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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피고 지고
"아부지, 어데 갔노?"
한밤중에 눈을 뜬 소녀는 섬뜩한 직감이 들었다. 졸린 눈을 부비며 밖으로 나오니 마루 건너편의 안방 문이 입을 벌린 채 열려 있었다. 소녀는 어둠이 가득한 방에 대고 조그맣게 소리쳤다. 소녀는 허겁지겁 고무신을 찾아 신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탱자나무로 둘러친 담 길을 돌았다. 보름달 아래로 복숭아꽃이 만발하면 깊은 저수지 바닥에서 처녀의 시체가 떠오른다는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소녀의 머리끝이 주뼛 섰다. 순간 황망한 모습으로 변한 소녀는 저수지로 뻗은 오솔길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녀귀신이 아버지를 물속으로 잡아 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헉헉 하는 숨소리가 턱에 닿았다. 한참동안 가파른 둑을 엎어지듯 기어오르자 산 그림자 드리운 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소녀의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아버지가 ! 처녀귀신에게 벌써 붙잡혀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수지 한쪽에 있는 정자에 올라선 소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쳐 부르다가 소스라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다.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먹먹해지며 통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나는 홍건하게 젖은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얼굴을 이불에 묻고 한참 흐느꼈다. 외로움은 가늘게 떠는 어깨에 서리서리 내려앉았다. 얼른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일찌감치 나섰다가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가슴을 죄는 것도 더 이상 못할 짓이다. 좀 더 방 안에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죽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포도 위로 뭇사람의 발길이 어지럽다. 일찍 나왔건만 갑자기 조급한 생각이 들어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아이보리색이 꼭 청회색으로만 느껴지는 법원 청사 안으로 빨려들듯이 들어갔다. 음침하고 우울한 생각, 무엇인가 집요하게 목덜미를 물어뜯는 불길한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쓸데없이 어렵게 만들며 법석을 부리는 것일까. 그들은 내가 남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도 원하는 것이 많았으며, 불행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진상을 거꾸로 해서라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바람대로 불행은 내 몫이 되었으며, 그들이 스스로 가장 야비한 짓을 할 때까지 버텼으며, 마침내 적들을 향한 고독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싸운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긍정하고 �! �해하고 싶은 눈물겨운 몸짓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욕망과 부단한 노력이 오히려 더욱 단단한 사슬이 되어서 나를 억압하고 조롱할 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우리 사회는 억압을 이겨 나가려는 사람을 도와주기는커녕 그 불행 속에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그 억압을 더욱 강화해 주는 폭력의 음험한 동조자가 된다는데 그 사악한 뒤틀림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실제 재판의 시시하고 재미없음이여. 가면과 형식의 우스꽝스러움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개인의 죄와 집단의 무모한 일들이 법이라는 이름하에 필연과 법칙으로 채택되고 포장되어서 진실보다 더 실제적이고 위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옭죄어 있었다. 드디어 예고된 순간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검은 법복을 입은 세 명의 권위의 화신들이 엄숙하게 법정을 들어서는 순간 우렁찬 구령이 고막을 때린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자 곧 중앙에 앉은 부장 판사가 짤막하게 선고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90가합 11044 해임처분 무효 확인소송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끝이었다. 순간 몸속의 피가 확 밖으로 빠져 나갔다. 법은 노상 강자의 눈치만 살피고 해석만 늘어가는 편리한 윤리였다. 확신으로 이곳을 찾지는 않았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득함 속에서 두 손을 법원 건물의 벽에 대고 한참을 서 있었다. 싸늘한 벽의 촉감, 이것은 언젠가 낙태수술하려고 병원을 더듬어 올라갈 때의 느낌이었다. 곁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교활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소송? 이 여자가 미쳤나? 재단이 니 눈에는 허깨비로 보이나? 니 멋대로 해 보거래이, 꿈쩍이나 할 줄 아나?"
"이 미친 가시나야, 돈 들고 와서 합의 보자고 했을 때에 눈 딱 감고 그 돈이나 곱게 챙겼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거 아니가? 명예는 뭔 얼어 죽을 명예라카노?"
교장과 엄마가 지르는 고성이 교대로 귓전을 맴돌았다. 질식할 것만 같은 이곳에 잠시도 더 머물 수 없다는 다급한 심정으로 허위허위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어리둥절함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한 마당 꿈만도 못한 우리네 현실, 자신이 그동안 허위 속에 갇혔다는 느낌만 팽배했다. 이제는 그들이 아닌 내가, 법이 아닌 내가 가위눌린 불면의 내 인생을 단죄하리라.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부에서 꿈틀거리며 들끓었다.
24 살의 여교사. 이것은 시골 소녀가 선택한 소박한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 머리를 지배한 담임선생님의 이상이, 가난과 애증의 나락에서 무지한 충돌과 악다구니로 내 삶을 지배했던 현실을 짓밟고 승리한 매듭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저 어둠에 어둠이 묻히듯 나 자신을 스르르 현실로부터 실종시키는 회피였다.
첫사랑이며 유일한 후원자인 아버지, 퇴직한 후 부쩍 심란해 하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코스모스 핀 길 따라 하늘로 떠났다. 푸른 내 꿈은 여지없이 박살났다. 더 이상 세상을 믿지 않았으며, 내면으로만 침잠했다. 내가 원하는 가장 소박한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막연한 전율에 휩싸였다. 운수납자가 머문다는 깊은 구름으로 쌓인 절로 갔다. 비구니 스님들은 한 쪽에서는 뙤약볕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울력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정자에 앉아서 신선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광대무변의 대자유와 진리 앞에서 비구니는 비구보다 지켜야 할 계율이 많다니, 분별심을 버려야 마땅한데도 세상의 잣대로 밖에 볼 수 없는 나는 가슴 한 쪽이 쏴한 느낌이 들면서 절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다. 한발은 세상에 담그며, 다른 한발은 다른 세상에 담그며 살자고 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살지 않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사랑이 채 뭔지도 모르는 풋풋한 내 인생에 대한 미련은 혹 아니었을까.
유월인데/ 성하의 계절인데// 내 인생의 문턱에 서서/ 한없는 절망감에 몸부림친다.// 아도니스 / 아도니스// 하나의/ 안타까운/ 방언이었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가없는/ 부질없는/ 고통인 것을// 그리하여/ 애타는 고통에서/ 벗어나리라// 유월인데/ 성하의 계절인데
길게 누워있는 강을 바라보며 야트막한 산언덕에 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자로 쭉 뻗은 건물을 돌며 옆으로 삐죽 보이는 샛길을 따라가면 조그만 묘지가 나왔다. 나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잘 그곳에 가서 누워 있곤 했다. 잘 가꾸어진 묘지 옆의 풀숲에는 철따라 진달래, 개나리, 아카시아, 할미꽃, 코스모스가 피었고, 그밖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줄줄이 얼굴을 드러냈다. 교정 아래의 길가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를 지키고, 늘어진 수양버들가지 사이로 강물이 흘렀다. 낮에는 개구쟁이들이 강물에서 멱을 감고,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물가에 모여앉아 힘겨운 줄 모르고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서천으로 붉은 제전을 벌이는 노을이 진다. 땅거미 지는 들녘에 뿍시미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나와 사방으로 자욱하게 깔�! �면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날뿐 사방을 고요했다. 밤에는 낚시꾼들이 밝힌 불빛이 점점이 흩어진 채 어둠을 지켰다.
공립학교의 발령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친구의 후임으로 시골의 학교로 와서 처음으로 고3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유난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애경이라는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애경이가 가출했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하며 울었다. 나는 난처했다. 학생과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뭘 걱정하십니까? 좀 더 기다려 보았다가 돌아오면 자퇴고, 돌아오지 않으면 퇴학입니다."
너무도 명쾌한 학생과장의 말에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적어도 장래가 창창한 학생이고 부모에게는 귀한 자식이련만, 과장은 학생을 무슨 기계부속품처럼 취급하는 기분이었다. 교실로 돌아온 나는 애경이와 가장 친한 친구를 불러서 캐물었으나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하나의 단서만을 근거로 그 학생의 손을 잡고 애경이를 찾으러 낯선 도시로 향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찾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학교는 학생을 버릴 수 있어도 교사는 학생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다. 내가 눈을 흘기자 애경이는 씩 웃었다.
하루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사건은 곳곳에서 터졌다. 어느 날, 반장을 맡은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내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더니 어렵게 말을 털어 놓았다.
"선생님, 저, 우리 반 학생 중에......"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어떻게 해서 그런 직감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 입에서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임신했다는 말이냐?"
태연한 척 말했지만 내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반장은 그런 내 속에 비수를 꽂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영선이라는 아이를 불렀다. 육안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극구 부인했다. 나는 잔뜩 경계하는 마음을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 남학생도 이 일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학생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을게 아니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펄쩍 뛰면서 손을 내저었다.
"절대로 안 됩니더, 그렇게 하지 마이소."
그 남학생에게 혹시라도 불똥이 떨어질까 봐 그것부터 먼저 걱정하였다. 소문이 어느 정도 난 상태인지라 주임선생을 찾아가서 조용히 이 문제를 담임 선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였다. 곧바로 퇴근하여 영선이의 집으로 향했다. 주임선생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다가온 주임선생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선이라는 학생에 대하여 윗분에게 얘기 했더니, 곧바로 자퇴서를 받아 오라고 합디다."
나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사자의 해명 한 마디 들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유야 어떻든, 학교의 소문이 나쁘게 나니 바로 자퇴서를 받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일부러 알려주러 왔다는 것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공평함과 분노, 그리고 양심, 그것은 나의 비극적인 고집이었으며 결점이었다. 학교란 학생을 살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학교가 학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학생을 감싸 도는 나에게 다른 여교사가 이상한 호기심을 터뜨렸다.
"그 학생이 도대체 누구에요? 궁금해 죽겠어요. 수업에 들어가서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선생님은 그런 학생과 한 교실에 있으면 불쾌한 생각이 들지 않나요?"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별안간 우리 사회의 문제로 돌변한 것이다. 왜 나는 거대한 힘에 편승하지 않고 꼭 약한 자의 편에 서려는 것일까? 약하고 소외된 자를 무릎 꿇게 하고 조롱하는 사악한 집단의 뒤틀림이 유령처럼 나를 덮쳐왔다. 벼랑 끝에 몰린 아이를 구해주지 못할망정 자퇴서를 받아서 학교의 소문이나 나쁘게 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과연 교사가 할 일인가, 학생의 장래를 죽이는 것이 과연 학교의 명예를 위하는 것인가. 장래를 박탈당하는 학생과 사학재단의 눈치나 보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교사와 똑같은 신세였다. 교사의 양심을 따르면 죽는다. 내가 주임선생이 윗분이라고 칭하는 사람에게 반항하여 외톨이가 되었다면 아무도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 어려서부터 품었던 교사의 꿈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선생다운 선생이 되자고 �! 淄坪� 되풀이하며 마음을 사려잡고 지내는 나 자신은 그저 객기부리는 철부지 교사나 모가지 달아날 각오를 하고 덤벼드는 불나방에 불과한 것이다.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강과 언덕을 스치는 전원 속의 학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윗사람이 시키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집단이 교사였고, 학생은 오직 학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물품 같았다. 별안간 내 처지가 소설 '변신' 속에 나오는 한 마리 벌레나 다름없었다.
내 삶의 어긋남은 숙명처럼 시골에 있는 학교까지 쫓아왔다. 내 부모의 뒤틀린 삶의 표상과 끊임없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던 이상이 충돌하는 고통의 학창시절, 이상과 현실의 모순을 탈피하여 도시에서 벗어난 교사의 연못은 그렇게 맑지 않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어떤 물이라도 그 속에 들어가면 한 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시궁창이었다. 그러나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부속품은 버려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허탈한 교사생활은 계속되었으며, 처음 교사로 발령 날 때에 품었던 환상은 먼 노을빛 같은 환상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학생에게 받는 스트레스보다도 재단이나 동료교사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선생님은 얼마 주고 들어 왔어요?”
“선생님은 그동안 얼마나 벌었습니까?”
사학재단은 황제로서 교사들 위에 군림했으며, 기부금을 내고 들어 온 교사들은 눈치 빠르고 말 잘 듣는 병사처럼 움직였다. 또한 교사들도 폐쇄적인 지역 사회에서 인간적인 약점이 위험 수위를 벗어나 버렸다.
쾌활한 성격의 가정과를 맡고 있는 김 선생은 그 지역의 유부남과 연애 중인데, 그 남자는 이혼수속을 밟고 있으며, 미모의 모 선생은 대학교 때부터 돈 많은 사장의 애인으로서 학비를 타 썼는데, 그 여선생은 결혼 후에도 사장과 관계를 계속했다. 우아하기로 소문난 모 선생은 대학교 때의 교수와 깊은 관계를 맺은 후, 그의 추천으로 학교에 취직했으며 아직까지 그 관계를 계속 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여학생의 엉덩이를 만지는 것이 버릇이 된 모 선생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실장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으며, 학생부나 체육부 학생들은 진학이나 취업의 위력으로 담당선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소문이 만발했다.
“선생님, 저도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금방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학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또한 교사들도 사학재단 편과 그렇지 않은 편으로 갈리어 끼리끼리 놀고 있었다. 자기편이 아니라면 화장실도 가지 않고 차 한 잔에도 주판알을 굴리며, 남선생은 끊임없이 자기끼리 귓속말을 속삭였고 그 들 중에 사학재단의 밀정 같은 사람이 있어서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 모두 윗사람에게 보고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은 정신병자처럼 말을 잃어갔다. 행동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감시당하고 있으며 윗사람의 취향에 잘 맞는 기계로 변해갔다. 남자친구가 학교로 전화를 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혹 눈에 띄면 그 다음날에 어떤 소문이 돌지 몰랐다. 누가 다방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둘이서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둥, 마치 시나리오를 쓰듯 각자의 기분대로 날뛰는 추측이 난무한다. 학교에 대한,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대한 기업과 같은 학교재단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갔다.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의 사진이 일자무식의 졸부가 이룩한 성공이었고, 장사수단이며,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무소불위인 칼의 상징인 것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가야 한다. 그러나 절 떠난 중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이 없는 군상들이 교무실에 웅성거리고 매일 교장과 교감의 일방적 처사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교무실은 마치 정치판이 여당과 야당으로 나누어지듯 은연중에 두 패로 갈려 있었으며, 이중첩자처럼 그 틈을 넘나들며 현명한 처세술이라는 것을 부리는 교사들도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교권을 찾는다는 말인가, 누구에게 교권을 침해당했다는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처지다.
몇몇 교사들이 평교사협의회를 구성하여 교사의 권리를 정식으로 공론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나는 과연 평교사협의회가 사학재단에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가에 대하여 큰 회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협의회에 가입했다. 마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운동과 맞물린 협의회의 교권보호를 위한 시도는 신문에 보도되었고, 협의회에 가입한 16명의 교사들은 요주의 인물로, 언젠가는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내쫓아내야 할 불온분자로 찍혀버렸다.
각박했던 집안 분위기를 탈출하여, 특히 강퍅하고 오직 자기를 앞세우기에 여념이 없던 엄마의 사슬을 벗어나서 순수하게 살고 싶은 생각으로 출가하듯이 선택한 교직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거리를 휭 쓸며 지나갔다. 바람이 계곡을 돌아서 넓은 강을 건너올 때에는 이미 그 바람은 칼바람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눈 먼 새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 혼기를 코앞에 둔 나는 반쯤 허물어진 채 사학재단의 거대한 힘에 억눌려 있었다. 그 동안 나 스스로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여 밖을 나서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그 속에 파묻히면서 나는 평범한 여자가 아닌 교사가 된다. 아늑하고 활기차 보였던 학교 건물이 점점 거대한 공장건물, 또는 입을 딱 벌리고 전율을 던! 지는 괴물덩어리처럼 다가오고, 번뜩번뜩 정체모를 눈빛의 동료들과 싸늘한 복도를 울리는 교장이나 교감선생의 발걸음에 질리는 나날에 나도 모르게 야위어 가고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나는 이쪽 아가리를 도망쳐 저쪽 아가리 앞에 선 연약한 동물이다. 복사꽃 날리던 달밤에 살금살금 탱자나무 골목을 돌아 멀리 사라지던 엄마의 불길한 발길과 술에 골아 떨어져 헛소리를 지르며 잠자던 아버지, 그리고 바글바글한 언니와 동생 틈에서 원인모를 허기에 시달리다가 겨우 탈출한 집안이었다. 탈출은 단순한 장소 개념이 아니다. 그들의 억지 논리에서, 그들의 이상한 윤리의식에서 또한 애정의 굶주림에서 뛰쳐나온 이데올로기였으며 타협이었다. 천리만리를 뛰어 도착한 유토피아에 한숨을 내려놓고 좀 쉬려는 찰나에 발밑을 기어가는 뱀을 보았다. 징그러운 벌레들이 우글우글한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해맑은 웃음으로 아침의 해를 보았던가, 그래서 징그러운 벌레들을 나뭇잎으로 알고, 꽃으로 알고, 훨훨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로 알고, 또 그 수렁의 물을 떠서 마시며 감로수로 알고 좋아했던가, 주변을 둘러보아 내가 어디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눈치 챈! 순간에 악 소리를 지르며 나는 하얗게 질렸다. 햇빛에 반사되던 숲이 점점 위로 솟아오르더니 큰 그림자 아래로 몸을 드러낸 괴물이 입을 딱 벌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세상에 낙원은 없다. 오직 어떤 괴물에게 먹히느냐, 또는 언제 먹히느냐의 문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존엄? 웃기는 말이다. 다윈의 약육강식이론은 동물에 빗대어 인간사회를 해부한 학문이다. 오로지 먹잇감으로 이어진 인간이 줄지어 있다. 작은 힘은 큰 힘을 견디지 못한다. 강력한 자석에 쇳가루는 딸려갈 수밖에 없는 냉철한 물리법칙에 의하여 작은 힘을 가진 인간은 큰 힘을 가진 인간 앞에서 그저 복종하고 머리 조아리며 오장도 꺼내주고 육부도 떼어주며 시름시름 거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동료교사의 권유로 간 민주화 강연장에서 전교조 교사인 그 남자를 만났다. 양심적인 교사의 장식품으로 전교조를 내세우며 엽색 행각에 나선 편집증 환자인 줄은 차마 믿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형사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제발 몸을 숨겨 달라고, 전교조 창립의 틈새를 이용하여 치졸한 연극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차 한 잔 하자고 권하면서 꼭 할 말이 있다고 하기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우울한 얼굴로 동료 교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지금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굳이 자취하는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집 근처에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막다른 골목길로 뛰었다. 내가 드나드는 쪽문이 보였다. 또박또박 들리는 발걸음소리가 사방을 울리! 는 듯 하며 현기증이 돌았다. 언젠가 내가 연탄가스에 중독 된 채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갔었다. 의식을 찾고 보니 나는 관속에 누워있듯 산소통 속에 들어있었다. 외형적인 죽음은 다 갖추어진 것 같았지만 오직 산소만 달랐다. 인간의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온 몸의 세포에게 연료를 공급해준다는 산소가 무형과 무채색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독사에게 물린 쥐의 현기증이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첫 입에 쥐를 물고 놔주지 않으면 바드득 용을 쓰는 쥐의 몸부림에 뱀의 이빨은 다 부러져 나간다. 이것을 잘 아는 영악한 뱀은 쥐를 침으로 쏘듯 순간적인 입놀림으로 독을 뿜는 이빨 두개로 살짝 상처만 준다. 훅하고 뱀의 아가리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쥐는 앞으로 내달린다. 빨리 도망가는 길이 사는 길이다. 그러나 뱀의 독은 이미 혈관을 타고 내장으로, 사지로, 두뇌로, 그리고 눈의 각막으로 퍼지고 있다. 현기증이 심해진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 마구 뛴다. 별안간 땅과 하늘이 뒤바뀌고 의식이 가물거릴 때에 혀를 날름거리는 큰 입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엄마는 내 인생을 철저하게 괴롭힌 창피함을 모르는 자존심의 백치였다. 독살 맞고,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였으며, 동네사람들에게는 인심 좋은 아낙네지만 집안에서는 누구의 도전도 허용치 않는 절대군주였다. 또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여 외간남자와의 간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끼니때마다 형제들은 개미떼처럼 방과 부엌을 들락거리며 먹을 것을 찾았지만 엄마는 화투판에 들어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엄마는 일곱 형제들을 미워했는지 모른다. 아들을 낳으려다 실패하여 딸을 낳았다는 자괴감이 가슴에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니 생명의 은인이래이."
둘째 언니는 나에게 곧잘 이런 말을 했었다. 네 번째 아기를 아들이길 빌면서 낳았지만 세상에 나온 것은 딸인 나였다. 엄마는 나의 숨통을 막아버리려고 이불을 얼굴에 덮어 놓았고, 그것을 바로 둘째 언니가 발견하여 내 얼굴에서 이불을 치워버렸다는 것이다. 유년의 첫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아기가 눈을 뜨면 곁에 아무도 없었다.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기억은 생생한데, 가족들은 아침만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구에 연구를 하다가, 새벽 일찍 엄마가 나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뒤뚱뒤뚱 뛰어 나가는 순간, ‘아이 잡아라’ 독수리가 매를 낚아채듯 언니들에게 붙잡혔다. 죽터지면서도 억울하고 서러웠다. 나는 한 마디의 설명을 원했던 것이었다. 갑자기 왜 다들 사라져야만 하는지......
엄마가 딸을 대하는 태도는 살모사가 자기를 닮은 살모사를 낳아놓고 징그럽다고 저주를 퍼붓고 기회만 있으면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았다. 주렁주렁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딸을 차버리듯 매정하게 뿌리치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설을 예사로 퍼부었다.
"우리 집 가시나들은 와 디지지도 않노? 다른 집 가시나들은 디지기도 잘 디지는데 우리 집 가시나들은 와 안 디지노? 길을 가다가 버스 만나서 탁 치어 디져뿌면 간을 꺼내어 아작아작 씹어 먹을끼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내 의식의 잣대에는 엄마가 전혀 맞지 않았다. 동네에서 남들이 수군수군 대는 말처럼 엄마는 거칠게 휘돌아 치는 계모 아닌 계모였다. 아버지는 열 두 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엄마를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었다. 지칠 줄 모르고 대드는 엄마의 괴력에 밀렸으며 되풀이되는 엄마의 바람기에 무감각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자신의 탐욕에 동조하는 자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언니들을 번갈아 가면서 식모처럼 부렸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수를 날렸다. 그리고 나한테는 아들 대신으로 접근했으나 아들이 생기자 곧바로 자신의 식모로 전락시켜 버렸다. 가끔씩 내 입에서 바른 소리라도 나오면 독설과 매질을 서슴지 않았다. 형제들은 서로가 반목하고 둘씩 짝지어 분열되기도 했�! 만� 교묘하게 줄타기하는 엄마의 농간에 서로 싸우기도 했다. 걸핏하면 매를 들고 달려드는 엄마를 피하여 돌담길을 돌아 도망치면서 나는 소리 질렀다.
"왜 낳았노? 누가 낳으라캤노? 심심하면 와 동네북처럼 때리노?"
엄마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쫓아왔으며, 나는 멀리 도망쳤다.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저녁에 탱자나무 넘어 집의 돌담을 빙빙 돌면서 밖에서 시위를 벌리듯 저항했다. 엄마는 계속 이어지는 의문부호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기도를 한다. 오늘도 무사히. 동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이 빨리 집에 가보라고 한다. 이쪽저쪽 휘둘리면서 부모님의 싸움을 말리다가 고개를 쳐들자, 담벼락 위에 옹기종기 붙은 얼굴들. 바로 우리 집을 지나쳐 가는 코흘리개 친구들이었다. 눈을 하나하나씩 마주치자, 머쓱하게 내려가는 머리통. 한밤중에 책을 읽고 있는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몽둥이세례. 말 못하는 사연을 일기장에다 눈물로 말 안하고는 못 배기는데, 그날의 소동을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가 계모냐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묻는 예측불허의 복병인 친구.
유부남하고 놀아나다니, 학교에서는 신이 났다. 히틀러라고 불리는 교장은 학교의 비리를 폭로하고 시건방지게 전교조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여교사를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눈에 가시 같은 여교사를 본보기로 쫓아내면 돈도 없으면서 주둥이만 남은 교사들을 그대로 휘어잡을 뿐만 아니라 재단의 장사에도 한 몫 거드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을 몽땅 모아놓고 나의 사생활을 불륜의 드라마처럼 왜곡하여 떠들어대면서 인민재판을 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여교사의 지위란 어떤 것인가? 특히 사학재단에서 근무하는 여교사는
국민의 사표로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 할 청소년을 교육하는 교육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노동자에 불과한 것인가, 교육자로서의 대우와 지위가 보장된 교육자인가, 아니면 기본적인 노동자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인가, 특히 여교사는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일개 가시나, 또는 저 여자인가?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라면 편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성직자처럼 모든 가르침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몽땅 떠맡아도 좋다. 오히려 후자의 길을 택하여 보수가 없는 가난한 교육자로 남는 것이 편하다. 최소한 양심에 따른 교육을 할 권리만이라도 확보해 주었는가. 여교사 채용 시에 결혼하면 사표를 수리한다는 결혼 각서에 이어 백지 사직서를 받지 않았는가. 남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공공연히 여교사는 학교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사원이라고 더욱 교묘! 하게 이간질하며 모욕하고 선동하지 않았는가.
이중인격자인 그 남자에게 폭행당한 나는 학교에 병가를 신청했다. 교장은 병가신청을 공공연히 거부하면서 중세 마녀 식의 사냥에 나섰다.
"한선생의 말에 의하면 우리학교의 다른 여선생도 불륜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한다, 도대체 선생님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처선 똑바로들 하십시오. 여선생이 불미스런 일을 저질렀으니 여선생님들이 한선생의 집에 가서 사표를 받아 오세요"
교장은 그 남자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고 같이 만나자고 한, 같은 과목의 교사이며, 후배인 동료교사에게 나의 사표를 받아 오라고 시켰다. 그 남자가 그랬듯이 교장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렇게 심심했습니까? 나는 이선생이 진실성이 없어 보여서 혼자 산다는 말을 하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선생이 나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동정심으로 만났을 뿐입니다. 교장선생님은 한선생 때문에 앞으로 신입생이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사표를 내면 받아 줄 것입니다.”
20여 년간에 걸쳐 이룬 교사의 꿈, 그 꿈은 도살장에 끌려가듯 승용차에 태워져 도착한 재단징계위원회에서 단칼에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합심하여 국민의 사표 및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할 교사로서 품위 손상을 하였다는 진실 만들기 게임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교사를 내치는 마당에 나는 더 이상 학교의 꼭두각시나 억압과 경멸의 대상이 아닌 국민의 사표나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는 지도자로 어느새 격상이 되었던 것이다.
기차를 탔다. 차창으로 스치는 야트막한 그리움. 삶은 계란을 입에 넣자 말이 되지 못한 편린들로 목이 메여 온다. 녹색 들판을 지나칠 때 마다 탄성의 손을 흔들듯이 가슴 속의 먼지도 환희로 털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심하면 멈추어 서는 어린 시절의 줄줄이 차, 차창으로 시골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물을 사라고 외쳤지. 감로수와 같은 맑은 산천의 물과 뼈 속까지 시원해지는 우물 물. 본향에서 점점 멀어진 일상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찌든 나. '본래 잃은 것이 없기에 얻어야 할 것도 없다',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고 하는데, 나는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얻으려고 이렇게 허덕이는가. 가슴 한 모퉁이 무너진 인연의 역사에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조그만 간이역에 만장을 앞세운 꽃상여가 지나간다. 어릴 적에 상여가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잔치라도 난 것처럼 우르르 달려 나가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구경을 하였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 중 누군가가 죽으면 가장 먼저 그 죽음의 냄새를 맡는 사람이 있었으니, 산 밑 외딴 집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상가 집에 찾아가서 애간장이 끊어지는 울음을 터뜨리면 상주들의 곡이 시작되었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물까지 빼놓곤 하였다. 장례가 끝나면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들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울어주고 사는 사람, 삶 보다는 죽음이 더 친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믿고 싶은 세상에서 한번쯤은 기막힌 일을 당할 수 있다. 바위에 계란치기 식으로 사람과 법과 세상에 절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감언과 돈과 힘으로 포장! 된 집단 이기주의의 벽 앞에서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을 달래 주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조건 없이 울어 주는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진정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은 누구일까. 인생의 위기나 막다른 골목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싶거나 빌어먹을 세상 대신 자신을 죽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빈 캔버스에 서면 지금도 뜬금없이 스치는 기름 냄새와 별빛,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쨌든 결사적인 환상이 아닌가. 내가 만든 길을 가는데 가장 큰 함정은 무엇이며 누구일까. 바로 자기 자신이리라. 이제 고단한 나를 그만 내려놓고 싶다.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무덤처럼 평온한 잠속으로 빠졌다.
아랫마을의 난장이집에서부터 불붙어 오르기 시작한 복숭아꽃은 소녀의 집을 지나서 저수지를 성큼 건너뛰어 산 중턱까지 만발해 있었다. 분홍꽃잎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달빛이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소녀는 두 팔을 벌리더니 손끝을 까딱까딱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손끝의 파동이 팔꿈치로 이어되더니 곧이어 가냘픈 소녀의 어깨로 전달되었다. 너울너울, 저수지 위에 앉은 분홍빛 학이 늘어뜨린 날개를 움찔움찔 거리더니 긴 목을 쑥 들어올렸다. 별안간 무학산 양쪽으로 내려앉았던 산자락이 파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복숭아꽃이 하늘에 가득 날리며 낙화가 사방에 달빛을 뿌린다. 소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부지, 내가 학이 되어서 아부지를 등에 태울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소녀의 몸은 분홍빛으로 타오르는 학이 되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활짝 펼친 날개에 도화가 휘날렸다. 긴 다리를 번갈아 들썩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별안간 저수지에 담겨 있던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물기둥이 솟구치더니 허공에 떠오른 커다란 이무기가 입을 벌려 아버지를 덥석 물었다. 너울거리던 소녀의 팔이 허공에 딱 얼어붙었다.
첫댓글 흥미진진 집에 가서 마저 바야 겠어요.
꿈에서 시작해서 꿈으로 끝나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