서 귀화한 호종조(胡宗朝)가 예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보문각 대제를 지내고 인종 때 기거사인에 이르렀으며, 풍수의 대가로서 지압술에 능했다고 하는데 그의 후손이 현존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홍(洪)씨는 이조에 정승 15명, 대사헌 7명, 공신 17명, 왕비 2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족으로 뽑혔다. 문헌에는 10여본이 나와 있지만 현존하는 본은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4본 뿐이다. 이중 단연 으뜸가는 본이 남양홍씨다. 그런데 남양홍씨 가운데는 전연 계통을 달리하는 두 집이 있다. 당홍(唐洪)과 사홍(士洪)이 바로 그 것. 당홍은 고려 초기의 인물인 홍은열(洪殷悅, 三重大匡太師, 그의 선조가 당나라로부터 문화 사절의 임무를 띄고 왔다고 함)을 시조로 하고 있는 반면, 사홍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중국 강남 휘주 사람으로 당나라의 태학사였다. 그는 640년 고구려 제28대 영류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유학을 가르칠 학사의 파송을 요청하자 제일 만저 선발되어 우리나라에 입국, 평양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은수포 당관으로 옮겨 문화를 진흥시키니 왕은 그가 사는 곳을 당성이라 하고 이에 사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 1세로 하고, 본관은 당성이 고려시대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남양으로 하였으며 같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인 홍선행(洪先幸)계와 구분하기 위해 <당홍(唐洪)>이라 통칭하고 있다. 당홍의 파계는 시조의 12대손에서 14개 파, 그 윗대에서 3개 파로 도합 17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벼슬 열력이 뛰어나고 후손의 수가 많은 파는 아래와 같다. 남양군<주>파(南陽君<澍>派) 문정공<언박>파(文正公<彦博>派) 판중추공<언수>파(判中樞公<彦修>派) 익산군<운수>파(益山君<云遂>派) 예사공<복>파(禮史公< >派) 중랑공<후>파(中郞公<厚>派) 당홍(唐洪)은 조선조에서 상신 8명, 대제학2명, 왕비 1명, 호당 7명, 청백리 3명, 문과 급제자 206명, 그리고 공신 10여 명을 배출했으며 그중 종파인 남양군파가 주류를 이루어 상신 5명과 대제학2명, 왕비1명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판서급을 배출, 열력이 단연 으뜸이다.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은 천민(天民), 일민(逸民), 성민 (聖民)형제를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졸옹공파(拙翁公派)에서만 상신 4명이 나왔다. 백파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 천민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홍서봉(洪瑞鳳)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자신과 아버지 천민, 조부 춘경이 모두 호당에 뽑혀 3대 호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파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일민의 손자 해봉(海峰) 홍명원(洪命元)이 인조때 관찰사를 지내고 당대의 시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또 명신으로서 <장덕군자>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의 다섯 아들인 처후(處厚), 처심(處深), 처윤(處尹), 처대(處大), 처구(處久)가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맏아들 처후의 자손이 가장 번창했다. 경종 때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과 맞섰던 충간공(忠簡公) 홍계적(洪啓迪)은 처후의 증손이요,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나오는 <도둑이 들어왔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것을 보고 엽전꾸럼미를 두고 갔더니 방문을 붙여 되돌려 주었다. 졸옹공파에서는 졸옹 홍성민이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그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명하의 형 명구(命耉)의 아들인 충익공(忠翼公) 홍중보(洪重普)는 현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중보의 아들 효간공(孝簡公) 흥득기(洪得箕)는 효종의 부마가 되었고,손자인 충간공(忠簡公) 홍치중(洪致中) 영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이밖의 남양군파 인물로는 중종반정 공신인 홍경림(洪景霖), 홍경주(洪景舟) 형제가 있다. 문정공파에서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안무공(安武公) 홍달손(洪達孫)이 나왔고, 판밀직공파에서는 청백리 홍계방(洪桂芳),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에서는 태조의 부마 홍해(洪海)와 단종조의 정난공신 홍순로(洪純老)가 나왔다. 익산군파(益山君派)에서 성조조에 좌의정에 오른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과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된 덕종의 부마인 소양공(昭襄公) 홍상(洪常)등이 나왔다. 예사공파에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홍효손(洪孝孫), 선조조의 호성공신 홍진(洪進), 그리고 헌종 때 대사헌을 지내고 유학자로 이름높은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등이 나왔다. 중랑공파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문경공(文景公) 홍길민(洪吉旼)과 그의 아들로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량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 등을 배출했다. 이밖에도 경력공파에서는 위평공(威平公) 홍윤성(洪允成)이 나왔다. 그는 문종즉위년에 문과에 급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예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고종때 인물로 금오위 별장을 지냈다. 그는 당성(지금의 남양)에 토착한 호족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선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의 세거진인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남양에는 당나라의 귀화족인 홍천하(洪天河)계의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있어 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홍선행계의 홍씨를 <토홍(土洪)>으로 통칭하고 있다. 토홍의 세계는 시조 홍선행의 9대손에서 12대손 사이의 5개 종파로 구별된다. 문희공<언필>파(文僖公<彦弼>派) 정효공<담>파(貞孝公<曇>派) 참의공<한>파(參議公<澣>派) 주부공<귀호>파(主溥公<貴湖>派) 대호군공<귀연>파(大護軍公<貴演>派)> 사홍은 조선조에서 상신 2명, 대제학1명, 청백리3명, 부마1명, 공신 3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했는데 각파별 열력은 다음과 같다. 문희공파에서는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은 승지 홍형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로 지도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 저작·지평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한 후 우부승지가 되었고, 기묘사화로 투옥,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나왔다. 1526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여섯 번 대사헌을 역임, 이어 이조·호조·형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 1544년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류관(柳灌)과 함께 원상이 되어 시정을 처결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545년(명종즉위) 위사공신2등으로 익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548년(명종3) 다시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궤장을 하사받았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경헌공(景憲公) 홍섬(洪暹)은 영의정 홍언필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23)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홍양에 유배, 석방된 후 사찬, 부제학,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7) 에 청백리에 녹선, 그후에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했다.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삭직, 다시 편의금부사로 복직하여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룰 지내고, 선조 즉위 원상으로 서정을 처결, 우의정이 되었고,1571년 좌의정, 1573년에 궤장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 157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홍섬의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宋帙)의 딸이어서 외조부와 부자가 모두 영의정에 오른 집안으로 유명하다. 정효공파에서는 언광(彦光)의 아들인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이 훈구파의 거두로서 선조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정효공의 손자 희(熹)의 아들 충목공(忠穆公) 홍진도(洪振道)와 충정공(忠靖公) 홍진문(洪振文) 형제는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외손자요, 인조와는 이종간으로 둘다 인조때 반정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진도의 5대손 정간공 홍억(洪檍)은 정조 때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참의공파에서는 이조참의 홍한(洪瀚)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화를 당했고, 그의 증순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은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도 뛰어났다. 가신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우원(洪宇遠)은 남인의 중진으로 숙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홍우량(洪宇亮)은 효종때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莊僖公) 홍숙(洪淑)이 중종때 형조판서로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숙청에 간여한 후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홍려(洪礪)는 중종의 부마이고, 병자호란 때 척화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은 진서 홍이성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 사서가 되었고, 1635년에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굴욕적인 요청을 하므로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친을 주장하므로 극력 반대하다가 평양서윤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척화신으로 몰려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심양에 압송되어 1637년(인조15) 3월 15일에 순절하였다. 1653년(효종4)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86년(숙종12) 에 이조판서에 가증되고,정려를 명했으며, 1757년(영조33)에 의리장과 부조묘를 명했으며, 청나라 태종은 그 충렬에 감복하여 삼한태두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밖의 인물로는 실학자로 혁신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있다. 그는 목사 홍력의 아들이다. 당시 유학자들과는 달리 군국, 경제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였고, 숙부를 따라 청나랑에 가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경의, 성리, 역사, 풍속등에 대하여 토론 했으며, 천주당에 가서 서양문물을 견학하고 독일인 흠천감정 할레르슈타인, 부감 고가이슬과 면담, 관상대를 견학하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귀국 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1775년 음보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익위사 시직, 감찰, 태인현감, 영주군수에 이르렀다. 종래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기화설을 주장한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하고, 경제정책에 있어서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국민생활의 보장과 국방의 기반을 견고히 하며, 계급의 타파, 인재의 등용, 학제개혁, 관제개혁, 민권옹호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천주교를 배척하고 주자학,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음악가로 <봉선화>의 작곡가인 홍난파(洪蘭坡)가 있다.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치고 동소교사가 되었다. 1918년 도교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업, 귀국후 <봉선화>를 작곡하였고, 1922년 연악회를 창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한편 음악잡지《음악계(音樂界)》르 발간했으며, 그 동안 소설《처녀혼(處女魂)》·《향일초(向日草)》·《폭풍우 지난 뒤》 등을 발표,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7년 도교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2년 뒤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내고 이해 도미, 셔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33년 귀국,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을 보급했다. 작품으로는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다. 시조 홍좌(洪佐)는 고려조에 직장동정을 지냈다. 그의 선대는 한양에서 살다가 부계로 이주하여 세게했다고 하며,시중을 지낸 홍란(洪鸞)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상고 할 수 없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부계로 하였으며 뒤에 부계가 의흥으로 개칭된 까닭에 의흥홍씨라고도 한다. 부계홍씨(缶溪洪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8명, 대제학 1명, 호당2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귀달(洪貴達)과 그의 두 아들 언충(彦忠)·언국(彦國)형제를 들수 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은 1460년 강릉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을 거쳐 봉교가 되었다. 1460년 설서로서 문무를 겸했으므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승진, 1469년(예종1) 장령으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직제학, 동부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1481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다. 충청도 관찰사, 형조·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 대사성, 지중추부사 겸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좌참찬으로서 10여조에 달하는 왕의 난정을 들어 간하다가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의해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 등을 편찬하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손녀를 궁중에 들여 보내라는 왕명을 듣지 않아 형장을 맞고 경원으로 유배가던 도중 살해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에는 끝까지 항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우암(寓菴) 홍언충은 좌참찬 홍귀달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군1) 증광문과 급제, 승정원 부정자를 거쳐 정자·자작·박사를 역임했다. 1498년 사가독서를 한 후 다음해 수찬이 되고,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3년 교리에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갑자사화로 문외출송되었다가 진안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직강에 복직되고, 다시 사가독서를 했다.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이 뛰어나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등과 함께 사걸로 일컬어졌다.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아우 홍언국도 문장과 지조로써 사림의 존경을 받았고,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언국은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연산군이 그의 딸의 미모를 탐내어 입궁을 강요했으나 거절,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고려 고종때 국학직학을 지냈으나 그의 선대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조상의 세거지가 풍산(豊山)이기 때문에 풍산으로 하였다. 풍산홍씨(豊山洪氏)는 조선조에서 왕비1명, 상신5명, 대제학3명, 공신1명, 장신3명, 문과 급제자 129명을 배출했는데 특히 헌종때의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풍산홍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문경공(文敬公) 홍이상(洪履祥)이다. 그는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선조때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의 여섯 아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며, 여섯 아들에게서 11명의 손자를, 6대손에서는 140여명으로 자손이 번창, 풍산홍씨의 세력이 급속도로 신장되었다. 홍이상의 아들들은 모두 현달했으며 그중에서 넷째인 영(零)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영의 아들 주원(柱元)은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주원의 큰아들 만용(萬容)은 숙종때 예조판서, 만용의 손자 현보(鉉輔)는 영조 때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봉한(鳳漢)과 인한(麟漢)은 현보의 아들이다. 봉한(鳳漢)은 홍현보의 아들이다. 음보로 세마 등을 거쳐 1743년(영조17) 딸이 세자빈(사도세자의 비)으로 뽑힌 두 다음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이 되었다. 1745년 광주부윤에 특진,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케 되면서부터 누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 제조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고, 다음해 비변서 당상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했다. 1755년 구관당상·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에 승진, 1761년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그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특히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등 시무 6조로 당면한 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의 작폐의 엄금, 은결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의 충실고 백성 부담의 절감을 기하는 등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 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비로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궁중 참변이 일어나면서 조정은 영조의 실덕을 책하는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책하는 <벽파>로 갈리어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이 무렵 홍봉한은 시파로서 세손(사도세자의 아들로 뒷날의 정조)의 보호에 힘썼고, 그의 아우 인한은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정조 즉위 직후에 정조를 해치려는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사사당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호해 온 사람이 홍국영(洪國榮)이다. 그는 주원의 둘째 아들인 만형(萬衡)의 5대손이며, 판돈령부사 홍낙춘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48) 정시문과에 급제, 정자를 거쳐 실서가 되어 당시 사도제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들이 세손(정조)을 해치고자 수차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세손의 승명대리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탄핵, 1776년 정조가 즉위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하여 정예병을 별도로 뽑아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신변이 위험한 정조의 보호에 힘쓰고 다시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상주와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도정권이 이룩되었고,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과 비슷하다 하여 대후겸을 불렸다. 그가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 겸 숙위대장이 되어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모든 정사가 그를 통하여 이뤄지게 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시작했지만 갖은 정치적 파란 끝에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풍산홍씨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홍양호(洪良浩)와 홍만선(洪萬選)을 꼽는다. 문헌공(文獻公) 홍양호는 당대에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이다. 그는 영조때 문과에 급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와서는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또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진체>와 <당체>를 잘 썼다.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은 예조참의 홍주국의 아들이다. 1666년(현종7) 진사시에 합격하고, 장악원정에 이르렀다. 행실이 근엄하고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서 당시의 완인이라 일컬어졌다. 류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의약·구황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실학사상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柳重臨), 서유구(徐有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밖의 인물로는 이상(履祥)의 셋째아들인 집의 후손 중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이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문간공(文簡公) 홍석주(洪奭周)가 순조 때 대제학·좌의정을 지냈다. 넷째아들 영(零)의 후손에서는 문헌공(文憲公) 홍낙순(洪樂純)이 정조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시조 홍규(洪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토평할 때 홍주에서 처음으로만나 견훤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 삼중대광 벽상 익찬공신으로 해풍부원군(해풍은 홍주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홍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홍주홍씨(洪州洪氏)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조의 아들 홍유후(洪儒厚)는 태사를 지냈고, 손자 홍욱(洪旭)은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 욱의 손자 홍간(洪侃) 역시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간의 손자 충숙공(忠肅公) 홍탁(洪濯)은 태사를 지냈다. 탁의 현손 홍위(洪僞)는 대제학을 지니고, 위의 5대손 홍우평(洪禹平)은 조선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우평의 아들 홍강(洪剛)은 관찰사를 지냈다. 학해(學海) 홍빈(洪濱)의 아들 홍석견(洪石堅)은 1520년(중종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홍락(洪珞)의 아들 홍찬서(洪纘緖)는 1629년 (인조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사를 지냈다. 화씨(化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진양(晋陽)단본이다. 《진양화씨세보(晋陽化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원래 중국 낭야 사람으로 본성은 화씨(花氏), 본명은 광신(光新)이며, 명나라의 개국공신이자 태조 때 사마대장군 영상서사를 지낸 충장공(忠莊公) 화운룡(花雲龍)의 6세손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명나라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세가였는데, 시상이 맑고 절의가 굳은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낭야의 화촌대에 은거했다. 때마침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낭야가 함락되자 그는 나라의 장래를 군심하며 <나라의 장래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어찌 오랑캐의 치하에서 편안하게 있으면서 선영을 받드리요>하고 조선으로 건너와 경주에 정착하여 살았다.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기특히 여겨 <화(花)씨가 우리나라에 들오온 것은 향화(向化)의 의리라>하며 화씨(化氏)로 사성하여 도승지에 기용하고 경성군에 봉해졌다. 그러나그 후 약 백여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우고, 영월에서 진주로 이주한 화섭(化燮)을 중조1세로 하고 본관을 진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에는 <화씨의 본관이 복룡(伏龍)·여황(餘 ) 2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나주의 지역명으로서 사실상의 나주화씨 단본>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주화씨가 진양화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진양화씨의 오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황(黃)씨의 본관은 163본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약 20본 정도이다. 그들 여러 관향 가운데 창원(昌原), 평해(平海), 장수(長水)의 3본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씨의 원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벼슬아치였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온다. 그는 한광무제(漢光武帝) 건무 4년(신라 유리왕 5년)에 구대림(丘大林) 장군(평해 구씨 시조)과 함께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착하여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며 황장군(黃將軍)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나라 황씨의 시원이다. 지금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면) 월송(越松) 지방에는 황장군 묘가 전하고 있으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은 구미진(丘尾津)이라고 불리고 있다. 황씨는 주로 고려 말엽에서 조선전반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에 정승 3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모두 171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특히 장수황씨가 부자(父子) 영의정과 2명의 대제학을 내어 단연 빼어나지만 문과 급제자 수가 많기로는 창원황씨가 으뜸이다. 시조 황사청(黃士淸)은 조선 선조 때 인물로는 학자였다. 그는 고향인 경주에서 어릴 때 임진왜란을 피해 함경도 지방으로 가던 중 가족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군 산내면에 정착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 선계를 알 수가 없어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고향인 〈慶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후손 7세 황치홍(黃致弘)은 1890년(고종27)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을 역임하였고, 8세 황기석(黃基錫)은 1907년 중추원 의관, 궁내부 주사 등을 지내고 서당을 세워 후학을 위하여 면학에 전념하였으나 정미의병으로 인해 서당은 파손되었다. 그 후 9세 황해철(黃海哲)이 잃었던 선계와 본관을 찾기 위해 1928년 경북 울진 월송에 가서 문의하던 중 경남 양산에 거주하는 황우찬(黃宇贊)이 소장한 <병신보>에서 황사청이 평해황씨 시조 온인(溫仁)의 9세손 란(鸞)의 5세손 황진운(黃進雲)의 둘째아들임이 밝혀졌고, 영덕군 창수면 황장구의 족보에도 똑같이 실려 있어 선계가 평해황씨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근 4백년간을 〈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족보를 편찬하였으므로 평해로 복원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평해황씨의 분적종으로 하여 황사청을 시조로 하고 세계를 잇기로 하였다. 시조 황언필(黃彦弼)은 고려 경종, 목종, 현종 3조를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 도첨의정승에 오르고 덕풍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의종때의 인물로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를 지낸 황광적(黃光迪)을 1세조로 하고 시조가 사적받은 덕풍이 덕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덕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덕산황씨(德山黃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린(黃璘), 황위(黃瑋), 황필(黃珌) 3형제를 꼽을 수 있다. 황린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합천군수, 교리, 승지, 상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고, 정붕(鄭鵬), 김일손(金馹孫)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매정(梅亭) 황위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동래부사, 현감, 교리 등을 거쳐 승지를 지냈으며 상정(橡亭) 황필은 성종때 문과에 급제,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시조 황자신(黃自新)은 고려조에서 대장군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황효원(黃孝源)은 정자 홍사간의 아들이다. 444년(세종26) 문과에 장원, 예빈시 주부·예조좌랑·좌헌납· 검상·사인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1) 사복시윤으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 이 되고 이조참의에 특진했다. 1457년 공조참판으로서 성절 겸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 에 다녀온 뒤 상산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충청도 관찰사를 역임, 1459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한성부윤에 올랐다. 두 번 관찰사를 지 내면서 유능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상산이 상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상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의 <만성시조편> 및 <황씨소원록>에 의하면 상주황씨(尙州黃氏)의 시조 황석주(黃石柱)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회산군파(檜山君派)의 시조 황석기(黃石奇)의 아우이고, 황효원은 석주의 6세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주황씨는 창원황씨의 분적종이고 자신(自新)은 석주의 손자가 되는 셈이나 사실 여부는 상고할 수 없다. 상주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3명, 청백리1명, 공신2명, 장신2명을 배출했다. 황사간(黃士幹)은 태종때 문과에 급제, 정자를 지냈고, 그의 아들 양평공(襄平公)황효원(黃孝源)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좌찬성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세조때좌익공신,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올랐다. 동산(東山) 황우한(黃佑漢)은 좌찬성 황효원의 5대손이며 이조참판에 추증된 홍세근의 아들이다. 생원으로서 1574년(선조7) 문과에 급제, 1580년 헌납이 되고, 1589년 좌승지를 거쳐 159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관찰사, 1596년 한성부윤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 1599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1601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1605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판·사옹원제조 등을 지낸 뒤 1606년 대사헌으로 죽었다. 황징(黃徵)은 황우상의 손자로 1662년(현종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9년(현종10) 무과에 급제, 선전관, 비변사 낭관, 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훈련원 부정 겸 사복시 내승을 거쳐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부호군 겸 내금위장 태복내승으로 재직 중, 연로한 부친이 있는 곳 가까이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뜻을 임금이 알고 충주영장에 임명하여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682년(숙종8) 허새(許璽)의 의옥사건 때와 인현왕후의 복위 때 두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소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조 황세득(黃世得)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회산군파(檜山君派)의 시조 황석기(黃石奇)의 아우이며, 문헌에 상주황씨(尙州黃氏) 시조로 나타나 있는 황석주(黃石柱)의 17세손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주황씨(星州黃氏)는 창원황씨 회산군파와 동원이며 상주황씨의 분적종으로 보인다. 시조 황세득은 직산 출신으로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장흥부사가 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선봉이 되어 벽파정 고금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이순신 함대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많은 적을 무찌르고 이듬해 전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황박(黃珀) 역시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1621년(광해군13)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귀국할 때 마침 후금이 심영, 요양을 함락하여 육로가 막히자 자원하여 해로로 명나라 등주까지 그들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1634년(인조12) 의주부윤을 거쳐 뒤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고 노령으로 퇴관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 휘하 군대에 종군, 용인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숙종때 그 부자에 대한 정문이 고향에 세워지고 공조판사에 추증되었다.역시 광해군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의주부윤·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뒤 노령으로 퇴관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 휘하에 종군, 용인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아산군 탕정면 용두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한다. 시조 황민보(黃旻甫)는 고려조에 중윤을 지냈다. 그의 선대에서 장수황씨(長水黃氏)으로부터 분적했다고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어느 연대에 어느 조상이 우주(紆州)로 사적 되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우주황씨(紆州黃氏)를 중흥시킨 인물은 시조의 10세손인 문숙공(文肅公) 황거중(黃居中)이다. 그는 고려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가 남원 운봉으로 쳐들어 온 왜구 아기바투를 칠 때 종사관으로 참전, 공을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 개국 후에 태조가 그를 정당문학에 발탁했다. 평소 유학에 심취했던 그는 사찰의 난립과 각종 불교행사의 폐단, 불교도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한 건의를 했다. 경학에 뛰어난 젊은 선비들을 뽑아지방에 배치하여 백성들을 교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조선초기 배불숭유를 국책으로 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오르고 공조전서, 호조전서 등을 역임했다. 또 그의 아들 기(圻), 육(陸), 균(均), 견(堅) 4형제도 모두 현달하여 번성한 까닭으로 그를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황헌(黃憲)은 현감 윤조(胤祖)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이 되어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여 사사케 했다. 시조 황경(黃瓊)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위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전중감으로 권신 이의방(李義方)이 모해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세거한 황공유(黃公有), 태학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기록된 일재(逸齋) 황감평(黃鑑平)등이 선대에 있었으나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고 선대의 요람지요 세거지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장수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0명, 상신2명, 대제학2명, 호당2명, 청백리 1명, 공신6명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4대 명상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정승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이다. 고려말 1389년(창왕1)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 여러 관직을 거쳐 1404년(태종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에 올랐으며,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등 왕의 처족이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거했고, 형조, 병조,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 1416년(태종16) 이조판서로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이어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1418년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 이어 남원에 위배되었다. 1422년(세종4) 풀려나와 1427년 좌의정에 오르고 세자사부를 겸했다.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즉, 영의정에 올라 이후 1449년 치사할 때까지 18년간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면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세조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다. 그는 정승의 자리에 24년, 영의정에만 18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청렴하여 청백리에도 녹선 되었다. 시조 몇 수가 전하며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상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방촌집( 村集)》이 있다. 그의 큰아들 호안공(胡安公) 황치신(黃致身)은 세종때 호조판서, 단종 때 중추원사, 세조 때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셋째아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은 세조 원년에 좌익공신에 올라 좌참찬·좌찬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은 희(喜)의 후손으로 부원군 열(悅)의 아들이다. 그는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당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인임(李仁任)이라고 명나라에 잘못 기재된 것을 여러 차례 진정하다가 승지에 올라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정시켰다. 이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에 봉해지고 예조를 거쳐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 보를 배종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國景仁)에 의해 임해군·순화군 두왕자와 함께 잡혀 왜장 가토로부터 선조에 항복권유를 쓰라는 강압을 받고 거부했으나 두 왕자와 그의 손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이 대신 썼다. 그는 선조때 광국공신에 오르고 대제학이 되었다. 이에 그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힌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묵살함으로써 석방된 뒤에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1597년 풀려났고, 죽은 뒤에 신원되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했으며,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또 한 사람의 대제학인 문경공(文景公) 황경원(黃景源)은 정욱의 8대손이며 기(璣)의 아들이다. 그는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삼례(예기·주례·의예)에 정통하고 특히 고문에 밝았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이밖에 선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내침이 있을 것을 예고했던 우송당(友松堂)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 방어전에서 전사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숙종때 학자로서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황엽(黃曄), 한말의 야사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등이 유명하다. 시조 황을구(黃乙耉)의 선계는 중국 노나라 사람인 황보(黃輔)이다. 보의 아들 황석기(黃石奇: 시호 恭僖)가 고려 충혜왕비 덕녕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와서 회산부원군(회산은 창원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창원황씨(昌原黃氏) 공희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황주군 제안면 성북리에 있고, 매년 음력 9월 18일에 향사하였는데 분단 이후 내왕이 막혀 근황을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낸 황윤후(黃胤後), 현종 때 문과에급제, 현감을 지낸 황재인(黃載仁)이 있다. 이밖에 황기홍(黃起鴻)과 황일룡(黃一龍)이 철종과 고종 때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다. 창원황씨(昌原黃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른바 <토황(土黃)>이라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황신(黃信)을 1세조로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와 공희공(恭僖公)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고 <당황(唐黃)>이라 일컬어지는 공희공파(恭僖公派), 그리고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황양충(黃亮沖)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가 그것이다. 이들 3파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따라서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에 <당황>이라 불리는 공희공파의 시조 황석기가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서 고려 공민왕때 노국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져 왔었으나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의 난을 토평하는 등 크게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원래 원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창원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78명, 공신 2명, 상신1명을 3파에서 고루 배출했다. 시중공파에서는 황재(黃梓), 황인검(黃仁儉), 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황재는 숙종때 문과에 급제, 영조 때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다시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편술했다. 그의 큰아들 정효공(貞孝公) 황인검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창성위가 되었다. 용헌 황사우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송간(松澗) 황응규는 우찬성 황사우의 아들이며,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초서를 잘 썼으며 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 후에 성균관의 천거로 전한사별제가 도어 장흥고 직장을 지낸 뒤 1569년(선조2) 52세로 알성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1588년 고향에 은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많은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그 공으로 절충장군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령부사가 되었으며 향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을 준비중 병사했다. 응규의 아들 정익공(貞翼公) 황섬은 정탁(鄭琢)의 문인이며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윤사가 되어 많은 공을 세우고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 이후 낙향, 학문에만 전념했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 교조강릉도 도만호가 되어 안우(安祐)와 함께 서울을 수복, 찬성사 상의에 호성수복 1등공신이 되고, 지문하성사에 승진, 추충분의익찬공신이 되었다. 이어 문하찬성사를 지내다 회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364년 동북면 도순토사로 덕흥군 혜를 왕으로 추대하고 원나라에서 침입해온 최유(崔濡)를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무찔렀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 경정감승을 받고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이 되었고, 1377년(우왕3) 의창군으로 서강도원수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무예와 용맹이 탁월했으며 특히 궁술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으며 명궁으로도 이름이 높아 원나라 순제도 그의 궁술을 관람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황기(黃琦)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길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부자가 함께 당대의 명신이었다.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은 정랑 황대수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21) 알성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정언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관해 대신들의 직언하지 않음을 논박하다가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전저의 문제에 관련,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기용,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을 접반하고 세자(광해군)를 따라 남하 제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6년 절충장군으로서 적영에 다녀온 뒤 통신사가 되어 명사를 따라 일본에 왕래,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올랐고, 그 뒤에 위유사·찬획사·전라도 관찰사 등으로 왜란에 공이 많아 159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호조의 참판, 이어 한성부 우윤·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대사헌으로 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다. 160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또 앞서의 사건으로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공훈으로 복관이 결정되었으나 상신 류영경(柳永慶)이 시행하지 않아 낙향했다. 1610년(광해군2)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2 등에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웅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황신의 후손에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했던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晧), 정조 때 학자이며 서예가로 이름났던 황운조(黃運祚)등이 나왔다.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종파라 일컬어지는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5) 중국 후한의 학사로 구대림(丘大林)장군과 함께 교직국에 시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잡고 살았다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갑고·을고·병고가 각기 기성군(기성은 평해의 옛이름)·장수군·창원백에 봉해져서 각각 평해황씨(平海黃氏), 장수황씨(長水黃氏), 창원황씨(昌原黃氏)로 갈라진 후 다시 세계가 실전되어 갑고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금오위장군·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명,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희석(黃希碩), 황현(黃鉉), 황여일(黃汝一), 황윤석(黃胤錫) 등을 들 수 있다. 양무공(襄武公) 황희석은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회군한 후 조선 개국에 참여, 개국공신으로 평해군에 봉해졌다. 황현은 공조전서 유정(有定)의 아들로서 태조 때 문과에 태종때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 세종때 대사성·인수부윤 등을 지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매월헌(梅月軒) 황여일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참판에 이르렀다. 이재(李齋)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익찬에 이르렀다. 그는 영조∼정조대의 실학자요 언어학자이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명종때 장원서 별좌로 시폐 4조를 상소하고 진보현감이 되어 민심을 수습한 황응청(黃應淸),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중종때 문과에 급제, 성주목사를 지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인조때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중군으로 전사, 병조참의에 추증된 황선신(黃善身)등이 있다. 시조 황공(黃功: 자 聖報)은 원래 중국 항주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말엽에 중도유수로 있다가 당시 북쪽의 오랑캐 누르하치가 후금국을 세워 명나라를 자주 침범하자 양병 정책을 세우고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국권의 회복을 꾀했으나 1644년에 끝내 명나라가 멸망하자 의병을 일으켜 청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어 심양에 압송, 계류되었다. 때마침 조선에서 병자호란 때 볼모로와 있던 봉림대군과 만나게 되어 서로의 뜻이 같음을 알고 명나라의 재건을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1645년 봉림대군이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여덟 사람과 함께 심양을 탈출, 봉림대군을 배종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들을 세칭 9의사라 일컫는다. 시조 황응성은 조선 중기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의정부 사록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행할 때 호종한 후 영유현령을 거쳐 평안도 병마평사가 되어 군량수송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보령현감으로 있을 때 이몽학(李夢鶴)이난을 일으키자 최호(崔湖)·홍가신(洪可臣)등과 함께 이를 토평하고 정난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선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누대를 황주에 세거한 사족의 후예로 황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병자호란때 구성부사로 철옹성을 지키고, 난이 끝난 뒤 의주부윤을 지낸 황윤후(黃胤後), 정조조에 휘릉참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은중경(恩重經)》및《두율(杜律)》을 하사받았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황인기(黃仁紀)를 들 수 있다. 1613년(광해군5)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1625년(인조3) 순릉참봉으로 별시문과에급제, 1627년 정묘호란때 가동과 마을 장정 수십명을 이끌고 참전코자 하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36년(인조14) 구성부사가 되어 부원수의 종사관을 겸임,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의주부윤이 되었다. 《회덕황씨세보(懷德黃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황락(黃洛)은 한나라 유신으로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에 표착하여 회덕에서 살았으므로 회덕에 관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서 지문성부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고 좌명공신으로 회천군에 봉해진 황윤보(黃允寶)를 1세조로 하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충남 대덕군 동면 마산리 관동에 있다. 회덕황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자후(黃子厚)·황종해(黃宗海)·황세정(黃世楨) 등을 들 수 있다. 혜의공(惠懿公) 황자후는 음보로 인녕부윤을 거쳐 1413년(태종13) 형조좌참의가 되어 호패법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으나, 그후 소합유의 진상에 부정이 있었고, 또 환상미의 부정 처분으로 회덕·진주 등지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듬해 호조참의로 종마관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여러 관직을 거쳐 1421년(세종3) 좌군총제가 되어 정조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성부윤·중추원부사를 역임, 1425년(세종7) 첨구전문업의 설치를 건의했으며, 중추원사에 올라 전의감 제조를 겸임했다. 황종해는 황덕휴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3)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1613년(광해군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1618년(광해군10) 연산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1628년(인조6)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그의 아들 황유(黃裕)는 태종의 부마로 회천위에 봉해졌다. 후천(朽淺) 황종해는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덕휴(德休)의 아들로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꼐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인조반정 후에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제곡(齊谷) 황세정은 송준길(宋浚吉)의 수제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고, 또 송시열(宋時烈)에게도 사사했다 숙종 원년에 제2차 예송이 일어나 송시열과 이미 죽은 송준길이 화를 입자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윤휴일파의 죄상을 규탄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경신대출척 때 풀려나와 연풍현감이 되었으나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비분, 벼슬을 떠나 학문에 전념했다. 후(后)씨의 본관은 기인(器寅)인데 본디 중국의 성씨이다. 남궁씨는 고조선 시대 중국에서 동래한 성씨로 본관은 함열(咸悅)단본이다. <함열남궁씨족보(咸悅南宮氏族譜)>에 의하면 B. C 1122년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하고 사도 벼슬을 지낸 남궁수(南宮脩)가 우리나라 최초의 남궁씨라고 한다. 그래서 그를 원조로 하고, 고려 성종조의 대장군 남궁원청을 시조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 남궁원청은 고려 경종 초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고, 991년(성종10) 대장군으로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오르고 감물아현(甘勿阿縣)을 식읍으로 받았다. 감물아현은 지금의 익산군 함열(咸悅)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함열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조 이하의 세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희(南宮得禧)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궁신(南宮信) 남궁민(南宮敏)을 들 수 있다. 신은 1세조 득희의 아들로, 충혜왕조에 호군을 지냈다. 그는 조적의 난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같이 압송되어 도주로에 유배되었다. 민은 판서 경(璟)의 아들로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 충목왕조에 경상도에 파견되어 안렴존무사를 겸했고, 뒤에 정치관이었다. 남궁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남궁찬(南宮璨), 남궁침, 남궁옥(南宮鈺) 등이 걸출한 인물이다. 남궁찬(南宮璨)은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의 여러 별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1495년 연산군의 난정을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를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로 극간했다가 용안으로 유배되고, 이어 1503년 그 곳에서 죽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었고,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숙(淑)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다. 남궁침은 찬의 손자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초에 춘추관 기사관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한성부 판윤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남궁옥은 관찰사 율의 아들로 효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은 시정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속필로 유명했다. 근세 인물로는 시인 남궁벽,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남궁억이 유명하다. 남궁벽(南宮璧)은 192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당시 천재 시인이라 불렀으나 28세로 요절했다. 남궁억(南宮檍)은 한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자는 치만(致萬). 1883년(고종 20) 영어학교에서 수학, 1886년 내부주사가 되고 이들해 전권대사인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해에 다녀와서 칠곡부사를 지냈다. 그 후 홍화학교에서 영문법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했다. 1898년 황성신문사 사장, 1905년성주목사, 다음해 양양 군수가 되어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대한협회장, 1908년 <교육월보(敎育月報)>를 간행하는 한편 관동학회(關東學會)장이 되었다. 1910년 배화학당 교사로 <가정교육(家庭敎育)>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의 교과서를 지었다. 1918년 홍천의 우곡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 무궁화 묘포를 만들었다. 1933년 무궁화와 역사사건으로 투옥,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造船)이야기> 등이 있다. 동방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진주(晉州) 단본이다. 동방씨는 중국 상고시대 복희씨의 후손으로 복희씨가 동방의 진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방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1792년(정조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는 동방숙(東方淑)의 본관 이 진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와 본관을 진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총 60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50가구가 평북 정주·박천지방에 있었으며,그 외에 평남에 4가구, 강원도 회양에 1가구, 경북 대구에 1가구, 경기도 장단에 3가구, 파주에 1가구가 있었다. 시조 독고공순(獨孤公舜)은 원래 중국 하남(河南)출신으로 고려 중엽에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 명종 때 시중을 지냈다. 확실한 세수는 알 수 없으나 연조로 보아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향이 원종 때 원나라에 가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하고 돌아 와서 태사가 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세계가 실전되어 세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조선 중종 때 사직(司直)을 지낸 독고신(獨孤信)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동에 있었다. 독고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입(立), 성(成) 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독고신의 증손으로 입(立)은 벼슬은 군자감 판관에 이르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남성(南城)을 지키던 중 적의 야습을 만나 아버지 행(行), 동생, 아들 수와 함께 전사했다.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의주의 구암사에 제향되었으며, 성(成)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김경복과 함께 의주의 문묘를 수호했는데 성이 함락되어 부형이 모두 살해되자 적진에 돌입, 수십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의주 구암사에 제향되었다. 사공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그 근본은 진나라때 사공이라는 벼슬을 하던 가신이 벼슬 이름을 성으로 삼아 사공씨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공씨는 효령(孝令) 단본으로 시조는 사공도(史空圖)이다. 그는 본래 중국 산서성 하중우향 사람으로 당나라 희종 때 예부낭중을 지내고, 신라 효공왕 때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 때 판의시사를 지내고 효령군에 봉해진 사공중상(史空仲常)을 1세조로 하고 효령에 관적하였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중상(中傷)의 아들 사공실(史空實)이 고려 말에 대호군을 지냈고, 손자 사공민(史空敏)이 문하시중을 지냈다. 조선조에서는 현종 때 정암(定菴) 사공조(史空祚) 지암(止菴) 사공호(史空祜)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고, 송암(松菴) 사공익(史空瀷)도 영조 때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남은(南隱) 사공호 역시 순조 때 행의로 천거되어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무신으로는 사공지(史空祉)가 숙종 때 용양위 부호군, 사공현(史空鉉)이 순조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서문(西門)은 중군 하남성 북부, 산서성 서남부의 지명으로 정나라의 대부가 그곳에 살면서 지명을 성으로 삼은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서문씨는 안음(安陰) 단본으로 시조는 서문기(西門記)이다. 그는 중국 하남 사람으로 원나라 순제때 중랑장을 지내고 위왕의 딸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하여 안음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음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있다. 선우씨의 본관은 태원(太原) 단본으로 청주한씨·행주기씨와 함께 멀리 기자에 연원을 둔 성씨이다. <태원선우씨세보>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둘째아들 중(仲)에게 우땅을 식읍으로 내리니 그 후손들이 조선의 <선(鮮)>자와 우땅의 <우(于)>자를 합한 선우를 성으로 삼고 기자가 원래 태원부 사람이었기 때문에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기씨조선 41대 애왕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금마군에 마한을 세워 통치하다가 10세 원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그 때 원왕에게 양(諒), 친(親), 평(平) 세 아들 중 양은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받고, 친은 한씨, 평은 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를 지낸 정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선우씨는 조선조에서 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역사상 대표 적인 인물은 관서부자라고 일컬어지며 존경받은 선우협(鮮于浹)을 들 수 있다. 그는 선우식의 아들로써 김태조(金台左)로부터 시, 서 역, 춘추를 배우고 장현광(張 光) 깁집(金集)등을 찾아 도를 물었으며 용악산에 들어가 후진을 가르쳤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관서부자>라 일컬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는 (돈암전서)가 있다. 그는 심성이기의 묘리를 터득한 인조·효종대의 학자로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사양했다. 근대 인물로는 사내 총독 암살사건에 관련, 옥고를 치르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 을 지낸 선우혁(鮮于爀)이 있다. 제갈씨(諸葛氏)의 본관은 남양(중국 황동성) 단본이다. 제갈씨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496성 중에나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6성 중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 성씨로서 공식적으로는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제갈씨조(諸葛氏條)를 보면 먼저 중국의 성씨임을 밝힌 뒤에 <조선 순천지방 유제갈씨 자래구거>라 한 것으로 보아 그때 비로서 생긴 성은 아닌 것 같다.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이고, 그의 20세손인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한다. 그 후 고려 제갈홍(諸葛泓)·제갈형(諸葛瀅)형제가 복성을 서로 한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은 제씨(諸氏)로 아우는 갈씨(葛氏)로 분성하였다. 그래서 제갈씨(諸葛氏)는 없어졌다가 구한말에 성씨환원 운동이 일어나 제갈씨로 복성했는데 미처 복성하지 못한 일부는 제씨와 갈씨로 그냥 남게 되었다고 한다. 제갈씨는 구한말에야 원성으로 환원된 성씨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드러난 인물이 있을 수 없고, 근세 인물로는 구한말의 의병장 제갈윤신(諸葛允信)이 있다. 그는 경북 영덕 출신으로 구한국군에 복무중 1907년(융희1)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연기우(延基羽)의 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1910년 의병대장으로 현청농(玄靑農), 김공선(金公先)과 협의, 삭녕군의 세금수송 일자를 탐지하여 부하들을 지휘, 세무관리와 일본 기마헌병을 사살했으며 그 후 철원·평강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다 목전면 산성곡에서 일본군의 야습으로 전사했다. 황보씨(皇甫氏)의 본관이 문헌에 영천(永川)·황주(黃州)등 9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영천을 제외한 나머지는 영천황보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이고, 현재는 영천 단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조 황보경(皇甫鏡)은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후손 황보능장(皇甫能長)이 금강산 장군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합에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황보안(皇甫安)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황보씨는 고려 및 조선 초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특히 복성씨로서는 유일하게 영의정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명종때의 명유로서 <강좌칠현>의 한사람인 황보항(皇甫抗), 의종때 대사성을 지내고 두차례나 전선을 맡았던 황보탁(皇甫倬), 정종때의 평장사 황보영(皇甫穎), 고종조의 평장사 황보기(皇甫琦)등이 있으나 특히 황보유의(皇甫兪義)·황보림(皇甫琳)이 유명하다. 유의는 목종때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자 당시 삼각산 신혈사에 유폐되어 있던 대량원군 순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고, 훗날 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임은 유의의 5대손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무찔러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 때 이성계의 회군에 가담, 또 1등공신이 되었으며 여러차례 왜구를 격퇴, 서북면 도절제사가 되었다. 조선개국 후에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단종 충신으로 유명한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이다. 황보인은 1414년(태종14)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세종때 여러관직을 거쳐 1440년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된 후 약 10년간에 걸쳐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6진을 개척했다. 그 후 좌·우찬성, 우의정을 거쳐 1452년(문종2)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2년에 승하하자 그는 김종서, 정분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고, 두아들과 손자도 함께 화를 입었다. 영천의 임고서원, 종성의 행영사에 제향되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석(錫)·흠(欽), 손자 한명도 함께 죽음을 당하고 셋째아들 은(銀)은 종 만이(萬伊)가 업고 도주하여 전전하다가 황주의 김만동(金萬同)의 집에 얹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영천황보씨가 황주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으로 타격을 받은 영천황보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명을 냈으나 그도 모두 조선 초기의 인물들이고, 그후 재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석말선(石抹宣)이란 사람이 있어 그 자손이 도원수(都元帥)가 된 일이 있다. 당나라 고조(高組) 때 대방왕(帶方王)부여융(扶餘隆)이 시조 중국 고양(高陽)에서 나옴 중국 하내(河內)에서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